가우스틴을 처음 만난 것은 9월 초 바닷가에서 열리는 오랜 전통의 문학 학회였다. 모두가 글을 쓰고 독신이며 아직 책을 내지 못한, 스물에서 스물다섯 살 사이의 청년들이 모인 바닷가 작은 주점에서의 첫 만남 이후, 기묘한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어진 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과거를 세밀히 재현한 ‘과거 요법 클리닉’을 만들었다. 소설가인 ‘나’는 그를 도와 과거의 물건과 이야기를 모아 클리닉을 꾸미는 임무를 맡았다. 타자기와 초콜릿, 담배와 포스터 같은 물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과거 이야기, 때로는 향기와 빛까지도 수집의 대상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과거라는 동굴에 숨기를, 돌아가기를 원하는 때가 올 거야.” 가우스틴은 그것을 시간 대피소(time shelter)라고 불렀다. 과거에 다시 살 수 있다는 개념, 현재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과거로 대피하겠다는 욕망은 나이나 병의 여부와 무관하게 점점 더 많은 이를 사로잡으며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는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2023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불가리아 작가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한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는 한 인터뷰에서 ‘시계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이 작품이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브렉시트라는 충격 이후, ‘위대한 과거’를 들먹이는 보수적 포퓰리즘이 만연한 세태 속 공중에 떠다니는 불안의 냄새를 맡으며 그는 세계가 이미 과거라는 팬데믹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변화를 감지하는 이토록 날 선 감각에서, 영원한 과거와 노스탤지어를 향한 그릇된 욕망이 불러올 위험에 대한 한 편의 놀랍도록 시의적인 사고실험 같은 소설. 중반부에 이르러 유럽 각국이 함께 회귀할 과거의 특정한 시대를 결정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모습은 한 편의 우스꽝스러운 우화처럼 보이지만, 이어지는 사건들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이 퇴행의 끝이 끝내 어디에 다다를 것인지 불안과 긴장 속에 지켜보게 만든다.
- 소설 MD 박동명
우리는 뇌의 이성을 믿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이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뇌과학계의 칼 세이건이라 불리는 저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이에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당신의 의식이 곧 당신일까?
그는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무의식에 의존하는지 알려준다. 뇌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작용을 남발하는가,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여러 갈래의 비의식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이를 증명하기 위해 책은 온통 흥미로운 사례들을 소개한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감각하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선택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인지, 의식이 모르는 일을 신체는 어떻게 해내는 것인지. 뇌는 의식이 닿지 않는 우주 속에서 나를 구체적으로 조종한다.
데이비드 이글먼의 흡입력 있는 글쓰기는 이번 책에서 역시 독자를 빨아들인다. 신기하고 놀라운 예시들과 정리 잘 된 설명들은 무의식의 뇌과학이라는 어려운 세계로 진입하는 문턱을 낮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행동하고 감각하는 나를 완전히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과학 MD 김경영
이 책의 한 문장
카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페인트>,<셰이커>의 이희영 작가의「단군 설화」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 소설. 비스족의 후계자 베아가 죽음의 숲 케이브를 지나며 성장과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단군 설화」를 알고 있다면 베아가 곰족을, 전사 타이가 호랑이족을 대변하고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더불어 베아와 타이가 통과의례를 위해 들어간 죽음의 숲 카이브는 동굴(cave)을 의미한다. 전혀 다른 두 목적을 가진 두 젊은 세대가 죽음의 숲을 건너 원하는 바를 이룰지 지켜보는 것이 이 소설의 포인트이다.
후계자 베아는 자신이 왜 후계자로 정해졌는지 스스로를 의심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은 비스족을 대표하기에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죽음의 숲에 가고자 했다. "두렵고 겁이 많기에 더 많은 것들을 배우려 노력"(p.226) 하는 베아에게 숲을 건너는 시간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줄 테니 말이다. 한편 팔방미인인 타이는 안락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숲을 건너간 피프족을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숲을 건너는 동안 성장하는 건 어느 쪽일까? 통과의례를 통해 성장하는 서사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한글 독자에게 익숙한 「단군설화」를 모티브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희영 작가의 문장들이 몰입감을 더해준다.
- 청소년 MD 임이지
책 속에서
세상 모든 결정이 다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지 않아. 결과가 나쁘다고 해서 모든 시도가 다 의미 없는 것도 아니야. 나는 이 여행에서 그걸 배웠어. 내가 케이브에 오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사실이야.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어. 이 모든 건 내가 스스로 터득한 거니까. pp.221-222
2025년이라는 숫자가 책등에 놓인 현대문학상의 70회 수상자가 소개된다.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2024)으로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의 산뜻한 미학을 보여준 김지연의 소설과 <수옥>(2024)으로 슬픔 한 방울의 둥그런 모양을 그려낸 박소란의 시가 수상했다. 소설 부문 수상후보작으로 구병모, 권여선, 송지현, 이주혜, 최진영의 반가운 신작 소설이 함께 실렸다.
김지연의 소설 <좋아하는 마음 없이> 속 주인공 안지는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좋아하는 마음 없이' 이른 결혼을 하고 곧 이혼을 했다. 남편의 불륜 상대였던 여자와 10년도 더 지난 뒤 한 카페에서 마주앉게 된 것은 남편이 사고로 죽은 후 아들과 보험금의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통속적이고 구질구질한 상황을 김지연의 소설은 진짜 삶을 대하듯 힐끗 바라본다.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마음 없이도 해괴한 에피소드 몇 개면 삶을 다른 풍경으로 바라볼 수 있다.
2024년의 독자들이 힘든 한 해를 보낸 것처럼 소설 속 인물들도 노화와 돌봄과 애도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갑자기 '그걸' 하지 않는 엄마와 산부인과에 동행하게 된 딸의 이야기인 구병모의 <엄마의 완성>을 읽을 때는 문장의 리듬감과 함께 들썩였고 돌봄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하찮게 대하는 권여선의 <헛 꽃>을 읽을 때는 인물의 가차없음에 얼굴을 찡그렸다. 송지현의 <유령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속, 딸과 연인을 잃고 상실을 나누기 위해 모인 인물들은 기어이 학교 운동장에서 맨발 걷기를 하는 장면의 실없음이 특히 좋았다. 나는 살아보겠다고 뭐라도 하는 사람들을, 지금 이 삶을 좋아하고 마는 사람들을, 혹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도 삶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소설들이 해답의 일부가 될 수 있길 기대해본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한 문장
분명한 건 오늘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둘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에 다시 또 생각난다면 그땐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안지는 남편이 우려준 차를 마시며 따뜻하고 달고 쓰다고 생각했다. 뒷맛은 조금 떫었다. 저녁 식사 후면 늘 마시던 차였고 안지는 그 맛을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