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침묵과 그 남자의 빛"
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여자는 말을 잃었다. 아이를 잃었고, 어머니를 잃었으니 말을 잃는 게 당연하다 상담가의 말에 여자는 말한다. 그렇게 간단할 수는 없다고. 오래 전에도 여자는 말을 잃었던 적이 있다. 그녀를 깨웠던 건 낯선 이국의 말. 여자는 이번에도 이미 저물어 죽은 언어가 된 희랍어를 택한다. 그리고 빛을 잃어가는 남자. 가족을 독일에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친다.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 행간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정적인 의미들이 와글댄다.
<채식주의자>, <내 여자의 열매>, <바람이 분다, 가라>의 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시적인 문장과 압축된 언어가 그 여자의 침묵과 그 남자의 빛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주어와 태를 결정하지 않고는 한 단어도 내뱉을 수 없는 희랍어처럼, 소설은 망설이고 조심스럽다. 예민한 기척과 절제된 언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미 죽은 말을 배우며 이들은 더듬더듬 서로를 스친다. 진실로 아름다운 소설, 오래 읽을수록 그 의미가 은은하게 빛난다.
- 소설 MD 김효선
이 책의 첫 문장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이 책의 한 문장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 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