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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만에 펴낸 2006년작 <가만히 좋아하는>으로 고요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의 세계를 보여준 시인 김사인이 다시 9년이 지나 펴낸 새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달팽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시로 시작한다. 귓속에 산다고 하는 달팽이.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낸 '저 쓸쓸한 길'을 본다.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더듬더듬, 먼 길을' 간다. 가만히 좋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홀로 고요한 시의 길. 모든 소리가 사라져도 시는 계속된다. 그렇게 오래 읽기 좋은 칠십 여 편의 시가 왔다.
많은 사람이 떠나간다. '망초꽃처럼 말갛던 태정.'도 (김태정 中), '너무 무서워서 자꾸만 자꾸만 술을 마시는' 영근도. (박영근 中)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간, '검불게 술에 탄 얼굴 다복솔 머리 헐렁한 바지'의 현정 (바보사막 中)도.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고비사막을 건너 이 세상을 떠났을 어머니에게 건네는 나직한 인사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에 이르면 슬픔을 참기가 어렵다. (고비사막 어머니 中)
미워할 것을 미워하고, 슬퍼할 것을 슬퍼한 뒤엔 슬픔 너머가 다시 환해진다. 수수하게 능청스럽고, 얼음처럼 매서운 시편이 지나면 고요가 찾아온다. 그 어머니 떠나는 길을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공부 中)라고, 고맙고 서러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게 된다. 더듬더듬, 먼 길을 한없이 느리게 떠나는 시의 길은 그렇게 고요히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