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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내려와 ‘당근밭’을 걸으며 채집한 삶의 신비가 있다. 밤 한 알을 손에 쥔 시인은 이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밤으로부터 밤을 구하려면 밤도 감수해야 한다. 피부가 사라지는 고통을. 그래도 조각나지는 않는다.
<밤 가위> 14쪽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열과>,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2020) 수록) 여름과 대면한 시인이 4년이 지나 맞이한 세계는 더 혹독한 여름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 곳곳은 분노와 폭염으로 지글지글 끓고 있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를 쓰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잃었어요'라고 시인은 미니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여름이 상하게 한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확신이 필요해서' (<터트리기> 27쪽) 상할 걸 알면서도 그대로 두고 싶은 그 마음을 앞에 두고 시는 이렇게 간절해진다.
지겹도록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어요 (<코트룸> 20쪽)
자꾸 그렇게 자신을 잊으려 하지 말아요 (<기록기> 85쪽)
이 혹독한 세계를 살아가는 이에게 그래도 한 번 더 당근 밭을 걸어보자고, 흙물이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대화를 청하고 귀를 연 시가 있다. '내가 있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물결의 시작>120쪽)고 우리를 듣는 시가 곁에 있다.
그러니까 계속 걷자. 당근의 비밀을 함께 듣자. 펼쳐진 것과 펼쳐질 것들 사이에서, 물잔을 건네는 마음으로.
(시인의 말,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