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시하는 삶
시하는 삶

‘시하다’는 ‘사랑하다’입니다.
나를 타자에게 내주지 못해 안달하는 말이
시입니다.

- <김혜순의 말> 중

기고 : 시집, 만들고 적는 마음

시집을 만드는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시집을 만드는지 궁금합니다.
문학동네 국내문학 편집자

시는 저에게는 수수께끼 같습니다. 산문과 달리, 전하고자 하는 말을 감출 수 있는 만큼 감춰서 내미는 글이라는 점에서요. 시집을 만든다는 건 이 수수께끼를 가장 먼저 푸는 사람이 된다는 것일까요. 이 막중하고도 즐거운 역할을 맡아본 뒤, 제 다음 차례를 맡아주실 독자 여러분께 드릴 사소한 힌트를 덧붙인다는 마음으로 시집을 만들고 있습니다.

창비 시시한 편집자

쇼츠로 대표되는 짧은 콘텐츠가 유행입니다. 저는 요즘 콘텐츠를 즐기는 호흡법에 시집이 꼭 맞다는 마음으로 시를 편집합니다. 고된 하루를 끝내고 긴 이야기를 들을 힘조차 없는 이에게 한 편, 한 문장이 잘 가닿을 수 있도록 이리저리 궁리를 해봅니다. 재미있는 시와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더 많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크게 떠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지금보다 시를 훨씬 더 많이 읽는 시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때가 다시 오리라 생각합니다. 오고 있을 거예요.

문학동네 국내1팀 편집자 Y

소설이나 산문에도 텍스트의 미학이 존재하지만, 유독 시집을 만들 때는 더더욱 우리말의 첨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언어가 지닌 본래의 힘과 아름다움을 수용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자 노력하며 편집에 임하죠. 시를 짓는 것으로 벼슬을 얻던 전통을 가진 민족답게 한국의 독자들은 시를 좋아한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도 종종 하면서요. 더 좋은 시란 단지 잘 쓴 시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우리 시의 내일을 기대하게도 합니다. 시의 미래는 지금도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문학동네 국내1팀 이재현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을 다시 읽을 때마다 불편해질 기대를 안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독자가 자신을 연민과 동정 없이 돌아보게 하는 정직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 정직함은 매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가능한 한 모두 기술하려는 화자의 노력에서 비롯합니다. 백은선은 정직하게 괴로워하고, 그 괴로움을 정직하게 돌파하고자 합니다. 시집 속, 읽는 이를 깊숙이 찌르는 물음과 안부를 떠올려봅니다. 그 다정한 언어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연습했던 밤들도요. 이 다정함을 독자분들께서도 맞아들이게 되리라 믿습니다.

민음사 김지현 편집자

시집을 만드는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듯 떠올리는 말이 있습니다. "시의 통일성이란 독자의 선의에 담겨 있다." 문학비평가 해럴드 블룸의 말입니다. 시에 대한 오랜 믿음과 달리, 시는 하나의 완전한 의미를 갖거나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세계의 일부 혹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작은 증거를 보일 뿐, 시의 의미는 독자에게 읽히는 순간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선의에 의해 읽히는 순간'이라는 점을 늘 되새깁니다. 시가 선의에 의해 읽히는 만큼, 독자는 시를 통해 선의를 새로이 발견할 것입니다. 그 순간을 상상하면 언제나 신비롭고 조금 벅찹니다.

시간의흐름 편집자

시집을 만들 때는 한 가지만 생각합니다. 시인의 말이 독자에게 가닿기를.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읽는 이의 마음이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길 바랍니다. 시를 통해, 혹은 시처럼 움직이는 말들을 통해 시라는 세계의 무한한 확장을, 새로움을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시집 많이 읽어주시길.

아티초크 편집자 문재영

엘라 윌러 윌콕스에서 엘제 라스커 쉴러에 이르기까지 아티초크는 해외 시인을 적극적으로 소개한다. 시를 잘 읽지 않은 시대에 번역 시집을 내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역자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라스커 쉴러의 시를 옮긴 배수아 작가는 번역가에게 “불가능성에 대한 헛된 공모자라는 운명”만이 주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심경을 털어놓는다. 아티초크는 이런 어려움을 독자들에게 알리고, 책이 탄생하는 과정에 독자를 동참시켜 함께 성장한다는 보람을 공유한다. 독자가 제안하고 박참새 시인이 추천한 『고독의 리듬』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침달 편집자 이기리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읽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기를 바라지만 작품 몇 편 혹은 단 한 줄이라도 읽고 품어주기를 바라는 이상한 마음으로 시집을 만듭니다. 모두에게 시가 필요하진 않지만 당장 시가 필요한 이에게는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도록. 늘 어딘가에 있으므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어둠 속 망망대해 위에서도 다름 아닌 망망대해 그 자체로 여기 있음이 맑아지는. 시인과는 최선의 문장을 고민하고 독자와는 최대의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아침달 편집자 능소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취미, 화법, 가치관 등 저와 그 사이에서 여러 공통점을 찾습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일면식 없더라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까워지고 있단 느낌이 듭니다. 그런 묘한 설렘으로 시인의 문장을 천천히 따라가 봅니다. 시인의 호흡은 얼마간 저의 단어가 되어 제 일상을 새롭게 채우고, 그 덕에 일상에서도 시인의 단어와 문장을 꽤 자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 식의 묘한 끌어당김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자주 조심스럽습니다. 그저 당연하듯, 자연스레 이끌리는 마음으로, 몇 달간의 동행을 이어갑니다.

타이피스트 편집자

시집을 만드는 일은 한 시인의 기도문을 담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시인들은 흔히 시집이 나와야 비로소 시인으로서의 이름을 세상에 내놓은 것 같은 기분이라고들 하지요. 그만큼 시집을 편집할 때는 매번 첫 인생을 경험하듯, 단어와 행간에 비치는 의미와 의도를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한 편, 한 편의 시에서 시인의 긴장과 떨림, 순수한 열망까지도 느끼게 되는 게 시집의 매력이니까요. 시집을 판매하는 일도 비슷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아요. 독자들에게 한 시인의 아름다움을 먼저 발견하고 들려주는 일. 느슨한 세계 안에 가득한 빛의 입자들을 매만지고 선보이는 일. 부디 한 시인의 아름다운 기도문이 당신의 손끝에서 오래 머무르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오서재 편집자

시는 우리가 사람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처음 사랑을 느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크고 작은 시련으로 혼자 서 있기도 버거울 때, 한 편의 좋은 시는 우리를 일으켜 세울 힘을 줍니다.
그 믿음으로, 시를 만날 때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한 편 한 편, 시의 힘으로 시집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 시의 힘입니다.

느린걸음 홍보팀장 이상훈

“내 작은 글씨가 꽃씨였으면 좋겠다. 네 가슴에 심겨지는.”(박노해) 독자분들의 손에 시집을 전하는 제 마음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없습니다. 시 한 편의 힘이 어떻게 피어날지는 누구도 모르기에 그만큼 설레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가 늘 곁에 두고 읽는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에는 박노해 시인이 12년간 매일같이 써온 3,000여 편의 시 가운데 엄선한 301편이 담겨 있습니다. 씨앗처럼 단단한 힘을 응축한 이 푸른 시집이 봄날의 생기와 활력을 더해줄 거예요 :)

아시아 편집자

시인들은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다른 눈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곤 했다. 시를 쓴다는 일은 시대의 아픔에 가장 먼저, 또 마지막까지 감응하는 일이라는 생각도. 그렇게 동시대와 호흡하면서 가지런히 써 내려간 한 구절, 한 문장을 대할 때면 어쩐지 좀 조심스러워지는데 시인들은 시를 대하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를 반기지 않는 것 같다. “막 읽어주세요.” 그런 말을 듣기도 했다. 시인의 요청대로 막 읽어내려가다가 숨이 턱 막혀 잠깐 읽기를 중단해야 하는 순간을 좋아하고 다시 정신을 붙들기 위해 노력한다. 아시아의 K-포엣 시리즈는 한국어와 영어 시집을 함께 출간하고 있다.

현대문학 편집자 J

편집 일을 하면서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시집을 읽었다. 시를 읽으며 내적으로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시를 만났고, 어느새 시집 편집자가 돼 있었다. 내가 시를 접하면서 위로받았던 것처럼 시집을 통해 독자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편집을 한다.

현대문학 마케터 Y

시를 담당하게 되면서 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시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소설과는 다른 시의 매력에 빠졌어요. 저처럼 많은 분들이 시인이 그려놓은 시 세계 너머를 상상하며 시를 사랑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소개합니다.

2021년 이후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에게 물었습니다
첫 시집을 내기까지 어떤 마음으로 내 시집을 준비하고 기다렸는지,앞으로 시로 어떤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은지 궁금합니다.
최지은 시인

종종, 시 쓰기는 아주 낯선 곳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어수선하고 불분명했던 생각이나 감정을 한 편의 시 속에서 충분히 경험하고 빠져나올 때, 무언가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은 변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달라졌다는 틈새를 발견하는 일은 마음의 안정을 주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첫 시집을 엮는 동안 저는 이 틈을 자주 떠올렸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시 속의 화자와 나 사이의 틈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나를 닮았지만 나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 그렇지만 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화자들을 매 편 새롭게 만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나의 시선을 돌아볼 때, 저 자신을 다시 보게 되는 것 같았거든요. 매 편의 낯섦, 헤맴, 닿음. 그저 이 반복이 좋았습니다. 이것이 모여 한 권의 시집이 되었고요.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이야기는 이미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이미 저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조금 느리더라도 또박또박 저의 시를 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독자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시가 몰고 오는 온갖 틈을. 시와 시인 사이, 시와 독자 사이, 시인과 독자 사이, 그리고 우리 각자 자기 안의 온갖 틈을. 어떤 이야기를 들려드리더라도 우리는 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미세한 틈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 안의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결국 이 희미한 틈, 이것일 것 같습니다.

한정원 시인

본격적으로 시를 써보려던 차에, 새로운 시인선의 첫 번째 필자로 소개되었다. 그즈음 사운드에 대한 관심이 컸기에, 시 속에 등장하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소리’를 채집해 보려는 실험으로서 희곡 형식의 시를 쓰게 되었다. 앞으로도 나만의 작은 실험들을 하며, 독자들에게 더 더 낯설게 다가가고 싶다.

홍인혜 시인

모든 습작생은 불확실성을 안고 시를 씁니다. 과연 내 글이 세상에 발표될까, 한 명의 독자라도 갖게 될까, 책의 꼴을 갖출 수 있을까,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그저 쓰는 셈이니까요. 그토록 캄캄한 책상 앞에서 그렇게나 지독하게 써댈 수 있다니 그 마음은 순애가 아니었을까요? 첫 시집은 그 순애의 결실이라 각별합니다. 다만 너무 절절하게 쏟아냈다 보니 남은 이야기들이 밋밋하게 느껴져 저는 요즘 방황하고 있습니다. 더 잘 쓰고 싶다는 야망도 손을 곱게 하고요. 이 시기를 잘 넘기는 것이 요즘의 과제입니다.

숙희 시인

저의 첫 시집, 그중에서도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해요. ‘우리 호텔의 투숙객 여러분께./오늘 밤 오로라가 나타나면 깨워드릴게요.’ 상상 속의 독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딱 그랬어요. 오로라만큼 멋진 것을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하룻밤 당신을 깨어있게 하고 싶다고요. 봄이 오면서 밤이 점점 짧아지네요. 『오로라 콜』에는 긴 밤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면, 앞으로는 긴 낮에 대해 그려보고 싶어졌어요. 생활로 이루어진 낮, 노동으로 채워진 낮, 밤을 기다리는 낮, 그런 모든 낮들을요.

박규현 시인

품에 안고 다닐 수 있을 만한 단단함이 있으면 좋겠다. 외출할 때 가뿐하게 들고 나갈 수 있을 만한 그것이 나의 시집이라면 좋겠다. 이렇게 첫 번째 시집의 탄생을 상상한 적 있습니다. 그 시기를 통과한 지금과 이후의 시들은 어쩌면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여전히 맹렬함을 간직한 불씨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숨을 고르게 쉬면서. 오래도록 예리한 목소리를 내기를 기다리면서. 다음으로 마주하게 될 단단함에 대해 골몰하면서.

신수형 시인

저는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출발과 동시에 제 반대편에서도 누군가가 저를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날 것이었습니다. 처음, 만날 것이었습니다. 과연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문득 회의감에 빠져들 때도 있었지만 결국은 만나야 해서, 저는 계속 그 ‘누군가’를 썼습니다. 써야만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만남은 조금 어색하고 조금 쑥스럽고, 그랬습니다. 그래도 기뻤어요. 서로를 향해 걸어온 긴 시간 때문에.
다시 출발합니다. 걷습니다. 걸어가면서 또 무엇을 보게 될까요. 어떤 기분들을 느끼게 될까요. 이번엔 누가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을까요. 언젠가 또, 우리 모두 만나게 되면 좋겠습니다.

고민형 시인

저희 요가 선생님은 ‘자신의’ 팔을 올리라거나 ‘자신의’ 다리를 쭉 펴라고 말해요. 저는 이해해요. 자신의 시를 쓰지 못할 때도 많거든요. 첫 번째 시집을 준비하며 그런 고민이 많았어요. “얼른 내리세요.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에요.” 한 번은 방귀가 나온 적 있는데 사람들이 웃어주어 참 고마웠어요. 저도 제가 아닌 척 큰 소리로 웃었답니다.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것을 쓰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슬쩍슬쩍 남의 다리를 움직이곤 해요.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헤어지죠. 저도 제가 아닌 다른 이의 시를 쓰고 있답니다.(찡긋)

이제재 시인

문득 눈을 감고 있는데 이미 잠에서 깼다는 걸 알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눈을 감고 바깥을 들을 때가. 그러다 캐리어 끄는 소리라도 들리면 그 속에 들어가 어둠을 견디기도 했습니다. 사실 첫 시집을 준비했던 8년간은 대부분 견디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는데,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다만 가볍게, 눈만 뜨면 된다는 걸 알 때도 있었습니다. 완벽한 아침의 빛이 거기에 있어, 이 장면을 모두에게 나눠주고 싶을 때가. 그래서 저는 쓰고 있습니다. 어둠도 빛도 보여주려고. 여전히 어디론가 운반되면서 말입니다.

이날 시인

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재능은 무엇보다도 용기라고 비로소 느낀다. 겁이 많은 나도 꾸역꾸역 용기를 냈었다. 도망치는 중에도 용기를 냈었다. 나의 첫 시집 또한 지난 용기들의 합체이기에, 이 책 그리고 앞으로의 내 시를 만나게 될 미래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고 싶다.
당신에게 이 세계를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매일 같이 생겨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장수양 시인

첫 시집을 낼 당시 저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액세서리 가게나 요가원 등에서 시간제 일을 주로 해왔어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한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고, 그렇기에 모두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 시간을 들여 저의 첫 시집을 펼쳐준다면 그 사람이 지루하지 않기를,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도 기쁨이 있는 시간이기를 바랐습니다.
첫 시집은 아직 만나지 않은 타인을 생각하며 준비했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린다고 해도, 저에게는 그림 속에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이 함께 머물기에 의미가 있어요. 시를 통해서 저는 당신이 보이지 않아도 당신이 함께 들어 있는 그림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장혜령 시인

사랑이 끝날 때, 그 사랑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것을 질문하며 첫 시를 썼습니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떠올립니다.
숲과 물과 바람이 죽을 때, 그 속에 깃들어 살던 것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박승열 시인

우선 질릴 때까지 시들을 들여다보고 고치고 배치해서, 두근거림보다는 빨리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첫 시집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다거나, 어떤 말을 던지고 싶다는 생각은 크게 없었습니다. 단지, 첫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제 에너지를 한데 묶어서 내보내면, 그 이후에는 어떤 에너지가 제게 찾아올지 궁금했습니다. 저는 늘 시적 에너지의 새로운 흐름을 찾는 것에 관심이 있거든요. 앞으로 시로 그리고 싶은 그림도 비슷합니다. 제게 그때그때 찾아오는 에너지들을 시 속에 쏟아놓고 싶습니다, 그것이 어떤 그림이든 간에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리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무수한 엑스트라들일 것 같습니다.

고명재 시인

아주 맑은 물에 손을 담글 때처럼. 너무 부드러운 모래를 두 손으로 떠보는 것처럼. 펑펑 울다 눈을 좀 식히고 싶어서 오목한 손으로 세숫물을 뜨는 것처럼. 그렇게 공손하게 손을 모으는 형상을 떠올리면서 첫 시집을 준비하곤 했어요.
공손한 마음. 공손한 시집. 공손한 말들. 도대체 공손이 뭘까요. ‘공손할 공(恭)’ 자는 ‘함께 공(共)’ 자를 ‘마음(心)’이 떠받치는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를 살게 하고 먹게 하고 떠받치는 것이 결국 ‘마음’이라는 이야기 같아요. 잘, 떠받드는 시집이 되기를 바랐어요. 손을 잘 모으는 시집이 되기를 바랐어요.
첫 시집을 준비하는 동안 딱 한 가지를 잘 해내고 싶었어요. 그건 바로 이 시집이 고명재라는 한 사람의 빛남을 전시(자랑)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를 있게 해준 우리’를 어떻게든 잘 담아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양육자, 보호자 같은 말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픈가요. 자신의 현재를 포기하면서 미래를 향해 손을 뻗던 그런 사람들. 그런 분들이 제게는 몇이나 있어서 죽고 싶을 때마다 저를 살게 했어요. 저를 살게 해준 어떤 귀한 기억과 사람들. 그들의 선한 눈빛, 함께 먹은 음식들, 청어 구울 때 들리는 비늘 타는 소리. 그 리듬, 탄성, 여름의 하늘과 소낙비. 이 모든 ‘자잘한 숭고’를 잘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손하게 꾸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책을 꾸려서 펼치고 보니 사람은 시집이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공손하게 손을 모으는 형상을 이미 취하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책은 떠받쳐야 읽을 수 있는 마음이더군요.
앞으로 시로 그리고 싶은 그림은 ‘설레는 미지’라고 답하고 싶어요. 시를 쓸 때마다 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특히 다음 행, 다음 연에 뭐가 써질지 예상조차 못 할 때, 그때가 저는 가장 설레요. 알 수 없는 것들이 도래하리라는 막연한 예감 속에 서-있기. 그때 시의 한 행과 한 연은 강아지들의 앞발과 같아요. 강아지들은 계단의 높이나, 진흙의 촉감, 아스팔트의 뜨거움을 예상할 수 없어서 끝없이 망설이고 주춤거리죠. 그러다 어느 순간 펄쩍 뛰거나 새로운 땅 위에 발을 톡 올려요. 저는 미래(未來)나 미지(未知)가 그런 거라고 믿어요. 대단한 무언가나 엄청난 게 아니라 그때 그 자리가 미지라 믿어요. 앞으로 저는 그런 ‘모르는 것들’을 시로 써보고 싶다는 상상을 해요. 강아지 앞발처럼 도톰하고도 탄력적인 것들을 써보고 싶어요.

한여진 시인

백지상태의 문서 앞에서 쓰고 싶다는 마음은 쓰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이 되어갑니다.
그 마음이 다음 겨울을 맞이했고요. 자꾸 새롭게 도달하는 겨울 안에는 굽고 볶고 데치고 무치고 튀길 것들이 천지에 가득합니다.

고선경 시인

첫 시집은 처음 혼자서 가는 여행 같았고 처음 치르는 시험 같았습니다. 왜 저는 여행을 가도 시험 보는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걸까요? 내가 얼마나 현지인처럼 좋은 곳을 잘 찾아내고 맛있는 걸 잘 골라 먹는지 보여줄 필요는 없을 텐데요. 불안했고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꼭 그만큼 뜨거웠습니다. 떨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쓸 때는 그렇더라고요. 첫 시집을 준비하는 내내 저는 긴 열대야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온몸에 땀방울이 달라붙어 있는 듯합니다만 이제 저의 열대야에는 눈이 내리네요. 사방이 낯선데 가장 지겹고 떨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저예요.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게 좋은 곳을 잘 찾아가는지는 아닙니다. 찾은 곳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가깝지요. 그러니까 백지 같은 눈밭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면 저와 독자 여러분의 발자국이 하트 모양으로 찍혔으면 좋겠습니다. 별 모양이나 달 모양, 아니, 평범한 발자국 모양이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것을 함께 보고 싶습니다.

임유영 시인

첫 시집 『오믈렛』의 시 대부분은 데뷔 이후 쓴 것입니다. 편집 과정에서 욕심을 부려 출간 직전에 쓴 시도 넣었기 때문에 만 3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렸지만 오로지 함께 해주신 편집자님들의 격려와 경험에 기대어 덜 괴롭고 덜 외롭게 책을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책이 나오고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아 감사한 마음입니다. 다음 책에서는 저 자신보다 읽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더 많이 담을 수 있길 바랍니다.

변윤제 시인

시집에 담긴 시 중 상당수는 지금보다 젊은 날의 제가 쓴 시입니다. 그때의 저는 ‘오지 않는 버스를 미리 타러’ 나간 사람처럼 매일 어딘가에서 서성였습니다. 시절이 어려웠고, 사람이 어려웠고, 무엇보다 제가 저 자신한테 어려웠어요. 어쩌면 시는 제가 저를 구원하기 위해 적는 기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압니다. 나라는 것은 무수히 많은 너와 내가 소속된 공동체라는 사실을요. 어쩌면 제가 저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는 힘을 얻은 건지도 모릅니다. 앞으로는 그런 시를 보여주고 싶어요. 조그만 노력이 결국 큰 슬픔을 이겨내는 시. 온 마음과 온 힘으로 살뜰히 나아가는 몸동작을요.

남지은 시인

제가 데뷔한 해에 태어난 어린이 은유는 이제 열두 살이 됐어요. 한 아이가 자라는 동안 저도 첫 시집을 내기까지 성장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생존과 생계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죠. 시와 멀어진 삶을 사는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는데요. 동료 시인들이 저를 시인으로 계속해서 호명해주고,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많은 어린이들이 제 시심을 지켜주었어요. 덕분에 더 단단해진 발과 손을 갖게 됐고 마침내 시의 집을 지었어요. 앞으로의 시 세계는 너른 들판이 되기를 소망해요.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시 안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시 밖의 삶도 건강하게 가꿀 수 있기를 바라서요.

이동욱 시인

시를 쓸 때 내가 호명하는 것은 구체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완성되는 과정에서 그 윤곽은 희미해지고, 의도를 벗어나 부풀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면 시작부터 잘못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을 주문했다. 상품은 며칠째 옥천hub에 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내 몸이 기다리는 옷 또한 어딘가에서 역시 내 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내가 주문한 옷이 배송되고 있다. 아직 멀리 있지만 매일 조금씩 가까워진다. 시를 쓸 때 그 느낌을 항상 떠올린다. 때로는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했다.

김기형 시인

서울과 파주를 자주 오가던 때에 첫 시집을 묶었습니다.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고속도로를 달리며 혼잣말을 많이 했습니다. 어쩌면 그 혼잣말 안에 있던 자유와 두려움, 무언가를 계속 부르던 주문과 같은 말 속에서 첫 시집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산 자의 입술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계속 고개가 꺾이는 죽음 속으로 제 말이 사라지는 것 같아, 빗발치는 문장들이 부디 살아 시가 되길 기도하던 마음이었습니다. 밤마다 작은 스탠드 불빛에 기대어앉아 캄캄한 밤을 쏘아진 총알처럼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았을 때, 제가 시에 바람소리를 담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 시집을 내기까지 산과 들을 다니던 알 수 없는 생각의 미로를, 오로지 감각에 의존하여 건너는 것이 저의 마음이었고 기다림이었습니다.
요즘 저는 몸에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이 오고가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제가 빚을 졌다는 것입니다.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는 그동안 병원에 올 일이 없었을까, 왜 내가 아니고 저들일까’ 미안하여서 서성이게 됩니다. 저에게 시는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총체인데, 만약 알 수 없는 세계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 것입니다.

흔들리는 육체가 걸어갈 때 어디에 말을 걸어야 할까요? 그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깊은 슬픔과 적막, 삭막하고 건조한 시간 안에 부드러운 새 숨이 잠들어 있을 것이며, 그를 뒤쫓는 기도의 손을 통해, 시의 손을 통하여 깨어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김유태 시인

쓸쓸한 해변을 걷는 사람들, 사라진 것과 밀려온 것과 버려진 것과 검은 물이 뒤엉킨 해변으로 가서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이유 같은 걸 발견하려 고투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펼쳐 읽는 시간을 상상했습니다. 출간 뒤 시집으로 보니, 저도 모르게, 유독 바다와 물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자주 골방으로 가서, 그곳에서 순환하고 역류하는 불가항력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 합니다.

박세랑 시인

뜨겁고 치열했던 이십대를 매듭짓는 마음으로 시집을 준비했었습니다. 상처가 많아서 버겁고 힘들었던 나날들이 많았는데요. 시 창작을 통해서 가까스로 고통의 강을 건넌 기분이에요. 첫 시집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보다는 그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그리고 저의 인간적인 미숙함으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마음으로 시집을 완성했었습니다.

시는 어렵고 사는 건 여전히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첫 시집을 읽어주셨던 독자분들께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어요. 현실은 잠시 잊고 더 멀리 날아갈 수 있는 그런 시집을 만들고 싶어요. 혼자가 또다른 혼자들에게 진심만 꾹꾹 눌러쓴 편지가 두번째 시집일 것 같아요.

이원석 시인

첫 시집을 준비하던 때, 저는 「Long walk」라는 스무 장짜리 장시를 탈고하고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공중에서 불의 혀가 고개 든 자들의 각막을 핥는 SF적 근미래의 인류 멸망을 배경으로 거대한 새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축을 이루고, 현실의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에 괴로워하다가 세계 멸망을 바라게 된 연인을 위해 소원을 빌다가 신의 장난처럼 세계 멸망을 불러온 주인공의 이야기가 다른 한 축으로 이어지며 자기 꼬리를 문 뱀처럼 회문(回文)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가 공개되면 모두가 열광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죠. 하지만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코로나 시기에 운영하던 주짓수 체육관의 문을 닫고 칩거하며 또다른 장르의 시들에 몰입하게 되는데 그게 스파이 연작시였습니다. 시의 주인공인 은퇴한 퇴물 스파이 ‘말로’처럼 술을 마시며 밤을 새워 시를 썼습니다. 그 연작시를 마치고서야 이제 시집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때 시집이 나왔습니다.

다음 시집은, 기쁨과 다정은 한편으로 밀어두고, 한쪽 구석에 서서 내내 뺨을 맞는 기분으로 시를 쓰고 싶습니다.

류휘석 시인

잊히고 사라지는 순간들을 기록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사라질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람들 틈에 끼어 꿈틀대다 집에 돌아와 혼자 뒤척였습니다. 비좁은 집에 울타리를 치고 제가 사라지지 않게 온몸으로 끄적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받으려고 했어요. 창문 아래 놓인 화분처럼 마르면 마르는 대로 살다가 물을 주면 자라는 척했어요. 가끔 바깥을 훔쳐 적고 그게 온통 저인 것처럼 굴었어요. 울타리를 허물고 훔친 바깥을 털어내고 싶습니다. 얼기설기 만든 구조물에 숨지 않고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김연덕 시인

제 첫 시집은 민음사 시집 중 처음으로 흰색으로 포인트를 준 시집이었는데요. 흰색 시집이 나오기까지 미술부와 의견 조율이 몇 차례 있었기 때문에, 꼭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혹은 고드름의 결정이 맺히기를 기다리는 조금 두렵고 두근거리는 겨울 마음이었던 것 같네요. 저는 제 시집이 흰색이어야만 한다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거든요. 내용도 내용이지만, 표지가 흰색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어요. 표지가 흰색이어야 안에 숨쉬고 있는 문장들도 모두 당황스럽게 찬 기운 속에 읽힐 테니까요. 첫 시집이 눈과 얼음의 결정 같은 시집이었다면, 앞으로는 세차게 쏟아지는 물의 이미지로 시집을 구성해 보고 싶어요.

박은지 시인

엉망을 굴리며 진창을 건너는 와중에 『여름 상설 공연』의 막이 올랐습니다. 어느 부분은 모자라고, 어느 부분은 넘치는 것이 꼭 저 같아서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래도요, 요괴와 짝꿍, 초록과 먼지, 빈 어둠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며 뒹구는 일이 무척 즐거웠거든요. 성실한 실패가 좋았습니다. 부족하니까, 부끄러우니까 더 사랑하고, 더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요, 희망 없이도 미래를 맞이할 용기를 내보려 합니다. 우리가 계절을 돌보고, 계절이 벌을 돌보고, 벌이 우리를 돌보는 장면을 함께 보고 싶어요. 다음 공연은 아마도 존재가 존재를 돌보는 장면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최재원 시인

급증한 송충이로 가로수들이 줄줄이 꽂아 놓은 검은 솜사탕 같던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 막 두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참이었습니다. 도서관 자전거 거치대가 나무 그늘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더위도 먹고, 배도 고프고, 실내는 시원해서 책을 펴자마자 잠이 들었습니다. 어두워진 후 밖으로 나오니 자전거 모양 털북숭이가 꿈틀대며 서 있었습니다. 털려고 했지만 수만 개의 송충이가 질긴 피륙으로 짜여 있어 무딘 칼로 살을 발라내듯 뼈에서 뜯어내야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끼인 것들이 연달아 터지는 폭죽 소리가 엉덩이로 들렸습니다. 20여 년 후 하필 서울대병원 영안실 앞길을 걷다 부고를 들었습니다. 천 년 묵은 카펫처럼 깔린 은행 열매에서 걸음걸음 목련 향기가 나는 진흙색 즙이 흘러나왔습니다. 만개한 목련의 소년처럼 부들부들한 피부에서 체념하는 듯 발악하는 듯 썩어 가는 은행의 냄새가 난 것도 같습니다. 그때가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달력을 확인할 용기가 없어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박참새 시인

“무릇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들의 최초의 불행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잠바티스타 비코

마윤지 시인

나의 시집. 첫 시집.

그러나 멀고 또 가까워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이었어요.

봄은 환한 낮이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밤 같은 것. 자고 일어나면 이미 변해 버린.

그 밤을 발견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어요. 거울처럼요.

시를 펼친 사람과 일상 속 세계의 자취를요.

동시에, 제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이 보게 될 무엇을 소원해요.

사실 제가 훔쳐보고 싶은 것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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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추첨일 : 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