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본문 속 날짜는 별도 언급이 없는 한 음력이다.
◆ 본문 속 이미지는 대부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제공받았다.
◆ 주요 인물 소개는 각주로 정리하고 따로 인물 색인을 정리하지 않았다.
◆ 참고한 자료는 미주로 정리하여 책의 뒤에 따로 나열했다.
나는 역사학자가 되어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면서 전봉준을 ‘발견’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이 양반과 상놈을 타파하고 지배세력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며 주권을 유린하고 이권을 앗아가는 침략 세력을 몰아내려 봉기한 사실을 말합니다. 이를 밑으로부터의 변혁 운동이라고도 합니다. 전국에 걸쳐 이 땅의 민중이 한마음으로 평등과 자주를 외치면서 일어났다가 끝내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중심에 전봉준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몇 십 년 동안 전봉준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면서 때로는 존경의 마음으로 옷깃을 여몄습니다. 그런 속에서 나는 전봉준을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친구로 여기기도 했고 ‘가장 어려운 시대에 처절한 삶을 산 민족의 지도자’로 우러러보기도 했습니다. 나는 애써 전봉준을 위대한 영웅이나 위인으로 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의 정의롭고 희생적인 삶을 찾아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의 집은 아주 넓고 복잡했지만 그저 가난하고 소외받는 머저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집에는 종들, 백정들, 빈농들 그리고 장리쌀을 얻어먹고도 갚지 못해 논배미를 빼앗긴 사람들, 세금을 내지 못해 딸을 팔아먹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는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정작 그 집의 주인인 전봉준이 쓴 글이나 신상 기록이 턱없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탓에 자료가 거의 없어졌습니다. 특히 그의 부모형제와 관련 있는 내력, 아내와 얽힌 이야기, 자식들의 행적 등은 어렴풋이 전해지는 말 말고는 거의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또 그의 청소년기 성장 배경도 미궁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와 여기저기 단편으로 기록된 것들을 주워 모아 생애를 추적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전되는 이야기는 때로는 애정이 담겨서 부풀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믿을 것도 있고 믿지 못할 것도 있다는 뜻입니다.
전봉준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과 문인들은 어리둥절해하다가도 나름의 해석을 내려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거나 작품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여러 이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전설과 기록을 나름대로 종합하고 분석해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사실을 선택해 이 책의 줄거리를 끌어냈습니다. 나름대로 진솔하게 전봉준의 삶을 추적했으나 자료의 미비 등 여러 가지 객관적인 조건의 한계로 너무나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집니다. 또 인명과 지명이 많이 나와 지루한 느낌을 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적에는 건너뛰어 읽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가 싸움패인 줄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근본으로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전봉준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할 줄 알았습니다. 몇 가지 보기를 들어봅시다. 그는 무엇보다도 양반과 상민, 상전과 노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없애려 노력했습니다. 또 누구나 호칭을 동등하게 접장接長이라 부르게 했습니다. 어린애와 여자에게도 맞절을 했습니다. 그는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열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에게 재물을 울려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적에도 윽박지르지 않고 설득을 펴서 동의를 구해냈으며 부자에게 쌀을 싸게 사서 굶주린 사람들에 싸게 되팔았습니다. 또 부정한 높은 벼슬아치와 수령들에게 칼을 들어 내리치기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꾸짖었으며 백성을 짓누르는 구실아치들에게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습니다.
19세기 말 당시는 외세가 개입해 조선의 자주권을 방해하기도 하고 주권을 유린하기도 했습니다. 외세가 이권을 거머쥐기도 하고 외국의 상인이 마구잡이로 상품을 팔아먹어 우리네 살림살이는 더욱 쪼들렸습니다. 그리하여 전봉준은 침략 세력을 몰아내려 목숨을 걸고 봉기를 했습니다. 신념과 정열로 끝까지 불의와 맞서 싸웠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우리의 역사에 길이 살아 있습니다.
이 책의 후반부, 곧 전봉준이 거사한 뒤의 이야기에서는 참으로 용기 있고 신념에 찬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이미 있던 자료와 새로 발굴한 자료를 모두 모아 선택해 꾸몄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이 염탐꾼 또는 밀정 노릇을 하면서 쓴 목격담과 신문 기사도 활용했습니다.
예전 나라 안의 벼슬아치와 선비들은 전봉준을 ‘역적’으로 몰아서 좋은 주장도 나쁘게, 바른 행동도 옳지 못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바른 행동도 일부러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흉악한 인간’으로만 몰아갔습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전봉준을 친일파로 끌어들여 이용하려고 온갖 회유와 음모를 꾸몄으나 전봉준은 “내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는데 나만이 목숨을 구걸할 수 없다” “당신네들이 우리나라를 도와준다고 하지만 내 믿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얼마든지 살릴 목숨을 대의를 위해 버렸던 것입니다.
올해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날 전봉준이 바라던 평등과 자주의 세상이 열렸을까요? 양반과 종들이 없어졌고 남녀의 차별이 사라지고 독립국가도 열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조국이 분단되어 갈등이 일어나고 강대국의 간섭이 사라지지 않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모순은 근본적으로 청산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탐욕적 자본주의가 만연해 이권을 독점하고 빈부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새로운 불평등사회가 빚어지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동학농민군을 이끈 지도자 전봉준이 보입니다. 그의 삶과 신념을 통해 이 시대를 바라보는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기보다 인간다운 면모에 다가가서 그와 친구가 되어봅시다.
2014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이해
통일로 가는 길가의 마을 헤이리에서 지은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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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전라북도 고창 땅의 덕정면 죽림리에 당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당촌은 고창 읍내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앞으로는 인내가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고 뒤로는 해발 400미터가 조금 넘는 화실봉이 길게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다. 당촌은 전형적으로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한 우리네 여느 농촌마을이다.
당촌에는 천안 전全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었다. 전봉준이 태어날 무렵 이 마을에는 전씨들이 20여 호 살았다 한다. 전씨들이 작은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 마을의 주민들은 입을 모아, 마을의 북쪽 끝머리에 전씨들이 만들어 오래 받들어온 ‘말무덤(言塚)’이 있다고 중언한다. 집성촌에서는 흔히 집안끼리 이 말 저 말로 헐뜯거나 모략질을 하여 말로 인한 싸움판이 벌어져서 의가 상하는 일이 많았다. 이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사발 같은 그릇에 말을 주워 담아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말무덤을 잘 보존하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당촌에 살던 전씨들은 번듯한 양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놈도 아니었다. 이들은 몇 대가 지나도록 낮은 벼슬 한 자리 하지 못하는 수가 많았다. 어찌어찌 해 공명첩空名帖(돈을 주고 산 벼슬 임명장)이나 하나 사서 행세하려 드는 정도였다. 재산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논밭을 갈아 먹을거리를 겨우 마련하는 수준이었다.
당촌의 사람들도 여느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미歲米(쌀로 환산해 나라에 바치는 세금)니 공물貢物(관가에 바치는 특산물)이니 군포軍布(장정이 군대 경비로 내는 포목)니 하는 명목으로 나라에 바치는 것 말고도 온갖 구실에 따라 식량과 재산을 갈취당했다. 그래서 더욱 가난한 처지로 몰락한 탓으로 보릿고개(춘궁기)가 되면 굶어서 부황이 들어 누렇게 뜨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너편 마을은 도산리다. 예전에 이 마을에는 80호쯤 살았는데, 주로 양반이라 거들먹거리는 안동 김씨와 청풍 김씨들이 많이 살았다. 김씨들은 조상 덕분에 많은 재산을 모아 지주가 되었으며 관가와 결탁해 소작인들을 못살게 굴기도 했다. 도산리의 김씨들은 당촌의 전씨들이 자기들보다 지체가 낮다고 하여 늘 깔보았다. 전씨와 김씨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웃 마을에 살면서도 늘 앙숙으로 지냈다. 모처럼 장터에서 만나도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않았다.
아이들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려 정초에 석전놀이를 벌이면서 이를 악물고 상대에게 생채기를 내려 들었다. 이때 나이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으면서도 앞장서 돌을 당차게 날리는 아이가 있었으니, 전씨 성을 가진 ‘녹두’(전봉준)였다.
전봉준은 1855년 곧 을묘년에 당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생지를 둘러싸고 몇 가지 다른 말들이 있으나 많은 연구자들이 당촌을 전봉준이 태어난 곳이라고 믿고 있다. 몇몇 기록과 여러 전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도 있다.
고창 당촌의 전봉준 생가. 전봉준 사후 관군들이 지른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가 2000년에 현재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중간 지주의 집 규모로 복원했다고 해서 논란을 빚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全彰赫은 1827년생이요 어머니 언양 김씨는 1821년생이다. 족보에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 더 많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예전 시대에는 아내가 지아비보다 나이가 많은 경우가 더 정상적인 부부 관계였다. 족보의 기록을 믿는다면, 전봉준은 아버지의 나이 28세, 어머니의 나이 34세에 태어난 것이다. 그 시절의 관례로는 ‘늦둥이’인 셈이다. 전봉준의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전하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아마 외동아들일지도 모른다. 동네 사람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들어보자.
정월대보름날, 날씨가 조금 풀린 것 같았다. 들판과 냇가에 쌓여 있던 눈들이 녹아내리고 있어서 철벅거렸다. 당촌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화실봉의 산마루에는 눈이 덜 녹아 잔설이 군데군데 보였다. 해거름이 되자 동네 아이들이 쥐불놀이를 하려고 몰려나왔다. 열 살이 조금 넘은 아이들이 앞장서서 여기저기 논 언덕에 쥐불을 놓았다. 쥐불놀이는 밤이 늦어서야 끝이 났다.
다음 날 오후에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소나무 아래로 몰려들었다. 30명쯤 되었다. 아이들마다 주머니에 잔돌을 가득 채우고 양손에도 제법 큰 돌을 쥐고 있었다. 건너 마을 도산리의 아이들도 같은 모습으로 냇가의 들판으로 몰려나왔다. 그 숫자가 당촌의 아이들보다 훨씬 많았다.
양편 아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하늘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들판을 가르는 인내의 냇가에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 사이로 잔설과 얼음이 얕게 깔려 있었다. 요란한 함성과 함께 돌격전이 벌어졌다. 아이들은 돌팔매를 연달아 날리면서 상대편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동안 돌팔매질과 돌격전이 이어졌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은 아이가 앞장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도산리의 아이들은 숫자가 많았는데도 힘이 부쳐 먼저 물러났다. 당촌의 아이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양쪽 마을 아이들은 이마와 머리통이 깨져 피를 흘리기도 하고 다리를 절뚝거리기도 하고 다친 팔을 늘어뜨리기도 하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두 마을의 아이들은 정초가 되면 해마다 석전놀이를 벌였다. 연중행사였던 셈이다. 서로 심하게 다치는 사고가 벌어지지만 치료비를 물어내라거나 관가에 고발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모두들 그저 정초의 액땜쯤으로 여겼다.
아무튼 녹두는 열두어 살이 되어서도 또래 아이에 비해 유난히 키가 작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작다는 뜻으로 녹두라는 별명이 붙었다. 녹두는 키는 작았으나 몸이 다부졌다.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두고, 귀공자처럼 피부가 하얗고 눈이 반짝거리고 체구가 단단했으며 주먹이 큼직했고 또 담력이 있어 무슨 일이건 앞장섰다고 말했다. 그런 탓으로 동네 아이들과 어울릴 적에 골목대장이 되었다.
녹두는 골목대장 노릇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촌 마을 어귀 언덕에 서당이 있었다. 당촌의 사람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서당을 차려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켰다. 서당 훈장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맡았다. 그는 글줄이나 하는 선비여서 마을의 일을 보기도 하고 고부(현재 전라북도 정읍 지역) 향교의 장의掌議(공립 교육기관의 실무 책임자) 노릇을 맡아보기도 했다고 한다.
어찌된 연유인지 전창혁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글줄이나 하다 보니 농사를 짓기보다 마을의 이런저런 일을 보느라 재산을 모으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훈장질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 당시 훈장은 1년 단위로 글을 가르친 대가를 받았다. 가을 추수를 마친 뒤 쌀이나 잡곡 등으로 일정한 분량을 보수로 받았다. 가난한 마을에서는 보수가 넉넉할 리 만무했으며 농번기에는 학동들을 서당에 보내기보다 농사일을 시켰다.
녹두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웠다. 많은 사람들이 전봉준을 유식한 사람이라고 칭송한 것을 보면 그의 지적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만일 글을 배우지 않고 농사만을 지었다면 그의 장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홍길동이나 임꺽정이나 장길산 같은 단순한 의적이 되었을까?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했으니 태평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재산을 많이 모은 농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녹두는 글을 배우는 틈을 타서 아이들을 이끌고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놀이를 벌였다. 봄이면 화실봉에 올라 진달래를 꺾기도 하고 나무를 해오기도 하고, 옆 마을인 매산리에 널려 있는 고인돌 사이에서 돌팔매질도 하고 놀았다.
녹두는 남달리 호기심이 많았다. 녹두가 열세 살 무렵 지었다는 한시를 한번 보자. 인내와 그 옆에 펼쳐진 작은 모래밭에는 가을철에 백구白鷗들이 자주 날아들었다. 녹두는 서당에서 백구를 바라보다 문득 시상을 떠올렸다.* 이 나이쯤 되는 학동들은 중국의 당시唐詩를 외우기도 하고 습작으로 시를 짓기도 하는 것이 하나의 과정이었다. 백구 시의 첫 구절은 이러하다.
* 서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스스로 모래밭에 뜻을 얻어 노니니
흰 날개 가는 다리 홀로 맑은 가을 즐기누나.
백구의 고고한 기상을 떠올리고 있다. 인간 세상의 번잡함을 애써 털어버리려는 뜻이 담겨 있다. 끝 구절을 보기로 하자.
번거롭게 마시고 쪼나 분수를 알고 있노니
물속의 고기떼들아, 너무 걱정 말아다오.
백구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적당히 배만 채우니 물고기들이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분수를 지킨다는 말이다. 전봉준이 이 시를 열세 살에 지은 것이 사실이라면 아주 뛰어난 시재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은 이와 달랐다. 제 배를 채우고도 끝없는 욕심을 부려 남의 재산을 갈취하고 국가의 재물을 부정으로 축낸다. 더욱이 기아에 허덕이는 소작 농민을 갈취하는 지주도 많이 있지 않은가?
전봉준의 일화가 아련히 전해지는 이 마을에 오늘날에는 전씨가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전봉준이 역적으로 몰려 죽고 난 뒤 관군들이 마을을 뒤져 전씨들을 찾아내 죽이고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전씨들은 도망쳐서 성을 바꾸고 살면서도 족보를 감추어 보존했다고 한다. 현재의 당촌은 그 뒤에 새로 형성된 동네나 다름없다. 다만 전봉준의 생가를 새로 복원해 전봉준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전봉준은 10대 초반의 나이에 살길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따라 당촌을 떠나서 이 마을 저 마을을 옮겨 다니면서 유랑생활을 거듭했다. 아마도 당촌에서 살림을 꾸리기가 힘겨웠던 탓일 것이다. 전봉준은 10대 후반의 나이에 한때 가족과 함께 금구 원평 언저리에 있는 항새마을(鸛峰) 등지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이곳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김덕명*이 살았던 용계동과도 가깝다. 촌수는 알 수 없으나 전봉준의 어머니 언양 김씨와 김덕명은 일가가 된다. 전봉준의 가족이 한때 김덕명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는 말도 전해진다. 예전에는 본관만 같아도 혈연의식이 끈끈했으니 전봉준 집안이 김덕명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 김덕명金德明 농민군 5대 지도자로 꼽힌다. 고향인 금구(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의 대접주로 활동하면서 원평 집회를 여는 데 힘을 쏟았고 백산대회에 총참모로 추대되었으며 원평에 집강소를 차려 지휘했다. 서울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사형이 언도되어 전봉준과 함께 처형되었다. 처형된 다섯 지도자 중에 유일하게 시신을 찾아와 묘소를 조성했다.
또 전봉준은 10대 후반 무렵에는 태인의 동곡리에 있는 지금실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곡리는 현재 정읍군 산외면에 속하나 예전에는 태인현에 속했다. 산외면은 주변에 여러 산들이 뻗어 있어서 구릉과 같은 산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산골이다. 좁은 들녘에 논밭이 군데군데 자락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지금실은 농업 소득이 보잘것없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동쪽에는 험악한 회문산에 가로막혀 있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했다. 주민들은 주로 상두산 줄기의 지금실재를 넘어 원평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원평장터와 지금실은 20리쯤 떨어져 있으니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지금실에는 이 주변의 토호 세력인 도강 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김기범(뒤에 개남으로 고침)이 태어나 살던 곳이다. 김기범은 중간 정도의 자영농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전봉준의 처지보다는 훨씬 여유 있는 집안 출신으로 볼 수 있다. 김기범의 어릴 적 별명은 ‘개똥이’였다 한다. 그도 전봉준처럼 키가 작았으나 당친 기상을 지녔다고 한다. 두 사람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니 청년이 된 녹두와 개똥이가 어울려 마을을 휘저으며 놀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전봉준은 이렇게 성장하면서 언제쯤 혼인을 했을까? 족보에 따르면 첫 아내는 여산 송씨로 송두옥의 딸이며 185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녀는 전봉준보다 네 살이 더 많았다. 예전에는 대개 10대 후반의 나이에 장가를 드는 것이 관례였다. 전봉준 둘째 딸의 나이가 1879년생이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밝힌 자신의 출생년도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자면, 전봉준이 혼인한 시기는 적어도 10대 후반의 나이 때인 1874~5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송씨는 23세 무렵 혼인했다는 말이니 그 시절의 관례로는 너무 늦은 것 같다. 또 족보에 따르면 송씨는 1877년에 죽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못 가 죽은 것이다. 전봉준은 고부에 살 때 자주 자녀들의 손을 잡고 아내의 무덤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묵도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전봉준의 아내 사랑이 극진했다고 수군거렸다. 송씨의 무덤은 황토재 남쪽 언덕바지에 있었다고 한다.1
전봉준이 아내의 무덤을 자주 찾은 것으로 보아 아내를 추모하는 정이 남달랐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예전 시대에는 흔히 지아비는 아내의 제사를 지낼 적에도 자식들에게 맡기고 멀건히 바라보는 것이 남성의 체면을 세우는 것이라 여겼다. 그가 자녀들을 데리고 가끔 아내의 무덤에 성묘했다 하니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일깨워주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또 족보에 따르면 전봉준의 둘째 아내는 남평 이씨다. 그녀가 전봉준과 언제 혼인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봉준은 송씨와 이씨 사이에서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근대사를 연구했던 일본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는 “이곳(지금실)에서 후처인 이소사가 오랫동안 외로운 안채를 지키며 전처의 소생과 자기의 소생인 두 아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전쟁터에서 갑자기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이소사의 기쁨과 두 아이의 환호는 비유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고 기록했다.2 자녀들을 데리고 살림을 꾸린 이씨는 이소사李召史(이두로는 ‘조이’라 발음)였다 한다. 위의 인용문은 전봉준이 전주에서 물러나 집강소執綱所 활동을 벌일 때 아내 남평 이씨에게로 돌아갔던 정경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전봉준의 가족은 고부 봉기 이후 지금실로 다시 옮겨가 살았다. 그런데 ‘소사’는 과부의 별칭이다. 호구 문서에는 이를 성 밑에 붙여 과부임을 표시했다. 그러니까 남평 이씨는 과부의 몸으로 전봉준과 재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이 죽고 난 뒤 남평 이씨의 행방은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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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았다. 적어도 1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 여기저기 돌며 유랑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가 살았던 곳은 산간 마을도 있었고 들판 지대도 있었다. 조금 풍족한 마을에서 살게 되면 먹고 살기에는 다소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야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유랑생활의 고초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자기의 처지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보다 여러 사람들이 왜 고통을 받고 사는지, 어찌해야 그 고통을 풀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더욱이 전봉준은 비록 가난한 삶 속에서도 글을 익히고 뜻있는 동지들과 어울렸으니 이런 생각을 갖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전봉준의 눈매는 지금 전해지는 어렴풋한 사진으로 보아도 형형한 빛을 던지고 있다. 그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 돌아가는 꼴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원대한 꿈을 키웠던 것이다.
전봉준은 그의 이름으로 알린 글에서 정론이요 공론이라고 우기는 ‘공자 왈, 주자 왈’을 인용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유교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았으며 농민전쟁 과정에서 읍양진퇴揖讓進退 같은 엄숙하고 고집스런 유교적 선비의 풍모를 보이지도 않았다. 그 자신은 뒷날 재판정의 심문관에게 ‘공맹孔孟의 학學’을 했다고 말했으나 이를 유학자의 길을 걸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볼 수 없고 그저 여느 사람들이 상식으로 글을 배운 걸 말했을 것이다.
전봉준이 불교를 믿었다는 근거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비록 백양사의 스님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몇몇 스님들과 뜻을 맞추기도 했으나 신도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지식인으로서 소양을 쌓는 정도로 관심을 가졌고 소외된 중들과도 동지 관계로 사귀었을 뿐이다.
또 그 자신이 “동학을 몹시 좋아한다”고 했고 고부의 접주 노릇을 했으나 동학의 포덕布德(동학을 전파하는 일)에 나서지는 않았다 한다. 그는 오히려 동학 조직을 봉기 세력으로 이용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농민전쟁이 시작되기 몇 년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동학에 입도했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할 것이다.
전봉준이 유랑생활을 하던 20대와 30대 중반의 나라 안 사정은 어떠했던가? 이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격랑에 휩싸인 때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전통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가 전개되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한 쪽은 비참한 농촌의 현실이요, 다른 한 쪽은 부정으로 얼룩진 지배세력의 동향이다. 이 둘을 하나로 묶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의 나이 열두 살 때인 1866년, 프랑스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한 사건이 벌어졌다. 천주교도들을 살해한 것을 응징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침입했다.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 일대의 건물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리고 왕실의궤 등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해 가져갔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부른다.
또 전봉준의 나이 열일곱 살 때인 1871년에는 강화도에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벌어졌다. 미국의 시꺼먼 군함이 대포를 장진하고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들은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하는 대포를 쏘면서 강화도 광성진에 상륙했고 이곳을 수비하던 우리 군대가 결사 항전을 벌였다. 미국 해군들은 통상을 요구하다가 실현시키지 못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물러갔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계기로 하여 일대 서양배척운동을 벌였다. 흥선대원군은 두 양요를 하나로 묶어 서양인들이 연달아 조선을 침략하러 넘본다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서양인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주장을 배척해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主和賣國)”라고 선언했다. 이어 철저한 항전을 독려하는 구호를 적은 척화비斥和碑를 전국의 중요한 곳마다 세우게 했다.
이렇게 하여 인민들 사이에는 서양 배척 의식이 더욱 고양되었고 정부는 이를 다시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빌미로 삼았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서양인은 눈이 파랗고 코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윤리와 도덕이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로 알았다. 서양 사람들이 어린애의 간을 꺼내간다는 유언비어도 떠돌았다.
신미양요가 나던 해에는 문경새재에서 직업적 봉기군인 이필제 일파가 잡히는 일도 일어났다. 이필제는 최제우*의 원수를 갚자고 최시형**과 동학교도들을 유인해 영해부 관아를 점령한 일이 있었다. 영해변란사건이라 부른다. 그 뒤에 새재에서 다시 동학교도, 불평객들과 손을 잡고 일대 변란을 꾸미려다가 잡혔다. 정부에서는 그를 오랫동안 추적해왔다. 이필제의 체포는 동학교도들이 더욱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 최제우崔濟愚 경주 용담 출신으로 1860년대 처음 경주를 중심으로 동학을 창도했다. 그 뒤 경상도와 전라도 남원 일대에서 포덕을 하여 많은 교도를 거느렸다. 동학에서 후천개벽을 부르짖고 검가를 통해 혁명사상을 전파했으며 양반·상놈을 가리지 않는 이시천人是天 사상을 고취하자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저서로《동경대전東經大全》과《용담유사龍潭遺詞》가 전해진다.
** 최시형崔時亨 동학의 2세 교주였다. 경주에서부터 최제우를 충실하게 받들었고 최제우가 대구에서 처형당할 때 도망쳐서 강원도 일대에서 동학재건운동을 벌였다. 보은 집회 등 여러 집회에서 늘 은인자중을 당부했으나 끝내 대동원령을 내려 손병희에게 일선 책임을 맡겼다. 전라도 임실에 숨어 있다가 북상해서 보은 북실에서 마지막 패배를 하고 다시 강원도 일대로 들어가 포덕을 하다가 1897년에 잡혀 처형당했다. 묘소는 여주에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조선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은 개항이었다. 개항을 강요당한 시기는 1876년이었으니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뒤이며 전봉준이 스물두 살 때였다. 일본인들은 군함 여러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정부를 위협하면서 개항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정부는 교섭에 응해 부산ㆍ인천ㆍ원산 등 세 항구를 열어 일본 상인들이 거주하면서 무역을 하게 하고 일본영사를 두게 했다. 또 일본이 조선의 연해와 섬들을 측량할 수 있게도 허락했다. 이것을 강화도조약이라 부른다.
이 개항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도 무역을 허락하게 되었고 외교관계도 맺게 되었다. 개항은 내부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본과 서양 세력들의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은 일본인과 서양인들에게 금광개발권ㆍ삼림벌채권ㆍ철도부설권 등의 이권을 내주었으며 금ㆍ은 등 자원과 쌀ㆍ콩 등 식량을 수출하는 대신 커피ㆍ양주ㆍ양복지ㆍ옥양목 그리고 사치품 따위의 물품을 수입하는 소비시장이 되었다.
개항이 이루어진 뒤 온 나라가 들끓었다. 민씨 정권은 외세와 결탁해 이권을 하나씩 거머쥐었으며 서양 배척 의식이 강한 척사파斥邪派들은 개항을 반대하는 운동을 열렬히 벌였다. 인민들은 식량이 더욱 모자라는 현실에 부딪쳤으며 높은 벼슬아치와 부호들은 수입 물품으로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일본과 청나라의 상인들은 영국에서 기계로 짠 옷감을 대량으로 들여와 조선 시장에 내다팔았다. 서양 옷감을 ‘질이 좋은 서양의 포목’이라 하여 옥양목玉洋木이라 불렀다. 옥양목은 금세 우리 시장을 휩쓸었다. 그리하여 외국 상인들은 중계무역으로 톡톡히 이익을 남겼지만 국내 목화 생산과 포목산업은 마비되어 농촌 경제를 파탄으로 내몰았다. 이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무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나라의 자원이 유출되었고 전통의 시장경제는 마비되었던 것이다.
한편 개항으로 말미암아 개방을 주장해왔던 개화파들은 기세를 올렸고 민씨들은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들을 이용했다. 그런 속에서 국가는 동등한 조건의 국교를 수립하지 못하고 계속 불평등조약에 시달렸다. 게다가 척화파와 개화파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대결을 벌여 나라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런 현실에서 서울의 정동 거리에는 미국ㆍ영국ㆍ독일ㆍ러시아의 공사관이 들어섰고 눈이 파란 백인들이 거리를 활보했으며 양장 차림을 한 백인 여성이 쓴 파라솔도 가끔 보였다.
이 무렵인 1882년 구식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를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 부른다. 민씨 정권은 무리하게 개화정책을 밀고 나갔다. 정부에서는 신식 군인을 양성하면서 구식 군인들에게는 봉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구식 군인들은 이에 항의해 집권 세력인 민씨들의 타도에 나섰다. 구식 군인들은 경복궁으로 밀려들어가 고종을 압박했고 민씨의 배후 인물인 민비를 잡아 죽이려 했다. 구식 군인들은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을 받들어서 정권을 맡게 했다.
민씨들과 민비는 도망을 쳤다. 서울에 주둔해 있던 청나라 군인들은 민씨들의 요구에 따라 구식 군인들을 일망타진했고 흥선대원군을 잡아 중국으로 끌고 가서 유폐시키는 불법적 행동을 멋대로 저질렀다. 그리하여 군인 폭동은 일단 수습되었으나 국가 주권은 청나라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1884년에는 개화파들이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는 일대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부른다. 개화파는 민씨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개화정책을 반대하자 일본의 힘을 빌려서 민씨 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그리하여 김옥균ㆍ홍영식 등은 일본군의 지원을 믿고 우정국 건물 낙성식을 빌려 민씨들을 압박하고 경복궁을 습격했다. 그러자 다시 청나라 군대가 이들을 축출했고 일본 군인들은 협조한다는 처음 약속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김옥균ㆍ박영효 등 주동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사건은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 ‘삼일천하’라 불렸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에 놀아나고 있었다.
이 두 사건으로 국가의 주권이 크게 훼손되었다. 외세는 더욱 기승을 부려 이권을 앗아갔으며, 식량과 금과 같은 자원이 야금야금 유출되었다. 민씨 정권은 더욱 부패해 외국 상인들에 이권을 팔아먹었고 뇌물을 챙기고 벼슬을 파는 따위의 불법과 부정 행위를 거듭했다.
대대로 벼슬을 누려온 문벌들은 척사파ㆍ개화파ㆍ수구파 따위로 갈라져 한시도 쉴 틈 없이 권력 쟁탈로 날을 지새우는 속에서 다시 친일파ㆍ친청파ㆍ친미파ㆍ친러파 따위로 갈라져서 아웅다웅 끊임없이 분란을 일으켰다. 엊그제까지는 당파 싸움으로 날을 지새웠는데 오늘에는 청나라파ㆍ일본파ㆍ러시아파 따위로 갈라져 대립했던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의 수탈이 가중되었다. 토지에 매기는 세미는 규정보다 턱없이 많게 거두어들였을 뿐만 아니라 흉년에 세미를 면세해주는 토지에도 조세를 매겨 착복했다. 군사 경비를 위해 호구마다 매기는 군포는 어린애, 노인들 심지어 군적에도 없는 배냇아이에게도 받아냈다. 환곡은 춘궁기에 빌려주고 추수기에 회수하는 구휼제도인데 빌려줄 적에는 나쁜 쌀이나 돌이 섞인 쌀을 나누어주고 회수할 적에는 말을 턱없이 고봉高捧(말질을 할 때 위로 수북하게 담음)으로 대서 받아냈다.
지주들은 소출의 7~8할을 소작료로 받았으며 부호들은 1년에 배의 이자를 받는 장리쌀을 풀었다. 끝내 도조賭租(논밭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빌린 대가로 해마다 벼를 냄)와 장리의 대가로 남은 논을 빼앗긴 소작인들은 먹고살 길이 없어 고향을 떠나 떠돌며 밥을 빌어먹기 일쑤였다. 중간 지주도 온갖 명목의 잡세를 내느라 농사를 지어도 손에 떨어지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중간 지주들도 불평불만에 차 있었다. 도시의 떠돌이 상인들에게도 조금도 빠짐없이 난전세亂廛稅(가게가 없는 떠돌이 장사꾼에게 매기는 세)를 받아갔으며 영세 어민들에게는 하찮은 고기잡이배에도 무거운 어업세를 물렸다.
민중은 “에이, 이놈의 세상 빨리 망해야지”라고 수군거렸으며 소외된 몰락 양반들도 “민가 놈들 때문에 못살겠다”고 불평을 토해내기 일쑤였다. 최하층민인 노비와 백정들은 세상이 뒤집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살폈다. 그런데도 민씨들과 일부 벼슬아치들은 집 안 벽장에 금송아지를 숨겨두고 부엌에는 고량진미가 널려 있었으며 곳간에서는 고기가 썩어 냄새를 풍겼다. 또 사랑채에는 항상 맑은 술과 청정한 과일이 담긴 주안상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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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에 걸쳐 나라 안의 크고 작은 일을 여럿 겪었으며 몸소 비참한 농촌 현실을 목도했다. 그는 “이래서는 안 되지, 도려내야지”라고 새롭게 각오를 다지면서 돌아가는 현실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한때의 흥분과 충동만으로는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 그의 은밀한 행동거지는 이 무렵부터 가동되고 있었다. 그의 인생관과 현실관은 이 시기에 확고하게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무렵 전봉준은 다산 정약용이 저술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읽고 개혁방안을 모색했다. 정약용은 18년 동안 강진 지방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국가를 개조할 방안인 《경세유표》를 저술했고 수령들의 부정부패를 막을 방법을 《목민심서牧民心書》에 담았다. 두 저술은 먼저 강진 지역에 살던 선비들의 손에 들어가서 읽히고 유포되었다. 전봉준은 해남과 강진의 선비들 손에서 전해진 《경세유표》를 탐독하고 감동을 받았다 한다.
1817년, 정약용은 《경세유표》의 서문에서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썼으며 저작의 목적을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려는 뜻”이라고 밝혔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개혁의 방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경세유표》의 요지는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사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정약용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첫째, 고대 중국의 탕왕과 무왕은 백성을 학대하는 폭군인 걸임금과 주임금을 무력을 써서 몰아냈는데 이를 혁명이라고 보아 그 정당성을 부여한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을 썼다. 어느 때고 간에 인민을 짓누르는 폭군은 몰아내야 한다는 논지다. 유교에서 가르치는 ‘불사이군不事二君(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을 부정한 사상이다.
둘째, 토지제도의 전면 개편을 주장하는 <여전론閭田論>을 썼다. 곧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은 이를 공동 노동을 통해 경작하며 그 소득을 공동으로 분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를 실시하면 포악한 지주도 없어지고 농토가 없는 농민도 노동의 대가로 일정한 소득을 얻게 된다고 했다. 이 방법을 실시하면 굶어죽는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형벌의 남용으로 인권이 심각하게 유린되는 일들이 많았다. 태형笞刑(매를 때리는 형벌) 이상의 형벌을 실시할 수 없는데도 부정을 일삼는 수령들은 규정을 어기고 모진 형벌을 가하기 일쑤였다. <흥보전>을 보면 흥보가 하찮은 대가를 받고 그 대신 매품을 판다. 죄인에게 안기는 매도 사고팔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흠흠신서欽欽新書》에 담았다.
몇몇 문벌가의 사람들이 벼슬을 독점하고 이권을 독차지했으며, 세도가들은 벼슬자리를 마음대로 팔아먹는 부정이 자행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