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A 과정을 마친 스물네 살, 파울로 코엘료의 “자신의 신화에 숨겨진 운명의 단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꽂혀 억대 연봉을 마다하고 ‘히치하이킹으로만 하는 세계 일주’에 나섰다.
자동차 1,300대를 비롯해 요트, 쇄빙선, 화물선, 비행기, 코끼리까지 육해공을 넘나드는 히치하이킹으로 남극에서 고비사막까지 17만 킬로미터를 완주하며 교통비 제로의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장장 5년 동안 2만 시간의 기다림과 2만 번의 퇴짜를 버텨낸 불굴의 의지와 세계인의 따뜻한 마음씨 덕분이다.
히치하이킹 덕질은 여행을 하는 동안 소아환자들과 세계 일주의 여정을 나누는 교육 프로젝트, 가는 곳마다 문화 간 다리를 놓는 350여 회의 여행수업, 공정 여행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세계 일주를 마치고는 모나코 왕자가 창설한 비영리단체 ‘평화와 스포츠Peace and Sport’에서 일하며 스포츠를 통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일을 했다. 현재는 재능 기부를 희망하는 여행자와 개발도상국 비영리단체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크 ‘미션이 있는 여행Travel With A Mission(TWAM)’을 창설해 더 나은 세상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LE MONDE EN STOP
by Ludovic Hubler
Copyright © Éditions Géorama,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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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dition was published by Book Planet in 2016 by arrangement with Agence littéraire Astier-Pécher through KCC(Korea Copyright Center Inc.),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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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t?
인간은 자아의 신화
구석구석에
숨겨진 운명의 단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파울로 코엘료
히치하이킹은 게임과 축구, 공부가 전부이던 열일곱 사춘기에 내 삶으로 들어왔다.
얼어 죽을 것 같이 추운 날이었다. 아빠는 내가 자립심도 부족하고 엄마 치마폭에 쌓여 과잉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갑자기 축구 연습에 혼자 가라면서 엄지를 들어 올리는 히치하이킹의 신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아빠는 우리가 사는 와슬론이라는 알자스 주의 작은 마을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이웃 마을까지 혼자 히치하이킹으로 가보라 했다.
“다 너를 위해서야.”
이 말을 손톱만큼도 믿지 않았지만 나는 별수 없이 엄지를 들고 도로변을 서성였다. 당혹스럽고 창피하고 말 그대로 멘붕 상태. 혹시라도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는 나를 누군가 알아볼까 봐 겁이 났고 사춘기 소년의 자존심은 말이 아니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내 앞에 멈춰 서는 차가 한 대도 없었고 결국 이웃 마을까지 걸어서 갔다. 내 인생 최초의 히치하이킹은 처절한 완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히치하이킹 패자부활전에 나섰고 다행히 만족스런 결과를 얻었다. 낯선 사람을 태워주는 재미난 운전자를 만나면서 자신감을 되찾고 시야도 넓힐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자신감이 붙어서 지방 국도에서 고속도로로 무대를 옮겨 파리, 니스, 툴루즈를 히치하이킹으로 갔다. 프랑스 국경을 넘어 영국과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그리스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긍정적인 경험이 쌓일수록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직접 겪어보니 히치하이킹 여행은 얇은 지갑으로도 별의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똥찬 방법이었다. 인내심, 자립심, 열린 마음, 포용력, 친화력을 높인다는 점에서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인생학교다. 또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나면 우연과 즉흥의 세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각자의 차 안에 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할 ‘타인’과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히치하이킹으로만 하는 세계 일주
‘히치하이킹으로만 하는 세계 일주’라는 꿈은 어느 날 불꽃처럼 타올랐다.
스트라스부르 경영대학원에 다니던 1999년 11월 비가 우중충하게 내리는 아침, 나는 대학원 친구인 장뤼크와 함께 도로 위에 섰다. 우리는 가을방학 3주간 히치하이킹을 이용해 동유럽에 가서 풍요로운 역사와 사람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우리는 엄지를 부지런히 들어 올려 오스트리아 린츠 인근의 한 주유소에 이르렀고, 여기서 루마니아에서 온 오십 대의 레오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프랑스에서 자동차를 사서 루마니아에 되파는 사업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린다고 했는데 우리를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두 시간 후 저 멀리 부다페스트의 반짝이는 불빛이 보일 즈음 아저씨가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난 이아시라는 곳까지 더 멀리 가는데 말야. 몰도바 국경 근처이고 여기서 차로 스무 시간 정도 걸려. 너희가 가보고 싶다면 우리 집에서 재워줄게. 집에 너희만 한 아들이 있어.”
얼른 장뤼크의 얼굴을 살폈더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새로운 행선지에 솔깃한 눈치였다. 히치하이킹으로 프랑스에서 헝가리까지 먼 길을 왔으니 이미 우리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여기서 다시 유럽의 반대쪽 끝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엄밀하게 말해 루마니아는 평판이 좋은 나라가 아니다. 드라큘라 성, 위험한 집시, 신호등 앞에서 차 유리를 닦고서 돈 달라는 사람들. 루마니아에 대해 아는 건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이런 두려움을 날리고도 남을 원초적 호기심이 차고 넘쳤다. 더군다나 후회 없는 삶이 내 모토 아닌가. 속에서 ‘예스’를 외치라고 아우성쳤다. 별일 있겠어? 일단 가보는 거야! 이 사소한 결정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우리는 이아시로 최종 행선지를 변경했다. 유럽 동쪽으로 내려갈수록 풍광이 확연히 변화했고, 이국적인 풍습과 사람들의 생김새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냥 아이같이 천진난만하던 우리는 루마니아 국경에서 낯선 현실을 목격하기도 했다. 레오 아저씨는 이골이 난 듯 능청스럽게 출입국 관리 한 명 한 명의 손에 지폐를 쥐어줬다. 밀수품을 못 본 척해달라는 뇌물이었다.
루마니아 국경을 넘자 표준 시간대가 한 시간 빨라졌다. 그런데 주변 풍경은 마치 50년 전으로 온 것 같았다! 루마니아는 내가 아는 유럽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우리의 독일제 자동차 오펠은 쏜살같이 달려서 말이 끄는 수레와 털털거리는 루마니아제 다시아를 추월했다. 다 해진 옷을 입고 거위와 돼지 떼를 몰고 가는 할머니도 스쳐갔다. 농부들은 여전히 몇백 년 된 듯한 농기구로 농사를 지으며 큼지막한 갈퀴로 건초를 긁어모으고 손으로 일일이 밀을 수확하고 있었다.
이아시에서 며칠을 보내며, 가이드를 자처한 레오 아저씨의 아들과 함께 왕궁과 그리스정교 수도원 여러 곳을 돌아봤다. 기념물마다 얽힌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며칠 후엔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슈티에 가서 1989년 12월 혁명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은 광장 벽의 총탄 자국을 어루만졌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건축물이자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위해 지었다는 의회궁전에도 갔다. 현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보니 역사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퍼즐을 맞추듯 역사와 지리에 대해 매일 새로운 조각들을 붙여나갔다.
마지막 날 밤 방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지난 며칠을 돌아보았다. 이 여행을 통해 나는 편견을 뒤집고 ‘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넓어졌다. 내 삶이 참으로 풍성해진 기분이 들었다. 불현듯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세계여행을 히치하이킹으로 해볼까?’
그때부터 나는 이 날 것의 아이디어에 꽂혔다. 티베트, 호주, 브라질 등 세계 곳곳의 도로에 서서 엄지를 치켜드는 내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다.
Why not! 안 될 게 뭐람!
운명의 단서를 따라서
루마니아에서 발화된 히치하이킹 세계여행의 꿈이 과연 내가 갈 길이고 진리일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대학원 졸업을 앞둔 내게 이 여행은 사회로 나가기 위한 통과의례이자 필연으로 다가왔다.
왜냐고? 나는 운명의 힘을 믿는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자아의 신화 구석구석에 숨겨진 운명의 단서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내게 세계여행이 필연이라는 단서는 충분했다. 동네를 여행한 다음에 더 넓은 프랑스, 유럽 그리고 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닌가! 고이 간직한 어릴 적의 꿈을 실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또 나는 도전에 응하는 걸 좋아한다. 도전을 통해 내 강점과 약점, 한계를 파악하고 스스로를 뛰어넘고 싶다. 그리고 순전히 히치하이킹만으로 세계여행을 꼭 해내고 싶다. 내가 알기로, 교통수단을 미리 정하지 않고 교통비를 전혀 쓰지 않는 100퍼센트 히치하이킹 세계여행 기록은 아직 없다.
그렇다고 기네스 세계기록을 세우는 것이 목표는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기꺼이 히치하이커를 차에 태워주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하는 ‘사건 사고’로 점철된 시각에서 벗어나서, 세계 곳곳의 현장에 뛰어들어 폭넓은 시각을 갖고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싶다. 다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
또한 세계에 이는 변화의 물결을 고려할 때에도 이 여행은 내게 필연이다. 경영대학원에서 비즈니스 리더가 되는 법을 배웠지만 세계의 빈곤과 불행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사회에 나가기 전에 나는 국제사회의 이해관계나 이슈에 대해 글로벌한 시야를 키우고 싶다. 경영대학원에서 배운 사례연구나 재무분석 말고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직접 들어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 여행을 통해 나를 찾고,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내 세포에 깊이 뿌리박힌, 세상 속의 리얼한 삶을 발견하고 싶은 충동을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세계여행이라는 꿈을 위해서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신중하고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물었다.
살면서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이 여행이 정말 말이 되는 걸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어떻게 살아갈까? 날 고용할 회사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몇 년씩 여행하다가 내 커리어에 망조가 드는 건 아닐까? 행복을 꼭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나? 무엇보다 지금 스트라스부르에서 행복하지 않은가? 수만 가지 질문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켰다. 잠을 못자고 뒤척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2년이 흘러갔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1월 25일, 이 혼돈이 운명을 맞게 됐다. 전에 인턴십을 지원했던 컨설팅회사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주겠다는 메일이 날아왔다. 연봉도 엄청 높았다. 이제 어쩌지? 회사에 들어가서 유유자적하며 안정된 삶을 영위해야 할까? 한번 회사에 들어가면 거기서 빠져나와 세계를 여행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일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꿈을 좇아 별빛 아래서 잠드는 삶을 살아볼까? 안정된 삶이냐 모험이냐, 현대인들이 흔히 빠지는 딜레마를 나라고 피할 수는 없었다.
‘큰 결정은 하룻밤 묵히라’는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내 생각은 두 문구로 정리되었다. 첫째는 생텍쥐페리가 한 말로 “생활이 꿈을 지배하지 않고, 꿈이 생활을 지배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라.”이고 둘째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로 “꿈은 될수록 크게 갖는 것이 지혜롭다. 꿈을 좇다가 놓치는 일이 없도록.” 이다.
여행 출발일은 심혈을 기울여 새해 1월 1일로 잡았다. 시작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날이 있을까! 그런데 본격적으로 여행 준비를 하다 보니 뭔가 중요한 게 빠진 듯했다. 이 여행은 단순히 나만을 위한 사사로운 프로젝트로 그쳐선 안 된다. 여행 자체도 큰 도전이지만 개인적 열망을 채우는 것 말고 다른 목표가 없다면, 그냥 유희에 불과하지 않을까? 경제적 제약을 극복하는 것이나 길에서의 운명적 만남만으로는 2퍼센트 부족하다. 나눔에 바탕을 두면서 이 여행을 더 의미 있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불면의 밤을 보내며 답을 찾다가 문득 큰 병을 앓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불도 안 켠 채 종이에 갈겨썼다. ‘스트라스부르 오테피에르 병원에 교육 프로젝트를 제안하자.’
세계여행을 하는 히치하이커가 세계 곳곳에서 사진과 경험담을 이메일로 보내고 웹캠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이들이 한순간이라도 아픈 현실을 잊고, 상상속이나마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꿈을 믿을 수 있게 격려하면 어떨까? 아이들이 좋아할까? 아이들에게 정신적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계획서를 작성해서 무작정 오테피에르 병원을 찾았다. 소아 환자들을 돌보는 샹탈 선생님이 맞아줬다. 내 이야기를 들은 샹탈 선생님은 아이들이 내 모험에서 용기를 많이 얻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뤼도빅, 당신이 힘들어하면 우리 아이들도 힘들어할 거예요. 당신이 기뻐하면 아이들도 기뻐할 거예요. 아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좌절을 겪을 만큼 겪었어요. 그러니 아무런 이유 없이 아이들을 저버린다든가, 또 실망시키면 안 돼요. 건강이나 다른 피치 못할 사정으로 포기한다면 아이들도 이해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와 약속한 이상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의 어깨 위에 우리 아이들이 있을 거예요.”
떠나기 열흘 전 일곱 번째로 병원을 방문했다. 병원 복도를 걷는데 마음이 급했다. 샹탈 선생님이 무균실에 있는 위중한 환자들을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그 아이들은 몇 달 동안 햇빛도 못 보고 상쾌한 공기도 못 맡은 채 세상과 격리되어있다. 나는 위생 가운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하고, 손과 코팅된 지도를 살균 처리하고 무균실로 들어갔다.
열 살 소녀 야스민은 화학요법 치료를 받고 있는데, 샹탈 선생님에게 내 프로젝트 이야기를 듣더니 뛸 듯이 좋아했다.
“완전 멋져요. 동물 사진을 보내주실래요? 돌고래나 캥거루가 정말 보고 싶어요.”
모진 시간을 꿋꿋이 참아내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울컥했다. 야스민에게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힘껏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열여섯 살의 엘로디는 몇 달째 병세가 갈수록 악화돼서 회복될 가망이 희박한 상황이었다. 샹탈 선생님은 엘로디가 요새 잘 먹지도 않고 만사에 관심이 없어 걱정이라고 했다. 엘로디도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죽기엔 너무 어린 소녀 앞에 서니 내가 이렇게 건강한 것도, 세계여행을 하겠다는 것도 미안해졌다. 다행히 내 여행 이야기에 엘로디는 동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며 엘로디에게는 생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매듭 팔찌를 내 손목에 직접 채워주고 싶어 했다. 옆에는 엘로디 엄마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서 있고, 엘로디는 힘에 부쳐 낑낑댔다. 병 때문에 시야가 흐려지고 기력이 약해서 팔찌 하나 채우는데도 진이 빠지는 모양이었다. 엘로디는 힘과 투지를 발휘하여 가까스로 작은 매듭을 묶었다.
배낭 속에 이 아이들을 담아가서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새 창을 열어주고 싶다. 이제껏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운명을 헤쳐온 아이들에게 꿈과 모험, 여행 한 조각을 선사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벌써 설렌다.
2003년 1월 1일 저녁 7시 프랑스의 알프스 발디제르
따뜻한 오리털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절대 나오고 싶지 않은 날,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칼바람이 매섭게 불고 기온은 영하 23도까지 떨어진 날에 나는 히치하이킹을 하러 도로로 나왔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어여쁜 스위스풍 집들에는 불이 환하게 들어와있다. 저 안에서는 가족들이 제야의 만찬을 마치고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겠지. 밖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목도리를 칭칭 감고 스키장 입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 나는 히치하이킹 세계여행이라는 꿈에 시동을 걸려한다. 지난 몇 달간 매일 이 출발의 순간을 머릿속으로 그려왔다. 높고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는, 여행을 시작하기에 완벽한 날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날 하루만은 도로를 오가는 차가 많기를 빌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바로 길을 떠나려면 차가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오늘 새해 아침 하늘은 회색빛으로 음울한데다가 하루 종일 눈이 내린다. 과연 지금 떠나는 게 맞을까? 해가 떨어지면서 그나마 눈은 그쳤지만 도로는 텅 비었다. 승용차나 트럭은 고사하고 자전거도 한 대 없다. 하늘도 나를 버린 걸까!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
7시 15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발밑에서는 뽀드득 소리가 난다. 걸어서 간신히 발디제르의 도로 초입에 도착했다. 표지판에 적힌 마을 이름 위로 검정색 대각선이 그어져있다. 마을의 끝이라는 표시다. 마을의 끝, 그리고 인생 1막의 끝에서 내 히치하이킹 세계여행의 막이 오른다. 그런데 교통량이 충분치 않다. 히치하이킹 여행은 자전거 여행이나 자동차 여행과 달리 내가 원할 때 떠날 수 없다. 모든 건 차량 운전자의 선한 마음씨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곁을 지키던 친구들은 추위와 잘 싸우라며 힘을 북돋아주는데,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하다.
8시 15분.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여전히 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밖은 쥐죽은 듯 조용하고 나는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안달이 나 있다. 처음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친구들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추운 알프스 산에서 세계여행을 시작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며 놀려댄다. 그래도 이 친구들은 길 위의 기다림을 알았으니 나중에 여행담을 얘기하면 공감을 해줄 것이다.
부모님과 나머지 가족은 오늘 함께하지 않았다. 엿새 전, 크리스마스 직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가족과 작별인사를 했다. 엄마는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슬픈 티를 안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 옆에서 아빠는 안락한 집을 떠나려는 다 큰 아들의 안전을 염려하며 말했다.
“6개월 이상은 안 된다. 너무 오래 여행하면 돌아오기 힘들어져.”
내가 친척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쯤에야 엄마는 속내를 보였다.
“진심으로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은 게 맞니? 스위스 같은 데로 가면 안 돼?”
엄마는 내심 결혼이나 손주 소식을 기대했을 텐데, 그래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줬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부모님의 정신적인 지지가 정말로 큰 힘이 되었다. 부모님이 믿어주지 않았다면 떠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홈 관중에게 야유를 받는 축구팀처럼 기가 팍 죽어서 무기력하고 불구가 된 심정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9시 23분. 마침내 어둠을 뚫고 멀리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빛이 도로를 밝힌다. 벨기에 번호판을 단 구형 벤츠가 내 앞에 선다. 알이 작은 선글라스를 쓴, 둥글둥글하게 생긴 운전자가 창을 내린다.
“어디로 가요?”
“세계여행을 갑니다! 지금은 다카르 방향으로 가요. 그 방향이세요?”
운전자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모양인데 진지한 내 얼굴을 보더니 안색이 달라진다.
“리용으로 가는 길인데 방향이 같네요. 타요, 빨리! 시간 없어요.”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왔다. 기쁘면서도 동시에 힘든 순간이다.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또 보자’는 말이 ‘몇 년 후’가 될지 그때는 몰랐다. 친구들의 마지막 모습이 사진처럼 내 뇌리에 찍힌다. 친구들이 손을 흔들고 나도 손을 흔든다.
이제 벨기에에서 온 사뮤엘과 단 둘이 남았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눈 덮인 알프스 산을 뚫어지게 본다. 사뮤엘은 내 여행 이야기에 심드렁해 보여서 나도 얘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세계와 사람과 문화를 탐험하겠다는 내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그저 감개무량할 뿐이다. 여행 정보를 찾고 일정을 짜며 밤을 지새우던 날들이 스쳐간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고, 또 다른 난관이 나를 기다렸다. 포기할 이유를 꼽아보며 여행 생각을 밀어내려고 애도 써봤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세계여행 계획을 목하 실행 중이라서 안심이 된다. 앞으로 직감을 믿으며 나아갈 작정이다. 직감은 중대한 결정을 할 때면 항상 나를 인도해준다.
하지만 금세 이 여행을 처음 접한 사람마냥 다시 불안감이 엄습하고 숨이 막힌다. 뜯어 말리던 사람들의 말이 맞으면 어떡하지? 간염이나 열대 풍토병에 걸리면 어떡할까? 강도나 강탈을 당하지 않고 고립되지 않고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도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10만 킬로미터가 훨씬 넘는 세계의 길 위에서 엄지를 드는 것은 유럽 히치하이킹 여행과 전혀 다른 이야기니 걱정이 산더미다.
사뮤엘의 차는 바람 부는 산길을 천천히 돌아 내려온다. 나중에 똑같은 길을 거꾸로 짚어올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라디오에서 속보가 흘러나온다. 올랭피크 리옹 팀이 1부 리그에서 우승했고, 공공부문 근로자들이 며칠간의 파업을 예고했고, 복지 혜택이 늘어났으며, 일부 지역이 영하 15도로 떨어졌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세상은 비슷할까? 아무튼 새로운 경험을 시작하기에 완벽한 때이다.
한밤중이 되어서 칼바람이 부는 지역을 벗어나 쭉 뻗은 아스팔트 도로로 접어드니 헤드라이트 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앞으로 길게 이어질 우정의 띠에 첫 매듭을 이은 사뮤엘이 이번 세계여행의 첫 번째 주유소에서 내려준다.
“건강 조심해요.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아프리카의 관문으로
주유소는 내 히치하이킹 여행의 주요 거점이다. 나는 주유하는 운전자에게 접근해서 여정이 표시된 지도를 보여주며 더 먼 주유소에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이 전술을 쓰면 운전자를 고를 수 있어서 히치하이킹의 태생적 위험성은 줄이고 성공률은 높일 수 있다. 운전자에게 호감을 사는 비결은 간단하다. 바로 CPPPS, 단정하고, 공손하고, 참을성 있게, 포기하지 않고, 항상 웃을 것!(Clean, Polite, Patient, Perseverant, Smiling)
야심한 밤 주유소에는 인적이 드물다. 추위를 피해 가게 안을 기웃거렸다. 가게 매니저 마르셀이 돈을 세며 말을 건넨다.
“젊은 친구, 어디로 가?”
“세계 방방곡곡을 갑니다! 지금은 세네갈의 다카르로 가는 중이에요.”
“세계 방방곡곡이라! 먼 길이구만. 그런데 달랑 가방 두 개가 전부야?”
전에 핀란드와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어깨가 빠질 뻔한 이후로 짐은 무조건 단출하게 하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 이번 여행에는 조그만 가방 두 개를 골랐다. 조금 큰 가방에는 8일 동안 말끔한 외모를 유지할 만큼의 옷가지를 넣었다. 작은 가방에는 중요한 서류와 사진, 비디오 자료를 챙겼다. 작은 가방은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되므로 몸에서 한시도 떼놓지 않을 작정이다.
지금 내게는 집 열쇠도, 다이어리도, 휴대폰도 없다. 한동안 도시인의 삶을 뒤로하고 유목민의 삶을 살아볼 것이다. 이제 걱정 없는 자유 속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마르셀은 돈을 다 셌는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같이 커피를 마시자고 한다.
“아프리카 다음엔 어디로 갈 거야? 바다는 어떻게 건너려고?”
나는 지도를 꺼내서 여행루트를 보여준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아시아를 돌아 다시 유럽으로 복귀하는 여정이고 1년에서 최대 2년이 예상된다. 배를 히치하이킹해서 바다를 건널 생각이라서 무역풍을 따라가는 요트를 얻어 타기 쉽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경로를 잡았다.
“와우! 차를 태워줄 사람이 한 트럭은 있어야겠어? 여행 경비는 어떻게 마련했나? 어마어마하겠는데?”
“2년간 1만 5천 달러 정도를 예상하고 있어요. 그동안 저축한 돈을 탈탈 털었고 타던 차도 팔았죠. 제 웹사이트에 로고를 올려주기로 하고 후원자도 몇 명 찾았어요. 또 여행기를 신문에 싣기로 했고 방송도 나갈 예정이에요. 필요하면 현지에서 일을 구하거나 돈을 빌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돈이 바닥나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여행이 끝나면 어쨌든 돈을 벌 테니까요. 식비와 인터넷 접속료, 관광지 입장료, 비자 수수료 등을 합해 하루 10달러 안에서 쓰려고 해요. 여행자보험이나 캠코더 구입비 같은 일시적 비용은 빼고요.”
“멋진 계획이야. 그래도 조심하라고. 세상은 위험투성이야. 다카르까지 가려면 생테티엔으로 향하는 남쪽 도로를 타야겠네. 건강 잘 챙기게.”
업무로 복귀하는 마르셀과 헤어진다. 발길을 옮기는데 마르셀의 혼잣말이 들린다.
“히치하이킹 세계 유랑을 휴대폰도 없이 떠나겠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청년일세.”
몇 시간이 지나도록 차가 한 대도 들어오지 않는다. 주유소는 적막 그 자체다. 결국 세계여행 첫날 밤부터 주유소에서 날밤을 샜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일찌감치 길을 나서는 트럭을 얻어 탔다. 친구가 기다리는, 첫 여행지 생테티엔으로 출발한다.
세계로 향한 첫걸음을 무사히 뗐다. 툴루즈,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알리칸테… 프랑스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유서 깊은 코스를 따라가다가 지브롤터를 향해 남쪽으로 과감하게 꺾는다. 이번 세계여행에서 가장 이국적인 아프리카의 관문으로 가는 중이다.
세계여행 1년차 1월 16일 아프리카 대륙을 향해 출발 유럽에서 히치하이킹 여행의 워밍업을 가뿐히 끝냈다. 30여 번 엄지를 접었다 폈다 하다보니 금세 지브롤터에 이르렀다. 운 좋게 모로코로 가는 트럭 운전사 후안의 간택을 받았다. 스페인 출신의 후안은 모로코 제1의 도시인 탕헤르행 페리선에 트럭 채 올라탈 예정이다.
마크툽!
“세계여행 한다니까 특별히 태워주는 거야. 여기는 안전한 동네가 못 되서 히치하이커를 태우질 않아. 자네 얘기가 재미있어서 한 번만 봐주는 거야.”
내 이야기를 듣고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니 힘이 솟는다. 내 여행이 옳다는 걸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부웅 뱃고동이 울리자 승객들이 우르르 배에 올라탄다. 후안의 트럭도 승선한다. 배가 항구를 천천히 벗어나자 진동과 소음이 몸으로 느껴진다. 나는 선미에 앉아 유럽의 마지막 이미지, 한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지브롤터 바위산을 희미해져서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본다. 아프리카 대륙은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니 아침부터 이런저런 걱정들로 복잡하던 머리가 맑아진다. 3년 전 루마니아에서처럼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싶은 열망과 불안감에 모든 것이 숨을 죽인다. 이제야 내가 평범한 일상을 뒤로하고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된다. 평범한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없을 때 그 존재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아프리카 여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서양을 건너려면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다카르에서 배를 히치하이킹해야 되는데, 4,000킬로미터를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사하라 사막은 어떻게 지나가지? 오늘 밤은 어디서 자야 하나? 생각에 빠져 엔진 소음도 듣지 못했다. 아랍 전통의상인 젤라바를 입은 남자들이 나란히 앉아 기도한다. 마크툽!•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리라.
마크툽maktoub의 의미는 ‘그렇게 쓰여있다’로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알라가 정한 운명이 있다는 이슬람 사상을 표현합니다.
모로코 해안에 가까워지자 구름 낀 하늘 끝에 공장 굴뚝과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매달려 있다. 탕헤르에 다 왔다. 항구 연안의 더러운 물에서 아이들이 헤엄을 치고 있다. 아이들은 개구리처럼 머리부터 다이빙해서 물밑에서 건져낸 반짝거리는 물건들을 자랑한다. 가난하지만 아주 즐거워 보인다.
승객들이 한꺼번에 내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고함지르고 밀치는 사람들에 밀려서 나는 짐짝처럼 부두까지 와버렸다. 이렇게 아프리카 땅에 처음 두 발을 디딘다. 수십 명이 득달같이 내게 달려든다. 팔을 붙잡고 가방을 잡아당기고 난리가 났다. 다들 최저가로 택시와 호텔을 제공하겠다며 소란스럽다.
“100디르함(약 3만원)에 시내까지. 좋아, 50디르함. 에라, 20디르함에 해줄게. 친구니까, 인심 썼다! 10디르함. 형제, 혼자 걸어 다니면 위험해. 날도 어둡고. 자, 내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게. 나만 믿어.”
나는 호객꾼들을 물리치고 앞만 보고 걷는다. 밀입국 브로커들이 1,200달러에 미국 서부의 엘도라도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둘러싼다. 유럽까지 무임승차하려는 모로코 사람들이 트럭 아래에 붙어있다. 길가에 쭈그려 앉은 사람들이 “모로코 최고의 하시시”라며 목청을 높인다. 썩 안심할 환경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항구를 무사히 벗어난다.
아프리카에 공짜는 없다?
호객꾼들을 벗어나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지고 황홀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 새로운 세계, 아니 새로운 행성에 나는 반해버렸다. 배로 겨우 한 시간을 왔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섰다. 자동차 경적과 소 울음소리가 합창을 하는 도로에는 트럭과 관용차, 고물 버스, 소달구지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이국적인 차茶의 향기, 무질서한 거리, 당나귀가 끄는 채소 수레, 그 뒤를 따라오는 행상이 내 오감을 깨운다. 이 시끌벅적하고 다채로운 환경, 활력 넘치는 움직임에 비로소 세계여행이 시작됐다는 것이 실감된다.
이제 혼자다. 나 혼자밖에 없다. 두 발로 서 있지만 나는 이 미지의 대륙에서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히치하이킹과 ‘아프리카의 길’이 바야흐로 시작되었고 내가 갈 길은 한 가지뿐이다. 진격하라!
항구의 출입구 근처에 막 출발하려는 흰색 소형 트럭이 보인다. 용기를 내서 트럭에 다가갔다. 운전사는 경찰관에게 줄 작은 뇌물봉투를 준비하는 중이다.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트럭 운전사가 내게 묻는다.
“어디까지 가요, 친구?”
“모하메디어까지 갑니다.”
“돈은 얼마나 줄 거요?”
웰컴 투 아프리카! 놀랄 것 없다. 아프리카에서 히치하이킹이 공짜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돈을 주고 히치하이킹해도 될까? 이 문제는 처음부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행하는 내내 고민하게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빈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싶지 않지만 한편으로 교통비를 한 푼도 쓰지 않는 세계여행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둘 중 어떤 것이 최선일까? 오락가락하다 결국 내 히치하이킹 세계여행의 첫 번째 원칙을 정했다. ‘상황에 따라 운전자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 있지만 절대 돈으로 보답하지 않는다.’ 나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 차량에 타기 전에 이 여행의 취지와 원칙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설사 수긍하지 않는 운전자에게도 감사를 표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내가 바라는 건 단순히 세계 일주가 아니다. 나를 태워준 사람들과 더 깊은 교감을 나누고 싶다. 히치하이킹은 상대에게 선의를 베풀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혼자 있고 싶은 사람이나 낯선 이를 태울 자신이 없는 사람들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행의 두 번째 원칙을 이렇게 정했다. ‘차를 태워주지 않더라도 불평하지 않는다.’• 태워준 운전자들에게는 여행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물론 내 얘기를 듣고 싶어 할 경우에. 또한 아무리 피곤해도 차를 태워준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열 것이다.
히치하이킹 원칙의 예외는 없었나요?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두 가지 예외를 두었는데 첫째, 혼잡한 도시에서는 히치하이킹이 거의 불가능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어요. 둘째, 북한 여행처럼 체제의 문제로 부득이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는 출발지(베이징)로 돌아와서 히치하이킹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세상은 좁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첫 번째 인연은 하비브라는 39세의 트럭 운전사다. 하비브는 나를 트럭에 태워주면서 먼 친척을 만나기라도 한 듯 환영의 뜻으로 꼭 안아준다.
“믿기질 않아. 스트라스부르에서 왔다고? 거짓말 같겠지만 내 사촌들이 그 근처 뮬루즈랑 콜마르에 살아. 크라우터게셰임에 사는 사촌도 있어. 세상 진짜로 좁네.”
모로코 사람에게 세상은 정말 좁은가 보다. 우리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친구가 되었다. 하비브는 오늘 밤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 한다. 나는 초대를 덥석 받아들였다. 현지인의 집에서 머무는 건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집에 도착하자 하비브가 내 손을 잡고 집안으로 안내한다. 작고 아담한 문을 지나가자 현관이 나왔다. 신발을 벗고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부엌이 있다. 벽에는 종교적인 사진과 코란 구절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하비브는 네 아이들과 아내를 소개한다. 하비브의 아내는 내게 먼저 씻은 후에 함께 저녁을 들자고 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나라는 존재를 알게 된 사람들인데 나를 왕자처럼 극진히 대접한다. 모로코와 프랑스의 특별한 동맹관계가 보탬이 되었겠지만 이 모든 게 어리벙벙하다. 나라면 모로코에서 온 히치하이커를 이렇듯 환대하고 끼니를 나누었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마도 ‘아니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비브 가족에게 여행길에 나선 이방인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베푸는 건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베푸는지로 선량함을 가늠한다. 인류애와 겸손에 대해 첫 번째 배움을 얻는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었다. 식사자리에 앉으니 “어디에 가느냐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져.”라는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난생 처음으로 이슬람 가족의 초대를 받은 거라 소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두 신기하다. 전형적인 아랍풍으로 장식된 방에서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수저나 포크 없이 손을 사용하는데 왼손은 볼일 볼 때만 사용하고 빵과 음식은 오른손으로 먹는다. 식사 후에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 트림 소리를 크게 내서 만족스러움을 표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하비브의 행동을 따라하자니 어색하고 낯설다. 민트차를 마시면 찻잔이 금방 채워진다. 우리는 차의 향기를 음미하며 우아하게 대화를 나눈다.
다른 생각을 만나면
우리는 가족과 결혼, 그리고 주로 종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슬람교도는 가족 예식을 중시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실천하고, 말끝마다 ‘인샬라’, ‘함둘라’를 붙인다.• 하비브네 가족의 꿈은 하나였다. 나처럼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도의 5대 의무 중 하나인 핫즈hajj, 곧 메카의 성지를 순례하는 것이다. 하비브는 자신의 삶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인지 이야기한다.
알아두면 좋은 이슬람 관용구
인샬라: 알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함둘라: 알라를 찬양합니다(식사나 일이 끝났을 때)
비스밀라 알 라흐만 알 라힘: 전지전능한 알라의 이름으로 자비가 함께하길
알함두릴라: 알라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알라후 아크바르: 알라는 위대하시다
“모든 것은 알라께서 계획하신다네. 자네를 데려온 것도 알라께서 바라셨기 때문이지. 알라께서 자네를 이리로 이끄신 거야. 이슬람은 원래 복종이라는 뜻이네. 나는 일생 알라의 말씀에 부단히 순종하고 있다네. 비스밀라 알 라흐만 알 라힘 •. 자네는 우리 가운데서 환영을 받을 거야.”
나는 예의상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조물주에 관한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게 정말 신이었을까? 내가 여기 모로코에 있는 건 우연의 산물이고 내 자유의지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은 많지만 토를 달지 않기로 한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종교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하비브는 이슬람 종파 중에서도 신비주의적 성향이 아주 강한 수피교도이다. 작은 묵주를 손에 쥐고 다니면서 매일 다섯 번 기도를 올리고 마음속으로 알함두릴라• 를 일만 번 되뇐다.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표하기 위해서다.
“알함두릴라를 반복하는 게 피곤하지 않아요? 이 말을 할 때마다 신실한 마음이 드나요? 아니면 습관적으로 느껴지나요?”
“뤼도빅. 자네가 백포도주나 맥주를 좋아하고 이 술을 하루 종일 마신다고 하자고. 내가 느끼는 것은 자네가 술을 마실 때마다 느끼는 기분과 같을 거야. 매일 매순간 알라께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은 술에 취하는 거랑 똑같다네. 지치기보다는 독실한 마음이 더 커지지.”
하비브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모르고는 세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코란에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실의 보드라운 카펫에서 잠이 들기 전까지 코란을 읽는다. 조만간 내가 만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 자신을 겸손한 눈으로 바라보고 다른 사람도 나를 쉽게 재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전에 어떤 미국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일 뿐이야.”
이번 여행의 목표에는 다른 세계관을 더 잘 이해하고 관용의 폭을 넓히고 싶은 것도 있다. 처음으로 나는 태어나서부터 접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빠져나와서 무슬림 가정의 일상을 경험한다. 종교는 가치관을 전파하는 수단이고 특정한 세계관과 사고방식, 사회관계를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종교는 의식의 모형이고 문화를 만든다. 이번 여행은 내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실체에 다가서는 기회가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첫걸음은 이만하면 성공적이다. 오늘 하루를 여행일기에 기록하고 잠이 든다.
날이 밝기도 전,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뮤에진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이슬람의 땅에서 사람들은 기도 시간에 맞춰 살아간다. 대형 스피커가 하루의 첫 번째 기도인 파지르 시간을 알린다. 하비브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 마을 끝에 있는 주유소에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하비브는 정말로 심성이 착하다.
하비브의 바통을 요세프가 이어받고, 모하메드, 오마르가 그 뒤를 잇는다. 하나둘 마을을 지날수록 사람들의 환한 웃음에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생각한 대로 아프리카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하다. 경직된 마음을 풀면 풀수록 사람들은 반갑게 맞아준다.
세상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두려움을 보이면 세상도 발톱을 세운다. 매일 세상과 부딪히면서 사건이 생기면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최대한 이 여행의 기쁨을 누리자!
히잡과 비키니
해가 찬란하게 비치는 아프리카의 대지를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모하메디어, 카사블랑카, 라바트, 페즈, 메크네스, 마라케시, 아가디르… 방문한 도시를 지도에서 지운다. 나는 번개처럼 빨리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다.
배고플 때나 차가 멈출 때면 밥을 먹고, 가격이 싸면 샌드위치, 샐러드 같은 음식을 구입한다. 물가는 대체적으로 낮아서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 숙소를 찾는 건 얼마나 발품을 파느냐에 달렸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의 집에서 신세지는 운수 좋은 날을 빼고는 올리브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소형 트레일러 뒤에서 잠을 청할 때도 있다. 불편한 건 괜찮은데 안전 때문에 늘 걱정이다. 호텔 숙박은 예산이 빠듯해서 생각할 수도 없다.
밤에 어디서 잘지, 어떤 차를 탈지, 10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떤 만남이 기다릴지 전혀 모르는 불확실한 날들에 적응이 되어간다. 이를 통해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터득해 간다. 미지의 세계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조금씩 편안함을 느끼는 범위를 넓혀가며 인내심을 키우고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메디나 지역, 왕릉, 노천 시장. 모로코의 아름다움을 매일 조금씩 발견한다. 나는 이름난 관광지에서는 오래 머물지 않으려 한다. 이런 곳에서 관광객과 현지인의 만남은 대부분 거래로 끝난다. 나를 걸어 다니는 지갑으로 보는 분위기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인 관광지를 피해 딴 길로 가는 것이 좋다. 관광지를 벗어나면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고 친절하게 차를 내주기도 한다. 관광객을 따라다니며 구걸하라고 아이들을 내모는 부모도 없고, 단체관광객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안 봐도 되고. 유명 관광지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최고의 여행을 경험하고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을 보다 깊숙이 이해할 수 있다.
메크네스 마을 축제에 갔을 때는 프랑스와 모로코 이중국적을 가진 스물여덟의 여성 파티마를 만났다. 몇 시간 동안 모로코와 프랑스, 삶, 종교 등 다채로운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이 잘 맞아 우리는 다시 만났다. 며칠간 함께 시간을 보내다보니 파티마의 속내를 알게 되었다. 파티마는 부모의 종교, 여성의 지위, 전통과 관습 이런 것들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모로코에서 태어났지만 파리에서 자랐고 3년 전 부모의 손에 이끌려 돌아온 그녀에게 모로코의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
“프랑스에선 친구도 많았고 정말 즐거웠는데.”
그녀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혼전관계를 가졌고, 엄마가 딸에게 대물림하는 순결 전통을 지키지 못했다고. ‘껴안고 애무는 하되 네 보석상자를 지켜라’는 엄마의 가르침을 깼다는 것이다. 모로코에 돌아온 후 파티마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얼마 전 처녀막 재생수술을 하러 프랑스에 갔었어. 처녀가 아닌 걸 알고도 결혼하겠다는 모로코 남자는 없어. 여기서는 아직도 첫날밤을 치룬 후 신부의 순결을 온 동네 사람이 확인할 수 있게 핏자국이 남은 시트를 걸어놔. 진짜야! 온 동네에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소문이 나면 우리 가족은 치욕을 견디지 못할 거야.”
파티마는 자신은 인습에 맞설 만큼 당차지 못해도 딸을 낳으면 절대 인습을 강요하지 않겠다지만 결심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힘겨워한다. 설상가상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끔찍하지만 모로코에서는 흔한 사연이라서 더 심란하다. 히잡과 비키니가 공존하는 것처럼 전통과 현대로 양분된 모로코. 모로코의 오늘은 이렇게 이중적인 이미지로 남았다.
히치하이킹은 나를 내려놓는 것
세계여행 1년차 1월 30일 사하라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에 도착한다. 겔밈이라는 마을이다. 마을의 공기에서 사막의 기운이 느껴진다. 마을은 온통 모래로 뒤덮여있다. 바람을 타고 동물 울음소리와 악취가 날아든다. 이 마을은 상인과 낙타를 모는 사람들, 여행자, 투아레그족이 모래벌판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현대 문명을 이용하기 위해 들르는 곳이다.
겔밈은 대서양을 따라 1,600킬로미터 가량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안선 위쪽에 있다. 이 마을은 서사하라•의 악명 높은 땅덩이를 가로지르는데, 바로 스페인령 리오 데 오로Rio de Oro가 있던 자리다. 현재 이 지역은 남극과 비슷하게 영유권이 명확하지 않다. 1974년 이후로 모로코가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독립을 주장하는 주민들과 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1,600킬로미터를 달려가면 모래언덕과 낙타가 있는 꿈의 사막이 펼쳐진다.
서사하라 지역은 스페인의 식민통치가 종식되자 사라위족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모로코와 무력 분쟁이 지속되다가 1991년 이후 UN의 중재로 정전 상태입니다. 사라위족이 세운 ‘사하라 아랍민주 공화국’은 일부 나라에서만 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탄탄, 타르파야, 라아유네. 몇 시간을 기다리다 가다를 반복하며 남쪽으로 이동한다. 프랑스 여행자의 레저용 차량도 탔고, 수시로 차를 세우고 기도하는 이슬람교도의 차도 탔다. 사막 깊숙이 들어갈수록 급진적인 이슬람교도를 만난다. 여자들의 얼굴은 베일 속으로 사라진다. 사막의 풍광은 점점 확연해지고, 북쪽의 광활한 녹지대는 등대풀과 가시밭에 자리를 내주었다.
아가디르에서 부즈두르까지 닭을 운송하는 트럭 운전사 하산이 타르파야에서 내 엄지를 보고 차를 세웠다. 트럭에 오르자마자 닭이 풍기는 악취에 일순간 정신이 혼미해진다. 머리에 터번을 쓴 하산은 4시간 동안 사라위족의 독립 투쟁을 자세히 설명하며 제발 모로코 침략자들이 돌아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사라위족의 문화가 사라질까 봐 두렵고 유엔의 개입이 실효성이 있을지 의심스럽단다. 해질 무렵까지 우리의 대화는 평화롭고 편안하게 이어졌고 하산이 잠자리를 내준대서 나는 냉큼 초대를 받아들였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부즈두르에 가까워지면서 휴대폰이 터진 이후로 하산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아랍어로 친구와 통화하는데 뭔가 작당을 모의하는 듯 말투가 심상치 않다. 내 쪽을 흘낏 쳐다보며 음험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몇 주 동안 잘 억눌러 왔는데. 괜히 그 집에서 잔다고 했나?
하산의 트럭이 부즈두르에 진입하는데 주변 풍경이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점점 험악해진다. 너저분한 거리, 여기저기 움푹 꺼진 땅, 버려진 고물, 공사 중단된 건물, 고철 같은 자동차, 칠이 벗겨져 더러운 벽, 위태위태한 보행자들. 도시 전체가 빈민굴 같고 미더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하산의 차는 자꾸만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들어간다. 차가 막다른 골목에 서자 어둠 속에서 수염을 기른 사내 넷이 튀어나와 내게 성큼성큼 걸어온다. 가운데 남자의 얼굴은 흉터투성이에 험상궂다. 서사하라의 벽지마을에서 지금 나는 홀로 무방비상태로 덩치 큰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흉터가 있는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선다. 남자의 수염에 창백한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린다.
“어느 나라서 왔소? 이름이 뭐요? 이슬람교도야? 혼자 왔어? 왜 이슬람교도가 아니야? 언제 개종할 거야?”
아랍 국가에서는 무신론자의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서구 사회에서 중립적으로 생각되는 무신론이 아랍 문화권에서는 ‘타락’의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종교가 없다는 건 ‘아웃사이더’라는 뜻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신론, 곧 종교적 장치 없이 신을 믿는다는 개념을 여기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려고 나는 이성을 잃은 남자에게 기독교인이라고 얼른 대답했다. 남자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안절부절한다. 이 남자가 뒤에서 칼을 빼어들면 어떡하지? 어디부터 찌를까? 귀? 허리? 아니면 손가락? 그때 갑자기 한 명이 폭소를 터뜨리더니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부즈두르에 온 걸 환영하네, 친구.”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짓궂은 장난이었을까? 몰래카메라 같은 건가? 어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방금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잠자리를 내주겠다는 남자들의 호의를 뿌리치지는 못했다. 혹여 쥐도 새도 모르게 뭔 일을 당할까 봐 무섭기 때문인지 아니면 근처 닭장에서 울어대는 닭들 때문인지 나는 밤새 뒤척였다.
이튿날 이른 새벽에 무거운 마음으로 도로로 돌아왔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얼마든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태평하던 날들이 이제 가물가물하다. 흉터가 있던 남자의 무시무시한 표정이 눈에 선하다. 그 남자가 무슨 생각에서 그랬을까? 장난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다. 하지만 언제라도 폭력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자.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는 건 사절한다. 대다수의 마음씨 좋은 사람들에게 내 에너지를 집중하자.
히치하이킹은 세상을 믿는 것이고 타인을 믿는 것이다. 사람의 정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이다. 길에는 선량한 운전자가 있는가 하면 인색한 운전자도 있다. 행동의 주체는 나지만 그 결과를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 여행이 운명의 힘에 좌우된다는 걸 받아들이자. 다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고 기분도 좋아졌다. 마크툽!
돈 없이 사하라 사막 건너기
부즈두르를 빠져나가는데 가족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두리번거리다가 이 외딴 곳에서 기적처럼 인터넷카페를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간판이 바람에 흔들린다. 반경 300킬로미터 안에 민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런 곳에 인터넷카페라니!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인터넷이 보급되어있다. 문득 바깥세상이 있는지도 모른 채 수천 년간 여기서 살았을 옛 사람들이 떠오른다. 요즘은 통신기술 덕분에 다른 나라의 풍요로운 모습이나 무절제한 생활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그게 좋은 일일까 아니면 나쁜 일일까?
스트라스부르 병원의 아이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낸다. 아이들은 사하라 사막에서 날아오는 생생한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백혈병을 앓는 여덟 살의 제레미는 세계 최대의 (뜨거운) 사막,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모래언덕의 모래를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사실 세계 최대의 사막은 한랭 사막인 남극이다. 아홉 살의 오렐리는 사라위족과 투아레그족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달란다. 야스민은 사막을 어떻게 건널지, 또 낙타 히치하이킹을 할지 묻는다.
야스민이 좋은 질문을 했다. 모로코의 다클라에서 모리타니의 수도 누악쇼트를 가로지르는, 700킬로미터에 달하는 인적 없는 사막을 어떻게 종단할 것인가? 그 문제 때문에 나는 몇 주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있다.
알제리 내전 이후 사하라의 남북을 오가는 교통은 모로코와 모리타니로 몰렸다. 하지만 사라위족 분쟁으로 인해 모로코와 모리타니 국경은 최근에야 열렸고, 도로 상태는 말이 아니다. 2002년부터 이 지역을 지나기 위해 무장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위험은 여전하다.
다클라는 모로코 영토의 마지막 마을이다. 모래바람에 휩싸인 유령도시로 사막관광을 위한 RV 차량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다. 이 마을에서 사하라 사막에 매료된 여행자들이 모험을 시작한다.
사막의 허허벌판에서 히치하이킹은 통하지 않는다. 사하라 종단은 프랑스에서 다른 마을을 찾아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국경마을의 군대 막사와 여행자 캠프를 돌아다니며 세계여행 프로젝트를 설명하고 누악쇼트에 가고 싶다고 열변을 토한다. 돌아오는 답은 각양각색이다. 차가 도착할 때까지 몇 주를 기다려라. 돈을 한 보따리 안기지 않는 한 태워줄 운전자가 없을 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중요한 건 돈인가 보다.
허구한 날 퇴짜를 맞으면서도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보기로 한다. 가능성을 하나하나 타진해본다. 마침내 끈기가 빛을 발한다. 사하라 사막에서 스릴이 넘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영국인 마틴과 그레이엄이 모리타니 수도까지 같이 가자고 한다. 아싸!
나는 줄곧 사하라 사막 종단을 꿈꿔왔다. 모험이 시작되려면 아직 조금 남았지만 히치하이킹 여행에서 최장 거리의 여정인 사하라사막에서 모래언덕을 활강하고, 유목민인 투아레그족을 만나고, 낙타 행렬을 따라갈 생각을 하니 잠이 안 온다.
다음 날 마틴과 그레이엄의 하얀 소형 트럭 뒤에 짐을 싣고 일주일치 생필품을 샀다. 그리고 대열에 동참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 유럽에서 왔고 종단을 마치면 차를 팔아 귀국 비행기 표를 살 계획이라고 한다. 차량 여덟 대 중 다섯 대가 골동품 같은 1960년대 산 푸조 504 브레이크 모델이다. 이 차들이 행선지까지 무사히 도착한다면 중고시장에서 팔려 페인트칠을 다시 하고 세네갈과 기니, 토고에서 버스택시로 사용될 것이다. 다른 차량 두 대는 반짝이는 구식 벤츠로 이 길에서 꽤나 흔한 모델이다. 대열에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희망봉까지 일주하겠다는 네덜란드 커플과 자전거 여행자 두 명도 있다.
마을을 빠져나오자 도로 표지판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른쪽으로 대서양이, 왼쪽으로 사막이 펼쳐진다. 광활한 바다와 가문 땅, 푸른색과 황색이 어우러지는 장대하고 잔인하고 거친 풍경이 수백 킬로미터 이어진다.
풍경이 이렇듯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데도 사하라 사막을 자동차로 지나는 사람들이 왜 이리 적은지 이해가 된다.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차가 계속 덜컹거리고 우리는 마치 트램펄린에 올라간 캥거루처럼 사방으로 튕겨져 나간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안 아픈 데가 없다.
알고 보니 영국 청년들이 나를 태워준 것은 현실적인 이유가 컸다. 모래언덕에 차가 빠질 때 밀어줄 손이 두 개나 더 생기기 때문이다. 차가 빠지면 바퀴 아래 모래를 파낸 다음 철판을 대고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 밀어야 한다. 빠질 때마다 빼내는 데 1시간도 넘게 걸린다. 밀다 보면 금세 모두 나가떨어진다. 하지만 사하라 종단을 마쳤을 때의 감격스러운 순간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
사막에서 길의 자취는 금세 사라진다. 왕성하게 움직이는 이 원시의 공간에서 영구적인 건 하나도 없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인간의 자취는 바람과 모래에 의해 금방 지워진다. 선두 차량에 탄 투아레그족 가이드는 아무런 표식도, 인적도 없는 이곳에서 타고난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길뿐만 아니라 드문드문 파묻힌 지뢰를 비껴갈 수 있게 이리저리 방향을 일러준다. 길옆에 뒤집어지고 불탄 차들이 지뢰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갑자기 그레이엄이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운전면허 있지? 운전해볼래?”
물론이지! 이게 웬 떡이냐 싶다. 좌우에 모래언덕 사이를 질주한다. 이제 나도 다카르 랠리 드라이버다.
사막 종단 첫날 우리는 해가 저물 무렵 국경경비대가 한창 기도 중일 때 모리타니 국경에 도착했다. 경비대는 나를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키려고 몇 마디를 건네다가 카사블랑카에서 받은 첫 여행비자 옆에 도장을 쾅 찍어준다. 유럽을 떠나 모로코에 들어섰을 때처럼, 모로코를 떠나 모리타니에 입국하며 다시 한 번 낯선 문화 속으로 들어간다. 영토 대부분이 사막인 모리타니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마그레브•)과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인(블랙아프리카•)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마그레브Maghreb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이 중심이 된 이슬람 동방세계와 대립되는 아프리카 북서부의 이슬람 ‘서방세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블랙아프리카BlackAfrica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지역을 일컫는 말로, 사람들의 피부가 검다고 백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는 모래 위에 솟은 작은 마을 누아디부를 지난다. 생텍쥐페리가 『인간의 대지』를 집필하고 『어린 왕자』를 구상했다는 마을이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고 나는 광활한 자연을 만끽한다. 고개를 들면 어디나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곳곳에서 모래돌풍이 솟아오른다. 저 멀리 모래바다가 끝이 없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드넓은 대지에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지고, 고요한 땅에서 활기가 샘솟는다. 고독과 명상에 이상적인 환경에서 내 영혼이 다시 깨어난다.
밤이 오면 차량 옆에 텐트를 치고 일행과 함께 모래언덕 사이에서 야영을 한다. 뜨거운 차와 파스티스 술을 나누며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유럽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자동차를 파는 것이 돈이 제법 되는 모양이다. 유일한 리스크는 사막 한가운데서 차가 고장 나는 것인데, 이럴 때엔 견인 비용이 차값이랑 맞먹어서 차라리 차를 버린다고 한다. 종단 도중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동행하던 벤츠가 퍼진 것이다. 차값뿐만 아니라 엄청난 통관비용까지 날리게 된 차 주인은 원통해한다. 아마 그는 사하라 사막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것이다.
함께 있는 분위기도 참 좋지만 나는 사막의 광활함을 혼자 만끽하고 싶어서 하루만 일행과 떨어져 자기로 한다. 사하라 사막 전체가 내 것이라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모래언덕 위로 20분쯤 걸어서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찾았다. 거대한 모래언덕이 끝없이 펼쳐지는 광경이 그림엽서 같다. 이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일몰이 은하수와 별로 빼곡한 밤하늘로 바뀐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빼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막의 평화를 홀로 느끼기 위해 잠자리를 마련한다. 마법과 같은 시간이다.
잠이 들락 말락 할 즈음 이상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어둠 속을 보는데, 갑자기 벽 같은 것이 나를 덮친다. 모래폭풍 한가운데에 갇힌 것이다. 허술하게 세운 텐트는 사방에서 무차별 공격을 받는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텐트를 열다가 모래알 수십 억 개에 강타당했다.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텐트가 폭풍의 손아귀에 찌그러든다. 광란하는 자연 앞에서 어떤 노력도 소용없다. 모래언덕에 파묻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에 떨면서도 참아보기로 한다.
겨우 잠들었다가 추위 때문에 몇 시간 만에 깨어난다. 누가 사하라 사막이 뜨겁다고 했을까? 사막의 밤은 얼어 죽을 것 같이 춥다. 접으면 크기가 물병만 한 침낭으로는 한기를 막을 길이 없다.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오들오들 떨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침낭 위로 두꺼운 모래이불 한 겹이 덮여있다. 주위에 여기저기 작은 모래언덕이 생겼고 텐트는 모래에 파묻혔다. 자연의 공격을 받아보니 참 인상적이면서도 당황스럽다.
며칠 후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물 때문이다. 짐을 줄이기 위해서 물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