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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필(공감만세 인터내셔널 이사장, 목원대학교 교수)
고령화 저성장 시대와 금융자본주의의 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온 사회가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부릅니다. 2030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지옥(hell) 같은 조선(朝鮮)이라는 의미겠지요.
대한민국은 요즘 젊은이가 살아가기에 점점 척박한 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삶의 단계를 포기한 ‘3포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도 함께 포기하는 ‘5포 세대’가 등장하고, 이제는 포기한 것이 너무 많아서 ‘n포 세대’라는 말도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헬조선을 만드는 데 기여한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어떠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고, 이들을 대할 때마다 안쓰럽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잘못해왔나 되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힘이 빠졌을 때 결국 의지해야 할 이들이 바로 청년들이기에 두려움이 더 커집니다.
청년들에게 “철없는 소리, 모두 너희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라고 하거나 “현실이 괴롭더라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다”라고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냉혹합니다. “개처럼 일하면 진짜 개 취급받는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일하면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게 된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게으름을 피우면 당장 확실한 보상을 받는다”, “고통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 다만 고통이 있다고 성취가 있는 건 아니다”라는 격언으로 되받아칠 수밖에 없는 청년들입니다.
이런 현실에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을 주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공정여행을 세상에 알린 이 책의 저자 고두환과 ‘공감만세’ 청년들입니다. 세계화가 심화시키는 불평등한 관계를 여행이라는 체험을 통해서 경험하고, 이를 넘어서 공정한 관계를 만들어보겠다는 청년들입니다. 여행을 통해서 경험하는 낯섦과 불편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숨은 욕망과 불공정한 거래 관계를 깨닫게 해주려는 여행을 설계하고 진행합니다. 여행자와 함께 여행지의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살리고 삶을 개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여행 이야기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난제들을 나름대로 풀어보려 애쓰는 고두환이라는 청년과 그와 함께하는 이들의 열정과 의지의 결실입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청년들이 만들고 싶어 하는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을 맛볼 수 있는 맛보기 상품들입니다. 이들이 꿈꾸는 진짜 상품은 평화와 호혜성 넘치는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 여행을 통해 고두환 대표와 공감만세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집을 떠나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가 여행입니다. 이 책을 읽는 여행이 끝나면, 이 책에 소개된 진짜 공정여행을 한 번 떠나보시길 권합니다. 공정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살고 있는 이 헬조선도 ‘평화와 호혜가 가능한 여행지’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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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여행으로 공생을 꿈꾼다
2009년, 세상을 가볍게 쉽게 그리고 시끌벅적하게 바꾸고 싶은 청년들이 모여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만든 조직이 지금의 공정여행 사회적기업 (주)공감만세다. 초기 멤버들은 가난한 나라를 돕고 협력하는 국제개발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우리가 돕고 협력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어느새 우리가 도움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돕고 협력한다는 건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인 게 아니라, 관계에 기반한 상호 소통에 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공감만세는 줄임말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라는 긴 이름 탓에 별칭을 가진 게 현재 우리의 이름이 되었다. 공정은 ‘공명정대’(公明正大: 모든 일을 바르고 정당하게 처리함)에서 시작된 말로, 공감만세의 깃발 아래 모인 청년들이 위에서 언급한 깨달음에 감동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당시 우리 생각과 비슷한 개념의 ‘공정무역, 공정여행, 사회적경제, 협동조합’ 등을 공부하다가 얼떨결에 창업의 길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남들보다 글 쓰는 데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완성하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책 첫 부분에 나오는 프랑스 이야기는 2011년 초에 쓴 글이고, 끝부분에 나오는 필리핀 이야기는 2015년 초에 쓴 것이다. 그만큼 공정여행에 대해 고민하고 논한다는 건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버거운 일 중 하나다. 그럼에도 책을 내기로 결심한 건, 내 생각이 이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고민들이 여러 사람들에게 읽혀, 함께 소통하며 한국 사회에서 공정여행이 조금 더 정교해지고 생활 속에 아스라이 녹아들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공감만세를 통해 3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공정여행을 다녀왔다. 공정여행가를 발굴하고, 공정여행 사회적기업이나 마을을 조성하는 ‘공정여행가 양성과정’을 통해 국내외 10여 군데가 창업하고 50여 지역의 마을이 공정여행으로 현지주민의 행복하고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게 되었다.
국내에는 공감만세 말고도 공정여행에 대해 고민하며 활발히 활동하는 사회적기업 및 공정여행가들이 있다. 항상 우리의 부족함으로 그들에게 누를 끼치는 건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매우 훌륭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5년, 공감만세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공정여행 문화를 확산하고 공정여행을 통해 국제개발과 국제교류를 더욱 효과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외교부 소관 사단법인 ‘공감만세 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설립 발기인들과 임원들은 모두 공정여행 경험이 있는 공정여행가들로, 공정여행을 통해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으며 기금을 마련하고 뜻을 모았다.
부족함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짧은 기간 내에 공감만세는 많은 일을 해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가야 할 길이 멀다. 공정여행이 학교 현장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자리 잡았다면 세월호 참사는 막았을지도 모른다. 공정여행이 정치인 연수 현장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자리 잡았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살 만한 세상이 됐을지도 모른다. 공정여행이 패키지여행 현장에 조금이나마 빠르게 자리 잡았다면 여행 가이드들이 제값도 못 받고 서로 속고 속이는 여행을 하며 가이드와 여행자 모두 힘들어하는 상황을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공정여행으로 세상을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변화와 혁신의 시발점이 공정여행으로부터 가능하다고 믿는다. 앞으로도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직책에 있든 공정여행을 통한 활동은 나의 삶에 넓고 깊게 투영되어 계속될 것이다. 이 책은 그 고민과 활동을 처음으로 정리해낸 부끄러운 기록이다. 그리고 독자들과 공유하며 함께 가자고, 함께하자고 손 내미는 초대장이다.
이 자리를 통해, 공감만세의 공정여행과 함께 해주신 수많은 분들께 감사드린다. 특별히 공감만세 식구들과 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해주신 한수경 편집자님과 내 삶에 진귀한 영감과 경험을 가져다주신 부모님, 언제나 지지와 격려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사)공감만세 인터내셔널’ 권선필 이사장님, 아무런 대가 없이 책의 탈고와 도움을 준 ‘(사)월간토마토’ 이용원 대표님, ‘(사)문화유산울림’ 안여종 대표님, 나의 스승 ‘(사)풀뿌리 사람들’ 김제선 상임이사님, 그리고 나의 아내 방랑예술가 덕에 이 책이 완성되었다. 다시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5년 가을
고두환
차
례
추천의 글
프롤로그 |공정여행으로 공생을 꿈꾼다
눈 뜨다, 모색하다_공정여행
•몽마르트 언덕의 이유 있는 작은 빵집
•18도, 55퍼센트, 보존 그리고 소통
Q&A알 듯 모를 듯, 공정여행이 뭐죠?
공정여행_그곳에 친구가 산다
•산골마을의 도전은 오늘도 계속된다
•무슨 소리! 우린 친구잖아, 친구!
•공정여행은 쌍방향으로
•계단식 논 ‘바타드’에서는 무슨 일이
•가난하지만 ‘잘’ 사는 바세코 사람들
•보기 드문 오타쿠
•평화를 공유하는 ‘아시아도서관’
Q&A어떻게 사회적기업으로 공정여행사를 꾸리게 됐나요?
국내를 색다르고 공정하게 여행하는 법
•일본 규슈 사람들의 대전 공정여행
•제주도를 공정하게 여행한다는 것은
Q&A공정여행에 꼭 필요한 준비물은?
모두가 공정하게 여행하는 그날까지
•행복 지수 1위, 부탄을 여행하는 독특한 방법
•공정무역 산지에서 만나는 숨은 보석
•국제 네트워크와 연대하는 공정여행
에필로그 |공정여행, 공감만세 그리고 나
함께 떠나는 공정여행
•서유럽 청소년 인문학 여행학교
•내 인생의 쉼표, 치앙마이 힐링 여행
•천상의 녹색계단, 바타드 가는 길
•간사이의 작은 실험들
•후쿠오카의 심장을 누비다
•대전 원도심 공정여행 ‘대흥동 사람들’
•쉼, 힐링, 만남, 제주 공정여행
•행복을 찾아서, 은둔의 왕국 부탄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의
이유 있는 작은 빵집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은 완전히 익은 빵만 좋아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인 엘리제 궁에 빵을 납품하는 이 나라 최고의 제빵사라면 당연히 수용해야 하는 요구일 터. 하지만 파스칼 아저씨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했다.
“굽기, 화덕과 만나는 단면, 반죽 정도 등 빵의 개성을 살려야 먹기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빵이 나옵니다.”
아저씨는 무슨 요구가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빵에 관해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 빵 자체만 먹으면 건강에도 좋고, 살도 찌지 않지만 무엇을 얹어 먹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강변하는 파스칼 아저씨는 아이러니하게도 늘어진 턱살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베이컨과 치즈, 초콜릿과 생크림 등 턱살이 좋아하는 친구들과 매일 만나는 모양이다.
“빵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입니다”
몽마르트 언덕 언저리에 한 사람이 있다. 25년간 그곳을 지킨 파스칼 브레윙.25년 전 네 명의 사람들과 몽마르트 언덕에서 빵집을 시작한 청년은 어느새 인자한 인상을 풍기는 아저씨가 되었다. 조그마한 빵집, 다섯 명만 들어서도 꽉 차는 빵집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하루에 빵집을 찾는 손님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프랑스인의 주식이라 불리는 바게트만 1,500개가량 팔린다. 이 빵집은 각종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국에서 온 몇몇 사람들과 농담을 섞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그에게서 빵 굽는 것에 관한 깊은 자부심이 느껴졌다.
“프랑스에는 빵집이 35,000개 정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파리에만도 1,200개의 빵집이 있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빵집은 그냥 단순한 빵집이 아닙니다.”
그가 이런 말을 꺼냈을 때, 맛이나 가격 등을 비교하면서 본인의 빵이 다른 빵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빵은 우리에게 주식입니다. 우리는 하루 세 번 빵집에서 같은 사람을 만나곤 하지요. 빵집은 사람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추억을 쌓아가는 공간입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찾아보기 쉬운 정육점이나 구멍가게와 마찬가지로 빵집은 마을 공동체 안에서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소통의 통로이자 만남의 장소입니다.”
단순히 빵 만들어 파는 사람일 거라 생각한 내게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단순한 장사가 아니지요. 빵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입니다.”
여러 대회에서 우승하고, 엘리제 궁에 납품하게 되면서 아저씨의 빵집은 유명세를 탔다. 외국 언론이 앞다투어 취재하고, 기내 잡지에도 여러 번 소개되었다. 관광객들이 이 빵집에 와서 빵을 먹고, 사 가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날은 바게트는 사지도 못하고 사진만 겨우 찍어가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였다. 다섯 명 남짓 들어가는 비좁은 빵집을 좀 더 넓은 장소로 옮기고, 빵의 양을 늘려야 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파스칼 아저씨의 빵집은 여전히 조그마하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빵을 비난할 마음은 없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그만큼 수요가 있으니 당연히 생기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어떤 원료를 쓰느냐에 따라서 건강과 직결되거나, 어떤 제빵법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맛이 결정되지요. 적은 인력으로 수십만 명이 먹을 빵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곳과, 매일매일 이 빵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과 맛을 고민하며 빵을 굽는 빵집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빵은 삶 그 자체입니다.”
예전에 공장에서 만든 빵과 빵집에서 만든 빵을 놓고 실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두 빵을 우유에 넣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실험이었는데, 푸석거리던 공장 빵은 우유를 모조리 흡수하였고, 수분을 머금은 빵집 빵은 우유를 흡수하지 않고 따로 분리된 상태로 있었다. 그 실험 결과가 공장 빵과 빵집 빵의 차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빵집은 프랑스의 사회 시스템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 취약계층의 경우, 관공서에서 보호대상으로 삼아 일종의 번호를 부여한 뒤, 빵집같이 거의 매일 들르는 곳과 그 정보를 공유한다. 그 사람이 매일 오기 때문에 빵집에서 대화를 하고, 그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고 돌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갑자기 그 사람이 발길을 끊는다면 빵집은 바로 관공서에 연락을 취한다. 아무도 돌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빵집이 그들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단순한 장사가 아니지요. 빵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입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는 집에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배달을 해줍니다. 바게트 하나라도 말이죠. 아이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집 열쇠나 귀중품도 빵집에 맡기고, 여러 잡다한 일들을 빵집에서 처리하곤 합니다. 바캉스 시즌에도 빵집이 문을 닫으면 안 되니, 인근 빵집들과 협의하여 돌아가면서 휴가를 갑니다.”
결국 빵집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사람과 지역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런 상황에서 파스칼 아저씨는 빵집의 규모를 확대할 필요도, 유명세를 이용해 어떤 일을 도모할 필요도 없었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협동조합은 재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엄청난 성공가도를 달렸지만, 몇 가지 원칙을 분명히 해두었다. 협동조합 원칙에 의거하여 생산한 공산품과 유기농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판다고 해도 대형 할인마트를 운영하면 동네 상권이 잠식당할 수 있으니, 도시 외곽에서만 대형 할인마트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공동체는 이렇듯 우리가 지켜야 하는 원칙 속에 사람과 사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동네 상권을 단순히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지표를 위해서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반자이고, 매일 만나며 관계를 맺는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추상적인 시스템의 이해 없이도 삶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있는 이들의 사고를 빵집 주인 파스칼 아저씨를 통해 만났다. 그들의 자부심을 구성하는 밑바탕에는 ‘사람과 사회를 잇는 통로’라는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파스칼 아저씨를 만난 건 2011년 겨울이었다. 지금도 몽마르트 언덕에 가면 턱살이 푸근한 파스칼 아저씨의 빵집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
18도,55퍼센트, 보존
그리고 소통
어느 나라에나 보편적으로 다양한 사물과 공간이 존재하지만, 그 속에 뚜렷한 세계관과 나름의 관점이 깃들어 있을 때, 그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를 배우고 둘을 깨닫는다. 프랑스 미테랑 도서관은 내게 그런 공간이었다.
미테랑 국립도서관 큐레이터인 프랜시스 사비니 씨는 내가 참가한 도서관 투어 프로그램의 안내자였다. 그는 몇 개의 단어를 힘주어 말하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온도는 18도, 습도는 55퍼센트, 보존 그리고 소통.”
건축, 그 이상의 예술 ‘미테랑 국립도서관’
1987년에 건축한 미테랑 국립도서관. 사회민주주의의 대부 격으로 불리는 미테랑 대통령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계관을 도서관에 투영하고 싶었다. 프랑스의 방대한 인문·사회·과학의 의미를 부여하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며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의 방점이 바로 이 도서관이다.
“공모를 통해 총 237개의 디자인을 접수했습니다. 그중 도미니크 페로라는 건축가의 프로젝트를 선택했죠. 도미니크의 디자인은 외부는 현대적인 감각을 드러내고 내부는 중세의 정신을 담아내며, 장서는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도록 삼박자를 고루 갖추었지요.”
사비니 씨는 도서관 입구에 설치한 설계 모형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당시 약 15억 유로(2조5천억 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미테랑 국립도서관에는 현재 2,4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미테랑 국립도서관은 총 네 개의 빌딩이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센 강이 흐르는 길 쪽으로는 브라질산 나무로 만든 촘촘한 계단과 통로가 늘어섰고, 사람들은 빌딩의 지하층으로 파놓은 정사각형의 통로를 이용해 이 공간을 드나든다. 그 가운데에는 수풀이 무성한 작은 숲이 있는데, 프랑스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를 본떠서 설계했다. 몸을 140도 정도 누일 수 있는 의자가 도서관 통로 곳곳에 놓여 있다. 의자 옆에는 촘촘히 콘센트를 설치해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여러 유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루브르 박물관 앞마당에 건축한 피라미드의 돌 중 하나를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이는 우리의 ‘과거-현재-미래’를 보여주는 자화상이지요. 루이 14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지구본 두 개는 이전 당시부터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것을 도서관에 비치할 거라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요. 유물에 맞춰 도서관의 보존 시스템을 일부 조정했습니다. 다행히도 현재까지 무사히 보존하면서 전시하고 있지요.”
자부심을 느낄 때 사람들은 턱이 살짝 올라간다. 사비니 씨의 턱은 이미 올라갈 때로 올라가 있었다.
열람하는 공간은 작은 소음 하나도 용납하지 않는다. 문이 없기에 여닫는 소리조차 없고, 모든 사람이 노트북을 사용하고 있지만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인당 책상 공간이 매우 넓고, 개인용 스탠드와 콘센트가 구비되어 있다. 특히 의자는 무척 편안해보였다. 중세 수도원의 모습을 본떠 만든 내부, 연구하는 공간에서 수도사들은 침묵했고, 숨소리를 죽인 채 움직이며 고도의 연구과정을 이어갔다. 미테랑 국립도서관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교육을 따로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자연스레 사람들에게 그래야만 한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도서관 1인용 책상은 웬만한 서재보다 좋았다. 그 안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내는 작은 소리보다도 미세한 소리로 그 공간을 고요하게 유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실험적인 도서관을 여럿 보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충격 그 이상이었다.
“도서관의 제1 목적은 ‘보존’과 ‘소통’입니다”
“열람과 학습 아닐까요?”
도서관의 목적을 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사비니 씨는 신선한 답변을 했다.
“도서관의 제1 목적은 ‘보존’과 ‘소통’입니다.”
처음에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 다시 한 번 물어봤는데, 마찬가지 답이 돌아왔다. 자료를 반영구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 보존을 통해 주변부와 어떻게 소통하는지가 과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테랑 국립도서관의 핵심은 ‘온도는 18도, 습도는 55퍼센트’였다. 그것은 보존을 위해 항상 지켜야 할 수치였다.
열람은 준비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위다. 석사급 이상부터 출입이 가능한 공간에서는 열람이 제한적으로 허락되는데, 자료를 요청하면 천천히 움직이는 장서 컨베이어 벨트가 48시간 내에 복사본을 배달해준다. 학습은 도서관에서 고민하는 요소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도서관 학습실 개방에 지역주민과 대학생 간 치열한 자리다툼이 지금도 한창이다. 찾아오는 지역주민은 대부분 입시를 준비하는 중고생 혹은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고, 시험 기간을 제외하고 열람실을 지키는 대학생 역시 고시나 취업준비를 한다. 언젠가 도서관에 학습실을 끊임없이 만드는 것은 공간 낭비라고 말한 문헌정보학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 도서관도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미테랑 국립도서관의 소통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수많은 전시품을 도서관에 비치해두어 도서관은 장서만 보관하는 곳이라는 상식을 깼다. 도서관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다양한 유물을 보존한다. 그리고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한다. 방대한 도서관 시스템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두 시간가량 설명하는 큐레이터를 배치할 정도이니 이들이 도서관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접근성 역시 소통의 중요한 매개체다. 주변에 위치한 시네마테크(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데이터베이스, 영화자료원) 그리고 몇몇 학교와 도서관의 접근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센 강 위에는 다리를 놓고, 복잡한 지하철 입구는 모두 도서관을 향하도록 도시 계획을 변경했다. 사람들이 오는 방향과 몰리는 인파를 고려해 동서남북에 각각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입구 쪽에는 소음이 날 만한 정보센터나 기념품 가게를 배치함으로써 나머지 공간의 고요함을 보장했다.
하지만 소통의 제1 조건은 차별 없는 드나듦이다. 특정 구역은 석사급 이상만 이용할 수 있거나 일정한 금액을 내야 하지만, 나머지 공간은 내외국인, 남녀노소 상관없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개방했다. 번잡함과 소음 탓에 도서관이 이런 정책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을 세우기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런 고민에 관해 사비니 씨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규제가 아닌 분위기, 곧 사회 인식이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거죠.”
“상식선에선 반환되어야 하지만…”
미테랑 국립도서관 맨꼭대기 층에 올라갔다. 파리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제2차 대전의 폭격을 피해 여전히 메트로폴리탄의 위용을 갖춘 곳, 센 강 주변으로 프랑스 최고 수재가 근무한다는 재정경제부, 저 멀리 기둥 두 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 건립 당시에는 파리의 흉물로 불렸으나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에펠탑까지. 유람선 바토무슈는 이들을 바라보며 센 강에 몸을 싣고 유유히 흘러간다.
“이곳은 파리의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콘퍼런스나 회의를 여는 이들에게 개방하지만, 1회에 적어도 5, 6천 유로(1,000만 원가량)의 대관비를 지불해야 합니다. 돈을 지불한다고 무조건 대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최하는 조직의 성격과 목적, 사회 인지도 등을 고려하여 대관을 결정합니다.”
거침없이 자부심을 드러내는 그의 앞에 문제를 하나씩 드러내야 할 순간이 왔다. 일단, 질문을 했다.
“자료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죠?”
“그야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야 하고, 보존 능력이 있는 사람 손에 맡겨야죠.”
“바닷가 근처에 있던 자료는 염도와 해풍까지 고려해서 보존한다던데, 맞나요?”
“그럼요, 대부분 그럴 겁니다.”
그는 당황할까? 의구심을 품고 질문을 이어갔다.
“외규장각 도서는 한반도에서 생성한 자료이고,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건 이런 사정을 프랑스인보다 잘 아는 우리 대한민국 연구자들일 겁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반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정치적 이슈는 피해가길 바랐고, 이것은 우리가 논의해봐야 해결되지 않는 논제라며 말을 이어갔다.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그러하다는 것, 인정합니다. 다만 우리는 정치적인 문제와 복잡한 이슈에 관해서 판단을 내릴 수도, 결정할 수도 없는 입장이지요. 만약 프랑스가 하나씩 반환을 시작하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유물과 자료를 반환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이는 사회 혼란을 부추길 거고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이후 미테랑 국립도서관의 훌륭한 보존 시스템과 그들의 철학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그런 시스템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현재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공부하고 싶게 하고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현대적 공간, 그곳이 미테랑 국립도서관이다. 그들의 제국주의적 시각은 아직도 프랑스 곳곳에 남아 있다. 여전히 아르메니아인과 루마니아인에 대한 억압적 차별이 존재하고, 수많은 폭동을 불러오곤 한다. 예전에 그들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들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미국을 제외하면 세계사회에서 핵과 자금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나라 중 하나다.
도서관을 둘러보고 나서 생각했다. 그들에게 드리운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약탈해온 유물과 자료는 잘 보관하겠구나. 턱을 끊임없이 추켜올리기 위해 오늘도 ‘보존’과 ‘소통’이 제1 목적인 도서관은 잘 운영하겠구나. 그리고 우리도 치열하게 살아야겠구나. 저 어리석은 합리화를 언제까지고 부러워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알 듯 모를 듯,공정여행이 뭐죠?
공정무역, 공정여행. 최근 몇 년 사이 무역과 여행 앞에 붙은 ‘공정’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공정여행일까? 공정여행 외의 다른 여행은 불공정하다는 의미인가? 알 듯 모를 듯한 ‘공정여행’의 개념을 차근차근 짚어보는Q&A. 공정여행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풀고, 나의 여행이 자연스럽게 공정해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1. 공정여행이라는 게 뭔가요? 쉽고 간단하게 정의한다면?
이런 질문을 받고보니, ‘공정여행’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지네요. 보통 우리가 하는 여행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서글프기까지 하고요. 원래 여행은 다 공정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하는 여행에서 그 공정했던 면이 점차 사라지자 ‘공정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