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소개
김연철
강원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해 뜨는 풍경을 자주 보고, ‘바다를 사랑하는 소년’으로 자랐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북한의 산업화와 공장관리의 정치〉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에 들어가 북한의 산업시설과 공장을 직접 둘러보며 대북 사업을 기획했다. 2004년부터 1년 반 동안 참여정부의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으로서 장관급 회담을 비롯해 다양한 회담에 참여하며 외교 전선의 선두에서 실전 협상을 경험했다. 개성공단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 상무부와 협상을 벌였고, 북한의 허허벌판에 공장이 하나둘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2005년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9ㆍ19공동선언 현장에 참여했다. 북한을 6자회담에 참여시키기 위해 협상안을 만들어서 설득하고,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함께 남한ㆍ북한ㆍ미국 삼각협상을 진행하기도 했다. 러시아 극동대표부의 초청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남한ㆍ북한ㆍ러시아 삼각협력을 협의했으며,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중협의에도 참여했다.
2008년부터 2년간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을 맡아 남북 문제와 통일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애썼다. 현재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 《냉전의 추억》 등이 있고, 통일문제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남북이 협상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날카롭게 대립하는 현장에서 ‘협상’의 진정한 의미와 방법을 고민하며 협상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 안의 분단’을 넘어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기를 소망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분쟁 해결과 평화 정착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한슬, 한아가 살아갈 세상을 위하여
2005년 9월 평양의 새벽을 기억한다. 그날 나는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으로 남북 장관급 회담의 합의문을 조율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기둥을 세우고 공간을 나누고 지붕을 얹듯이, 합의문이라는 집이 모양을 갖출수록 몸속 신경세포들이 곤두섰다. 앞에는 북한이라는 상대가 있고, 뒤에는 언론과 야당이 지켜보고 있었다. 정책보좌관이 되기 전에 근무했던 경제연구소에서도 북한과의 다양한 비즈니스 협상을 경험했지만, 정부의 협상은 달랐다. 날씨 이야기를 해도 뾰족함이 묻어났고, 때때로 결렬을 선언하고 짐을 싸고, 그때마다 말리기는커녕 ‘잘 가시오’ 하면서 상대와 똑같은 행동을 하는 유치한 벼랑 끝 전술을 번갈아 썼다. 밀고 당기는 신경전으로 꼬박 밤을 새운 그날 새벽, 문득 협상에 관한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양한 시대와 다양한 나라의 협상을 공부할수록 협상의 보편성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보면 협상은 정부나 기업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협상의 연속이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나 연인들이 영화를 고를 때, 가족들이 외식을 할 때도 양보하고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의견 차이가 있고, 그때마다 우리는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한다.
인간관계, 사회관계, 국제관계에서 벌어지는 협상은 수준과 방법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협상의 주체는 사람이다. 협상가는 직위와 제도라는 모자를 쓰지만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협상에서 성공하려면 이익의 기계적인 배분보다 신뢰를 먼저 쌓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신뢰는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협상이 얻어야 할 결과다. 믿을 수 있는 사람과는 굳이 협상을 할 필요도 없다. 믿을 수 없기에 협상을 하는 것이고, 협상을 하면서 서로를 알고 약속을 지키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협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테이블에 마주앉아 ‘관계’를 이루어야만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마주앉는다는 것은 거울 앞에 서는 것과 같다.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욕을 하면서, 왜 거울 속의 상대가 웃지 않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관계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친다. 내가 웃어야 거울 속의 상대도 웃는다.
이 책에는 수많은 협상의 기술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언제나 통하는 협상의 비법을 찾지만,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똑같은 기술이라도 상황에 따라 맞기도 틀리기도 한다. 협상의 기술은 줄타기에서 균형을 잡는 것과 같다. 상대의 의도와 나의 목표 사이에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의 사이에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내 편의 지지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한다. 때를 아는 것이 협상의 유일한 기술이다. 서두르지 않되 기회를 잡아야 하고, 정확해야 하지만 얼버무려야 할 때가 있다. 또한 양보할 때와 얻어야 할 때를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 지금 지더라도 나중에 이길 수 있고, 이번에 양보하면 나중에 얻을 수 있다.
물론 협상의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은 다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1938년 뮌헨협상을 첫 번째로 소개한다. 당시 뮌헨에서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와 협정을 맺고 평화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는 협상을 선택한 체임벌린을 악당에게 굴복한 겁쟁이로 낙인찍었다. 결과적으로 뮌헨협상은 실패했지만, ‘총’이 아니라 ‘협상’을 선택한 체임벌린의 용기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은 1년 정도 지연되었다. 그를 조롱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때로는 용기 있는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할 때도 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혹은 우리 사회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그치지 않고 있다. 화해의 문을 지나 평화의 들판으로 나아가려면 우리는 ‘협상의 강’을 건너야 한다. 비즈니스 협상이 실패하면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것으로 그칠 수 있지만, 정부의 협상이 실패하면 자칫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 책은 20세기 전쟁의 시대에서 시작해 21세기 오늘날까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20가지 협상의 명장면을 모았다. 성공한 협상에서는 지혜를 배우고, 실패한 협상에서는 교훈을 찾았다. 잘 알려진 협상은 주목하지 않았던 측면을 부각시키고, 알려지지 않은 협상은 전체적인 과정을 소개했다. 폭력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고 적을 친구로 만든 감동의 역사에서 세상을 바꾼 협상의 힘을 느꼈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협상 가운데 이 책에서는 한국전쟁 휴전협상과 한일협정을 다루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던 2년 동안 수많은 목숨이 사라졌고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거대한 증오가 만들어졌다. 왜 협상을 그렇게 오래 끌었을까? 1965년의 한일협정은 눈앞의 이익을 좇으면서 역사 청산을 후대의 몫으로 미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잘못 끼운 첫 단추로 인해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이 두 협상을 통해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갈등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치유의 정치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면 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협상의 시대 말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휴머니스트 출판사와 1년여 동안 꼼꼼하고 성실하게 원고를 다듬어준 역사팀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협상이 없는 풍경은 삭막하고 일방적이며 폭력적이다. 세상이 더 부드러워지고 더 배려하고 더 평화로워지기를 바라며, 협상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16년 7월
김연철
1938년 9월 30일 영국의 헤스턴 공항, 쏟아지는 빗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 브리티시항공의 제트기가 착륙하고, 네빌 체임벌린 총리가 손을 흔들며 트랩을 내려왔다. 그는 뮌헨에서 히틀러 독일 총통과 회담을 마치고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며칠 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하 ‘체코’)을 침략하겠다고 선언했다. 체코의 수데텐(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에서 독일계 주민과 체코 정부 간에 자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지속되자, 히틀러는 이 도시를 해방시키겠다고 큰소리쳤다. 체임벌린은 군중을 향해 종이를 흔들었다. 영국과 독일이 서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평화 선언 문서였다. 수데텐 지역을 제물로 바치는 대가로 체임벌린이 얻은 성과였다.
체임벌린이 탄 차가 버킹엄궁전을 향했다. 5마일 정도 되는 도로에는 수천 명의 군중이 ‘네빌’을 환호하며 늘어서 있었다. 버킹엄궁전에 도착한 체임벌린 부부는 조지 6세 부부와 함께 발코니로 나와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지 6세는 체임벌린에게 눈짓을 했고, 총리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군중의 환호에 응답했다.
총리 집무실이 있는 다우닝가로 가는 길도 수많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경찰들은 군중을 헤치고 길을 여느라 애를 먹었다. 총리 관저 앞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한 부인은 “당신이 내 아들을 돌려주었어. 이제 전쟁터로 가지 않아도 돼요”라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총리는 1층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나는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입니다.” 그러고는 “여러분, 이제 집으로 돌아가 편안히 잠들어도 좋습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다음 날인 10월 1일, 영국의 신문들은 일제히 전쟁을 막기 위해 어려운 협상을 마치고 온 ‘평화의 사도’를 칭송했다. 어떤 신문에서는 체임벌린을 ‘아마겟돈을 막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영국 하원은 찬성 366표, 반대 144표로 뮌헨협정을 비준했다. 영국의 정치인과 시민 대부분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여론은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을 지지했다.
그날 영국인들이 잠자리에 들 시각, 히틀러의 군대는 체코로 행진했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수데텐을 점령했다. 물론 그날 런던에도 폭탄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년 뒤인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했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후 ‘우리 시대의 평화’라는 단어는 아주 오랫동안 조롱거리가 되었으며, 체임벌린은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혔다. 1999년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체임벌린은 ‘20세기 최악의 총리’로 지목되었다. 사람들은 체임벌린의 외교정책을 ‘갈등을 피하고, 상대의 선의를 유도하기 위해 양보하는 정책’이라는 뜻에서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라 불렀다. 그 말은 곧 ‘어리석은 협상’을 대변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자기 전에 냉장고 속 케이크를 먹고 싶은데, 엄마에게 우유를 가져다달라고 하는 아이’로 생각했다. 우유는 핑계일 뿐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케이크였다. 하지만 체임벌린은 우유를 줘서 케이크를 못 먹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수데텐 지역을 접수했다. 체임벌린은 외교로 전쟁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히틀러는 우유로 만족하지 않았다.
역사는 뮌헨협정이 제2차 세계대전의 포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는 뮌헨에서 전쟁과 굴욕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체임벌린은 굴욕을 선택했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비난했다. 처칠은 체임벌린을 “자기가 마지막 먹잇감이 되기를 바라면서, 악어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인들은 정치적 사건을 논할 때 ‘1938년의 뮌헨’에 빗대어 자기 주장을 펼치곤 했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역시 1950년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할 때 “1930년대의 교훈을 알아야 한다. 도발에는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 유화적으로 대응하면 추가적인 도발만 부추긴다”라고 강조했다. 그랬던 트루먼조차 몇 년 뒤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로부터 오히려 유화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는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루먼에 대해 “1930년대의 교훈을 새기지 않아 중국을 잃고, 한국전쟁을 초래했다”라고 비판했다.
‘뮌헨의 교훈’이 자주 인용되면서 체임벌린의 오명도 널리 퍼졌다. 베트남전쟁에 미국이 개입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965년에 린든 존슨 대통령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물러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임벌린이 당했던 것처럼, 호찌민이 사이공을 점령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8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후보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군비 감축을 ‘유화정책’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1990년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걸프전쟁을 시작할 때도, 2000년대 이후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할 때도 일단 ‘1938년의 뮌헨’부터 걷어찼다. 군사 개입은 언제나 ‘독재자에게 놀아난 순진한 체임벌린’에게 침을 뱉으면서 정당화되었고, 반대로 대화와 협상은 ‘가짜 평화’라는 이름으로 조롱당했다.
왜 사람들은 체임벌린에게 침을 뱉었을까? 처칠의 말대로 굴욕이 아니라 전쟁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히틀러의 야망을 사전에 차단하고, 야만적인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었을까? 결국 체임벌린은 오명을 뒤집어쓴 채 1940년 11월 9일에 눈을 감았다. 그는 죽기 12일 전 이런 유언을 남겼다. “뮌헨이 없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제국은 1938년에 파괴되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역사가의 평가가 두렵지 않다.” 체임벌린은 어떻게 협상에 대한 자신감을 끝까지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제 ‘굴욕’의 오명을 뒤집어쓴 ‘체임벌린의 협상’을 재해석해보자.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에 대한 첫 번째 비판은 ‘왜 수데텐 지역을 양보했느냐’다. 즉 ‘강대국의 안녕을 위해 약소국을 제물로 삼아도 되는가’라는 비판이다. 수데텐은 강대국 정치에 희생되는 약소국의 비극적 운명의 상징으로 자주 거론된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이 양보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히틀러가 기세등등해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먼저, 수덴텐 지역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비극의 땅, 수데텐은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독일인이 이 땅으로 이주한 것은 12세기부터다. 당시 보헤미아 왕국은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추진했다. 자국민만으로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주해온 독일인들은 개간을 통해 경제적 안정과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었다. 그들은 대부분 독일과 체코의 접경 지역인 수데텐에 모여 살며 자신들의 종교와 언어, 문화를 유지했다. 체코인들은 수데텐의 독일인을 경제적 침략자로 여겼고, 17세기부터 민족 갈등이 되풀이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었다. 당시 체코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던 300만 명의 수데텐 독일인들은 하루아침에 ‘슬라브 국가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성립 당시부터 수데텐 독일계 주민들은 체코 정부에 자치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데텐 지역의 자치를 둘러싼 독일과 체코의 갈등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1867년 오스트리아제국을 유지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귀족들의 대타협으로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1세가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는 이중제국으로, 유럽에서 러시아와 독일 다음으로 국토 면적이 넓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오스만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했으나 패배했다. 그 결과로 대부분의 영토를 잃고 남은 영토마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했다.
그러다 1919년 3월 4일, 독일계 주민들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자신들의 자치 독립을 요구하면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반도에 3ㆍ1운동의 물결이 일어난 지 3일 뒤의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의 백성이 독립을 외치던 시기에 수데텐 주민들 또한 독립을 요구했다. 체코 경찰은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총을 쏘았다. 60여 명의 비무장 시민을 향해 여자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학살은 독일인에게 아주 오랫동안 복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1920년대 수데텐 지역의 독일인들은 재산 몰수와 대량 해고를 당했을 뿐 아니라, 학교마저 폐쇄되는 수모를 당했다. 1932년 당시 체코 실업자의 50%가 독일계였다. 이러한 비극적 토양 위에서 1933년 우익 정당인 ‘수데텐 독일당Sudeten Deutsche Partei’이 탄생했고, 독일계 주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나치스와 연결되었다.
히틀러는 1938년 9월 12일 뉘른베르크에서 “체코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고 연설했다. 아울러 수데텐에 사는 300만 독일인의 인권을 보호할 것이며, 이 지역이 ‘독일제국’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그해 4월 히틀러는 국민투표 형식을 빌려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했다. 히틀러가 내세운 ‘모든 독일인의 통일’, 즉 ‘게르만 민족주의’는 ‘독일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1938년 당시 동유럽에 흩어져 살던 독일인은 860여만 명이었는데, 그중 약 350만 명이 체코에 살았다.
체코 입장에서 수데텐은 분쟁의 땅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에드바르트 베네시 체코 대통령은 체코인들이 겪을 운명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도 자신들의 운명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베네시 정권은 먼저 동맹 전략에 기대어 안전보장을 모색했다.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체코는 1934년 6월 소련을 국제법적으로 승인했다. 이어서 1935년 5월 프랑스, 소련과 각각 상호원조협정을 맺었다. 히틀러의 팽창정책에 맞선 체코 정부의 대응이었다. 체코 정부는 프랑스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또한 히틀러가 쳐들어오면, 소련의 붉은 군대가 개입할 것이라고 믿었다.
한편으로,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달리 스스로를 지킬 힘이 있다고 생각했다. 1938년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체코는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 항공 분야와 보안 부분의 기술군 4만 7,000명, 국가방위군 2만 4,000명, 그리고 각종 전문가 2만 5,000명이 소집되었다. 소집된 예비군은 정규군과 함께 수데텐 지역으로 진군해 독일 전선과 마주 보는 요새들을 장악했다. 만일 체코군의 진군에 맞서 히틀러가 군사행동을 감행했다면 요새를 쉽게 함락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체코의 군사력이 히틀러의 군대를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수데텐 독일인들은 적극적으로 히틀러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히틀러를 지지하는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스Nazis)’이 나서서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는 수데텐 독일인들이 바라던 바였다. 1938년 5월, 체코 지방선거에서 콘라드 헨라인이 이끄는 수데텐 독일당이 87%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는 체코 침공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것을 군부에 지시했다. 전쟁의 먹구름이 다시 체코로 몰려왔다.
영국은 수데텐 독일인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체코 정부 또한 진전된 자치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수데텐 독일인들의 요구는 이미 자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체코 정부가 양보를 거듭했으나 그럴수록 수데텐 독일당은 계속 더 어려운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협상은 접점을 찾기 힘든 길로 빠져들고 있었다.
영국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스당의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9월 12일에 히틀러가 체코 침공을 선언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행히 그날 히틀러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흥분해서 연설을 했지만, 선전포고를 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인 9월 13일, 수데텐 지도자들은 체코 정부와 진행하던 협상을 깨고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체코는 오스트리아처럼 내부로부터 붕괴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영국과 프랑스는 전전긍긍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힌 프랑스와 영국은 체코가 아니라 히틀러의 손을 들어주었다. 약소국의 입장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강대국 정치의 냉정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수데텐을 포기하라고 베네시 정권을 설득했다. 베네시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으나 곧 체코가 강대국 정치의 제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베네시는 눈물을 흘리며 수데텐을 포기했다.
1938년 10월 1일, 히틀러의 군대는 친親나치스인 수데텐 분리주의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수데텐에 입성했다. 체코 대통령 베네시는 결국 사임했다. 그리고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을 해체했다. 슬로바키아에는 파시스트 꼭두각시 정권을 세웠고, 체코 역시 ‘보헤미아-모라비아’라는 이름의 보호령으로 개조해버렸다. 이후 가혹한 보복이 잇따랐다. 1939년 가을, 프라하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나치스는 시위 주동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특히 나치스 친위대 보안대장 출신으로, 체코 지역의 총독 노릇을 하면서 프라하의 도살자로 불리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히틀러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체코인 1만 명을 처형했다. 암살 장소였던 리디체Lidice 마을에서는 16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남성을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 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리디체 학살).
이후 나치스 독일이 패배했을 때, 수데텐 독일인들 또한 체코를 배신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945년 봄과 여름 사이에 체코는 수십만 명의 수데텐 독일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추방된 사람들은 모든 재산을 잃었다. 이처럼 수데텐은 복수가 다시 복수를 부르는 비극의 땅이었다.
화해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이루어졌다. 1989년 체코의 민주화 혁명을 이끈 바츨라프 하벨은 개인 자격으로 “독일이 사과했듯이, 우리도 사과할 때가 되었다”라고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하벨의 편지가 공개되자 체코에서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그러나 하벨은 대통령 취임 이후 독일과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97년 1월 21일 마침내 양국은 2년여에 걸친 비공개 협상을 통해 ‘화해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프라하에서 열린 서명식에서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우리는 용서받기를 원하며, 용서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바츨라프 클라우스 체코 총리도 “과거가 미래를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히틀러가 수데텐의 갈등을 핑계로 체코를 침략하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던 상황에서 체임벌린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을 막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뮌헨 회담 전에 이미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두 번이나 만났다. 첫 번째 만남은 뮌헨 회담 보름 전인 1938년 9월 15일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체임벌린은 독일 남부 알프스산맥의 휴양도시인 베르히테스가덴으로 갔다. 체코 침공을 선언한 뒤였기에 히틀러는 그가 영국의 참전을 선언하러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68세의 영국 총리는 눈앞에 닥친 전쟁을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독일로 날아갔다.
체임벌린의 목표는 숭고했다. 그러나 그의 협상은 아마추어적이었다. 그는 히틀러와 개인적으로 담판을 지으려 했기 때문에 외교부의 전문적인 도움을 받지 않았다. 통역관도 대동하지 않은 탓에 상대국인 독일 측의 도움을 받았다. 또한 영국 측 회담 기록자도 없어서 회담이 끝나고 며칠 뒤에야 독일 측에서 기록한 대화록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
체임벌린은 핵심 쟁점인 체코 문제에 관해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참고자료도 전혀 없었다. 평화에 대한 열망은 높았으나, 협상 준비는 너무 소홀했다. 이에 비해 협상 상대인 히틀러는 속임수와 심리전, 그리고 신경전에 능했다. 체임벌린은 ‘허풍이 아님을 보여줄 능력이 없다면, 허풍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협상을 지배한 쪽은 순진한 신사가 아니라 교활한 악당이었다. 세계 정세부터 논의하자는 체임벌린의 제안에 히틀러는 거짓말로 선수를 쳤다. 히틀러는 회담 당일에 수데텐 독일인 300명이 사살되었다는 거짓 정보로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수데텐을 독일제국에 병합하는 문제에 동의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기습 질문에 말려들었다. 결국 체임벌린은 개인적으로 독일의 수데텐 병합에 동의하지만, 그에 대한 최종 판단은 내각과 협의해야 한다고 자기 패를 보여주고 말았다.
히틀러와 대화한 이후 체임벌린은 그의 욕심에도 한계가 있으며 목표를 달성하면 약속을 지킬 것이라 오판했다. 9월 22일, 본 근처 휴양지인 고데스베르크에서 가진 두 번째 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체임벌린은 수데텐 지역을 양보하는 안을 갖고 갔지만, 히틀러는 더 큰 요구 사항을 들고나왔다. 히틀러는 독일과 체코의 새로운 경계선 설정과 함께 10월 1일까지 체코군 철수를 요구했다. 영국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 아래 밀어붙인 것이다.
고데스베르크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뒤 뮌헨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일주일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 여론은 뮌헨 회담에 대해 비관적으로 전망했지만, 체임벌린은 낙관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체코는 부대 이동 명령을 내렸고, 영국은 해군 동원령을, 프랑스도 예비군 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 군부는 전쟁을 시작할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뮌헨 회담 직전인 9월 24일과 25일, 베를린에서 실시된 독일 기계화 사단의 기동훈련에 시민들이 침울하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회담이 열리는 뮌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뮌헨 시민들은 평화의 사도 체임벌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히틀러는 총동원령 발표가 있기 두 시간 전에 영국의 체임벌린,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그리고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에게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체임벌린은 당시 영국 하원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소문을 읽고 있었다. 그때 뮌헨에서 회담을 열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담은 쪽지가 연단에 선 체임벌린에게 전해졌다. 체임벌린에게 그 쪽지는 깜깜한 밤중에 난데없이 나타난 한 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체임벌린이 얼굴에 화색을 띤 채 쪽지를 읽자, 회의장을 짓누르고 있던 절망스럽고 초조한 기운이 금세 안도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보수당 쪽에서는 “이런 고마울 데가. 신께서 총리를 통해 우릴 도우시네!”라는 안도의 말이 쏟아졌다.
뮌헨 회담에 참석한 독일ㆍ이탈리아ㆍ영국ㆍ프랑스 4개국 대표는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넘기는 데 합의했다. 4개국의 서명이 이루어진 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양자회담을 제안했다. 그는 영국과 독일의 관계를 개선하고 유럽 평화에 함께 기여하자는 성명서를 작성해 히틀러의 서명을 받았다. 체임벌린에게는 확실한 정치적 성과가 필요했지만, 히틀러에게 그 문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서명을 하면서도 별다른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뮌헨협상에서 히틀러와 체임벌린의 결정적 차이는, 히틀러는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카드를 많이 갖고 있었던 반면, 체임벌린은 그런 카드가 없었다는 점이다. 상대를 움직일 카드도 없이 선의에만 의존하는 협상은 성공하기 어렵다. 체임벌린은 협상의 성과에 매달렸지만, 히틀러는 협상의 성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히틀러처럼 일방적이고, 소통 능력도 없고, 반칙에 익숙한 상대와 협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필요한 전쟁을 막겠다는 체임벌린의 의지는 순진한 발상이었을까? 유화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히틀러의 야망을 고려할 때, 제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허망한 희망에 사로잡혀 군사 개입의 적기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과연 그럴까? 체임벌린이 이끌던 영국 내각은 히틀러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핼리팩스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수억 명의 목숨이 반쯤 미친 사람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라고 썼다.
체임벌린도 히틀러의 실체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1938년 3월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향해 진군했을 때, 그는 자신의 일기에 “독일이 이해하는 유일한 주장은 힘이다. 믿을 수 없다”라고 썼고, 체코에 위기가 감돌기 시작할 때에는 히틀러를 ‘반쯤 미친 놈’이라고 평한 핼리팩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러나 1930년대 영국의 유화정책은 국력이 상대적으로 하강 국면에 접어든 시기에 전개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회고처럼 1930년대에 영국은 “이미 해는 저물고 잔광만 남은 상태임에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황혼에서 살고 있었다”.
체임벌린이 1931년 재무장관에 취임했을 당시 영국은 대공황의 여파로 허덕이고 있었다. 파산 직전이던 영국 경제는 1936년경이 되어서야 안정적인 상태로 접어들었다. 막대한 재정 지출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후유증이 만만찮았다. 1936년 영국의 재정 적자는 2억 6,000만 파운드에 달했는데, 1935년의 1억 8,000만 파운드와 비교해보면, 증가폭이 매우 컸다. 체임벌린이 1937년 5월 총리에 취임했을 때, 영국 재무부는 과도한 군비 확대로 인해 경제ㆍ사회구조가 약화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만일 재군비 정책을 선택하면 국방비를 늘려야 하고, 그러면 재정 적자가 더욱 심각해질 상황이었다. 재정 적자는 정부의 경제 개입 능력을 제한하고 파운드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경제성장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당연히 잠재적인 군사력도 약화된다. 여전히 세계 금융ㆍ상업의 중심지였던 영국은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다. 국내 물가와 파운드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체임벌린만이 아니었다.
대외정책에서도 당시 영국은 제국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갈수록 약해지는 국력으로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영국이 신경 써야 할 지역은 유럽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영국은 세 지역에서 동시에 안보 위기를 겪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나치스 독일, 지중해에서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아시아에서는 군국주의 일본을 상대해야 했다. 캐나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연방 국가들 역시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총리인 체임벌린은 안정과 현상 유지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체임벌린이 뮌헨으로 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1936년경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이 볼드윈 내각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영국은 독일과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재무장에는 최소한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은 1936년 히틀러의 라인란트 점령● 때부터 국방비를 증액하기 시작했다. 전체 정부 지출에서 국방비의 비중이 1930년에서 1934년까지 12~14%였지만, 1936년에는 21%, 1937년 26%, 1938년 38%, 그리고 1939년에는 48%까지 늘었다. 1937년 5월, 총리 취임 당시 체임벌린은 자신의 일기에 “재무장과 독일과의 외교를 동시에 추진하는 양면정책이 이 위험한 시대에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썼다.
● 라인란트는 라인강 양쪽 강변 지역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맺어진 베르사유강화조약은 라인강 서쪽 전부와 동쪽 강변에서 50킬로미터까지의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규정했다. 군사 요새를 설치할 수 없고,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으며, 군사훈련 또한 금지되었다. 히틀러의 군대가 라인란트로 진군한 것은 베르사유조약을 깨뜨린 명백한 도발 행위였다.
역사학자 그레이엄 스튜어트는 1940년 8월 영국이 독일과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했을 때, 영국의 공군력은 1938년 9월과 비교해 거의 10배 정도 발전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사우샘프턴까지 영국의 해안을 따라 레이더 기지를 세운 것도 전쟁 시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37년 첫 레이더 기지 건립 이후 1940년 6월경까지 영국은 57개의 기지를 건립했다. 뮌헨협상을 통해 유럽에 전쟁이 1년 정도 연기되는 동안 영국은 연안의 레이더망을 완성하고, 전투기의 실전 배치를 끝냈다.
하지만 영국은 국방 전략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그 이유는 대부분 ‘정보 실패Intelligence Failure’● 때문이다. 영국은 1930년대 초 독일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1938년에는 반대로 독일의 공군력을 과대평가했다. 체임벌린 총리가 히틀러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데는 런던 공습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하게 작용했다. 뮌헨협상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런던에서는 공습 대비 팸플릿이 배포되고, 900개 이상의 대피소가 급조되었으며, 거대한 참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1938년 당시 나치스의 폭격기는 비행 능력이 떨어져 독일에서 런던까지 곧바로 날아갈 수 없었다. 런던 공습은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 해안을 장악한 1940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영국은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공군 위주의 국방정책으로 국내 방위에 집중했다. 그런 탓에 독일의 중부 유럽 진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잘못된 정보 수집과 분석으로 인한 전략적 실패였다.
● 정보 실패는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제대로 예측하거나 판단하지 못해 상당한 국가적 손실을 입은 상황을 의미한다. 20세기에 일어난 대표적인 정보 실패의 사례로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징후 무시, 한국전쟁 발발과 중국군 개입 가능성에 대한 오판, 이라크전쟁 개입을 위한 정보 왜곡 등을 들 수 있다.
1938년 가을, 당시 영국은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단순히 군사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무렵 반反히틀러 연대가 느슨해지면서 동맹국 사이의 협력도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중 미국이 고립주의로 돌아섰다는 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유럽 대륙의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고립주의를 전통적인 외교 전략으로 내세웠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윌슨 미국 대통령은 국내 고립주의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럽의 전쟁에 개입했다. 미국의 개입이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미국 내에서는 전쟁 개입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
또한 1930년대 미국은 대공황을 겪으면서 남의 일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될 생각이 없었다. 1938년 9월 9일, 체코를 둘러싼 위기가 휘몰아칠 때에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하이드파크 기자회견에서 “만약 체코를 둘러싸고 영국ㆍ프랑스가 독일과 전쟁을 한다면 미국이 도우리라 예측하는데, 이는 100% 틀린 것”이라고 말했다. 9월 19일에도 루스벨트는 로널드 린드세이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히틀러와 제3제국●을 반대하지만, 미국 시민들은 유럽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약 전쟁이 나면, 동맹은 패배할 것이다. 하나 미국의 여론을 고려하면, 전쟁이 일어나도 미국이 대서양을 건너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어렵다.”
●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주장하면서, 신성로마제국(962~1806)을 독일 제1제국으로,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1871~ 1918)을 제2제국으로, 그리고 히틀러 자신이 집권한 1933년부터를 제3제국으로 불렀다.
루스벨트는 자기 코가 석 자라 유럽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뮌헨협정의 약속이 점차 깨지고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루스벨트는 자신이 뮌헨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1938년에 루스벨트는 체임벌린을 위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전쟁 발발의 모든 책임을 체임벌린에게 돌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미국 또한 뮌헨에 가지 않아 외교무대에서 정치적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부담감은 제2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자 미국이 개입을 결정하는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체임벌린은 ‘왜 소련과 협력하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뮌헨 회담에 소련은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 체임벌린의 보수당 정부는 볼셰비즘을 나치즘만큼이나 경계했다. 그래서 소련과 동맹을 맺을 때 따라올 위험은 과대평가한 반면, 그로 인한 이익은 과소평가했다. 영국 외교관들은 소련이 체코에서 제2의 ‘에스파냐 내전’●을 꾀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 1936년 에스파냐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에스파냐 내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프랑코의 ‘국민진영’을 지원했고, 소련은 ‘공화진영’을 지원했다. 영국ㆍ프랑스ㆍ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해서 공화진영을 지원하지 않고 불간섭정책을 폈다. 공화진영을 지원하기 위해 내전에 참여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카탈루냐 찬가》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의 독선과 패권을 고발하기도 했다. 모든 이념의 격전장이며 내전 안의 내전으로 평가받는 ‘에스파냐 내전’은 사망자 35만 명, 망명자 50만 명, 수감자 30만 명을 낳고 1939년 4월 프랑코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스탈린은 과연 영국, 프랑스와 협력할 의사가 있었을까? 뮌헨협정 직후 영국의 핼리팩스 외무장관이 소련의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에게 물었다. “체코가 독일과 전쟁을 하면 소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리트비노프는 체코를 지원함과 동시에 소련의 30개 보병 사단을 서쪽 국경에 배치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 체코, 소련의 참모회담 개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도 프랑스도 소련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의 속내는 복잡했다. 파리의 소련 외교관들은 독일이 체코를 공격하면, 프랑스와 함께 체코를 돕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스탈린은 소련 바깥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체코와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면 반드시 프랑스와 영국도 전쟁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소련은 앉아서 기다리다가 적당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개입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은 어땠을까? 소련은 이미 미국에 이은 두 번째 산업국가였다. 그러나 뮌헨협정이 체결될 무렵, 소련의 붉은 군대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군에 대한 스탈린의 대숙청 때문이었다. 1937년 5월부터 1938년 9월까지,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장교들을 대량 숙청했다. 고위 장교의 65%, 하급 장교의 15%가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거나 가혹행위로 사망했다. 붉은 군대의 지휘 능력과 전투력, 그리고 사기가 복원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1938년 9월 뮌헨협정 이후 전쟁 발발까지 히틀러에 대항할 수 있는 연합과 동맹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방황하던 스탈린을 꼬드긴 것은 히틀러였다. 결국 1939년 8월, 앞문으로 돌진하기 위해 뒷문을 걸어 잠가야 할 상황이었던 히틀러는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40년 5월에 구성된 전시내각을 처칠에게 맡긴 장본인이 바로 체임벌린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1945년 2월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졌을 때, 히틀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라고 자문한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뮌헨’이었다. 히틀러는 “1938년에 전쟁을 시작했어야 했다”라고 후회했다.
체임벌린은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실수와 책임을 뒤집어썼고, 자신을 변명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체임벌린’이라는 이름은 오명으로 남았고, 사람들은 ‘뮌헨의 교훈’을 함부로 이용하곤 했다. 시공을 초월해서 전쟁의 길로 달려가려는 자들은 체임벌린을 제물로 삼는다. 어떤 사람들은 대화와 협상 자체를 유화적인 태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화정책은 1930년대 영국이 직면한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체임벌린이 순진하고 겁을 먹어서, 혹은 용기가 없어서 그런 정책을 취한 것이 아니다. 물론 정보 실패도 있었고, 전략적 판단 착오도 있었다. 하지만 유화정책은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한 시간 벌기였다.
협상이 늘 빛나는 것은 아니다. 수모와 굴욕으로 비칠 수도 있다. 유화정책의 강력한 비판자였던 처칠은 “약자의 유화는 무익하고 치명적이지만, 강자의 유화는 고귀하고 품위가 있는 평화의 길”이라고 말했다.
“핵무기로 소련을 공격하라!” 미치광이 리퍼 장군은 대통령의 허락도 없이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폭격기 조종사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명령을 따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미국 대통령은 소련 지도자에게 핵 보복을 하지 말라고 요청한 뒤 미국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곧이어 이미 출격한 폭격기 조종사에게는 기수를 돌리라고 명령한다. 폭격기 대부분은 격추되고, 몇 대는 운 좋게 기수를 돌려 돌아온다. 그런데 단 한 대만이 통신 고장으로 명령을 듣지 못한 채 소련을 향해 계속 비행한다. 그리고 고장 수리 과정에서 핵폭탄이 실수로 발사된다. 그 뒤 자동적으로 이어진 소련의 보복 공격.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1964)의 내용이다. 마지막 장면에 히로시마에서, 비키니섬에서, 혹은 대서양에서 이루어진 핵폭발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면서 조용히 음악이 흐른다. 운명의 날을 상징하는 버섯구름이 화면 가득 퍼지고, 베라 린이 우아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우리 다시 만나리We’ll meet again〉가 태연하게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우리 다시 만나리. 언제인지 몰라도. 어디서인지 몰라도. 난 알아요. 다시 만날 것을. 어느 화창한 봄날에.”
1964년 1월에 개봉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그렇게 지구 최후의 날을 그렸다. 이 영화는 ‘블랙코미디’다. 미치광이 장군, 맹목적인 관료, 그리고 무능한 대통령이 얽히고설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비록 영화 속 가상의 사건이지만 이제껏 인류가 경험하지 않은 핵전쟁의 끔찍한 결말을 예견케 한다. 핵전쟁은 과거의 전쟁과 다르다. 제한전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다.
큐브릭 감독은 이 영화에서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초기 핵전략을 꼬집었다. 1950년대에 등장한 ‘핵억지Nuclear Deterrence’ 개념이 한 예다. ‘억지’라고 번역된 ‘deterrence’는 ‘겁먹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terrere’에서 유래했다. ‘억지 전략’이란 한마디로 겁먹게 하는 전략이다. 다시 말해 ‘나는 확실한 보복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약 네가 공격하면 너는 죽게 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서로 핵을 갖고 있다면? 너만 죽는가? 나도 죽는다. 그래서 핵억지를 ‘서로Mutual 확실하게Assured 파괴한다Destruction’는 의미에서 ‘상호확증파괴’라고 부른다. 약자로 ‘MAD’라고 쓰기도 하는데, ‘미친’ 또는 ‘미치광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mad’를 연상시킨다.
핵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미친 짓’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일어났다.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라고 말했다. 큐브릭 감독은 이 사건에 관련된 여러 인물을 영화에 등장시켰다. 당시 핵전쟁이 일어났다면, 다시 말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면,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마지막 장면처럼 인류는 이 지구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미국과 소련 양국은 핵전쟁의 문턱에서 멈추었다. 아마겟돈, 최초의 그러나 최후의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건은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되었다. 1962년 10월 14일 미국의 유인 정찰기 U-2기가 쿠바 상공에서 중요 군사시설을 촬영했다. 15일 영상사진을 판독한 정보 분석관들은 소련이 중거리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0월 16일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외교안보 분야의 고위 관계자들을 소집했다. 이날부터 미국과 소련이 극적으로 타협한 10월 28일까지 13일간의 기록은 외교사의 전설이자, 게임 이론을 비롯한 국제정치 이론의 원천이며, 위기관리 리더십의 상징적 사례가 되었다.
지금까지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여전히 협상의 교과서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협상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이 한 편의 드라마에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위기 상황에서 지도자의 리더십이 돋보인다. 무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만들고, 유능한 지도자는 위기를 해결한다. 케네디, 그는 46년 6개월의 생애와 2년 10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을 보낸 비운의 대통령이지만, 그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보여준 용기와 지혜, 그리고 역사적 책임감은 전설로 남았다.
왜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미국이 터키에 핵미사일 기지를 만든 데 대한 반격이었다. 미국이 소련의 턱밑에 비수를 겨누었으니, 소련도 미국에 맞대응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피그만 침공 사건 때문이었다. 미국의 지원하에 과테말라에서 훈련을 마친 1,400여 명의 쿠바 망명자 부대가 1961년 4월 17일, 쿠바의 피그만에 상륙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남쪽으로 14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마을은 상륙 작전을 펼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작전은 아주 어설펐다. 작전 시작 전부터 쿠바 망명자들 사이에는 소문이 쫙 퍼져 있었다. 또한, 이미 3월 22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서 이 작전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보도한 탓에 카스트로 정부 역시 눈치를 채고 있었다. 카스트로 정부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잠재적인 저항 세력을 구금하여 내부 봉기를 원천봉쇄했다. 그리고 오합지졸 게릴라들이 상륙할 해안에 미리 2만여 명의 쿠바 정부군을 배치하고 기다렸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피그만 해안 지역이 반反카스트로운동의 중심지여서 게릴라군이 상륙하는 즉시 쿠바의 반체제 세력이 봉기할 것이라고 케네디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과는 오히려 참혹했다. 3일 만에 118명이 사망하고, 1,189명이 포로로 잡혔다. ‘완벽한 실패’였다. 미국의 체면이 구겨진 반면, 카스트로 정권은 자신감을 얻었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쿠바는 미국 안보의 직접적인 위협 요소였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혁명 직후부터 반미와 친소를 표방하는 쿠바 체제를 전복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게다가 쿠바의 망명객들이 앞장서서 호언장담하며 개입을 재촉했다. 1960년 3월,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피그만 침공 작전을 승인했다. 같은 해 11월 대통령 선거에서도 쿠바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케네디는 쿠바혁명을 막지 못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무능과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 후보의 책임을 물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닉슨은 실제로 쿠바 전복 작전을 총괄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케네디는 임기를 시작하면서 이미 준비가 상당히 진행된 이 작전을 반대할 수 없었다. 작전을 취소하면 과테말라에 모여 있는 쿠바 망명자들이 미국 본토로 몰려와 ‘카스트로에게 겁먹고 굴복한 대통령’이라고 성토할 것이 뻔했다.
케네디는 물론 미군의 직접 침공이 실패한다면 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중앙정보국이 게릴라를 모아 과테말라에서 훈련을 실시하고 구체적인 침공 작전을 수립하는 상황에서도 케네디는 미국의 직접 개입을 감추고자 했다. 공군의 지원도, 포격 지원도 없었다. 이처럼 어설픈 타협과 판단은 결국 작전의 실패를 예고했다. 결과적으로 케네디 역시 피그만 침공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케네디는 실패의 경험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그것이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그만 침공이 실패하자 케네디는 군부와 중앙정보국을 믿은 자신의 순진함을 자책했다. 그들은 얼마나 자신만만했던가? 그러나 정보는 실제 상황과 어긋났고, 작전은 허술했으며, 결과는 예상도 못한 것이었다. 중앙정보국은 1954년 과테말라에서 반혁명 쿠데타를 성공시킨 경험을 과신했다. 앨런 덜레스 중앙정보국 국장은 당시 쿠바의 상황이 과테말라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케네디를 설득했다. 합동참모본부 또한 지나친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미군이 군사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침공 작전을 승인했을 때, 군부는 젊은 대통령을 만만히 보았고, 실제로 전투가 벌어져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에 서면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이 미군의 동원을 허가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처럼 작전의 진행 과정에는 곳곳에 허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케네디는 ‘완벽한 실패’를 겪은 뒤 “군이나 정보당국, 이른바 전문가를 믿지 마라”라는 교훈을 얻었다. 케네디는 피그만 사건 당시 《뉴스위크》 워싱턴 지국장이었던 벤자민 브래들리에게 “내 후임자에게 맨 먼저 충고해줄 말이 있소. 장군들을 예의 주시할 것.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사 문제에 관한 그들의 의견이 마치 굉장한 값어치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당연히 지도자의 몫이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케네디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책임져야 할 정부 관리는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실무자가 아닌 대통령 자신이 정책 실행 결과에 대한 책임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피그만 사건을 계기로 중앙정보국의 무능과 군인들의 무모함에 대해 확실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군부의 특성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케네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어뢰함 함장으로 근무한 경험을 통해 군인의 실전 심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피그만 침공 작전의 실패는 그가 1년 뒤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한층 성숙한 결정을 내리는 학습의 기회였다.
입장에 따라 사건을 해석하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소련의 흐루쇼프와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피그만 침공 사건은 미국에 대한 견제가 불가피함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피그만 침공 사건이 쿠바 미사일 위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소련은 케네디 정부가 반드시 쿠바를 침공할 것이라는 ‘의지의 증거’로서 이 사건을 해석했다. 피그만 침공을 ‘미국의 직접 침공의 전조’로 본 것이다. 카스트로 역시 미국의 코앞에서 벌어진 쿠바혁명을 미국이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단정했다. 그래서 미국의 침공은 이미 정해진 일일 터이고, 그 시기가 ‘언제’인가만 남았다고 판단했다. 소련과 쿠바는 빠른 시일 안에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 미국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흐루쇼프는 피그만 침공 사건을 계기로 쿠바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미국이 쿠바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만큼 소련은 쿠바를 지키고 활용해야만 했다. 피그만 침공 과정에서 드러난 케네디 정부의 무능도 흐루쇼프가 자신감을 갖는 데 한몫했다. 흐루쇼프는 젊은 케네디를 얕잡아 보았다. 그는 이 사건이 케네디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하지 못했다.
위기의 순간, 자신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판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합리적인 선택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 불이 나거나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이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즉시 탈출해야 한다. 그러나 위기의 징후가 발견된 뒤 최종 단계에 이르기까지 늘 얼마 정도의 시간은 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가장 합리적인 대응을 찾아라.’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첫 번째 교훈이다.
당시 미국 국가안보 보좌관이던 맥조지 번디는 최종 선택을 하기까지 쓸 수 있는 시간을 6일 정도로 예상했다. 핵미사일 부품을 실은 소련 배가 쿠바 인근 해역으로 접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 것이다. 만약 48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결정해야 했다면 선택은 훨씬 더 제한되었을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10월 16일 국가안전보장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 NSC를 소집했을 때, 당장 눈앞에 놓인 선택은 두 가지였다. 먼저 공격할 것인가, 아니면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을 받아들일 것인가. 만일 먼저 공격한다면 핵전쟁으로 이어질 게 뻔했다. 그렇다고 소련 핵미사일을 용인한다면 국내적으로는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것이며,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위신에 손상을 입힐 터였다. 두 가지 선택 모두 적절하지 않다면 제3의 대안을 찾아야 했다.
케네디가 주어진 시간 동안 찾아낸 제3의 대안은 해상 봉쇄였다. 국민에게 상황을 알리고 해당 조처를 발표한 것이 10월 22일이었다. 그 6일간 케네디 행정부는 가능한 선택을 나열한 뒤 각각의 결과를 검토해 가장 나쁜 선택부터 배제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낸 타협안이 해상 봉쇄였다. 소련이 양보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시간을 벌 수 있는 방안이었다. 시간을 벌면 그사이에 더 나은 대안을 준비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군부는 처음부터 선제공격을 주장했다. 어차피 맞붙어야 한다면, 먼저 주먹을 날리는 것이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군부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있도록 토론 분위기를 이끌었다. 누구나 자유롭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토론 분위기를 만들어 장군의 주장에 대령이 반론을 펼 수 있도록 했다.
국무부와 국방부 혹은 다른 정부 부처에도 문을 열어 서로 의견을 내고 비판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새로운 정보를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주장을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선택지를 마련하고, 그 선택지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검증했다.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는 열린 토론으로 집단적 사고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시간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는 서로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 열린 토론보다는 일사불란한 논의가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는 독재적 결정이 민주적 결정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케네디는 피그만 침공 작전의 실패를 잊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결과를 예측해야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상 봉쇄는 최선의 해법이 아니었다. 미봉책이었을 뿐 위기의 원인은 해소되지 않았다. 핵전쟁의 공포가 미국 시민들에게 몰려왔다. 10월 24일, 핵미사일 부품을 실은 소련 선박 20척이 정선停船 지점까지 다가왔다. TV에서는 공포의 카운트다운을 생중계했다. 3마일, 2마일, 그리고 1마일. 이제 선을 넘으면 예고대로 발포할 것이고, 그러면 핵전쟁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공포에 떨며 절망하고, 누군가는 방공호를 더욱 깊게 팠다. 또 다른 누군가는 기도를 했다.
물론 당시 흐루쇼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자국 선박에 선을 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련도 문턱을 넘었을 때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교착 상황에서 10월 26일에 흐루쇼프가 먼저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미사일을 철수하겠다”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음 날 두 번째 메시지에서는 “터키의 미국 미사일 기지도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리는 10월 27일은 위기의 13일 중에서, 그리고 미국의 외교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하루였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참석자들은 흐루쇼프의 제안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터키의 핵미사일 기지를 철수한다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의 반발을 초래할 뿐 아니라 미국의 협상력이 약화될 것이며, 소련에 대한 굴복으로 비쳐 국내 여론의 질타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강경론이 우세한 가운데 불에 기름을 붓는 사고가 발생했다. 긴장이 높아지면 우발적 사건이 일어나는 법. 미군 10만 명이 쿠바 침공을 준비하는 긴장된 상황에서 10월 27일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오전 11시 59분, 공군 조종사 찰스 W. 몰츠비가 몰던 정찰기 U-2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소련의 핵실험 물질을 조사하기 위해 북극으로 향하던 중 내비게이션 고장으로 항로를 이탈한 것이다. 소련의 미그기가 긴급 발진했다. 알래스카 공군기지에서도 F-102 전투기 두 대가 발진했다. 전투기에는 공대공 핵미사일이 장착되어 있었다. 오후 1시 41분에 로버트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이 U-2기의 실종 보고를 받고, 4분 뒤 케네디 대통령에게 전화로 이 사실을 알렸다. 케네디는 “이럴 때 늘 말 안 듣는 빌어먹을 놈들이 꼭 있다니까” 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 다행히도 이 정찰기는 천신만고 끝에 이날 오후 알래스카 빙판 위에 비상착륙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났다. 같은 날 오후 2시 3분, 쿠바 동부 지역에서 정보 수집을 하던 미국 정찰기 U-2기가 소련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면서 조종사가 사망했다. 모스크바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현지 지휘관들의 자체 판단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쿠바군도 이미 미국 정찰기가 사정권으로 들어오면 무조건 발사하라는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의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미국 공군의 U-2기가 상공에 나타나자 소련군 장성들은 상부의 지침을 얻기 위해 연락을 취했지만, 하필이면 통신 사정으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소련의 쿠바 현지 지휘관들은 쿠바군의 실전 심리에 동조해 격추를 명령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흐루쇼프는 격노했고, 자신의 상황 통제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바다 아래에서도 아찔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소련 잠수함 B-59함은 자국 화물선을 호위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 해군은 이 잠수함에 핵무기가 탑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잠수함에는 15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진 핵탄두가 탑재되어 있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폭발력과 맞먹는 가공할 무기였다. 미국 해군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경고용 폭뢰를 투하했다. 소련 잠수함의 선체가 일부 손상되면서 산소가 고갈되기 시작해 몇몇 승무원이 실신했다. 발렌틴 샤비츠키 함장은 이성을 잃은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이렇게 앉아서 죽을 바에는 핵미사일을 발사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역시나 이런 결정적 순간에 모스크바와 통신이 두절되었다. 매뉴얼에는 함장을 포함한 핵통제 장교 세 명의 만장일치로 발사 여부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세 명이 모두 동의하기만 하면 핵무기가 발사될 터였다.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핵통제 장교 한 명이 반대했다. 그는 모스크바와 통신이 재가동될 때까지 발사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흥분한 함장을 진정시켰다. 다행히 상황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다.
쿠바에서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쿠바군에 미국 정찰기를 격추하라는 지시를 한 데 이어, 그날 새벽 아바나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서 “앞으로 24시간, 늦어도 72시간 내로 미국의 공습이 임박했다”라고 흐루쇼프에게 알렸다. 그리고 미국이 침공하는 즉시 소련이 미국을 향해 핵 공격을 감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스트로는 이미 TV와 라디오를 통해 “양키들에게 항복하느니 조국을 지키다 죽겠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소련의 쿠바 지역 사령관인 이사 플리예프 역시 전쟁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기고에 있던 핵탄두를 트럭에 싣도록 명령했다. 당시 미국은 몰랐지만 이미 쿠바에는 전술핵무기● 98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은 쿠바에 주둔한 소련군을 8,000명에서 1만 명 정도로 추정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30년 뒤에 공개된 비밀자료에 따르면, 당시 쿠바에는 소련군 4만 2,822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중무장 전투부대가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전술핵무기도 배치되어 있었다. 다만 흐루쇼프는 플리예프에게 발포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 모스크바와 쿠바의 통신 상태는 원활하지 않았고, 현장의 실전 심리는 가득 차올랐다.
● 핵무기는 사정거리에 따라 전술핵무기와 전략핵무기로 구분된다. 전술핵무기는 사정거리 500킬로미터 이하의 단거리 핵미사일, 전투기 탑재 소형 핵폭탄, 그리고 핵지뢰 등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전략핵무기는 5,500킬로미터 이상의 사정거리를 가진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그리고 대형 전략폭격기 탑재용 핵폭탄을 의미한다.
그날 미국 중앙정보국은 소련 본토의 미사일 기지 여섯 곳 가운데 다섯 곳이 가동 중이라고 보고했다. 미군 역시 전투기에 연료를 주입하고, 미사일 발사 준비에 착수했다. 전투함과 잠수함 들도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전쟁의 기운이 부풀어 올랐다. 작은 불씨가 닿기라도 한다면 곧 터져버릴 기세였다.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은 그날 저녁을 이렇게 기억한다. “회의를 마치고 백악관을 나설 때는 아름다운 가을 저녁이었다. 그러나 곧 다음 주 토요일 밤에는 아마도 살아 있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날의 위험성은 사람들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상대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던 만큼 오판의 가능성도 매우 컸다. 맥나마라는 1963년 의회 청문회에서 ‘검은 토요일’을 회상하며, “미국이 쿠바를 군사적으로 공격하면, 당연히 소련이 핵미사일로 반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핵전쟁으로 이어질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미국과 소련은 게임 이론에서 ‘치킨 게임’ 혹은 ‘겁쟁이 게임’이라고 부르는, 파국을 향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에서도 미국 군부는 겁쟁이처럼 핸들을 먼저 꺾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최소한 출구를 마련해주고 상대를 몰아야 파국을 면할 수 있다.
벼랑 끝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는 비밀접촉을 시도했다. 10월 27일 급박했던 하루가 저물어가던 저녁 8시쯤, 대통령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미국 주재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에게 만나자고 제안했다. 도브리닌은 1962년부터 1986년까지 24년간 미국에서 소련 대사로 근무한 전설적인 외교관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1962년 5월 도브리닌이 미국에 부임한 이래 줄곧 그와 잦은 만남을 가져왔다. 그해 10월 16일 이후에도 로버트 케네디는 새벽 1시가 넘어 소련 대사관저를 몇 차례 더 방문했다. 이처럼 상대의 의도를 읽고 협상의 쟁점을 조율하려면 비밀채널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세 개의 채널이 가동되고 있었다. 첫째는 양국 대사관이다. 대사관은 공식 채널이었지만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상대편 지도자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했을 때, 한쪽 편지가 상대편 지도자에게 전달되기까지 12시간 이상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대사관은 긴급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적절한 채널이 아니었다.
둘째는 공개적인 미디어였다. 흐루쇼프는 주로 모스크바 라디오를 활용했고, 케네디는 TV를 활용했다. 이 채널은 빠르고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청중이 너무 많다는 단점이 있었다. 협상 상대와 여론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셋째는 상대국 지도자와 직접 연결 가능한 비밀채널이다. 당시 로버트 케네디와 도브리닌의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물론 이 채널 역시 그렇게 빠르지도, 그렇다고 비밀이 보장되지도 않았다. 당시 도브리닌의 메모는 자전거 택배로 웨스턴유니언 전화국을 통해 소련으로 전달되었다.
다만, 이 세 번째 채널은 효과적인 비밀채널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비밀채널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당사자들이 언제든지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최소한 외교와 정치 분야를 동시에 알아야 하고, 최고지도자와 직접 연결돼 있어야 한다. 물론 비밀채널을 통해 서로 외교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의지를 과장할 수도 있고, 상대의 양보를 시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정보를 흘리는 행위는 위험하다. 속임수와 거짓이 밝혀지면, 협상의 가장 밑바탕이 되는 신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로버트 케네디는 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서 철수하면 쿠바 봉쇄를 풀고 불가침을 선언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도브리닌은 그렇다면 터키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4~5개월 내로 터키에서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며, 다만 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의 동의를 얻을 시간이 필요하고, 이러한 사항은 구두약속이므로 비밀이 지켜져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케네디 대통령과 충분히 상의하고 결정한 협상 전술이었다. 케네디 측은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긴박한 순간에 비밀협상의 위험을 차단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고도의 협상 기술을 구사했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또 한 가지 결정적인 협상의 기술을 발휘했다. 내부 강경파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는 도브리닌 소련 대사에게 “군부는 무조건 싸우려 하고, 대통령은 더 이상 군부의 공습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12시간, 최대 24시간 내에 어떤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내부 강경파의 주장을 협상 카드로 활용했지만, 그것은 과장된 행동이 아니었다.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군부 쪽 참가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감이 높아지자, 선제공격을 아주 강하게 주장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도브리닌에게 다음 날인 10월 28일까지 답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군부에 맞서 통제를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고백처럼 던졌다. 당시 흐루쇼프도 군부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압력을 협상 카드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미국 쪽이었다.
미국 공군 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는 군사적 공격을 머뭇거리는 케네디 대통령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르메이는 해상 봉쇄를 “1938년 뮌헨에서 있었던 유화정책과 다름없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해상 봉쇄는 상대가 만만하게 여길 만한 조치여서 오히려 강경하고 도발적인 추가 행동을 부추길 것이라며,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 기지, 쿠바 공군, 그리고 통신시설에 무차별적인 공습을 즉각 감행하자고 주장했다.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동의하지 않았다. 케네디는 선제공격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도 소련의 맞대응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장군들을 보면서 자신의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군들의 주장은 엄청난 장점이 하나 있지. 그들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나중에 우리 중 아무도 그들이 틀렸다고 말해줄 수 없을걸. 우리는 다 죽고 없을 테니까 말이야.”
케네디 대통령은 비장의 카드를 준비했다. 로버트 케네디의 담판이 실패했을 때 사용할 카드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의 소련 핵미사일과 터키의 미국 핵미사일을 동시에 철수하자는 공식적인 제안을 당시 UN 사무총장인 우 탄트가 발표하도록 요청할 계획이었다. 소련의 요구를 수용할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비밀거래를 위해 딘 러스크 국무장관의 오랜 친구인 앤드루 코디어 당시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국제관계학장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코디어 학장은 얼마 전까지 우 탄트의 수석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카드는 쓸 필요가 없었다. 흐루쇼프가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을 즉각 수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장의 카드는 대통령과 국무장관, 그리고 코디어 세 사람만 아는 비밀로 남게 되었다.
10월 28일, 도브리닌이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의 공식 전문을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전해주었다. 전문을 읽은 뒤 로버트 케네디는 “마침내 아이들을 보러 갈 수 있겠네. 집에 가는 길을 거의 잊어버렸어”라고 말하며 웃었다. 도브리닌은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 법무장관의 미소를 그때 처음 보았다고 기억한다. 그렇게 위기는 끝났다. 터키의 미사일 철수 약속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협상의 승자는 케네디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흐루쇼프도 체면을 잃지는 않았으나 공개할 수 없는 거래 내용 때문에 이후 정치국 위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케네디는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의회와 언론에서 터키의 미사일 철수 거래를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러나 소련이 언제 거래 내용을 밝힐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10월 27일, 케네디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도 터키 주재 미국 대사에게 터키 총리를 만나라고 지시했다. 터키 총리에게 “터키에 대한 미국의 안보 공약은 변함이 없으며, 다만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터키의 미사일 철수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다”라는 말을 전달해놓아야만 했다.
터키를 달래는 일은 또 하나의 협상이었다. 1959년 아이젠하워 정부와 핵미사일 배치를 합의한 이후 터키는 소련의 위협 속에서도 그것을 안보의 징표로 삼아왔다. 미국은 두 가지 측면에서 터키를 설득했다. 첫째는 터키에 배치된 핵미사일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성능이 개선되고 숫자가 많아지면서 중거리 미사일의 군사적 효능은 확실히 약화되었다. 둘째는 핵미사일을 다른 수단으로 대체한다는 약속이다. 미국은 동지중해에 핵잠수함을 배치하고, 터키가 바라는 전투기 F-104도 여러 대 제공할 뿐 아니라, 터키의 미군 기지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약속했다. 1963년 2월, 마침내 터키 총리가 미사일 철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곧바로 맥나마라 미국 국방장관이 중심이 되어 미사일 철수를 시작했고, 4월 말 완료했다. 이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마침내 끝났다.
쿠바 미사일 위기 상황에서 미소 양국은 수많은 실수와 오해, 그리고 그 결과물인 오판을 거듭했다. 오해는 상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상대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대체로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오해가 오판을 부르는 것이다. 소련의 흐루쇼프는 미국의 젊은 대통령을 얕보았고, 미국 역시 ‘정보 실패’를 거듭했다.
미소 양국은 오해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소통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양국은 이듬해인 1963년 6월 ‘핫라인’을 설치했다. 크렘린과 백악관 사이에 소통 수단을 마련한 것이다. 핫라인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해를 확인하고 상대의 오판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습했을 때(6일전쟁), 당시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은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총리에게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당시 6일 동안 20개의 메시지가 소련에 전달되었다.
협상을 할 때 신뢰는 중요하다. 이때 신뢰는 조건이 아니라 협상의 결과다. 케네디는 흐루쇼프의 거짓말에 분노했다. 쿠바에 건설 중이던 핵미사일 기지를 미국이 알아내기 전까지 흐루쇼프는 쿠바에 방어용 무기만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대가 자신을 속였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 상대방의 어떤 말도 믿지 않으려 한다. 케네디가 보여준 놀라운 점은 분노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신중하게 사태를 파악해 합리적으로 대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도 케네디는 언제나 상대를 합리적 행위자로 간주했다. 자신이 선제공격을 고려하면 상대도 똑같이 그 방법을 택할 것이고, 결국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핵전쟁의 문턱을 넘어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협상은 전쟁만큼이나 어렵다. 자칫하면 정치적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또 극도의 불신관계에서는 상대의 약속을 믿기도 어렵다. 그러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 케네디 대통령의 말처럼 “두려움 때문에 협상을 시작할 필요는 없지만, 협상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나는 죽음의 신,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의 사막 위로 버섯구름이 피어오를 때,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비슈누 신의 말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부터 그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 불렸다. 그는 자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의 의미를 잘 알았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즉 ‘트리니티Trinity’라는 이름의 핵실험 이후 인류는 핵무기 시대로 접어들었다.
●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오펜하이머의 전기 제목에서 유래했다. 그들이 오펜하이머를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라고 부른 이유는 이중적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지만, 제우스의 분노를 사서 코카서스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받았다. 전기에서도 오펜하이머가 맨해튼 프로젝트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전반부와 양심의 가책을 겪는 후반부를 균형 있게 다루었다. 오펜하이머는 핵폭탄이 터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접한 뒤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핵 확산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공산주의자’로 몰려 비미(非美)활동특별조사위원회(일명 매카시 위원회)에 불려나가 수모를 겪었다.
실험 3주 뒤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되었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터졌을 때 7만여 명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가사키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히로시마에서만 그 뒤 5년 동안 낙진과 방사능 피해로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다.
오펜하이머는 괴로워했다. 1945년 10월 25일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는 “각하,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인류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 다가올 파국을 막기 위해 핵무기를 통제할 국제기관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1946년에 미국 국무차관 딘 애치슨과 원자력위원회의 데이비드 릴리엔탈이 공동으로 작성한 <원자력의 국제 통제에 관한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오펜하이머도 ‘애치슨-릴리엔탈 보고서’로 알려진 이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보고서에서 “핵전쟁을 예방하려면 국제적인 차원에서 경찰의 역할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면서, “국제적인 ‘원자력 관리 관청’을 만들어 모든 우라늄 광산, 원자력발전소, 연구소를 통제하자”라고 제안했다.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고뇌하는 과학자’들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만이 ‘가공할 만한 새로운 무기’를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UN은 원자력위원회를 만들어 ‘핵무기 통제’ 방안을 찾아보기로 했지만 합의는 쉽지 않았다. 미국 대표 버나드 바루치는 “모든 핵물질과 관련 시설을 국제적으로 통제하자. 통제를 위반한 국가를 처벌하기 위해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을 적용하지 말자”라고 제안했다. 언뜻 보기에는 과격한 주장인 듯하지만, 바루치는 “미국은 국제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라는 단서를 붙여 미국만 예외로 두려 했다. 1946년 6월, 당시 미국은 핵무기 9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소련은 즉각 거부했다.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사 결정 방식은 만장일치제로, 5개 상임이사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런데 핵 문제와 관련해 거부권 행사에 제한을 두자는 미국의 제안을 소련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UN의 소련 대사 그로미코는 “소련 정부는 소련 경제의 일부를 외국인의 통제 아래 둘 수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이 먼저 핵무기를 폐기하라”고 촉구했다. 소련은 1949년 8월 핵실험에 성공했다. 결국 UN 원자력위원회는 1952년 아무런 성과 없이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영국(1952), 프랑스(1960), 중국(1964)도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국제사회는 핵무기 확산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다만, 강대국들이 핵무장을 하면서 ‘비핵화’가 아니라 ‘비확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핵무기를 보유한 5개 강대국을 인정하고, 더 이상 핵무기가 확산되지 않도록 국제기구를 만들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자는 발상이다. 국제사회는 1957년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설립하고, 1968년 핵비확산조약NPT을 채택했다. 비확산을 둘러싸고 핵보유국과 비보유국 사이의 갈등도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67년 라틴아메리카의 비핵지대조약인 ‘틀라텔롤코조약Tlatelolco treaty’이 맺어졌다. 틀라텔롤코는 멕시코 외무부가 있는 도시 이름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예비회담이 열렸고 협정 서명이 시작되었으며, 현재에도 조약 이행을 위한 사무국이 있다. 최초로 이루어진 인간 거주 지역의 ‘핵 없는 세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비핵지대Nuclear [Weapon] Free Zones, NWFZ’라는 개념은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DMZ’에서 빌려온 것으로, 핵무기의 배치, 생산, 사용 등이 금지된 지역을 의미한다. 1956년 소련이 중부 유럽의 비핵지대화를 처음으로 제안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가 중부 유럽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의도였다. 그 뒤 1957년 10월, 폴란드의 아담 라파츠키 외무장관이 UN 총회에서 중부 유럽 비핵지대 구상을 다시 제안했다. ‘라파츠키 플랜’으로 불리는 이 제안의 핵심은 “동독과 서독이 핵무기의 생산과 보유를 금지한다면, 폴란드도 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폴란드 정부는 서독의 핵무장을 두려워하면서 만일 그렇게 된다면 소련이 폴란드 영토에 핵무기를 배치할 것으로 보았다.
미국과 영국은 중부 유럽의 비핵지대 구상을 반대했다.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현존하는 상태에서, 서유럽의 군사력만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던 서독 역시 동서독이 함께 다자협정에 서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처럼 1950년대 냉전의 절정기에 유럽에서 비핵지대가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196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핵실험을 하자, 다음 해에 14개 아프리카 국가들이 UN 총회에서 ‘아프리카 비핵지대’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19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핵비확산조약에 가입해 핵무기를 스스로 폐기할 때까지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1963년에는 핀란드 대통령이 북유럽 비핵지대 설치를 제안했다. 덴마크, 핀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지역 협력에 대해 공감했지만 핵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는 비핵지대에 소극적이었지만, 회원국이 아닌 핀란드와 스웨덴은 비핵지대화를 찬성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국 영토에 핵무기를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비핵지대 주장은 1958년 코스타리카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핵개발 움직임을 우려하던 미국은 코스타리카의 제안을 적극 환영했다. 그 뒤 UN 외교무대에서 몇 번의 제안이 더 있었고, 결정적으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전환의 계기였다. 다행히도 핵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배를 다시 소련으로 돌리긴 했지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핵전쟁의 가능성을 실감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직후 브라질이 UN 총회에서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 결의안을 다시 제안했다. 이에 멕시코가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아예 주도자로 나섰다.
멕시코는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어느 국가보다도 큰 충격을 받았다. 쿠바와 이웃 국가인 멕시코는 쿠바혁명 이후에도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에서 쿠바가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멕시코는 쿠바의 핵무장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쿠바를 둘러싸고 미소 간에 핵전쟁이 일어나면 직접적인 타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멕시코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소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장을 할지, 아니면 캐나다처럼 미국의 핵우산 아래로 들어갈지를 결정해야 했다. 핵보유국의 핵우산 아래에 들어간다는 것은 핵 공격을 받았을 때 핵보유국이 대신 보복해준다는 의미다. 캐나다는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미국의 핵우산에 포함되었다. 하지만 멕시코는 처지가 달랐다.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들어가면 안보정책을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가 양자택일이라는 ‘악마의 선물’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비핵지대였다. 핵무기 경쟁에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벗어나서, 라틴아메리카를 비핵지대로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이었다. 멕시코는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미국과도 소통이 원활한 편이었기에 이 일을 추진하는 데 적격이었다.
1962년 10월 29일, 흐루쇼프가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다음 날, 브라질이 먼저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 결의안을 제출했다. 11월에 다시 내용을 보완하고 볼리비아, 에콰도르, 칠레가 공동 제안자로 참여해 결의안을 제출했다. 당시 멕시코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너무 서둘러서는 안 되고, UN 총회의 결의안에서 한발 더 나아간 국가 간 협정 체결 방식으로, 가능하면 라틴아메리카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멕시코의 판단이었다.
1963년 4월, 멕시코는 브라질ㆍ칠레ㆍ에콰도르ㆍ볼리비아 대통령을 초청해서 비핵지대를 위한 5개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멕시코가 제시한 내용은 훨씬 구체적이었고, 브라질을 비롯한 참여국들은 즉각 환영했다. 멕시코는 곧바로 미국과 협의를 시작했다. 미국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결과 그해 11월 27일에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를 권고하는 UN 총회 결의안 제1911호가 채택되었다. 91개국이 찬성했고 반대표는 없었으며,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기권했다.
멕시코는 국제적 지지를 등에 업고 1964년 11월에 17개국을 초청하여,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화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멕시코 외무차관이었던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유연하고, 헌신적이며, 성실한 자세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협상을 시작한 1964년은 격변기였다. 소련에서는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이 실각했고,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중국은 그해 10월 핵실험에 성공했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노력은 어두운 국제 정세 속에서 더욱 빛났다.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적극적인 협력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라틴아메리카의 미래에 대해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생각은 달랐지만, 양쪽 모두 비핵지대의 필요성에는 공감했다. 미국은 이 지역의 비핵지대화가 국제적인 비확산 노력에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의 핵 패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핵지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967년까지 네 차례의 회담이 열리는 동안 어려운 고비도 많았다. 우선적인 과제는 쿠바의 참여 문제였다. 준비위원회의 로블레스 위원장은 쿠바의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에게 편지로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쿠바섬의 일부인 관타나모에 미국이 해군기지를 유지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쿠바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비핵지대조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쟁점은 ‘검증’ 문제였다. 약속 이행을 어떻게 확인하는가는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히 각국의 선의에 맡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초안을 작성하면서 ‘사회적 검증’이라는 개념이 제기되기도 했다. 각 국가에서 국민이 직접 검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정부가 자신의 시민에게 스파이 노릇을 허용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결국 검증은 각 나라가 국제원자력기구와 안전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다자협상은 양자협상보다 훨씬 어렵다.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조정 과정도 복잡하다. 준비위원회에서도 편이 갈렸다. 한쪽은 멕시코가 주도했다. 이쪽에서는 집단적 규범을 강조하고, 실용적 접근을 중시했다. 다른 쪽에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있었다. 브라질은 처음에 비핵지대조약에 적극적이었지만, 1964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입장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1966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양국의 군사정부는 멕시코가 주도하는 협상에서 공동전선을 펴면서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양국은 집단적 규범이 아니라, 각국의 재량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3차 실무회담에서 브라질은 엄격한 전제 조건을 제시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중국을 포함한 모든 핵보유국, 그리고 영토적 이해관계에 있는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 모든 국가가 조약을 비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브라질의 주장대로 하면, 이 조약은 체결이 불가능했다. 이미 쿠바가 불참을 통고했고, 중국의 참여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핵무기를 실은 항공기나 배의 통과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파나마운하 통과를 문제 삼은 것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통과 조항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핵미사일을 장착한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이 파나마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남아메리카를 돌아가야 한다면, 전략의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부담이 컸다. 또한 핵무기를 싣고 간다고 의심되는 선박을 강제로 세워 소유자의 동의 없이 검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준비위원장 로블레스가 중재에 나서서 ‘파나마운하 통과 문제’는 각국의 재량권에 맡기는 것으로 절충했다.
협상 막바지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평화적 핵폭발Peaceful Nuclear Explosions’을 허용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을 들고나왔다. 이 주장은 원래 1953년 UN 총회에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 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미국의 주장은 사회주의권을 제외하고 원자력의 평화적 혜택을 나누어 갖자는 것이었다. 미국의 원자력위원회는 이를 ‘보습 프로젝트Project Plowshare’라고 불렀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평화적 핵폭발이라는 개념을 직접 창안한 사람은 맨해튼 프로젝트의 ‘문제적 인물’인 에드워드 텔러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두 패로 나뉘었다. 오펜하이머처럼 ‘양심적이고 고뇌하는 과학자’도 있었지만, 텔러처럼 더욱 강력한 무기 개발에 나선 과학자도 있었다. ‘수소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텔러는 원자폭탄 폭발에 사용된 방사선을 이용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뒤,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부정적 여론을 피해가기 위해 평화적 핵폭발이란 개념을 만들어냈다.
텔러는 방사능 낙진이 없고 비용이 적게 드는 매우 경제적인 수단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평화적 핵폭발을 ‘깨끗한 핵폭발’이라고 불렀다. 미국은 1958년 평화적 핵폭발과 관련된 연구를 시작해 1977년 마칠 때까지 총 7억 7,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그사이에 27번의 핵폭발이 이루어졌다. 알래스카에 항구를 건설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산맥을 가로질러 고속도로를 만들기 위해, 파나마운하를 확장하기 위해 핵폭발을 이용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핵폭발로 인한 낙진 피해가 발생하고,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불거지면서 강력한 반대 여론이 일었다. 미국은 자국 내에서 평화적 핵폭발을 중단하면서 곧이어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조약의 평화적 핵폭발에 관한 조항을 허용할 수 없다는 영국과 소련의 입장에 합류했다. 군사적 목적과 평화적 목적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브라질 군사정권은 원자력을 저발전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아마존 정글지대를 개발하기 위해 평화적 핵폭발을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운하를 파고, 강을 연결시키고, 유전과 가스를 개발하는 데 평화적 핵폭발을 활용하려고 했다. 아르헨티나도 브라질 편을 들었다.
로블레스가 다시 협상의 기술을 발휘해 평화적 핵폭발을 허용하는 조항을 두되, 전제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해 각국마다 접근을 달리할 수 있도록 했다. 멕시코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평화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평화적 핵폭발을 금지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평화적인 용도라면 가능한 것으로 해석했다. 1990년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모든 핵실험 금지에 동의할 때까지 해석의 차이는 계속되었다.
이처럼 조약 체결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참여 문제였다. 너무 구체적인 합의를 요구하면 양국은 떨어져나갈 것이고, 그러면 지역 대표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될 터였다. 멕시코는 두 국가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조약 발효 시점을 신축성 있게 운용하자고 제안했다. 조건부 유보, 즉 웨이버 조항Waiver Clause●을 두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또한 조약 체결 뒤에라도 양국의 주장이 반영될 수 있도록 회원국 가운데 3분의 2의 지지로 기존 조약 내용을 개정할 수 있는 조항도 두었다.
● 웨이버는 의무 면제를 의미한다. 국내 법률에서는 예외 조항을 두어서 법을 신축성 있게 적용하고, 국제 조약에서는 일부 조항의 의무를 면제해 다수 국가의 합의를 유도하기 위해 활용된다. 예를 들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서 ‘쌀시장 개방’의 유예는 대표적인 웨이버 조항이다. 일반적으로 의무 면제에 관한 조항은 조건이 달려 있고, 법률로 정해진 동의 절차 과정을 거쳐 결정한다.
1967년 아르헨티나는 조약에 서명은 했으나 비준은 유보했다. 브라질과 칠레는 조건부로 비준했다. 즉 지역 내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를 비롯해 영토적 이해관계에 있는 지역 바깥의 국가와 핵보유국이 모두 비준할 때까지 효력을 유보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1967년 ‘틀라텔롤코조약’은 출발했다.
조약은 서문, 본문, 그리고 두 개의 부속의정서로 구성되었다. ‘부속의정서 I’은 라틴아메리카에 영토적 이해가 있는 국가들의 의무에 관한 것이고, ‘부속의정서 II’는 핵보유국들이 이 지역 국가들에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라틴아메리카에 속령을 갖고 있던 국가와 핵보유 국가는 모두 조약에 참여했다.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조약 체결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조약 비준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양국은 조약 체결을 연기해 시간을 벌고자 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핵개발에 나선 이유는 에너지 문제였다. 1950년대 라틴아메리카는 경제 발전의 시대였다. 당시 브라질의 수도였던 리우데자네이루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산업화 지역으로 변신했고, 그만큼 에너지 소비도 증가했다.
마침 미국은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을 강조하면서 제3세계에 기술 이전을 장려하고 있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이미 1950년 5월에 원자력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나치스 독일에서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를 초빙해 대규모 연구시설을 제공했다. 심지어 로널드 리히터라는 과학자가 1951년 3월에 소규모지만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가 연구 결과가 사기로 밝혀져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이후에도 아르헨티나는 노력을 계속해 1960년대 중반에 이미 핵 재처리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발전된 핵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핵지대 제안에 반대했다. 아르헨티나는 ‘핵주기’ 완성을 목표로 했다. 즉 우라늄을 광산에서 채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각종 관련 시설과 장비를 갖추어 정련 과정을 거치고, 핵물질을 생산하는 두 가지 대표적인 방법인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의 재처리를 병행하고, 마지막으로 핵폐기물 처리까지 전 과정을 갖출 계획이었다.
브라질은 1960년대에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1960년대 ‘브라질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급속한 경제성장은 우호적인 국제환경과 저렴한 에너지 공급 덕분에 가능했다. 브라질은 원래 수력발전이 풍부했다. 당시 파라나강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12,000MW급 수력발전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1973년 세계적인 석유 위기(제1차 오일쇼크)를 겪으며 좀 더 안정적인 원자력발전이 필요했다.
브라질의 핵개발 프로그램은 군사정권이 ‘수입 대체 산업화’의 길을 선택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국제무역을 중시하는 ‘수출 지향 산업화’가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하던 기술과 장비를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는 국제사회와 거리를 둔 브라질 자립 선언이었다. 특히 브라질의 군사정권은 원자력을 ‘자립 경제’의 수단으로 생각했다.
브라질 군사정권은 육ㆍ해ㆍ공군으로 나누어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공군은 레이저 농축을 연구했고, 육군은 흑연 원자로를 건설하고, 해군은 원심 분리기를 통해 우라늄 농축을 시도했다. 해군은 특히 우라늄 농축을 통해 핵 추진 잠수함을 개발하고자 했다. 해군의 프로젝트 담당자는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핵공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군인이었다.
브라질의 핵개발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강력하게 대응했다. 브라질은 핵무기 생산 의심 국가 명단에 올랐고, 미국은 고성능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 장비의 브라질 수출을 막았다. 그 바람에 브라질의 석유회사, 우주 연구소, 대학 연구소의 장비 구입이 한꺼번에 중단되었다. 미국 상무부는 브라질의 몇몇 기업이 미국 회사에서 구매한 장비들을 수출 금지 품목으로 분류해 통관을 막았다. 게다가 미국은 브라질에 대한 국제금융기구의 차관도 중단시켰다. 이로 인해 미국과 브라질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덩치가 큰 인접 국가로, 19세기에 독립한 이후로 서로 영토 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 뒤 양국은 경쟁관계였지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양국은 각자 핵개발을 추진해오다 1970년대 후반부터 공동대응을 모색했다. 핵 문제에 대해 양국이 신뢰를 구축해간 과정은 한마디로 공동의 적에 맞서다 정이 든 경우라 할 수 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기술을 도입해 원자력발전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1974년에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미국은 원자력 기술 이전 정책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