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근田好根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맹 유학과 조선 성리학을 전공했고, 16세기 조선 성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은사이신 안병주 선생과 함께 『역주 장자』를 펴냈다. 아내와 더불어 『공자 지하철을 타다』를 쓰고, 아이들을 위해 『열네 살에 읽는 사기열전』을 썼다. 또 『대학 강의』, 『장자 강의』, 『맹수레 맹자』, 『번역된 철학, 착종된 근대』(공저), 『강좌한국철학』(공저),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공저), 『동양철학산책』(공저), 『동서양고전의 이해』(공저), 『유학, 시대와 통하다』(공저), 『철학자가 사랑한 그림』(공저) 등을 펴냈다.
주로 동아시아의 고전을 해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만큼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읽을 책의 글자수를 세는 버릇도 그래서 생긴 벽(癖). 불멸의 고전인 유가의 십삼경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아 있고, 문자의 기원을 찾는 일은 덤으로 즐기는 여유다. 미래를 기약하면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마천과 정약용의 수법을 좋아한다.
일러두기
∷ 이 책의 양장본 초판은 2015년 10월 5일에 발행되었다.
∷ 철학자들의 한문 저술 번역은 저자가 직접 한 것이며, 해당 번역문의 원문은 본문 맨 뒤에 실었다.
∷ 번역 인용문과 해당 원문은 번역문 끝과 원문 앞에 같은 번호(❶, ❷, ❸순)를 표시해서 확인할 수 있게 했고, 한 원문이 여러 차례 인용될 때는 ❶-1, ❶-2, ❶-3식으로 표시했다.
∷ 시 원문은 번역문 바로 아래에 두어, 번역문과 원문을 함께 음미할 수 있게 했다.
∷ 『조선왕조실록』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 누리집 번역문이며 원문은 따로 싣지 않았다.
∷ 서명은 겹낫표(『 』), 편명과 개별 작품은 홑낫표(「 」), 그림은 홑꺾쇠(〈 〉)로 표시했다.
타자화된 사유를 삶의 문법으로
한국에서 철학을 하는 일은 어렵다. 아니 그 어느 곳에서도 철학을 하는 일은 어렵다. 철학은 대답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탄생한 이래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앞에 놓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머리를 싸매 왔고, 각자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이 대답 없는 물음이란 목적지 없는 여정과 같아서 어딘가 종착점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그 지루한 여정을 견디는 일은 철학하는 자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더욱 고통스럽다.
한국 철학에서도 조선 성리학을 전공한 내가 이황과 이이의 글을 앞에 놓고 머리를 싸맸던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성리학에 대한 지성계 일반의 평가는 한마디로 가혹했다. 이를테면 당대를 풍미했던 마르크시즘의 유물사관에 따라 봉건적 관념론으로 폄하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주화의 열기가 가득했던 시대에 성리학은 그저 체제수호를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 적대시되는가 하면, 실용을 추구하는 풍토 아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공리공담의 학문으로 매도되더니, 급기야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철학은 돌아볼 가치도 없는 그야말로 쓰잘 데 없는 물건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에 성리학을 비롯한 한국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입밖에 꺼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고, 아예 한국 철학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것조차 힘겨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은 서구 학계의 경우 더욱 심했다. 그토록 장구한 세월 지속된 문명을, 그토록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던 문명을, 그토록 드넓은 지역에 힘을 발휘했던 문명을, 불과 몇 가지 근거를 토대로 그토록 허망한 사회·역사적 결론을 내놓았던 막스 베버 같은 독일의 사회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영미권 학자들 대부분은 동아시아의 사유를 사상이나 철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동아시아의 철학은 철학이 아니라 화석화된 유물 정도로 비쳤다. 마치 옛날 알 수 없는 어느 곳에서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신기한 인간이 있었던 것처럼 동아시아인들을 대했다. 그 때문에 동아시아의 사유를 대하면서 마치 자신들은 전혀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것처럼 너스레를 떨기도 하고, 색다른 견해라도 접하면 신기한 물건을 보듯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며 타자화해 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장자』에 나오는 소 잡는 백정의 신목(神目)에 따른 리드미컬한 칼놀림[奏刀]이나, 피아니스트의 손을 의식하지 않는 신들린 타건[keying]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대관절 유학의 수기(修己)나 독일어의 빌둥(Bildung), 영어의 컬티베이션(cultivation)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며, 하나가 곧 전체라는 화엄의 종지가 나사렛 예수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과 동일한 통찰의 결과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그들의 허망한 결론 앞에 말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간의 한국 지성계 아니었던가.
넘을 수 없을 듯이 보이는 이 같은 편견에도 나는 한국 철학이 아직 이 땅에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 일찍이 함석헌이 “물에서도 아니 녹았고, 불에도 아니 탔고, 칼로 찍어도 아니 끊어졌고, 망치로 때려서도 아니 바숴진 것이 우리 말 우리 생각”이라고 한 것처럼 우리의 사유는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아니 당신이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그 때문에 나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원효와 똑같이 통합의 논리를 제시하는 논객이 있고, 지눌의 깨달음에 도달한 고승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이 땅 어딘가에 이황처럼 말과 행실을 일치시키려 애쓰는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게 혹 당신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틀림없이 당신이다. 왜냐하면 이황의 글을 읽고 나면 당신이나 나나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으며, 조식의 상소문을 읽고 나면 당신이나 나나 그 경건함에 고개를 숙일 것이며, 박지원의 시를 읽으면 당신이나 나나 눈물지을 것이고, 정약용의 논(論)을 읽으면 당신이나 나나 무릎을 치며 탄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자로서 한국 철학사를 펴내는 일은 동아시아 고전을 연구하는 이가 『논어』를 주해하고 기독교 신학자가 성서를 주해하는 것만큼이나 학문적으로 뜻 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는 이런 학문적 의미 때문만이 아니다. 원효 이래 1300년에 걸친 한국 철학의 거장들이 추구하고 실천했던 삶의 문법이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던 바람이 이 책을 펴내는 데 더 큰 동기로 작용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사적 고찰을 통해 철학의 연대기를 충실하게 구성하는 일보다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철학자들의 사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과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밝힘으로써 오랫동안 우리 스스로에 의해 그리고 서구의 시선에 의해 일방적으로 타자화된 사유를 지금 살아 움직이는 삶의 문법으로 복원하는 데 마음을 기울였다. 또 한국 철학의 독자성을 드러내기보다 그 사유가 고립된 지역의 일시적 산물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장구한 사유를 이어 온 동아시아 전통 지식인들의 오래된 고민이 반영된 결과임을 밝히고자 했다.
물론 나의 얕은 지식으로 이런 소망의 만분의 일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 때문에 책을 내놓으면서 성취감보다는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특히 삼국 시대처럼 단간편묵(單簡片墨)에 지나지 않는 짧은 기술을 근거로 어떻게 그들의 삶과 사유를 진실에 가깝게 그려낼 수 있겠으며, 한 사람이 일생을 바쳐도 불가능할 만큼 긴 시간 축적된 깊은 사색의 결과물을 어찌 어리석은 자의 한때의 노력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이런 두려움에도 이 책을 세상에 내놓는 까닭은 이제는 한국 철학을 이야기할 때라고, 이제는 우리의 삶을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고 누군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쓴 지난 1년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경희대 교정을 유령처럼 거닐었다. 함께 걸으며 벗이 되어 준 사람이 있어 외롭지는 않았지만 글을 쓸 때는 홀로 외로웠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만난 철학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채워 주고 내 영혼의 일부가 되었다. 이 책은 그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2015년 가을, 고황산 기슭에서
전호근
한국 철학사 강의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로 만날 철학자는 삼국 시대 철학자, 그중에서도 신라의 불교 철학자 원효(元曉, 617~686)입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분이라면 왜 삼국 시대 이전의 철학, 그러니까 단군 신화나 삼국의 건국 신화부터 이야기하지 않는지 의아해 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 철학사 강의를 시작하면서 고조선의 철학이라든지 단군 신화의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다든지 또는 그 자체가 철학적 사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기원을 묻는 철학적 질문,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물음에서 비롯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철학적 물음에 부합합니다. 그렇지만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 철학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강의에서 신화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서양 철학 2600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입니다. 흔히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처음 한 말로 알려져 있죠. 그러나 그리스 역사를 조금 깊이 알고 있는 이들은 이 말이 본래 델포이 신전의 벽에 쓰인 글귀라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을 기술할 때 그 누구도 델포이 신전의 철학을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과 똑같은 문구라 하더라도 델포이 신전의 글귀는 신탁이기 때문입니다. 신탁은 신의 말을 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탁을 전하는 사람은 신의 명령, 그러니까 신의 권위에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지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델포이 신전 벽의 글귀는 철학적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참이냐 거짓이냐를 따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까요. 신탁은 인간 이성 너머에 있는 신의 명령이죠. 그 때문에 이 글귀가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전파되면서 비로소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양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탈레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해야겠지만 여기서는 신탁과 철학적 명제의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사례로 들었습니다.
이 강의에서 삼국 시대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전 신화에 등장하는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신화와 철학의 차이는 신탁과 철학적 명제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신화는 과학 이전의 미개한 사유방식이라거나 철학보다 낮은 수준의 사유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류가 전혀 다른 것들을 비교하면서 우열을 논하는 것은 과학적이지도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철학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화와 철학, 그리고 과학은 모두 인류문명의 산물입니다. 그 어느 것도 다른 것과 비교해서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신화의 역사가 철학보다 오래된 것은 분명하고, 근대 이전에는 철학과 과학이 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니 신화가 가장 오래된 사유 형태이고, 과학과 한 몸이었던 철학이 그다음이고, 근대과학은 그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와 철학의 역사, 과학의 역사는 출발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사와 한국 철학사의 출발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유불도가 조화를 이룬 삼국 시대
삼국 시대는 불교와 유학과 도교가 세 나라에 나름대로 뿌리를 내렸다는 점에서 삼교가 균형을 이룬 시대였습니다. 이는 그만큼 다양한 세계관이 공존했다는 것을 의미하죠. 그에 비해 고려 시대에는 불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만 존중되고 다른 종교는 거의 백안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려 말에 회헌(晦軒) 안향(安珦)이나 상당(上黨) 백이정(白頤正) 같은 유학자들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주자학을 도입할 때만 해도 유학은 설 자리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향이 「느낀 바 있어 짓다[有感]」라는 시에서 “향등 걸린 곳곳마다 부처한테 기도하고 집집마다 노래하며 귀신에게 기도하는데, 몇 칸 안 되는 공자의 사당에는 인적 없이 가을 풀만 무성하구나[香燈處處皆祈佛 絃管家家競祀神 唯有數間夫子廟 滿庭秋草寂無人]” 하면서 한탄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유교의 경전을 가르쳤습니다. 『논어』나 『맹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유교 경전을 습득하고 실행하겠다는 맹서를 새긴 신라 때의 비석)을 비롯하여 여러 금석문을 보면 오경[五經: 유가의 다섯 가지 핵심 경서인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예기(禮記)』·『춘추(春秋)』]에 해당하는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백제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제도가 있었어요.
그러나 고대에 한어(漢語)를 익힌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알기 위해서였죠. 예컨대 중국에 가서 출세를 도모하거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응대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를 소통의 수단으로 익혔을 뿐, 텍스트 자체의 내용을 깊이 있게 파고든 경우는 드뭅니다.
유학만 놓고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대에는 최치원 같은 유학자가 나와서 상당히 약진한 측면이 있는데, 고려 시대에는 그 장구한 역사와 문화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유학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는 불교의 시대로 국가의 모든 대소사가 불교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같은 승려가 화폐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한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식의 불교 국가는 불교 사원에 부(富)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국가 경제가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유독 고려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나라도 그랬습니다.
당나라 무종 때 강제로 환속시킨 승려의 수가 26만 명이라고 합니다. 환속 승려의 수와 실제 승려의 수를 합하면 대략 백성의 15퍼센트가 승려였다고 하죠. 당나라 문인 한유(韓愈)가 이를 격렬하게 비판했어요. 노동자, 농민 같은 생산자의 처지에서 보면 지식인이나 승려 계층은 밥벌이도 못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 폐단이 생기겠죠. 물론 생산자만 많아도 문제가 생깁니다. 상앙이나 한비자 같은 법가 사상가가 추구한 국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 쉽습니다. 오직 생산만 중시하고 인간다움이나 인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될까요? 불을 보듯 뻔합니다. 제아무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한들 그 부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쓰이지 않으면 나라가 불행한 상황에 빠질 겁니다. 이와 반대로, 놀고먹는 계층, 그게 승려든 다른 성직자든 일반 지식인이든 마찬가지인데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공부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겠죠. 따라서 균형이 중요합니다.
당나라의 경우 그런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고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성기에는 불법(佛法)이 국가를 운영하는 힘이 되었지만, 중·후반기 이후 외침(外侵)이 거듭되고 사원의 공재(空財)가 국가의 부를 넘볼 정도로 축적되고 폐단이 쌓이면서 왕조의 기틀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조선이죠.
조선은 고려와 정반대로 불교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조선은 권근, 정도전 같은 유학자들이 배불론(排佛論)을 강경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한유의 「논불골표(論佛骨表)」의 논리를 빌려 오기도 하고 정도전의 경우 스스로 『불씨잡변(佛氏雜辨)』 같은 논문을 써서 불교 비판 이론을 전개하는데 대체로 이론적 기반을 엄밀하게 갖추기도 전에 논점을 선취하는 형태로 불교를 배척합니다. 그 결과 불교는 커다란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승병이 활약하고, 불교가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된다는 점이 받아들여지면서 조선 사회에서도 불교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습니다. 물론 조선의 불교는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독자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존속합니다. 그러다 보니 철학으로서 불교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극단성은 어떤 사회가 단일한 가치를 추구할 때 나타나기 쉽습니다. 고려에서는 불교가 그랬고, 조선에서는 성리학이 그런 작용을 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그런 문제가 크지 않았습니다. 다양성 측면에서 보자면 통일신라기에 접어들면서 도교가 부진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불교와 유학과 도교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 조화를 이루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불교 철학자 원효입니다.
원효 다음에는 의상을 살펴볼 텐데, 한국 철학사에서 삼국 시대 부분은 당시의 중요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설총(薛聰)이나 강수(强首) 같은 유학자보다 승려를 더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철학사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양적 측면만 고려하면 안 되니 도교와 유학도 비슷한 비중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유학 쪽에는 설총과 최치원이 있습니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이죠[원효의 속성(俗姓)은 ‘설(薛)’, 이름은 ‘사(思)’]. 또 최치원은 삼국 시대 인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고도의 논리를 갖춘 유학자였습니다.
1장
원효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화쟁국사 원효
원효(元曉, 617~686)는 동아시아 불교사에 빛나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같은 명저를 남긴 불교 철학자입니다. 원효의 사상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화쟁(和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화쟁 사상이 통일신라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고들 평가하기에, 지금도 사회 통합이 필요할 때나 지식인의 책임을 논할 때 ‘화쟁’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생물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인 최재천도 통섭 이론을 설명하면서 원효를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통섭과 원효의 통섭이 같은 맥락인지는 살펴봐야겠지만 ‘통섭’이라는 말을 끌어낸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원효의 원(元)은 으뜸, 효(曉)는 새벽입니다. ‘첫새벽’이라는 말이죠. 왜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는 일연(一然, 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당대에 원효보다 유명했던 고승들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많은 고승들의 훌륭함이 전부 원효대사의 말을 통해 입증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원효가 여러 스님들이 자기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기억에 남는 이는 원효대사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추천, 비평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추천해 준 비평가가 오히려 훌륭한 겁니다. 일찍이 사마천이 “백이와 숙제는 비록 현인이었지만 공자를 통해 이름이 빛났고 안연은 홀로 뛰어났지만 공자 덕분에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공자의 위대함을 말해 주는 구절이죠. 훌륭한 사람에게는 그를 알아보는 또 다른 거인, 곧 천리마가 필요한데, 공자가 그런 천리마였죠.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 절대적 권위로 인정되었던 근대 이전 사회라면 공자나 원효 같은 사람이 천리마 역할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근대 사회는 절대적 권위가 인정되지 않으니 이런 천리마가 통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뛰어난 사람이 나오려면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천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첫째가 개인의 탁월성[individuality], 둘째가 해당 분야의 전문성[domain], 그리고 그 분야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field]이라고 했어요.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이 중에 앞의 두 가지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조건인 ‘필드’는 개인이 노력해서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개인이 있어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으면 조용히 살다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안목을 가진 사람이 그 가치를 알아보고 세상에 소개하고 높이 평가해야만 비로소 탁월한 개인이 세상과 만날 수 있어요.
원효는 누가 알아줄 것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만큼 그 파급력, 영향력이 엄청나게 컸던 사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원효는 한국 사상사 전체에서 한국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철학의 첫새벽으로 다루어야 할 인물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원효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효가 한 말이나 일화를 통해서 원효의 화쟁 사상을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어린 시절 일화나 E=mc2이라는 유명한 공식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원효의 이론은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늘 논쟁이 일어날 만큼 굉장히 어렵습니다. 다만, 원효의 영향력이 국제적이었다는 점은 여러 경로를 통해 입증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돈황사본(敦煌寫本)에도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필사본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이른바 돈황사본은 20세기 초반에 오럴 스타인(Aurel Stein)이라는 유대인 탐험가가 중국 돈황(둔황) 막고굴(莫高窟)에서 수도사를 속이고 영국으로 가져간 엄청난 문서 더미를 가리킵니다. 그 문헌 중에서 『장자(莊子)』나 『도덕경(道德經)』의 오래된 판본도 발견되었고 당나라 때 문헌, 10세기 이전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대승기신론소』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10세기 이전에 당나라 돈황 지역에서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필사본이 읽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2015년 1월에는 독일에서 『대승기신론소』의 중국 투르판 필사본 단간(斷簡)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투르판 필사본은 돈황본보다 좀 앞섭니다. 그리고 1500년대 이후이긴 하지만, 일본에서도 원효의 저술이 상당히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지금 국내에서 어떤 저술이 화제를 모으며 잘 팔린다 해도 일본이나 미국, 영국에서 출간될 수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구미에서 인기를 누리는 저자들의 책은 엄청나게 많이 번역되어 나옵니다. 지식의 위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원효의 저술은 지금보다 국력이 약하고 학술 교류가 더 부진했던 전통 시대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어요. 그러니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쟁, 온갖 쟁론을 화해시키는 논리
제가 이 장의 제목을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라고 붙였는데 이 말은 화쟁의 논리를 사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화쟁 사상은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그 양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이 『대승기신론소』에 등장합니다. 본래 불경을 주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한 글자 한 글자, 한 단어 한 단어를 풀이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효는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고 『대승기신론』이라는 불경을, 글 쓴 사람의 종지(宗旨)를 꿰뚫는 방식으로 해석해 나갑니다. (이후 당나라의 승려 법장이 다시 자기 견해를 가지고 『대승기신론』을 쓸 때에도 원효의 주해에 따라 자신의 견해를 정리했다고 합니다.)
‘화쟁(和諍)’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 ‘화(和)’는 화합, 통합의 논리입니다. ‘쟁(諍)’은 ‘말씀 언(言)’에 ‘다툴 쟁(爭)’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말로 다투는 것, 싸움입니다. 이렇게 보면 화쟁론은 온갖 쟁(諍)을 화해시키는 논리, 곧 쟁(諍)을 화(和)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가 하면 화쟁의 화(和)와 쟁(諍) 자체가 상반되는 뜻이죠. 그래서 화와 쟁 자체는 대립되지만 화와 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모두 진리를 찾기 위한 방편이라는 논리에 도달하는 것이 화쟁론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원효의 화쟁론은 이후 한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 잡습니다.
불교의 나라 고려에서는 대각국사 의천이 나왔습니다. 국사(國師)라는 호칭은 신라 시대에는 없었고 고려 시대에 처음 생겼는데, 나라의 스승, 나라의 스님이란 뜻입니다. 의천은 고려의 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동시에 13대 왕 선종과 15대 왕 숙종의 동생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스님으로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천이 선종에게 이야기해서 원효에게 화쟁국사라는 호칭을 내리도록 합니다. 여기서 고려의 스님들도 원효 사상의 핵심이 화쟁이라고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도 사회 분열이 심각해지면 원효의 화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여러 매체에서 원효의 화쟁을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화합’을 이루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화합이 어렵습니다. 서로 이익을 다투잖아요. 이익을 다투는 사람들 간에 어떻게 몫을 나누는 것이 합당한지, 그에 대한 합의는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나라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을 찾으려고 아침 일찍 나간 주인과 같다”로 시작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꾼을 모집해서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킵니다. 오후에 또 거리에 나가 보니 빈둥빈둥 노는 사람이 있어서 “당신은 왜 놀고 있소?” 하니까 아무도 일거리를 안 주어서 그렇다고 해요.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그럼 우리 포도밭에 와서 일해요” 하고서 데려와, 저녁나절에 일을 끝내게 합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일하기로 한 사람에게 1데나리온을 주고, 오후부터 일한 사람한테도 1데나리온을 줘요. 당연히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이 불만을 제기하겠죠. 왜 우리한테 1데나리온만 주냐고요. 포도원 주인이,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정했고, 나는 계약대로 당신에게 그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똑같이 1데나리온을 지불했다고 해서 당신이 항의하는 이유가 뭐냐, 이렇게 얘기해요. 이상하죠.
만약 세 시간짜리 강의에 처음부터 와 있던 학생도 출석을 인정하고 끝날 즈음에 온 학생도 출석을 인정한다면 불만이 생기겠죠? 그런데 그 불만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포도원 주인 이야기가 왜 성서에 들어가 있는지, 왜 하늘나라에서는 그런 식의 분배가 받아들여지는지를 생각해 봐야겠죠. 왜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이 분배를 하는가 하는 비교를 넘어서야 비로소 화합이 됩니다. 타인의 처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그저 내가 더 많이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화합이 안 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 사회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있는데 정규직이 비정규직보다 일을 더해서 정규직입니까? 자동차 생산 라인만 봐도 숙련이고 비숙련이고 할 것 없이 똑같은 노동 시간, 똑같은 조건에서 일하는데 한쪽은 파견 근로자고 한쪽은 본사 직원입니다. 이들의 급여 차가 두 배가 넘습니다. 그게 정당합니까? 또 실업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있고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어요. 그럼 실업자는 게을러서 그런가? 자질이 떨어져서 그런가? 이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게으른 자에게는 돈을 줄 수 없다는 논리를 들이댄다면 설명이 안 됩니다. 그걸 뛰어넘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화쟁이 됩니다. 원효를 얘기하면서 거기까지 가지 않으면 가나 마나입니다. 아무것도 나눠 주지 않으면서 화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소용이 없어요. 요컨대 특정한 교설을 주장하지 않고 상반되는 주장을 잘 살피고 상대가 왜 불만을 제기하는지, 왜 저 사람에게 돈(급여)을 줘야 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차병직의 『상식의 힘』이라는 책을 보면 어떤 한국인이 헝가리에 갔다가 거기서 사회주의적 분배 방식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사과 장수 할머니가 사과를 팔고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과를 사 가는데 그 할머니가 하나는 좋은 것, 하나는 나쁜 것 이런 식으로 섞어서 팔아요. 한국 사람이 할머니에게 “돈을 더 줄 테니 좋은 것만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너한테는 안 팔아” 했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까요? 어리석어서? 왜 한국 사람은 모두 다 좋은 것만을 원할까요? 다 나름의 입장이 있죠. 할머니 얘기는, 먼저 온 사람이 좋은 것 다 가져가면 뒤에 온 사람은 뭘 가지고 가느냐는 거고, 한국 사람은 아침에 부지런히 일어났으니까 좋은 걸 가져갈 자격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죠. 그러니까 한국인은 잠을 편안하게 못 잡니다. 먼저 일어나서 좋은 사과를 차지해야 하니까 피곤하게 삽니다. 평생 죽어라 일만 하면서 사는 거예요. 늦게 오는 사람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죠. 정의로운 사회가 맞나요?
화쟁이란 것이 말은 하기 쉽지만 상반되는 주장을 살피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또 상대를 포용해야 됩니다. 그런데 포용이 힘들죠. 꼴도 보기 싫은데 어떻게 포용합니까? 그런데 포용하고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면 원효의 화쟁론은 의미가 없어요. 대립을 넘어서 상위의 가치를 지향하는 게 화쟁이니까요. 그래서 화쟁이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한국 불교는 화쟁을 지향하는지 의문이고 화쟁이 뭔지 아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국내파 지식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했던 것과 달리 원효는 신라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의상과 같이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죠. 저 유명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화입니다. 무덤 안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갈증이 심해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해골에 담긴 물인 걸 알고 구토를 했다고 하죠. 어젯밤에는 그렇게 다디달던 물이 어떻게? 여기서 확 깨달은 겁니다. 송나라 때 당나라 고승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헌인 『송고승전(宋高僧傳)』에 따르면, 원효는 두 번인가 도당 유학을 시도했지만 이 일이 있고 나서는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일화가 『송고승전』의 「원효전」에 나오지 않고 「의상전」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물론 흔히 알려진 해골 이야기와는 약간 다릅니다만 줄거리는 비슷합니다.
신라의 지식인 중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사람으로서 유학을 안 가서 성공한 사람이 원효이고, 가서 성공한 사람이 최치원입니다. 최치원은 열두 살 때 당나라로 떠났어요. 당나라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고 가면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던 때였죠. 어쨌거나 최치원은 유학을 해서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칩니다. 황제에게 인정받고 농민반란을 일으킨 황소(黃巢)에게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황소가 최치원의 격문(檄文)을 읽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놀라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문(文)의 힘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일화로 보면 됩니다. 최치원은 이 정도로 이름을 떨쳤지만 당나라는 그때 이미 쇠락해 가고 있었기에 신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신라 또한 이미 저물어 가는 나라였죠. 스케일에서 당대를 압도하는 면이 있는 그런 최치원을 품어 줄 나라가 없었던 겁니다.
서양에서는 칸트가 국내파고 볼테르가 유학파인데 둘 다 성공했습니다. 톨레랑스, 곧 관용론으로 세상을 흔들었던 볼테르는 영국에 자주 가서 거기서 보고 배워 옵니다. 반면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지금의 칼리닌그라드 밖으로 150킬로미터 이상 떠난 적이 없어요. 완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죠. 그런데 그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에 다시없는 이성의 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칸트는 인간 이성의 통찰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 줍니다. 칸트처럼 제대로만 생각하면 산속에 있든 세속에 있든 시장 통에 있든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칸트는 시간강사 하다가 46세에 교수가 되었고 57세가 될 때까지 1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순수이성비판』을 냈죠. 요즘 한국에서는 대학 교수가 일 년에 논문 3.5편 정도를 써야 합니다. 편당 석 달 정도 기다려 주는 셈인데 그 정도 고민해서 쓴 통찰의 결과물이 볼만할 리 있겠습니까? 칸트 같은 인물을 기대한다면 적어도 11년 동안 고민할 수 있게 해 줘야 합니다. 11년이라는 시간을 주면 아마 대다수가 놀겠지요. 하지만 그 노는 사람 중에 칸트가 한 명은 나오지 않을까요?
이야기가 멀리 갔는데 다시 신라로 돌아오면 해외파였던 의상에 이르러서 화엄 철학이 좀 더 기반을 다지게 됩니다. 원효는 깨달았으니 갈 필요가 없었고 의상은 못 깨달았으니 가는 게 옳았다고 해야겠죠.
원효의 가계와 탄생지
원효가 단순히 승려로만 기억되지 않는 것은 속세와의 인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원효의 전기인 「의해(義解)」 편, ‘원효불기(元曉不羈)’를 보겠습니다.
성사(聖師) 원효(元曉)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인데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내내말(談㮈乃末)이다.
애초에 압량군(押梁郡) 남쪽에 있는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❶-1
원효의 할아버지라고 말한 잉피공(仍皮公)은 신라의 귀족으로 여섯 촌장 중 한 사람입니다. 잉피공의 사당이 적대연(赤大淵) 옆에 있다고 했는데 적대연은 바로 이 글이 수록된 『삼국유사』의 작자 일연 스님이 살았던 거처로 유명합니다. 물론 고려 때 이야기죠. 경상북도 청도 운문산에 운문사가 있습니다. 운문사 안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이른바 금족지가 있어요. 그곳에 적대연이 있습니다. 아무튼 원효는 신라를 대표하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출생과 함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합니다.
원효의 특이한 사적(事跡)
‘사라수’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대사의 집이 본래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임신한 뒤 달이 다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자 창황한 가운데 집으로 갈 겨를이 없어서 우선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 두고 그 안에 누워 있었다. 그런 연유로 그 나무를 사라수라 한 것이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보통의 밤나무와는 달랐기에 지금까지 사라밤이라고 일컫는다”라고 했다.❶-2
인용한 부분을 보면 원효가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 사라수는 밤나무죠. 아버지의 옷[裟羅]을 밤나무에 걸쳐 두었다는 전설에서 사라수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여러 가지 맥락이 겹쳐 있습니다. 우선, 신주(神主)를 만들 때 밤나무를 사용합니다. 밤나무가 단단하다는 실용성이 첫 번째 이유겠지만 밤이 음(陰)을 상징하는 물건이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결혼식 폐백례를 올릴 때 아들딸 많이 낳으라고 신랑신부에게 대추와 밤을 던져 주죠. 대추는 아들을, 밤은 딸을 뜻합니다. 대추는 씨가 하나고 밤은 알이 두 개 이상 있으니, 대추는 양의 수이고 밤은 음의 수라고 보는 겁니다. 대추는 익으면 겉도 붉고 속도 붉지만 밤은 겉만 붉고 속은 하얗죠. 또 밤은 그냥 둬도 싹이 돋지만 대추는 반드시 땅에 심어야 싹이 돋습니다. 그러니까 원효의 탄생 설화는 이런 전래의 풍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를 읽어 보겠습니다.
예부터 전해 오기를, 옛날 어떤 주지 스님이 있었는데 절에서 일하는 종한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톨을 주었다. 종이 관에 가서 송사를 일으키자 관리가 이상하게 여겨 밤을 가져가 살펴보았더니 밤 한 톨이 발우 하나를 가득 채웠다. 마침내 도리어 한 톨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연유로 율곡이라는 지명이 생겼다.❶-3
사라사의 주지 스님과 기적의 밤 이야기입니다. 주지 스님이 절의 종한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톨을 주자 종이 관가에 가서 이를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 밤 한 톨이 주발 하나에 가득 찼다고 하니 엄청 컸던 겁니다. 성서에 오병이어(五餠二魚: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 남았다는 얘기가 있죠. 간혹 백 명, 천 명이 아니고 백부장, 천부장 같은 대표자가 먹은 것이라는 둥 합리적인 해석으로 기적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기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물 ‘위’를 걸어야 기적인 겁니다. 성서학자들이 이걸 두고 예수가 물가를 걸었는데 사람들이 착각해서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하는데, 그러면 기적이 아닙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 이야기도 신통력을 보여 준 예로 보면 됩니다. 말하자면 옛날부터 전해 오는 신통력을 가진 스님 이야기와 원효의 탄생이 결합된 이야기입니다. 계속 보겠습니다.
원효대사는 출가한 뒤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들고 절 이름을 초개(初開)라 하고, 밤나무 옆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대사의 행장(行狀)에 이르길,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조고(祖考)를 따른 것이다. 『당승전(唐僧傳)』에는 이르길, 본래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고 하였다.❶-4
출가한 뒤의 행적과 출신지를 간단히 기록한 부분입니다. 절 이름을 ‘처음으로 불법을 열다’라는 뜻인 ‘초개(初開)’로 한 것은 원효가 특정 인물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불법을 깨우쳐 새로운 문호를 열었다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태어날 때부터 특이한 자질로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다. 사방으로 돌아다닌 전말과 크게 불법을 퍼뜨린 성대한 자취는 『당전(唐傳)』과 행장에 갖추어져 있으니 여기서는 다 기재할 수 없고 다만 『향전(鄕傳)』에 기술된 한두 가지 특이한 사적만을 남겨둔다.❶-5
일정한 스승이 없었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불리한 진술입니다. 기존의 권위에 의존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문호를 열기 위한 조건으로는 꼭 맞습니다. 공자도 일정한 스승이 없었거든요. 원효가 실제로 기존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예는 많습니다.
대사는 일찍이 어느 날 정신 나간 척하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허락할까?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빚을까 하노라”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태종이 듣고서 말하길, “이 스님이 아마 귀부인을 얻어 현인을 낳겠다는 말인가 보다. 나라에 대현이 있으면 이로움이 그보다 더 클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요석궁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다. 관리에게 명령하여 원효를 찾아 인도하게 하였다.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막 그를 찾았는데 원효가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다가 만나게 되었다. 원효가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적셨다. 관리는 대사를 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볕에 말리게 하고, 이어 그곳에서 하룻밤 묵게 하였다. 공주가 과연 임신하여 설총을 낳았다.❶-6
아마 원효가 아닌 다른 스님이 이런 일을 했다면 파계 행위로 비난을 들었겠죠. 그리고 이런 행위가 파계인 것도 맞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일연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원효는 실계(失戒)하여 설총을 낳은 뒤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다. 그 모양을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일체 무애인(無㝵人: 모든 일에 장애가 없는 사람. 완전한 자유인)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구절을 따서 무애(無㝵)라고 이름 짓고, 이어서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가지고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면서 불법을 교화하고 읊조리며 돌아오니 가난하고 무지한 무리[桑樞瓮牖玃猴: 상추(桑樞)는 뽕나무 뿌리를 가져다가 문의 지도리로 만들 만큼 가난한 사람의 집을 뜻하고, 옹유(瓮牖)는 깨진 질그릇으로 창을 낸 사람을 뜻하며, 확후(玃猴)는 원숭이와 같은 삶을 산 사람, 곧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뜻함]까지 모두 부처의 명호를 알게 되고 모두가 나무(南無)의 호칭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가 참으로 컸다.❶-7
원효가 실계(失戒), 곧 계율을 어겼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계율이란 건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요? 일반적으로 계율의 준수는 성실한 수행을 뜻합니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계율이란 늘 일정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계율을 만든 자가 의도하는 것은 계율을 통해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계율은 때로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사마천은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궁형을 받고 살아났죠. 지금도 “그냥 죽을래, 궁형받고 살래?” 하면 궁형받고 살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궁형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돈을 많이 내면 가능했어요. 그런데 사마천은 돈이 없었죠. 왜 궁형을 받으면 살 수 있느냐? 후손을 낳을 수 없잖아요. 재산을 물려줄 수 없으니 속죄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궁형은 일종의 신체적 계율과 같은 효과를 발휘합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제왕의 측근에 있던 환관들은 거세를 당했습니다. 권력자의 측근에게 후손이 있으면 자신의 재물과 권력을 후손에게 물려주려고 할 테고 자연스레 권력자에 대한 충성도가 약해지겠죠. 거세는 후손에게 무언가를 빼돌릴 수 없게 하는 생물학적 계율의 강제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 사마천은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사기』의 콘텐츠를 더욱 풍부하게 구성할 수 있었지요.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사제의 결혼이 11세기부터 금지되기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제에게 자식이 있으면 자식한테 교회의 재산을 빼돌릴 수 있으니 금지한 겁니다.
원효는 의도적으로 계율을 깨뜨림으로써 스스로 기존의 권위에서 벗어납니다. 그 일이 오히려 불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죠.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후에 승복을 벗어 버립니다. 『삼국유사』 「원효전」의 제목이 ‘원효불기(元曉不羈)’인데, ‘불기(不羈)’는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법을 깨달았지만 불법에 구속되지 않았기에 파계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죠.
얼마 전 우리 사회에서도 승적을 반납하겠다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사실 엄청난 이야기인데요, 종단의 인정이 필요 없다는 겁니다. 부처의 깨달음을 얻는 데 종단의 인정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자격증이 소용없는 거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교단에서 주는 권위를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권위를 넘어서서 깨달음을 얻겠습니까?
그가 태어난 마을을 불지(佛地)라 했고 절은 초개(初開)라고 했다. 스스로 원효라고 일컬은 것은 아마도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初輝佛日]는 뜻일 것이다. 원효 또한 방언이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 지방의 말로 원효를 첫새벽[始旦]이라고 불렀다.❶-8
일연이 평가하는 원효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가 태어난 마을인 불지(佛地), 곧 ‘부처의 땅’이라는 이름이 말하듯 원효가 부처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초개(初開)’는 원효에게서 비로소 불법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원효라는 호칭 역시 신라 말로 첫새벽[始旦]이라는 뜻이니 결국 한국 불교는 원효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입적한 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는 뜻[終天之志]을 표시하였다. 설총이 소상(塑像: 진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 곁에서 예를 갖추었을 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像忽廻顧] 지금까지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至今猶顧矣]. 일찍이 원효가 머물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❶-9
원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설총이 예를 갖추자 소상이 돌아보았다’는 표현에서 원효의 지향이 홀로 피안으로 가는 데 있지 않고 당시 세상에 있었음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일연의 찬을 읽으면서 원효의 전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찬하여 말한다.
각승(角乘)이 처음으로 삼매경을 열었으니
박 들고 춤추며 온갖 거리 깨우쳤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 잠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본 자취만 쓸쓸하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羈)’❶-10
‘각승(角乘)’이란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인데, 여기서는 원효를 가리킵니다. 원래 찬의 말미에 ‘廻顧至’ 세 글자가 붙어 있는데 문의(文意)가 통하지 않는 구절입니다. 아무래도 찬의 바로 윗부분에 나오는 ‘像忽廻顧 至今猶顧矣’의 ‘廻顧至’ 세 글자가 말미에 잘못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앞의 네 구만으로 완전한 시가 되니 더 그렇게 보입니다. 아무튼 원효의 삶이 압축된 찬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원효의 깨달음과 대중 불교를 열어간 행적, 그리고 요석궁에서의 실계와 세속의 인연이 네 구 속에 전부 들어 있으니까요.
화쟁의 논리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 우리의 마음 또한 이와 같아서 불생멸심(不生滅心)이 움직일 때 생멸상(生滅相)을 떠나지 않으며 생멸하는 상(相)도 참된 마음이 아님이 없기 때문에 생멸상 또한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심생멸문(心生滅門)’❷
다시 화쟁의 논리로 돌아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대승기신론소』에서 원효는 화쟁의 논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다.” 파도도 물이고 바다도 물이죠. 둘이 다른 게 아닙니다. 우리는 물을 직접 볼 수 없고 파도를 보든가 고요한 바다를 보든가 푸른 바다를 보든가 하는 식으로 물의 여러 가지 응용 형태를 보는 것뿐입니다. 응용 형태가 다른 것을 가지고 각자가 자기 주장을 내세워서 싸우죠. 이것과 저것을 나누어 싸우고 옳고 그른 것을 나누어 싸우는데 그게 결국 한 가지라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는 두 가지 상반된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그것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걸 따로 독립적인 대상으로 보고 그걸 다시 사유합니다. 엄청나게 투철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파도와 고요한 바다는 둘이 아니라 한 가지라고 주장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견해로 보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 일심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진여[眞如: 범어로는 ‘타타타'(tathātā)’. 진실한 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라고 하면 깨달음인데 참된 모습,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반대로 무명[無明: 범어로는 ‘아비드야(Avidyā)’. 명지(明知)가 없는 상태]은 명이 없는 상태, 알지 못하는 상태, 무식한 상태입니다. 이 둘이 상반된 것 같지만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합니다. 불생멸심(不生滅心)과 생멸상(生滅相)을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생멸심은 진리이고 생멸상은 비진리라는 식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고, 그 둘이 서로 떠날 수 없으므로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일 뿐이라는 게 원효의 견해입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논어』 강의할 때 제가 자주 하는 말입니다만 성인 공자, 만세사표로서의 공자가 있는가 하면 도둑 공자, 기생충 공자, 멍청한 공자도 있어요. 별별 공자가 다 있습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우리가 사람을 보는 것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가 사실일지라도 전부 같은 데서 나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면서도 타협점을 모색하고 결국에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는 논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원효의 ‘화쟁론’입니다.
그럼 화쟁은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여기서 여러 용어가 등장합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에는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중관(中觀)과 유식(唯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상반된 견해가 수없이 많습니다. 원효의 이야기가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그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주요 불경을 거의 다 보고 그걸 근거로 제시하면서 주석을 붙여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 분야의 문헌을 충분히 읽은 뒤 나름의 통찰력을 가지고 주석을 하고 자기 견해를 내세우니까 통하는 겁니다. 일승, 삼승, 중관, 유식은 그중 몇 가지 예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승은 대승불교의 세 가지 가르침으로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뜻합니다. 성문은 부처의 소리를 듣고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것, 부처의 말씀을 듣고 피안의 세계로 타고 가는 것입니다. 연각은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부처의 소리를 듣지 않고요. 보살은 일체 인간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걸 말합니다. 성문승은 부처에 의존해서 보는 것이고, 연각승은 자기가 직접 깨닫는 것이며, 보살승은 대승, 전체가 다 타고 가는[乘] 건데 각각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흔히 소승(小乘)은 작은 배를 타고 혼자 피안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대승(大乘)은 큰 배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소승이 안 되는데 대승이 되겠습니까? 둘이 아니죠. 그러니 대승과 소승이 회통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중관이나 유식의 경우, 용수보살(龍樹菩薩)과 미륵보살(彌勒菩薩)이 각각 세운 것인데 서로 다른 견해입니다. 중관은 용수가 펼친 공(空) 사상으로 상대적 대립물 중에 어느 한 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중도(中道)라고도 부르죠. 용수의 사상을 따르는 학파를 중관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윤회와 열반은 같다고 봅니다. 유식은 미륵이 펼친 주장으로 현실의 제법(諸法)은 실유(實有)가 아니라 공(空)이라고 봅니다. 미륵의 유식설을 따르는 학파를 유식파라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와 서로 상반된 견해를 통합시키는 논리가 화쟁입니다.
화쟁의 방법으로는 개합(開合), 여탈(與奪), 입파(立破)가 있습니다.
먼저, 개합(開合)에서 ‘개(開)’는 여는 것, ‘합(合)’은 합치는 것, 곧 닫는 것입니다. 원효는 이 둘을 합쳐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개’는 하나의 불법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치는 것이고 ‘합’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진 불법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상반되는 것이 불법의 한 방편으로서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게 개합의 논리입니다.
여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與)’는 주는 것이고 ‘탈(奪)’은 빼앗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빼앗는 것이고 빼앗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논리죠.
입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입(立)’은 세우는 것이고 ‘파(破)’는 깨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논리를 자기가 깨는 것입니다.
선승들이 선문답을 할 때 서로 무엇을 가지고 소통하는지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개합·여탈·입파의 논리를 적용하면 명쾌하게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원효가 이야기하는 화쟁의 최종 종착지는 일심(一心)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환귀일심(還歸一心). 하나의 마음, 곧 일심으로 돌아가면 불국토가 되는 것이고 극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대승(다 같이 불법의 세계로 가는 것)이니 열반(혼자서 깨닫는 것)이니 하는 것도 모두 일심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승기신론소』에서는 환귀일심이 본각(本覺)이라고 강조합니다. 원초적 깨달음은 일심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이야기하며 만법귀일(萬法歸一)을 제시합니다. 만 가지 다른 법칙, 불법이 있지만 그걸 넘어서라고 합니다. 하나하나가 다 방편인데 그걸 회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만법귀일입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원효는 신라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전통을 수립했고 불교의 개조(開祖)가 되었습니다. 물론 최근의 발굴 자료를 통해 그 당시 『금강삼매경론』과 『대승기신론소』 같은 책 자체가 세계적인 불경 해설서로서 널리 유통되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장
의상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
화엄 철학의 정통을 잇다
원효와 함께 신라의 불교를 대표하는 의상(義湘, 625~702)의 화엄 철학을 살펴보겠습니다. 화엄(華嚴)에서 ‘화(華)’는 ‘꽃’을 말하므로 화엄은 ‘꽃으로 장식한 장엄한 불법’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불교는 전통적으로 화엄 철학이 강세입니다. 원효의 화쟁론도 화엄 철학에서 나왔고 화엄 철학의 근간이 되는 『화엄경』은 지금까지도 가장 권위 있는 불교 경전으로 통합니다. 화엄 철학이 신라 불교의 주류가 된 것은 원효가 처음으로 화엄을 전파한 것도 한 가지 이유이지만, 뒤이어 의상이 당시 당나라를 비롯해 국제적으로 유행하던 화엄 철학을 전파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효는 특이한 경우입니다. 유학을 가려고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스스로 깨달은 그 힘을 가지고 신라에 화엄을 전파합니다. 화엄을 전파하는 방법도 파격적인데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노랫말로 지어서 세상에 퍼뜨립니다. 어쨌든 원효의 불법이 그 당시 당나라의 스님들보다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나옵니다.
원효는 공자처럼 특정한 선생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공자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선한 사람도 나의 스승이고 악한 사람도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어요. 선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의 행동이 훌륭하구나 하고 따라 하고, 잘못된 행동을 보면 나는 저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면 선인이나 악인 가릴 것 없이 모두 스승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원효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침을 얻었고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고 설총을 낳습니다. 석가모니는 본래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생로병사의 문제에 충격을 받고 뛰쳐나가서 온갖 수행을 하다가 깨닫는데 원효는 깨달음을 얻고 나서 온갖 고행을 거칩니다. 설총이 원효의 소상에 참배를 하자 그 소상이 돌아보았다는 설화가 나온 것도 그만큼 원효의 불교가 대중성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신라 불교의 저변이 탄탄해진 것은 원효의 파격과 함께 의상의 정통적인 화엄 철학이 뒤를 이었던 덕분입니다. 원효와 의상은 모든 면에서 대비됩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원효는 국내파였고 의상은 유학파였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둘 다 화엄을 종지로 삼았습니다. 저술 면에서는 원효의 저작이 더 많이 남아 있고 의상의 것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만 내용은 상당히 비슷합니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불교의 가르침을 직접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서쪽은 이후 혜초(704~787)가 다녀왔던 천축국(天竺國), 곧 인도를 의미하지만 의상이 가보고자 했던 서쪽은 화엄 철학이 성행하던 중국을 뜻합니다. 원효보다 여덟 살이 어린 의상이 원효와 같은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두 사람이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의상은 29세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데 그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합니다.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중국 유학
『삼국유사』 「의상전」의 제목은 ‘의상전교(義湘傳敎)’입니다. 의상이 불교를 전했다는 뜻이죠.
법사(法師) 의상(義湘)은 아버지[考: 돌아가신 아버지를 뜻함]가 한신(韓信)으로 김(金)씨다. 나이 29세에 서울의 황복사(皇福寺)에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얼마 안 되어 서쪽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를 살펴보려 하였다.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떠나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변방의 순라에게 첩자로 의심을 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永徽) 초에 마침 서쪽으로 돌아가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서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양주(揚州)의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관아에 머물도록 청하고 극진히 대우했다.❶-1
의상이 원효와 함께 갔던 요동은 당시에는 고구려 땅이었습니다. 바닷길은 험하고 육로가 상대적으로 안전해서 그리로 갔겠죠. (훗날 최치원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는데 당시 뱃길은 무사히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는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동에서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받아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풀려납니다. 1차 입당(入唐) 시도는 실패한 거죠.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당나라 사신이 신라에 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 편이 있어 그를 따라 중국에 갑니다.
이 이야기에서 원효의 행적을 살펴보면 첫 번째 입당 시도 때는 첩자로 오인받았다고 했으니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성립이 안 됩니다. 그 후 의상은 두 번째 시도 끝에 배를 타고 떠납니다. 두 차례 입당 시도가 있었다는 내용은 『송고승전』에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해골 이야기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오면서 아무래도 각색이 많이 되었겠지요. 사실 어떤 건 구전이 더 정확합니다. 신라 때부터 구전되어 온 설화가 많은데 경주의 한 재야 학자가 구술을 토대로 신라의 승려들과 관계된 내용을 정리한 자료도 있습니다. 어쨌든 해골 이야기는 전승되어 온 거라고 봐야겠죠.
중국으로 간 의상은 양주(揚州)의 주장(州將)이었던 유지인의 초청에 응하여 관아에 머뭅니다. 당나라는 절도사의 시대입니다. 특히 중·후반기에는 전국적으로 번진(藩鎭: 당나라 때 군대를 거느리고 그 지방을 다스리던 변방의 관아) 세력이 발호하여 조정은 힘이 없었습니다. 번진의 세력이 워낙 강해서 거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승려의 수가 너무 많아서 국가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당 무종 때 환속시킨 승려 수만 26만 명이었다고 하니 환속하지 않은 승려까지 합하면 온 나라에 놀고먹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만 고려 말 통계를 보면 거의 5분의 1 정도 되는 인구가 스님이었어요.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수가 극히 적었다는 말인데, 그러면 나라 경제가 유지되기 힘들겠죠. 아무튼 당나라 때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가 성행했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스님이 되고 싶어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는 이야기니까요. 한 지역을 책임지던 절도사가 극진히 예우할 정도로 존중받는 직업군이었던 셈이죠. 의상이 중국에 갔을 때 주장에게 환대를 받은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입니다.
지엄과의 예견된 만남
당나라에 간 의상은 지엄(智儼) 선사를 만납니다. 지엄은 중국 화엄 철학의 2대조입니다. 중국 화엄 철학을 연 사람은 두순(杜順)이고, 그다음이 지엄, 그다음이 의상, 현수(賢首)로 이어집니다. 의상이 세 번째예요. 현수는 법장(法藏)의 호입니다. 현수는 의상보다 열두 살이 어린데 둘 다 지엄 밑에서 배웠습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현수가 나중에 의상을 ‘상인(上人)’이라고 불러요. 자기 윗사람이라는 거죠. 그러면서 자기가 지은 화엄의 해설서를 의상한테 보내 자문을 구합니다.
『삼국유사』 「의상전」에는 의상이 중국에 가서 지엄을 만나는 과정이 기술되어 있는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를 찾아가 지엄(智儼)을 만났다. 지엄이 전날 밤 꿈을 꾸었는데 한 그루 큰 나무가 해동(海東)에서 자라나 가지와 잎이 넓게 뻗어 중국[神州]까지 와서 덮었는데 그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었다. 올라가서 살펴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불교에서 말하는 보배로운 구슬. 용의 여의주) 한 개가 있는데 빛이 멀리까지 비쳤다. 그러다 깨어나 놀랍고 이상히 여겨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마침 이르렀다. 남다른 예를 갖추어 맞이하면서 조용히 말하길, “내가 어젯밤 꾼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조짐이었다”라고 하며 들어오기를 허락하였다.❶-2
지엄이 의상에게 “들어오기를 허락했다[許爲入室]”라고 나오는데, ‘입실(入室)’은 원래 ‘승당입실(升堂入室)’로 『논어』 「선진」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루는 공자 문하에 있던 제자 자로가 음악을 연주합니다. 자로는 용맹한 사람이니까 북쪽 변경의 살벌한 음악을 연주했다고 해요. 그런데 공자가 “내 집에서 어째서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느냐?” 하고 나무랍니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예악을 숭상하는 문화주의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문화라고 해도 무(武)를 앞세우는 칼춤 같은 걸 숭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자로를 이렇게 꾸짖고 난 후 다른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습니다. 자로는 공자보다 아홉 살 어리지만 다른 제자들은 수십 년 어립니다. 안연은 서른 살이 어렸고 증삼 같은 제자는 마흔여섯 살이나 어렸어요. 새카만 제자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자 공자가 “자로는 마루에는 올라왔고[升堂] 아직 방에는 들어오지 못했다[入室]”라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자로를 공경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합니다. 입실은 성인과 같은 방 안에서 마주 볼 정도로 대등한 경지에 올랐다는 얘기죠. 여기서 지엄이 입실을 허락했다는 것은 의상을 제자로 받아들였음을 뜻합니다.
지엄의 제자가 된 의상은 화엄 철학을 공부하고 신라로 돌아옵니다. 『송고승전』에는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화엄학을 다 배우고 포교하러 신라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나옵니다. 이 점을 보면 일연이 원효의 화쟁 철학과 의상의 화엄 철학을 어떠한 측면에서 이해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효도 의상도 신라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잘 부합했다고 본 것이죠.
환국하여 나라를 구하다
얼마 있다가 본국의 승상 김흠순(金欽純)과 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붙잡혀 구금되었고, 당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쪽을 공격하려 하였다. 흠순 등이 비밀리에 의상에게 사람을 보내 먼저 신라로 가도록 권유했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庚午)에 신라로 돌아와 조정에 사정을 알렸다. 신인대덕(神印大德)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임시로 밀단법(密壇法)을 설행하고(비밀리에 단을 설치하고 불법을 전파함) 기도하여 나라가 마침내 침략을 피할 수 있었다. 의봉(儀鳳) 원년에 의상이 태백산(太伯山)에 돌아와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고 대승(大乘)을 널리 펴니 영험함이 자못 드러났다.❶-3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불법으로 나라를 구하고 부석사를 창건합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가면 ‘뜬 바위’, 곧 부석이 있죠.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돌과 지면 사이에 실을 넣고 두 사람이 당기면서 반대편으로 지나가면 실이 돌 밑을 그대로 통과한다고 해서 부석(浮石: 공중에 떠 있는 돌)이라 했다고 나오는데 정확한 풀이는 아닌 듯합니다. 부석(浮石)은 ‘뜬 바위’라는 뜻이 아니고 ‘법력으로 돌을 띄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컨대 정조의 일기로 시작해 국가의 기록물이 된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부빙(浮氷)’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떠다니는 빙산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조선 시대 서울에서 빙산이 나올 리가 없지요. 이 말은 ‘얼음을 띄우다’는 뜻입니다. 강에서 얼음을 떠내 빙고에 간직하는 장빙(藏氷)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조정에 사정을 알렸다’는 뜻으로 쓴 ‘聞事於朝’에서 ‘문(聞)’은 ‘듣게 했다’는 뜻이므로 ‘듣는다’로 새기면 안 됩니다. 사역의 뜻인 ‘하게 하다’를 잘 새겨야 합니다. 보통 한문 번역의 큰 오류가 이런 데서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부석(浮石)의 ‘부(浮)’도 ‘뜨다’가 아니라 ‘띄우다’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현수가 의상에게 편지를 보내다
다음으로 경전과 관련된 내용을 보겠습니다. 의상과 동문수학한 현수가 바로 중국 화엄종의 3대 조사인 현수 법장입니다. 현수가 의상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편지를 보낸 경위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남산의 문인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현수가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로 화엄의 종지를 밝힌 화엄학 해설서]를 지어 의상이 머물고 있는 곳에 부본(副本)을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은근하고 간절한 뜻을 전했다.❶-4
현수가 『수현소』를 짓고 나서 의상에게 부본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고 하죠. 책을 완성하기도 전에 자신의 저술을 보여 준다는 건 각별한 신뢰를 표하는 겁니다. 보통은 잘 안 보여 줍니다. 표절당할 수 있으니까요.
옛날에도 표절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연년세세화상사(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歲歲年年人不同)’은 살인 사건을 부른 시구입니다. 이 시구는 당나라 초기의 시인 송지문(宋之問)이 지은 「유소사(有所思)」의 한 구절로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선비들이 고문 학습서로 가장 많이 읽었던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실려 있는 명시입니다. ‘연년세세화상사 세세년년인부동’이라는 연구(聯句)가 특히 유명한데 늙음의 비애를 슬퍼하는 뜻으로 인용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말로도 자주 회자됩니다. 시의 일부를 한 번 볼까요.
「유소사(有所思)」
낙양(洛陽) 성동(城東)의 도리화(桃李花)는
폴폴 날아 뉘 집으로 지는가.
낙양 젊은 아가씨들 예쁜 얼굴 뽐내며
흩날리는 꽃 보며 길게 한숨짓는구나.
금년에 꽃 질 때 얼굴색 바뀌니
내년 꽃 필 때면 누가 다시 있을까.
……
해마다 해마다 꽃은 같은데
해마다 해마다 사람은 같지 않네.
……
하루아침에 병에 누워 찾는 사람 없으니
짙은 봄날의 즐거움은 뉘 곁에 있는가.
아리따운 눈썹 얼마나 가랴.
잠깐 사이 머리 세고 어지러이 헝클어졌네.
예부터 춤추며 노래하던 곳 바라보니
황혼녘 새들만 슬피 울고 있구나.
洛陽城東桃李花 飛來飛去落誰家 洛陽女兒好顔色 坐見落花長歎息
今年花落顔色改 明年花開復誰在 ……
年年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
一朝臥病無相識 三春行樂在誰邊 宛轉蛾眉能幾時 須臾鶴髮亂如絲
但看古來歌舞地 惟有黃昏鳥雀悲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남자인 송지문이 어떻게 여인의 마음을 저리도 잘 헤아렸나 싶어서 감탄하곤 했습니다.
어쨌든 『당시유향(唐詩遺響)』[원나라 양사홍(楊士弘)이 찬한 당시 감상집]에는 이 시가 송지문의 작품이 아니라 유정지(劉廷芝)의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으로 나옵니다. 유정지는 송지문의 사위예요. 뭔가 이상하죠? 아니나 다를까, 『당재자전(唐才子傳)』[원나라 신문방(辛文房)이 찬한 당나라 명사들의 전기]에는 이 아름다운 시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가 전합니다.
어느 날 유정지가 이 시를 지어 놓고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았는데 장인인 송지문이 이 시구를 보고는 감탄하고서 자신에게 양보해 달라고 합니다. 유정지는 장인의 간절한 청이라 감히 거절은 못 했지만 그렇다고 양보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송지문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여 하인들을 시켜 유정지를 몰래 죽였다고 합니다. 물론 『당재자전』은 신뢰도가 그리 높지 않은 문헌이기에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고래로 표절 사건이 분분하지만 가까운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글을 표절한 이 이야기는 엽기적이긴 합니다. 그런데 제가 연대를 조사해 봤더니 안 맞더군요. 아무래도 지어낸 이야기인 듯합니다. 물론 문헌의 연대 기록이 잘못되었을 수 있으니 확실한 건 모릅니다.
어찌 보면 표절자는 뛰어난 글의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죠. 가끔 표절할 이유가 없는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 탐나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서 표절을 해 놓고 내가 그때 미쳤나 보다, 하는 경우가 있죠. 지금은 표절을 저작권 문제로 보지만 중요한 건 저작권이라기보다 명예입니다.
이제 현수의 편지 내용을 보겠습니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의 중 법장(法藏)이 해동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바칩니다. 함께 노닐다 헤어진 지 20여 년이 흘렀지만 우러러보는 정성이 어찌 잠깐이라도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마는 구름이 만 리에 자욱하고 바다와 육지가 천 겹인지라 이 한 몸 다시 뵐 수 없음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가슴에 품고 있는 그리움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전생에 함께 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같이 학업하였고, 이러한 보답을 얻어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특별히 돌아가신 스승님에게서 이 심오한 경전의 가르침을 전수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뒤 화엄의 뜻을 널리 펴고, 법계(法界)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선양하고,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날로 새롭게 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하시니 뛸 듯이 기쁨이 더합니다. 이로써 석가여래가 입멸하신 뒤에 불일(佛日)을 밝게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구르게 하여 불법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임을 알겠습니다.
법장은 매진하였으나 이룬 것이 없고, 활동하였으나 볼만한 것이 적어 우러러 이 경전을 생각하니 돌아가신 스승에게 부끄럽습니다. 분수에 따라 받은 것은 능히 버릴 수 없으므로 이 업에 의지하여 내세의 인연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다만, 화상(和尙)의 장소(章疏)가 뜻은 풍부하나 문장은 간략하여 후인으로 하여금 뜻을 알게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화상의 은밀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적어 의기(義記)를 애써 완성하였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서 고향에 돌아가 그 땅에 전하고자 하니, 청컨대 상인께서는 옳고 그른 것을 상세히 검토하여 가르쳐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마땅히 내세에는 이 몸을 버리고 새 몸을 받음에 서로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 앞에서 이와 같은 무진(無盡)한 묘법(妙法)을 받고 무량(無量)한 보현(普賢)의 원행(願行)을 수행한다면 나머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굴러 떨어질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인께서는 옛일을 잊지 마시고 어느 업의 세계에 계시든 바른길을 보여 주시고,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생사를 물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❶-5
의상이 교(敎)를 전하다
이제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서 활동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의상은 열 군데의 절을 창건합니다.
의상은 이에 열 곳의 절에 교를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原州)의 비마라사(毗摩羅), 가야산(伽倻)의 해인사(海印), 비슬산(毗瑟)의 옥천사(玉泉), 금정산(金井)의 범어사(梵魚), 남악(南嶽: 지리산)의 화엄사(華嚴) 등이다. 또한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 「화엄일승법계도」를 말함)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一乘: 대승불교 전체)의 핵심을 모두 포괄하였으니 천년을 두고 볼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고자 하였다. 나머지는 찬술한 것이 없으나, 한 점의 고기로 온 솥의 국물 맛을 알 수 있다. 「법계도」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에 이루어졌다. 이 해에 지엄도 입적하였으니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노나라 귀족들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았다는 대목에서 공자가 『춘추』를 끝낸 것을 말함)과 같다. 세상에 전하기를,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 석가모니의 별칭)의 화신[幻有: 『장자』에 나오는 말. 범어는 ‘아바타’]이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인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십 대덕은 영수(領首)가 되었는데, 모두 아성(亞聖)이라고 하고 각각 전기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鶻嵓寺)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 팔을 펴 부석사 방의 등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저술했는데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들었으므로 글이 오묘한 뜻을 많이 지녔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있으면서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하였다.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이 무리와 함께 탑을 돌았는데, 매번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고 무리도 층계에서 석 자나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 하였다. 나머지는 최후(崔侯: 최치원)가 지은 「본전(本傳)」과 같다.❶-6
『삼국유사』 「원효전」과 마찬가지로 「의상전」에도 마지막에 찬이 나옵니다. 일연이 게송을 지어 원효의 업적과 의상의 활약을 정리한 것입니다.
찬하여 말한다.
연진(烟塵: 연기와 먼지)을 무릅쓰고 덤불을 헤쳐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지엄선사가 있던 곳)의 문이 열려 상서로운 보배를 접했도다.
화엄[雜花]을 캐와서[釆釆: 『시경』에 나오는 말] 고국에 심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을 이루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의해(義解)」, ‘의상전교(義湘傳敎)’❶-7
여기서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을 이루었다”라는 것은 중국 화엄의 정수를 다 가져왔다는 의미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의상전교’ 말고도 의상이 어떤 도력을 지닌 사람인지 보여 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서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가 있던 곳에 도달했다. 이웃에 도선율사가 있었다. 도선율사는 늘 하늘로부터 주는(옥황상제가 주는) 공양을 받았다. 매양 재(齋: 불교의 의식)를 지낼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먹을 것을 보내 주었다. 어느 날 도선율사가 의상에게 재를 올려달라고 요청하였다. 의상이 와서 좌정한 지 한참 뒤 하늘의 공양이 때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의상은 마침내 빈 주발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에 하늘의 사신이 마침내 당도했다. 율사가 “오늘은 무슨 까닭으로 이리 늦었는가?” 하고 물으니, 하늘의 사신이 “온 동굴 가득히 신병(神兵)들이 막고 있어서 들어오지 못했소이다”(옥황상제가 보낸 사신이 신병에 가로막혀 못 들어왔다는 의미) 했다. 이에 율사가 신이 의상을 보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침내 그 도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㙮像)」,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❷
원효와 의상
이제 의상과 원효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송고승전』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원효와 의상이 토굴 속에서 잡니다. 토굴은 무덤이라고 봐야죠. 그다음 날은 집에서 잡니다. 그런데 토굴보다 집에서 잘 때 오히려 편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이상하죠. “어제는 토굴에서 편안하게 잠들었는데 오늘은 집 안에서 자는데도 귀신이 오락가락했다네. 아, 마음에서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토굴이나 무덤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법이 오직 앎이니 마음의 바깥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로 가지 않겠네.” 여기서 흔히 알려진 해골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만, 토굴을 무덤이라고 보면 맥락은 같습니다. 원효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중국에 가지 않지만 의상은 중국에 갑니다.
원효에게는 요석공주와의 로맨스가 전해지는데 의상에게는 선묘낭자와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상이 중국에 갔을 때 선묘낭자가 의상의 용모에 반해서 함께 살자고 청하지만 의상이 물리칩니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갈 때 선묘낭자가 바다에 몸을 던지죠. 그러고는 용이 되어 의상이 탄 배를 호위해 줍니다. 선묘낭자의 마음이 참 지극하죠.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려고 할 때 부석사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반대하면서 의상을 해치려 하자 선묘낭자의 화신인 신룡이 나타나 돌을 띄웠다 내렸다 세 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석사가 되었죠. 지금도 부석사 뒤편에 선묘각이 있는데 거기에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초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할 때도 두 사람은 상반된 모습을 보입니다. 의상은 이른바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짓고 14일 동안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합니다. 그 후 낙산사를 창건하여 의상대를 짓고 관음굴까지 조성했다고 하죠. 말하자면 정통적인 방식으로 불사(佛事)를 일으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서 낙산사를 창건한 겁니다. 원효가 멀리서 그 얘기를 듣고, 관음보살이 나타났으면 나도 가서 뵈어야겠네, 하고 낙산사에 갑니다. 가는 길에 원효는 관음보살을 두 번 만납니다. 들을 지나는데 농사짓는 아낙네가 벼를 베기에, “그 벼이삭 하나 주시오” 하니까, 그 아낙네가 “영글지 않아서 드릴 수 없네” 해요. 그러니까 원효가 “영글지 않은 걸 왜 베누?” 하고 갑니다. 가다가 빨래하는 아낙네가 있어서 “물 한 바가지 주시오” 하니까, 아낙네가 빨래하던 구정물을 줘요. 원효가 “이런 고약한 사람이 있나?” 하면서 그걸 안 받아 먹고 근처 시내에서 물을 마셨어요. 마시고 보니까 아낙네는 안 보이고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거기서 새가 “스님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합니다. 원효가 소나무 아래를 보니까 흰 신발 한 짝이 있어요. 그러고는 낙산사 관음굴에 가서 관음보살을 보려니까 그 앞에 나머지 신발 한 짝이 있더래요. 원효가 관음보살을 보지 않고 그냥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왜 관음굴에 와서 관음보살을 뵙지 않고 가느냐고 물으니까, “이미 두 번이나 봤어” 합니다. 그러고는 바다를 보니까 파도가 이는데, 파도 하나하나가 백의관음보살(흰옷 입은 관음보살)의 옷자락이었다는 거죠.
의상은 발원문을 쓰고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보고 원효는 농사짓는 아낙네, 빨래하는 아낙네에게서도 보고 아무 데서나 관음보살을 봅니다. 원효답게 보는 거죠. 반면 의상은 중국에 가서 배워 온 것을 전수하여 교단을 거느리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정통적인 방식으로 봅니다.
의상 철학의 정수가 담긴 「화엄일승법계도」
이제 의상의 저술을 읽어 보면서 그 사상의 핵심을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의상의 저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는 게송(偈頌)입니다. 다음 그림을 보시면,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에서 시작해,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으로 꺾어지면서 ‘舊來不動名爲佛(구래부동명위불)’에서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화엄경』의 정식 명칭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 모두 8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겨우 210자밖에 안 되는데 이 안에 화엄의 요지가 포괄되었다고 합니다. 이 게송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一卽一切多卽一]’라는 대목입니다. 선문답은 아닙니다만 이 게송을 이해하려면 선문답식으로 여러 가지를 내려놓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의상의 전기로는 『삼국유사』의 ‘의상전교’ 말고도 최치원의 『의상전(義湘傳)』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고려 시대 때 보조국사 지눌이 지은 글 중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보면”이라는 기록이 있어서 알려진 글입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의상이 지엄에게 화엄을 배우던 어느 날, 꿈에 신인이 나타나 깨달은 바를 글로 지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엄이 그 글을 읽어보고 그다지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상이 불전에 나아가 그 글을 불에 태우자 210자만이 타지 않고 남습니다. 이것들을 거두어 다시 불길 속으로 던졌는데 끝내 타지 않아 이 글자들을 가지고 게송을 지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불에 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의심의 불길에서 살아남았다고 이해해야겠지요. 그 글자들로 화엄 철학을 7언(言) 30구(句) 210자(字)로 간명하게 풀이한 것이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입니다. 조금 길지만, 전체를 다 읽겠습니다.
法性圓融無二相 법성은 원융(‘원’은 둥글다, ‘융’은 하나다)하여 모두 모양이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제법(세상의 수많은 규칙)이 부동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다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지혜(반야의 지혜, 참다운 지혜)로 알 뿐 다른 경계로 알 수 없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은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니
不守自性隨緣成 자성(본래의 정체성)이 있지 않고 인연으로 만들어지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네.
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시방세계) 머금었으니
一切塵中亦如是 온갖 티끌이 다 이와 같다네.
無量遠劫卽一念 셀 수 없는 무량겁(헤아릴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의 흐름)이 한 생각에 지나지 않고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바로 셀 수 없는 무량겁이라.
영원의 시간과 찰나의 시간이 같다, 티끌 하나에 온 우주의 이치가 있다는 말은 온 우주의 이치가 티끌 하나하나에 다 들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식으로 공간의 물체를 이야기한다면 한 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순간에 영원의 시간이 들어가 있고 영원의 순간도 매 순간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또 ‘자성(自性)’이라는 개념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많고 적음, 크고 작음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일(一)과 십(十)이 있으면 일도 자기 정체성이 있고 십도 정체성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일과 십은 서로 만나야, 곧 연기(緣起)를 통해서만 의미가 생성된다는 겁니다. 일은 단독으로 의미가 없고 십이 있어야 의미를 지닙니다. 십은 일의 열 배죠. 일의 열 배이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지, 일이 없으면 십도 의미가 없습니다. 곧 일과 십은 같습니다.
프랑스 수학자 푸앵카레는 “수학은 다른 사물에 같은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농구공, 배구공, 지구는 크기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결국 같은 종입니다. 도넛과 컵의 경우도 언뜻 상관없어 보이지만 실은 같은 종류입니다. 구멍이 한 개 있으니까요. 이런 식이면 일과 십도 같습니다. 여기서 십은 전체를 뜻하고 일은 하나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다’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더 살펴보겠습니다.
九世十世互相卽 구 세와 십 세가 서로 함께 마주하니
仍不雜亂隔別成 그대로 섞이지 않고 따로 한 세계 이루었네.
初發心時便正覺 초발심 그때가 바로 올바르게 깨친 때요,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은 늘 함께 어울리니
理事冥然無分別 리(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일)와 사(세상에 나와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를 위해서 일하는 것)가 아득하여 분별이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모든 부처와 보살이 대인의 경계로다(성인이다).
能仁海印三昧中 중생을 사랑하는 부처의 해인(고요한 바다에 만상이 하나하나 도장처럼 새겨짐. 불법을 뜻함) 삼매(지혜) 안에서
繁出如意不思議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법 뜻대로 꺼내와
雨寶益生滿虛空 중생에게 유익하게 온 누리에 법비(보배로운 법의 비) 내려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의 그릇 따라 갖은 이익 얻게 하네.
是故行者還本際 그런고로 수행자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하나니
叵息妄想必不得 망상을 버리지 않으면 절대 얻을 수 없다네.
여기서 초발심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발심을 낼 때가 바로 열반의 경지와 같다는 거죠.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발심 때보다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나요? 공부를 시작할 때, 음악을 처음 들을 때, 그 첫 순간을 넘어서기가 무척 힘들죠. 특히 중도에 초발심을 잊어버리고 샛길로 빠지는 경우가 많죠. ‘처음처럼’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그때 깨닫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합니다.
無緣善巧捉如意 까닭 없는 좋은 일 뜻대로 힘쓰면
歸家隨分得資糧 근본으로 돌아감에 좋은 밑천 얻으리.
以陀羅尼無盡寶 한없이 보배로운 참된 가르침으로
莊嚴法界實寶殿 법계를 장엄하게 하여 보전을 채워
窮坐實際中道床 끝내 실재에 앉아 중도를 깨닫나니.
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움직이지 않아 부처라 이름하네.
‘무연선교(無緣善巧)’는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겁니다.
또 다른 수학자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그리고리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는 ‘푸앵카레 추측(우주의 모양을 추측한 것)’을 증명했습니다. 푸앵카레는 가우스 이래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히는데, 그가 남긴 푸앵카레 추측은 이른바 ‘밀레니엄 난제’ 중에 하나여서 이것을 증명하면 미국의 클레이 수학 연구소라는 비영리 단체에서 100만 달러를 줍니다. 그런데 페렐만이 그걸 안 받습니다. 게다가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수상자(2006)로 지명되었는데, 거기에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경제적으로 풍족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가 받는 연금으로 살아요. 문학평론가 김우창이 ‘자유’라는 주제로 이 일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페렐만은 자유로운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가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뭘 했느냐 하면 그저 돈을 안 받았을 뿐입니다. 돈을 안 받기 위해 애를 쓰거나 하지도 않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는 돈을 많이 버는 거죠. 돈을 벌지 못하면 무능한 자로 치부되잖아요. 그런데 페렐만은 돈을 받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진 겁니다. 우리가 페렐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가 보여 준 탁월한 능력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가 보여 준 무능함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거꾸로, 내가 왜 자유롭지 못한지가 보입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내려놓아야 할 것을 못 내려놓는 거죠.
또 다른 예로 사르트르도 노벨 문학상을 안 받았습니다. 명백한 거부였어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한다면 이 일도 자연히 이해가 됩니다. 사르트르는 본질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지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예컨대 비겁한 인간이 있다 치면 본래 인간의 본질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비겁한 선택을 하니까 비겁해지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자유롭지 못한 선택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작은 걸 내려놓고 자유를 경험한 적이 있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봅시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네.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순수의 예언」이라는 시에서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고 했죠. “하나의 티끌에 온 세상 머금었으니 온갖 티끌이 다 이와 같다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와 똑같은 발상입니다. 블레이크의 시는 꽤나 까다롭습니다. 예를 들어 「굴뚝 청소부」 같은 시는, 굴뚝 청소 잘 하면 하나님이 잘 봐줄 거야, 하는 내용인데 단순하게 읽으면 순응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아동 노동 착취를 비판하는 시입니다. 의상의 화엄 철학을 알고 있으면 이런 맥락이 쉽게 보일 겁니다.
원주의 무위당 장일순도 그랬어요. 무위당의 무위(無爲)는 『도덕경』·『장자』에서 가져온 말이죠. 또 ‘좁쌀’이라는 호도 있습니다. 장일순은 “좁쌀 한 알에 우주가 담겨 있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화엄 사상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하나와 전체의 관계를 사유할 때 하나가 찰나의 순간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먼지나 티끌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절묘한 부분은 먼지나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하면서 온 우주 속에 있는 먼지와 티끌 하나하나가 다 그렇다[一切塵中亦如是]고 하는 점입니다. 찰나의 순간 하나하나가 영원이라는 거죠. 어떤 일에 몰입할 때 일념의 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는 걸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것을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이라는 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찰나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영원과 맞닿아 있고, 우리가 만나는 하찮은 사물 하나하나가 온 우주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게 온 우주와의 대면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유가 인도나 동아시아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에서 나사렛 예수가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고 하죠. 그런데 여러분이 양치기 목동이라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결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경제적인 측면에서 따지면 어리석은 짓이죠. 그런데도 나사렛 예수는 그렇게 합니다. 그 한 마리 양이 전체와 맞먹는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화엄의 세계관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3장
삼국 시대 도교 전통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처세와 군사 전략에 활용된 노자 사상
3장에서는 막고해(莫古解)와 을지문덕에 관한 자료, 그리고 「성덕대왕신종 명문」을 통해 삼국 시대의 도교를 살펴보겠습니다. 삼국 시대 도교에 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에 극히 적은 기록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막고해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하고 을지문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군데에 다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으로 중국 수나라의 침략군을 상대로 초유의 대승리를 이끈 고구려의 장수죠. 또 막고해는 백제의 장수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노자 『도덕경』의 문구를 인용한 내용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옵니다. 전쟁을 수행하는 장수가 전쟁터에서 노자를 인용한 점이 이채롭습니다. 또 다른 자료인 「성덕대왕신종 명문」에도 『도덕경』을 인용한 글귀가 나옵니다.
『도덕경』이나 『장자』의 문구는 아니지만 당시의 도교 사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경주 감산사(甘山寺)에서 미륵보살상이 출토된 적이 있는데 이때 이 불상을 어떻게 조성하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석각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김지성(金志誠)이라는 사람이 노자와 장자를 좋아하여 소요를 즐기고 무위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덕경』이나 『장자』를 직접 인용하진 않았지만 그런 취향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내용을 중심으로 도교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막고해와 을지문덕이 모두 인용한 구절은 『도덕경』 제44장에 나오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는다”입니다. 이를 통해 당시 장수들이 『도덕경』을 즐겨 읽었고 일상에서 노자와 관련된 시를 짓는다든지 군사적 결단을 내릴 때 노자를 활용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사상 하면 보통 무위(無爲)나 자연(自然)을 이야기하면서 현실과 상당히 거리를 두는 은둔적 삶을 지향한다고 보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노자 사상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노자 사상은 처세나 군사 전략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볼 자료들은 바로 노자가 그런 식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이렇게 도가를 이해한 학문이 중국 한나라 초기에 형성된 황로도학(黃老道學)입니다. 삼국 시대의 기록은 노자 사상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백제 장군 막고해의 간언
다음은 『삼국사기』 24권 「백제본기」에 나오는 내용인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는다”라는 『도덕경』 제44장이 인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제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태자에게 간하는 내용입니다.
근구수왕(近仇首王)은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아들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대항하게 했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막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인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타는 말의 굽을 다치게 하였다.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들의 군사가 비록 많지만 모두 수를 채운 것으로 가짜 군사들입니다. 그중 날래고 용맹한 이들은 붉은 깃발을 든 부대입니다. 만일 그들을 먼저 깨뜨린다면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따라 진격하여 크게 쳐부수고 달아나는 군사를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 서북에 이르렀다. 그때 장수 막고해가 이렇게 간했다. “일찍이 도가의 말에 이르길,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십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중단하고는 마침내 돌을 쌓아 표시한 다음, 그 위에 올라 좌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후에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
그곳 바위에 마치 말발굽처럼 생긴 자국이 있는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것을 태자의 말굽 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 만에 훙거(薨去)하자 태자가 즉위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근구수왕(近仇首王)’, 375년❶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입니다. 근초고왕은 백제를 강력한 국가로 키운 왕 중의 한 명이죠. 유명한 칠지도[七支刀: 백제에서 제작한 철제 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음.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음]도 근초고왕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근초고왕이 왕위에 있을 때 고구려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구려 국강왕은 바로 고국원왕으로 이름이 사유(斯由)입니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침범해 오자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싸우게 하죠. 태자가 적기를 든 부대를 직접 진격해서 깨뜨리고는 패주하는 군대를 쫓아가 수곡성의 서북쪽에 이릅니다. 수곡성은 지금의 서울 지역이에요. 그때 장군 막고해가 이렇게 말하며 말립니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이르길, ‘만족할 줄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했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바라십니까?” 그러자 태자가 그 말을 훌륭하다고 여겨 추격을 멈춥니다.
이 이야기는 장군 막고해가 『도덕경』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태자를 설득하는 내용이죠. 말하자면 『도덕경』을 전쟁에 활용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질적 자료입니다. 실제로 노자 사상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예부터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마치 새로운 이야기인 양 여기는데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컨대 전국 시대의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는 노자 사상을 일종의 권모술수로 이해했습니다. 또 송대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도 한나라 고조 유방의 모사(謀士)였던 장량(張良) 같은 이가 노자의 권모술수를 이용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노자의 철학을 은둔의 철학이나 무위자연의 철학으로만 보는 것은 노자 사상을 상당히 좁게 보는 것입니다.
『도덕경』에 막고해가 인용한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가 나오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이름과 몸 중에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몸과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얻는 것과 잃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운가? 이 때문에 몹시 아끼면 크게 허비하게 되고, 많이 간직하고 있으면 크게 망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
—『도덕경(道德經)』 제44장❷
“이름과 몸 중에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名與身孰親]”를 보면 명(名)은 명예고 신(身)은 내 몸, 생명입니다. 보통 명예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런 통념을 확인이라도 하듯, “이름과 몸 중에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과연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하며 정색하고 되물은 것입니다. 질문 안에 답이 내포되어 있는 셈이죠.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한 독법입니다.
재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身與貨孰多]”에서 신(身)은 자신의 몸이고 화(貨)는 재물입니다. 앞에서는 명예와 생명을 비교하고 여기서는 몸과 재물을 비교합니다.
「백이 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가의(賈誼)의 말을 인용해 “욕심 많은 자는 재물에 목숨을 바치고, 의리를 추구하는 자는 명예에 목숨을 바친다[貪夫殉財 烈士殉名]”라고 했는데 노자의 시각에서 보면 둘 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가장 중요한 목숨은 바치는 게 아닙니다. 유가에서 주장하는 살신성인도 안 됩니다. 물론 유가에서도 무조건 목숨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의리도 지키고 목숨도 유지해야죠. 유가에서는 이 둘이 상충할 때 어떤 게 옳으냐를 따집니다. 명예, 몸, 재물 가운데 노자에게는 몸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쟁터에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얻는 것과 잃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괴로운가[得與亡孰病]”에서 망(亡)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나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과 얻는 것,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가? 명예나 재물을 많이 얻는 것은 사실 몸을 희생하는 것이고 오히려 그걸 잃어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명(여기서는 그것을 ‘몸’으로 표현했습니다)이 가장 중요한데 이 몸을 버리게 하고 정신을 소진시키는 것이 명예나 재물이라는 거죠. 따라서 몸을 보존하려는 시각에서 보면 명예나 재물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얘깁니다. 욕망은 일정한 방향성이 있어서 자신을 돌아볼 줄 모릅니다. 그런데 노자는 바로 그 욕망이 가장 중요한 것을 앗아간다는 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생각과 상당히 다르죠. 바로 이런 점이 노자의 통찰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마지막 구절은 “이 때문에 몹시 아끼면 크게 허비하게 되고, 많이 간직하고 있으면 크게 망한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갈 수 있을 것이다[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게 필요한가? 지족(知足)과 지지(知止)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욕망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기에 위태롭지만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지혜를 통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것은 적당한 수준, 곧 적절한 시점을 언제로 잡아야 하는지가 관건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장구(長久)는 ‘오래가다’라는 의미인데요, ‘서바이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전쟁터에서는 오래 살아남는 것, 곧 자신의 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겠지요.
보장왕이 도교를 따르다
앞서 보았듯이, 백제 장군 막고해는 이미 4세기경에 노자 텍스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술을 펼칠 때 자신이 읽은 글을 활용해서 설득을 했다는 것은 그 글의 이해 수준이 상당히 높았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백제와 달리 고구려와 신라에서는 도교가 훨씬 뒤늦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643년 보장왕 때 도교와 관련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보장왕(寶臧王)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입니다.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장(臧)이며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건무왕(建武王)의 동생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蓋蘇文)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려고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2년(643년) 봄 정월에 아버지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사신을 당에 들여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개소문이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빠트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나란히 흥행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행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을 갖춘 것이 아닙니다. 엎드려 청컨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대왕이 크게 옳다고 여겨 외교 문서를 보내 요청하니 당 태종이 도사 숙달(叔達) 등 여덟 명과 함께 노자 『도덕경』을 보내 주었다. 왕이 기뻐하고 사찰을 빼앗아 이들을 묵게 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보장왕(寶臧王)’, 643년❸
위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의 권력자들이 불교가 흥행할 때 불교 세력과 그다지 우호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보장왕이 도교를 받아들인 내용은 『삼국유사』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불교 승려여서 보장왕이 도교를 받아들인 사건을 두고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비판적으로 기술합니다. 물론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명분을 중시하는 유학자였으니 임금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좋게 평가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불교 쪽에서 보면 명분의 문제뿐만 아니라 불교 사원을 빼앗아서 도교를 유치한 셈이니 더더욱 좋게 볼 리 없었겠지요.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에서는 종교를 통해 국가 이념을 확립했다기보다 오히려 종교적 갈등 때문에 국가 이념이 흔들린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에서는 「고려본기」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고려본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말기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오두미교(五斗米敎: 중국 후한 말기에 일어났던 도교의 일파로, 가입하는 사람에게 쌀 다섯 말을 바치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붙게 되었음)를 다투어 신봉하였는데, 당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도사를 파견하여 천존상(天尊像)을 보내고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니 왕과 나라 사람들이 함께 들었다. 이때가 바로 제27대 영류왕(榮留王) 즉위 7년, 무덕 7년 갑신이었다. 그다음 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나라에 가서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황제가 허락하였다.
보장왕이 즉위하면서 역시 삼교를 함께 일으키고자 했는데 그때 총애하던 재상 개소문이 왕에게, 유교와 불교는 나란히 성행하나 도교[黃冠]가 아직 성행하지 않으니 특별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자고 진언하였다.
그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그릇된 도[左道]가 정도에 필적하여 국운이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내 신통력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의 완산주(完山州)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가 살았다. 이때가 바로 영휘 원년 경술 6월이었다. 얼마 안 되어 고려가 망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흥법(興法)」,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❹
「고려본기」는 곧 「고구려본기」입니다.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 보장왕이 도교를 들여오자 당시 반룡사에 있던 보덕화상이 그릇된 도(도교)가 정도(불교)에 맞서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간했다고 하죠. 그러나 왕이 듣지 않자 신통력을 발휘하여 방장을 날려서 완산주, 그러니까 지금의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방장이란 불교의 종단을 대표하는 조사가 머무는 방, 곧 조실(祖室)을 뜻합니다. 조실의 사방이 1장(가로 세로 3미터)이라고 해서 방장(方丈)이라고도 하는 것이죠.
전설에 따르면, 석가모니의 제자 유마거사가 머물렀던 곳이 사방 1장 크기였는데 유마거사가 병이 나자 그를 문병하러 온 제자와 신도 3만 2,000명이 그 방에 다 들어갔다고 합니다. 기적이 일어난 셈이죠. 불교 경전에서 자주 보이는 이런 식의 비유는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면 시공간의 한계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 2장에서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에서 살펴보았듯이, 하찮은 티끌 하나 안에 삼라만상이 들어 있는데 삼라만상 전체를 이루는 티끌 하나하나가 다 그렇다고 했죠. 티끌 하나 속에도 삼라만상이 들어가니까 사방 3미터 안에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다시 앞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면, 일연은 보장왕이 쓸데없이 도교를 들여와서 나라가 망했다고 기술합니다. 이처럼 승려 계층은 도교가 도입되면 불교가 약화될 수 있으니 이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유학자들은 왕을 시해한 자가 최고 권력자를 제 뜻대로 움직이니 역시 옳지 않다고 보았을 겁니다. 보장왕은 원래 임금이 될 사람이 아니었는데 연개소문이 옹립하여 허수아비 왕이 되었죠. 그러니 도교의 도입은 실제로는 연개소문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왕에게 성공적인 사업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내는 을지문덕의 시
고구려의 도교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나라 장수인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내는 시를 들 수 있는데, 앞서 살펴보았던 백제 장군 막고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의 「을지문덕 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문덕은 수나라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지치게 만들고자 싸울 적마다 쉽게 져 주었다. 그래서 우문술 등이 하루 동안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은 쉽게 이긴 것을 믿고서는 여러 의견을 무시하고 마침내 진군하여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산에 의지하여 군영을 세웠다.
문덕이 우중문에게 시를 보냈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天文)을 꿰뚫었고 절묘한 계산은 지리(地理)를 다하였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아 그치기를 바라오[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을지문덕(乙支文德)’, 612년❺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왔는데, 이른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2,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을지문덕은 장수인데 이름 ‘문덕’은 무력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장수의 이름이 무력과 상반되는 뜻이라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시를 지어 적장에게 보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여유를 갖고 있었으니 이름값을 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을지문덕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은 막고해가 인용했던 『도덕경』의 바로 그 구절입니다. 막고해나 을지문덕 같은 장수들이 『도덕경』을 읽고 그 내용을 자기 주장의 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당시 많은 이들이 노자를 읽고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덕대왕의 지극한 도
삼국 시대의 도교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로는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의 명문(銘文)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른바 ‘에밀레종’으로 알려져 있죠.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원래 봉덕사에 있었다고 해서 봉덕사종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봉덕사가 어디에 있던 절인지 정확한 위치를 아직 모릅니다. 성덕대왕신종이 주조된 것이 771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의 종입니다. 동아시아 고대 동종 중에서 상원사 동종과 함께 가장 오래된 종으로,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 집약된 결과물입니다. 이 종에 새겨진 글에 『도덕경』의 한 구절이 나옵니다. 효성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덕을 기리고자 불사를 일으켜 종을 주조했는데 거기에 『도덕경』의 문구가 변형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효성왕(孝成王) 때 『도덕경』이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했다. 휘(諱)는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이고 어머니는 소덕왕후다. …… 2년 …… 여름 4월에 당나라 사신 형숙(邢璹)이 노자 『도덕경』 따위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소부리군(所夫里郡)의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효성왕(孝成王)’, 737년❻
효성왕이 임금으로 즉위한 지 2년이 되던 해에 당나라에서 『도덕경』을 보내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을 새기기 전에 신라에 『도덕경』이 전해졌고 그것이 명문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은 한쪽에는 비천신상 문양이 있고 뒤에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 경주박물관에 간 적이 있는데 때마침 어느 박물관 연구팀이 와서 성덕대왕신종 탁본을 뜨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덕대왕신종에는 비천신상 문양만 있는 줄 알았다가 그제야 명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명문의 일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의 것[形象之外: 형상 밖의 형상, 가장 큰 형상]을 포함하고 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다. 태음(大音)이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는데 아무리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성덕대왕신종 명문[聖德大王神鐘之銘]」, 771년❼
여기서 ‘형상지외(形象之外)’는 형상 밖의 것을 가리키는데 눈으로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태음(大音)은 ‘가장 커다란 소리’라는 뜻인데 이 둘은 모두 『도덕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도덕경』의 해당 구절을 몇 군데 살펴보겠습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고 한다.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고 한다. 손으로 잡아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라고 한다. …… 이것을 일러 형상 없는 형상, 물건 없는 물상이라 한다. 이것을 두고 아른거리지만 분간할 수 없는 상태인 홀황(惚恍)이라고 한다. 앞에서 맞이해 보았자 그 머리를 볼 수 없고 뒤를 따라가 보았자 그 꽁무니를 볼 수 없다.
—『도덕경(道德經)』 제44장❽
‘이(夷)’는 ‘평평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전경의 색과 배경색이 같으면 둘을 구분할 수 없겠죠. 그것이 이(夷)입니다. ‘희(希)’는 들리지 않는 것으로,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 나온 ‘태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미(微)’는 워낙 미세해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공기와 같은 존재를 뜻합니다. 요컨대 ‘희’와 ‘미’와 ‘이’는 모두 감각으로 붙잡을 수 없는 ‘도(道)’를 뜻합니다. 그리고 명문에서 ‘형상지외’라고 한 것은 바로 『도덕경』의 ‘형상 없는 형상’, 곧 ‘무상지상(無狀之狀)’을 가리킵니다. 『도덕경』의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일러 ‘대상(大象)’이라고도 합니다. 해당 구절을 보겠습니다.
최고의 도사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한다. 중간쯤 되는 도사는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 여긴다. 수준 낮은 도사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비웃음을 당하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그 때문에 훌륭한 말에 이르기를, “밝은 도는 마치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도는 마치 물러나는 것 같고, 평평한 도는 오히려 치우친 듯 보이고 최고의 덕은 마치 골짜기처럼 낮다”라고 하였다. 아주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넓은 도는 마치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건실한 덕은 마치 각박한 듯하고 질박한 것은 마치 더러운 것처럼 보인다. 큰 네모[大方: 땅]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채워지지 않는다.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도덕경(道德經)』 제41장❾
「성덕대왕신종 명문」에 나오는 “태음(大音)이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는데 아무리 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라는 문장은 바로 『도덕경』의 ‘태음희성(大音希聲)’을 풀이한 것입니다.
‘태음희성’에서 ‘태음’, 곧 ‘커다란 소리’에는 정치적 맥락이 담겨 있습니다. 커다란 소리란 어떤 소리를 말할까요? 음량의 크기를 측정하는 데시벨이 높은 소리일까요? 아닙니다. 성덕대왕신종이 훌륭한 종으로 평가받는 것은 여운이 길어서입니다. 한자에서 성운(聲韻)이라고 하면 ‘성(聲)’은 첫 소리를 말하고 ‘운(韻)’은 남아 있는 소리, 곧 여운(餘韻)을 말합니다. 종을 한 번 치면 처음에는 직접적인 타격음이 울리지만 타격이 끝난 뒤에 소리가 남아서 계속 울리죠. 성덕대왕신종은 이 남아 있는 소리가 압도적으로 긴 종입니다. 그런 의미를 이해한 상태에서 태음을 말하면, 태음은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실제로 소리가 없지 않은 상태, 남아서 계속 울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맥락에서 해석하면 이미 죽은 성덕대왕의 정치적 교화라고 할 수 있는 성덕(聖德)이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잊히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종을 주조하여 이미 죽은 왕의 덕을 칭송하려 했고 이 종을 통해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리게 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노자의 ‘태음희성’을 설명할 때 「성덕대왕신종 명문」을 활용하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를 다른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대상무형(大象無形)’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부죠. 가장 큰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게 무엇이냐? 바로 ‘도’입니다. 도는 뭐냐? 도를 소리로 표현하면 무성(無聲)이고 그릇으로 표현하면 만성(晩成), 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모퉁이가 없는 모퉁이이고 무형의 형상입니다. 이처럼 앞에 ‘무(無)’ 자가 붙으면 다 ‘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일부에 해당하는 기능을 상실하는 대신 모든 가능성을 얻는 것, 그것이 ‘도’입니다.
장자식으로 얘기하면 음악을 연주하면 도가 깨지고, 연주하지 않으면 도의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은 음악이 바로 이 모티프를 활용한 것이죠. 피아니스트가 무대에 나와서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면서 음악의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조건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태음입니다.
4장
강수, 설총, 최치원
조강지처의 교훈과 화왕(花王)의 경계
신라의 유학자들
이번에는 강수(强首, ?~692), 설총(薛聰, 655~?), 최치원(崔致遠, 857~?) 이 세 유학자를 한꺼번에 살펴보겠습니다. 삼국 시대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술된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드릴 테니 옛날이야기를 읽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보시면 됩니다.
이 장의 제목을 ‘조강지처의 교훈과 화왕(花王)의 경계’라고 달았는데, ‘조강지처(糟糠之妻)’는 강수의 말에서 따왔고, ‘화왕의 경계’는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라는 이야기에서 따왔습니다. 조강지처는 본 디『후한서(後漢書)』 「송홍전(宋弘傳)」에서 나온 말입니다. 중국의 고사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버전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고사성어를 빌려 오기도 했어요. 그 일단을 보겠습니다.
조강지처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라의 강수입니다. 설총의 「화왕계」는 다른 문헌에는 나오지 않고 오로지 『삼국사기』에만 나옵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학했고 설총도 유학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강수는 언제 태어났는지 알 수 없고 최치원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관(冠)과 신을 숲 속에 벗어 두고 떠나 어디에서 삶을 마쳤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전하죠. 신선이 되어 여전히 가야산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최치원의 유학자적인 면모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함양군 학사루기(咸陽郡學士樓記)」를 읽어 보면, 마치 최치원이 눈에 보일 듯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연암은 “세상에서는 고운(孤雲: 최치원의 자)이 도를 얻어 신선이 되었다고들 하는데 이는 고운을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최치원은 유학자이므로 신선이 되었을 리 없다는 말인데 완전히 타당한 지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요. 연암에게 유학자의 면모만 있지 않은 것처럼 최치원에게도 그 정도의 자유는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수, 설총, 최치원 세 사람 가운데 최치원에 관한 기록이 제일 많습니다. 문집도 잘 보존되어 있고 양도 많아서 강수나 설총에 비해 이야기할 거리가 많습니다. 반면 강수와 설총의 이야기는 문집이 따로 없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이 전부입니다.
참고로 『삼국사기』는 『삼국유사』만큼 이야기가 풍부한데 상당히 정통적인 문장입니다. 그래서 고문을 익힌 사람이라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삼국유사』는 문장의 변칙이 많고 특이한 표현이 많이 나와서 좀 더 어렵습니다.
강수, 머리에 뿔이 난 유학자
강수(强首)의 ‘강’과 ‘수’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으로, 머리[首]가 툭 튀어나왔다[强]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성은 임(任)씨라고 하는데 『삼국사기』 「강수 열전(强首列傳)」에서 강수 자신이 임나가랑(任那加良) 사람이라고 했다는 말로 미루어 그렇게 추정합니다.
출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고대의 기록에는 흔히 성현의 용모가 특이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강수도 보통 사람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해서 강수를 낳았는데 머리 뒤쪽에 높이 솟은 뼈가 있었다. 석체(昔諦: 강수의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의 이른바 현자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 “이 아이의 머리뼈가 이렇게 생겼는데, 어떻습니까?” 하고 묻자 그 현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들으니 복희씨는 호랑이와 같은 용모였고 여와씨는 뱀의 몸뚱이를 가졌으며 신농씨는 소머리였고 고요는 말의 입을 가졌다고 했으니, 성현과 같은 무리라서 그 모습이 또한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 아버지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이르길, “이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니니 잘 키우면 마땅히 장래에 국사가 될 것이오”라고 했다.❶-1
이 기록에 따르면 강수의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해서 뒤통수가 뿔처럼 튀어나온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옛날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공자죠. 공자의 이름이 ‘구(丘)’입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과 어머니 안징재가 니구산(尼丘山)에서 빌어서 공자를 낳았는데, “나면서부터 정수리가 울퉁불퉁해서 이름을 구(丘)로 했다[生而首上圩頂 故因名曰丘云]”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혹자는 니구산의 구 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합니다만 아무튼 사마천의 기록을 따르면 공자도 머리 생김새가 울퉁불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천은 공자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전해지는 공자의 용모를 그대로 기술했겠죠. 그러니 강수의 용모가 공자와 비슷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 기록에서 보듯이, 고대 성현들은 용모가 다 이상합니다. 복희씨가 범 모양이라는 말도 있고 복희씨와 여와씨는 형제간으로 두 사람 모두 인두사신(人頭蛇身: 사람 머리에 뱀의 몸뚱아리)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화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어쨌든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죠. 복희씨는 처음으로 팔괘(八卦)와 서계(書契) 문자를 만든 사람이고 여와씨는 인류를 창조한 신으로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만들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후대로 갈수록 신화가 풍부해집니다. 그중 여와가 사람을 창조한 이야기가 아주 재미납니다. 처음에는 흙덩이를 하나하나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나중에는 새끼줄에 진흙을 묻혀 빙빙 돌리자 진흙 방울이 사방으로 떨어져 모두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매우 효율적인 인류 창조라 하겠습니다.
신농씨는 농사의 신인 동시에 태양신이기도 한데 인류에게 약초의 효능을 최초로 가르쳐 준 신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농씨는 약초의 효능을 알기 위해 하루에 70여 가지 독초를 맛보았다고 하는데 어느 날 단장초(斷腸草)라는 맹독성 독초를 씹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두가 인류를 위해 노력한 헌신적인 신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강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강수는 용모가 이상했는데 이른바 현자라는 사람이 강수의 골상을 보고 성현과 같은 부류라고 했다는 겁니다. 현자가 이런 식으로 현명하게 이야기해 주자 그 이야기를 듣고 강수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이 아이를 잘 키우면 나라에서 으뜸가는 선비, 곧 국사(國師)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강수는 유학자로서는 다소 신비로운 출생 내력을 지닌 셈인데 유학자의 출생이 이렇게 모호한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사실 공자도 출생이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앞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강수 열전」은 공자의 출생이나 용모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강수 열전」에는 ‘야합(野合)’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것도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도 김부식이 「강수 열전」을 지으면서 「공자세가」의 아이디어를 가져와 서사 구조에 포함시킨 것 같습니다.
유학과 불학 사이에서
이어서 강수가 성장한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유학과 불학 사이에서 유학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장한 뒤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는데 글에 담긴 의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였다. 아버지가 강수의 뜻을 살펴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너는 불교를 배울 것이냐, 유학을 배울 것이냐?” 강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인간 세상의 사람인데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원컨대 유학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라” 했다.
마침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는데, 얻어들은 것은 비록 얕고 하찮았지만 터득한 바가 갈수록 수준이 높아져 우뚝하게 당대의 영걸이 되었다. 마침내 벼슬길에 들어 여러 관직을 거쳐 당시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❶-2
여기서 강수는 불교를 ‘세상 밖의 가르침[世外敎]’이라고 규정하면서 자기는 세속의 사람이니 유학의 도를 배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외(世外)와 세간(世間)으로 불교와 유학을 구분한 셈인데 이는 불교와 유교의 지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수는 유학의 가르침을 세속 윤리로 파악했는데 정확한 견해라고 하겠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유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싶다면 어디에 갈 필요가 없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은 내세의 삶, 곧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승려가 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승려가 된다는 것은 세속의 인연을 끊는 것을 의미하죠. 세외라는 것이 우주 공간 너머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삶이 세간이고 현재의 삶이 끝난 다음에 있는 것이 세외입니다. 현세보다 내세의 삶을 더 중시하는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거죠. 이런 인생관을 강조하는 종교는 많습니다. 천주교나 개신교도 세외교라고 볼만한 측면이 있습니다. 현재의 삶은 다음의 삶을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니까요. 물론 불교를 비롯한 세외교가 단순히 그런 지향성만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불교에서는 혼자 깨닫는 것보다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면 단순히 세외교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라고 해야겠지요.
대장간 집 딸과 사랑에 빠지다
이번에는 강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강수는 대장간 딸과 변치 않는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배우자 선택은 예나 지금이나 그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라고 할 수 있지요. 강수는 그 점에서 아주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강수는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간 집 딸과 야합(野合)했는데 사랑이 자못 두터웠다. 스무 살이 되자 부모가 읍내의 처녀들 중에 용모와 행실이 아름다운 자를 중매하여 그의 아내로 삼으려 했다.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아버지가 노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 시대에 이름이 나 온 나라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미천한 자를 아내로 삼는다면 또한 부끄러울 만하지 않은가?” 강수는 두 번 절하고 이렇게 말했다. “가난하고 미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말을 들으니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당(堂)에서 내려가게 해서는 안 되고 가난하고 미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미천한 여자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❶-3
여기서 ‘부곡(釜谷)’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은 대장장이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대장장이는 천민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사는 읍내와 떨어진 곳에 모여 살았던 거죠. 그런데 강수가 그곳에 사는 대장간 집 딸과 사랑을 나누고 함께 산 겁니다. 또 대장간 집 딸과 ‘야합’했다고 나오는데 『사기』 「공자세가」에 보면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안씨 집안의 셋째 딸 안징재와 야합해서 공자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야합은 말 그대로 들에서 만났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곧 사랑을 나누었다는 뜻이죠.
야합은 당시의 일반적인 풍습과 어울리지 않는 결합으로 대체로 신분을 넘어선 사랑을 표현한 경우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여러 가지 풀이가 있습니다. 일례로, 공자의 경우 어머니 안징재가 숙량흘을 만났을 때 14세가 안 되었고 숙량흘은 70세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성은 64세가 넘으면 양기가 끊어지고 여성은 14세 이전이면 음기가 통하지 않으므로 둘이 결합해도 아이가 생기기 어려운데 공자를 낳았으니 야합이라고 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만,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남자가 64세가 넘으면 양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타당성이 없을뿐더러 여성의 경우도 반드시 14세가 되어야 음기가 통한다고 할 수는 없지요. 야합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면 ‘들에서 사랑을 나누었다’라는 뜻이 되니 공자에 대한 불경이 되는 것 같아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인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자의 탄생을 그런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야합을 나쁜 행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봐도 야합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야합해서 주몽을 낳았다[東明柳花太后 …… 與北扶餘君解慕漱野合而孕]”라고 한 기록도 있고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21일 되던 갑자일에 여자로 변해 환웅천왕과 야합해서 단군을 낳았다[熊食之 三七二十一甲子 化爲女 與天王野合而生檀君]”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아무튼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면 강수는 대장간 집 딸과 만나서 서로 사랑이 자못 독실했는데 스무 살이 되자 강수의 부모가 고을의 여인 중에 용모와 행실이 반듯한 자를 중매해서 새 아내로 삼게 하려 합니다. 그런데 강수가 두 번 결혼할 수 없다고 사양합니다. 이것은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하는 처신입니다. ‘조강지처’란 어려운 시절에 술지게미나 겨[糟糠] 따위로 남편을 뒷바라지한 아내, 곧 가난한 시절을 함께한 아내를 뜻합니다. 이런 아내는 집에서 쫓아내면 안 되고 가난한 시절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바로 ‘조강지처 불하당 빈천지교 불가망(糟糠之妻不下堂 貧賤之交不可忘)’입니다.
흔히 유가에서 여성의 정절을 강요했다고들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경우에서 보듯 유가에서 정절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키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만……. 물론 ‘한 남편만을 섬긴다’는 ‘일부종사(一夫從事)’ 같은 조목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을 구속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입니다.
맹자가 오륜의 하나로서 강조한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친’이나 ‘친친인민(親親仁民)’의 ‘친친’은 본래 가부장제 이전의 모계 사회에서 유래한 관념으로 추정합니다. 『예기(禮記)』에도 은나라 시대에는 친친이 강조되었고 주나라에 이르러 ‘존존(尊尊)’이 중시되었다고 나옵니다. 본래 친친은 부자간이 아니라 어머니와 자식 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친은 ‘몸에 직접 닿는다’는 뜻이죠. 예컨대 임신한 여성이 자신의 몸에 깃든 태아를 사랑하는 것이 친친입니다. 가장 강력한 사랑이죠. 이에 비해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사랑을 존존이라 합니다. 존귀한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 이것이 부자간의 사랑입니다만 사실 친친과는 사랑의 종류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주나라 후기에 이르러 존존 관념이 친친 개념으로 대치됩니다. 그 결과가 맹자의 ‘부자유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요컨대 원래는 ‘모자유친’이었는데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친’ 관념이 부자간에 성립된 것이죠.
사실 부자간에는 친친이 성립되기 힘듭니다. 친친이 성립되려면 어떤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라는 점이 확인되어야 하는데 부자간에는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이야기 같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죠. 여자의 경우는 자신이 직접 아이를 낳으니까 자기 자식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경우는 설혹 배우자가 낳았다 하더라도 꼭 자기 자식인지 확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부장제가 확립되면서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정한 장소에 공간적으로 감금하고 ‘일부종사’ 관념을 주입시켜 정신적으로 억압하면서 부자 관계를 확인하기가 쉬워졌죠. 그때부터 친친 관념이 부자간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인류가 일부일처제를 제도화한 건 전체 인류 역사에서 아주 짧은 기간입니다. 인류 역사가 200만 년 되었다고 하는데 사냥의 역사는 50만 년, 농경의 역사는 1만 년밖에 안 된다고 추정합니다. 수렵·채집 시절의 가족 관계는 농경 시대와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는데 남녀 모두가 정착해서 가정을 꾸린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정착은 여성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가정의 형성 역시 여성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렵·채집을 주요 생존 수단으로 삼은 시대에 남자는 정착할 필요 없이 자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여성은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니까 일정한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계의 기준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세워질 수밖에 없겠죠.
중국 윈난 성의 모숴족(摩梭族)은 지금도 모계 사회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에는 문이 네 개 있어요. 평시에는 집 안에 여자와 어린아이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양육을 받아야 하니까 집 안에서 삽니다. 아이가 크면 남자는 쫓아내고 밤에만 들어올 수 있게 하죠. 모계 사회를 도식화한다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좋은 사회죠. 남자로서는 ‘이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확인할 수 없으니 그 아이에게만 잘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부자유친’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가부장제가 성립되면서 여성의 모든 생활을 통제하게 되었는데, 일정한 거주 공간에 내실로 들어가는 문이 딱 하나면 남자는 아이가 자기 자식인지 확인할 수 있겠죠. 그때부터 부자유친이 가능해집니다.
일부종사 관념은 일종의 정신적 감금 장치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관념이 남성에게도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입니다. 강수의 경우가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또 『춘향전』을 보면 춘향이가 이몽룡한테 일부종사 관념을 들이대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일부종사하니까 너도 나를 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면서요. 이 도령도 강수 아버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만 춘향의 논리가 아주 정연해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일부종사 관념이 완전히 일방적이었다면 아마도 모순이 심각해져서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생업을 돌보지 않고
이어서 강수가 평소 생업을 돌보지 않고 가난을 즐겼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안빈낙도(安貧樂道)에 부합하는 생활 태도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점도 유교적 가치와 부합합니다.
강수는 일찍이 생계를 도모한 적이 없었고 집안이 가난해도 기뻐하였다[家貧怡如]. 왕이 담당자에게 해마다 신성(新城)의 곡식 일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문무왕이 말하길, “강수는 문장 짓는 것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여겼는데, 그가 편지로 중국과 고구려·백제 두 나라에 뜻을 온전히 전한 덕분에 우호를 맺고 공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선왕께서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했던 것은 비록 무력으로 이룬 공이라고 하나 문장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사찬(沙湌)의 관직을 제수하고 녹봉을 올려 해마다 곡식 이백 석을 주었다. 신문대왕 때에 이르러 죽었다.❶-4
『논어』에 보면 “군자모도불모식(君子謀道不謀食)”, 곧 “군자는 도를 추구하지 먹을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인용문에 나오는 ‘가빈이여(家貧怡如)’는 집안이 가난했는데도 기뻐했다는 뜻인데, 역시 『논어』에 나오는 ‘빈이락(貧而樂)’과 통합니다. 이 부분은 공자의 제자 안연과 비교한 대목으로 강수가 유학의 가치를 잘 지켰음을 알려 줍니다.
그런데 ‘가빈이여’나 ‘빈이락’을 거칠게 이해해서 군자는 경제에 관심이 없다고 해석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이야기하면서 다섯 무(畝)의 택지에 뽕나무를 심고 산림을 잘 가꾸고 닭이나 돼지, 개 따위를 잘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군자는 백성들의 생업을 위해 ‘모식(謀食)’ 합니다. 다만, 자기 개인의 먹을 것을 사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생계 문제를 근심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가족의 시각에서 보면 한심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감명을 주는 면도 있습니다. 다행히 강수는 나라에서 녹봉을 넉넉히 주어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강수는 출생이 공자와 비슷했고 사랑을 할 때나 재물에 욕심을 두지 않았던 점에서도 유교적 가치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유학에 관한 강수의 독창적 견해는 전하지 않지만 이러한 실천을 두고 평가한다면 유학자로서 살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강수 열전」은 신문대왕대에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무리되는 듯하지만, 뒷이야기가 전합니다. 바로 강수의 아내 이야기입니다.
강수의 아내가 먹을 것이 부족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대신이 그 소식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곡식 백 석을 하사하게 했더니 강수의 아내는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천한 사람인데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라 나라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혼자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후한 하사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그러고는 마침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강수(强首)’❶-5
어떻습니까? 강수가 매력을 느낄 만한 여자였지요? 이 대목에서 대장장이의 딸이었던 그녀가 강수의 신분이나 부유함이 아니라 그 내면을 사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수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부인 이본은 남편이 죽은 뒤 남편의 유언을 따라 국가에서 나오는 대통령 연금을 거절하고 드골이 육군 대령이었을 때의 연금만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하죠. 강수의 부인과 비슷한 처신이었다 하겠습니다.
설총, 화왕의 경계로 왕을 일깨우다
앞서 원효를 이야기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설총은 원효의 아들입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설총을 종주로 받든다”라고 썼습니다. 말하자면 승려의 후손이 유학의 종주(宗主)가 된 셈입니다. 설총과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보이는데 이야기 자체가 참 재미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