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 d’Eve ni d’Adam
by
Amélie Nothomb
Copyright ⓒ Editions Albin Michel 2007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Munhak Segye-Sa Publishing Co. 2008
This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ditions Albin Michel S.A. Paris through ShinWon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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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도 이브도 없는
나에겐 일본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게 일본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처럼 보였다. 그래서 슈퍼마켓 게시판에 쪽지를 남겼다. ‘프랑스어 과외, 흥미로운 가격’.
그날 저녁 바로 전화벨이 울렸다. 이튿날 오모테산도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그는 나의 이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약속장소에서 어떻게 서로를 알아볼지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황이 없어 전화번호도 못 물어봤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아마 깜빡했다는 걸 깨닫고 그쪽에서 다시 전화를 하겠지 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전화 속 목소리는 젊게 느껴졌었다. 그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1989년의 도쿄에는 젊은이가 드물지 않았으니까. 특히 1월 26일 15시경, 오모테산도의 카페에는.
난 유일한 외국 여자가 아니었다. 아니, 정반대였다. 하지만 그는 나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프랑스어 과외 쪽지 남기신 분?”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아주 경직된 태도로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선생은 나이며, 그를 이끄는 것이 내 역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그가 스무 살에 이름은 린리(Rinri)이며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역시 내가 스물한 살에 이름은 아멜리이며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 국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로선 익숙한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영어를 사용할 수 없어요.” 내가 말했다.
나는 그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프랑스어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수준은 그야말로 한심스러울 정도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발음이었다. 린리가 나에게 프랑스어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난 중국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휘력이 빈약한 데다 영어 구문을 서투르게 흉내내고 있었으니까. 그는 부조리하게도 영어 구문을 참조해가며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는 프랑스어과 3학년 대학생이었다.
나는 일본의 외국어 교육이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수준이면 더는 섬나라 근성 운운할 수조차 없었다.
청년도 상황을 이해했는지 서둘러 사과하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대화의 단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다시 그에게 말을 시켜보려고 시도했다. 헛수고. 그는 마치 썩은 이빨을 감추기 위해서인 양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봉착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일본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섯 살 때 이후로는 일본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고, 16년 만에 ‘해 뜨는 나라’로 돌아와 보낸 엿새는 그 언어에 대한 내 어릴 적 기억을 되살려놓기에 충분치 않았다. 아니, 어림도 없었다. 따라서 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밑도 끝도 없는 횡설수설을 뱉어놓고 말았다. 경찰관, 개, 그리고 꽃이 만개한 벚나무에 관한 얘기였다.
청년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 얘기에 귀를 기울였고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섯 살짜리 꼬마한테 일본어를 배웠느냐고 물었다.
“그래요.” 내가 대답했다. “그 꼬마가 바로 나예요.”
그리고 나는 그에게 내 인생역정을 들려주었다. 그것을 프랑스어로 천천히 서술해주었다. 가슴을 찡하게 하는 특별한 감동 덕분에 나는 그가 내 말을 이해한다고 느꼈다.
그는 내 서툰 일본어 실력에 어느 정도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듯 보였다.
그가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로 내가 태어나 다섯 해를 보낸 지방, 간사이를 잘 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가 유명한 보석세공 학교를 운영하는 도쿄에서 태어났다. 그가 지친 듯 말을 멈추고는 앞에 놓여 있는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의 설명은 돌들이 5미터 간격으로 놓여 있는 징검다리를 통해 홍수로 물이 불은 강을 건너는 것만큼이나 힘겨워 보였다. 위업을 달성한 후에 숨을 돌리는 그를 나는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프랑스어가 다루기 까다롭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나는 내 제자의 입장에 서고 싶지 않았다. 프랑스어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필시 일본어 쓰는 법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울 테니까.
나는 그에게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그의 성찰이 실존적인 성격의 것인지, 아니면 언어적인 것인지 궁금했다. 고민 끝에 툭 튀어나온 그의 대답이 날 당혹감에 빠뜨렸다.
“노는 거요.”
장애가 어휘적인 것인지 철학적인 것인지 결정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뭘 노는 거요?”(린리가 사용한 단어 ‘Jouer’는 전치사 á나 de와 결합하여 ‘놀이를 하다, 운동경기를 하다, 악기를 연주하다, 연기를 하다, 노름을 하다’라는 뜻의 타동사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무위(無爲)를 뜻하는 동양적 의미의 ‘놀다’와는 많이 다르다. 화자가 ‘뭘 노느냐’고 되묻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역자 주)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노는 거요.”
그의 태도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세상사에 초연하거나, 혹은 까다로운 언어의 학습을 게을리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두 경우 모두 그 청년이 훌륭하게 답변을 해냈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와 전적으로 같은 의견이었다. 그래서 맞장구를 쳤다. 그의 말이 옳다고, 삶도 하나의 놀이라고, 노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그는 마치 내가 신기한 얘길 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외국인과 토론을 벌일 때 편한 점은 다소 황당한 상대방의 표현을 언제나 문화적 차이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린리가 나에게 뭘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 음절씩 또박또박 끊어가며 빗소리 듣기, 등산하기, 책읽기, 글쓰기,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노는 거네.”(번역을 살짝 달리 했지만 린리가 여기서 한 말 역시 ‘jouer’다. : 역자 주)
왜 했던 말을 또 하는 걸까? 어쩌면 그 점에 대해 내 의견을 묻고 있는 건지도. 그래서 내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나도 노는 거 좋아해요. 특히, 카드놀이요.”
이번에는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공책을 꺼내 카드를 그렸다. 에이스, 클로버,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그가 말렸다. 그랬다, 물론 그도 카드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싸구려 교수법을 펼치는 내가 더없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떠오르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어떤 음식 좋아해요?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르르흐흐.”
나도 일본요리는 꽤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가 간결하게 반복했다.
“우르르흐흐.”
그래요, 근데 그게 뭐죠?
어쩔 줄 모르던 그가 내 공책을 집어 계란의 윤곽을 그렸다. 몇 초 동안 속으로 퍼즐 조각들을 이리저리 맞추던 내가 외쳤다.
“계란!”
그가 바로 그거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반색했다.
“외프라고 발음해야 해요, 외프.”
“우르르흐흐.”
“아뇨, 내 입 모양을 잘 봐요. 입을 더 크게 벌려야 해요. 외프.”
그가 입을 크게 벌렸다.
“오르르흐흐.”
나는 스스로 물어보았다. 이게 과연 나아진 걸까? 그랬다, 달라지긴 했으니까. 옳은 방향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갔으니까.
“훨씬 낫네요.” 점점 나아질 거라고 낙관하며 내가 말했다.
내 예의에 만족한 듯 그가 겸연쩍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선생이었다. 그가 나에게 수업료에 대해 물었다.
“좋을 대로 줘요.”
그 대답은 통상적인 가격을 대충도 모르는 내 절대적 무지를 감추고 있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진짜 일본여자처럼 말을 한 모양이었다. 린리가 주머니에서 미리 돈을 넣어둔 예쁜 전통지 봉투를 꺼냈으니까.
영 찜찜했던 나는 봉투를 거절했다.
“이번에는 안 받을래요. 수업이랄 수도 없었으니까. 기껏해야 소개 정도.”
청년은 봉투를 내 쪽으로 밀어놓고는 커피 값을 지불하고 돌아와 다음 주 월요일로 약속을 정했다. 그리고는 내가 돌려주려고 애쓴 봉투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인사를 하고 가버렸다.
염치없게도 나는 봉투를 열어보았다. 6천 엔. 환율이 약한 화폐로 보수를 받으면 엄청 신이 난다. 액수가 늘 놀라울 만큼 크니까. 나는 ‘오르르흐흐’로 변한 ‘우르르흐흐’를 떠올리고는 내가 6천 엔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속으로 일본과 벨기에의 부를 비교해보았고, 그 거래가 광활한 불균형의 대양에 떨어진 물 한 방울이라고 결론지었다. 6천 엔을 들고 슈퍼마켓에 가면 노란 사과 여섯 개를 살 수 있었다. 아담이 이브에게 그 정도는 빚졌다고 봐야 했다. 나는 그제야 편한 마음으로 오모테산도를 돌아다녔다.
1989년 1월 30일. 성인으로 일본에서 보내는 열 번째 날. 일본에 돌아온 이후로 매일 아침 커튼을 젖히면 푸르디푸른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긴 세월 동안 몇 톤은 족히 나갈 듯이 무거운 회색 하늘을 향해 커튼을 젖히며 살아온 내가 어떻게 그 맑디맑은 도쿄의 겨울 하늘에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오모테산도의 카페로 내 제자를 만나러 갔다. 수업은 날씨에 집중되었다. 좋은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서로 할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주제인 날씨가 일본에서는 주된, 그리고 의무적인 대화 내용이니까.
일본에서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날씨 얘길 꺼내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린리의 프랑스어 실력이 지난번보다 훨씬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 가르침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다. 그가 따로 공부를 한 게 분명했다. 아마 프랑스어권 여자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게 그에겐 큰 동기부여가 되었을 게다.
여름의 혹독한 더위에 대해 한창 이야기하던 그가 눈을 들어 막 카페로 들어선 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누구예요?” 내가 물었다.
“하라, 같은 과 친구예요.”
청년이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린리가 영어로 소개를 했다. 내가 항의했다.
“프랑스어로 해요. 친구분도 프랑스어 전공이라면서요.”
프랑스어로 소개를 다시 시작한 내 제자는 갑작스런 언어권 변화 때문에 끙끙 매다가 결국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하라, 소개할게, 여긴 내 정부(情婦, 린리가 사용한 단어는 ‘maîtresse’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선생님을 뜻하지만(중학교부터는 professeur다) ‘정부’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 역자 주) 아멜리야.”
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가상한 노력을 기울인 내 제자의 기를 꺾어놓고 싶진 않았으니까. 난 친구 앞에서 그의 잘못을 정정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이 될 테니까.
그날은 우연의 일치가 겹치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대사관에서 일하는 벨기에 아가씨 크리스틴이 카페로 들어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서류 작성하는 걸 도와준 적이 있었다.
내가 그녀를 불렀다.
이번에는 내가 소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마 내친 김에 반복연습을 해보고 싶었는지 린리가 크리스틴에게 말했다.
“소개하죠, 여긴 내 친구 하라, 그리고 여긴 내 정부 아멜리.”
벨기에 아가씨가 날 흘낏 쳐다보았다. 난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크리스틴을 그들에게 소개했다. 그 오해 때문에, 그리고 남자를 지배하려는 여자로 보일까봐 두려워 나는 감히 내 제자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프랑스어로 계속 대화를 이어가는 걸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둘 다 벨기에분이세요?” 하라가 물었다.
“그래요.” 크리스틴이 웃으며 말했다. “프랑스어를 아주 잘 하시네요.”
“아멜리 덕분이에요. 아멜리를 제 정…….”
그 순간, 내가 린리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하라와 린리는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하지만 말을 배우는 데는 개인 교습이 더 낫죠, 아닌가요?”
크리스틴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우리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오해를 풀어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아멜리는 어디서 만났어요?” 그녀가 린리에게 물었다.
“아자부 슈퍼마켓에서요.”
“재밌네요!”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그가 게시판에 붙은 쪽지를 보고 알았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으니까.
여종업원이 새로 도착한 손님들의 주문을 받으러 왔다. 크리스틴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는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했다. 자리를 뜨는 순간, 그녀가 네덜란드어로 나에게 속삭였다.
“잘 생겼네, 잘해봐요.”
그녀가 가고 나자, 그녀가 방금 한 게 벨기에 말이냐고 하라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긴 설명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벨기에에서는 지역에 따라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가 사용된다. : 역자 주)
“그런데도 두 분은 프랑스어를 정말 잘 하네요.” 린리가 감탄조로 말했다.
‘또 오해’, 난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난 더는 기운이 나지 않아 하라와 린리에게 프랑스어로 대화하라고 부탁하고는 얼토당토않은 잘못을 고쳐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날 놀라게 만들었다.
“토요일에 우리 집에 놀러올 거면 히로시마 소스 좀 가져와.”
“야수도 우리하고 같이 놀 거야?”
“아니, 걔는 미나미 집에서 논대.”
난 그들이 도대체 뭘 노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하라에게 물어봤지만 그의 대답 역시 지난 번 수업 때 내 제자가 했던 대답만큼이나 모호했다.
“토요일에 린리하고 같이 우리 집에 놀러 와요.” 하라가 제안했다.
나는 그가 예의상 날 초대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난 그 초대를 덥석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도 혹시 내가 가면 제자가 불편해할까 봐 슬쩍 운을 띄워봤다.
“도쿄 지리를 몰라서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내가 데리러 갈게요.” 린리가 제안했다.
얼씨구나, 나는 하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린리가 과외비가 든 봉투를 내밀었을 때, 나는 지난번보다 기분이 더 찜찜했다. 나는 그 돈을 하라의 집에 들고 갈 선물을 사는 데 쓰기로 마음먹으며 양심을 다독였다.
토요일 오후, 나는 내 숙소 앞에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한 흰색 벤츠가 멈춰서는 것을 보았다. 내가 다가가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운전수는 내 제자였다.
그가 도쿄를 가로질러 달리는 동안, 나는 그의 아버지가 그런 종류의 차량을 주로 타는 야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생각을 속에만 담고 있었다. 린리는 교통이 혼잡해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나는 크리스틴이 네덜란드어로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난 결코 그가 잘 생겼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가 실제로 잘 생겼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바싹 깎아 가파른 목덜미와 미동도 않는 이목구비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를 만나는 게 이번이 세 번째였다. 그는 매번 똑같은 옷만 입었다. 푸른색 진, 흰색 티셔츠, 그리고 검은색 가죽점퍼. 발에는 우주비행사 운동화. 그는 놀라울 정도로 깡마른 체격을 갖고 있었다.
자동차 한 대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끼어들기를 한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운전수가 차에서 내리더니 린리에게 뭐라고 소리를 빽빽 질러댔다. 내 제자는 아주 차분하게 깊이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거친 남자가 씩씩거리며 차로 돌아갔다.
“저 사람이 잘못했잖아요!” 내가 외쳤다.
“그래요.” 린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사과했어요?”
“프랑스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라요.”
“일본어로 말해 봐요.”
“칸코쿠진.”
한국인. 나는 이해했다. 나는 속으로 내 제자의 예절바른 체념을 비웃었다.
하라는 코딱지만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린리가 그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히로시마 소스 상자를 내밀었다. 벨기에산 맥주 팩을 들고 온 내가 멍청하게 느껴졌지만, 일제히 처음 마셔보게 됐다며 반색을 했다.
하라의 아파트에는 배추를 얇게 썰고 있는 마사라는 청년과 에이미라 불리는 미국 아가씨가 이미 와 있었다. 그 아가씨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혔는데, 내가 유일한 서양여자라는 걸 힘들어할까 봐, 나를 편하게 해줄 요량으로 그녀를 초대했다는 심증이 들자 나는 그녀가 더 못마땅했다.
기회다 싶었는지 에이미는 자신이 타국생활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녀가 가장 아쉬워하는 것? ‘피너츠 버터’,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가 입을 열 때마다 첫 마디는 늘 ‘포틀랜드에서는……’으로 시작되었다. 그 외딴 마을이 미국 어느 해안에 위치해 있는지도 모르면서, 있건 말건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세 청년은 예의바르게 그녀의 푸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저급한 반미주의를 혐오했지만, 그것을 이유로 그 아가씨를 싫어하는 걸 스스로 금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추접스런 형태의 반미주의일 거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런 증오심에 빠져들었다.
린리는 생강 껍질을, 하라는 새우껍질을 벗겼으며, 마사는 배추를 잘게 써는 일을 마쳤다. 나는 속으로 그것들을 히로시마 소스와 합쳐보았고, 한창 포틀랜드 얘길 하고 있는 에이미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오코노미야키 만들어 먹으려는 거군요!”
“아세요?” 하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간사이에서 살았을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에요!”
“간사이에서 살았어요?” 하라가 다시 물었다.
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첫 수업 때 내 이야기를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든지. 나는 갑자기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게 만든 에이미의 존재를 축복했고, 떨리는 목소리로 내 과거를 설명했다.
“그럼 국적이 일본이세요?” 마사가 물었다.
“아뇨. 여기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아요. 일본 국적만큼 취득하기 힘든 국적은 아마 없을 거예요.”
“현지에서 태어나면 미국인이 되는 건 쉬운데.” 에이미가 지적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얼른 대화주제를 바꿨다.
“나도 거들고 싶어요. 계란은 어디 있죠?”
“오늘은 손님으로 왔으니 그냥 앉아서 노세요.” 하라가 말했다.
나는 놀 거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이미가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소부.”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아소부, ‘투 플레이(to play)’, 나도 알아요.” 내가 대답했다.
“아뇨, 당신은 몰라요. 아소부는 투 플레이와 같은 뜻이 아니에요. 일본에서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아소부라고 해요.”
그러니까 바로 그거였다. 나는 그것을 나한테 가르쳐준 게 포틀랜드 아가씨라는 사실에 격노했고, 그녀를 도로 제자리에 갖다놓기 위해 현학적이고 유치한 복수극에 뛰어들었다.
“아이 씨(I see). 그러니까 라틴어의 ‘오티움(otium)’과 같은 뜻이군요.”
“라틴어?” 질겁한 에이미가 되물었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쾌재를 부르며 ‘오티움’을 고대 그리스어와 비교했고, 포틀랜드 촌 아가씨에게 문헌학을 전공한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주기 위해 인도 유럽어 어원까지 들먹였다.
나는 그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놓은 다음에야 입을 다물고 ‘해 뜨는 나라’식으로 ‘놀기’ 시작했다. 나는 오코노미야키 반죽을 준비하고 굽는 것을 지켜보았다. 함께 지글지글 익어가는 배추, 새우, 생강 냄새가 나를 16년 전으로, 인자한 성품의 가정부 니시오 상이 그 후로 내가 두 번 다시 먹어보지 못한 그 진미를 만들어주었던 시절로 실어갔다.
하라의 아파트가 너무 좁아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눈에 들어왔다. 린리가 점선을 따라가며 히로시마 소스 포장 팩을 뜯어 낮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홧츠 댓(what’s that)?” 에이미가 신음하듯 말했다. 향수에 젖은 나는 팩을 집어 쓴 자두, 식초, 사케, 그리고 콩 냄새를 들이마셨다. 마치 테트라팩으로 마약을 흡입하기라도 하듯.
잘 구워진 오코노미야키 접시가 내 앞에 놓이자, 나는 문명인의 탈을 벗어던지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은 채 소스를 듬뿍 뿌린 다음 마구 먹기 시작했다.
지독하게 감동적인, 너무나 간단한 동시에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푸짐한 동시에 너무나 멋을 부린 그 대중음식을 메뉴로 내놓는 일본식당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섯 살 적의 나는 니시오 상의 치마폭을 한시도 벗어나지 않았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눈을 허옇게 뒤집은 채 빽빽 소리를 질러대며 그 진미를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곤 했다. 나는 눈을 희멀건하게 뜬 채 관능의 헐떡거림을 내뱉으며 내 오코노미야키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나는 깨끗하게 접시를 비우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마다 식탁예절은 다 달라요.” 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여러분은 방금 벨기에인이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본 거예요.”
“오 마이 갓!” 에이미가 외쳤다.
그녀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촌 아가씨는. 그녀는 뭘 먹든 추잉 검을 씹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라는 훨씬 내 마음에 드는 반응을 보였다. 날 위해 서둘러 새 반죽을 준비했던 것이다.
우린 기린 맥주를 마셨다. 내가 가져간 시메이 맥주(Chimay, 정통 벨기에산 맥주 브랜드 : 역자 주)는 히로시마 소스와 묘하게 잘 어울렸다. 세르부아즈 맥주(cervoise, 호프를 넣지 않고 보리나 밀로 빚은 맥주 : 역자 주)는 반주용으로 이상적이다.
나는 그날 그들이 무슨 얘길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입에 넣고 씹은 것이 온통 날 사로잡았으니까. 내가 내 존재를 뒤흔들어놓는 심원한 기억의 모험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그들과 함께 나누길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흐릿한 감정적 안개를 통해 에이미가 ‘픽셔너리’ 게임(그림을 그려 단어를 알아맞히는 게임 : 역자 주)을 하자고 제안했고, 우리가 그 단어의 서양적 의미로 ‘놀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녀는 곧 자신의 제안을 후회했다. 일본인들은 개념을 그림으로 표현해야 할 때 아주 강한 면모를 보인다. 내가 황홀경에 빠져 소화를 시키는 동안, 번번이 탈락한 미국 아가씨가 화가 나 소리를 지르는 동안, 세 일본 청년이 승부를 겨뤘다. 그녀는 그나마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보다 더 못했으니까. 내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난 감자튀김과 비슷하게 생긴 뭔가를 종이 위에 그려놓았다.
“컴 온!” 세 청년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는 동안 그녀가 이렇게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는 아주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고, 린리가 숙소까지 날 바래다주었다.
다음 수업 시간, 난 그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나를 선생보다는 친구 대하듯 했다. 나는 잘 됐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걸 덜 두려워하는 만큼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테니까. 반면, 그것 때문에 돈 봉투 받는 게 훨씬 더 불편해졌다.
헤어지는 순간, 린리가 내게 왜 매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