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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우리 할머니의 작품을 정식으로 출간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 할머니가 1920년부터 1970년 무렵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집필한 작품들은 21세기인 지금 읽어도 신선하고 재미있다. 등장 인물들이 워낙 자연스러워서 요즘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이들이 등장하는 상황과 장소가 전 세계 사람들의 애정과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들은 이번에 새로 나온 정식 한국어 판을 통해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일부 작품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한국에 새로운 세대의 애거서 크리스티 팬들이 탄생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대표적인 두 명의 주인공으로 기억되는 작가이다. 14권의 작품에 등장하는 마플 양은 영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며 뜨개질과 수다로 소일하는 미혼의 할머니이지만, 놀라운 기억력과 날카로운 두뇌 회전으로 주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그리고 마플 양과 상반되는 성격을 지닌 에르퀼 푸아로는 자신만만하고 콧수염을 포함한 자신의 외모와 벨기에라는 국적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그는 이집트와 이라크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수수께끼를 해결하며 『오리엔트 특급 살인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나일 강의 죽음 Death On The Nile』,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The Murder Of Roger Ackroyd』 등 애거서 크리스티의 여러 대표작에 모습을 드러낸다.
황금가지의 대담하고 참신한 표지와 전반적인 디자인 덕분에 작품의 성격이 잘 살아난 것 같아 기쁘다. 또한 한국 독자들이 할머니의 원작이 지닌 참된 묘미를 느낄 수 있도록 충실한 번역을 위해 애써 준 점도 높이 사고 싶다.
할머니의 작품이 20세기의 그 어떤 작가들보다 많이 팔리고 있는 이유는 나이와 국적에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재미와 감동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모쪼록 한국 독자들도 황금가지에서 선보이는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을 즐겁게 감상하기를 바란다.
매튜 프리차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손자
ACL 이사장
금요일 아침 6시 30분, 루시 앵커텔은 또 다른 하루를 맞이해 크고 푸른 눈을 떴다. 언제나 그렇듯이 눈을 뜨자마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활발한 두뇌로 산적한 문제들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다른 누군가와 이 문제들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레이디 앵커텔은 어젯밤 할로 저택에 도착한 사촌동생 미지 하드캐슬을 말 상대로 점찍고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여전히 우아한 어깨에 네글리제를 걸친 다음, 어젯밤 할로 저택에 도착한 미지의 방으로 향했다. 레이디 앵커텔은 항상 당황스러울 정도로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는 이미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그녀는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미지가 할 대답까지 채워 넣었다.
레이디 앵커텔이 미지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때 그녀의 상상 속 대화는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번 주말이 우리의 골칫거리라는 데 동의하겠지?”
“으음……? 뭐라고요?”
느닷없이 단잠에서 깨어난 미지는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투덜댔다.
레이디 앵커텔이 활기차게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고 덧문을 열었다. 9월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 안으로 들어 왔다.
레이디 앵커텔은 즐거운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새야! 예쁘기도 하지.”
“뭐라고요?”
“어쨌든 지금 문제는 날씨가 아니야. 계속 맑은 날씨가 이어질 것 같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한 방에 모인다면, 분명히 열 배는 더 상황이 악화될 테니까. 내가 그 불쌍한 게르다를 너그럽게 봐주지 않는다면 라운드 게임(편을 가르지 않고 혼자서 하는 카드 놀이 — 옮긴이)은 작년처럼 엉망이 될 테고……. 나중에 헨리에게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어. 물론 게르다도 초대해야지. 존만 초대하는 건 너무 무례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 문제가 커져……. 제일 안타까운 건 게르다가 너무 착하다는 거야. 정말이지 게르다처럼 착한 사람이 머리가 모자란다는 게 이해가 안 돼.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는 걸까? 정말 불공평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루시?”
“주말 파티 말이야. 내일이면 손님들이 도착하잖니. 밤새 그 생각을 하느라 골치가 아팠어. 미지 너랑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넌 똑똑하고 분별력이 있잖니.”
미지가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루시, 지금이 몇 신 줄 알아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내가 원래 시간은 잘 모르잖니.”
“6시 15분이에요.”
“그렇구나.”
루시 앵커텔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대꾸했다.
미지는 무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는 정말 견딜 수 없이 짜증 나는 사람이야! 왜 내가 저런 행동을 참아 줘야 하는 거지?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미지는 루시 앵커텔의 미소를 바라보며 그녀가 평생 동안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외국의 세력가에서 정부 관료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주는 불편함과 짜증, 당황스러움을 참고 견딘 것이다. 남들의 화를 금방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풀도록 만드는 것은 루시 앵커텔의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이었다. 루시가 그 커다랗고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연약한 손을 내밀어 “오! 정말 미안해요…….”라고 말하는 순간, 쌓였던 분노는 눈 녹듯이 금세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지, 정말 미안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지금 얘기하잖아요…….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잠이 다 깨 버렸으니까.”
“아유, 미안해라! 그래도 날 도와줄 거지?”
“주말 일 때문에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레이디 앵커텔은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침대에 걸터앉는 것과는 다르다고 미지는 생각했다. 마치 한순간 요정이 나타난 게 아닌가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레이디 앵커텔은 하얀 손을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럽게 살랑였다.
“하나같이 잘못된 사람들이 와……. 잘못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야. 사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지.”
“누가 오는데요?”
미지는 건강하게 갈색으로 그을린 팔을 들어 이마에 흘러내린 굵고 꼬불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미지의 자태는 조금도 요정 같다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음, 먼저 존과 게르다. 이 둘만 놓고 보면 문제 될 건 없어. 존은 유쾌하고 아주 매력적이지. 하지만 불쌍한 게르다는…… 다들 게르다에게 잘해 줘야 해. 아주아주 친절하게 말이야.”
왠지 모를 반발심에 미지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그 정도로 심각하진 않아요.”
“게르다는 너무 불쌍하잖아. 그 눈을 봐. 말귀가 어두워서 남의 말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 같잖니.”
“그렇지 않아요. 루시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게르다 탓만은 아니라는 거예요. 루시는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대화를 하려면 쫓아가기가 힘겨워요. 말의 곁가지는 죄다 빼고 정신없이 뛰어넘잖아요.”
“원숭이처럼?”
레이디 앵커텔이 모호하게 대꾸했다.
“그럼 크리스토 부부 말고는 또 누가 오는 거예요? 헨리에타?”
그 말에 레이디 앵커텔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그 애가 있어 안심이야. 그 앤 항상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헨리에타는 언제나 쾌활하고 착하잖니. 그 애가 불쌍한 게르다를 많이 도와줄 거야. 작년에도 정말 멋지게 해냈지. 우리가 리머릭? 아니 낱말 맞추기든가 인용문 맞추기든가…… 여하튼 그런 게임을 할 때 다들 끝마치고 큰 소리로 답을 읽을 때까지도 그 불쌍한 게르다는 시작도 못 하고 있지 않겠니. 그게 어떤 게임인지도 몰랐던 거야. 정말 끔찍한 일이지, 그렇지 않니, 미지?”
“왜 다들 이 집에 오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머리 쓰는 게임에 라운드 게임 정도나 할 뿐이고 거기다 이런 기묘한 대화에도 맞장구쳐 줘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 우리가 노력해야지……. 게르다도 분명 지긋지긋할 거야. 가끔씩은 그 애가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구나. 하지만 게르다는 그 자리에 남아서 불쌍하게도 당황한 표정으로…… 또 수치스럽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 존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이었고 말이야.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처럼. 바로 그 순간 헨리에타가 기지를 발휘한 거야. 게르다에게 그 애가 입고 있는 스웨터에 대해 물어보더구나. 정말 시든 배추 잎 같은 칙칙한 색에 완전 싸구려 같은 스웨터였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게르다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직접 뜬 거라고 하지 뭐겠니. 헨리에타가 뜨개질 견본을 달라고 부탁하니까 게르다가 얼마나 행복하고 뿌듯한 표정을 짓던지. 그게 바로 헨리에타야. 언제나 적절한 처신을 할 줄 안다니까. 정말 요령 좋은 아이지.”
“골치 아픈 일을 자진해서 떠맡는 거죠.”
미지가 느릿느릿 대꾸했다.
“그래. 거기다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지.”
“아, 하지만 말로만 그치지도 않죠. 루시, 헨리에타가 그 견본으로 실제 스웨터를 떴다는 거 아세요?”
“어머나. 그리고 그걸 입었대?”
레이디 앵커텔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네, 그걸 입었죠. 헨리에타는 뭐든 끝까지 해내니까요.”
“끔찍했니?”
“아니요. 헨리에타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더라고요.”
“음, 물론 그랬겠지. 그게 바로 헨리에타와 게르다의 차이점이야. 헨리에타는 뭐든 하는 일마다 잘 해내고 결과도 좋지. 자기 일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일을 똑 부러지게 할 줄 아니까. 미지, 주말에 우리가 손님을 잘 치르도록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헨리에타일 거야. 그 애는 게르다를 보살피고, 헨리 또한 즐겁게 해 주고, 존의 성질을 가라앉혀 줄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해.”
“데이비드 앵커텔이요?”
“그래. 막 옥스퍼드에서 내려왔거든. 케임브리지든가? 그 나이 또래의 남자 아이들은 정말 다루기가 힘들어……. 특히 똑똑한 애들은 말이야. 데이비드는 아주 똑똑하지. 더 나이가 들 때까지 똑똑해지지 못하도록 막았으면 싶을 정도라니깐. 그런 애들은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면서 손톱을 물어뜯곤 하지. 이제 여드름이 솟고 울대뼈가 나오는 사춘기잖니.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거나 반항적인 태도로 대들거나 둘 중 하나야. 그래도 아까 말했듯이 난 헨리에타를 믿어. 그 애는 아주 요령 좋게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줄 아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조각가를 존경하잖니? 게다가 헨리에타는 동물이나 어린아이들의 두상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작품들까지 만드니까. 작년 신진 예술가 전시회에 내놓은 금속과 석고로 만든 희한한 것들 있잖아. 꼭 쓸데없이 복잡한 사다리 같아 보였는데. 그 작품명이 「상승하는 사고(思考)」던가…… 뭐 그런 제목이었지? 데이비드 같은 사춘기 남자아이에게는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어…… 내가 보기엔 엉터리 같지만.”
“오, 루시!”
“그래도 헨리에타의 작품 중에서 꽤 마음에 드는 것도 있었어. 가지가 늘어진 물푸레나무 조각상 같은 거 말이야.”
“헨리에타는 정말 천재적인 조각가예요. 게다가 성격도 좋고요.”
미지의 말에 레이디 앵커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가로 가볍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멍하니 커튼 끈을 만지작거렸다.
“왜 도토리일까, 궁금하네.”
“도토리요?”
“커튼 끈에 달려 있는 도토리 말이야. 문에 달려 있는 파인애플처럼. 그러니까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어? 솔방울이나 배를 쓸 수도 있는데 항상 도토리를 달아 놓잖아. 사료용 도토리. 왜 낱말 맞추기 하다가 나온 적 있잖아…… 돼지 먹이로도 쓰이는 거.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희한해.”
“두서없는 소리는 그만둬요, 루시. 주말 파티 문제를 이야기하러 온 거잖아요. 게다가 전 왜 그 준비에 노심초사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라운드 게임을 제대로 하고 싶다면 게르다에게 이야기할 땐 찬찬히 설명해 주면 될 테고, 똑똑한 데이비드는 헨리에타에게 맡기면 될 텐데 뭐가 문제예요?”
“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에드워드가 오거든.”
“오, 에드워드.”
미지는 그 이름을 말한 후 잠시 침묵했다. 이윽고 조용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에드워드를 초대하신 거예요?”
“미지, 내가 초대한 게 아니야. 그냥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자길 초대할 건지 알려 달라고 전보를 보내지 않겠니. 에드워드가 어떤 사람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어찌나 예민한지. 내가 안 된다고 대답했더라면 아마 다시는 우리 집에 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미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드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순간 미지의 눈앞에 에드워드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선명히 보이는 듯했다. 루시의 비현실적인 매력, 즉 우아함, 무심함, 아이러니함을 닮은 얼굴이었다…….
“사랑스러운 에드워드.”
루시의 말 한마디가 미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루시는 성급하게 말을 이었다.
“헨리에타가 에드워드와 결혼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애는 정말로 에드워드를 좋아해, 분명하다니까. 크리스토 부부네만 오지 않는다면…… 존 크리스토는 언제나 에드워드에게 좋지 않은 영향만 미치니 말이야. 둘이 만나면 존은 점점 더 커지고 에드워드는 점점 더 작아지는 것 같아.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어?”
다시 한번 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주말 약속은 오래전에 잡힌 거라 크리스토 부부를 뺄 수가 없어. 하지만 미지, 왠지 이번 주말은 아주 힘들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어. 데이비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화만 낼 테고, 어리숙한 게르다를 도와줘야 하는 데다, 존은 의기양양해하고 에드워드는 주눅만 잔뜩 들 테니…….”
“그리 좋은 조합은 아니네요.”
미지가 중얼거리는 말에 루시는 미소를 짓더니 관조하듯 말했다.
“때로는 일이 저절로 해결되기도 하지. 일요일 점심 식사에 범죄 해결사 한 분을 초대했어. 기분 전환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범죄 해결사요?”
“달걀처럼 머리가 동글동글한 사람이야. 헨리가 고등 판무관으로 바그다드에 있을 때, 그 사람도 무슨 문제를 해결한다고 바그다드에 와 있었거든. 아니 그 후던가? 그 사람이랑 대사관 직원들이랑 함께 점심 식사를 했지. 흰색 연미복을 입고 단춧구멍에는 분홍색 꽃을 끼운 채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신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난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서 그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안 나. 사람이 이미 죽었는데 그 이유가 뭐가 중요하겠어? 끝난 일을 가지고 법석을 떠는 건 우스운 일이지…….”
“이 동네에 무슨 범죄라도 일어난 거예요?”
“오, 아니야. 그 사람이 이 동네에 별장을 하나 샀대. 너도 알잖니, 왜 근처에 생긴 우스꽝스러운 신식 별장들 말이야. 정말이지 움직일 때마다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칠 정도로 낮은 천장에…… 배관 시설은 쓸 만하지만 정원은 아주 엉터리야. 런던 사람들은 그런 데를 좋아하지. 또 다른 별장에는 웬 여배우가 하나 산다고 하더구나. 물론 우리처럼 1년 내내 사는 건 아니지. 그래도…….”
레이디 앵커텔은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래도 별장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미지, 날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제가 그렇게 도움이 된 것 같진 않은데요.”
“그러니?”
루시 앵커텔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부턴 푹 자고 아침 식사 때 일어나렴. 그리고 일어나면 얼마든지 무례하게 굴어도 좋아.”
“무례하게라고요?”
미지는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오! 알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분부대로 하죠.”
레이디 앵커텔은 미소를 짓고는 방을 나섰다. 열려 있는 욕실 문앞을 지나다가 가스풍로와 주전자를 발견한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차를 좋아하지……. 그리고 미지는 앞으로 몇 시간은 더 잘 테니 차를 끓여 주자.’
그녀는 가스풍로에 주전자를 올려놓고는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레이디 앵커텔은 남편의 방문 앞에 멈춰 서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유능한 공직자인 헨리 앵커텔 경은 아내를 잘 알고 있었다. 아내를 너무나도 사랑했지만 아침잠을 방해받는 것은 싫었던 것이다.
레이디 앵커텔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헨리와도 의논을 해 보고 싶지만 나중에 해도 될 것이다. 열린 창문 옆에 서서 잠시 밖을 내다보고는 하품을 했다. 다시 침대로 들어간 그녀는 머리를 베개에 뉘었고 잠시 후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욕실에서는 주전자가 끓고 또 끓었다…….
“주전자 또 하나 버리게 생겼네요, 거전 씨.”
가정부 시먼스가 말했다. 집사인 거전은 하얗게 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시먼스에게서 다 타 버린 주전자를 받아 들고 식기실로 가, 주전자 여섯 개를 저장해 둔 찬장 아래에서 새로 하나를 꺼냈다.
“여기 있어요, 시먼스 양. 주인마님께서는 절대 모르실 거예요.”
“주인마님께서는 자주 이러시나요?”
시먼스의 질문에 거전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주인마님께서는 정말 마음씨가 고우시지만 그만큼 건망증도 아주 심하시죠. 그러니 이 집에서는 주인마님이 당황하거나 걱정하지 않으시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아야 해요.”
헨리에타 세이버네이크는 작은 점토 조각을 동그랗게 말아 적당한 자리에 붙였다. 그녀는 신속하고 능숙한 솜씨로 소녀의 두상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귓전에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약간은 천박하고 칭얼대는 목소리를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세이버네이크 씨, 저는 정말로 제가 옳다고 생각해요! 저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 정말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예요?’ 세이버네이크 씨, 저는 여자라면 그런 통념들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저는 ‘난 그런 말을 듣는 데 익숙하지 않아요. 정말 당신은 아주 추잡한 상상만 하는군요!’라고 쏘아 줬죠. 물론 분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지만, 필요할 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믿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세이버네이크 씨?”
“아, 물론이죠.”
헨리에타를 잘 아는 사람이라도 그녀가 건성으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열성적인 목소리였다.
“‘만약 당신 부인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거야 어쩔 수 없죠!’라고 말해 줬어요. 세이버네이크 씨, 그 일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가는 곳마다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하지만 절대 제 잘못은 아니에요. 오히려 남자들이 너무 유혹에 약한 거죠, 안 그래요?”
모델은 교태스럽게 깔깔거렸다.
“지독할 정도죠.”
헨리에타는 눈을 반쯤 감은 채 대꾸했다.
‘훌륭해. 눈꺼풀 바로 아래의 면이 아주 훌륭하게 됐어……. 그리고 다른 쪽 면이 올라와 합쳐져야지. 턱의 각도는 이상해……. 저기를 긁어내고 다시 만들어야겠어. 골치 아프네.’
생각에 빠져 있던 헨리에타는 이번에는 따뜻하고 호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힘들었겠네요.”
“질투란 건 너무 불합리한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세이버네이크 양. 그리고 너무 편협하죠.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그저 자기보다 더 젊고 예쁜 존재를 부러워하는 것뿐이라고요.”
두상의 턱을 다시 손질하고 있던 헨리에타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네, 물론이죠.”
헨리에타는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법을 몇 년 전부터 익혀 두었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 브리지 게임을 할 수도,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논리 정연한 편지를 쓸 수도 있었다. 지금은 자신의 손가락 아래서 나우시카의 두상이 제 모습을 찾아가도록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으며, 아주 사랑스럽고 어린아이 같은 저 입술에서 나오는 천박하고 혐오스러운 수다쯤은 조금도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헨리에타는 수월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는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모델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전문 모델은 대부분 그렇지 않지만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 꼼짝없이 있어야 하는 게 불편한 아마추어 모델들의 경우에는 몸 대신 입을 놀려 자신을 표현하려 했다. 헨리에타의 일부분은 모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했지만, 저 깊숙이에 있는 진짜 헨리에타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이지 저속하고 비열한 데다 혐오스러운 여자야……. 하지만 저 눈…… 정말이지 사랑스러워. 사랑스러운 눈이야…….’
눈을 작업하는 동안은 모델이 마음껏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입을 만들 때면 모델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할 작정이었다. 저렇게 완벽한 곡선을 가진 입에서 저렇게 천박한 말이 나오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지.
헨리에타는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 젠장. 저 아치형 눈썹을 망쳐 버렸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지? 뼈를 지나치게 부각시켰어……. 날카롭지만 두껍지는 않아…….’
헨리에타는 인상을 찌푸린 채 뒤로 물러나 점토로 만든 두상과 단상에 앉아 있는 모델을 비교해 보았다.
도리스 손더스는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왜 당신 남편이 저에게 선물을 주어서는 안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런 일로 오해를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정말이지 아주 근사한 팔찌였어요, 세이버네이크 씨. 정말 끝내주게 멋졌다니까요. 물론 그 불쌍한 인간은 그 팔찌를 살 돈도 없었겠지만 정말 자상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절대 그 팔찌를 돌려줄 생각은 없지만요!”
“그럼요, 그럼요.”
헨리에타가 중얼거리며 대꾸했다.
“게다가 그 사람이랑 저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요. 그렇고 그런 추잡한 일 말이에요……. 그런 사이는 절대 아니었죠.”
“그럼요. 분명 그러셨겠죠…….”
이제 눈썹이 정리됐다. 그다음 30분 동안 헨리에타는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했다. 정신없이 두상을 만지는 사이 그녀의 이마며 머리카락에 점토 덩어리가 붙었다. 그녀의 눈은 맹렬한 열정으로 가득했다. 거의 다 됐어……. 나우시카(그리스 신화에서 난파한 영웅 오디세우스를 구조한 여인. 아름다우면서도 용감한 여성상으로 추앙받는다 — 옮긴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이제 몇 시간 후면, 헨리에타는 지난 열흘 동안 그녀를 괴롭혔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나우시카……. 지난 열흘 동안 헨리에타는 나우시카였다. 나우시카와 함께 잠에서 깨었으며, 나우시카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나우시카와 함께 외출을 했다. 헨리에타의 마음은 온통 아름답지만 멍한 나우시카의 얼굴을 찾는 데 쏠려 있어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 때에도 헨리에타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가 않았다. 수많은 모델들을 만나 보고, 그리스인 모델을 쓸까도 생각했지만 깊은 실망감만 맛보고 말았다…….
헨리에타는 특별한 무언가를 원했다. 영감을 불어넣어 줄 특별한 무언가를. 일부분이나마 마음속에 자리 잡은 그 구상을 완전하게 일깨워 줄 특별한 무언가를. 수도 없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느라 육체는 점차 지쳐 갔다. 헨리에타를 몰아붙이고 괴롭게 만든 것은 원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는 절박하고도 그칠 줄 모르는 열망이었다.
거리를 걷는 헨리에타의 눈은 텅 비어 있었으며,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헨리에타는 온 힘을 다해 그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히 떠올려 보려 애썼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데다 비참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눈앞이 선명해졌다. 헨리에타는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종착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멍하니 올라탄 버스 안이었다……. 그렇다. 드디어 나우시카를 발견한 것이다! 자그마하고 어린아이 같은 얼굴, 반쯤 벌린 입술, 그리고 눈…… 사랑스러우면서도 텅 비어 있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
그 소녀는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헨리에타는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마음을 가라앉힌 헨리에타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어 내야 했다……. 절망스러웠던 탐색의 고통은 이제 끝이다.
“실례지만 잠시만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저는 전문 조각가예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당신 머리가 마음에 들어요.”
헨리에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으므로, 매력적인 모습으로 상냥하게 굴었다.
도리스 손더스는 갑작스러운 헨리에타의 말에 당황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동시에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제 머리만 필요하시다면 그건 힘들겠죠. 게다가 전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어요.”
적당한 망설임과 함께 보수에 대한 의구심도 서려 있었다.
“물론 전문 모델에 합당한 보수는 드릴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우시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도리스 손더스는 헨리에타의 작업실에 앉아 자신의 매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사실, 영원히 자신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물론 그녀는 작업실에 있는 헨리에타의 다른 작품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을 즐기는 동시에 열심히 자기 말을 들어 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모델 옆 테이블에는 그녀의 안경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근시가 너무 심해서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지만, 허영심 때문에 되도록 안경을 쓰지 않았으며 때로는 거의 앞이 보이지 않은 채로 길을 걷는 게 더 좋다고 헨리에타에게 털어놓았다.
헨리에타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텅 비어 있는 듯한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헨리에타는 갑자기 조각 도구를 내려놓고는 활짝 기지개를 켰다.
“좋습니다. 이제 끝났어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아뇨, 고마워요, 세이버네이크 씨.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끝난 건가요? 이렇게 빨리요?”
헨리에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작품이 완성된 건 아니에요. 조금 더 마무리 작업을 해야죠. 하지만 더 이상 모델을 서지는 않으셔도 돼요. 원하는 건 얻었으니까요……. 기본 틀은 다 됐어요.”
모델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왔다. 다시 안경을 쓰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수함과 모호하고 순진한 매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저 경박하고 예쁘기만 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헨리에타 곁으로 다가와 점토로 만든 두상을 바라보았다.
“아, 저랑 별로 닮지 않았네요. 그렇지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실망이 담겨 있었다.
헨리에타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이건 초상화가 아니니까요.”
정말이지, 점토로 만든 두상은 모델과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헨리에타가 본 나우시카의 본질은 두 눈과 광대뼈의 선에 있었다. 이 두상은 도리스 손더스가 아니라 시인이 창조해 낸 눈먼 소녀였다. 입술은 도리스의 입술처럼 반쯤 열렸지만, 도리스의 입술은 아니었다. 이 입술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할 것이며, 도리스의 생각이 아닌 다른 생각들을 말할 것이다…….
이목구비 중 어느 하나도 뚜렷한 것은 없었다. 그것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기억 속의 나우시카였다.
모델이 다시 의심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조금 더 손을 본다면 더 나아지겠죠……. 정말 제가 더 필요하지 않으세요?”
“고맙지만 이젠 됐어요.”
헨리에타는 속으로 ‘더 이상 필요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라고 외쳤다.
“정말 멋지게 해내셨어요. 고맙게 생각해요.”
헨리에타는 능숙하게 도리스를 쫓아낸 다음 작업실로 돌아와 블랙커피를 마셨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끔찍할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행복하고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아, 정말 다행이야. 이제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군.’
그 즉시 그녀의 생각은 존에게로 옮겨 갔다.
‘존.’
존을 떠올리자마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며 심장이 갑작스레 뛰기 시작했다. 기운이 솟았다.
‘내일이면 할로에 간다……. 존을 볼 수 있어.’
그녀는 기다란 소파에 푹 파묻혀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연거푸 세 잔이나 마시고 나자, 활기가 되돌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돌아와서 정말 좋아……. 더 이상 불안하고 끔찍한 열정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아. 무언가를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거리를 헤맬 필요가 없어서 좋아! 이젠 열심히 일하는 것밖엔 남지 않았어……. 그쯤이야!
그녀는 빈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우시카에게 다가갔다. 잠시 나우시카를 바라보는 동안, 차츰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뭐가 잘못된 거지?
텅 빈 눈.
아무것도 보지 않는 텅 빈 눈은 무언가를 볼 수 있는 눈보다 더 아름다웠다……. 텅 빈 눈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 놓는다……. 나우시카가 그런 눈을 가졌지? 아닌가?
그래, 분명 그런 눈이야……. 하지만 그것 외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의도하거나 생각하지 않은 무언가가……. 구조는 좋아. 그래, 확실해. 하지만 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 이 왠지 모르게 천박한 듯한 느낌은?
작품에는 천박하고 비열한 느낌이 어려 있었다.
물론 헨리에타는 모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말이 귀와 손끝에 스며, 작품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녀는 이제 다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헨리에타는 재빨리 조각상에서 몸을 돌렸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래, 분명 착각이었을 거야. 아침이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혼자 생각했다.
‘사람이란 건 정말 나약한 존재야…….’
헨리에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작업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숭배자」 조각상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건 괜찮다. 훌륭한 배나무로 나뭇결을 근사하게 살려 냈다. 이 작품은 아주 오랫동안 간직할 것이다.
헨리에타는 비판적인 눈길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그래, 정말이지 훌륭해.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그녀가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이자 인터내셔널 그룹에 출품할 작품. 그래, 충분히 전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야.
그 작품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겸손함, 강인한 목 근육, 굽은 어깨, 약간 치켜든 얼굴……. 평범한 얼굴이지만 숭배라는 행위가 그 인물이 가진 개성을 이끌어 내고 있었다.
그래, 복종, 동경…… 그리고 맹목적인 숭배를 넘어서는 지극한 헌신.
헨리에타는 한숨을 쉬었다. 존이 그렇게 화를 내지만 않았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화를 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헨리에타는 존의 분노가 그조차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해 주는 거라고 생각했다.
존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전시할 순 없어!”
헨리에타 또한 단호하게 받아쳤다.
“난 전시할 거예요.”
그녀는 천천히 나우시카에게로 되돌아갔다. 다시 고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토로 만든 두상에 물에 뿌리고는 축축한 천으로 덮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급한 일은 끝났다. 핵심적인 기본 틀은 다 됐으니까. 그저 인내심만 발휘하면 되는 것이다.
앞으로 3일 동안은 루시와 헨리, 미지…… 그리고 존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온몸의 근육을 하나하나 쭉 늘리다가 문득 자신이 얼마나 피곤한 상태인지를 깨달았다.
헨리에타는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후 침실로 갔다. 등을 대고 누워 천장 채광창으로 비치는 별 한두 개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언제나 켜 두는 유리 갓을 씌운 작은 전등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좀 뻔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창성이 없었다.
그래도 이만큼 성장했다는 게 다행이야…….
그리고 이제 자자! 진한 블랙커피를 마시긴 했지만 원한다면 언제든 잠에 들 수 있었다. 오래전, 그녀는 언제든 잠에 빠져드는 법을 익혀 두었다.
생각을 하되 생각에 이끌려 가지 말고, 생각이 머릿속에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절대 생각을 붙잡거나 이끌려 가지 말고 집중하지도 말고 그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절로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집 밖에서는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떠들썩한 고함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헨리에타는 멍하니 그 소리를 들었다.
저 자동차 소리는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야……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가 있는 나무 이파리처럼 줄무늬가 있지…… 나뭇잎과 그림자…… 뜨거운 정글…… 그리고 강을 따라 내려가는 거야…… 넓은 열대의 강…… 바다까지 쭉 이어져서 정기선이 출발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시끌벅적한 목소리……. 갑판 위에 서 있는 그녀와 존…… 그녀와 존이 출발한다…… 푸른 바다, 그리고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짓고…… 메이슨 도레(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 옮긴이)에서 존과 함께 했던 저녁 식사 때처럼…… 불쌍한 존, 그렇게 화를 내다니……! 밤공기를 쐬러 밖으로 나갔지…… 자동차에 올라타서 기어를 넣는 느낌…… 매끄럽고 부드럽게 런던을 질주하듯 빠져나가, 셔블 다운을 지나…… 나무들, 근사한 나무들…… 할로 저택…… 루시…… 존…… 존…… 리지웨이 병(病)…… 사랑하는 존…….
이제 그녀는 무의식,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곧 날카로운 불쾌함, 왠지 모를 죄의식이 그녀를 잠에서 잡아끌었다. 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회피한 무언가가 있었다.
나우시카?
천천히, 마지못해 헨리에타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불을 켜고 두상 곁으로 다가가 천을 벗겼다.
그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우시카가 아니야…… 도리스 손더스야!
극심한 고통이 헨리에타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다.
“조금만 고치면 괜찮을 거야. 조금만 고치면 괜찮을 거야…….”
그러다 다시 중얼거렸다.
“멍청하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잖아.”
지금 당장 하지 않는다면…… 내일이면 그럴 용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마치 자신의 육체를 파괴하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일…… 그래,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어미 고양이가 딱 이런 심정일지 모르겠다고 헨리에타는 생각했다.
숨을 재빨리 들이마신 그녀는, 두상을 잡고 뭉그러뜨린 다음 커다란 통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점토로 뒤범벅이 된 손을 내려다보며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자아를 뒤틀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손에 붙은 점토를 씻어 냈다.
이상한 공허함, 그와 동시에 평화로움을 느끼며 침대로 돌아왔다.
나우시카는 다시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이미 한 번 태어났지만 오염되었고 죽어 버렸다.
‘이상한 일이지…….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들이 내면으로 스며드는지.’
절대 귀를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도리스의 천박하고 비열한 마음이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어 무의식적으로 손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제 한때 나우시카, 아니 도리스였던 것은 점토 덩어리, 곧 다른 무언가로 새로이 태어날 원료로 되돌아갔다.
헨리에타는 꿈꾸듯 생각했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일까? 우리가 개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까? 누구의 생각? 하느님의 생각?’
이건 페르 귄트(동명 희곡의 주인공.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도 평범하기 때문에 ‘거대한 국자’에 담겨져 녹은 다음 새로운 영혼을 창조하는 데 쓰이게 될 거라는 말을 듣고 그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 옮긴이)가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단추를 만들기 위해 쇠붙이를 녹이는 국자에 담겨지면서…….
‘온전한 인간, 진정한 인간인 나는 어디 있는가? 이마에 신의 각인이 새겨진 나는 어디 있는가?’
존도 이런 기분이 들었던 걸까? 지난밤에 그는 너무나도 지쳐 있었고 너무나도 의기소침해 있었다. 리지웨이 병……. 그 어떤 책을 찾아봐도 리지웨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멍한 상태에서 헨리에타는 리지웨이 병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존 크리스토는 진료실에 앉아 오전의 첫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가 상세하게 증상을 늘어놓자, 그는 격려하는 듯한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따금씩 이해한다는 것 같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존은 환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지시 사항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환자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퍼져 나갔다. 크리스토 선생님은 정말 훌륭해! 환자들에게 관심이 많고 진심으로 염려해 주시잖아.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더 건강해진 것 같다니까.
존 크리스토는 종이 한 장을 앞으로 끌어당겨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이 환자에게는 변비약을 처방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미국에서 새로 특허를 낸 이 약은 셀로판지에 멋지게 포장되어 있는 데다, 특이하게도 연한 살구색으로 코팅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만큼 비싸기도 할뿐더러, 그 약을 구비해 둔 약국도 많지 않아 구하기도 어려운 약이었다. 그 약을 사려면 워더가(街)에 있는 작은 약국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아마도 두세 달은 그 약으로 버틸 수 있겠지만, 그다음에는 다른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 것이다. 이 환자를 위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미 쇠약해진 육체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약도 효과를 낼 수는 없다. 늙은 크랩트리 부인과는 전혀 달랐다…….
지루한 아침이다. 돈을 벌었다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정말이지, 존 크리스토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했다! 병에 걸린 여자들이 지긋지긋했다. 게다가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일시적으로 병을 완화시키는 정도였다. 때로는 자신이 하는 일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문마저 들었다. 그럴 때면 항상 세인트크리스토퍼 병원과 마거릿 러셀 병동의 길게 늘어선 침대, 이가 몽땅 빠진 입을 벌리며 씩 미소를 짓던 크랩트리 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존과 크랩트리 부인은 서로를 이해했다! 그녀는 옆 침대에 누워 있는 약해 빠진 여자와 달리 전사(戰士)였다. 그녀는 존과 마찬가지로 살기를 원했다. 빈민가에 사는 데다 술주정뱅이 남편에 제멋대로인 아이들, 낮이나 밤이나 끝없이 많은 건물의 끝없이 많은 바닥을 닦아 내야 하는 그녀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하느님이나 알고 계실 것이다. 끊임없는 노역에 즐거움이라곤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살고 싶어 했다……. 그녀는 존 크리스토가 그러하듯 인생을 즐겼다! 두 사람이 즐긴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 아니라 삶 그 자체…… 살아 있다는 그 자체였다. 정말 이상한 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존 크리스토는 헨리에타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존은 환자를 문 앞까지 마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뜻하고 상냥한 태도로 격려하듯 환자의 손을 잡았다. 목소리 또한 관심과 염려로 가득해서 상대방에게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환자는 기운이 다시 솟아나, 행복에 빠져 돌아갔다. 크리스토 선생님이 이렇게나 관심을 가져 주시다니!
환자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존 크리스토는 환자에 대해 말끔히 잊어버렸다. 사실 환자가 진찰실에 있는 동안에도 그녀의 존재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저 자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전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님에도 환자들은 그의 말과 행동에서 힘을 얻었다. 의사로서 자동적인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나면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 축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 정말 피곤해.’
그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이제 환자 한 명만 더 보면 주말에는 쭉 쉴 수 있다. 그 생각을 하기만 해도 즐거웠다. 알록달록 단풍이 든 나뭇잎과 9월의 부드럽고 촉촉한 바람…… 숲으로 이어지는 길…… 모닥불…… 루시, 세상에서 가장 특이하고 유쾌한 루시…… 호기심이 많고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루시. 그는 영국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루시와 헨리의 초대가 좋았다. 그리고 할로 저택은 그가 아는 가장 유쾌한 저택이었다. 그는 일요일이면 헨리에타와 숲속을 거닐곤 했다. 언덕과 봉우리를 따라서…… 헨리에타와 함께 걸으면 이 세상의 모든 환자들에 대해 잊을 수가 있었다. 헨리에타가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갑자기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아마 헨리에타는 병에 걸리더라도 절대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겠지!’
아직 환자가 한 명 남았다. 책상 위 벨을 눌러야 한다. 하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이미 늦어 버렸다. 위층 식당에는 이미 점심 식사가 차려져 있을 테고, 게르다와 아이들이 기다릴 것이다. 빨리 남은 환자를 봐야 한다.
그럼에도 존 크리스토는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너무나 피곤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피곤했다.
최근 들어 이러한 피로감이 점점 더했다. 인식은 하고 있지만 왜인지는 알 수 없는, 끊임없이 커져만 가는 짜증 때문이었다. 덕분에 불쌍한 게르다만 고생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순종적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언제나, 잘못한 게 존일지라도 모든 걸 무조건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어떤 날은 게르다의 행동이나 말이 짜증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짜증을 돋우는 것은 바로 지난날 게르다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부분이었다. 게르다의 인내심과 이타심, 무조건 남편에게 복종하는 순종적 태도……. 바로 그러한 것들에 기분이 언짢았다. 게다가 게르다는 한 번도 남편의 불같은 성미에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주장을 먼저 내세우지도,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게르다와 결혼한 건 바로 그 때문이었잖아, 안 그래?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산미겔에서 보낸 그해 여름 이후로…….)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게르다에게서는 짜증을 느낄 뿐일 부분들을 헨리에타에게는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다니 말이다. 헨리에타에게서 짜증을…… (아니, 그건 틀린 표현이다. 짜증이 아니라 분노일 것이다.) 분노를 느끼는 부분은 변함없이 정직하기만 한 그에 대한 태도였다. 그건 헨리에타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모순된 것이었다. 한번은 헨리에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신처럼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처음이야.”
“그럴지도요.”
“당신은 사람들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서슴지 않잖아.”
“내겐 그게 더 중요한걸요.”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요.”
“그렇다면 왜 나에게는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해 주지 않는 거야?”
“내가 그러길 바라요?”
“그래.”
“존,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잘 알잖아.”
자자, 이제 헨리에타 생각은 그만두자. 오늘 오후면 그녀를 만나게 될 테니까.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우선이다! 벨을 울리고 그 빌어먹을 마지막 환자를 보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병약한 노부인들! 10분의 1만 진짜 병이고 나머지 10분의 9는 우울증에 불과할 것이다! 쓸데없이 돈 낭비를 하느니 건강이 나쁘다는 걸 즐기면서 살아갈 순 없는 걸까? 그쪽이 이 세상의 모든 크랩트리 부인에게도 공평한 일일 텐데.
그래도 여전히 그는 꼼짝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너무너무 피곤했다. 아주 오랫동안 피로가 쌓이고 쌓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랐다.
갑작스럽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집에 가고 싶어.’
존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이 든 걸일까? 이게 무슨 뜻이지? 집이라니? 그에게는 고향집이라는 게 없었다. 부모님은 인도에 살았기 때문에 존은 어릴 적 고모 집부터 삼촌 집까지 여러 친척집을 전전했고, 명절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존이 가진 집은 현재 살고 있는 할리가(街)의 집이었다.
그렇다면 현재 사는 이 집을 생각한 것일까? 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다운 호기심이 일었다. 갑자기 떠오른 그 충동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집에 가고 싶어.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미지가.
그는 눈을 반쯤 감았다……. 무언가 생각날 것 같았다.
미처 의식적으로 떠올리기도 전에 눈앞에 깊고 푸른 지중해와 야자수, 선인장과 선인장 열매가 선명히 보였다. 뜨거운 여름날의 먼지 냄새,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에 누워 있다가 바닷물에 몸을 담갔을 때의 시원한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산미겔!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약간 혼란스러웠다. 지난 몇 년 동안 산미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분명 그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곳에서의 일은 그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벌써 12년, 아니, 14년…… 15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옳은 일을 한 것이다! 그의 판단은 분명 옳았다! 당시 그는 베로니카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 있었지만 잘되지는 않았다. 베로니카는 그의 육체와 영혼을 모조리 휘어잡으려 했다. 그녀는 구제불능의 이기주의자였으며 그러한 점을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베로니카는 원하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었지만, 존 크리스토만은 손에 넣지 못했다. 존은 베로니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그가 베로니카에게 나쁜 짓을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존 크리스토가 베로니카를 차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존은 자신의 인생을 살고자 한 것뿐이었으며, 베로니카와 함께라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베로니카에게는 자신의 인생이 전부였으며, 존은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었다.
존이 할리우드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거절하자 베로니카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러고는 무시하듯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의사가 되고 싶다면 할리우드로 가서 학위를 따면 돼. 물론 쓸모없는 짓이지만. 당신은 벌써 먹고살기 충분할 만큼 벌었잖아. 그리고 난 거기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될 테고.”
존 크리스토는 울컥해서 대꾸했다.
“난 내 직업이 정말 좋아. 난 래들리와 함께 일할 거라고.”
젊고 열정적인 그의 목소리는 두려울 정도였다.
베로니카는 코웃음을 쳤다.
“그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노인네랑?”
“그래, 그 우스꽝스럽고 초라한 노인네는 프랫 병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연구 업적을 세웠지…….”
분노하는 존의 말을 베로니카가 가로챘다.
“누가 프랫 병 따위에 신경이나 쓰겠어? 캘리포니아 기후는 정말 매혹적이야.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데?”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이 같이 가지 않는다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당신을 원해, 존……. 난 당신이 필요해.”
그러나 존은 베로니카에게 할리우드를 포기하고 자기와 결혼해 런던에 정착하자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베로니카는 기분이 좋은 듯했지만 자신의 뜻을 굽히지는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