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넘어 일터와 일상의 영역에서 구체화될 수 있는 길을 찾는 목회자이다. 성경적 가치관과 현실 세계 사이의 조화를 찾는 데 관심이 많은 일터 개발원 연구위원이며 그 연장선상으로 유튜브 채널 ‘일터와 일상’에 관련 콘텐츠를 공유하고 있다. 초대 교회 공동체성을 회복하고 성경적 공동체를 세워 가고자 열음터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다. 양질의 신학 및 신앙 콘텐츠를 전달하고 소통하고자 신학인강 고백아카데미와 도서출판 고백아카데미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건국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M.Div.)와 신학 석사(Th.M.) 학위를 받았으며, 동 대학원에서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미션 디모데》(공저, 두란노),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고백아카데미), 《메가처치를 넘어서》,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이상 포이에마) 등이 있다.
셉티무스 씨, 출근하세요?
지은이 | 신광은
초판 발행 | 2024. 11. 20
전자책 발행 | 2025. 1. 1
등록번호 | 제1988-000080호
등록된 곳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65길 38
발행처 |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영업부 | 2078-3333 FAX | 080-749-3705
출판부 | 2078-3331
정가 : 22,000원
전자책 정가 : 15,400원
ISBN 978-89-531-4963-2 03230
e-ISBN 978-89-531-5002-7 05230
독자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8-20절의 정신에 따라 첫째 목회자를 돕는 사역과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사역, 둘째 세계선교TIM 와 문서선교단행본·잡지 사역, 셋째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 사역, 그리고 가정·상담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2월 22일에 창립된 두란노서원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역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목차
| 추천사 |
| 감사의 글 |
| 프롤로그 | 두 가지 과제
1◆
셉티무스의 소명 이야기
셉티무스, 크리스천이 되다
셉티무스, 천국을 맛보다
셉티무스, 소명을 깨닫다
셉티무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기로 하다
셉티무스, 왕업에 더욱 힘쓰다
셉티무스,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넘어지다
2◆
코르넬리우스의 소명 이야기
코르넬리우스, 회심하다
코르넬리우스, 믿음의 사업가로서 거듭나다
코르넬리우스, 생업을 넘어 왕업에 이르다
코르넬리우스, 리더로 성장하다
코르넬리우스, 좁은 문을 선택하다
3◆
하나님 나라가 일터로 임할 때
천국의 미래성과 현재성
일터와 하나님 나라
4◆
다시 생각하는 소명
소명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 왜곡
다시 생각하는 소명
5◆
일의 기원: 왕업, 생업, 죄업
왕업(King’s Work)의 탄생
생업(Living Work)의 탄생
죄업(Sinful Work)의 탄생
6◆
일의 운명: 죄업, 생업, 왕업
죄업의 운명
생업의 운명
왕업의 운명
7◆
크리스천의 일의 원칙 1: 생업에 힘쓰라
생업과 일반 은총
생업의 원칙
생업과 세속적인 일
8◆
크리스천의 일의 원칙 2: 생업이 왕업 되게 하라
왕업으로의 승화 원칙
일과 안식
9◆
크리스천의 일의 원칙 3: 왕업에 더욱 힘쓰라
직분 소명의 신학
거저 주라
왕업에 더욱 힘쓰라
| 에필로그 | 일터에서 하늘은 사라지지 않는다
| 주 |
| 추천사 |
이 책은 일터 사역의 근거가 되는 일의 신학을 다루고 있다. 일이라는 주제 자체가 신학의 주제로서는 매우 독특한 것이지만, 이 책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독특하다.
최근 들어 일터 사역을 주제로 한 신학서가 조금씩 소개되고 있는데, 대부분 미국에서 출간된 책들이고, 국내서도 미국에서 나온 책들을 참고해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저자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사용한 용어부터 기존에 들어보지 못한 참신한 용어이며, 전체 내용은 물론 형식 또한 신선하다.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다. 기회가 된다면 영어로 번역해서 외국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 신광은 목사는 책을 쓰는 과정에서 일터 사역에서 오랫동안 헌신해 온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때로는 심각한 논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 치열했던 과정이 책에 녹아 있는 만큼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한 인사이트들이 담겼다. 저자가 주관적인 주장을 펼침에도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신학서가 흔히 갖기 쉬운 딱딱함이나 지루함을 피하고자 기존 책들과 달리 일터 신학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론을 1세기 크리스천의 소명 이야기로 풀어 설명한다. 또한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했으므로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말씀을 현재 상황에 적용하기에 용이할 것이다. 저자가 신학적인 냉철함과 문학적인 상상력을 두루 갖추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아직 걸음마 단계인 한국 교회의 일터 사역이 큰 걸음을 내딛게 되길 기대한다.
방선기 목사 일터개발원 이사장
한국 교회와 교인이 당면한 곤혹스러운 문제는 사회생활에서 신앙과 인격, 신앙생활과 실천이 부딪치며 일으키는 풀 수 없는 갈등과 좌절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해결의 실마리나 단서도 모른 채, 세상으로부터 경멸과 질책을 듣는 처지가 되었다. 성경 교리를 앵무새처럼 주장하면서도 혼동과 무지와 욕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것 같다. 소위 실천적 무신론이라고 할 정도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매우 난해하고 도전적인 주제다. 눈에 보이지 않고, 현재의 실상도 아닌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믿으며 살아가란 말인가? 하나님 나라는 이제 공허하고 진부한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신광은 목사는 크리스천의 일을 죄업, 생업, 왕업이라는 관점에서 탁월하게 조망한다. 또한 독자들이 세 범주 간에 일어나는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현실화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제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논지를 명확하게 전달한다. 이 책을 통해 크리스천 직장인과 사업가는 막연하기만 하였던 천국을 일터에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일터에서 지금 맛보며 마치 청량음료를 마신 듯 시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안정규 케냐 선교사 Good Foundation 대표
신광은 목사님의 책은 항상 흥미롭다. 이 책은 전작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에 이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일터와 직장에 어떻게 임하는지를 하나님 나라 신학에 기초해서 진지하게 설명하고 있다. 평신도 직장인으로서, 직장에서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크리스천의 한 사람으로서 신학적 연구와 풍부한 성경적 성찰을 바탕으로 직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전하는 신광은 목사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특히 이 책의 내용 중 직업 소명론에 대한 가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을 설명한 4장 ‘다시 생각하는 소명’에 주목하고 싶다. 평신도 직업의 신앙적 의미를 경시하게 하는 전통적 성속 이원론이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직장과 세상 일에 대한 ‘신앙적 청산주의’의 태도를 가지게 한다면,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라고 단순히 강조한 개신교의 직업 소명론은 직장에서의 성공과 경제 활동의 성과를 전적으로 인정해 버리는 태도와 연결되어 직장과 세상 일에 몰두하는 ‘신앙적 투항주의’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위험이 있다. 직장 생활, 경영 활동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사이에 아무런 긴장과 갈등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책에서 직장 생활과 노동을 ‘왕업’, ‘생업’, ‘죄업’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고, 일터에서의 노동은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죄의 일이 함께 존재하는 긴장의 상황이라는 점을 역설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에 이어서 직장 생활의 하나님 나라 신학적 의미를 규명하고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신광은 목사님의 노력에 함께 하는 동지로서 지지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 드린다.
이병주 변호사
평신도신앙실천운동 상임대표, 《직장에서 믿음으로 사십니까》 저자
| 감사의 글 |
이 책은 일터 개발원의 연구모임을 통해서 쓰이게 되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주제는 방선기 목사님이 제시하셨다. 하여 먼저 방 목사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4년 여간 연구모임에서 매주 발제와 토론을 겪으며 글이 숙성되고 다듬어져서 지금의 내용에 이르게 되었다. 모임에 참석하여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 특별히 방선기 목사님, 원용일 목사님, 방선오 장로님, 호미해 대표님, 오만종 목사님 등에게 감사드린다. 특히 원용일 목사님은 여러 논리적인 허점과 부족한 점을 기탄없이 지적해 주어서 보완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셨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이 책의 원고가 완성되고 몇몇 분들에게 피드백을 부탁드렸다. 그분들 중 케냐의 안정규 선교사님, 이병주 변호사님, 그리고 방선기 목사님께서 귀한 추천사를 써 주셨다. 또한 대한항공에서 일하셨고 지금은 명지대 교수로 계시는 방선오 장로님,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계시는 김용복 교수님, 한의사 정상지 자매님, IT전문가 김만명 형제님, 김성덕 형제님 등 귀한 피드백을 아낌없이 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책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게 도와주신 여러 동역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부족한 원고를 다듬어서 근사한 책으로 만들어 주신 두란노서원의 여러 직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밤낮으로 기도해 주시는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더불어서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딸과 사위, 근영이, 교회 식구들, 그리고 후원자들의 기도와 격려에도 감사드린다.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은 분들이 있다. 책을 주로 카페에서 썼는데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서너 시간씩 자리를 차지하는 민폐를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양해해 주실 뿐만 아니라 매번 반갑게 환영해 주셨던 여러 카페 사장님과 직원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카페 자작나무에서
신광은
| 프롤로그 |
두 가지 과제
이 책은 2020년 가을부터 (사)일터개발원 연구 모임에서 진행했던 연구 과제의 결과물로 역시 같은 과제의 결과물인 《하나님 나라가 땅으로 임할 때》(고백아카데미, 2022년 출간)의 속편인 셈이다.
《셉티무스 씨, 출근하세요?》는 두 가지 과제를 목표로 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 신학의 기초 위에서 일터 신학을 개발하는 것이고, 둘째는 소명론을 21세기 상황에 맞게 새롭게 정리해 보는 것이다.
첫 번째로, 일터 신학을 하나님 나라 신학의 기초 위에서 정립하는 것은 2020년 가을 방선기 목사님의 제안으로 시작한 연구 모임의 주요 목표였다. 방 목사님은 일터 신학이 그동안 소명론이나 선교 신학, 혹은 실천 신학의 범주로 논의되면서도 하나님 나라 신학의 토대 위에서는 활발히 논의된 적이 없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한 연구 모임을 제안함으로써 비로소 논의를 본격화하였다.
하나님 나라 신학의 기초 위에 일터 신학을 수립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20세기 신학의 중요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학적 성과와 일터 신학을 연결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1세기 일터의 환경이 급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일터 신학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을 바탕으로 일터 신학을 정립한다면, 그 기초가 탄탄하게 되리라 기대한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胡志明)은 “以不變 應萬變”(이불변 응만변)이라고 말했다. “불변하는 한 가지로 만 가지 변화에 대응하라”라는 뜻이다. 뿌리를 든든히 내리지 못한 탓에 상황 변화에 이끌려 우왕좌왕한다면, 나무가 송두리째 뽑힐 수 있다. 굳은 터 위에 확고히 서야 천변만화하는 상황들에 잘 대응할 수 있는 법이다. 일터 신학을 하나님 나라 신학의 기초 위에 제대로 세우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는 든든한 기초 위에서 일터 신학을 논의한다면, 다양한 상황 변화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이 책의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두 번째로, 지금까지 소명론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논의되어 왔다. 하나는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심’을 주제로 한 구원론적 논의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제기한 직업 소명을 주제로 한 논의다. 영향력의 면에서 보자면, 후자가 훨씬 더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직업 소명론이 서구 문명에서 세속 직업을 바라보는 관점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 ‘직업’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베루프(beruf)는 ‘소명’이란 뜻도 있다. 직업과 소명이 한 단어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직업을 뜻하는 영어 단어 보케이션(vocation)은 소명을 뜻하는 라틴어 보카티오(vocatio)에서 유래했다. 일반 직업학에서 직업 소명이란 주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소명론을 논하기에 앞서 살펴봐야 할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구원론의 소명론과 직업 소명론 사이의 연관 관계에 관한 좀 더 분명한 이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연관 관계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직업 소명론은 신학적인 근거와 성경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구원 소명론과 직업 소명론을 별개로 다룬다면, 소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 소명론과 직업 소명론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소명론이 필요하다.
더불어서 최근 개신교회의 직업 소명론이 새로운 일터 환경에서 적용되기에는 한계가 보인다는 점도 문제다. 21세기 일터 현장에서는 평생직장을 더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멀티잡(multi-job)이 당연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직업을 소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 직업 소명론을 구원론의 소명론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터 환경에 적용할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것이 이 책의 두 번째 과제다.
지난 4년 가까이 연구 모임을 통해 두 가지 주제에 관한 많은 토론과 논쟁을 벌여 왔는데,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간의 노력을 이 책에 담았다.
소설 형식을 빌리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전반부에서는 특별히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1세기 후반, 고대 로마 제국의 식민 도시 오스티아(지금의 오스티아 안티카)를 배경으로 가상의 교회와 인물들을 설정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들려줄 것이다.
이어서 후반부에서는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면서 얻은 결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계획이다. 나는 일을 ‘왕업’(王業)과 ‘생업’(生業)과 ‘죄업’(罪業)이라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하고자 한다. 특히 크리스천의 일에는 왕업과 생업의 차원이 동시에 존재함을 제시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왕업은 일의 종말론적 차원으로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고, 생업은 일의 현실적 차원으로서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소설과 이론의 결합은 일종의 실험이다. 이러한 시도의 성공 여부는 독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가늠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책의 내용이 계속 바뀌었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가졌던 맨 처음 생각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연구 모임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며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셨다고 믿는다.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
◆ 소설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이는 허구이며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문학적 장치임을 밝힌다. 크리스천 노예 셉티무스(Septimus)와 그 주인 코르넬리우스(Cornelius)가 주인공이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제국의 수도 로마를 향해 항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오스티아(Ostia)1 항을 거쳐 테베레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오스티아는 당시 로마의 관문 역할을 한 덕에 꽤 번성한 무역항의 지위를 누렸다. 전 세계에서 온 곡물과 상품이 이곳을 통해 로마로 운송되었으며 로마의 인력과 물품이 이곳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로마에서 재판받기 위해 가이사랴항에서 배를 탔던 바울도 난파당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을 통과했을 것이다.
오스티아 시내에는 상점, 사무실, 창고 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으며 포룸(forum), 곧 중앙 광장 주위로 바실리카, 신전, 극장, 공중목욕탕 등 공공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상인, 선원, 관료, 귀족, 노예 등 약 2~3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100만 인구의 로마에 비하면 작았지만, 당시로선 대도시였다. 하층민과 서민은 주로 로마식 아파트라고 할 수 있는 인술라(insula)에 모여 살았고, 상류층은 시내의 도무스(domus)나 교외의 빌라(villa)와 같은 고급 주택에 살았다.
오스티아항의 교역 물품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들여오는 곡물이었다. 이집트는 제국의 곡창 지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출이 풍성했다. 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같은 정복자는 반드시 이집트를 정복하고자 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집트는 자기 땅에서 생산된 밀을 비롯한 곡물을 매일 같이 오스티아항과 여러 주요 항구 도시로 실어 나름으로써 로마인들을 먹여 살렸다. 만일 오스티아항이 막힌다면, 로마뿐 아니라 제국의 온 도시가 그야말로 패닉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노예로 팔려 온 이집트 출신의 셉티무스는 주인 코르넬리우스를 따라 이곳 오스티아로 온 지 4~5년이 되었는데, 주로 이집트풍의 이국적인 요리를 도맡아 했다. 코르넬리우스는 원래도 꽤 성품이 괜찮은 편에 속하는 주인이었지만, 2~3년 전에 크리스천이 되고 난 뒤에는 더욱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셉티무스를 비롯한 여러 노예에게는 포르투나(Fortuna) 여신이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고 할 만한 일이었다. 셉티무스는 진심으로 주인을 존경하였는데, 어느 날 주인을 따라 교회 모임에 참석하였다가 그도 크리스천이 되었다.
셉티무스는 주인 코르넬리우스를 따라 교회 모임에 처음 참석했던 2년 전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그는 주인이 크리스천이 된 뒤로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인해 기독교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어느 날 주인이 궁금하면 같이 가 보자고 했다.
때는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주인을 따라나선 셉티무스는 순간 자신이 신전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니면 으슥한 곳에서 치러지는 주술 의식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예상과 달리 주인은 그를 도심의 도무스로 인도했다. 큰 규모로 보아 상류층의 저택이 분명했다. 이런 곳에서 신에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다는 사실이 셉티무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인과 함께 식탁에 앉다2
그들이 도착하자 어떤 남자가 밝게 웃으며 문을 열고 두 사람을 맞았다. 내부는 휑해 보일 정도로 검소해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상당히 밝은 분위기였다. 이미 10여 명의 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몇 사람이 코르넬리우스에게 다가와 가벼운 입맞춤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중 한 명은 영락없이 자신과 같은 노예 출신으로 보였는데, 그가 상류층 사람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 엄청난 문화 충격을 받았다. 코르넬리우스와 인사를 나눈 신자들이 셉티무스에게 다가왔고, 얼떨결에 그도 그들과 입 맞추며 인사를 나누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인사법에는 가족이나 친척들 사이에 입술만 살짝 갖다 대는 바시움(basium)과 공적인 자리에서 존경의 표시로 뺨에 가볍게 입 맞추는 오스클룸(osculum)이 있는데, 이때의 인사는 바시움에 가까웠다.
집 안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셉티무스는 음식의 종류와 요리 수준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순간 군침이 돌았다. 그들은 연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트리클리니움(triclinium)으로 안내되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손님들을 초대하여 이른 저녁부터 늦은 시간까지 트리클리니움에서 연회를 즐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값비싼 그릇에 희귀한 이국 요리를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부와 고상한 취향을 은근히 자랑하곤 했다. 코스 요리를 배불리 먹고 나서는 대개 와인 파티로 마무리하는데, 간혹 난잡한 분위기로 흘러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여느 연회와도 달랐다.
우선 자리 배치부터가 달라 보였다. 보통 연회에서는 주인이 상석에 앉고, 그 옆으로 주인과의 친소 관계나 지위와 신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어쩌다 눈치 없는 손님이 자기 자리보다 윗자리에 앉기라도 하면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고, 심하면 쫓겨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도착한 순서대로 자리에 앉는 듯했다. 왜냐하면 귀족과 하층민이, 심지어 노예까지도 한데 섞여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서로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셉티무스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통상 노예들이 해 주던 날벌레를 쫓는 일을 포함한 상당히 많은 일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3 게다가 여주인이 하인들과 함께 음식을 직접 나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리에 앉은 노예들에게 귀부인이 음식을 날라다 주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오, 이런 세상이 다 있구나.’ 셉티무스는 자기도 풍성한 음식을 맛볼 생각에 흥분되었다.
음식은 주로 집주인이 마련했지만, 신자들이 각자 자기 집에서 가져온 음식도 꽤 많아서 참석자들이 먹고도 남을 정도였다. 음식뿐 아니라 옷이나 생필품을 가지고 온 이들도 많았는데, 어떤 신자는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헌물’이라고 하였고, 그렇게 바쳐진 것들을 가난한 자나 병든 자, 생계가 어려운 과부들, 그리고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한 신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했다.4 자기 것을 나누어 남을 돕는다는 의미로 이를 ‘연보’(捐補)라고 불렀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도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굶어 죽는 이들이 없다고 했다.
식탁에 앉은 모두가 격의 없이 교제하며 먹고 마셨다. 셉티무스는 처음으로 큰 식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즐겁게 식사하는 경험을 했다. 여러 사람이 가져온 음식인지라 일관된 콘셉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정성스럽게 요리한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셉티무스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이것이 과연 종교 모임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옆 사람에게 도대체 예배는 언제 시작하느냐고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예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오시리스냐 예수냐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지도자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남성이 일어나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기념 식사’를 합시다”라고 말했다.5 그러자 사람들이 식탁의 남은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했고, 금세 차분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티투스(Titus)로 장로라고 했다. 티투스 장로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굳은 확신에 차 있어 보였으며 그에게서 강렬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왔다.
티투스 장로가 다 같이 ‘평화의 키스’로 인사하자고 하자 모든 신자가 일어나 서로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는데, 혹자는 입술을 가볍게 부딪치며 친밀한 인사를 나누며 평화를 기원했다. 귀족과 노예가 서로를 ‘형제자매’로 부르며 인사하다니! 셉티무스는 절대 불변의 가치인 줄 알았던 신분 질서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순간 ‘여기가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자들이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한쪽에 마련해 두었던 빵이 티투스 장로 앞으로 운반되었고, 참석자들의 잔은 최상급 적포도주로 새롭게 채워졌다. 장로가 빵 한 덩이를 손에 들더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찢어서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들은 그것을 받아먹었다. 또 장로가 포도주 잔을 들어 올리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함께 잔을 들고 포도주를 마셨다. 그들은 예배 때마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린다고 했다. 셉티무스는 예수라는 이름의 신(神)이 그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셉티무스는 이집트의 많은 민중이 그러하듯 오랫동안 곡물의 신 오시리스(Osiris)를 섬겨 왔다.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를 가리켜 죽음과 부활의 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셉티무스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예수와 오시리스가 친족 관계는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오시리스는 악의 신 세트(Seth)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겨 사방에 흩뿌려졌는데, 여동생이자 아내인 이시스(Isis)가 조각난 사체를 다시 모아 부활시켰다고 한다. 셉티무스는 오시리스의 죽음과 부활이 절기의 순환, 특히 나일강의 범람과 농업의 주기를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다산과 풍요를 위해서 오시리스에게 기원했다. 부활한 오시리스는 내세를 주관하는 신이 되었으므로 죽은 뒤에 낙원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오시리스를 잘 섬겨야 하는데, 이 믿음이 장례 풍습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야기는 뭔가 달랐다. 그에게는 무척 낯선 이야기였다. 일단 신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건으로 굳게 믿었다. ‘몸’의 부활을 특히 강조하면서 부활한 날짜와 시간까지도 특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날 셉티무스가 들은 티투스 장로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예수는 셉티무스와 다름없는 사람으로서 서른세 살까지 갈릴리와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는데, 완전한 몸으로 되살아나셨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영원히 죽지도 않는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시어 승천하셨다. 지금은 천상에서 온 세상과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돌아오실 텐데, 그때가 되면 모든 믿는 자의 몸이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몸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이 신자들과 함께하시며 신자들의 삶을 다스리신다.’
셉티무스는 처음 접하는 거대한 세계관 앞에서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 왔던 모든 것을 전면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30~40년 전 어느 봄날에 부활하셨다는 것이 사실인가? 셉티무스도 예수님을 영접하면, 정말로 그리스도와 같은 부활의 몸을 입게 될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는데, 과연 그럴까? 진짜로 그런 세상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유의 주께서 나를 아시다니
기념 식사, 곧 성찬(聖餐)이 끝난 뒤에도 모임은 계속되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뜬 한두 사람을 빼고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리어 늦은 시간에 참석한 이들로 인해 인원수는 더 늘었다. 어느 순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가락이지만,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의 아들이시다. 만유의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마귀로부터 온 인류를 구하신 구원자요 교회의 머리이시다. 전쟁을 그치게 하고 평화를 가져오시는 이가 온갖 피조물을 먹이시고 입히신다.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존경과 예배를 바칠지어다!’
찬가 사이에 기도가 이어지곤 했다. 신자들의 기도는 이집트 신전에서 제사드릴 때 읊조리던 주문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자녀가 부모에게 말하듯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기도했다. 그렇게 친밀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을 들으니 진짜로 신이 그들 사이로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찬찬히 들어보니 이방인들의 낯선 언어로 기도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그것을 가리켜 ‘방언 기도’라고 하였다. 누가 방언 기도를 하면, 으레 누군가 그 의미를 해석해 주었다. 그가 들은 방언 기도의 내용은 이러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모임과 예배를 기뻐하시며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이방 신들에게 제사하지 말라, 로마 제국의 타락한 향락 문화에 젖어 살지 말아라, 그런 삶을 산 자들은 돌이켜 회개하라….’
예배가 끝나갈 무렵에는 다 같이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겠습니다. 검투 경기를 보거나 도박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성을 사고팔지 않겠습니다. 악을 행치 않고, 선을 행하겠습니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도움을 구할 때,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지 않겠습니다….”
셉티무스는 다짐 하나하나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끔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다니….’
모임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셉티무스 형제여, 형제가 이곳에 온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순간, 셉티무스는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에게 물었다.
“코르넬리우스 주인님이 저를 이곳에 데려오셨는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부르셨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주인 코르넬리우스뿐 아니라 모든 상황과 여건을 통하여 형제를 이곳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아, 그런가요?”
“성령께서 이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시는군요. ‘셉티무스여, 네가 이곳에 와서 너무너무 기쁘다’라고 말입니다.”
셉티무스는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이시라면, 이집트의 오시리스나 로마의 제우스(Zeus)보다 더 위대하신 분일 텐데, 그런 분이 한낱 노예에 불과한 내 이름을 기억하시고, 나를 이곳으로 인도해 주셨다고? 내가 이곳에 와서 기쁘다고 말씀하시다니!’ 너무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바로 그 순간, 셉티무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기로 결심했다. 아직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지만 말이다.
셉티무스는 주인 코르넬리우스에게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코르넬리우스가 이를 티투스 장로에게 알렸고, 셉티무스는 티투스와 면담하게 되었다. 티투스가 물었다.
“셉티무스 형제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오?”
셉티무스가 대답했다.
“음…, 예수라는 신을 섬기며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가 대부분 그 때문이지요. 그런데 말이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건설하신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뜻이라오.”
“네? 나라라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뜻이란 말이오. 그 나라를 가리켜 ‘하나님 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부르지요.”
티투스의 말에 깜짝 놀란 셉티무스가 되물었다.
“로마 황제 말고 누가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건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 아닌가요?”
티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해서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것은 아니라오. 왜냐하면 황제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에 불과하니 말이오. 분명한 것은 만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길 원한다면, 지금까지 섬겨 온 모든 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오. 한마디로 세상 나라를 떠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부른다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 받기
셉티무스는 이것이 굉장히 까다로운 요구처럼 느껴졌다. 당시 사람들은 여유만 된다면 많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행에서 안전하려면 여행의 신을 섬겨야 하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려면 전쟁의 신을, 사업이 잘되려면 사업의 신을 섬겨야 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다다익선, 많은 신을 섬길수록 좋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섬기고 다른 모든 신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는 예수가 과연 인간 삶의 수많은 문제를 혼자서 다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셉티무스의 가슴속에는 의문보다 강력한 소망의 씨앗이 이미 심긴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 온 모든 신을 버리고서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시리스를 더는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티투스 장로에게 그도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로가 그에게 침례6를 제안했다. 다만 침례를 받으려면, 몇 가지 알아야 할 것과 다짐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침례를 받기 전에 몇 차례 더 면담을 갖기로 했고, 코르넬리우스는 이 기간에 셉티무스가 면담에 집중하도록 배려해 주기로 했다.
첫 면담 자리에서 셉티무스가 침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티투스는 침례란 흐르는 물에 몸을 완전히 잠갔다가 일으키는 의식으로 첫째는 죄 씻음을 의미하며, 둘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의미하고, 셋째는 이 세상 나라를 떠나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중 세 번째 의미가 셉티무스의 귀에 쏙 박혔다. “침례를 받으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요?”
“그렇소. 침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을 수가 있다오. 그러나 이 시민권은 인구 조사 명부에 기록되거나 법정에서 발급받는 증서의 형태로 받는 것이 아니오. 성령께서 형제의 영혼에 인 치심으로써 받는거라오.”
그 순간, 셉티무스는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장로에게 물었다.
“침례를 받으면, 제가 시민권을 받게 되나요? 그럼 그 나라에서는 저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우리 노예들의 평생 꿈이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받는 것인데, 로마 제국보다 훨씬 더 좋은 나라의 시민권을 받을 수 있다니 꿈만 같군요.”
티투스는 침례에 관해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셉티무스의 몸이 물속에 잠기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정체성의 죽음을 의미하며 물 위로 다시 올라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에 참여하여 새 정체성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즉 사륵스라 하는 몸을 물속에 잠글 때 옛 정체성, 곧 이집트 출신의 요리하는 남자 노예라는 정체성이 죽고, 물 위로 올라올 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첩자처럼 살라
티투스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영’으로서만 그렇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오. 우리 ‘몸’까지 완전히 구속되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하기 때문이오. 그때까지는 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지만, 육으로는 이 땅에서 노예라는 현실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이들이 있어요. 실제로 에베소교회에서는 몇몇 노예들이 침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으므로 더는 크리스천 주인을 위해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오.”
셉티무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사실, 저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얻는다는 말에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걸요.”
티투스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셉티무스 형제여, 바울 선생께서는 아들 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2).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코르넬리우스의 노예인 상태에서 부르셨다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라는 것이 그분의 뜻이라오.”
“계속 노예로 살라는 뜻입니까?”
“그렇소. 지금까지 그대가 살아온 모든 삶의 여정이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오. 심지어 노예로 사는 삶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요 부르심이라오.”
셉티무스는 왠지 억울해졌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받는다면서요? 시민권을 받으면, 자유인이 되는 거 아닙니까? 시민권을 받았는데도 노예로 계속 살라니요? 노예라는 옛 정체성이 죽었다면서 여전히 노예라고 하시니, 제가 남자가 아니면서 남자이기도 하고, 이집트인이 아니면서 이집트인이기도 하다는 말씀인가요?”
티투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재밌는 표현이오. 그렇다면 형제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서 이렇게 얘기해 보겠소. 형제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소.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는 노예인 상태로 지내야 하오. 형제는 ‘이미’ 남자라는 정체성을 벗어 버렸지만, ‘아직’ 이 땅에서는 남자이고,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나 ‘아직’ 이 땅에서는 로마 제국 오스티아에 사는 이집트인 노예로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오.”
“제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면, ‘지금’ 당장 자유인으로서 살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티투스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오. 그러면 형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인이 될 것이오. 그러나 그날이 올 때까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실 것이오. 비록 이 세상이 죄악에 물들어 있고,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왕 노릇을 하고 있소만, 베드로 사도가 말하기를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라고 하였소. 신자라면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이오.”
“장로님, 그럼 저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 노예로 살아야만 합니까?”
“형제여, 그대는 이미 영으로는 자유인이오. 그러나 겉으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충직한 노예가 되어야 하오. 이것은 신자의 은밀한 비밀이라오.”
“마치 적국에 몰래 숨어든 첩자같이 말입니까?”
“그거, 참 좋은 비유로군. 그렇소. 형제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세상 나라로 보내진 첩자인 셈이오.”
셉티무스는 티투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고, 실천하기는 더 어려웠다. 티투스 장로의 가르침은 당시 노예들의 유일한 관심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당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은 첫째, 주인이 살아생전에 노예를 해방시켜 주거나 둘째, 주인이 자신이 죽은 후에 노예를 해방시켜 주겠다는 유언을 받는 방법, 셋째, 특별한 공을 세워 자유인이 되는 상을 받거나 넷째, 돈으로 자유민의 지위를 사는 방법 등이 있었다. 제국은 노예들로 하여금 해방 가능성을 믿게 함으로써 더 큰 노동력을 끌어낼 수 있음을 진즉 알았던 것이다. 즉 해방의 소망은 노예들에게 일종의 미끼였다.
여느 노예들처럼 셉티무스의 최대 관심사도 해방이었으므로 그 또한 소망을 품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티투스 장로는 “노예 해방이 그대 삶의 제일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오. 그대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야 하오”라고 가르쳤다. 그러면서도 “바울 선생이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고전 7:21)라고 말하셨으니, 형제도 해방될 기회가 있다면 굳이 그것을 거부할 필요는 없소”라고 조언해 주었다. 이것은 복음이 현 체제를 맹목적으로 옹호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된 신자에게는 이 땅에서의 삶이 ‘노예여도 그만, 해방되어도 그만’이다. 신자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옛 정체성에 가치를 두지 말라는 뜻이다.
생업에 충실하라
셉티무스는 침례를 받기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께 뭔가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가 티투스 장로에게 물었다.
“장로님, 예수 그리스도께 어떤 제물을 바치면 좋겠습니까?”
“형제여, 그리스도께서 과연 형제에게서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제물을 받길 원하시겠소?”
“모든 신은 제물을 원하지 않습니까?”
“형제여, 그리스도께서는 형제가 소나 양이나 염소가 아닌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신다오.”
“네? 저를 제물로 바치라고요? 설마 저를 죽이실 생각은 아니겠죠?”
“물론, 아니지요. 형제는 자신을 죽은 제물이 아닌 산 제물로서 주님께 바쳐야 하오.”
“산 제물이라니요?”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곧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라오.”
그제야 셉티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하죠?”
티투스가 셉티무스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은 그중 첫 번째를 말해 주겠소. 형제는 지금 코르넬리우스 형제의 집에서 주로 요리를 맡고 있다고 들었소만.”
“네, 맞습니다.”
“그 일을 열심히 하길 바라오. 자기 일을 절대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되오. 예수님을 믿기 전보다 더 열심히 하시오. 그게 첫 번째요.”
“그게 다입니까?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저 자신을 바치는 일이란 말씀인가요?”
티투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소.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원하시는 삶의 태도는 타인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기 생업(生業)에 열심히 종사하여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라오. 이것이 출발점이오. 하나님이 형제로 하여금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일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섭리요 선물이라오. 그 일을 통해서 형제와 가족이 먹고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 말이오. 그러니 자기 생업에 충실한 것은 곧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라오.
그런데 데살로니가교회 성도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곧 재림하실 터이니 생업은 제쳐 두고 그리스도의 강림만을 기다리자고 하는 이들이 있었소. 그런데 당장에 먹을 것이 없으니 다른 신자들에게 손을 벌리며 살아야 했소. 그래서 바울 선생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오.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살후 3:12). 그리스도의 강림을 소망하더라도 자기 생업을 팽개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오. 그러니 형제가 자기 주인의 집에서 맡은 바를 다하여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첫 번째 길이요 신자의 의무라오.”
“아,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제 일을 성실히 해내겠습니다!”
생업의 의미를 깨달은 셉티무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셉티무스는 티투스 장로 앞에서 다짐한 대로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는 존재가 되고자 했고, 자기 주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노력했다. 코르넬리우스도 다양한 방식으로 셉티무스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며 티투스 장로에게 셉티무스의 변화를 자랑하곤 했다.
두 번째 면담이 있던 날, 셉티무스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티투스 장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티투스가 웃으며 말했다.
“형제여, 코르넬리우스 형제를 통해 그대가 이전보다 더 성실하게, 더 열심히 일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소. 참 잘했소.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부르신 뜻을 잘 받들고 있구려.”
“장로님, 아무리 생각해도 생업만 해가지고 저 자신을 그리스도께 산 제사로 드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성실했습니다. 이집트에서부터 이곳에 오기까지 생업을 놓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그리고 주위의 믿지 않은 노예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티투스가 셉티무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기다리시오. 지금부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두 번째 방법에 관해 말해 드리겠소. 지난번에 침례 현장에서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다고 말한 바 있소. 다시 살아난 뒤에는 신자의 정체성이 어떻게 바뀐다고 말했는지 기억하오?”
생업, 왕업이 되게 하라
셉티무스가 자신 있다는 듯 힘주어 대답했다.
“그럼요.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고 하셨지요.”
“맞소.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큰 비밀이 있다오. 베드로 사도가 신자들을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들’(벧전 2:9)이라고 말했다오.”
“‘왕 같은 제사장’이라니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소. 로마인들은 황제를 가리켜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7 라고 부르오.”
“그 말은 신자가 황제와 같은 존재라는 뜻입니까?”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존엄한 존재라는 뜻이오. 그러니 형제도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말하고 행동해야 하오.”
“물론,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티투스가 말했다.
“왕은 왕으로서 할 일이 있지 않겠소? 그것을 왕업(王業)이라고 하오. 신자에게 왕업이란 무엇이겠소?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했던 일을 말하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던 일이기도 하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하게 될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늘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시고, 소외된 약자를 돌보셨는데,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섬기는 일이 바로 왕업이오.”
“그러나 저는 한낱 노예에 불과한 걸요.”
“형제가 주인집에서 맡은 일이 무엇이라고 했소?”
“요리입니다. 제 생업이지요.”
“바로 그 생업을 왕업으로 만들어야 하오.”
“예? 제가 하는 하찮은 일이 어떻게 왕업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티투스 장로가 말을 계속 이어 갔다.
“형제는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생업에 열심히 종사해 왔다고 했소. 또 다른 믿지 않은 이들도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으오. 그런데 이들은 생업을 잘 감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는 것이오. 오직 신자만이 자기 생업의 참 의미를 깨달으니 안 믿는 사람은 당최 알 수가 없지. 생업의 의미를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섬길 때, 형제가 하는 일은 비로소 왕업이 된다오.”
“그렇습니까?”
“형제여, 주님이 강림하실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오. 그러나 지금도 교회 안에서 그 미래의 나라를 엿볼 수 있는데, 바울 선생은 이를 위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를 권면했다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갈 6:2)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갈 6:5)라는 말씀이오.”
셉티무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말씀 아닙니까?”
티투스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내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시오. 신자가 ‘서로의 짐’을 지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오. 교회 공동체에도 형편이 어려운 신자들이 있는 법이오. 교회는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고아나 과부들을 돕기 위해 연보할 대상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에 들어온 연보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어 가난한 자들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돕고 있소.
그런데 디모데가 사역하던 에베소교회에서 이를 악용한 일이 벌어졌다오. 과부이기는 하지만 돈벌이하는 자녀들이 있는 경우에는 비교적 사정이 넉넉한 편인데, 그들도 구제 명단에 포함시켰던 것이오. 생계를 꾸릴 능력이 있는 자녀들이 자기 어머니를 돌보지 않고, 교회에 책임을 떠넘긴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 선생이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소.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런 신자들은 불신자보다도 더 악한 자라고 했소.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불신자들도 행하는 당연한 도리인데, 믿는 자가 되어서 그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얼마나 악하냐며 책망한 것이오. 만일 누군가가 교회의 상호 부조를 악용하여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의존하여 살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그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정말로 지원이 절실한 신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지 않겠소? 교회는 돕지 않아도 될 이들까지 돕느라 구제 사역을 수행하기에 벅차게 될 것이오.
그러나 신자들이 각자 자기 짐을 스스로 진다면, 서로의 짐을 지는 데 부담이 덜하지 않겠소? 즉 자기 짐을 지는 것이 곧 다른 형제들의 부담을 줄여 주는 길이라는 뜻이오. 그래서 바울 선생이 서로 짐을 져 주되 자기 짐은 자기가 지라고 말한 것이오.”
셉티무스는 첫 모임에서 보았던 풍성한 연보 물품들을 떠올렸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굶어 죽는 이들이 없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로 별천지에 와 있는 줄 알았어요.”
티투스가 말을 이어 갔다.
“자기 생업을 잘 감당함으로써 왕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의 부담을 줄여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오. 이처럼 자기 생업에 충실한 동시에 구제 활동도 열심히 한다면, 그때 생업이 곧 왕업이 되는 것이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셉티무스 형제여, 그대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다 보면, 그 자체로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오?”
“그냥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 선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