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다. 우리나라 제1호 만화이론 전공 교수로 만화와 웹툰, 애니메이션과 게임, 그리고 캐릭터 산업을 연구하고 있다. 만화를 그리지도 못하고, 만화애니메이션 마니아도 아니면서 여전히 흥미로운 강의로 학생들과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사)한국애니메이션학회 회장, 한국영상자료원 이사,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 애니메이션진흥위원회 위원, (사)한국캐릭터학회 회장 등을 맡았다. 1994년부터 라디오와 TV 등 방송에서 만화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경향신문》, 《국민일보》 등에서 정기칼럼을 연재했다.
저서로는 〈한국만화산업연구〉, 〈애니메이션 경제학〉, 〈저패니메이션과 디즈니메이션의 영상전략〉, 〈애니메이션 용어사전〉, 〈만화에 빠진 아이, 만화로 가르쳐라〉, 〈만화〉, 〈슈퍼 히어로〉, 〈만화의 문화 정치와 산업〉, 〈게임 플랫폼과 콘텐츠 진화〉, 〈만화웹툰작가평론선: 류기운·문정후〉, 〈웹툰 비즈니스 딜레마〉가 있고 역서로는 〈애니메이터 서바이벌 키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외 다수가 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이자 서울웹툰아카데미 이사장이다.
만화를 보며 자랐다.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그리고 《보물섬》까지 한국만화잡지를 탐독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1980년대 만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현세와 허영만, 김혜린, 신일숙의 팬이 되었다. 삼촌의 서가에서 고우영의 극화를 봤고, <선데이서울>에서 박수동과 방학기를 만났다. 1995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이후 꾸준히 만화평론을 계속해 왔다. 연구, 만화전시기획, 컨설팅, 스토리, 만화교육과 관련하여 활동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20년까지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2020년 9월부터 웹툰대안교육기관 서울웹툰아카데미(swa)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만화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는 일을 스스로 ‘만화금석학’이라 부르며 즐겨 한다. 2023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이사, (사)한국만화가협회 부설 만화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웹툰자율규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30여 권의 단독 저서와 공저를 집필했다. 최근 저서로 〈시대를 읽는 만화〉, 〈지금은 이런 만화〉, 〈관계와 계보로 읽는 한국만화역사〉가 있고 공저로 〈웹툰 입문〉 외 다수가 있다.
우리 시대 만화가 열전
종이책 발행 2024년 1월 10일
전자책 발행 2024년 12월 2일
지은이 한창완·박인하
펴낸곳 (주)행성비
펴낸이 임태주
편집총괄 이윤희
책임편집 곽종구
디자인 이유진
마케팅 한경화
출판등록번호 제2010- 000208호
주소 경기도 김포시 김포한강10로 133번길 107, 710호
대표전화 031-8071-5913
팩스 0505-115-5917
이메일 hangseongb@ naver.com
홈페이지 www.planetb.co.kr
종이책 ISBN 979-11-6471-254-0 (03600)
전자책 ISBN 979-11-6471-274-8 (05600)
값 20,000원
행성B는 독자 여러분의 참신한 기획 아이디어와 독창적인 원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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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자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KPIPA)의 <2024년 전자책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입니다.
일러두기
1.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한글 맞춤법'에 따랐다.
2. 작품명, 잡지명은 출간 당시 표기를 따랐고, 외국 인명이나 지명 등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표기함을 원칙으로 했다
3. 본문에 쓰인 기호의 쓰임새는 다음과 같다.
《 》: 신문, 잡지
〈 〉: 만화명, 단행본, 논문
4. 본문에 사용된 이미지는 저자가 제공했다.
미국의 유명 목사가 상원 의원에 출마했다가, 그 지역 주간신문에 연재하던 시사만화가의 주간 만평 때문에 낙선한 사례가 있었다. 만화가는 그 목사의 비리와 종교 지도자로서의 인간적인 문제점에 대해 매주 한 컷의 만평으로 비판했고, 결국 낙선한 목사는 해당 만화가를 대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법원은 만화가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만화가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의미는 모두 열려 있다고 판결했다. 만화로 표현된 정치 만평을 본 신문 독자들이 만화에서 알려주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믿은 채 각자의 의견으로 반영한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정이었다. 그 저변에는 만화가 갖는 비판 기능과 더불어 과장과 왜곡으로 은유화된 유머의 효과를 인정하는 판결이었다. 만화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장 쉽게 비판하며, 그 과정에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통한 시대의 균형감을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고 김종필 의원이 국무총리 시절, 신문에서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으로 본인을 표현하며 시국에 대해 비판을 하자, 불쾌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만화가 날 그리면 난 살아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정치인의 존재 근거가 만평의 표현이라는 노정객의 한마디는 만화가 갖는 시대의 자존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화의 시대성은 항상 도전적인 소재와 실험적인 장르를 통해 급변하는 메시지의 다양함을 제시했으며, 그때마다 스타 작가들의 작품은 시대의 선물처럼 등장했다. 그들은 시대가 가로막았던 표현과 이념의 장애물들을 팬덤과 스타덤으로 극복하며 만화를 통해 성장해온 세대들에게 변혁의 시대를 책임지게 했다. 그래서 만화는 성장과 극복의 시간 속에서 내 삶을 먼저 대신 살아주는 멘토였고, 함께 시간을 채워준 동료였다.
한국 만화가 갖는 시대의 존재감은 이제 웹툰의 서사에서도 인류에게 또 다른 감성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마블코믹스의 수많은 히어로가 <어벤저스>로 총집결하며 한동안 인류에게 스펙터클의 감동을 만들어냈다면, 웹툰 작가 강풀의 <무빙>은 히어로가 갖는 가족의 휴머니즘을 한국적 신파로 제시하며 가장 가까운 현실적 감동을 소환한다. 시대에 대한 솔직함과 표현의 자유로움은 결국 감정의 진화와 공감의 확대를 선도한다. 이는 한국 만화가 시대를 통해 얻은 지워지지 않는 저력이며, 격정의 근현대사가 만들어준 우리의 창조적인 DNA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한국 만화는 우리 스스로 창조해낸 ‘웹툰’이라는 시스템을 세계 문화의 중심에 세우고, 표준화된 웹툰 산업 네트워크의 생태계를 주도하고 있다. 그 저변에는 한국 만화가 경험하고 축적해온 시대의 고민과 저력이 틈새 장르로서가 아닌 주류 장르로서의 부상을 현실화시킨 결과이다. 그 시대의 역사 속에 한국 만화의 성장이 있었고, 작가주의의 대중화가 익숙해지고 있었으며, 비판은 더 섬세하고, 유머는 더 독특하게 고유의 능력을 완성했다.
시사만화, 만화방, 만화 잡지, 만화 대여점 그리고 웹툰까지, 한국 만화의 고난한 시간과 시대의 고민은 여러 형태의 창작과 유통 그리고 소비의 흔적을 남겼고, 그 전설 같은 역사 속에 우리의 미래는 조금씩 탄탄하게 성장했다. 그래서 지나온 한국 만화의 시대적 유산들이 더 소중하다. 우리의 시간을 가득 채우며 한국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작가와 작품의 남겨진 모습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내일을 만난다.
— 한창완
나는 오랫동안 만화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만화의 이해’를 강의했다. 강의 첫머리에 만화는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학생들의 표정이 바뀐다. 그러면 일본 만화의 아버지, 만화의 신이라고 불리는 데즈카 오사무 선생의 말을 소개한다. “내게 만화란 표현 수단의 암호에 지나지 않아서 실제적으로 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한 문자로 이야기를 써 내려간 게 아닌가 싶어.” 만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표현의 매체로 존재하는 만화를 바라보아야 한다.
표현의 매체로 존재하는 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를 치열하게 반영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미국 현대 만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 인기 만화 (제목이 여러 번 바뀌어 통상적으로 캐릭터의 명칭을 따라) <노란꼬마(Yellow Kid)>는 뉴욕의 허름한 골목에 거주하는 이민자들을 반영한다. 뉴욕 빈민가 호건골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커다란 신문 지면에 가득 채운 ‘호건골목 시리즈’에서 ‘노란꼬마’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호건골목 시리즈’는 20세기 초반 뉴욕에서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엔터테인먼트인 보드빌 쇼와 유사하게 왁자지껄한 여러 쇼를 보여준다. 이후 보드빌 쇼의 한 테마였던 슬랩스틱이 새로운 매체인 영화로 전환되면서 인기 캐릭터 ‘노란꼬마’만 독립해 우스개 만화가 되었다. 작가 리처드 펠턴 아웃콜트는 1902년 《북맨(Bookman)》과의 인터뷰에서 “노란꼬마는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유형이었다”라고 밝혔다. 아웃콜트는 찰스 디킨스처럼 뉴욕 빈민가를 스케치해 아일랜드계 이민자 꼬마 아이를 탄생시켰다. 노란꼬마는 단지 만화 주인공이 아니라, 20세기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로 가득한 뉴욕이었고 빈민가였으며 이민자들이었다.
한국 만화도 마찬가지다. 길창덕의 명랑 만화는 1970년대 서울 도심, 중산층이 없다면 나올 수 없었다. 1960년대 명랑 만화와 다른 길창덕, 신문수, 박수동, 이정문의 명랑 만화는 도심, 중산층, 의무교육을 기반으로 한다. 1990년대 명랑 만화의 대표 작품인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는 1980년대 작품들과 비교해 콘텍스트가 더욱 정교해진다. 쌍문동 주택이 아니었다면 둘리 일행의 해프닝이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 1990~2000년대 명랑 만화의 계승자인 김진태와 홍승우는 달라졌다. 김진태는 히어로, 미스터리, 탈옥, 판타지, 메디컬, 조폭, 직장 시트콤과 같은 장르를 영화와 TV의 드라마나 쇼, 외화를 통해 소비하는 1990년대식 일상을 반영한다. 대중문화의 원본이 패러디로 등장하기 때문에 동시대 대중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김진태 만화를 이해할 수 없다. 반면 홍승우는 명랑 만화의 포맷을 그대로 계승한다. 그는 1990~2000년대 핵가족을 중심으로 명랑 만화를 디자인한다.
1980년대 여성 만화는 여성의 진학률이 중요한 콘텍스트로 등장한다. 1960~1970년대 소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면, 1980년대 소녀들은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여중고생을 위한 만화방 만화 시리즈가 출간되었고, 김혜린, 신일숙 등 변화한 세계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1988년 강력한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여성 만화 잡지 《르네상스》가 창간되었다. 늘 만화는 시대였다. 만화는 시대를 드러내는 여러 DNA를 품고 그 시대를 드러낸다.
만화는 시대라는 걸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책은 《국민일보》 연재에서 언급된 작가뿐만 아니라 중요한 여러 작가들을 추가로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면과 시간 때문에 빠진 작가들이 많아 여전히 아쉽다.
— 박인하
김성환
2019년 9월 8일, 고바우영감은 우리 곁을 떠났다. 향년 87세, 작가가 자신이 그린 캐릭터의 실제 나이가 되어 찬란한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내려다보며 영원한 캐릭터가 되었다. 아침 신문을 펼칠 때마다 1면 기사보다도 가장 먼저 ‘고바우는 뭐라 하나?’라고 전 국민을 궁금하게 했던 김성환 화백. 그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민주주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가장 쉽고 가장 시원하게 보여준 시대의 아침이었다.
1955년 7월 1일 《동아일보》에 네 컷 시사만화 〈고바우영감〉이 연재를 시작한다. 본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19세였던 청년 김성환이 다락방에 숨어서 혼자 그렸던 캐릭터가 고바우영감이었다. 그로부터 2000년까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를 거치며 1만 4천139회의 연재를 통해 말 못 하는 국민과 쓸 수 없었던 기자들을 대신했다. 대한민국 최장기 연재로 기록되는 〈고바우영감〉은 그렇게 신문의 존재 의미를 대변하며 민주주의의 교과서 역할을 독자들에게 선물했다.
1천91회분 연재에서 당시 가정집 화장실 분변을 치우던 청소부들끼리 서로 인사하던 네 컷 만화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앗! 저기 온다”, “귀하신 몸 행차하시나이까?” 같은 분변 청소부인데, 아주 공손하게 절하는 것을 본 고바우영감은 묻는다, “저 어른이 누구신지요?” 주위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답한다. “쉬, 경무대에서 똥을 치는 분이요.” 〈고바우영감〉 연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인 ‘경무대 똥통 사건’이다. 실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을 사칭하던 사기 사건을 풍자한 만화로 벌금을 물게 된 김성환 화백은 이로부터 시대의 정치적 사건들마다 고바우영감의 무표정한 질문과 돌발 행동으로 독자들이 모두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던 시대의 답답함을 무장해제시키는 영웅이 된다.
〈고바우영감〉 탄생 50주년 기념우표 발간, 세계만화대백과사전에 한국 만화가로 유일하게 등재, 1만 743매에 달하는 원화가 기록 문화재로 등재된 〈고바우영감〉. 대한민국의 건국과 전쟁의 현장에서 참화를 그려냈던 작가는 어렵고 못 먹고 살던 피폐한 후진국의 삶에서부터 개발의 역사와 산업화를 통한 성장의 역사, 민주화를 통한 아픔의 상처까지를 그려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꿋꿋하게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우리의 모습에서도 항상 뒤를 돌아보며 초심을 잃지 말라고 매번 확인해주던 노화백은 그렇게 우리에게 역사로 남았다.
〈고바우영감〉은 ‘경무대 똥통 사건’ 등 해학과 풍자를 버무린 에피소드로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고바우영감〉 표지와 만화 컷(©김성환)
지금은 신문을 읽는 독자층과 함께 시사만화를 연재하는 일간지도 예전보다 눈에 띄게 줄었지만, 여전히 시사만화가는 시대를 읽는 방향이며 모두를 진동시키는 커다란 범종이다. 신문사 사주의 출판기념회에는 참석하지도 않던 유명 정치인들이 시사만화가의 출판기념회에 가득 모이자, 신문사 사주가 시사만화의 힘을 느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일화도 있다. 미국의 시사만화가가 네 컷의 만화를 연재하다 세 컷의 만화로 연재 형태를 바꾸자, 신문사 사주가 그림칸 수가 줄었으니 원고료도 줄여야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농담처럼 던진 신문사 사주의 제안에 시사만화가는 이렇게 답한다. “네 컷으로 이야기하는 세상보다 세 컷의 세상 이야기가 더 힘드니 원고료를 올려주셔야 합니다!”
시사만화는 사설과 칼럼 그리고 기사가 읽혀지던 공간의 힘보다 더 묵직한 여운으로 신문을 덮은 아침부터 종일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사색의 공간을 숙제처럼 남긴다. 독자들은 그 숙제 같은 잔상을 통해 민주주의를 배웠고, 그 기억으로 세상을 향해 외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미국의 한 잡지사 시사만화가가 상원의원에 출마한 목사를 주말마다 연재된 만화 지면을 통해 비판한 사건이 있었다. 유명한 인기 목사였지만 교회 자금을 횡령하고, 방만한 교회 경영과 부도덕한 여성 편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체하던 목사의 개인 비리를 조목조목 만화로 그려내며 잡지의 주말 연재를 뜨겁게 달구었던 시사만화가는 결국 상원의원에 낙선하게 된 목사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게 된다. 미국 대법원은 연재된 시사만화를 통해 독자들이 목사의 개인 비리를 진짜 사실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 현실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사유로 무죄판결을 한다. 결국 만화는 독자들이 만화적 표현으로 읽고, 만화적 상상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니 그러한 만화의 표현을 통해 목사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사실은 목사의 개인적 판단인 것으로 해석한 판결이었다.
50년 동안 한국 현대사를 함께하며 민주주의의 기반을 차곡차곡 함께 쌓아올린 〈고바우영감〉 또한 이렇게 만화적 표현과 만화적 상상력으로 세상을 조율하는 메가폰이었다. 한때 3김 시대를 풍미하며 최다선 국회의원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 총재가 당시 유행하던 ‘모래시계’ 드라마의 여성 주인공으로 그려져 풍자된 시사만화가 화제가 되었다. “시사만화에 여자 주인공으로까지 풍자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라는 기자 질문에 노정객은 여유 있게 웃으며 답했다. “시사만화에 내가 그려진다면 아직 살아 있다는 거야!” 시사만화는 살아 있는 역사이며, 〈고바우영감〉은 그 역할의 첨병으로서 매번 최전선에 서 있었다.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난 김성환은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해방 이후 서울로 내려왔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형편이 어려워진 탓에 가족들이 헤어져 사는 등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으며 미술반장을 도맡아 했던 그는 신문에서 김용환 화백의 〈깡통여사〉를 만나며 시사만화를 알게 된다. 해방 직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씨〉를 연재하게 되면서 전속 만화가의 길을 경험하게 되었던 그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었던 다락방에서 열심히 그렸던 200여 명 이상의 캐릭터 중에서 고바우가 탄생했다.
성인을 위한 만화로, 표정을 없앤 고바우는 그날의 주제에 따라 기분이나 심리 상태를 머리카락으로 표현했다. 평소에는 앞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던 머리카락이 놀라면 빳빳해지고, 질릴 정도면 꼬불꼬불해지고, 화났을 때는 똑바로 서는 표현이 바로 고바우의 표정이었다. 이름에는 우리의 민족성을 대변하는 단단한 바위, 크고 단단한 돌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한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의 이름을 ‘바우’라고 지었으며, 가장 적절한 성인 ‘고’를 붙여 고바우영감이 탄생하게 되었다.
1961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1년 제14회 개인전까지 ‘회화’, ‘동양화’, ‘세계 풍물화’, ‘고바우 서화 소품전’, ‘그 시절 그 모습’, ‘다정한 편지’ 등 그림과 시대, 역사와 삶에 대한 기록을 예술로 축적해온 노력은 후배 작가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또한 1987년 ‘1만회 게재 기념전’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었고, 1996년 1월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 ‘고바우 김성환작품전시실’을 상설 전시실로 개관하며, 시사만화가 문화재로서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보여주었다는 증인의 역할을 모두에게 증명해낸다.
이후 2011년 ‘고바우만화상’을 만들어 노력하는 후배들에게 시사만화의 시대정신을 전달하는 의욕을 보여주었고, 사회적 기부 활동도 적극적으로 했다. 2013년 문화재청은 김용환의 〈토끼와 원숭이〉,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와 함께 〈고바우영감〉 원화를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다. 국가는 김성환 화백에게 2002년 ‘보관문화훈장’에 이어, 2019년 12월 ‘금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멍텅구리씨〉 표지
“시사만화가 없어진다는 건 중요한 무기 하나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틀어 볼 수 있는 시사만화는 여전히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입니다. 시사만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민심을 읽는 것이지요.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주는 겁니다. 만화를 그리는 게 제 직업이니 만화를 통해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성환 화백의 이러한 고백은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비판의 비상구를 시사만화로 만들고 지켜왔던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과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그것을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숙명을 대변하고 있다.
— 한창완
고우영
프랑스대혁명 이후 공화정이 시작된 프랑스는 왕정 때 못지않은 혼란이 불거졌다. 새로운 통치 세력 및 정치계급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민중들의 삶은 더 나아지기보다 피폐해지기만 했다. 그러한 일상을 기록하던 화가가 있었다. 19세기 초중반을 불꽃처럼 살아낸 오노레 도미에는 세상을 풍자하고 기록하며, 그림만으로 시대의 아픔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정치적 카툰의 시작이었고, 회화를 넘어 예술이 지켜내야 할 시대의 이야기와 방향을 제시했다고 평가받으며 화가보다는 풍자만화가로 후세에 알려졌다.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나듯, 만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해학과 풍자이다. 또 그러한 장치를 통해 통쾌하게 공감시키는 비평의 날카로움이다.
한국 만화는 1950년대 말 만화방 시대로 시작되면서 아동들이 보는 계몽 목적의 준공공재 수준의 그림책이었고, 특히 1960~1970년대를 지나며 군사정권으로부터 항상 감시당하는 교육용 미디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렇게 정체되고 한정되던 만화를 긴 잠에서 깨게 한 ‘천재’가 있었다.
그의 시도는 계몽적이지도 않았고 교육적이거나 점잖지도 않았다. 독설과 비유, 성적 농담과 언어유희, 자기도취와 역사 왜곡 등 그가 대사와 연출에서 보여주는 시도는 처음 만나는 만화였고, 지면 또한 만화방이 아닌 일간지 스포츠 신문이었다. 초등학교 이후 만화책을 보면 어른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성인들은 신문에서 매일 만나는 그의 만화에서 본인이 성인이라는 자존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1972년 고우영의 〈임꺽정〉은 그렇게 《일간스포츠》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당시 《일간스포츠》를 발행하던 한국일보사에서도 일간신문에 이런 만화를 연재하는 것에 대해 반발과 저항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당시 사주였던 장기영 대표에 의해 《소년한국일보》를 중심으로 만화 사업부가 창설되었다. 40여 명의 만화가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던 한국일보사는 한국 최초로 스포츠 연예 신문 《일간스포츠》를 창간하고, 신예 만화가 고우영에게 대담한 작품을 맡긴다. 이미 소년 잡지 《새소년》에서 가라테 영웅 최영의를 주인공으로 한 〈대야망〉을 연재하던 젊은 만화가 고우영은 당시 국내 만화방의 독점적 유통망이었던 합동출판사의 막강한 통제력에 반발하며 《일간스포츠》 연재를 감행한다.
고우영이 표현해내는 대사의 가벼움은 지적 유머로 평가되었고, 시대를 뛰어넘는 기막힌 발상과 연출의 호쾌함은 성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적 지평으로까지 회자된다. 대표작 〈임꺽정〉, 〈일지매〉, 〈초한지〉, 〈삼국지〉 캐릭터 컷(오른쪽 위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주) 고우영)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젊은 패기였고, ‘임꺽정’이라는 캐릭터 역시 한 시대의 무소불위 권력과 싸워내던 속칭 도적왕 이야기였다. 위험한 주제와 지적받을 캐릭터였지만, 그가 표현해내는 대사의 가벼움은 지적 유머로 평가되었고, 시대를 뛰어넘는 기막힌 발상과 연출의 호쾌함은 성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적 지평으로까지 회자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고우영은 만화라는 미디어를 전혀 다른 해석의 관점과 성인들의 차별화된 비평 문화로 격상시키며 중국 고전들을 한 편씩 해부하는 또 다른 도전에 돌입한다. 그 도전의 시작은 〈수호지〉였고, 연이은 도둑 3부작 〈일지매〉까지의 연재 성공은 그에게 쉴 수 없는 작품 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초한지〉, 〈금병매〉 등의 중국 고전소설을 자신만의 언어와 그림으로 그리며 스포츠 신문 열독층을 형성했고, 이후 일지매, 가루지기 등 전통적인 우리 설화의 캐릭터들을 발굴해 넉살 좋은 성인 담론의 쾌도난마를 시의적절하게 보여주었다.
실제 고우영은 태어난 곳이 중국이다. 당시 만주국,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번시에서 1930년대 말 유복한 가정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복 이후에는 평안남도로 이주했다가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며 만화가의 삶을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만주국에서 경찰로 근무했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친일 전력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살아가던 동료들과는 다르게 일제에 부역한 과거를 반성하며 세상을 등진 낙향거사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와 만화가였던 두 형의 노력으로 생계가 유지되었다. 아버지와 두 형이 요절한 이후, 본인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만화가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삼국지〉(위), 〈초한지〉 만화 컷(©(주)고우영)
고우영은 둘째 형 고일영의 유작인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며 만화방에 데뷔했으나, 초기 크게 돋보인 작가는 아니었다. 이미 중학생 때부터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를 기초로 한 〈쥐돌이〉를 그려냈던 영재 만화가는 만화방 시스템에서 생계형 작가로 버텨낸다. 이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재능 있는 그림만으로 월간지 《어깨동무》에서 초대 미술부장을 역임하며 잡지와 만화라는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후, 《일간스포츠》의 연재 시작은 그에게 인기 작가라는 세상의 평가와 함께 한국 만화를 제도권 내의 스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사회적 견인차 역할까지 담당하게 한다.
고우영은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다양한 취미에서 달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능력들은 이후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와 여행, 등산, 낚시, 골프 등에 이르는 장르적 도전으로 연계된다. 아내와 함께 다니기 시작한 성당에서 영세명 요셉으로 세례를 받고, 《평화신문》에 돈키호테를 신부로 해석한 만화 〈몬시뉼키호테〉를 연재했으며, 교리책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 등을 출간하고는 성경 전체를 만화로 만들어보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 고전의 시작과 끝을 모두 정리해보겠다는 야망 같은 욕심도 부렸고, 등산, 낚시, 골프 등 스포츠마다 마치 매뉴얼 같은 교범을 만화로 만들어보겠다는 시도도 했다.
〈짱구박사〉 만화 컷(©(주)고우영)
주기적으로 여행을 기록해 1970년대 미국 여행 기록 〈미국만유기〉, 1980년대 유럽 여행 이후 〈유럽만유기〉, 1990년대 중국 여행 이후 〈중국만유기〉 등 전 세계 여행에 대한 백과사전 같은 만화를 기획 출간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실용 학습 만화와 삽화 등에도 도전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겠다는 의욕의 전집 기획 등 어떤 주제와 목표에 집중하면 무엇이든 최고로 만들어보겠다는 의지는 한국 만화사에 또 다른 도전들을 추동시켰다. 〈고우영의 맛있는 골프〉에서는 전국 131개 골프장의 길과 맛집까지 소개했는데, 그와 함께 라운딩을 했던 지인들에 따르면 어느 단골 골프장의 몇 번 홀 나무 밑에 숨겨둔 위스키병이 있었고, 그 홀에 갈 때마다 그 병을 찾아 마시며 자신의 호기로움을 보여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윤승운, 신문수, 이정문, 허어, 이두호, 박수동 등과 함께 낚시 동호인 모임 ‘심수회’를 만들어 본인이 알고 지내던 사회의 인적 네트워크와 만화계를 연결했다. 1980년대 말에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라면과 맥주 광고에 이어 〈가루지기〉 영화 시리즈의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1988년부터 4년 동안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역임하며, 변화하던 한국 만화의 지평을 넓히고 만화방 만화와 잡지 만화를 넘어서 단행본 시대로 직진하던 한국 만화의 작가들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고우영의 스포츠 신문 연재는 이후 방학기와 강철수, 이현세와 허영만, 이재학과 하승남 등의 스타 작가 군단을 일간지 연재로 동참하도록 했고, 한국 만화가 해내야 할 새로운 서사와 주제, 장르들에 거침없이 도전하게 했다. 2001년 고우영 만화 다시 읽기 붐을 일으킨 MBC라디오의 고우영 삼국지 라디오 드라마는 잠자던 팬덤을 부상시켰고, 인터넷 신문 《딴지일보》에 재연재된 〈고우영 삼국지〉는 무삭제 CD판으로 복간되어 신세대 독자들을 매혹시켰다. 《한국일보》 이사대우 편집위원을 역임하며 신문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완성했던 작가 고우영은, 2005년 향년 66세로 그를 좋아하던 독자들 곁을 떠난다.
〈맛있는 골프〉 표지(©(주)고우영)
프리미엄 만화의 시대를 열어젖힌 천재 작가, 시대와 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대사와 연출의 미학을 영화와 문학 수준 이상으로 끌어올려 만화의 새로운 해석과 도전을 보여준 악동 같은 천재, 그래서 모두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작가, 고우영은 늘 신선한 시도로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미 1980년 1월 8일 기고했던 《동아일보》 칼럼에서는 대학에 만화과가 생길 거라며 본인은 너무 바빠서 주임교수 요청을 거절할 것이라는 특유의 자화자찬을 만화적 상상으로 표현했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그의 발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풀숏으로 보여지는 원경숏이 대사보다 더 큰 내레이션의 힘을 보여주는 스킬, 그 어떤 후배 작가도 범접할 수 없는 이런 여유로운 작화는 여전히 한국 만화에서 기념비적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에서는 탈선의 만용이 유머로 용인되는 여백이 있다. 도전의 자신감으로 해석되는 내공의 탄탄함이 직설적인 작화의 가벼움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된 명장의 추상화로 느껴지게 한다. 시대적 고증과 언어의 계급성을 뛰어넘는 콜라보와 융합의 대향연, 그래서 축제 같은 고전 역사 만화의 고우영식 코스프레는 여전히 지금도 한국 만화가 배워야 할 유머의 매뉴얼이며, 해학과 비평의 이정표이다.
— 한창완
길창덕
우스개는 힘이다. 형상에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두 갈래 길로 갈라졌다. 첫 번째 길은 풍자와 계몽의 길이다. 유럽의 근대화와 함께 권력을 풍자하며 풍자 산업이 등장했다. 전단,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 풍자만화가 수록되었다. 풍자를 끌어가는 강력한 힘은 ‘우스개’였다. 대중들은 절대 권력을 조롱하는 만화에 환호했고, 발 빠른 출판업자들은 대중들이 좋아하는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창조했다. 유럽과 미국에서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걸쳐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창조되었고,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이 몇 개의 연속된 칸에서 바보짓을 하는 우스개(comic, funnies)가 그대로 새로운 형식을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20세기 초반 한국도 일본과 미국에서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받아들였다. 한국 최초의 연재 만화는 1909년 6월 2일에 창간된 《대한민보(大韓民報)》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揷畵)〉지만, 우스개 만화는 1924년 10월 13일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심산 노수현의 네 칸 만화 〈멍텅구리〉 시리즈부터 시작된다. 〈멍텅구리〉 시리즈는 미국을 대표하는 가족 우스개 만화인 조지 맥머너스의 〈아빠 기르기(Bringing Up Father)〉와 이 만화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아소 유타카의 〈논키나토상(ノンキナトウサン, 태평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기획, 창작되었다.
〈멍텅구리〉 시리즈는 ‘헛물켜기’를 시작으로 ‘련애생활(연애생활)’, ‘자작자급’, ‘가뎐생활(가정생활)’, ‘세계일주’ 등으로 시리즈를 이어가 1927년 8월 18일까지 모두 703회가 연재되었다. 당시 반도키네마에서 영화로 제작되어 조선극장에서 상영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멍텅구리〉의 인기에 놀란 《동아일보》는 안석주의 〈허풍선이 모험기담〉을 1925년 1월 23일부터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주인공 허풍선이 세계 일주를 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다룬 것으로 ‘세계 여행’이라는 근대의 로망이 펼쳐졌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는지, 8월 17일부터 〈멍텅구리〉와 같은 형식(세로로 긴 4칸)을 채용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를 내세운 〈엉터리〉를 연재하며 〈멍텅구리〉의 인기에 맞불을 놓기도 했다. 이 밖에 《시대일보》에서는 1925년 6월 30일부터 〈구리귀신〉(작가 미상)을 연재했고, 그 뒤를 이어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마리아의 반생〉을 연재했다.
1924년 〈멍텅구리〉의 인기에 힘입어 한국에 우스개 만화의 시대가 열렸다. 여느 나라처럼 한국도 근대 만화의 출발점에 우스개 만화가 존재했다. 이 우스개 만화가 1970년대에 ‘명랑 만화’로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는 커다란 숲이 되었다. 그 숲을 키워낸 대표적인 작가가 길창덕이다.
1970년대 골목길 오후 5시면 울리던 애국가와 나를 꼼짝 못 하게 하던 국기 하강식. 여름방학이면 시골 친척집에 다녀온 기억. 학교에 모여 나무를 심던 식목일. 어린이날에는 무료로 개방했던 창경원과 어린이대공원, 어린이회관.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회와 청군과 백군의 기마전, 김밥 도시락. 우리 집 앞 버스 종점 옆 자장면 가게. 친구들과 하던 탐정, 탐험, 무인도 놀이의 즐거움. 또랑또랑 외우던 국기에 대한 맹세. 1970~1980년대에 이러한 유년 시절을 보낸 모두의 추억에 길창덕의 명랑 만화가 함께한다.
1970~1980년대 많은 어린이 신문과 잡지에는 길창덕 만화가 빠지지 않았다. 《소년한국일보》 독자들은 신문을 펴면 먼저 〈재동이〉를 찾았다. 《새소년》의 부록으로 배달되던 〈선달이 여행기〉를 먼저 찾아보았고, 〈꺼벙이〉를 보기 위해 《소년중앙》을 들었다. 해태유업에서 제공한 〈마음의 등불〉 때문에 해태우유를 먹자고 조르기도 했다. 우리가 지나온 1970~1980년대는 머리에 생긴 땜통 자국, 장난치다 생긴 커다란 혹, 반쯤 감긴 졸린 눈, 선 몇 개로 쓱쓱 그은 캐릭터로 남았다.
길창덕 만화에 가장 열광한 세대는 1970~1980년대에 유년 시절을 보낸 이들이었지만, 길창덕 만화의 독자는 몇 세대가 함께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아리랑》이나 《실화》, 《야담》과 같은 대중잡지에 연재하던 만화를 본 당시 어른들이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연재한 어린이를 위한 만화를 본 세대가 있으며, 1970년대부터 연재를 시작한 〈꺼벙이〉와 함께 자라난 세대와 1980년대 〈쭉쟁이〉, 〈재동이〉, 〈고집세〉, 〈코미디 홍길동〉 등의 만화를 본 세대, 마지막으로 1996년 단행본으로 새롭게 출판된 〈내동생 꺼실이랑 우리오빠 꺼벙이〉를 본 세대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길창덕의 명랑 만화는 20세기 한국과 함께했다.
길창덕은 1929년 12월 11일 평안북도 선천군 동림면에서 아버지 길경춘과 어머니 서정희 사이에서 6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세가 강했고, 상공업이 발달했다. 길경춘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개신교회 장로였다. 길창덕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해 아이들을 건사했다. 크리스천으로 성실하게 살았던 아버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란 길창덕은 자신의 만화를 통해 충, 효와 같은 교훈을 독자들에게 전하기를 즐겨했다. 그래서 길창덕의 명랑 만화는 ‘일탈’보다는 ‘교훈’을 중시했다.
웃음보다는 친근함과 일상이 강조되고, 교훈적이고 따뜻한 길창덕의 명랑 만화는 세대를 아우르며 사랑을 받았다. 〈꺼벙이〉, 〈코미디 홍길동〉 표지
1943년 정주보통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길창덕은 정주역에 근무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1월 27일 길창덕은 어머니를 두고 고향 정주를 떠났다. 부산으로 간 길창덕은 빨리 고향에 돌아갈 요량으로 1951년 8월 군에 자진 입대해 4년간 교육 담당으로 근무했다. 1955년 제대 후에는 형의 장사를 도와주며 만화를 그리고 시를 썼다. 만화가 문하에 들어가지 않고 독학으로 만화를 익혔다. 잘못 그리면 고치는 걸 배우지 못해 매번 처음부터 다시 그리며 특유의 선을 완성했다. 어느 날 길창덕은 그동안 작업한 만화와 시를 모아 《서울신문》에 보냈다. 1955년 7월 18일 자에 〈머지않은 장래의 남녀상〉이 채택되었고, 8월 1일 〈사랑의 남신상〉, 8월 9일 〈공처가〉, 8월 22일 〈입체영화 이문(立體映畵 異問)〉 등이 잇달아 게재되었다. 만화와 달리 시는 모두 탈락했다. 내심 시인이 되고 싶었던 길창덕은 시인의 길을 접고 만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1956년 월간 《실화》에 네 칸 만화 〈허서방〉을 발표했다. 간간이 발표된 길창덕 만화는 독자와 편집자를 사로잡았다. 이듬해 《야담》, 《소설계》, 《삼천리》, 《만화천지》 등에 단편 만화를 발표했다. 1958년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