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진로 상담사로 일해왔습니다. ‘사람’과 ‘직업’에 관심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인지라 자기 일을 통해 스스로를 자유롭게 표현하며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궁금했지요. 어쩌면 저렇게 행복해 보일까? 어떻게 자기 일을 저렇게 사랑하는 거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무슨 비밀이라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비밀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창하지만, 제가 살펴본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다른 이와 구분되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듯 보였지요.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신의 장단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지금 여기’에 몰입할 줄 알았습니다. 일할 때는 온 주의를 쏟으며 그 일에 집중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진짜 같이 있다는 느낌을 주었지요.
사실 제가 읽은 책에 나오는 수많은 현인들도 이 두 가지를 강조하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 사랑’과 ‘지금 여기’ 말이죠. 오래도록 저는 이 두 가지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떨 때는 자기 사랑이 먼저인 것도 같았고, 어떤 때는 지금 이 순간이 먼저인 것도 같았고, 또 어떨 때는 그 둘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가끔은 혹시 이 두 가지가 동의어는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요.
이런 궁금증을 지니고 있던 어느 날 〈우선, 달콤한 풀〉이란 시를 만났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하는 미국 현대 시인 메리 올리버의 이 시는 시인의 열여섯 번째 시집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수록되었는데, 일흔 중반에 접어든 시인이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시집의 중심 시구이기도 한 아래 문장이 인상적이었지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 그다음엔 그걸 잊어. 그다음엔 세상을 사랑하는 거지.”
저는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시인이 전 생애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진실, 그녀의 ‘앎’에 기대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하지만 핵심을 품고 있는 것만 같은 이 문장을 ‘진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고민해보았습니다.
진로(進路)는 ‘나아갈 진’과 ‘길 로’, 즉 나아가야 할 길이자 방향입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과정이지요. 진로 상담은 인생 상담과 비슷합니다. 단편적으로 인생의 어느 시기에 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통합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담자의 재능이나 관심사, 장단기 목표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혹은 미워하는지, 어느 지점에 멈춰 서 있는지, 외부 환경은 어떠한지 등 인생 전반에 대해 충분히 나누어야 하지요. 메리 올리버가 ‘자기 사랑’을 이 문장의 가장 앞부분에 놓았듯, 진로 찾기에 앞서 자기 사랑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일의 시작점에서는 재능과 적성이 큰 역할을 하지만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데는 책임감이 필요합니다. 세상 어떤 일이든 타인의 평가나 외부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주위의 시선이 차갑거나 내외부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아 두렵고 막막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그동안 책임감을 가지고 열심히 해낸 나와 내 일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단단한 기둥이 되어줍니다. 흔들릴 수는 있지만 적어도 무너지지 않게 해주지요. 이처럼 자기 사랑은 한 사람이 커리어를 이어가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기 사랑은 긴 여정입니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걸려 넘어지는 지점 또한 제각각입니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요. 자신의 과거와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기 싫은 모습조차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괜찮다고 말해줘야 하지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자신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충분히 자신을 인정하고 허용하다 보면 차츰 감정적인 허기도 채워집니다.
그즈음 자신에게 질문하게 되지요.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걸 좋아하지? 나는 무슨 일을 할 때 행복하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비로소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저것 시도하고 탐색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잘하는 것 등을 발견하게 되죠. 그사이 서너 번 이상 직업이 바뀌기도 하고, 뜻하지 않은 좌절과 실패가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여기저기 기웃대기를 멈추고 온전히 지금 여기를 살아갑니다. 허망한 생각으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에 집중하게 되지요. 몰입할수록 성과도 좋아지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커집니다. 자신을 지키거나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도 조금씩 사라지지요. 누군가의 말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더 이상 타인의 인정에 과도하게 기대지 않게 됩니다.
그다음 단계는,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를 잊는 일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작은 ‘나(에고)’에 온 주의를 집중해 살아갑니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느라 조급하고 불안해하지요.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하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쓰기도 하죠.
그랬던 작은 ‘나’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며 지금 여기를 살게 되면, 과도하게 쏠려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나에게만 보냈던 관심과 주의를 타인과 세상을 향해 돌리지요. 개체적 자아가 차츰 사라지며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쓸모 있고 필요한 존재가 되어 세상에 기여하고 싶어 하지요. 타인을 사랑하고 세상과 연결되고 싶어 합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오며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와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자기 사랑이 촘촘히 채워진 도화지 위에 자기만의 그림을 마음껏 그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을 정도로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과 하나가 되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바라는 건, 우리가 이 생에 온 진짜 이유를 깨달았으면 한다는 겁니다. 외부의 평가와 세상의 잣대에 흔들리지 않고 진정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눈떴으면 좋겠습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말한 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 아닐까요.
이 책은 제가 진로 상담사와 독서모임 운영자로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들과 마음공부를 하며 진짜 ‘나’와 만났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일을 글로 적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쓰기로 다짐했던 첫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 어디선가 힘들어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이죠. 부족한 글이나마 이 책을 통해 단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고이 담아 부칩니다. 누군가에게 그 마음이 닿는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 사랑’이었으면 합니다.
어느 봄과 여름 사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과이모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