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自序)
할머니는 교양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볕이 뜨거운 날에는 모자를 쓸 것
바쁠 때는 두 계단씩 올라갈 줄도 알 것
이라고 적힌
나도 교양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인도양을 건너는 인도
사람의 이야기나
완벽한 사자를 기르는 법이 더 궁금했다
세 번째 시집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
2024년 6월
임지은
리본과 화분이 약속한다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한다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
새로 산 우산이 겨울비를 맞는다
계단이 물 자국을 빨아들인다
투명한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쓴다
오래오래 잘 사세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머리부터 집어넣는 티셔츠의 세계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
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인다
컵과 얼음이 만나서 완성되는 여름
구멍 난 장갑이 눈사람의
차지가 되는 겨울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래
사람들이 둥근 것을 좋아해서
서울에는 원이 많다
학원 병원
식물원 동물원 유치원
동그란 식탁에 모인 동그란 얼굴
동그란 컵에 담아 마시는
동그란 웃음
태어난 자리에서 죽은 나무가
밑동만 남겨진 채 잘려 나가는 걸 볼 때
동그란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식물도 특별히 살고 싶은 곳이 있을까?
한여름에 얼음을 껴안고 있는 펭귄은 남극을 기억할까?
사람들이 좋아해서
심은 나무와 좋아해서 잡은
생선과 좋아해서 데려온 동물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에게 좋아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졌다
시간이 원을 좋아해서
시계가 둥근 것이 아니듯
세상엔 좀 더 많은 모양이 필요하고
휴일에 찾은 식물원은 문을 닫았다
식물도 깊은 잠이 필요하니까
잠자는 나무를 따라 눈을 감았다 뜨면
하늘에 새들이 피어 있었다
횡단보도가 얼룩말인 척 누워 있었다
침대에 심어 놓은 인간이 뿌리로 걸어 다녔다
경계는 좋은 거야?
갈라지는 길에서 아이는 묻습니다
그 어려운 단어를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지만
경계는 아이와 나를 멀어지게 합니다
*
여기는 차도입니다
전에는 인도였죠
사람들이 걷는 것을 즐겼을 때
걷는 일에서 인생의 리듬을 배웠을 때
이젠 길에서 농담을 줍는 사람은 없고
무단 횡단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거 참 아주 위험한 농담이군요
도로에는 울타리가 세워지고
신호등은 거꾸로 숫자를 셉니다
행여나 사람들이 죽음을 건너지 않도록
*
운동장에 물 주전자로 선을 그리고
아이들이 피구를 합니다
공을 맞은 아이는 선 밖으로 나오고
공을 피한 아이는 살아남습니다
피구는 회피를 배우는 운동입니다
선이 증발해 버리자
아이들은 흩어지지도 모이지도 않습니다
놀이는 중단됩니다
*
경계는 슬픈 거지요?
잘못 그은 선을 지우개로 문지르며
아이는 묻습니다
괜찮아, 약간의 똥을 남길 뿐
깨끗하게 지워질 테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발바닥이 있어 걸어 다닙니다
서 있을 때 발바닥은
낮잠으로부터 제일 멀어요
일어나기 위해 쭈그려 앉은 나를 누군가 밉니다
나는 굴러가면서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돼요
지구가 돈다는 사실도
달에겐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돌멩이와 화분과 의자를 가져다 놓으니
공원이 되어서 걸었습니다
니체가 죽지 않았다면 여전히 살아 있을 텐데, 같은
무용한 생각을 하며
대야와 우산과 수건을 가져다 놓고
해변이라 한다면
그곳에도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칠까 궁금해하며
딱딱한 것이 밟혀 운동화를 거꾸로 털자
작은 돌이 굴러갑니다
위로가 필요해 쭈그려 앉은 사람처럼
돌의 발바닥은 위, 아래가 아닌
중간 어디쯤 위치해 있을 거예요
누군가 껌 종이와 유리 조각과
마침표를 가져다 놓고 마음이라고 해서
만져 보았습니다
말랑하네요, 딱딱
해지지만 않는다면 말랑할 겁니다
당신의 내면은 지나치게 촘촘하다
발 디딜 틈 없는 그곳에 어느 솜씨 좋은 화가는 붓을 들어 흰색을 칠한다
그러나 빽빽한 숲을 좋아하는 당신은 나무 한 그루를 더 그린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방문에 당신은 내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방도 발 디딜 틈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앉을 곳 하나쯤은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모르는 당신에게 어느 손끝이 야무진 청소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