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_ 황윤
작가. 소장 역사학자이자 박물관을 사랑하는 남자.
혼자 박물관과 유적지를 찾아 감상하고, 고증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겁다.
아름다운 자연보다 잘 짜인 박물관이 더 좋은 이유는 인간이 함께 쌓아온 지식과 문화의 총체가 담긴 공간이기 때문.
박물관의 수준이 곧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이기에 우리나라에 더 근사한 박물관들이 만들어지길 고대하며 역사 교양 대중화를 위한 글을 쓴다.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국립중앙박물관》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경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백제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가야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제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강원도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남한산성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경주 여행2 만파식적편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통영진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분청사기 여행》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백자 여행》
《컬렉션으로 보는 박물관 수업》 《도자기로 본 세계사》 《박물관 보는 법》 《김유신 말의 목을 베다》
책읽는고양이는 동물병원 안에 있는 작은 출판사입니다.
동물병원과 출판사를 오가는 고양이들은 종종 책 위에서 휴식을 청합니다.
무심한 듯 우아하게 나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같은 책을 펴냅니다.
※ 일러두기
1. 표지에 사용한 수자기(帥字旗)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깃발입니다. 조선 후기에 사용한 것은 확실하나 임진왜란 당시에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2018년에 개최된 관함식에서 일출봉함에 게양된 수자기에 대해 일본이 ‘이순신 깃발’이라 표현하며 불만을 표명함으로써 대중적인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2. 본문에서 인용되는 모든 저작이나 단행본에는 《 》(겹화살괄호)를, 잡지 등의 정기간행물에는 < >(홑화살괄호)를, 문서, 그림 등의 제목에는 ‘ ’(홑따옴표)를, 전시명에는 “ ”(쌍따옴표)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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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통영시립박물관을 방문한 가을 어느 날,
“음,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 초상이로군.”
통영에 가면 반드시 보려고 벼르던 작품이다. 이곳 박물관 2층에는 두 점의 이순신 초상이 함께 전시되고 있는데, 한 점은 작은 액자 속 푸른 옷을 입고 있고 다른 한 점은 이보다 2배 정도 큰 크기로 조선 후기 복장인 구군복(具軍服)을 입고 있다. 가만히 감상해보니, 참으로 이질적이면서도 인상적인 분위기로 다가오는 걸.
두 작품이 이토록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작은 작품은 수채화로, 큰 작품은 전통 채색화로 그려졌다. 수채화 작품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라는 영국인 화가에 의해, 전통 채색화는 근현대 전통 회화를 그린 성재휴(成在烋, 1915~1996)에 의해 그려진 작품이라는 사실. 즉 비슷한 시점 서양화가가 서양화 기법으로 그린 이순신과 동양화가가 전통 채색화로 그린 이순신이 대비되듯 한 곳에 전시된 것이다. 덕분에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싶군.
엘리자베스 키스, ‘청포를 입은 무관’. 통영시립박물관. ⓒPark Jongmoo
다만 성재휴 작품은 선배 작가인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이 아산 현충사에 배치할 분명한 목적 아래 1932년 그린 이순신 초상화를 모델로 하여 1938년에 그린 것인 반면,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이순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사실 해당 작품의 명칭부터 사실 이순신이 아니거든.
키스의 한국 관련 책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를 번역한 송영달 미국 이스트캐롤라이나대학교 명예교수는 키스의 이 ‘무인 초상화’를 최근 입수했다. 이 그림은 그동안 키스의 조카인 애너벨 베러티가 소장해왔다. 《키스, 동양의 창을 열다》 번역판에는 송 교수가 붙인 부록에 키스의 그림들이 나열돼 있는데, 이 그림은 ‘청포를 입은 무관’으로 소개돼 있다.
<경향신문> 영국 화가 키스가 그린 초상화 인물은 이순신 장군 2019, 7. 7.
이상범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성재휴가 그린 이순신. 1938. 시립통영박물관. ⓒPark Jongmoo
기사 내용처럼 해당 그림에 대해 엘리자베스 키스는 이순신이 아닌 ‘청포 입은 무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키스가 죽은 후 ‘청포 입은 무관’은 그의 조카가 소장한 채 오랜 기간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근래 송영달 교수가 책을 번역하다 발견한 직후 무인 뒤에 거북선이 가득한 병풍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 의해 등장하였다. 혹시 아산 또는 통영 등지에 남아있던 이순신 초상화를 일제 강점기 시절 엘리자베스 키스가 보고 옮겨 그렸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관심도가 높아지자 송영달 교수는 해당 작품을 구입한 뒤 통영시에 기증하였고, 지금처럼 통영시립박물관에 전시되기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이순신 초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현재는 나름 통영시립박물관의 상징처럼 알려진 상황.
그렇다면 정말로 해당 작품은 조선 시대에 그려진 이순신 초상을 엘리자베스 키스가 보고 옮겨 그린 것일까? 궁금해진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그제 방문한 진주 여행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유등축제
진주 유등축제를 볼 겸 KTX를 타고 진주를 방문했다. 10월 중순이라 그런지 하늘이 파랗고 쾌청하여 좋군. 진주역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지나 남강을 건너는데, 오 저기 축제 모습이 보이네.
진주성 주변 남강에 용, 봉황, 코끼리, 공룡, 귀여운 인형, 연꽃, 사람 등등 다양한 모양의 등이 물에 떠있다. 밤이 되어 불이 켜지면서 더욱 아름답겠지. 또한 강 곳곳에는 다리를 연결하였는데, 마치 정조 시대 화성원행의궤도에 선보인 배다리처럼 디자인한 것이 재미있다. 낮인데도 벌써부터 이곳저곳 사람들로 붐빈다. 저녁이 되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인파가 넘칠 듯. 아무래도 축제를 즐기러 전국에서 오니까.
이 유등축제를 단순히 진주를 가로지르는 남강에서 벌어지는 현대적 축제쯤으로 여길지 모르겠지만, 실은 임진왜란과 연결된 숨은 이야기가 있다. 즉 단순한 지역 축제가 아니라는 의미. 이를 한 번 살펴볼까?
유등축제 배다리. ⓒPark Jongmoo
화성원행의궤도 중 배다리.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1. 1592년 7월 한산도대첩, 2. 1592년 10월 진주대첩, 3. 1593년 2월 행주대첩을 꼽는다. 이들 각각의 전투는 임진왜란 전황을 크게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으니, 이 중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이 다름 아닌 남강을 주변으로 한 진주성이거든.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과 함께 무려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부산 상륙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는 속전속결의 모습을 보였다. 이때 일본의 전략은, 1. 조선 왕을 사로잡기 위해 북쪽으로 빠르게 진격한 일본 육군을 위한 보급은 배에 실어 일본→대마도→남해안→서해안을 거쳐 이동시키고, 2. 그 과정 중 한반도 곡창 지대인 전라도까지 함락시켜 해당 자원 역시 일본군이 적극 사용하도록 하며, 3. 이를 통해 빠른 속도로 조선을 흡수하여 한반도를 보급 기지로 삼은 후 명나라로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592년 7월 8일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함으로써 1차적으로 일본 육군의 보급을 맡아줄 해상 지원이 무너졌고, 1592년 10월 김시민이 이끈 진주성에서 일본이 패배하면서 2차적으로 곡창지인 전라도 진출마저 실패하게 된다. 이로써 이미 북쪽으로 진출한 일본군은 해상으로 본국의 보급품을 지원받을 수 없게 된 데다 한반도 안에서도 전라도에서 보급품을 얻으려던 기본 계획마저 무너지고 말았지.
그러던 차에 조선 지원을 위해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하며 참전하였고, 1593년 2월 한양 근처에서 권율이 주도한 행주대첩에서도 크게 패배하면서 일본은 더 이상 북쪽에서 군대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일본과 가까운 경상남도로 후퇴하여 기회를 보며 버티는 작전으로 변경하였다. 이로써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패로 정해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던 관계로 조선은 승리했음에도 매우 큰 피해 속에 처절한 기억으로 남은 전쟁이 되고 만다.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큰 의미를 지닌 전투가 벌어진 진주성. 이곳에서 김시민과 조선 병사들이 일본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군사 신호 및 통신을 위하여 남강에 등불을 띄운 것이 오늘날 유등축제의 기원이다. 그런 만큼 유등축제는 과거 역사적 사건을 방문객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
자. 버스에서 내렸으니, 지금부터는 진주성으로 가서 진주대첩을 상세히 그려볼까.
진주성의 과거와 현재
버스 정류장에서 진주성 공북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다. 아무래도 북쪽 성문부터 들어가면서 여행하는 것이 구경하기 편해서 말이지. 거리상 약 10분 정도 걸어야 할 듯. 걸으며 바라보니 저 위의 성곽이 꽤 운치 있게 보이는걸.
현재 성 둘레 1.7km의 진주성 규모는 임진왜란 당시보다 크게 축소된 형태다. 본래는 지금보다 동쪽으로 더 길고 넓게 뻗어있었지. 어느 정도냐면 현재 진주성 동문인 촉석문 앞으로 진주시가 대첩광장을 조성하고 있는데, 해당 영역을 포함한 주변 상당이 진주성 내부에 속했을 정도. 그러나 성이 너무 넓어 오히려 방어하기 어렵다고 여겼기에 임진왜란 이후 동쪽 성을 일부 축소하였으며 그 과정 중 진주성 내부에 성을 하나 더 만들어 외성과 내성으로 크게 나누게 된다. 즉 성을 적당한 규모로 줄이되 만일 적에게 외성이 무너지면 내성으로 옮겨가 방어하는 방식으로 생존력을 높인 것이다. 다만 임진왜란 시점에 내성, 외성으로 구분된 시스템이 준비되었다면 더욱 난공불락으로 유지되었을 텐데 안타깝군.
진주성 공북문. ⓒPark Jongmoo
결국 현재 남아 있는 진주성은 임진왜란 이후의 내성이 위치한 곳이며 한때 둘레 4km에 다다르던 외성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을 거치며 벌어진 안타까운 점이라 하겠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 외성이 먼저 철거되고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더 나아가 내성까지 철거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독립 후 1960년대를 지나며 수차례 복원되어 내성 부분만 겨우 되살아날 수 있었다. 즉 현재의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와 비교하여 약 5분의 2 정도 규모라 보면 좋을 듯.
현재 성 둘레 1.7km의 진주성 규모는 임진왜란 당시보다 크게 축소된 형태다. 사진 게티이미지
조선 초기, 임진왜란 시기, 조선 후기, 현재의 진주성 모습. 카카오위성사진
한편 촉석문 앞 오랜 기간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장소를 대첩광장으로 조성하던 중 통일신라 배수로, 고려시대 토성 등이 발굴되어 주목받았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이전부터 이미 진주성이 중요한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지. 오죽하면 진주성에 대해 저 과거로 가면 백제 거열성(居烈城)에서 시작되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다시금 부각될 정도로 의미 있는 발굴 성과였다. 이렇듯 진주성은 임진왜란 전부터 이미 역사가 남다른 장소였던 것.
이로써 현재 남아 있는 진주성의 모습과 과거의 진주성 모습까지 대략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때 성을 지킨 김시민을 필두로 3800명의 조선 군사들이 5배가 넘는 2만 명의 일본군과 격전을 펼쳤던 곳은 어디였을까?
진주성은 현재 사라진 동쪽 지역이 방어에 있어 약점이었다. 지금도 성을 살펴보면 성 남쪽으로는 폭이 넓은 남강이 흘러 함부로 공격하기 힘들고, 서쪽은 경사 높은 언덕에 위치하여 역시나 공략이 쉽지 않다. 또한 북쪽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으로 해자를 둘러 방어력을 크게 높였지. 일제 강점기 시절 매립되어 사라진 대사지(大寺池)라 불리던 거대한 연못이 바로 그것.
이에 비해 평지에 위치한 동쪽 성벽은 진주성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만큼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이곳을 적극 노렸으며,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군 역시 성 동쪽에서 최선을 다해 방어에 임했다. 이는 곧 현재 남아 있는 진주성이 아닌 사라진 진주성에서 큰 격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한다. 현재 그 위치를 대략 찾아보자면 ‘장대어린이공원’ 주변이 바로 그곳이다. 혹시 관심이 있다면 네이버 맵이나 카카오 맵으로 찾아보면 좋을 듯싶군.
드디어 공북문에 도착. 이미 입장하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마침 축제 때라 입장료가 무료다. 그렇다. 기억해두자. 설날과 추석·유등축제 때는 진주성 입장료가 없다는 사실. 이는 반대로 축제가 없을 때는 표를 사야 한다는 의미다.
(위) 촉석문. 사진 게티이미지 (아래) 촉석문 앞 오랜 기간 주차장으로 사용하던 장소를 대첩광장으로 조성하고 있다. ⓒPark Jongmoo
일제 강점기 시절 매립되어 사라진 대사지라 불리던 거대한 연못.
촉석문부터 장대어린이공원 블럭까지가 사라진 진주성 영역. ⓒPark Jongmoo
김시민은 누구?
성 안으로 들어서자 각양각색의 인형들이 장식되어 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인형들이 매우 인상적. 다만 이런 인형들 하나하나가 등이기에 저녁이 되면 아름답게 빛이 날 예정이다. 그리고 저쪽으로는 공연하는 밴드 모습이 보이고 가족과 함께 여행 온 관람객, 연인과 함께 온 관람객, 친구들과 단체로 여행 온 중·고등학생들 등 수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다. 중간중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많이 보여 기분이 좋군. 왁자지껄한 분위기 덕분에 정말 인기있는 축제로 다가오는구나.
성 남쪽, 그러니까 남강이 보이는 뷰가 시원한 길을 따라 서쪽으로 쭉 올라가본다. 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남강 쪽 유등이 배치된 것이 정말 잘 보이는걸. 휴우. 기분이 상쾌해. 이렇게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어느덧 국립진주박물관이 눈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다만 지금은 박물관 안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올 예정이라, 박물관에 대한 설명은 조금 이따 하겠다. 박물관 입구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가방이나 짐을 보관할 수 있는 물품보관함이 있거든. 여기에 짐을 넣어두고 가벼운 몸으로 진주성을 돌아볼 생각이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를 묘사한 인형들. ⓒPark Jongmoo
남강이 내려다보이는 성곽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 ⓒPark Jongmoo
자~ 진주성에 올 때마다 이렇게 짐을 박물관 물품보관함에 두곤 한다. 가볍게 비밀번호로 열고 닫고가 가능하니, 혹시 짐이 있다면 이곳에 맡기는 것을 추천. 여행 때 가방을 계속 들고 다니면 아무래도 피곤하니까 말이지. 그럼 마저 서쪽으로 더 이동해볼까?
언덕 위에 위치한 진주성 서쪽 가장 끝 부분, 등산을 하듯 서장대가 위치한 곳으로 이동하다보니, 점차 주변 관람객도 줄어 한산하다. 아무래도 성 중심부에서 점차 떨어져서 그런 듯.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만큼 진주성 전투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그전에 우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시민에 대해 알아볼 시간.
언덕 위에 위치한 진주성 서쪽 가장 끝 부분에 서장대가 있다. ⓒPark Jongmoo
조선은 과거 시험으로 고위 관료를 뽑던 국가였던 만큼 합격자에 대한 기록도 잘 남아있는 편이다. 이를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이라 하니 소위 문과, 무과 과거 합격자 명부를 뜻하지. 특히 해당 기록에는 과거 합격자 본인에 대한 사항, 가족에 대한 내용, 시험의 종류 및 성적 등이 상세히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순신의 경우 1576년 식년시(式年試: 3년마다 보는 정기 시험) 무과에 32세의 나이로 합격하였으며 총 29명의 합격생 중 병과(丙科) 4위에 해당했다. 다만 당시 과거 시험은 성적에 따라 갑, 을, 병으로 나누어 성적을 표기했기에 갑 3명, 을 5명에 이은 병 4위로서 이순신의 전체 성적은 12등이었다. 또한 이순신에 대해 자(子)는 여해(汝諧)이며, 가족 사항으로 아버지는 종5품의 창신교위(彰信校尉)였던 이정, 형제로는 이희신, 이요신, 이우신 등이 있었다. 이렇듯 과거 합격자 명부에는 합격생을 넘어 해당 인물의 가족 정보까지 정확히 기록해두었지.
뿐만 아니라 전력(前歷: 과거의 경력)이라는 항목에는 이순신에 대해 보인(保人)이라 되어있으니, 이는 곧 합격할 당시 별다른 직업이 없었다는 의미다. 지금으로 치면 무직? 그렇다면 반대로 직업을 지닌 이가 무과에 합격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인데, 물론이다. 이순신이 합격할 당시 29명의 합격생 중 무려 25명이 내금위, 갑사 등의 하급 군인 출신이었거든. 오히려 보인, 즉 아무 직업이 없던 이는 이순신 포함 4명에 불과했다. 이를 미루어볼 때 보통 군 경력이 있던 인물들이 장교로서 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 무과 시험에 도전했던 모양.
한편 문무과방목(文武科榜目)에 따르면 1592년 10월, 진주대첩을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31세에 1584년 별시(別試: 비정규적으로 시행된 시험) 무과에 합격한 인물로서 합격 당시 성적은 을과(乙科) 3위에 해당했다. 이때에는 무려 202명이 무과에 합격하였는데, 이를 갑 1명, 을 16명, 병 185명으로 나누었다. 즉 당시 김시민은 202명 중 4위에 해당하는 높은 성적을 거둔 것이다.
무엇보다 김시민의 경우 전력(前歷)이 겸사복(兼司僕)이라 되어 있다. 겸사복은 조선 시대 정예 기병 부대이니, 김시민이 과거 시험 합격 전 중앙군에 편제된 기병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순신과 달리 김시민은 이미 군인 경력이 있는 상태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했던 것.
그런데 왜 이순신 때와 달리 김시민 때는 무려 202명의 무과 합격생이 배출된 것일까? 이는 당시 벌어졌던 큰 전쟁인 니탕개의 난과 연결된다. 1583년 함경도에서 니탕개가 이끈 여진족이 조선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최대 3만 명의 유목민이 공격해온 엄청난 사건이었거든. 이는 임진왜란 전까지 가장 많은 숫자의 외부 적이 조선으로 침입한 사건이었을 정도. 이후 약 4년에 이르는 여진족의 준동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장교를 보충하고자 1583년에는 비정규 시험인 별시로 500명, 1584년에는 별시로 202명의 무관을 무과 시험에 합격시켰다. 그 결과 이순신 합격 때는 29명에 불과했던 무과 합격생이 김시민 때는 202명에 이르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니탕개의 난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때 명장으로 올라서는 이순신, 김시민, 황진, 이억기 등이 하급 장교로서 활약했다는 사실. 덕분에 임진왜란의 명장들은 비교적 실전 경험이 풍부한 상황에서 일본군을 맞이할 수 있었다. 즉 이들이 이룩한 혁혁한 공은 과거부터 충실히 경험한 군 경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던 것.
그리고 시간이 흘러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도수군 절도사(정3품)에 임명되었고, 김시민은 진주판관(종5품)에 임명되었다. 이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 이루어진 인사였다.
진주대첩
드디어 높다란 위치에 자리 잡은 서장대에 도착했다. 서장대에서 바라보니 진주시 전경이 저 멀리까지 시원하게 펼쳐 보이는군. 이처럼 지금은 조용히 진주시 뷰를 감상하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과거에는 군대를 지휘하는 중요한 장소로서 주변에 비해 높은 장소인 만큼 적병의 움직임을 세세히 파악하여 명을 내릴 수 있었지.
한편 이런 장소로는 진주성 내 북장대도 있다. 역시나 지휘소가 있던 장소로서 서장대보다 규모가 더 크며 광해군 시절인 1618년 중건한 뒤, 근래 수리 과정에서 고종 시절인 1864년에 쓴 상량문이 발견되며 더 큰 유명세를 얻었다. 상량문은 새로 짓거나 고친 건물의 내력을 적어둔 문서로서 이를 통해 고종 시절에 북장대의 수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거든. 그렇다면 북장대는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절에도 철거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조선 중기 건물이었던 것.
반면 서장대는 허물어져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을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34년, 진주의 부호이자 향토 사학자인 서상필 선생(1892~1955)이 진주의 자존감을 세우기 위해 사재를 털어 만들었다. 다만 서장대 역시 본래는 북장대와 유사한 규모였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으로 지금의 작은 형태로 지어졌다고 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상필 선생은 서장대를 만든다며 진주경찰서에 연행,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고 하니. 나라 잃은 슬픔이란 이런 것일까? 뿐만 아니라 서상필 선생은 일제 강점기 시절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며, 진주고, 진주여고 설립 때에는 발기인으로 큰돈을 기부하기도 한 인물이다. 앞으로 서장대를 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잊지 말고 이분의 이름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이렇게 높은 서장대에 올라 주변 풍경을 내려다보니 임진왜란 시절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 가득 모인 일본군이 그려진다. 이제야 진주대첩의 과정을 눈앞에 보이듯 이야기할 때가 온 듯싶군.
이순신에 의해 해군의 서해 진출이 완전히 막힌 일본은 전라도 진출 진입로를 열기 위해 진주성을 적극 공격하기로 정한다. 지금도 진주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조선 시대에도 진주성은 전라도로 이동하는 길목으로서 중요한 장소였으니까.
서장대. ⓒHwang Yoon
이에 1592년 8월 중순부터 한양으로 진출한 병력 일부를 김해로 옮기고 약탈한 물자를 부산으로 이동시키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한 일본군은 9월 24일 드디어 김해성을 출발하여 진주성으로 서서히 진격하였다. 이때 일본 병력은 2만 명 이상이었으니, 상당한 대군이었지.
같은 시점 진주 주변의 조선군은 임진왜란 시작 후 형편없이 무너지던 상황을 점차 극복하고 있었으니, 바로 그 중심에 김시민이 있었다. 정3품인 진주목사가 전쟁 발발 후 지리산으로 도망갔다가 병사한 상황에서, 종5품인 진주판관으로 군사를 수습하며 활동 중이었거든. 이 과정에서 김시민은 진주 병력과 함께 5월에서 8월까지 진주성으로 접근하는 소수의 일본군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으며 사천, 진해, 고성 등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되래 공격하는 등 수비와 공격을 왔다 갔다 하며 놀라운 활약을 벌였다. 덕분에 7월 진주목사로 승진하면서 지금으로 치면 진주 시장이 된다.
그러나 이번 진주성 공격에는 일본군 2만 명 이상이 동원된 만큼 매우 암울한 상황이었는데, 진주목사가 된 김시민은 공격을 대비하여 총통 70자루와 충분한 화약을 준비하는 등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문제는 진주성을 지키는 병력이 3800여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 물론 여성, 아이, 노인 등 민간인 수만 명이 함께하였기에 이들 중 일부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히고 성 위에 두어 마치 병력이 많이 있는 것처럼 하는 방식이 그것.
북장대. 고종 시절인 1864년에 쓴 상량문이 발견되며 일제 강점기에도 철거되지 않고 살아남은 조선 중기 건물임이 알려졌다. 사진게티이미지
또한 성 밖에는 관군과 의병들이 동원되어 진주성을 지원하였다. 일본군이 예상하지 못한 곳을 소수의 결사대로 기습하거나 야간에는 진주 주변의 산봉우리에서 횃불을 올리고 고함을 지르며 휴식을 취할 수 없게 했으니까. 이때 진주성을 지원한 이들 중에는 그 유명한 곽재우(郭再祐, 1552~1617)도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의병을 이끌어 홍의장군(紅衣將軍)라 불리던 그는 진주 주변인 의령의 누대에 걸쳐 알아주던 부호 집안 출신으로 일본군이 부산으로 온 것을 들은 직후인 4월 22일부터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저항을 시작했거든. 그렇게 여러 공을 세우던 중 진주성으로 대군이 온다는 것을 듣자 지원에 나서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나팔을 불며 구원병이 곧 온다고 외치는 등 남다른 심리전을 보여 승리에 큰 도움을 준다. 이렇게 진주성 밖에서 호응하던 병력 숫자는 약 4000명에 이르렀다. 덕분에 일본군은 2만 명이 넘는 숫자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공세를 펼치기는 쉽지 않다 여겼으니, 곽재우의 지원은 진주성을 지킨 또 다른 힘이 된 것이다.
전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10월 5일
일본군 기병 1000여 명이 진주성 동쪽에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공격에 나서기 전 진주성 전반의 형태와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보낸 선봉이었던 것. 이에 진주성에서는 큰 깃발을 올리고 부녀자까지 남장하여 배치시킴으로써 숫자의 열세를 딛고 당당함으로 맞섰다. 이후 척후병을 보내 일본군이 진주성 10리 지점에 주둔한 것을 확인한다.
10월 6일
진주성으로 다가온 일본 조총병이 성을 향해 총을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시에 큰 소리를 치고 여러 깃발을 올리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주변의 집 문을 뜯어 성 100보 지점에 방패로 세우고 그 뒤에서 조총을 밤새도록 발사하였다. 이에 조선군도 밤새도록 대응하였고 성 바깥에 위치한 의병들은 뒷산으로 올라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며 언제든 진주성을 지원할 모습을 보이며 일본군을 지치도록 만든다.
10월 7일
진주성 주변 민가를 모두 소각한 일본군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활로 성을 공격하였다. 그리곤 잡아온 조선 아이들을 시켜 밤새도록 “한양이 이미 함락되었고 8도도 무너졌는데, 새장 같은 진주성에서 어찌 버티겠는가? 항복해라.”라 외치도록 했다.
그러자 김시민은 악공을 불러 거문고를 타고 퉁소를 불도록 하여 진주성이 여전히 여유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10월 8일
대나무 사다리를 성벽에 기대며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이외에도 바퀴를 단 높은 나무 구조물을 성 주변으로 옮겨 성을 아래로 보고 조총과 화살을 쏘았다. 이에 김시민은 소형 화포인 현자총통을 발사하여 구조물을 파괴하도록 하고 큰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 적들이 성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더 나아가 성 곳곳에는 적을 속이기 위해 활을 당겨 쏘는 모습을 지닌 허수아비를 배치하여 공격을 분산시켰다.
밤이 되어 진주성 외각에 위치한 조선 병사들이 남강 건너편에서 호각을 불고 횃불을 켜자 성내에서도 호응하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일본군 진영에 소동이 일어나며 강변으로 병력을 보내는 등 난리가 났다. 조선군이 호응하여 야습을 감행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
10월 9일
진주성 주변에서 호응하는 조선군을 공략하기 위해 2000명의 일본군이 본대에서 빠져 움직였으나 격퇴당한다. 오히려 조선 구원군이 일본군 측면을 공격하는 등 진주성뿐만 아니라 주변 전장에서도 일본군은 큰 압박을 받는다.
한편 흙으로 토성을 쌓아 성보다 위에서 조총과 화살로 공격하려던 일본군의 계획도 김시민이 현자총통으로 세 번이나 토성 위의 일본군 진지를 파괴하니 무산되었다. 이에 일본군은 후퇴하는 척 군사를 돌렸는데, 저녁에 진주에서 납치된 한 아이가 운 좋게 도망쳐 진주성으로 왔다. 이에 적의 상황을 물으니 “내일 새벽에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라 하는 것이 아닌가? 일본군은 거짓 퇴각으로 성을 안심시킨 뒤 조용한 새벽부터 다시 공격하고자 한 것이다.
10월 10일
막사에 불을 지르며 퇴각하는 척하던 일본군이 아이의 말대로 새벽부터 1만여 명이 동원되어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진주성의 약점인 동문을 향해 대군이 밀려들어 왔으니, 진짜 마지막 결전이었다.
일본군은 긴 사다리를 성에 기댔는데, 밤이라 잘 안 보이는 만큼 인형을 만들어 사다리에 두어 조선군을 속인 채 뒤에 있던 진짜 병력이 성 위로 올라왔다. 또한 조총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으며 군사들이 외치는 소리가 우뢰처럼 울렸다. 이에 동문에서 조선군들은 사력을 다해 막으며 결사 항전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북문을 향해 일본군 공격이 들어왔다. 동문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북문을 뚫으려는 계획이었던 것. 생각지 못한 공격에 조선군 수비가 잠시 무너졌지만 진주성의 장교들이 사력을 다해 지휘하며 겨우 수습하게 된다. 오죽하면 노약자들까지 동원되어 돌과 불을 던지는 바람에 성 안에 기와, 돌, 초가지붕이 거의 다 사라졌을 정도.
그렇게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날이 밝았는데, 일본군 총탄이 김시민의 이마를 맞췄다. 그렇게 쓰러진 김시민은 며칠 동안 치료를 받다 결국 3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러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 1557~1608)이 갑자기 쓰러진 진주목사 김시민을 대신하여 지휘를 맡았다. 당시 이광악은 활을 무척 잘 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때 병사들을 지휘하던 적장을 쏘아 죽이는 등 분투를 한다. 참고로 이광악은 김시민의 무과 시험 동기였으니, 1584년에 별시로 202명의 무관을 뽑을 때 김시민은 을과 3위, 이광악은 을과 16위였다는 사실. 진주성 전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그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전쟁 영웅이라 하겠다.
이광악 초상화. 독립기념관.
이렇게 새벽부터 8시간에 걸친 공격을 했음에도 진주성이 버티자 일본군은 지금 시간으로 오전 11시쯤 되어 결국 전투를 멈췄다. 진주성의 화포와 활, 돌, 뜨거운 물 공격으로 피해가 막심했던 모양. 다만 조선군이 정확한 사상자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시신을 불로 소각하였으며, 포로 및 소와 말은 버린 채 퇴각하였다. 당연히 조선군 역시 적은 군사로 대치하는 과정 중 김시민이 쓰러지는 등 큰 피해를 얻었기에 대규모 추격전은 꿈꾸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김시민은 전사하였지만 전쟁은 승리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진주대첩이다.
김중업과 김수근
서장대 구경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