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사부다
1판 1쇄 발행 | 2024년 06월 06일
지은이|김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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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주 2024
ISBN 978-89-5732-3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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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북은 한국을 만든 인물 5백 명에 관한 책들(5백 권)의 출간을 기획하여 차례대로 펴내고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삶을 들여다보고 반성하며, 지금 우리 시대와 각자의 삶을 더욱 바람직하게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아울러 한국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폭넓고 심도 있게 탐구하는, 출판 사상 최고 ‧최대의 한국 인물 총서가 될 것입니다.
시리즈의 제목은 「나는 누구다」로 통일했습니다. ‘누구’에는 한 인물의 이름이 들어갑니다. 한 인물의 삶과 시대의 정수를 독자 여러분께 인상적‧효율적으로 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왜 이 인물을 읽어야 하는가에 충분히 답해 나갈 것입니다.
이번 한국 인물 500인 선정을 위해 일송북에서는 역사,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국방, 언론, 출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선정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선정위원회에서는 단군시대 너머의 신화와 전설쯤으로 전해오는 아득한 상고대부터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20세기 최근세까지의 인물들과 그 시대들에 정통한 필자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최첨단 문명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글로벌시대를 살고 있으며 인공지능 AI의 급속한 발달로 인간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인간의, 한국인의 정체성이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 정체성은 개인이나 나라의 편협한 개인주의나 국수주의는 물론 아닐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성향을 아우르는 한국 인물 500은 해당 인물의 육성으로 인간 개인의 생생한 정체성은 물론 세계와 첨단 문명시대에서도 끈질기게 이끌어나갈 반만년 한국인의 정체성, 그 본질과 뚝심을 들려줄 것입니다.
위원장: 양성우(시인, 前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
위원: 권태현(소설가, 출판평론가), 김종근(미술평론가), 김준혁(역사, 한신대 교수), 김태성(前 11기계화사단장), 박상하(소설가), 박병규(前 중앙일보 경제부), 배재국(시인, 해양대 교수), 심상균(KB국민은행 노조위원장), 윤명철(역사, 前동국대 교수), 오세훈(언론인, 前 기아자동차 홍보실장), 이경식(작가, 번역가), 오영숙(前 세종대학교 총장), 이경철(문학평론가, 前 중앙일보 문화부장), 이덕수(시민운동가, 시인), 이동순(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이덕일(순천향대학교, 역사), 이순원(소설가), 이종걸(이회영기념사업회장), 이중기(농민시인), 장동훈(前 KTV 사장, SBS 북경 특파원), 하만택(성악가), 하응백(前 경희대 교수, 문학평론가)
우리 역사에 많은 명장이 있지만, 이사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신라의 장군이라 하면 삼국통일을 이끈 김유신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대중에게 이사부라는 이름은 독도를 노래한 가요에서 “신라 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가사로 익숙할지도 모른다. 우산국을 정벌하여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마련하였으니 그 공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우산국 정벌은 그 시작일 뿐이다. 이사부는 금관가야부터 대가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야국과 소국들, 그리고 고구려 땅을 정복하여 신라를 처음으로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부상시켰다. 신라는 진흥왕 대에 비로소 고구려와 백제에 맞설 수 있는 나라가 되어, 장차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사부는 왜 동해 가운데 있는 섬인 우산국을 정벌하려고 했을까?
사료를 찾아보니 신라는 거의 해마다 왜의 침입을 받았는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후 231년 동안 왜군의 침입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산국을 친 목적은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신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막기 위함이었다.
당시 신라는 제대로 된 수군도 전선도 없는 상황이었다. 신라의 전선이 어떤 모형이었으며 우산국을 치러 갈 때 전선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어디서 배를 만들고 어디서 출발했을까? 여러 자료를 찾아서 살펴본 결과 이사부가 전선을 만들어 해상에서 왜군을 물리쳤고, 이로써 우리 해전의 역사에 이순신 이전에 이사부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지증왕 시절인 505년에 실직군의 군주가 된 이사부가, 512년 나무로 사자로 만들어 우산국을 정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한동안 기록에서 보이지 않다가 가야국을 정복하는데 이사부가 등장한다.
고대사에서 한반도 남쪽은 백제와 가야국들, 그리고 신라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들은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서로 동맹을 맺기도 하고, 서로의 영토를 빼앗기 위해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신라보다 먼저 번성했던 가야국들이 이때부터 쇠퇴하였는데, 그 가야국을 모두 신라에 복속시킨 이가 바로 이사부다.
이사부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562년, 화랑을 이끌고 대가야를 복속시킨 것으로 나온다. 505년에 실직군주가 되어 562년까지 전장에 있었으니, 그는 58년 동안 신라의 정치가이자 장수로 살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장군으로 있을 수 있었던 그의 저력은 무엇일까? 왕족 출신이었던 그는 나중에 진흥왕의 의붓아버지가 되었다. 신라 역사 이래 가장 많은 영토를 차지하여 진흥왕을 정복왕으로 만들고도 그는 권력을 가지지 않고 왜 노년까지 전장의 장수로 살았을까?
우리나라 고대사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이사부의 일생에 대한 자료 역시 빈약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기본으로 하고 그 외의 이사부에 대한 모든 기록을 찾아보았다. 필사본 『화랑세기』와 『일본서기』 등은 신뢰할 수 없는 면이 있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없는 내용이 많으므로 참고하였다.
치열했던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의 역사와 함께 한 이사부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어떤 가치관으로 신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지혜와 불안한 시대를 타개하는 용기는 어느 시대에나 필요하다. 특히 서로 다른 가야를 통합하여 더욱 큰 신라로 나아가게 한 그의 지도력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 천오백 년 전의 그의 행적을 따라 신라 중흥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전쟁과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백성을 생각했던 신라 장군 이사부.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한국적인 지도자의 모습을 그가 보여줄 것이다.
이사부는 신라의 왕족인 아진종(阿珍宗, 451~511)과 백제의 보옥(宝玉, 452?~521)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혼인은 신라와 백제의 결혼동맹에 의한 것이었다.
아진종은 신라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인데, 갈문왕은 왕의 아버지나 형제에게 붙이는 칭호다. 습보의 아들 지증왕(智證王, 437~514)이 왕위에 오르면서 갈문왕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아진종과 지증왕은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나 어머니가 달랐다. 이찬 관직에 있던 아진종은 479년, 신라의 사신으로 백제를 방문하여 보옥공주를 만났다.
보옥공주는 백제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의 딸이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압력에 맞서기 위해 애를 썼으나, 말년에 고구려 첩자에게 속아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백성의 신망을 잃었다. 고구려의 장수왕은 이때를 노려 3만 군대를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다.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며 신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라 하였다.
개로왕은 결국 수도 한성을 잃고 고구려군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왕비와 왕자비는 장수왕이 취하고 후궁과 공주들은 고구려 장수에게 바쳐졌다. 그 전장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온 여인이 보옥공주였다.
“한성을 회복하기 어려우면 웅진으로 가 다시 백제를 일으키도록 해라.”
개로왕이 왕자 문주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었다. 문주가 신라의 지원군 1만 명을 얻어 한성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성이 불타고 백성 8천 명이 끌려간 후였다.
문주는 웅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문주왕(재위 475~477)은 마음이 여리고 성품이 온후하였으나 나라를 이끌어 갈 힘이 약했다. 웅진으로 터를 옮긴 뒤 왕권은 귀족들의 세력에 휘둘렸고, 결국 문주왕은 채 삼 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반역자의 칼에 죽고 말았다. 열세 살의 아들(삼근왕, 재위 477~479)이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한 어린 왕 역시 얼마 가지 못하였다.
보옥공주의 어머니는 백제의 무장 가문인 진씨 집안 출신이었다. 보옥 역시 외탁을 하여 키가 크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당시 백제의 강력한 세력이던 진씨 귀족들은 십 대의 동성왕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동성왕(재위 479~501)의 즉위식에 신라의 사신이 왔는데, 아진종이라는 왕족이었다. 아진종은 보옥을 그윽하게 보더니 말했다.
“아름다우나 엄하고, 정숙하며 도량이 크신 분이라 들었는데, 과연 그러하십니다.”
아진종은 이미 보옥에 대해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장수의 풍채에 유연한 선비의 얼굴을 한 아진종이 보옥의 첫눈에 들었다. 왕이 아진종을 독대한 뒤에 보옥을 따로 불렀다. 동성왕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의 아들이니, 보옥에게는 조카였다.
“일찍이 우리 백제는 신라와 동맹을 맺었고 이번 웅진 천도에도 신라가 힘이 되어 준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눈을 내리깔고 왕의 말을 듣던 보옥이 왕을 바로 보았다.
“신라가 우릴 도운 것은 고구려가 남하하여 신라까지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겠지요. 신라가 이미 동맹을 깨고 고구려의 보호 아래 있고자 했음을 어라하께서는 잊지 마십시오. 신라는 믿을 나라가 못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왕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렇지요. 그러나 지금 우리로선 신라와 동맹을 견고히 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내야 합니다. 예전에도 백제와 신라는 결혼동맹을 맺은 바 있고, 앞으로도 신라 왕족과의 결혼을 지속하여 그 동맹을 굳힐 것입니다.”
보옥은 결혼동맹이란 말이 자신을 옥죄어 옴을 느꼈다.
“하여, 고모님께 여쭙습니다.”
보옥은 결혼동맹과 자신과의 연관성을 알아채고 있었다. 보옥을 바라보는 왕의 눈빛이 간곡하였다.
“신라의 이찬 아진종이 어떠합니까?”
아진종이 자신에게 보인 호감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쩐지 보옥은 씁쓸하였다.
“신라는 신뢰할 만한 나라가 못 되는데 신라의 왕족에게 신의가 있겠습니까?”
거절의 의미로 대답하였지만, 보옥은 이미 자신이 거역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알아차렸다. 문득, 한성이 함락된 후 개로왕의 후비였던 어머니와 다른 공주들이 고구려 장수들에게 하사된 일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 능욕을 겪고 어찌 사실까? 공주들은 늙은 장수의 노리갯감이 되진 않았을까? 차라리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명예롭거늘, 여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나라 사내에게 바쳐진단 말인가?’
보옥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제 운명이 고구려로 끌려간 제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왕이 당황하여 다가와 보옥을 위로했다.
“그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은 나라와 나라 간의 외교요, 경사입니다.”
달이 보름을 지나고 있었다. 연못가에 나서자 가벼운 바람에 보옥은 다시 눈물이 났다. 바람 소리가 낯선 향기를 불러왔다. 어느새 아진종이 곁에 와 있었다.
“웅진의 달이 서라벌보다 밝은 듯합니다.”
보옥은 눈물을 닦고 목소리를 진중히 했다.
“땅이 기름지고 하늘이 맑은 곳이지요. 비록 고구려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백제는 풍요롭고 순박한 나라입니다. 저 달과 같이 밝은 땅입니다.”
아진종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보옥을 바라보았다.
“달은 점점 자라 만월이 되고, 만월은 기울기 마련입니다.”
아진종의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그에 비해 신라는 아직 가득 차지 않았으니, 곧 만월이 될 날이 오겠지요.”
아진종의 목소리는 공손하였으나 보옥에게는 그 말이 백제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들렸다.
“신라의 왕족은 오직 흥망 앞에만 고개를 숙이나 봅니다. 달은 차올랐다가 기울고, 기울었다가 다시 차오르는 것이 순리지요.”
보옥의 말에 아진종이 살포시 웃음을 지었다.
“그렇지요. 사실 나는 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일에 별 관심이 없소. 지금 내 마음엔 백제와 신라도 없소. 나는 그저 아리따운 여인의 마음을 얻고 싶을 뿐이오.”
“우리 사이에 백제와 신라가 없다면 지금 이렇게 마주하지도 않겠지요.”
신라의 사내는 가볍게 말을 잘 돌리는구나 싶어 보옥은 그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다음 날, 왕은 대신들 앞에서 아진종과 보옥의 혼인을 알렸다. 대신들은 혼인을 축하하며 기대와 안도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아진종은 축하의 말에 일일이 화답하며 기뻐하였다.
신라로 떠나기 전날, 보옥은 사당에 들어가 부모님의 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고구려군의 침략으로 부모님을 잃어 사고무친인 제가, 이제 신라로 가니 다시 백제 땅을 밟기 어려울 것입니다.”
부모님의 축복을 받으며 혼인하지 못하고 외로이 신라로 가야 하는 운명이 야속하기만 하였다. 흐느껴 울다가 돌아보니 아진종이 서 있었다. 아진종도 사당에 들어가 보옥 부모의 위패를 향해 절을 올렸다. 아진종은 눈물을 흘리는 보옥 곁을 말없이 지켜주었다.
서라벌의 왕족들이 사는 동네엔 높은 기와지붕들이 줄을 서 있었다. 신라의 귀족들은 화려한 문양을 좋아한다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일가는 보옥에게 친절하였고, 하인들은 그녀를 잘 따랐다. 보옥은 아침저녁으로 서쪽의 백제 땅을 향해 절을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계절이 덧없이 흘러갔다. 꽃이 피는 봄에도 잎이 지는 가을에도 보옥의 가슴속엔 떨어져 흩날리는 꽃잎만 무성했다. 차갑고 시리던 보옥의 가슴에 피가 돌기 시작한 것은 아이를 잉태한 후였다.
‘네가 나를 살게 하는구나, 아가야. 백제인의 피와 살을 받은 내 아가야.’
배가 불러오면서 보옥의 낯빛이 밝아졌는데 아진종은 그런 보옥을 더 귀하게 여겼다.
산달이 다 되었을 무렵, 고구려가 신라의 국경을 침범해 와 신라는 백제에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와 백제의 군사가 모산성에서 고구려군과 맞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아진종이 전투의 상황을 보러 모산성에 갔을 때 보옥에게는 산기가 있었다.
“아가야, 아버지가 곧 오신단다. 조금만 기다리렴.”
보옥은 진통이 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지아비인 아진종이 그리웠다. 그의 그윽한 말소리를 떠올리며 보옥은 잠시 풋잠이 들었다.
꿈속에 들판을 달리는 말을 보았다. 그 말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 사내가 아진종인가 싶어 보옥은 반갑게 그를 맞으려 했다. 말은 거침없이 달려 바다에 다다랐다. 말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사내는 아진종이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말간 얼굴로 바다 위를 달리며 웃고 있었다.
“앗!”
갑작스러운 진통에 소스라치며 보옥은 잠에서 깼다. 입 밖으로 비명이 새어 나올 만큼의 고통이 이어졌다. 뱃속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에 기진할 즈음에, 마당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산성에서 승전보가 왔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격퇴하였답니다. 이찬 어르신이 오고 계십니다!”
보옥은 기쁜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땅을 딛고 바다 위로 말을 달리던 사내아이가 보옥의 품속에 와 안겼다.
484년, 신라 습보갈문왕의 아들인 아진종과 백제 개로왕의 딸인 보옥 사이에서 이사부가 태어났다.
이사부!
우리는 그의 행적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우선, 그의 이름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사부의 이름이 ‘이’ 자로 시작되기에 그의 성을 이씨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이사부(異斯夫)는 이(李)씨가 아니다.
이사부는 『삼국사기』에는 김(金)씨, 『삼국유사』에는 박(朴)씨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사부’란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사부(異斯夫) 혹은 태종(苔宗)이라 부른다.
성은 김(金)씨요, 내물왕의 4세손이다.
『삼국사기』 열전 이사부 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異斯夫)는 성은 김씨요, 이름은 태종(苔宗)이다. 당시에는 한자를 이두식으로 표기하여 읽고 쓰는 방식이 지금의 한자 표현법과 달랐다.
태(苔)는 이끼를 뜻하는 말인데, 그 음을 따서 ‘잇’ 으로 읽고 이것이 ‘잇’ 혹은 ‘이사’라는 발음으로 표현되었다. 당시에 사이시옷은 주로 ‘사’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사’는 태(苔)의 뜻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다.
종(宗)은 당시의 왕족 남자의 이름에 자주 나온다. 법흥왕의 이름은 원종이었고, 거칠부는 황종, 이사부의 아들은 세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종(宗)은 그 의미상 부(夫)에 대응하는 말인데, 당시부터 사람을 나타내는 말에 부(보)를 많이 쓴 것으로 보인다. 울보, 먹보, 흥부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하는데 이 역시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부’는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뜻을 따서 쓴 이름이다. 당시에는 ‘잇부’와 유사한 발음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 식으로 성과 함께 이름을 말한다면, ‘김이사부’가 그의 이름이다. 그런데 당시의 기록을 보면 이름을 쓸 때 성은 쓰지 않고 대부분 이름만 적고 있다.
이사부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거칠부를 예로 든다면 그는 황종(荒宗)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칠 황(荒)의 ‘거칠’ 음을 이름에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