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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는 사제가 쌀알 한 움큼을 흩뿌리고 있기라도 하듯, 차디찬 빗방울이 체에 거른 가루처럼 후드득 떨어진다. 빗방울이 닿은 곳마다 표면이 오돌토돌한 얼음 알갱이가 맺힌다. 가로등 아래서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은빛 요정 같네. 콘스턴스는 생각한다. 그러고 나면 이런 생각이 뒤따른다. 자신은 너무 쉽게 매혹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아름다움은 일종의 환상이다. 또한 일종의 경고다. 아름다움도 독나비처럼 어두운 이면을 간직하고 있는 터다. 그러니 텔레비전 뉴스에서 이번 얼음 폭풍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겪게 될 것이고 또 이미 겪고 있다고 하는 위협과 위험과 비탄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이완이 하키와 축구 경기를 보겠다고 산 텔레비전은 평면 고해상도 화면을 탑재하고 있다. 콘스턴스는 수상한 오렌지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가 어슴푸레 옅어지기 일쑤였던 옛날의 흐리흐리한 화면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고해상도 화면으로 보면 더 별로인 것들도 있지 않은가. 모공, 주름, 코털, 그리고 바로 두 눈 앞으로 덮쳐드는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치아. 현실 속 자기 모습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게 하는 그런 것들을 보면 콘스턴스의 마음에는 불쾌감이 인다. 마치 본의 아니게 타인의 욕실에서 오목한 확대 거울 역할을, 좀처럼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 그런 거울 역할을 수행하는 느낌이다.
다행히 일기 예보를 전하는 기상 캐스터들은 화면에서 멀찌가니 물러서 있다. 그들은 1930년대 휘황찬란한 영화에 등장하는 종업원 혹은 여성 도우미를 공중 부양시키기 직전의 마술사처럼 지도를 꼼꼼히 살피면서 커다란 손동작을 해 보인다. 보십시오! 엄청난 흰 구름 기둥이 대륙을 휘감고 있습니다! 얼마나 거대한지 한번 보십시오!
기상 캐스터는 이제 스튜디오 바깥 상황을 알린다. 차들이 앞 유리 와이퍼를 좌우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힘겹게 천천히 전진하는 동안 현장에 나가 있는 젊은 두 리포터는 투두둑투두둑 빗방울을 받아 내는 우산 아래에서 몸을 움츠린다. 한 명은 여자이고 한 명은 남자인데 둘 다 검은 파카를 입고 회백색의 모피가 얼굴을 후광처럼 동그랗게 감싸는 모자를 쓰고 있다. 두 사람은 들떠 있다. 이런 광경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아직 너무 어리니까. 곧이어 자동차 다중 충돌 사고, 어느 주택의 일부를 완전히 깔아뭉개며 쓰러진 나무, 얼음 무게를 못 이기고 축 늘어진 상태로 타다닥 소리를 내며 매섭게 명멸하는 전깃줄, 진눈깨비로 뒤덮인 채 줄줄이 공항에 발이 묶인 비행기들, 트레일러 부분이 전복된 채 도로에 엎어져 연기를 내뿜고 있는 대형 트럭 등을 담은 온갖 재난 현장이 송출된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와 소방차, 방화복 차림으로 어수선하게 떼 지어 모인 대원들이 보인다. 누군가가 다쳤다. 언제 봐도 심장 박동을 가속하는 광경이다. 얼음 결정으로 수염이 새하얘진 경찰이 화면에 등장하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모두 실내에 머물러 달라고 청한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경찰이 시청자들에게 말한다. 이 태풍에 맞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찌푸린 눈살과 서리로 뒤덮인 눈썹이 마치 1940년대 전시(戰時)에 전쟁 채권을 홍보하는 포스터 속 인물의 얼굴처럼 장엄하다. 콘스턴스는 그때가 기억난다고, 기억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역사책이나 박물관 전시품이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본 광경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기억 하나하나에 정확한 표식을 달기가 적잖이 어려울 때가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약간의 파토스를 자아내는 광경이 펼쳐진다. 반쯤 얼어붙은 몸에 어린아이의 분홍색 낮잠용 담요를 두른 동네 강아지가 화면에 잡힌다. 온몸이 얼음장이 된 아기가 있었다면 그보다 더한 파토스를 자아냈겠지만 아기가 없으면 강아지로 대신하면 된다. 젊은 두 리포터는 아이 귀여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는 비에 흠뻑 젖은 꼬리를 맥없이 흔드는 강아지를 쓰다듬는다. 남자가 말한다. “운이 좋은 녀석이구나.” ‘너였을 수도 있었어, 착하게 살지 않았으면 너만 구조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라는 속마음이 내포된 말이다.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내는 자의 들뜸이 역력하다. 이제 더 많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가 말한다. 이번 폭풍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도 않았으니까요! 대체로 그렇듯 시카고에서는 상황이 더 심각합니다. 계속 상황을 주시해 주십시오!
콘스턴스는 텔레비전을 끈다. 방을 가로질러 램프 조도를 낮춘 다음 현관 전면으로 난 유리창 옆에 앉아 가로등이 불을 밝힌 어둠을 내다보면서 나뭇가지와 지붕과 전봇대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광경을, 바깥세상이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변하는 광경을 지켜본다.
“알핀랜드.” 콘스턴스가 소리 내어 말한다.
“소금이 필요할 거야.” 이완이 콘스턴스의 귀에 대고 말한다. 처음 이완이 그런 식으로 말을 걸었을 때 콘스턴스는 화들짝 놀란 것은 물론이고 공포심마저 느꼈다. 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그의 존재에 한결 편안해진 상태이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은 여전하다.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이완의 참견은 보통 일방적이다. 콘스턴스가 대답을 해도 이완은 보통 대꾸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는 거의 늘 그런 식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콘스턴스는 이완의 옷을 어떻게 처리할지 답을 내리지 못했었다. 처음에는 옷들을 옷장에 걸어 두었지만 옷장 문을 열 때마다 옷걸이에 걸린 재킷과 정장을 보면서 이완의 몸이 스르르 그 속으로 들어가 산책을 나설 수 있기를 말없이 기다리는 일이 너무 속상했다. 트위드 재킷, 울 스웨터, 작업용 격자무늬 셔츠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릴 수도 없었다. 그건 낭비일 뿐만 아니라 반창고를 홱 떼어 내듯 너무 느닷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옷을 하나하나 개어 좀약과 함께 여행 가방에 담아 3층에 두었다.
낮에는 괜찮다. 이완은 자기 옷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하고, 불쑥 들려오는 이완의 목소리는 안정적이고 유쾌하다.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길을 안내하는 목소리. 유난히 긴 집게손가락으로 지적질하는 목소리. 여기로 가, 이거 사, 저거 해! 약간 깔보는 듯한, 얕잡아 보면서 놀리는 듯한 목소리. 병에 걸리기 전에도 이완은 대체로 그런 태도로 콘스턴스를 대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황은 한층 복잡해진다. 이완이 여행 가방 안에서 흐느껴 울고 구슬픈 목소리로 불만을 표출하면서 자기를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악몽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완으로 변신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면서 실제로 변하지는 않는 낯선 남자들이 현관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들은 이완으로 변신하는 대신 검은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위협만 한다. 콘스턴스가 이해할 수 없는 혼란한 요구를 하거나, 심할 때는 살해 의지가 명백히 드러나는 태도로 이완을 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어깨로 콘스턴스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3층에 둔 여행 가방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조용한 외침이 들려옴에도 콘스턴스는 “이완은 집에 없어요.”라고 호소한다. 남자들이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콘스턴스는 그때 잠에서 깨어난다.
수면제를 복용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콘스턴스는 수면제가 중독성이 있고 불면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안다. 어쩌면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아들 녀석들이, 녀석들이라 부르기에는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들들이 이완의 장례식에서 강력히 주장한 대안이었다. 두 아들은 각각 뉴질랜드와 프랑스의 도시에, 콘스턴스를 자주 찾아오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기 쉬운 먼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둘 다 쌀쌀맞지만 약삭빠르고 각각 성형외과의와 칙허회계사로서 직업적 성공을 거둔 아내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고 있었고, 그 탓에 콘스턴스 혼자 네 명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콘스턴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완이 여전히 머무는 집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아들네 부부는 늘 콘스턴스에게 약간의 경계선 성격장애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업으로든 거금을 쓸어 담기 시작하면 정신 나간 짓 아니냐는 꺼림칙한 기미마저 희미해지곤 하는 법임에도 그들은 알핀랜드를 이유로 콘스턴스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았다.
아파트는 양로원을 돌려 말한 것이지만 콘스턴스는 그 대안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아들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간편할뿐더러 콘스턴스에게도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을 원한다. 더욱이 콘스턴스가 고통스러운 애도의 시간을 겪고 있음을 참작하기는 했지만 콘스턴스에게서, 그리고 콘스턴스의 집에 있는 냉장고 따위에서 무질서한 혼란을 감지하기도 한 터라 마음이 편치 않을 만도 했다. 가령 냉장고에는 상식적으로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물건들이 있었다. 완전 늪지대잖아라는 아들들의 속생각을 콘스턴스는 간파할 수 있었다. 보툴리누스균이 넘쳐나는데 중병에 걸리지 않으셨다니 놀랍네. 하지만 이완의 숨이 멎어 가는 마지막 나날 동안 콘스턴스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므로 식중독에 걸리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소다크래커와 치즈 조각, 그리고 병째 숟가락으로 퍼먹은 땅콩버터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며느리들은 지극히 다정한 태도로 대처했다. “이거 좋으세요? 이건 어떠세요?” “아니, 아니야.” 콘스턴스는 통곡했다. “다 싫어! 전부 다 내다 버려!” 세 어린 손주,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하나는 콘스턴스가 마시다가 집 안 곳곳에 둔 찻잔과 코코아잔을 찾는 유사 부활절 달걀 찾기에 동원되었다. 잔에 담긴 액체의 표면은 어느새 제각기 다른 성장 단계를 밟고 있는 회색이나 옅은 녹색의 세균막으로 덮여 있었다. “이거 봐, 엄마! 또 찾았어!” “우웩, 토 나올 것 같아!” “할아버지는 어딨어?”
적어도 양로원은 콘스턴스에게 벗이라도 제공해 줄 것이었다. 그리고 콘스턴스가 살고 있는 종류의 집은 유지 관리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만큼 그에 뒤따르는 부담과 책임도 덜어 줄 터였다. 게다가 이제는 온갖 귀찮은 가사 노동에 시달릴 이유도 없지 않은가? 며느리들은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 가며 그런 생각을 전했다. 브리지 플레잉이나 스크래블 같은 보드게임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했다. 아니면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백개먼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과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거나 뇌에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은 게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무난한 게임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직은 아니야.”라고 말하는 이완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직은 그런 거 안 해도 돼.”
콘스턴스는 이완의 목소리가 실제가 아님을 안다. 이완이 죽었음을 안다. 당연히 알고 있지 않겠나! 하지만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최근에 유가족이 된 사람들도 콘스턴스와 똑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했다. 환청. 환청이라고들 했다. 콘스턴스는 환청에 관한 글도 읽어 보았다. 정상적인 증상이다. 콘스턴스는 미치지 않았다.
“당신은 미치지 않았어.” 이완이 위로하듯 말한다. 콘스턴스가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것 같을 때마다 이완은 이렇게나 다정해질 수 있는 사람이다.
소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이완의 말이 옳았다. 주초에 비축해 두어야 했던 제설제를 깜빡한 바람에 당장 내일이라도 보행로가 아이스링크장이 될 운명에 처했으니, 지금이라도 소금을 챙겨 두지 않으면 콘스턴스는 자기 집에 갇힌 죄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얼음층이 녹지 않으면 어쩐담? 일단 식량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완이 주야장천 지적했듯 공기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콘스턴스가 각종 통계 수치 — 독거노인, 저체온증 환자, 아사 — 에 숫자 하나를 더하게 될지도 모른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소금 한 자루만 있어도 계단과 산책로를 정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콘스턴스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등지는 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가 최선의 선택지다. 두 블록만 가면 된다. 소금은 무거우니 바퀴가 두 개 달린 빨간색 방수 장바구니도 챙겨야 한다. 자동차가 있기는 하지만 그걸 운전한 사람은 이완뿐이었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에 깊이 빠져들고부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의가 산만해진 탓에 수십 년 전에 만료된 면허를 갖고만 있었다. 알핀랜드는 무수한 생각을 요한다. 정지 신호 같은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내 버린다.
밖은 이미 꽤 미끄러울 것이다. 이 무모한 모험을 감행했다가 목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콘스턴스는 부엌에 서서 안절부절못한다. “이완, 나 어떡하지?”
“진정하고 정신 차려.” 이완이 단호하게 말한다. 그다지 유익한 조언은 아니지만 이완은 확답을 피하고 싶은 질문을 받으면 습관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어디 있었어? 엄청 걱정했어, 사고 났었던 거야? 진정하고 정신 차려. 나 사랑해? 진정하고 정신 차려. 바람피우고 있는 거야?
부엌 곳곳을 무턱대고 뒤지다가 커다란 지퍼형 비닐봉지를 발견한 콘스턴스는 뿌리가 시들시들해진 당근 세 개를 봉투 안에 던져 넣고 작은 벽난로용 황동 삽으로 재를 퍼서 봉지를 채운다. 이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시작한 시점부터 콘스턴스는 불을 피우지 않았다. 옳지 않은 일처럼 느껴져서였다. 불을 붙이는 행위는 무언가를 재개하는 행위, 시작하는 행위인데 콘스턴스는 시작하고 싶지 않다. 현재를 지속하고 싶다. 아니, 콘스턴스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장작더미와 불쏘시개 몇 개가 아직도 남아 있다. 쇠 받침대에는 이완과 마지막으로 불을 피웠을 때 쓴 통나무 두 개가 일부 그을린 채로 남아 있다. 이완은 역겨운 초콜릿맛 고영양 음료가 든 잔을 자기 옆에 두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로 민머리 상태였다. 콘스턴스는 격자무늬의 차량용 담요를 이완의 몸에 둘러 준 다음 그 옆에 이완의 손을 잡고 앉아서 이완이 보지 못하게 고개를 돌린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콘스턴스의 고통에 이완까지 고통스러울 필요는 없었다.
“좋네.” 이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목소리가 몹시도 가늘었고 다른 신체 부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완의 목소리는 그렇지 않다. 지금 이완의 목소리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20년 전의 목소리, 특히 웃을 때 두드러지는 깊고도 울림 있는 목소리다.
콘스턴스는 코트를 걸치고 부츠를 신은 다음 손모아장갑과 울 모자를 찾는다. 돈, 돈도 조금 필요할 것이다. 열쇠, 열쇠가 없어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현관 앞에서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콘스턴스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현관으로 향하자 이완이 말한다. “손전등도 챙겨.” 콘스턴스는 부츠를 신은 채로 터벅터벅 위층으로 힘겹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다음 이완의 침대 자리 옆 탁자에 놓인 손전등을 가방에 챙겨 넣는다. 이완은 계획을 세우는 데 능한 사람이다. 콘스턴스 혼자서는 손전등을 챙길 생각을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관 계단은 이미 완전히 빙판이다. 비닐봉지 지퍼를 열어 재를 바닥에 흩뿌린 다음 봉지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은 콘스턴스는 한쪽 손으로는 난간을 붙잡고 다른 쪽 손으로는 쿵 쿵 쿵 발맞춰 내려오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잡아끌면서 게처럼 옆걸음으로 계단을 한 번에 한 칸씩 내려간다. 보행로에 다다르자마자 우산을 펼쳐 보지만 이 상태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장바구니와 우산을 동시에 들고 가는 것이 무리인지라 콘스턴스는 우산을 도로 접는다. 우산은 지팡이로 쓰면 된다. 잘금잘금 움직여 보행로만큼 빙판은 아닌 도로변으로 걷다가 중간에 휘청 중심을 잃은 콘스턴스는 우산을 이용해 중심을 되찾는다. 차가 한 대도 없으니 적어도 차에 치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콘스턴스는 유독 반질반질한 도로변에 재를 흩뿌려 희미한 검은 발자국을 남기면서 걸음을 옮긴다. 상황이 여의찮으면 그 발자국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숲에서 은은히 빛나는 하얀 바위나 빵 부스러기처럼 신비롭고 매혹적인 검은 재의 흔적을 따라가는 것은 알핀랜드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재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 이 재와 관련된 뭔가를, 의심할 여지 없이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힘을 억누르기 위해 발화해야 할 구절이나 문구 같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먼지는 먼지로 돌아갈 것이니라, 따위의 주문은 안 된다. 마지막 의식에 관한 내용도 안 된다. 그보다는 룬 문자 같은 매혹적인 주문에 가까워야 한다.
“애시, 배시, 크래시, 대시, 내시, 매시, 스플래시.” 콘스턴스는 조심조심 빙판에 발을 내디디며 큰 소리로 말한다. 재(ash)와 압운을 이루는 단어가 꽤 여럿이다. 이 재를 어떤 이야기로, 아니, 알핀랜드에는 다양한 줄거리가 존재할 수 있으니 여러 이야기로 녹여 내야 한다. 마법을 부리는 재의 창조자로는 교활하고 비뚤어진 악당인 붉은 손의 밀즈레스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정신을 뒤흔드는 환영으로 여행자들을 현혹하고, 그들이 올바른 경로에서 벗어나도록 유인한 다음 철창에 가두거나 금 사슬이 설치된 벽에 결박하고, 그 상태로 털복숭이 꼬마 악마들이나 시아노린, 파이어피글 같은 정령들을 데려다가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붉은 손의 밀즈레스. 비단 소재의 가운, 자수가 수놓인 예복, 털로 장식된 망토, 반짝반짝 화려한 면사포 등 옷이 갈기갈기 찢긴 여행자들이 자기에게 애원하고 매혹적인 자태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광경을 즐거이 지켜보는 붉은 손의 밀즈레스.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이 줄거리의 복잡한 내막을 세세히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밀즈레스는 콘스턴스가 종업원으로 일했던 시절의 상사 얼굴을 하고 있다. 툭하면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사람이었다. 그 상사는 알핀랜드 시리즈를 한 번이라도 읽어 보았을까, 콘스턴스는 궁금하다.
이제 첫 번째 블록 끝에 다다랐다. 이번 외출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두 손은 얼음장이고 어딘가에서 눈 녹은 물이 떨어져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니 끝을 봐야 한다. 콘스턴스가 한기 서린 공기를 들이마신다. 어디선가 불어온 얼음 알갱이들이 채찍처럼 얼굴을 휘갈긴다. 텔레비전 뉴스 보도대로 바람이 거세지고 있다. 그래도 폭풍의 복판에 있으면 어쩐지 활기가 돋고 기운이 솟는다. 폭풍이 거미줄을 휩쓸어 간 덕분에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동네 구멍가게는 연중무휴다. 콘스턴스와 이완이 20년 전 이 지역에 이사를 온 후로 줄곧 감사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보통 가게 밖에 쌓여 있는 제설제 자루가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다. 콘스턴스는 바퀴 두 개 달린 장바구니를 덜컹덜컹 끌며 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소금 남은 거 있나요?” 콘스턴스가 계산대에 있는 여자에게 묻는다. 새로운 얼굴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원래 직원이 자주 바뀌는 곳이기는 하다. 이완은 가게 손님 수가 적고 상추 상태가 시들시들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익이 나는 곳일 리가 없고 그렇기에 돈세탁 용도로 운영되는 곳이리라고 말하곤 했다.
“아, 어쩌죠. 갑자기 다 나가 버렸어요. 다들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그 말은 콘스턴스 당신은 대비하지 못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사실이 그렇기는 했다. 평생에 걸쳐 반복된 실패. 콘스턴스는 결코 대비라는 걸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매사에 대비하며 산다고 치면 대체 어떻게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지? 일몰에 대비하다니. 월출에 대비하다니. 얼음 폭풍에 대비하다니. 그래 버리면 너무 밋밋한 삶이 되지 않겠나.
“아.” 콘스턴스가 말한다. “없군요, 전 운이 없었네요.”
“이런 날씨엔 밖에 나오면 안 돼요, 선생님. 너무 위험해요!” 여자는 머리를 붉게 염색하고 목 부근의 뒷머리를 밀어서 요새 유행하는 스타일을 연출하고는 있었지만 겉모습으로 보건대 콘스턴스보다 기껏해야 열 살 어린 정도였고 살집도 적잖이 더 많았다. 적어도 난 쌕쌕거리면서 말하지는 않지. 콘스턴스는 생각한다. 그래도 콘스턴스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건 좋다.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때나 들었지 한참을 못 듣고 살았는데. 이제는 심심찮게 듣는 말이 됐다.
“괜찮아요. 집에서 고작 두 블록 거리예요.”
“이런 날씨에는 두 블록 가는 데만도 한참 걸리잖아요.” 여자가 말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옷깃 위로 설핏 문신이 드러난다. 용이나 그 부류의 동물 같다. 스파이크, 뿔, 불룩 튀어나온 눈. “얼어 죽을 수도 있다고요.”
콘스턴스는 여자의 말에 동감하며 장바구니와 우산을 계산대 옆에 좀 놔둬도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그런 다음 철제 쇼핑 카트를 밀면서 매대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둘러본다. 캔에 든 토마토즙을 선반에 옮겨 나르고 있는 호리호리한 남자 한 명을 마주쳤을 뿐 손님은 콘스턴스뿐이다. 콘스턴스는 매일매일 지옥의 환상도를 연출하듯 유리 진열대 안에서 꼬치에 꽂힌 채 뱅글뱅글 돌고 있는 바비큐 치킨 한 마리와 냉동 완두콩 한 팩을 고른다.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이완의 목소리가 말한다. 그것도 사라는 말인가? 이완은 화학 물질 범벅일 거라며 바비큐 치킨을 못마땅해했지만 콘스턴스가 사 오면 꽤 선뜻 먹어 치웠다. 음식을 먹던 시절에 말이다.
“무슨 말이야? 이제 우리 집엔 고양이 없잖아.” 콘스턴스는 대부분의 경우 이완이 자기 마음을 읽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래도 읽어 낼 때가 가끔 있기는 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간간이 발휘될 뿐이다.
이완은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상대의 마음을 애태우는 습성이 있는 그는 대체로 콘스턴스가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콘스턴스는 그의 의도를 알아서 깨우친다. 현관에 소금 대신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를 뿌리라는 말이다. 소금만 하지는 못할 테고 뭔가를 녹이지도 못할 테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미끄럼을 방지해 줄 것이다. 콘스턴스는 끙끙대며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자루를 카트에 싣고 양초 두 개와 나무 성냥도 한 갑 챙긴다. 됐다. 이제 준비됐다.
콘스턴스는 계산대로 가서 닭고기의 미덕에 대해 여자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여자도 닭고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하기야, 닭 한 마리만, 아니 두 마리만 있으면 요리가 쉬워지는데 누가 마다할까? 콘스턴스는 용 문신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유혹을 억누른 채 구입한 물건들을 바퀴 달린 장바구니에 채워 넣는다. 이런 주제로 말문을 트면 순식간에 복잡다단한 주제에 관한 대화로 방향이 틀어지곤 한다는 사실을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을 통해 배웠다. 알핀랜드에도 용이 있는데, 용에 열광하는 팬들은 자기들이 떠올린 번뜩이는 생각을 콘스턴스와 나누고 싶어 안달이었다. 용을 이렇게 말고 저렇게 그렸어야 했다거나, 자기들이라면 용을 이렇게 그렸을 거라거나, 용의 아종(亞種)은 이래야 한다거나 하면서 용을 돌보는 방식이나 용에게 먹이 주는 방식과 관련해 콘스턴스가 범한 실수 등등을 지적했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때문에 어떻게 그렇게나 흥분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콘스턴스가 이완과 한 대화를 그 여자가 엿들었을까?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랬더라도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중무휴로 운영하는 가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행인과 대화하는 사람들이 늘 얼마간 존재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알핀랜드에서 누군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해석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알핀랜드 주민 중 일부는 정령과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디 사세요?” 콘스턴스가 가게 문을 반쯤 나섰을 때 여자가 묻는다.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서 댁까지 동행 좀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거든요.” 친구라니, 어떤 친구지? 저 여자가 폭주족의 애인일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콘스턴스가 생각한다. 어쩌면 여자는 콘스턴스가 생각한 것보다 젊을지도 모른다. 그저 풍파를 맞아 늙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콘스턴스는 못 들은 체한다. 음모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동행을 허락했다가는 주머니에 강력 접착테이프를 챙긴 폭력배가 집을 급습할 때를 노리며 현관문 밖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배가 차가 고장 났다면서 핸드폰 좀 쓸 수 있겠냐고 물으면 콘스턴스는 선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오시라 했다가 눈 깜짝할 새에 강력테이프로 난간에 결박되고, 그러면 폭력배는 콘스턴스의 손톱 아래를 압정으로 쑤시면서 마지못해 비밀번호를 불게 할지도 모른다. 콘스턴스는 이런 상황에 빠삭하다. 괜히 텔레비전 뉴스를 보는 게 아니다.
재를 뿌려 남긴 흔적은 어느새 쓸모를 잃었다. 그 위로 눈이 덮여서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바람은 더 강력해졌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여기서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를 뜯어야 하는 걸까? 아니다, 모래 자루를 뜯으려면 칼이나 가위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입구가 끈으로 봉해져 있기는 하다. 콘스턴스는 손전등으로 장바구니 안을 슬쩍 비추어 보지만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았는지 조도가 너무 약해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가 없다. 모래 자루를 뜯겠다고 씨름하다가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 수 있으니 서둘러 앞만 보고 돌진하는 편이 낫다. 정말로 돌진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콘스턴스가 집을 나섰을 때보다 빙판이 두 배는 두꺼워진 듯하다. 앞마당에 심긴 관목을 보니 어둠 속에서 빛나는 관엽들이 우아하게 땅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어 얼핏 분수 같기도 하다. 곳곳에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길을 부분 부분 막고 있다. 콘스턴스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바구니를 보행로에 그대로 둔 채 난관을 꽉 붙잡고 미끄러운 계단을 힘겹게 오른다. 다행히 현관등이 환한 빛을 비춰 준다. 하지만 콘스턴스는 자신이 그걸 직접 킨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열쇠를 가지고 문간에서 허둥댄 후에야 문을 연 콘스턴스는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눈을 뚝뚝 떨어뜨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한다. 거기서 부엌 가위를 한 손에 챙겨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 계단을 내려간 다음 빨간 장바구니를 세워 둔 곳으로 가서 고양이 화장실용 모래 자루를 뜯고 모래를 마구 흩뿌린다.
됐다. 콘스턴스는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쿵 쿵 쿵 끌며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간다. 콘스턴스 등 뒤로 문이 닫힌다. 쫄딱 젖은 코트를 벗고, 물 먹은 모자와 장갑이 마르도록 라디에이터에 올려 두고, 부츠는 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