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1 이 책은 Hermann Hesse, Unterm Rad(Gesammelte Schriften in 7 Bänden, Frankfurt a. M. 1978. S. 373-546)를 옮긴 것이다.
2 인명, 지명 등 고유명사의 우리말 표기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되, 일부 예외를 두었다.
3 주석은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중개업과 대리업을 하는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다른 주민들에 비해 뛰어난 점도, 특이한 점도 없었다. 그는 떡 벌어진 건강한 체격, 돈에 대해 솔직하고 진정 어린 존경심에서 나온 엄청난 장사 수완, 마당 딸린 작은 집과 묘지에 있는 가족묘, 꽤 개화했지만 낡아 빠진 신앙심, 하나님과 공권력에 대한 적당한 존경심, 시민이 지켜야 하는 예절의 훌륭한 법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심의 소유자였다. 술은 상당히 마시지만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의심스런 거래도 하지만 결코 법적 허용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뱅이, 더 부유한 사람들은 벼락부자라고 욕했다. 지역 모임의 회원이어서 매주 금요일 ‘독수리’ 회관에서 볼링을 했고, 마을에서 빵 굽는 날이면 언제나, 그리고 해장국이나 돼지찌개를 끓이는 날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일을 할 때는 값싼 시가를 피우지만, 식후나 일요일에는 고급 시가를 피웠다.
내면생활은 속물적이었다. 감정이라 할 만한 것은 먼지 쌓인 지 오래였고, 대대로 내려오는 투박한 가족관계, 아들에 대한 자부심, 가난한 사람한테 가끔씩 베푸는 적선이 전부였다. 지능은 타고난 극히 제한적인 영민함과 산술 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독서는 신문뿐이고, 예술 향유의 욕구를 채울 만한 것은 매년 열리는 시민단체의 아마추어 공연과 가끔 가는 서커스 구경이 전부였다.
어떤 이웃 사람하고 이름이나 집을 바꿔도 그는 다른 사람과 차이점이 없어 보였다. 마음속에 깊게 숨어 있는 것, 모든 뛰어난 능력이나 인물에 대한 변함 없는 불신, 그리고 모든 평범하지 않은 것, 좀 더 자유로운 것, 좀 더 우아한 것, 정신적인 것에 대한 본능적이고 질투 섞인 증오에 있어 그는 마을의 여타 아버지들과 똑같았다.
그에 관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더 신랄한 사람만이 그의 평범한 삶이나 알 수 없는 비극을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외동아들이 있는데, 그 아이에 관해서라면 이야기를 할 만하다.
한스 기벤라트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재능 있는 소년이었다.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기품 있고 특이하게 돌아다니는 모습만 보아도 그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슈바르츠발트1의 작은 마을에서는 통상적으로 이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협소한 이 공간 밖으로 시선을 보내고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대체 어디에서 이 소년이 진지한 눈과 영리한 이마와 우아한 걸음걸이를 갖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어머니한테서일까? 어머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생전에 늘 아프고 근심이 많았다는 것밖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정말로 신비한 불꽃이 하늘에서 오래된 이 소도시로 떨어진 것이다. 이곳에서는 팔구백 년간 건실한 주민은 많이 배출했지만 재능 있는 인물이나 천재는 한 번도 배출한 적이 없었다.
1 Schwarzwald: 독일 남서부의 산악지대.
현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병약한 어머니와 오랜 가문의 역사를 보면서 지나치게 똑똑한 것이 몰락의 징조라는 것을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소도시에 그런 사람은 없었고, 단지 관리와 교사들 가운데 좀 더 젊고 좀 더 영리한 사람들이 잡지의 기사를 통해 ‘현대인’의 존재에 관해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는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몰라도 유식한 척할 수 있었다. 결혼생활은 탄탄하고 때로 행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생활은 손을 못 댈 정도로 구식이었다. 유복하고 부유한 시민들 중에는 지난 20여 년 동안 수공업자에서 공장주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관리 앞에서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며 친분을 맺으려 하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그들을 상거지, 서기 나부랭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들이 품은 최고의 야심은 가능하면 아들을 대학에 보내 관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꿈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이들 자손의 대부분은 라틴어학교마저 낙제를 하며 힘들게 다니면서 겨우 졸업하는 수준인 때문이었다.
한스 기벤라트의 재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교사, 교장, 이웃, 시市목사, 동급생과 모든 사람이 이 소년이 두뇌가 명석하고 정말 특별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이의 미래는 정해지고 확고해졌다. 왜냐하면 이곳 슈바벤 지방에서는 부모가 부유하지 못하면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단 하나의 좁은 길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즉 주州 시험에 합격해서 신학교에 가고, 그 뒤에 튀빙엔 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거나 교직으로 가는 것이다. 매년 이 주州에서 사오십 명이 평탄하고 확실한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치고 여위고 이제 막 견진성사를 받은 아이들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 지식을 국비로 공부하고 나서 8년이나 9년이 지나면 학창 시절보다 더 긴 제2의 인생 여정으로 들어가 국가에게 받은 혜택을 갚아야 한다.
몇 주 후에 시험이 있을 예정이었다. ‘국가’가 해마다 주의 어린 꿈나무를 뽑는 ‘헤카톰베2 기간에 소도시와 시골마을에서는 많은 가족의 한숨, 기도, 소원이 주도州都3로 향한다. 시험은 그곳에 있는 어느 성城에서 시행된다.
2 헤카톰베Hekatombe: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황소 백 마리를 제물로 바쳤던 제사로, 많은 희생자를 내는 행사라는 뜻이다.
3 이 소설의 무대인 헤세의 고향 칼프는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다. 이곳의 주도는 슈투트가르트이다.
한스 기벤라트는 이 소도시에서 고통스러운 그 경쟁에 나가는 유일한 후보였다. 대단한 명예지만 그런 명예를 거저 얻은 것은 아니었다. 매일 4시까지 이어지는 학교 수업이 끝난 뒤에 교장선생님한테서 그리스어 특별수업을 받았고, 6시에는 친절하게도 목사가 라틴어와 종교 수업을 해 주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저녁 식사 후에 수학 교사한테서 한 시간 동안 수업을 받았다. 그리스어 수업에서는 불규칙동사를 배운 뒤 불변화사로 표현되는 다양한 문장 결합 형태를 중점적으로 공부했고, 라틴어 수업에서는 문체를 명확하고 간결하게 쓰는 것, 세련된 운율을 만드는 법을 특히 많이 연습했다. 수학에서는 복잡한 비례 계산에 역점을 두었는데, 수학 교사는 비례식이 나중에 대학 공부나 실생활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떤 전공보다도 중요하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비례식은 논리적 능력을 길러 주고, 명료하고 냉철하고 효과적인 사고를 하도록 만드는 토대가 된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스가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부담을 느끼고 지식을 쌓느라 정서가 메마르거나 등한시되는 일이 없도록, 견진성사 준비를 받는 아이들이 매일 아침 수업 시작 한 시간 동안 듣는 성서강독에 참여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수업에서는 브렌츠4의 교리문답을 배우고 질문과 해답을 암기하고 낭송했다. 이를 통해서 얻게 되는 종교적 삶의 고무적인 숨결은 소년들의 영혼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스는 힘을 북돋아 줄 그 시간을 활용하지 않고 그 축복을 스스로 저버렸는데, 교리문답서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나 연습문제를 적은 쪽지를 몰래 끼워 넣고 한 시간 내내 세속의 학문을 공부한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불안감과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다. 주임 목사가 곁에 오거나 이름을 부르면 항상 깜짝 놀라 움찔했고, 질문에 대답을 할 때면 이마에 진땀이 솟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발음까지도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해서 목사를 만족시켰다.
4 요하네스 브렌츠Johannes Brenz(1499~1570): 종교 개혁가이자 개신교 신학자.
하루 종일 수업을 받고 나면 쓰기와 암기, 복습과 예습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스는 밤늦게까지 아늑한 불빛 아래에서 숙제에 매달렸다. 담임교사는 그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집에서 공부하는 것이 특히 집중이 잘되고 실력도 향상된다고 했다. 한스는 대개 화요일과 토요일에는 10시, 다른 날에는 11시나 12시까지 공부했는데 그보다 더 늦게까지 공부하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는 등잔기름을 많이 쓴다고 투덜대면서도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어쩌다 생기는 한가한 시간이나 한 주의 마지막인 일요일이면 한스는 학교에서 다루지 않은 작가의 작품을 읽고 문법을 복습해야 했다.
“무리하면 안 된다. 무리하지 마라.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산책을 하도록 해라. 그게 효과가 좋다. 날씨가 좋으면 책을 들고 야외로 나가는 것도 좋아.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공부하는 게 얼마나 즐겁고 쉬운지 알게 될 거야. 고개를 들고 기운을 내도록 해라.”
그래서 한스는 될 수 있는 한 고개를 들고 다녔고 산책을 하면서도 공부를 했다. 잠이 부족해서 피곤하고 눈가가 푸르스름한 채 휘청거리며 걸어 다녔다.
“기벤라트는 어떻게 될까요? 합격하겠지요?” 어느 날 담임교사가 교장에게 물었다.
“하지요. 합격합니다.” 교장이 환호하듯 말했다. “정말 똑똑한 학생입니다. 보기만 해도 영리한 게 보이지 않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한스는 정신적으로 더욱 원숙해진 것 같았다. 귀엽고 부드러운 소년의 얼굴에는 불안해 보이는 쑥 들어간 눈이 어렴풋한 열기로 빛나고, 반듯한 이마에는 지성을 드러내듯 가느다란 주름이 꿈틀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가늘고 야윈 팔과 손은 축 늘어져서 보티첼리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나른한 우아함마저 보였다.
드디어 때가 왔다. 다음 날 한스는 아버지와 함께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주 시험을 치르고 신학교의 좁은 문을 들어갈 자격이 있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그는 작별 인사를 하러 교장선생님을 찾아갔다.
평소 사나운 폭군 같던 교장은 헤어질 때 전에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오늘 저녁엔 더 이상 공부하면 안 된다. 약속해라. 내일은 정말 가뿐하게 슈투트가르트에 가야 한다. 한 시간 산책을 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라. 젊은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한다.”
엄청나게 많은 충고를 들을 줄 알고 잔뜩 겁을 먹었던 한스는 친절한 말에 내심 놀랐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그는 학교를 나왔다. 커다란 키르히베르크 보리수가 늦은 오후의 뜨거운 햇살에 축 늘어져 빛을 발하고, 광장에는 커다란 두 개의 분수가 물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검푸른 전나무가 울창한 소도시 주변의 산들은 들쭉날쭉한 지붕의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매혹적으로 보였다. 머리가 지끈 아팠다. 그래도 오늘은 공부를 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천천히 광장과 유서 깊은 시청 건물을 지나 마르크트가세5를 지나고 대장간을 지나 알테 브뤼케6까지 왔다. 거기서 잠시 서성거리다가 드디어 넓은 다리 난간에 걸터앉았다. 몇 주, 몇 달 동안 매일 하루 네 번씩 그곳을 지나다니면서도 다리 옆에 있는 자그마한 고딕식 예배당7을 쳐다본 적이 없었다. 강물과 수문과 방죽과 물방아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심지어 바데비제8와 피혁 공장이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가 늘어진 강가도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곳의 강물은 깊고 초록빛으로 호수처럼 고요했다. 휘어진 가느다란 버들가지가 물속으로 늘어져 있었다.
5 Marktgasse: 시장길이라는 뜻. 여기서는 지명. 여기에 나오는 지명은 대부분 헤세의 고향인 칼프의 실제 지명인 경우가 많다.
6 alte Brücke: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니콜라우스 교橋를 부르는 말이다.
7 성 니콜라우스 예배당.
8 Badewiese: 수영할 수 있는 강가의 풀밭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지명.
그러자 다시 기억이 났다. 얼마나 많은 날을 한나절 또는 온종일 여기서 시간을 보냈고, 얼마나 자주 헤엄을 치고 잠수를 하고 노를 젓고 낚시를 했는지 모른다. 아, 낚시! 하지만 이제는 낚시하는 법을 거의 잊어 버렸다. 작년에 시험공부 때문에 낚시가 금지되었을 때 그는 너무도 슬프게 울었다. 낚시, 그것은 기나긴 학창 시절에서 제일 재미있는 일이었다. 버드나무의 옅은 그늘 아래에 서 있는 것, 가까운 물방앗간 방죽에서 들리는 쏴쏴 하는 소리, 깊고 고요한 강물! 강물에 어른대는 햇빛, 기다란 낚싯대의 가벼운 흔들림,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당길 때의 짜릿한 흥분, 파닥거리는 차갑고 통통한 물고기를 손에 잡았을 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전에는 힘 좋은 잉어를 많이 잡았다. 그리고 은어, 돌잉어와 맛 좋은 향어와 작고 색깔이 예쁜 연준모치도 잡았다.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보던 그는 초록빛으로 뒤덮인 강가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아름답고 자유롭고 거칠던 소년 시절의 기쁨은 이제 아득히 멀리 사라졌다. 그는 가방에서 무심코 빵 하나를 꺼내 크고 작게 덩어리를 만들어 강에 던져서 빵 조각이 물에 가라앉는 것을, 그리고 물고기들이 빵조각을 물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송사리와 잔챙이들이 몰려와 작은 덩어리를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큰 덩어리는 굶주린 주둥이로 이리저리 밀쳐 냈다. 뒤를 이어 좀 더 큰 은어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은어의 거무스름하고 넓은 등은 강바닥과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은어는 빵 덩어리 근처를 돌다가 갑자기 주둥이를 둥글게 쩍 벌려서 삼켰다. 느리게 흐르는 강물에서는 눅눅하고 후덥지근한 공기가 솟아올랐고, 초록빛 물 표면에는 옅은 구름 몇 조각이 흐릿하게 비쳤다. 물방아는 톱니바퀴가 삐걱거렸고, 두 개의 방죽은 서늘하고 낮게 철썩였다. 소년은 얼마 전에 견진성사를 받던 일요일이 생각났다. 엄숙하고 감동적인 분위기에서 그는 속으로 그리스어 동사를 외우고 있었다. 요즘에는 다른 때에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생각이 뒤죽박죽되고, 학교에서도 지금 하는 수업 대신 이미 했거나 아니면 나중에 할 공부를 생각하는 일이 많았다. 어떻게든 시험을 잘 봐야만 한다.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억센 손이 그의 어깨를 잡더니 누군가 친절하게 말을 걸자 그는 깜짝 놀랐다.
“잘 지냈니, 한스야. 같이 좀 걸을까?”
구두 장인匠人 플라이크였다. 전에는 그 집에서 종종 저녁 시간을 보냈지만 요즘 그곳에 가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함께 걸으면서 한스는 이 경건주의자9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 플라이크는 시험을 언급하면서 그에게 행운을 빌고 용기를 주었다. 하지만 그의 말의 핵심은 그런 시험은 피상적이고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불합격을 해도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최고 우등생도 그럴 수 있으니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분 나름의 특별한 의도를 갖고 우리의 영혼이 각각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이야기였다.
9 경건주의는 18세기에 신교 교회에서 일어난 종교운동으로 영적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한스는 아저씨한테 양심의 가책이 좀 있었다. 이 사람과 그의 확고부동하고 감탄할 만한 인품에는 존경심을 가졌지만, 사람들이 그와 그의 신앙 동료들에 관해 하는 갖가지 농담에 함께 어울려서 비웃은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이 구두 장인의 날카로운 질문에 겁을 먹고 피한 자신의 비겁함도 부끄러웠다. 한스가 교사들의 자부심이 되고 약간 건방져진 후 플라이크는 한스를 우습게 보면서 그의 기를 꺾으려 했다. 그러는 사이 소년의 마음은 호의적인 이 스승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소년기의 반항심이 한창때여서 자의식을 건드리는 모든 달갑지 않은 관계에 대해서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는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플라이크 옆에서 같이 걸어가고 있으면서도 한스는 그가 얼마나 걱정하면서 자신을 좋게 생각해 주는지 알지 못했다.
크로넨 골목길10에서 두 사람은 목사와 마주쳤다. 구두 장인은 점잖지만 냉담하게 인사를 하고 갑자기 서둘러 사라졌다. 왜냐하면 목사가 신식 목사여서 부활마저 믿지 않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때문이었다. 목사는 소년과 함께 걸었다.
10 크로넨가세Kronengasse: 마르크트 광장과 레더 가街 사이의 골목길.
“어떠냐?” 목사가 물었다. “시험이 다가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지?”
“네, 그래요.”
“그래, 잘 견뎌야 한다. 너도 알 거야. 우리 모두가 너한테 희망을 걸고 있어. 나는 네가 특별히 라틴어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거라고 기대한다.”
“만약에 떨어지면요…….” 한스가 수줍게 말했다.
“떨어지다니!” 목사가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어. 무슨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지만 혹시 떨어질 수도…….”
“그럴 리 없다. 한스야. 그럴 리 없어.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자, 아버지께 안부 전해다오. 그리고 기운을 내라.”
한스는 목사를 눈으로 배웅했다. 그런 뒤 구둣방 주인을 찾느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아저씨가 뭐라고 했지? 마음을 올바로 두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라틴어 같은 것은 별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말은 그럴듯해. 그런데 목사는! 만약 시험에 떨어지면 목사 앞에 절대로 얼굴을 못 내밀게 될 거야.
한스는 풀이 죽어서 집으로 돌아와 경사를 이루고 있는 마당에 들어섰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이끼가 낀 뒤채가 있었는데, 예전에 그곳에다 널빤지로 우리를 만들어 3년 동안 토끼를 키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토끼는 시험 때문에 지난가을에 압수당했다. 놀 만한 여가 시간이 없는 까닭이었다.
그는 마당에도 오랫동안 나와 본 적이 없었다. 텅 빈 우리는 무너질 것처럼 보이고, 벽 모퉁이의 석재들은 다 무너졌다. 나무로 만든 작은 물레방아 바퀴는 휘고 부서진 채로 수도관 옆에 쓰러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만들고 자르면서 즐거워했던 때가 생각났다. 2년 전 일이다. 아득한 옛날 같다. 그는 물레방아의 바퀴를 집어 이리저리 비틀어 완전히 부순 다음 그것을 울타리 너머로 내던졌다. 다 사라져 버려! 이제 이런 시절은 끝났고 지나가 버렸다. 그러자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생각났다. 그 아이는 물레방아 바퀴를 만들고 토끼장을 만들 때 한스를 도와주었다. 오후 내내 그들은 여기서 함께 놀았다. 새총을 쏘고 고양이를 따라다녔고, 천막을 치고 간식으로 당근을 날로 먹었다. 그러나 그 후 한스는 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아우구스트는 1년 전에 학교를 나가 기계 견습생이 되었다. 그 후 겨우 두 번 놀러 왔을 뿐이다. 그 애도 요즘 시간이 없다.
구름의 그림자가 골짜기 위로 빠르게 지나갔다. 해는 벌써 산기슭에 걸려 있었다. 한순간 소년은 쓰러져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대신 헛간에서 손도끼를 꺼내 가냘픈 팔로 토끼장을 내리쳐 산산 조각냈다. 각목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못이 삐꺽대며 구부러졌다. 작년 여름부터 있던 약간 썩은 토끼의 먹이가 보였다. 그는 전부 다 부수었다. 그렇게 하면 토끼와 아우구스트와 과거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모두 부숴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저런, 이게 무슨 짓이야!” 아버지가 창문에서 소리쳤다. “거기서 뭐 해!”
“장작 패요.”
그 말만 하고 나서 그는 손도끼를 집어 던지고 마당을 가로질러 골목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강가를 달려 상류로 올라갔다. 저 멀리 양조장 근처에 뗏목 두 개가 묶여 있었다. 전에 그는 뗏목을 타고 몇 시간씩 강물을 따라 내려간 적이 있다. 더운 여름날 오후에 뗏목의 목재 틈새로 찰싹대는 물소리를 들으며 강을 따라 내려가면 흥분되기도 하고 나른하게 졸음이 오기도 했다. 한스는 물결에 천천히 흔들리는 헐거운 뗏목 위로 뛰어올라 버드나무 더미 위에 누워 상상의 나래를 폈다. 뗏목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때로는 급하게 때로는 천천히 흘러서 초원, 밭, 소도시, 서늘한 숲가를 지나고 다리를 지나 열린 수문 아래로 흘러간다. 나는 그 뗏목 위에 누워 있고, 모든 것이 다시 전과 똑같다. 카프베르크에서 토끼 먹이를 뜯어오고 강기슭의 피혁 공장 마당에서 낚시를 하고 두통도 걱정도 없던 그때와 똑같다.
지치고 짜증난 모습으로 그는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시험을 보러 가는 슈투트가르트 여행을 앞두고 말도 못 하게 흥분해서 똑같은 질문을 열두 번도 더 했다. 책은 다 챙겼는지 양복은 준비됐는지 가는 도중에 문법 공부를 더 할 것인지 기분은 괜찮은지 질문이 쏟아졌다. 한스는 짧고 삐딱하게 대답했고,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서 곧 밤 인사를 했다.
“잘 자라, 한스. 푹 자거라. 내일 6시에 깨워 주마. 사전은 잘 챙겼지?”
“네, 챙겼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방에서 한스는 불도 켜지 않은 채로 그냥 앉아 있었다. 이 방은 시험이 지금까지 그에게 준 유일한 축복이었다. 자신만의 작은 방이었다. 그는 이 방에서 주인이었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여기서 피곤, 잠, 두통과 싸우면서 밤늦도록 카이사르, 크세노폰, 문법, 사전, 수학숙제와 더불어 지냈다. 야심으로 불타서 오기를 부리며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절망에 빠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소년 시절의 잃어버린 모든 즐거움보다 훨씬 값진 것, 꿈처럼 아주 귀한 시간, 자부심과 열정과 도취감에 가득한 행복한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 좁은 방 안에서 학교, 시험, 이 모두를 뛰어넘어 보다 높은 존재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를 꿈꾸고 간절히 원했다. 자신이 뺨이 통통하고 온순한 학교친구들과 뭔가 다르고 좀 더 나은 사람이며, 언젠가는 아득히 높은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지고 황홀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지금 그는 이 작은 방 안이 더 자유롭고 더 시원한 공기로 가득한 것처럼 숨을 들이쉬며 침대에 앉아 몇 시간이나 꿈, 희망, 예감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서서히 피로에 지친 그의 큰 눈에 얇은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다시 한 번 눈을 뜨고 깜박이더니 곧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소년의 창백한 얼굴이 야윈 어깨 위로 기울어지더니 피곤한 듯 가느다란 팔이 축 늘어졌다. 그는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엄마처럼 부드러운 잠의 손길이 불안한 소년의 가슴속 파도를 다독이고, 예쁜 이마의 잔주름을 펴 주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장선생님이 몸소 역에 나온 것이다. 기벤라트 씨는 검정 예복을 입었는데, 흥분과 기쁨, 자부심 때문에 가만히 서 있지를 못했다. 아버지는 교장과 한스 주변을 불안하게 총총걸음으로 돌아다녔는데, 역장과 모든 역무원들한테서 즐거운 여행과 아들의 합격을 비는 인사를 받았다. 그는 작고 뻣뻣한 짐가방을 왼손과 오른손에 번갈아 들었는데, 우산을 겨드랑이 아래에 끼었다가 다시 무릎 사이에 끼었다가 몇 번 떨어트리기도 했다. 우산을 집어들 때마다 가방은 내려놓았다. 왕복표를 가지고 슈투트가르트를 가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미국이라도 가는 사람 같았다. 아들은 아주 침착해 보였지만 남모르는 두려움이 목을 누르는 기분이었다.
기차가 들어와 멈춰 서자 부자는 올라탔다. 교장이 손을 흔들고 아버지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저 아래 골짜기에서 소도시가 사라지고 강이 사라졌다. 여행은 두 사람에게 고역이었다.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갑자기 생기가 돌고, 즐겁고 친절하고 세련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작은 마을의 주민이 며칠 동안 주의 수도에 머물게 되니 신이 난 것이다. 하지만 한스는 점점 더 조용해지고 근심에 잠겼다. 도시를 보자 마음이 조여 왔다. 낯선 얼굴, 뽐내듯 높이 솟은 집, 지치게 만드는 먼 길, 마차철도11, 도시의 소음에 기가 질리고 고통스러웠다. 숙모 집에 묵었는데 그곳에서 낯선 방, 숙모의 친절과 수다, 할 일 없이 멍하니 앉아 있기, 아버지의 끝없는 격려와 충고에 녹초가 되었다. 낯설고 멍한 기분으로 한스는 방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낯선 환경, 숙모와 도시풍의 차림새, 큰 무늬의 벽지, 탁상시계, 벽에 걸린 그림을 보거나 창문 밖의 소음 가득한 거리를 내다보면서 그는 배신당한 기분이었고, 집을 떠난 지 아주 오래되어서 애써 배운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11 철제 레일이 나오기 전에는 목재 수렛길로 마차가 다녔다. 처음에는 화물 운송용이었지만 후에 여객 운송을 담당했다.
오후에는 그리스어 불변화사를 복습하려고 했는데 숙모가 산책을 가자고 했다. 순간 마음속에 푸른 초원草地과 숲의 소리가 떠올라 한스는 기꺼이 따라나섰다. 하지만 여기 대도시에서는 산책도 고향과는 종류가 다른 오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시내에 가 볼 곳이 있어서 한스는 숙모와 단둘이서 집을 나섰다. 하지만 계단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2층에서 뚱뚱하고 거만해 뵈는 부인과 마주친 것이다. 숙모가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자마자 상대방은 엄청난 달변으로 수다를 시작했다. 15분 이상 그렇게 붙잡혀 있었다. 한스는 층계 난간에 기댄 채 옆에 서 있었는데, 부인의 강아지가 킁킁대면서 냄새를 맡더니 그에게 달려들었다. 두 부인은 한스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뚱보 부인이 코안경 너머로 몇 번이나 한스를 위아래로 훑어봤기 때문이다. 드디어 거리로 나오자 숙모는 곧장 어떤 가게로 들어가 한참 만에 나왔다. 그 사이 한스는 부끄러운 듯 길에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밀리기도 하고 길거리의 아이들한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숙모는 가게에서 나오자 커다란 초콜릿 하나를 주었다. 그는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지만 공손하게 받았다. 다음 모퉁이에서는 승합마차를 탔다. 북적대는 마차는 끊임없이 딸랑 소리를 내면서 거리를 지나고 또 지나 드디어 넓은 가로수 길과 공원에 도착했다. 분수가 물을 뿜어 댔고, 울타리를 두른 화단에는 꽃들이 피어 있었다. 작은 인공연못에는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산책하는 사람들 무리 속에서 왔다 갔다 하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산보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얼굴, 우아한 옷과 그렇지 못한 옷, 자전거와 환자용 휠체어와 유모차를 보았다. 그리고 뒤엉킨 목소리도 들었고, 먼지 섞인 더운 공기를 마셨다. 그러다가 마침내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그동안 거의 쉬지 않고 말하던 숙모가 깊이 숨을 내쉬더니 미소 띤 다정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면서 초콜릿을 먹으라고 했다. 그는 먹고 싶지 않았다.
“저런, 부끄러워서 그러니? 괜찮아, 어서 먹어, 어서.”
한스는 초콜릿을 꺼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은박지를 뜯어 아주 조금 베어 먹었다. 초콜릿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지만 숙모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한스가 입에 든 것을 녹여 먹는 사이에 숙모는 사람들 속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리로 갔다.
“여기 있어. 금방 돌아올게.”
한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남은 초콜릿을 멀리 잔디밭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다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다시 불규칙동사들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거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전부 다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바로 내일이 시험인데.
숙모는 다시 돌아왔는데, 그동안에 이번 시험 응시자가 118명이라는 정보를 가져왔다. 합격자는 36명이라고 했다. 소년은 기가 꺾여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에 오자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고, 또다시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너무도 고집을 부려서 아버지는 심하게 꾸중을 했고 숙모조차 못마땅해했다. 밤에는 괴롭고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끔직스런 장면에 시달렸다. 그는 117명의 응시생들과 함께 시험장에 앉아 있는데, 시험관은 때로는 고향의 목사처럼, 때로는 숙모처럼 보이기도 했다. 앞에는 먹어 치워야 할 초콜릿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울면서 그것을 먹는 동안 다른 학생들이 차례로 문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모두들 잔뜩 쌓인 자기 몫을 다 먹은 것이다. 그런데 한스의 초콜릿은 눈앞에서 점점 더 높아져서 책상과 의자에까지 넘쳐 그를 질식시킬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한스는 시험에 늦지 않으려고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동안 고향 소도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한스를 염려해 주고 있었다. 우선 구두 장인 플라이크가 아침 수프를 들기 전에 기도를 올렸다. 숙련공들과 두 명의 견습공을 포함한 전 가족이 식탁 주위에 둥글게 모여 섰다. 장인은 오늘 평소의 아침기도에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주님, 한스 기벤라트의 어깨에 당신의 손을 얹어 주십시오. 오늘 시험을 치룹니다. 그를 축복하시고 힘을 주시어 당신의 신성한 이름을 알리는 올바르고 성실한 일꾼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목사는 한스를 위해 기도하지는 않았지만 아침 식사 시간에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기벤라트가 시험 보러 들어가겠군. 그 애는 특별한 인물이 될 거야. 모두들 눈여겨보게 될 거야. 내가 그 애 라틴어 공부를 도와준 건 보람 있는 일이야.”
담임교사는 수업 시작 전에 학생들에게 말했다. “자, 이제 슈투트가르트에서 주 시험이 시작된다. 우리 모두 기벤라트의 행운을 빌어 주자. 하긴 그런 건 필요 없을 거야. 너희 같은 게으름뱅이 열 명쯤은 혼자 당해 낼 수 있는 아이니까.”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자리에 없는 친구를 생각했다. 한스의 합격, 또는 불합격에 내기를 건 아이들은 더 그랬다.
진심 어린 기도와 관심은 쉽게 먼 거리를 뛰어넘어 멀리까지 효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한스도 고향에서 사람들이 자신을 생각하고 있음을 느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시험장으로 가서 주눅들고 놀라워하면서 조교의 지시를 따랐다. 창백한 소년들이 가득한 방에서 그는 마치 고문실에 들어간 범죄자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교수가 들어와 조용히 시키고 라틴어 문체 연습 문장을 받아쓰게 하자, 한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이 정도는 정말 우스울 만큼 쉽다고 생각했다. 아주 빨리, 거의 즐거워하면서 초안을 마친 뒤 그는 신중하고 깨끗하게 정서淨書했다. 그는 남들보다 일찍 제출한 학생들 중 하나였다. 시험을 마친 뒤 숙모 집으로 가는 길을 못 찾아서 뜨거운 도시의 길에서 두 시간이나 헤매면서도 다시 찾은 평정심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숙모와 아버지로부터 얼마간이라도 벗어난 것이 기뻤다. 낯설고 소음 가득한 도시의 거리를 걸으면서 용감한 모험가라도 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간신히 집에 도착하자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어떻게 됐어? 시험이 어땠어? 잘 봤니?”
“쉬웠어요.” 한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라면 5학년 때 다 풀었을 거예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