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순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와 고려대 스페인 라틴아메리카 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였다. 2006년 고려대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신자유주의정책 도입 이후 멕시코의 지역격차 변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라틴아메리카지역 연구자로서 지역격차의 원인에 대해 식민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지속해 왔다. 라틴 아메리카의 빈부격차 문제, 불량주택지구 문제, 미-멕 국경 문제 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빈곤의 연대기: 제국주의, 세계화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2015),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이해》(2019)가 있으며, 역서로 《파벨라: 리우데자네이루 주변 지역의 삶에 대한 40년간의 기록》(제니스 펄만 저, 2022)이 있다.
이 저서는 2018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8S1A6A4A01039517)
머리말
3,100여 킬로미터의 경계 혹은 혐오선線
2018년 11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에는 미 국경 수비대가 쏜 최루탄을 피하기 위해 황급히 도망가는 라틴계 여성과 어린 두 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엄마 손에 끌려 도망치던 어린 소녀들은 디즈니 만화영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바지도 입지 못한 채 기저귀 바람이었다.
이 사진은 당시 미-멕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입국하려는 카라반(미-멕 국경을 넘으려는 불법이민자 행렬) 무리를 미 국경 수비대가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찍힌 것이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정책과 미-멕 국경에 대한 미국의 봉쇄적인 태도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이끌어 냈다. 이후 미-멕 국경을 넘으려는 카라반 물결과 이를 저지하는 미국 정부의 태도는 신문이나 특파원 단신으로 자주 거론되었다.
멀리 떨어져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그 사진은, 사진 속 어린아이는 불쌍해도 굳이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돈을 벌어야 하는 그 어머니의 처지에는 공감하기 어려운,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에 돈을 벌러 가는 건 오늘날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며, 적법한 서류 없이 다른 나라에 입국하려는 것은 분명 불법이다. 게다가 이민국 관리가 무섭기로 유명한 미국이 아닌가. 그런데 이 사진은 몇 가지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남겼다.
소위 세계화 시대에, 상품도 정보도 돈도 국경을 넘나드는 시대에, 왜 사람은 국경을 자유로이 넘을 수 없는 걸까? 기저귀도 떼지 못한 아이들을 둘씩이나 이끌고 몇 천 킬로미터를 걸어올 만큼 고향에서의 삶이 처참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고향에서 그들의 삶은 왜 그렇게 무너진 것일까? 더 나아가,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넘은 이 모녀는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이가 입은 티셔츠에 프린트된 공주처럼?
이러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그에 대한 답을 구하다 보니 미국과 멕시코 양 국가 간 오랜 교류의 역사와 함께 세계화라는 거대한 물결을 헤집지 않을 수 없었다.
20세기 말, 세계화라는 말이 아직 낯설던 시절에 많은 미래학자들은 물자와 인구의 이동을 막는 장벽, 특히 국경은 사라지거나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과연 휴대폰 하나에 들어가는 부품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생산되고, 전 세계 사람들이 똑같은 기종의 휴대폰을 사용하며, 그 휴대폰을 통해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각국의 콘텐츠를 누구나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본도, 물자도, 정보도 국경을 넘는 일이 너무나 쉬워졌다. 게다가 교통 통신의 발달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미래학자들이 예견한 미래는 실현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계화는 우리들 사이에 놓인 장벽을 허물어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온 테러, 분쟁, 난민, 이주민, 빈부격차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경계 내에 더욱 공고하게 소속되기를, 그들을 둘러싼 경계가 그들의 안위를 보장해 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나를 둘러싼 경계의 의미는 더 중요해졌다. 어느 나라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가족을 두고 먼 나라로 돈을 벌러 가야 할 수도 있고, 높은 환율 덕에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즐기며 편안하게 살 수도 있다. 특히 COVID-19 상황에서 국경의 의미는 그러한 사회적·제도적 측면의 경계를 넘어 생존확률까지도 결정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한국에 머물던 나는 미국에 사는 친구보다 생존확률이 높았다. 운 좋게도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최근 경계, 특히 국가 간 경계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과거 물리적 영토의 가장자리에 지나지 않던 ‘경계’는 이제 제도적 경계, 디지털 경계 등으로 확대되었고, 경계의 위치도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공간부터 가상공간까지, 그리고 개인의 신체까지 다변화하였다.
이 책은 이러한 경계 중 가장 극적인 경계 중 하나인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다루었다. 장장 3,100여 킬로미터의 긴 국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미국과 멕시코라는 두 국가,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라는 세계 지역, 그리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교류에 초점을 맞추었다.
미국 내 라티노Latino(미국 내에서 에스파냐어를 사용하는 히스패닉)를 연구한 아레올라DanielD.Arreola는, 미-멕 국경 지역에서 미국과 멕시코 문화가 혼종된 새로운 문화 지대가 형성될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멕 국경지대에서는 멕시코계 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가 예견한 혼종문화 지대는 국경을 너머 양 국가의 도시에서, 농촌에서, 산업지구에서 나타났다. 국경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두 국가 간의 인적·물적 교류는 양국이 맞닿아 있는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 지역에 새로운 지역성을 부여하고 있다.
미-멕 국경이 형성된 지는 2백 년도 채 안 되었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국경은 양국 사람들이 드나들기 어려운 경계가 아니었다. 미국 사람들은 주로 술을 마시고 즐기러 국경을 넘어갔고, 멕시코 사람들은 일상용품을 사거나 농장에서 돈을 벌러 경계를 넘었다. 길을 잘못 들면 사막을 헤맬 수는 있어도 마약상의 총에 맞지는 않았다. 비교적 평범한 경계와 경계 지역이었다. 그러나 사회가 변화면 경계도 변한다.
미-멕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변화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멕시코와 미국의 정치적·사회적·제도적 변화와 함께 글로벌 시스템의 변화였다. 경계를 둘러싼 제도적 변화와 글로벌 노동 체계의 변화로 이 지역에 제조업체들이 들어섰고, 경계를 두고 나타난 임금격차는 합법 혹은 불법노동이주 물결로 이어졌다. 더 나아가, 멀리 콜롬비아에서 미국이 벌인 마약과의 전쟁은 결국 이 지역을 마약상들의 격전지로 만드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 사회에서 미-멕 국경 지역이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시점은 매우 명확하다. 1994년 1월 1일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 간의 자유무역협정, 즉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NorthAmericanFreeTradeAgreement의 발효되면서부터다. 당시 미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높던 우리나라로서는 저렴한 인건비를 바탕으로 발달한 미-멕 국경지대의 멕시코 측 지구, 즉 마킬라도라 지구가 제조업 상품생산지로서 중요해졌다. 1990년대 미국 소비시장에 제조업 상품을 수출하던 한국, 대만, 일본 등 주요 국가의 제조업체들이 이 멕시코 국경 지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북아메리카 시장의 주요 생산기지이다. 즉, 우리나라에 멕시코라는 나라가 중요해진 이유도 글로벌 생산체제 내에서 멕시코가 지닌 제조업 생산지로서의 경쟁력 때문이었다.
한편, 미-멕 국경의 경관은 미국과 멕시코, 미국과 멕시코인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메타포처럼 여겨진다. 북쪽, 즉 미국 측에서 바라보는 미-멕 국경은 살풍경하기 그지없다. 미국 도시에 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멕시코의 도시경관을 바로보고 있노라면, 국경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까지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된다. 미국인들이 바라보는 국경도 그러하다. 미국인들에게 미-멕 국경은 가난한 라틴아메리카 이주민들이 끊임없이 넘어올 기회를 엿보는, 자신들의 안온한 삶을 지키려면 반드시 막아야 하는 마지노선처럼 보인다.
미국 쪽에서 멕시코로 가는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차를 몰고 간다면 ‘그냥’ 계속 남쪽으로 운전하면 된다. 도보로 갈 때에는 걸어서, 공공건물에 들어갈 때 받는 간단한 검사 과정처럼 여권을 제시하면 바로 멕시코에 입국할 수 있다. 반면에 남쪽, 즉 멕시코 측에서 바라보는 미-멕 국경은 사뭇 다르다. 높은 장벽과 검문소에 가려 미국의 도시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 쪽 검문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시간씩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른 채 비좁은 보도 위에 서서 기다려야 하지만, 그 지루하고 긴 기다림에도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행 검문소에 들어서면, 마치 미국 공항의 입국심사대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펼쳐진다.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은 여전히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입국심사관의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당황하며 더듬더듬 미국 입국 사유를 밝힌다. 개중에는 입국을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 마침내 검문소를 통과한 순간, 그들이 마주하는 미국은 미국이라 하기엔 초라한 경관이다. 그러나 긴 기다림 끝에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이들은 안도의 시간도 잠시, 서둘러 짐을 추슬러 갈 길을 간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미국과 멕시코의 경계로서 미-멕 국경과, 라틴아메리카와 앵글로아메리카의 경계로서 미-멕 국경의 형성을 다룬다. 미-멕 국경의 형성은 근대국가 미국의 국토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나아가 이 국경은 스페인 제국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로 대표되는 유럽 세력의 충돌 과정에서 형성된 두 세계의 경계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국경의 형성 이후 이루어진 미국의 서부 개척 과정과 국경을 넘는 인적 교류를 다룬다. 국경의 형성 직후부터 멕시코 이주민들은 국경을 넘어갔다. 그들은 미국의 황무지였던 서부 지역을 개척하고 도시와 인프라를 형성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국 그들이 오랜 기간 국경을 넘은 이유는 경제적 이윤, 즉 본국 송금이었으며, 이는 최근 들어 이주민 개인과 가정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의 경제·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경계로서 미-멕 국경은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양국 간의 새로운 산업활동지구로 떠올랐다. 마킬라도라로 대표되는 미-멕 국경 지역의 산업 발달은 미국 산업 체제 변화의 결과이자 멕시코 국가정책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적·경제적 교류는 국경 지역에 마을과 도시를 만들어 내었다. 미-멕 국경 지역은 그 어느 국가 간 경계보다 더 뚜렷한 도시의 발달을 나타내며, 특히 티후아나, 씨우다드 후아레스, 몬테레이와 같은 도시들은 멕시코 도시 시스템 및 경제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국경을 넘나드는 교류가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활발한 물적·인적 교류는 마약을 중심으로 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의 마약산업은 글로벌 마약산업의 구조 변화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국경 너머 이주한 이들의 정체성과 삶에 대해 다룬다. 오랜 기간 미국 주류사회에서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살아온 멕시코계 인구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자부심을 갖게 된 과정을 살핀다. 또, 미국에 적응해 살아가는 라티노 인구에 대한 미국 사회의 편견을 통해 아직도 미국 사회의 경계인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라티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네 번째 부분은 이주자들의 증가에 직면한 미국 사회의 반응을 다룬다. 오랜 기간 이어진 이주 경향은 라틴계 인구를 미국의 주요 인구 집단으로 만들었고, 이들의 정치적·사회적 잠재력 또한 증가하였다. 미국 주류사회는 이에 위협을 느꼈고, 소수 보수적인 계층에서 시작된 혐오론은 이주자 전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으며,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혐오정치로 발현되었다. 이주민에 대한 미국 주류사회의 거부감과 혐오론은 결국 국경 경계 및 정책 강화, 봉쇄 등으로 이어졌다.
2023년 봄
지은이
미국은 북쪽으로는 캐나다와, 남쪽으로는 멕시코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멕시코는 북쪽으로는 미국과, 남쪽으로는 벨리스·과테말라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가 공유하는 이 국경은 흔히 ‘미-멕 국경’이라 하지만, 미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남서부 국경theSouthewestborder’이라 한다. 멕시코에서는 미국과 공유하는 북쪽 국경을 “프론테라lafrontera”라 한다. “border”가 ‘경계’의 의미가 강하다면, “frontera”는 ‘변경’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미국과 멕시코를 경계짓는 이 기나긴 국경은 두 국가 간의 국경일 뿐 아니라, 북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경계이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나아가 부유한 세계와 빈곤한 세계 간의 경계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 미-멕 국경이라 일컬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은, 아마도 전 세계에 존재하는 국경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국경 중 하나일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밀입국자 문제, 카라반 행렬, 마약 카르텔 문제,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 장벽 건설 등으로 해외 뉴스에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국경이 형성된 지 채 2백 년이 안 되었고, 불과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몇 안 되는 국경 마을에는 경계라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장에서는 미-멕 국경이라 알려진 3,145킬로미터의 긴 경계가 형성된 순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 순간은 단순히 두 국가 간의 경계가 그어진 것을 넘어,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가,1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하나의 선을 경계로 양편에 전혀 다른 사회를 구성하는, 매우 극적인 경계선이 시작된 순간이다. 더 나아가,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서라도, 목숨을 내놓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넘으려 하는, 이 선 하나를 넘고자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그 앞에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하다.
‘외로운 별’ 텍사스의 반란
2003년, 우리나라에서 외국계 헤지펀드인 론스타가 외환은행의 지분과 경영권을 인수 및 매각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고, 잊어버릴 만하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외로운 별, LoneStar는 미국 텍사스주의 별명으로, 사모펀드 론스타는 텍사스에 기반한 자본이다. 어릴 때 즐겨 보던 〈주말의 명화〉 덕에 우리 세대에게 각인된 텍사스는 황량한 벌판의 카우보이와 그가 신은 투박한 부츠 이미지 정도이지만, 텍사스주는 미국에서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주이다. 풍부한 석유 자원이 매장되어 있고 농업생산력이 높으며, 휴스턴을 중심으로 항공산업이 발달하는 등 미국에서도 캘리포니아 다음으로 GDP가 높은 주이다.2 텍사스가 외로운 별인 이유는 텍사스 주기州旗에 그려진 별이 하나이기 때문이지만, 현재도 텍사스가 미연방 독립을 운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은 미-멕 전쟁(1846~1848)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며, 미-멕 전쟁의 불씨는 ‘외로운 별’ 텍사스의 형성과 독립에서 촉발되었다. 즉, 미-멕 국경의 형성은 텍사스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미국의 영토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18세기 후반 독립 당시만 해도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 지역에 치우친 크지 않은 나라였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미국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해 나아갔다. 북미 대륙 북동부에 치우쳐 있던 미국의 영토는,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면서 서쪽으로 대거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1848년 미-멕 전쟁의 결과 멕시코 북부 영토가 귀속되면서 태평양과 대서양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여기에 1867년에는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고, 1898년 미-서 전쟁으로 스페인으로부터 괌과 푸에르토리코에 대한 소유권과 필리핀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3 19세기는 미국에게 ‘영토 확장의 세기’였다.
미-멕 전쟁 이전까지 미국 중서부와 서부 지역, 즉 캘리포니아·뉴멕시코·애리조나·텍사스·캔자스 등은 스페인 식민지에 속했으나, 멕시코 독립 이후에는 멕시코에 속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스페인 식민 시기 제국의 변경으로 주요 관심 지역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은이 나지 않았고, 값비싼 열대작물이 재배될 만큼 기후가 덥지 않았으며, 제국의 중심지로부터 너무 멀었다.
1493년, 스페인 제국은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deTordesillas」을 통해 교황으로부터 남북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스페인은 남북 아메리카 지역에 여러 개의 도시들을 건설하며 비교적 체계적으로 식민지배체제를 구축하였지만, 페루의 포토시Potosí와 누에바에스파냐NuevaEspaña(현재의 멕시코 지역)의 중부 지역에서 은광들이 발견되자 상황이 변했다. 당시에는 은이 국제통화였기 때문에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은 채굴에 온 힘을 쏟았다. 게다가 1570년대에 필리핀으로 가는 항로가 개척되어 중국 시장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되면서 아카풀코(멕시코 게레로주), 베라크루스(멕시코 베라크루스주) 같은 교역항도 중요해졌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제국은 은광과 그 운송 경로, 그리고 행정중심지 등을 중심으로 구축되었다. 그러나 변경 지역에 속한 북아메리카 지역은 은광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유목민이 대부분인 원주민들은 용맹스러워서 다스리기에 버거웠다. 그래서 이 지역은 식민지 기간 내내 인구가 희박하고, 마을이나 도시의 발달도 더뎠다.
18세기 중반 들어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놓고 벌인 영토분쟁, 즉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IndianWar(1754~1763)이 발발하면서 스페인 제국도 이 지역의 안보를 강화해야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스페인 제국은 북부 변경 지역에 선교 개척지인 미션misión과 군사적 전진기지인 프레시디오presidio를 설치하였다. 식민지 주민을 선교하는 조건으로 교황에게 식민지배 권한을 부여받은 스페인 제국은,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를 개척할 때 반드시 미션과 프레시디오를 함께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미 서부 지역에 가톨릭 성자나 용어에서 이름을 지은 딴 마을들, 예를 들어 산 디에고SanDiego, 로스 앙헬레스LosAngeles, 산 프란시스코SanFrancisco, 산타 페SantaFé 등이 건설되었다. 이 마을들은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인구가 크게 늘어 이후 서부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 지금도 이 도시들에는 미션이나 프레시디오라는 지명들이 남아 있다.
1821년 멕시코가 독립할 당시, 대륙 북부 변경 지역은 인구가 희박하고 개발이 부진한 상태였다. 영국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미국 동부 지역도 경제적 번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 미국이 당시 세계적으로 값비싼 원자재였던 면화를 생산하여 영국에 판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보편적인 직물이 됐지만, 산업혁명 이전 유럽에서 면직물은 고가의 인기 있는 섬유였다. 가공이 쉽고 활용도가 높으며 내구성도 강한 면화와 면직물은 인도에서 주로 수입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일찍부터 면화가 생산되어 소량이나마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카리브해 지역이나 중앙아메리카 해안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던 면화는 해도면海島綿이라는 종으로, 생육 조건이 까다로웠으나 고품질의 면직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소량 생산된 아메리카의 해도면은 영국이나 유럽의 왕실, 귀족들이 주로 사용하는 고급 면직물 생산에 사용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면직물은 주로 인도산이었다. 유럽인들은 질 좋고 아름다운 인도산 면직물에 환호하였고, 유럽산 모직물 산업이 타격을 입을 정도로 많은 양을 수입하였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인도와의 면직물 무역에서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인도에서 수입되던 면직물을 기계화를 통해 값싸게 생산하고자 한 당시 영국 산업가들의 열망은 산업혁명으로 이어졌고, 실제 산업혁명은 면직물 산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유럽, 특히 영국이 면화의 주요 수입처로 떠올랐고, 미국은 면화를 충분히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미국 남부 지역의 건조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은 양질의 목화를 생산하는 데에 알맞았다. 특히 현재 ‘딕시Dixie’라고 일컬어지는 조지아·미시시피 등의 지역은 건조한 기후와 배수가 용이한 지형적 특성 덕에 면화, 특히 소출이 많고 섬유가 길어서 옷감용으로 적당한 육지면陸地綿의 재배가 가능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까지는 미국에서 면화를 생산하지 못했다. 육지면의 특성상 면화와 씨앗을 분리하기가 어려워 일일이 사람 손으로 뜯어내야 했는데, 그러려면 너무 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목화 씨에서 목화 섬유를 분리해 내는 도구, 즉 조면기繰綿機를 개발하면서 미국에서도 면화 생산이 가능해졌다.
1790년대 말부터 미국 남부의 농부들은 면화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대부분 영국으로 수출하였다. 그러면서 미국에 목화 농장 열풍이 불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withtheWind>(1939)의 배경이 된 미국 남부의 목화 농장들도 주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담배나 밀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목화를 수출하면서 큰돈을 벌자,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목화 재배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노동집약적 목화 재배 과정에 투입할 노동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목화 농장주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구매하여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였다.
일반적으로 흑인 노예 혹은 흑인 인구라 하면 미국을 떠올리지만, 사실 미국에 유입된 흑인 노예의 비중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 유입된 노예노동력의 약 4퍼센트에 불과하다. 식민지배가 시작된 이후 약 1,100만 명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아메리카 지역으로 유입되었는데, 이 중 약 40만 명 정도만이 미국으로 갔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약 350년간 아메리카 지역에 유입된 흑인 노예 인구 중 450만 명 정도는 카리브해 지역으로, 약 450만 명 정도는 브라질로 보내졌다. 이들은 대부분 카리브해 제도 및 브라질의 주요 산업이었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되었다.4 자메이카의 전설적인 가수 밥 말리가 흑인인 이유는, 브라질의 네이마르와 펠레가 흑인인 이유는, 결국 사탕수수 때문이었다.
지금의 북아메리카 지역에는 19세기 이전까지 흑인 노예가 활발하게 유입되지 않았다. 비싼 노예를 사용할 만큼 수익성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값이 나가는 작물들은 서늘한 기후 탓에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는 열대작물들, 즉 향신료, 사탕수수, 카카오, 커피 등이었다. 게다가 미국으로 흑인 노예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19세기 초반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흑인 노예를 노동력으로 사용하던 국가들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아메리카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예제는 자유·평등·박애와는 반대되는 제도였고, 특히 프랑스의 식민지, 그중에서도 흑인 노예 비중이 전체 인구의 95퍼센트에 달했던 아이티에서는 혁명 이후 노예제 폐지와 혼혈인에 대한 차별 금지를 요구하는 폭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결국 1803년 아이티가 독립하고 흑인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는 같은 해 프랑스의 루이지애나 식민지 매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메리카의 신생국가들에서도 대부분 노예제도를 금지하였다.5 그러나 미국 남부의 목화 재배지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이 지역의 노예노동력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19세기 초반 영국의 목화 수요가 계속 증가하자, 미국 남부의 목화 생산자들은 이웃 국가들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목화 재배 지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지금의 텍사스를 비롯한 남서부 지역을 매입하여 목화 농장을 확대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1820년 미국은 스페인 정부에 매입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스페인은 미국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듬해인 1821년, 스페인 내부의 혼란과 스페인령 식민지들이 벌인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으로 스페인 제국이 붕괴되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하였다.6
당시 신생 독립국가였던 멕시코 정부는 비교적 인구가 적고 발전이 늦었던 북부 지역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명목 하에 「식민화법」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북부 변경 지역에 정착하는 외국인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불하해 주고, 일정 기간 세금을 면제해 주는 산업장려정책을 펼쳐 미국을 비롯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정착을 유도했다. 그 결과, 당시 미국 동남부 지역, 우리가 흔히 ‘남부’ 혹은 ‘딥 사우스deepsouth’라고 부르는 지역의 목화 농장들이 텍사스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822년 스티븐 오스틴StephenF.Austin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텍사스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 지역의 외국계 이주민 인구는 빠르게 증가하여, 1830년 약 7천 명이던 미국계 외국인이 1835년에는 3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같은 기간 텍사스 지역의 멕시코계 인구도 3,500명에서 8천 명으로 증가하였으나, 그 증가 폭은 상대적으로 적었다(임상래, 2011, 100). 텍사스 지역의 발전은 사실상 미국인들이 주도하였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외국인을 끌어들여 지역을 발전시키는 멕시코 정부의 정책이 이상해 보이지만, 19세기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유럽계 백인들을 정착시켜 인구 증가와 국가 발전을 꾀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즉, 라틴아메리카의 독립과 건국을 주도한 이들은 대부분 유럽계 백인들의 후손, 즉 크리오요criollo로, 이들은 유럽계 백인의 이주를 통해 아메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당시 그들에게 원주민이나 혼혈인, 즉 메스티소mestizo는 자신들과 같은 국가에 속한 동등한 국민이 아니었다. 따라서 멕시코 정부는 유럽계 백인 인구로 이루어진 미국인들의 정착과 그들의 목화 재배지 조성을 반겼다.
그러나 노예제로 인해 텍사스 주민과 멕시코 정부 간에 갈등이 촉발되었다. 신생 독립국인 멕시코는 1829년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한 반면, 당시 텍사스의 주요 산업인 목화 농업은 전적으로 흑인 노예노동력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7 멕시코 정부는 텍사스 지역으로의 추가적인 노예 유입을 금지하였지만, 텍사스의 백인 농장주들은 계속해서 흑인 노예들을 유입시켰다. 이는 북부 지역 식민화 정책에 대한 멕시코 정부의 태도 변화를 가져와, 1830년 멕시코 정부는 북부 지역에 백인계 인구의 유입을 금지하였다. 더 나아가, 기존에 정착한 백인계 인구에게 부여되던 특혜를 철회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에 텍사스에 정착한 미국계 백인들 사이에서 멕시코로부터 독립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임상래, 2011, 100).
텍사스 지역에서 반反멕시코 감정이 점점 높아져 1835년경 독립운동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1836년 3월 텍사스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텍사스의 독립 선언은 멕시코 중앙정부에게는 변방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이었다. 멕시코 연방정부는 산타안나AntonioLóezdeSantaAnna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정부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였다. 당시 텍사스 독립군과 멕시코 진압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가 그 유명한 알라모전투BattleoftheAlamo이다. 알라모전투는 멕시코 진압군이 승리하였으나, 연이은 하신토전투BattleofSanJacinto에서는 샘 휴스턴SamuelHouston 장군과 스티브 오스틴이 이끄는 텍사스 독립군이 승리하고 산타안나 장군이 포로로 붙잡혔다. 전쟁에 패한 멕시코는 「벨라스코 조약TreatyofVelasco」을 통해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멕시코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텍사스 주민들은 독립된 하나의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미국에 편입되고자 했다. 그러나 독립 이후 곧바로 미국으로 편입되지는 못하였다. 텍사스는 미국 연방 가입 의사를 미 행정부와 의회에 적극 알렸으나, 당시 미국의 잭슨AndrewJackson(1829~1837) 대통령은 텍사스의 편입을 유보하였다. 당시 미국은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국토의 팽창을 적극 도모하고 있었으나, 노예 폐지론자들은 노예제를 허용하던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될 경우 노예제 찬성 주의 비중이 높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이후에도 텍사스는 여러 차례 합병 의사를 밝혔고, 결국 독립 후 10년 가까이 지난 1845년에야 미국 의회가 텍사스 합병을 승인하였다.
텍사스가 미국에 합병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노예제도였으나, 영국도 텍사스의 미국 편입을 막으려 하였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영국은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전 세계의 국제 정세에 적극 개입하고 있었다. 영국은 텍사스가 독립하고 미국에 합병되기 전, 텍사스의 거취와 관련하여 멕시코에게 중재안을 제안하였다. 멕시코가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면 텍사스가 미국에 편입되는 것을 막아 주겠다고 한 것이다. 멕시코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벨라스코 조약」을 맺긴 했지만, 텍사스를 일개 반란 지역으로 폄훼하고 있었기에 영국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1845년 미국 의회가 텍사스 합병을 결의하자, 미국과도 단교하였다.
멕시코의 단교 조치에 대하여 미국은 멕시코와 텍사스 간의 국경을 문제 삼으며 기존의 국경선에서 240킬로미터 정도 서쪽에 위치한 리오그란데강을 국경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국경의 위치를 둘러싸고 미국과 멕시코 간에 잦은 교전이 이어졌고, 급기야 1846년 5월 13일 미국이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임상래, 2011, 102).
미-멕 전쟁과 국경의 형성
미국이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하자, 캘리포니아의 백인계 주민들도 멕시코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세 방향으로 전력을 배치하였다. 우선 전쟁의 주요 전장이었던 알라모를 비롯한 내륙 방향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곧장 멕시코 북부 몬테레이 방향으로 남하 진격하였다. 서쪽으로는 캘리포니아 쪽으로 군대를 배치하여 당시 멕시코 영토의 북부 지역을 점유하였다. 남쪽으로는 멕시코만을 가로질러 베라크루스Veracruz항을 통해 수도인 멕시코시티로 진격하였다.8
1847년 3월 멕시코만의 베라크루스항을 점령한 미군 병력은 5월 멕시코시티에 입성하고, 그해 9월 멕시코시티를 점령하였다. 멕시코 정부군은 케레타로Querétaro주까지 후퇴하였다. 1848년 이달고주 과달루페에서 멕시코와 미국 간에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yofGuadalupeHidalgo」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 조약으로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었던 산타안나는 멕시코 영토의 절반 이상인 200만 제곱킬로미터를 미국에게 판매하여야 했다(임상래, 2011, 102-103). 미국은 멕시코의 영토를 받는 대신에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농장주들에게 지불해야 할 전쟁배상금 1,500만 달러를 대신 지불해 주는 아량을 베풀었다. 산타안나 대통령은 1848년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의거하여 멕시코 북쪽 땅에 대한 주권을 1,800만 달러에 포기하였다.
그러나 양국 간의 영토가 최종적으로 확립된 것은, 1853년 「라 메시야 조약TheSaleofLaMesilla」에 의한 ‘개즈던 매입GasdenPurchase’9 이후이다. 멕시코는 약 7만 8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리오그란데강 유역의 영토를 940만 달러 가격에 미국에 판매하였다. 미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이전부터 이 지역까지의 영토를 원하였으나, 당시 멕시코는 해당 지역에 대한 이양을 거부하였다. 「라 메시야 조약」은 멕시코 산타안나 대통령의 적극적인 의사로 체결되었고, 그 배상금은 그의 개인적 치부에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다(CeruttiandGonzález-Quiroga, 1999, 14-16).
과거에는 국가 간 경계의 위치가 오늘날처럼 뚜렷하지 않았기에 정확한 수치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1848년 이전 멕시코는 4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과 개즈던 매입으로 멕시코는 200만 제곱킬로미터, 즉 한반도의 열 배 규모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당시 상실한 영토는 현재 미국의 애리조나·캘리포니아·네바다·뉴멕시코·텍사스·유타주 전체와 콜로라도·오클라호마·알칸소·네브라스카·와이오밍주의 일부이다. 그 결과, 양 국가 간에는 3,140여 킬로미터의 국경선이 형성되었다.
미-멕 전쟁으로 인한 국경선의 확정은 아메리카 대륙의 패권에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 이에 대해 임상래(2011)는, 미-멕 전쟁은 양 국가 간의 단순한 영토분쟁을 넘어, 미국이 ‘아메리카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승리한 사건이라고 평가하였다. 비록 독립 직후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었지만 당시 아메리카 대륙의 최강자였던 멕시코에게 신흥국 미국이 결정적 타격을 입히고 아메리카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사건이었다. 또한,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과 더불어 현재 미국의 면모를 갖추게 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되짚어 보면, 1823년 “아메리카의 일은 아메리카가 알아서 할 테니 유럽은 간섭하지 말라”던 미국 먼로 대통령의 ‘먼로독트린’10이 당시 아메리카 지역의 나머지 국가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녔을지는 의문이다. 비록 대부분의 국가가 막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시기이기도 했지만, 당시 미국의 위상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위상은 미-멕 전쟁 이후 매우 달라졌다. 무엇보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모두 아우르는, 대륙을 횡단하는 넓은 국토를 갖게 되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소위 본토 이외의 영토를 연이어 획득하였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하였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크림전쟁 이후 재정적으로 어려웠으며, 영국에 알래스카를 빈손으로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었다. 이에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2세는 미국 정부에 알래스카 매각 의사를 적극 타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알래스카 매입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알래스카라는 지역 자체가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그 당시만 해도 자원의 보고로서 알래스카의 가치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존슨AndrewJohnson(1865~1869) 대통령은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매입하였다.
1898년은 미국 영토 획득전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해였다. 우선 미국은 1888년에 진주만 기지를 설치했던 하와이를 1898년 미국 영토로 합병하였다.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의 전략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98년, 미국은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의 독립을 명분으로 미서전쟁을 일으켰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2018)에서 주인공 유진 초이가 참전했던 바로 그 전쟁이다. 결과는 미국의 승리였고, 쿠바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미국은 스페인이 소유하고 있던 식민지 중 카리브해 지역의 푸에르토리코를 미국령에 합병하고, 오세아니아 미크로네시아에 위치한 괌을 자치령으로 삼았으며,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필리핀은 식민지로 삼았다. 아메리카 대륙에 머물던 미국의 영토가 태평양, 오세아니아, 동남아시아로 서진하는 순간이었다.
이 경로는 포르투갈 탐험가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했던 경로와 유사하다. 괌과 필리핀은 16세기 초 마젤란이 태평양의 적도 해류를 따라 소위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경로에서 도착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식민지배로부터 쿠바인을 구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으로 치른 전쟁을 통해 미국은 이 지역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이 지역들은 오늘날 미국의 주요 군사기지들이 입지한, 말 그대로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부터 1898년 미서전쟁까지, 19세기는 미국에게 영토 확장의 세기였다.
멕시코를 위한 변辯
일반적으로 미국이 전 세계의 패권국가로서 공고히 올라선 시기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부터로 본다. 전쟁이 끝나고 전 세계가 브레턴우즈BrettonWoods 체제11로 들어서면서 대영제국의 시기가 저물고 새로운 미국 패권시대가 열렸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세기 전인 1846년, 미-멕 전쟁 발발 당시만 해도 미국은 세계 패권국가는커녕, 라틴아메리카의 신생국가들에 비해서도 그리 우월한 경제적·정치적 지위를 지닌 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은 이제 막 산업혁명을 시작하려던 참이었고, 대외무역은 영국으로의 면화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농업이 주요 산업인 변방 국가였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지금의 미 중부 지역에 프랑스 제국을 다시 세우고자 했던 것도 유럽 제국주의의 야욕에 더하여 미국의 경제적·정치적 위세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당시 멕시코의 영역은 스페인 제국이 중남미 식민지를 다스리고자 부왕령副王領(식민지를 몇 개로 나누어 국왕 대신 부왕이 통치한 영토)으로 설치한 누에바에스파냐의 중심부가 위치한 지역이었다. 즉,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제국의 지배 거점으로서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정치·경제·문화·사회의 중심지였다. 부유한 스페인령 식민지의 중심부를 대부분 아우른 멕시코는, 미국의 서부 지역에서부터 유카탄반도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국토와 인구가 속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번영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독립 이후 멕시코의 경제적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독립과 동시에 스페인 제국이 경영했던 은광 산업은 막을 내렸고, 스페인인들과 함께 스페인의 자본도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국가를 새로이 건설해야 할 신생 독립국 멕시코의 재정수입원은 관세뿐이었고, 그나마 무역의 쇠퇴로 해마다 줄어들었다. 당시 멕시코는 1826년 영국으로부터 빌린 차관의 이자조차 갚지 못하여 디폴트를 선언하였고, 이후 유럽 국가들로부터 더 이상 차관을 빌리기도 어려워졌다. 멕시코 정부는 당시 ‘아히오티스타agiotista’라 불린 대부업자들에게 고리의 대출을 받아야 했고, 이는 19세기 멕시코 정부 및 국가의 활동을 위축시킨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BautistaMorelos, 1964).
미국이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신생국가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 때문이었다. 미-멕 국경이 형성된 1848년은 멕시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의 정점이었다. 독립 이후 멕시코시티, 즉 중앙정부에서는 끊임없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스페인 제국 세력이 물러나고 생긴 권력 공백에 카우디요caudillo, 즉 지방 호족들이 끊임없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이 교체되었다. 1876년, 마침내 포르피리오 디아스ProfirioDíaz에 의해 정국이 안정되기까지 55년간 총 63번의 대통령이 교체되었고, 2명의 황제가 등극했다.12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도 과거 스페인 식민지의 핵심 지역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개입하고자 간섭과 침략을 이어 갔다. 심지어 멕시코를 식민지화하고자 했던 프랑스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막시밀리안 황제(1864~1867)를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미-멕 전쟁을 이끌었던 산타안나 대통령은 멕시코 역사상 가장 여러 번 대통령에 오른 인물로, 총 8번이나 대통령직에 올랐다. 또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멕시코의 운명을 결정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1829년 멕시코를 재점령하려는 스페인군이 침공했을 때 멕시코를 구하였고, 1836년 텍사스 독립을 놓고 미국과 치른 알라모전투에서 승리하였으며, 1838년 배상금을 요구하며 베라크루스를 침공한 프랑스에 맞서 다시 한 번 멕시코를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신토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혀 「벨라스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텍사스를 독립시키고,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서명하여 멕시코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미국에 빼앗긴 당사자이기도 하다(임상래, 2011, 100-101). 그는 훌륭한 군인으로서 미국, 프랑스 등 신생국가 멕시코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을 상대해 용감하게 싸웠지만, 멕시코 역사상 가장 무절제하고 고압적인 대통령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인권을 존중하고 강화한다는 내용을 헌법에 넣으려는 국회를 해산하고 자신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독재지향적인 헌법을 만들게 하였고(Prieto, 1906), 1840년 프랑스의 베라크루스 침공 시에는 부상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다리를 애도하는 공식적인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는 기행을 저지르기도 했다(JosephandHenderson, 2003, 213-216).
반면에 미국은 19세기 들어 루이지애나 매입으로 영토가 대거 확장되었고, 남부 지역에서는 목화 플랜테이션의 성장과 함께 외화 수입이 급증하였으며, 북부 지역에서는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멕시코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1848)을 체결한 직후에는 새롭게 미국 영토에 편입된 지역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소위 ‘골드러시’(서부 개척) 시대가 시작되었다. 멕시코 영토의 매입은 미국민들에게는 국토의 주요한 부분을 완성하는 역사적 순간이자 경제성장의 주요한 기점이었지만, 멕시코 국민에게는 국토의 절반을 잃어버린 치욕과 오욕의 사건이었다. 게다가 「벨라스코 조약」(1836)으로 미국에 양도한 지역에서도 대규모 금 광산이 발견되고 하루가 다르게 인구가 늘어나며 마을과 도시가 건설되는 것을 바라보는 멕시코 사람들의 심정은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들은 텍사스 독립군을 이끈 텍사스 탄생의 아버지 스티븐 오스틴과 샘 휴스턴의 이름을 딴 도시를 만들었지만, 멕시코인들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서명한 멕시코의 장군이자 최다선 대통령 산타안나를 원망하곤 한다. 우리에게 이완용이 있다면, 멕시코인들에게는 산타안나가 있다. 멕시코의 오랜 정치적 혼란을 끝낸 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1911년 망명길에 오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불쌍한 멕시코, 신은 멀리 있지만 미국은 바로 옆에 있구나.” 미-멕 전쟁은 이웃한 두 국가의 악연이 시작된 시작점이었다.
각주
1 ‘앵글로아메리카’는 미국·캐나다·그린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북아메리카 지역을, ‘라틴아메리카’는 멕시코·아르헨티나·브라질 등 북아메리카 남부에서 남아메리카로 이어지는 지역을 가리킨다.
2 US Beaurou of Economic Analysis(https://www.bea.gov/)
3 미국은 스페인이 식민지(1571~1898)로 소유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소유권을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시 러일전쟁 직후 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가로 떠오른 일본과의 협의가 필요했다.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소유하되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 양 국가 간의 조약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이다. 즉, 미국은 필리핀을 얻는 대신에 일본의 조선 침탈을 용인하였다.
4 스페인 식민지나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유입된 흑인 노예노동력은 비교적 적었다. 스페인 제국은 문화적 혼돈을 이유로 식민지로의 흑인 노예 유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또한, 스페인 왕실은 흑인 노예노동력을 수입하고 거래할 수 있는 권리, 즉 ‘아시엔토asiento’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상인들에게 판매하거나 대가성 선물로 사용하였다. 17세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무역은 네덜란드가 주도하였으며, 주요 노예무역 시장은 카리브해 지역에서 열렸다.
5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늦게까지 노예제도를 유지한 곳은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은 1871년 「자궁자유법Free Womb Law」을 발표하여 노예 어머니에게서 출생한 자녀는 자유민으로 규정하면서 노예제도를 폐지해 나갔고, 1888년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황녀 이자베우가 「황금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였다. 이로써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노예제가 완전히 폐지되었다.
6 멕시코를 비롯한 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공식적인 독립 연도는 1811년이나 실질적인 독립은 1821년에야 이루어졌다. 1811년은 멕시코의 이달고Miguel Hidalgo y Costilla 신부,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y Palacios 장군 등이 독립운동을 시작한 시기로, 이후 10년에 가까운 독립전쟁이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독립은 1821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으로 인한 스페인 왕실의 유실, 즉 식민지의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스페인 왕실의 부재로 이루어졌다.
7 1609년 20명의 흑인 노예가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유입되었지만, 북아메리카 지역은 흑인 노예의 주요 유입지가 아니었다. 당시 노예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게다가 영국 식민지로 유입되는 노예의 거래는 왕립아프리카회사Royal African Company of England가 주도하고 있어서 더 비쌌다. 1697년 노예무역에서의 독점이 철폐되고 여러 업체가 참여하면서 아프리카계 흑인 노예의 가격이 하락하였다. 이에 북아메리카 지역으로 유입되는 노예 인구가 급증하여 1700년 약 2만 5천 명에 달하였으며, 흑인 인구가 백인 인구보다 많은 지역도 있었다. 노예 가격의 하락과 자연증가로 인해 1760년경 북아메리카 지역의 흑인 인구는 25만 명에 달하였고 대부분이 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다(브링클리, 2005, 132-133).
8 베라크루스는 멕시코시티에서 300킬로미터 정도 동쪽으로 떨어져 있지만, 서쪽 태평양안의 아카풀코와 함께 오랫동안 멕시코시티의 전진 항구로 기능하였다. 1500년대 초반 정복자 코르테스Hernán Cortés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처음 베라크루스항으로 들어온 이래 베라크루스는 외부 세력이 중앙아메리카 대륙의 중심지인 멕시코시티로 진출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9 1853년에 현재 미국 애리조나주 남부와 뉴멕시코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구입한 사건. 당시 이곳이 남부 대륙횡단철도 건설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라는 주장과 이곳의 미국인 거주지를 보호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멕시코 주재 미국 공사 제임스 개즈던이 협상을 주도하였다. 미국 본토의 마지막 영토 확장이었다.
10 1823년 먼로 대통령이 제창한 외교 방침, 외교상의 불간섭주의.
11 1944년 7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체결된 브레턴우즈 협정에 따라 미국 뉴햄프셔주 휴양지인 브레턴우즈에서 발족한 국제 통화 체제.
12 포르피리오 디아스(1830~1915)는 멕시코의 독재자로 31년간 대통령직(1876~1880년, 1884~ 1911년)을 수행하였고, 이 시기를 ‘포르피리아또Porfiriato 시대’라 한다. 디아스 대통령의 통치는 카우디요 세력이 군웅할거하던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기를 끝내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근대화를 추진하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적극적인 외국자본 유치와 무역 증진을 통한 자유주의 경제정책, 광산 개발 및 상업농 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1차산업 중심의 산업화 정책, 철로망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간 접근성 증대 등 멕시코 근대 경제의 주요 근간이 이 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무분별하게 유럽식 계몽주의를 추구하며 오랜 기간 집권하여 국민의 반발을 샀다. 특히 외국계(주로 미국계) 토지 회사들을 끌어들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원주민과 소농들의 경작지를 빼앗고, 그중 약 3분의 1 정도를 외국계 회사에 토지 측량 대금으로 지급한 일은 멕시코혁명(1910)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11년 하야하여 독일로 망명하였다.
우리는 세계를 몇 개 지역으로 분류해서 이해한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남부아시아, 서부 유럽·동부 유럽·남부 유럽 등. 이러한 지역 분류는 대개 그 지역이 속한 대륙과 상대적 위치에 따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북아메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카리브해 지역이라는 분류 외에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역 분류를 자주 사용한다.
라틴아메리카LatinAmerica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멕 국경 이남의 지역을, 앵글로아메리카Anglo-America는 미국과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을 일컫는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라틴latin’은 라틴어를 가리킨다. 즉, 라틴어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를 주로 사용하는 이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자연스레 발생한 명칭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는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 학자들이 ‘억지로 만든’ 명칭이다.
미국과 캐나다가 속한 북아메리카는 일반적으로 앵글로아메리카라고도 불린다. 이 명칭도 이 지역이 앵글로 문화권인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금 미국의 중부와 서부 지역은 19세기 중반까지 스페인, 그리고 멕시코가 소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캐나다의 세인트로렌스강 지역과 미국의 미시시피강 유역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앵글로아메리카라고 하기엔 영국이 지배한 면적이 너무 적었다.
이 지점에서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유럽인들이 ‘비어 있던 아메리카’를 발견해서 식민지를 ‘개척’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는 몇 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침략했을 때 수도 테노치티틀란Tenochititlán의 인구는 20만에 가까웠다고 한다. 당시 전 세계에 그에 버금가는 인구를 가진 도시는 유럽의 파리, 명나라의 베이징 정도였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유럽은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도 그들 입장에서는 ‘발견’했지만, 식민지로 삼은 지역은 필리핀을 비롯해 일부 지역이었다. 더욱 상식적이지 않은 점은, 엄밀히 말해 스페인이 아메리카라는 대륙의 존재를 알기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 대부분은 스페인의 것이었다는 점이다.
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자연스레 아메리카 지역의 주인이 되었던 것일까? 이 장에서는 미-멕 경계에서 마주하고 있는 두 지역, 라틴아메리카와 앵글로아메리카가 형성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폴레옹, 라틴아메리카를 만들어 내다
1600년경 프랑스인들이 오늘날 앵글로아메리카라 불리는 지역에, 대서양에서 오대호로 유입되는 주요 하천인 세인트로렌스강을 따라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는 영국인의 진출보다 앞선 것이었다. ‘아카디아Acadie’라고 불린 프랑스의 지배 지역은 현재 캐나다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인 메인스트리트MainStreet 지역이 되었다. 현재 미국에 속하는, 미시시피강과 그 서부 지역을 아우르는 프랑스의 식민지는 프랑스 왕 ‘루이의 땅’, 루이지애나라 불렸다.
지금은 미국의 미시시피강 하류에 위치한 주의 이름이 된 루이지애나는 본래 미시시피강 유역을 모두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아카디아와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의 아메리카 식민지 ‘누벨 프랑스’를 이루었다. 1763년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분쟁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면서 미시시피강 본류의 동부는 영국이, 서부는 스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북아메리카 대륙에 프랑스 식민지를 재건하려 한 나폴레옹은 1800년, 스페인에게 이탈리아의 투스카니를 양도하는 대신에 루이지애나 서쪽 지역을 돌려받았다.
본래 루이지애나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 하운을 이용해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주로 하였다. 원주민들이 버팔로를 잡아 가죽을 벗겨서 말리면, 프랑스 상인들이 구입해 갔다. 영국인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원주민, 특히 유목을 하는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던 반면에, 프랑스인들은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프랑스인들은 미시시피강 하구에 항구도시 뉴올리언스를 건설하여 아메리카 대륙과 프랑스 간의 중개 무역지로 삼았다.1 이에 더하여 1697년 스페인과 「리즈위크 조약TreatyofRijswijk」을 맺고 획득한 히스파니올라섬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사를 지었다. 생도맹그Saint-Domingue라 불린 히스파니올라섬의 서부, 오늘날의 아이티 지역은 18세기에 사탕수수 농업을 주로 했는데, 당시 프랑스 전체 GDP의 약 20퍼센트를 생산하였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많은 부를 생산하는 이 섬을 ‘카리브해의 진주’라고 불렀다. 프랑스는 누벨 프랑스와 생도맹그 등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부를 얻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의 여파는 아메리카의 식민지에도 불어닥쳤다. 아이티에는 약 50만 명의 흑인 노예와 약 5천 명의 프랑스인, 그리고 약 1만 명의 혼혈인들이 살고 있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흑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지만 백인에 비해 차별 받는 존재였다. 혁명 정신의 영향을 받은 혼혈인들은 사회적 차별에 반발하며 1790년 봉기를 일으켰다. 이어 1791년 생도맹그의 흑인 노예들도 해방을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더하여, 1793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이자 영국군이 생도맹그를 침공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프랑스 정부는 흑인 노예들에게 정부군에 협조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면 자유민으로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하지만 흑인 노예들의 도움으로 영국군을 물리친 프랑스 정부는 노예해방을 미루며, 군대를 파견해 식민지배를 다시 공고히 하려 하였다. 생도맹그의 흑인과 혼혈인 인구는 격렬히 저항하며 해방과 독립을 요구하였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1804년 생도맹그는 흑인 공화국을 선포하며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새로운 국가의 이름은 ‘아이티Haiti’였다.
본래 나폴레옹 황제의 목표는 루이지애나와 뉴올리언스, 그리고 생도맹그를 연결하여 북아메리카 지역에 프랑스 식민제국을 새로이 건설하는 것이었다. 생도맹그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할 당시, 나폴레옹 황제는 유럽을 침공하여 제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전쟁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의 주요 수입원까지 잃어버린 프랑스는 재정적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 게다가 생도맹그는 북아메리카 식민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다. 생도맹그 없이는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만으로 식민제국을 구성하고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미국 정부에 루이지애나를 1,500만 달러에 매각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국은 즉각 매입에 응하였다. 루이지애나 매입을 계기로 미국은 동북부의 작은 국가에서 대륙 전체로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한편, 생도맹그를 독립시킨 데에 이어 루이지애나까지 매각함으로써 북아메리카의 프랑스령 식민지를 모두 잃어버리게 된 나폴레옹은 곧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에 아메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회복할 방안을 모색하였다. 당시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 학자들은 아메리카에서 주로 사용하는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자신들의 프랑스어와 같은 언어 계통, 즉 로망스어계라는 점에 착안하여, 고대 라틴어에서 유래한 언어를 같이 사용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었다. 이후 라틴아메리카에 속하지 않는 북아메리카의 두 국가에 대해서는 ‘앵글로아메리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다. 이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일종의 대구對句 개념이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앵글로아메리카 지역에서 영국이 식민지배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이었다. 오히려 스페인과 프랑스가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에, 앵글로아메리카라는 지명은 썩 적절하지는 않다.
라틴아메리카라는 명칭은 스페인에서 독립한 신흥 독립국들의 지배 세력이었던 크리오요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아메리카 지역에서 태어난 백인계 인구를 가리키는 크리오요 세력은, 스페인 본국에서 태어난 백인인 페닌술라르peninsulares에 비해 식민지배 기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식민지배 시절, 스페인의 국왕들은 스페인에서 태어난 이들(페닌술라르)이 스페인을 모국으로 여겨 충성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이들(크리오요)들은 아메리카를 모국으로 여겨 충성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페닌술라르에게는 무한한 권리와 제한된 의무만을 부여하였지만, 크리오요에게는 메스티소와 유사한 사회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였다. 마치 우리 통일신라 시대의 성골과 육두품처럼 말이다.
이러한 차별은 결국 식민지배 기간 동안 크리오요 세력이 스페인과 페닌술라르에 반감을 갖게 만들었고,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이 발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크리오요들은 기본적으로 매우 유럽지향적인 성향이었고, 당시 유럽의 중심 국가이던 프랑스가 라틴아메리카 개념으로 상호 간의 유대를 강조하자 이에 열광하였다. 1822년 먼로독트린에서 ‘라틴아메리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공식 사용되었다. 이후 라틴아메리카라는 지역 분류는 이 지역을 일컫는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지명에 새겨진 유럽 식민지배의 잔재
유럽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의 지명에 많은 흔적을 남겼다. 특히 식민 초기에는 새로운Nueva, New, Nouvel이라는 단어를 앞에 사용하거나 당시 재임하던 왕의 이름을 붙였다. 북아메리카 지역에 건설된 프랑스령 식민지, 즉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는 ‘새로운 프랑스’라는 의미로, 1534년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Cartier(1491~1557)가 캐나다 북동부 세인트로렌스강 지역을 탐험한 이후 건설되었다.
1682년에는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René-RobertCavelierdeLaSalle가 미시시피강 유역을 탐험한 이후 이 지역을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 ‘루이지애나’라 하였으며, 누벨 프랑스의 범위도 크게 확장되었다. 누벨 프랑스의 범위는 현재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미시시피강 유역을 거쳐 로키산맥 지역, 플로리다에 이를 만큼 광대했다. 그러나 1763년 프랑스가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패하면서 미시시피강 동쪽 지역을 영국에, 플로리다 지역은 스페인에 양도하면서 누벨 프랑스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다. 1803년 프랑스가 미국에 루이지애나를 매각할 당시, 루이지애나의 범위는 멕시코만 연안 지역부터 현재 캐나다의 앨버타, 서스캐치원의 일부 지역까지 이르렀으며 면적은 214만 7천 제곱킬로미터였다. 이 중 일부 지역은 1818년 미국과 영국 간의 국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영국령 캐나다로 편입되었다.
영국이 북아메리카에 영국 식민지 마을인 제임스타운Jamestown을 처음 설치한 것은 1607년으로, 당시 국왕은 제임스 1세였다. 그러나 1584년, 비록 실패하였지만 이 지역에 탐험대를 보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기려 이 지역을 버지니아라 하였다. 평생 미혼이었던 여왕의 별명이 ‘버진 퀸TheVirginQueen’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와 영국 외에 북아메리카에서 중요했던 또 다른 세력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매우 적은 규모의 식민지를 북아메리카의 북동부 지역에 건설하였다. 허드슨강 하구에 위치하여 유럽과의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에 건설된 이 항구의 이름은 ‘뉴암스테르담NewAmsterdam’이었다. 영국 식민지로 둘러싸였던 뉴암스테르담은 이후 영국에 양도되었으며, 이름을 ‘뉴욕NewYork’으로 바꾸었다.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비교적 적은 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