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손님이 바글바글 있는 미림문고. 왠지 모르게 직원들 얼굴에는 웃음과 평화로움이 걸려 있다.
강동경찰서 여성청소년과에 근무하는 아람은 작년 겨울 한 사건을 수사하면서 동인과 사귀는 건가 싶은 생각이 모호하게 들 정도로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아람은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서점에 근무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책, 특히 추리소설을 수천 권 독파한 동인은 그간 아람과 함께 종갓집 종부 실종사건과 교통사고로 위장한 살인사건, 북토크 음독사건, 물품을 이용한 사기 사건 등을 해결했다. ⟪서점 탐정 유동인-더 비기닝⟫ 참조
동인은 특유의 추리 지식과 행동력으로 아람의 수사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고, 아람은 차츰 그를 서점 탐정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하나 더, 둘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었다.
지난해 연말 아람은 동인에게 제대로 고백했고, 동인은 책보다 너의 냄새가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아직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이후로도 둘은 쭉 만났지만,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없었다. 아람이 사건을 자문하면 동인이 그걸 조사해 주고, 둘은 사건 이야기하느라 그렇게 시간이 갔다.
해가 바뀌고 2월 밸런타인데이에 아람은 예의상 동인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사실 직접 만들려고 해봤지만, 워낙 똥손이라 실패만 거듭하다가 그냥 유명하다는 외국산 초콜릿을 사서 주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동인이가 먹어보더니 맛이 그 맛이 아니라 해서 브랜드를 자세히 보니 이게 웬일!
이탈리아제가 아니라 제대로 국내산이었다. 이름이 ‘F’로 시작하는 게 너무도 흡사하고 디자인이 비슷해 다른 걸 집어 온 거였다. 일부러 신경 써서 골랐건만.
‘흠, 요즘은 만나면 당일에 손잡고, 3번째 키스 그리고 10번째 데이트는 음 그런다던데….’
돌이켜보니 둘은 너무도 많이 만나서 그날 처음 본 이성이 가장 끌린다는 법칙에 제대로 위반이었다.
‘하는 수 없지, 뭐. 에휴. 다시 친구로라도 만나야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자기 혼자 마음을 정리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인과 만났다. 그래도 선톡이 오느냐 안 오느냐는 연락 문제의 불균형으로 연인들이 많이 고민한다는데, 아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하고 선톡도 하고 그렇게 보면 꽤 괜찮은 친구 사이였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어느덧 가을, 아무리 연인인지 친구인지 모호한 사이라 해도 가을과 겨울은 커플이 아닌 사람에게 너무 시렸다.
아람은 동인을 잊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요즘 미림문고를 더 자주 왔다. 혹시라도 동인을 자주 보면, 식상해서 안 좋아하게 될까 봐.
그렇게 아람은 미림문고에 와 있었다.
서가 구석 거울처럼 반사되는 벽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평소에 입는 검은색 슬랙스 정장이 너무나 형사 같은, 보디가드 같은 딱딱한 느낌을 주어 동인과 거리가 멀어지나 하는 생각에 오늘은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진을 입었지만 역시나 활달하고 엄청 건강한 여자 형사 느낌은 살아 있었다. 포니테일 머리도 풀고 다니려 했지만, 치렁치렁한 게 귀찮아 역시 질끈 묶어버렸다.
형사로 경찰서에서 피의자가 조사에 협조를 잘 하지 않으면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며, ‘협조 잘해주십시오, 선생님.’이라고 말할 때의 얼굴은 역시 엄청난 포스와 파워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장점이 연애에 있어서는 단점이 되는 것도 같았다.
아, 나도 좀 여리여리한 청순파였으면 좋겠지만 이 혈기방장한 에너지는 어디로 가지도 않는다. 의리! 의리! 하고 외칠 것만 같은 기세다. 성형 시술이라도 받아야 하나 싶지만, 또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이었다.
혼자서 서점을 슬금슬금 돌아다니는데 저만치 점장님과 같이 서점으로 들어오는 동인이 보였다.
아람은 몸을 슬쩍 숨기고 잠복근무하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동인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외근을 다녀왔는지 주차장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점장님의 뒤를 따라오는 동인은 메모지를 주머니에서 빼 들고 점장님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었다. 며칠 만에 본 동인은 역시 멋졌다. 하얀 셔츠의 소매는 두 단을 곱게 접어서 팔을 드러냈고, 카키색 일자 팬츠를 입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이마의 반을 드러낸 따옴표 머리에 큰 키는 정말 아람을 심쿵하게 했다.
아람은 오른손으로 머리를 쳤다.
“정신 차려, 강아람. 너랑 쟤는 남사친 여사친도 아닌 그냥 친구야, 친구. 아무런 이성적 감정이나 호감을 느껴선 안 돼.”
자책하는 아람의 눈에 점장님이 들어왔다.
비혼인 40대 후반의 점장님은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구로 등허리는 꼿꼿하고 어깨는 반듯했다. 평소에 늘 조용하신 편으로 배우 정우성처럼 무척 고상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시선을 살짝 내려 주변을 보며 여유 있게 인사하는 모습이 무척 멋졌다. 귀 위로 살짝 새치가 보이는 것도 묘하게 지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아람은 점장을 뒤따르는 동인을 보았다. 그는 매의 눈으로 매장과 진열 평대를 관찰하면서 다녔다.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다 긁적이고, 성큼성큼 걸어 다니면서 책들을 체크했다.
아람은 씩 웃었다. 아까 평화롭던 직원들의 표정은 역시 수장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아람 자신도 사무실에 과장님이나 계장님이 자리를 비우면 얼굴에 웃음이 자동으로 걸렸다.
아, 그런데 역시 온갖 환한 조명에 화려한 예술적 책 표지들 사이에서 동인이는 너무도 빛난다.
확실히 밖에서 보면 그래도 좀 덜 멋지다고 느껴지는데 서점 홀에서는 역시다. 엄마를 돌이켜 봐도 집에서 그냥 있을 때 보면 뚱뚱하고 그냥 다른 엄마들처럼 평범한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서 작가로 북토크를 하는 사진들은 멋져 보인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할 때 빛난다. 그래서 매번 서점에서 동인이를 보니 계속 반하는 것이다.
아람이 망상에 빠져 홀로 멍하니 있는데, 동인이가 어느 틈에 등을 ‘탁’ 쳤다.
“하이, 강아람 형사님.”
“어, 유동인 탐정. 점장님과 어디 다녀와?”
“근처 로데오거리에서 코로나 거리두기 지침이 완화돼 오랜만에 거리 축제가 열렸잖아. 거기에 우리 서점이 부스도 참여해서 출판사 직원들도 나와서 같이 책 판매 중이야. 책 배달해주고 왔지.”
“그렇구나. 이따 가봐야겠네.”
“이따가 저녁에 와봐. 내가 가판대 마감해야 해. 가을은 책 판매가 비수기라 열심히 해야 한단다.”
“알았어. 시간 나면 도와줄게. 근데 원래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냐?”
“흠. 통설에 의하면 여름이나 겨울, 봄에 비해 도서 판매율이 줄어들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선배 마케터들한테 들었지.”
“글쿠나. 가을이 비수기라니, 새롭다. 근데 아까 톡으로 용건이 있다는 거는 뭐냐? 동인 탐정님아.”
“진짜 사건 의뢰 때문에 너한테 뭐 물어보려고.”
“왜? 무슨 일인데?”
동인은 아람과 같이 홀에서 사무실로 들어가 탕비실에서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나중에 말해줄게. 도서전 가판대 위치 좌표 줄 테니까 퇴근하고 거기서 보자.”
퇴근 후 아람은 거리 도서전 가판대에 도착해서 동인이 책을 판매하는 걸 돕고 마감을 한 후 가판대 정리를 도왔다. 행사 마지막 날이라 둘은 직원들과 함께 책과 집기들을 차량에 실어 서점 창고에 가져다 두고 나왔다.
그들은 ‘귀염 귀염’ 타코 가게에서 시그니처 메뉴인 나초를 아작아작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
“요즘은 우리 서점도 인터넷 서점과 중고 서점이랑 경쟁이야. 코로나 시대 이후 더 치열해졌어. 솔직히 작가나 출판사 입장에서는 중고 서점에서 나오는 이윤이 거의 안 돌아가니 좀 서운한 것도 있고.”
아람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나는 너희 서점에서 신간 사서 읽고 집이 작아 쟁여둘 데 없으니까, 올구스 서점에 팔거든.”
올디스 벗 구디스 중고 서점은 줄여서 올구스 서점이라고 많이들 불렀다.
“근데 팔 때 가격이 그 작가의 주식시세 같이 재미나더라. 인기 작가 책은 중고도 비싸게 쳐주더라고. 내 친구 중에 에세이 낸 애가 있는데 그 친구 책은 아직 신인이니까 좀 싸게 쳐주고 그러더라.”
“흐음. 사실 인터넷 서점 포인트가 높으면 책이 더 잘 팔리니까 다들 신경을 많이 쓰는데, 어떤 출판사는 다른 출판사 책이 궁금하긴 한데 괜하게 그 책 포인트 높이기는 싫으니까 꼭 오프 서점에서만 산대.”
“푸하하하. 그런 거 은근히 재미있다. 업계 사람들만 아는 이야기들.”
“재미가 전부는 아니야. 실은 낮에 가판대에서 싸움이 일어났었거든. 점장님과 같이 가서 중재했는데 책 사러 온 고객들끼리 싸움이 붙었더라고.”
“무슨 일인데?”
“표지족과 내용족 사이에 싸움이 난 거야. 한쪽은 표지, 그러니까 외모지상주의 즉 표지가 예뻐서 독자들이 고른다를 주장했고, 다른 쪽은 편집이 잘 되어 있고 목차가 잘 정리돼 있어야 고른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내용이 중요하다는 고객들이었지.”
동인의 말에 아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어? 그런 일들이 다 있어? 흠흠. 그러고 보니 나도 표지족인가 봐. 예쁜 표지에는 그냥 손이 슉 가던데.”
동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책이 탄생한 후부터 시작된 고민인데, 내가 볼 때는 말이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같은 고민이야. 솔직히 내가 독자들을 분석해 볼 때는 예쁜 표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도 책을 사는 목적이기는 한데, 내용족들은 그래도 로그 라인을 중요시하지. 줄거리나 혹은 이 책은 정말 어떤 처세에 필요하다는 한 줄 카피가 선택을 부르기도 하거든.”
“야, 그거 묘하게 디테일이 있다. 난 더 나가서 목차족인데 목차 보고 땡기면 구매, 아님. 로그 라인이 아무리 좋아도 안 낚임. 난 목차 떡밥이 딱이야.”
“MD로서 죽을 때까지 고민이 될 거야. 내용이냐? 표지냐 아님 목차냐.”
“내가 준 거 딱 줍네.”
“무슨 소리, 나도 목차 마니아야. 근데 저번에 어떤 고객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은 흔적이 보이는 책을 가져와서 목차는 맘에 드는데 책 내용이 맘에 안 든다고 반품 하신 고객이 있었어.”
아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책이 반품 가능해?”
“영수증 가져오고 파손 흔적 없으면 가능은 하지. 그런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그리고 만화책이나 래핑 된 거나 굿즈가 포함된 거는 굿즈가 훼손되면 당연히 반품 불가.”
“재미있다. 그런 거는? 띠지는? 그거 잘 찢어질 거 같아.”
“그래서 그거 때문에 곤란해. 띠지는 손 타면 찢어지기도 하는데, 그걸로 반품 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데 또 어떤 독자는 띠지가 있는 빈티지 책들을 찾아 소장하느라 발품 팔고. 한마디로 책의 소장 세계는 무한대의 아트 수준이야.”
“띠지 찢어진 그 책은 어떻게 한대?”
“다시 띠지 갈이 하는 거지 뭐. 비용이 한 권당 20원이라는 얘기를 출판사 사장님께 들었어.”
“그나저나 동인아, 너 추리작가는 언제 데뷔하냐? 작가가 되어야 책을 더 잘 이해할 것 같은데. 근데 아까 뭐 한다던 이야기가 이거야?”
“아니, 실은 오늘 좀 있다 모임 가는데 그때 들어 봐봐.”
“무슨 모임?”
“추리작가협회 운영진 모임.”
“엥? 그분들 어떻게 알아?”
“북토크 가봤다가 몇 분 뵈었어.”
“에헤. 협회 운영진이면 어르신들 아냐? 나 어르신들 힘든데. 경찰서에서도 윗분들 어려워.”
“내 소문 들었다면서 서점 탐정에게 부탁할 일이 있대. 근데 나 혼자서는 어려울지도 몰라서 네 도움 받으려고 같이 간다고 했지.”
“응? 추리작가라면서. 자기들이 풀지.”
“원래 자기 사건은 자기가 못 풀어. 객관적으로 들여다봐야 풀리지.”
아람과 동인은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인 카페로 갔다.
“반가워요, 어서 와요.”
추리작가협회 회장 등 운영진들이 앉아 있었다. 진중해 보이는 인상에 사각 테의 안경을 낀 중년 남성이 회장, 그 옆에 둥근 안경을 끼고 키가 큰 남자 부회장과 둥근 어깨에 살집이 있는 여자 부회장 등이 인사를 했다.
아람이 동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들 어째 체중이 좀 나가 보이시는데?”
“코난 도일이나 에도가와 란포를 생각해 봐. 작업실에서 내내 앉아서 글만 쓴다면 어찌 되겠어. 안락의자 탐정이 본인들 이야기인 거라면.”
“으흠, 그렇군.”
“저, 여기는 강동경찰서에서….”
“안녕하십니까. 강동서 여청과 강아람 형사입니다.”
“어머나, 어서 와요.”
형사라는 말에 다들 아람에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우리가 취재하려고 형사님들 종종 만나는데 이렇게 여자 형사님은 처음 뵈어요.”
“반갑습니다. 실은 추리작가협회에 마약수사과 형사님도 계세요. 경북청에 계시는 분입니다.”
아람의 인기는 급상승하고, 동인은 살짝 밀려난 분위기였다.
국내와 해외 추리소설 동향에 관해 이야기가 무르익고 아람은 부회장이 취재하면서 묻는 말에 답을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회장이 정중하게 화두를 꺼냈다.
“저 사실 유 대리님이 서점 탐정으로 소문나서 뵙자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하신다는 게….”
“이게 박태영 작가님이 실종된 지 오래됐는데 해결이 안 났거든요.”
동인은 아람에게 간략히 박태영 작가 이력에 관해 설명했다. 아람은 인터넷에서 박태영을 검색했다. 자그마한 눈에 둥근 안경, 온순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였다. 소심하게 보였고, 체구가 작았다.
박태영 추리작가는 2016년에 베스트셀러였던 추리소설 ⟪인간의 파멸일기⟫로 대히트를 친 작가라 했다. 아람도 들어본 적 있는 제목인 걸로 봐서 엄마 서가에 꽂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작가가 실종 상태라는 것이다.
이 책은 추리적 기법으로 사람들의 정신적 고뇌와 인간성의 상실에 관해 쓴 소설로 결말의 파격적 반전이 유명하댔다.
아람이 이야기 나누는 걸 듣다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경찰에 실종신고는 되어 있는 건가요?”
협회 회장이 답했다.
“물론이죠. 꽤 됐어요. 하지만 단서를 못 찾아서 우리도 나름대로 고민 많이 하고 발로 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종의 흔적을 실마리도 못 찾았습니다.”
협회 회장이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고뇌에 찬 얼굴로 말을 이었다.
“태영 선배 와이프가 그렇게 암 투병하다 가시지만 않았으면 이 자리도 그 선배가 하고, 지금도 후속작으로 대단한 작가로 조명받았을 텐데 아쉽죠.”
이번에는 여자 부회장이 말했다.
“대단한 필력이셨어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무너지고, 나중에 우리가 집에 찾아가 보니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작가님은 빈방 안에 망연자실 앉아 계셔서 너무나 놀랐잖아요. 어머니와 집을 합쳐 같이 사신단 얘기를 후에 들었고요.”
이번에는 남자 부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한 10개월인가 지나 실종됐다는 소식이 들렸죠. 실종만 안 됐어도 지금쯤 작품이 해외 번역도 되고 세계로 뻗어나갈 작가였는데. 후속작으로 부활일기, 생존일기 등등 기획한 작품이 꽤 많았는데 그렇게 사라지시고 지금 5년이 넘었어요. 어디에 살아는 계신 건지.”
협회 회장이 동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저희가 부탁드릴 의뢰는 작가님의 행방입니다. 저희가 사실 박태영 작가님 소재를 아무리 알아봐도 알 수 없어서요. 여기 형사님도 친구로 계시니 오늘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들이 아람과 동인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박 작가님을 찾아 주십시오.”
동인은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고 아람은 동인을 집에 태워주었다.
“에혀, 너 혹시 이 사건 해결해 주면 뭐 협회 가입시켜주고 그런 거 원하는 거 아냐?”
동인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럼 큰일 나. 협회 가입은 협회에서 발간하는 ⟪계간 미스터리⟫에 투고해 신인상을 받아야 가입할 수 있는 거야. 절대 네버 에버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으니 어디 가서 그런 말 말아라.”
“아, 알았어. 그나저나 실종 수사 그거 쉬운 거 아냐. 게다가 5년이나 지났으니까, 폰이나 메일 계정을 조사해도 흔적이 거의 없지. 게다가 형사인 나도 내가 맡은 사건만 사법 포털사이트에서 사건 관련해 검토할 수 있지 아무거나 함부로 열어볼 수는 없어. 다 열람 기록이 남으니까.”
“그럼 발품을 팔아야 한다는 거네. 사실은 박태영 작가의 작품을 낸 출판사 대표님을 알거든. 우리 서점에도 자주 오셔서 책 홍보도 하시고 북토크도 여시는 분인데 강마음 사장님이라고 그분도 박 작가님을 꼭 찾고 싶다는 거야. 후속작 원고도 받고 싶고, 어떻게 사는지 너무 궁금하대.”
“서점 탐정, 그럼 우리 한번 의기투합해서 박태영 작가님 찾아볼까? 가족은 계셔?”
“아까 들은 대로 작가님 부인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살아계셔. 같이 가보자. 강마음 사장님하고 약속 잡아볼게. 작가님 어머니와 가끔 연락하신대.”
“알았어.”
아람은 강동경찰서로 돌아와 실종자 찾기 사이트 등에 들어가서 박태영을 검색했다. 페이스북에 장기실종자 찾기 센터로 들어가 보니, 5년 전 전단을 복원한 포스팅이 있었다.
실종될 당시의 사진도 있었는데 지금 아람의 나이와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 않는데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성명 : 박태영
실종 당시 나이 : 40세 (현재 나이 45세)
실종 시간 장소 : 2017년 4월 20일 서울 중구 명동 지역으로 추정.
신체 특징 : 얼굴은 갸름한 편이며 175센티미터 키에 날씬한 체형으로 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낙담하던 중 소설 취재한다며 명동 방면으로 나간다고 했는데 돌아오지 않음.
일요일에 만난 강마음 사장은 40대라고는 하지만, 무척 날렵한 체구여서 젊어 보였고 인상도 좋았다.
“그러니까 작가님이 저랑 동갑이었거든요. 제가 무턱대고 찾아가 만났죠.”
강마음이 운전하는 차에 아람과 동인이 올라타고 박태영 작가의 모친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저는 1인 출판사 대표였고 박태영 작가는 회사원으로 소설 등단을 한 신인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작품이 히트해서 전업 작가로 돌아섰고, 막 떠오르는 작가였죠. 제가 먼저 연락해서 우리 출판사에 원고를 좀 주십사 간청을 드렸습니다. 솔직히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다음날 진심이 느껴진다면서 원고 계약하실 의사를 밝혔거든요.”
동인이 맞장구쳤다.
“그게 바로 그해 추리문학대상을 받은 ⟪인간의 파멸일기⟫ 맞죠?”
“네. 맞습니다. 초대박이 나서 저희 출판사 직원도 책 분야별로 뽑을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은인 같은 작가님이죠.”
강마음 사장이 운전해 간 곳은 곧 재개발이 들어간다고 소문난 대단지 저층 아파트였다. 이사 나간 집들의 쓰레기로 가득한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로 천천히 걸어갔다.
201동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한 할머니가 다 죽어가는 관음죽을 화분에서 낑낑대며 삽으로 후벼 파내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동인이 화분을 들려고 하는 할머니에게 물어보는데 강마음 사장이 놀란 기색으로 인사했다.
“박태영 작가님 어머니 되시죠? 저 기억하시죠? 지난번에 찾아온 강 사장입니다.”
“어머나, 사장님 이렇게 오셨네요? 기억나죠. 암요.”
“어머니, 뭐 하시는 중이셨어요?”
“화분의 화초가 다 죽어가서 여기 심어 놓으려고요.”
동인과 아람이 화분에서 관음죽을 파내서 화단에 옮겨 심는 걸 도왔다. 이때 저만치서 폐지가 가득한 리어카를 전동기 휠체어에 연결한 노파가 다가와 화를 버럭 냈다.
“아니, 이 여편네야. 그렇게 관리사무소에서 화분 쓰레기 그만 내다 버리라 하는데 또 옮겨 심어?”
“이거 죽은 거 아니야. 우리 태영이가 좋아하던 화초야. 오래된 건데 갑자기 시들시들해져서 해를 좀 보게 하려고.”
“아이고, 언제까지 아들 타령이야. 저번에도 누가 화초 화단에 옮겨 심은 거 훔쳐 갔다고 방방 뛰더구먼. 그거 경비원 아저씨들이 캐내서 내다 버린 거야. 다 죽은 거라서. 그러니까 이 짓 좀 그만 혀! 어이구 참나. 망령도 제대로야.”
박태영의 어머니는 풀죽은 얼굴로 다시 화분에 관음죽을 옮겨 심었다. 화분은 동인과 강마음이 들고 3층으로 이동했다. 아람은 이 무거운 화분을 노모가 어떻게 들고 내려오셨을지 생각하며 아들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느껴졌다.
아람은 다리를 저는 어머니를 팔짱 껴 부축하고 3층으로 올라갔다. 박태영 작가의 모친인 유명숙이 뜨겁게 우린 홍차를 내왔다. 버터링 쿠키도 가져왔는데 담긴 접시가 고급스러웠다.
강마음과 유명숙이 일상적 대화를 나누는 사이 아람과 동인은 잠자코 있었다.
유명숙이 동인과 아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차린 건 없지만 좀 드세요들. 사장님, 혹시 우리 태영이 연락은 왔나요?”
강마음이 조심스레 고개를 저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람은 유명숙을 슬그머니 살피면서 그녀의 건강에 문제가 있나 유심히 보았다. 실종자 가족 중에는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노인들이 제법 있어서 아람은 그런 부분에 있어 잘 판별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안 보셔도 돼요. 아직은 멀쩡해요. 인지능력 검사에서 경계에 있지만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어머니. 제가 직업이 여성청소년과 형사여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람은 머쓱해져 머리를 조아렸다.
“집에서 아무리 물을 주고 거름을 줘도 이파리가 시들한 게 뿌리가 썩어 그런가 싶어, 일단 통풍이 잘되는 바깥 화단으로 옮겼죠. 근데 그걸 또 파가는 사람이 있으니, 원. 그렇게 먹고 살기 힘든가?”
아람은 아까 경비원이 버린다고 했는데, 뭔가 싶었다. 유명숙이 고령에 혼자 사시다 보니 건망증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아람은 여청과 일을 보면서 위태로운 독거 어르신들을 많이 접했는데 그때마다 주민센터 복지과에 잘 들여다봐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동인이 살갑게 말했다.
“누군가 더 잘 키우려고 가져갔나 보죠. 심려치 마세요, 어머니.”
“꼭 우리 태영이 젊을 적 모습 같네. 누구세요?”
“저는 박태영 작가님 책을 파는 서점 직원입니다. 탐정으로도 종종 일합니다.”
“그렇구나…, 흐흑. 태영이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며요. 어디 가서 뭐 먹고 사는지, 춥지는 않은지, 어디서 잠을 자는지. 형사님, 우리 태영이 찾을 수 있을까요? 흐흑….”
유명숙이 한동안 흐느끼더니 눈물을 훔치고 쿠키를 권했다.
“어머니, 이분들이 박태영 작가님 찾으러 나선 분들이세요. 여청과 형사님하고 추리를 잘하시는 탐정이시니 누구보다 작가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작가님이 어떻게 실종된 건지 듣고 싶대요.”
유명숙은 천천히 실타래를 풀듯이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5년 전, 박태영은 작가로서 입지가 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바쁘게 살았는데 아내 이서정이 갑작스레 말기 췌장암 판정받고 투병을 하다 6개월 만에 숨졌다고 했다.
박태영은 아내와 정이 각별했고, 종종 여러 작품에서 아내를 모델로 소설을 썼댔다. 그런 아내가 죽자, 정신이 흔들렸고 글을 쓰는 일도 그만두고는 방에서 두문불출하다가 어느 날 소설 취재를 한다며 집을 나갔다 그대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 며느리가 그렇게 가고 나서 태영이는 살던 집을 정리하고 그 돈을 나한테 줬어요. 그 후로는 이 집에 들어와 저기 구석방을 썼어요. 서정이의 물건이 있는 같이 살았던 정든 집에서 도저히 살기가 힘들다고 하더군요.”
“방에 들어가 봐도 될까요?”
동인의 제안에 유명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로 꾸며진 방으로 들어가자, 박태영의 물건으로 보이는 책들과 컴퓨터 그리고 침대가 그대로 있었다.
동인이 컴퓨터를 켜보았지만,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린 컴퓨터는 부팅이 되지 않았다.
아람은 강마음과 서가를 훑었다.
“어 여기 있다. ⟪인간의 파멸일기⟫ 이거 무슨 내용이에요? 제가 아직 안 읽어봐서요.”
아람의 질문에 강마음이 대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한 여성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 간에 얽힌 범죄에 휘말리고 나락까지 떨어지지만, 형사의 도움으로 새 출발을 한다는 내용이죠. 휴머니즘적 주제 의식에 본격적 추리 요소도 있어서 호평을 받고 영화로도 제작되고, 한마디로 히트했죠.”
동인이 다가왔다.
“사장님. 이게 실화 르포소설인가요? 예전에 추리 작법 강연 들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그런 말도 있었는데,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 나오는 여자 주인공은 아내를 모티프로 썼다는 소문이 있었죠. 실제 묘사도 그렇고 영화에 나오는 배우도 아내와 무척 닮았어요. 전에 제가 물어본 적 있었는데 작가님은 말하기 곤란하다면서 정확하게는 말씀 안 하시고 모든 건 창작이라고만 했죠.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예요.”
“그렇군요. 말씀을 아끼시는 분인가 봐요. 그렇다면 신작 취재하려다 사라지신 건데, 무슨 작품을 쓰려고 하셨나요?”
강마음이 아람의 물음에 대답했다.
“신작 소설은 ⟪인간의 파멸일기⟫에 나오는 형사 시리즈로 갈 예정이었는데 여자 주인공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고 시작한대서 저는 그간 흔들리던 박 작가님이 재기하는 건가 해서 반가웠죠. 차기작은 ⟪인간의 부활일기⟫를 가제로 했는데 그만 이렇게 됐죠.”
그날은 그렇게 1차 조사를 마쳤다. 강마음 사장의 차에 아람과 동인이 탔다. 그들은 다음번 만날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아람이 동인을 만나러 가는 중에 톡이 왔다.
아람 아람, 이거 따봉 눌러주고
댓글 좀 달아줘.
이게 뭔데?
포털사이트 웹 소설 미스터리 부문
연재인데, 댓글 수나 따봉 수로 랭
킹이 매겨져.
너 뭐 추리작가협회 발간 잡지로
등단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건 나중에 공모에 낼 거고 이건
매일 연재하는 미스터리 웹 소설
형식인데, 부탁한다.
그리고 좀 있다 주소 찍어줄게. 그
리로 와.
여간해서 이런 부탁은 거의 없던 동인이 원하는 거라 아람은 당장 아이디를 만들어서 회차별로 댓글을 달고, 따봉도 눌러주었다. 댓글도 거의 없고 랭킹도 뒤로 밀려 있어 언제 작가가 되나, 걱정만 될 뿐이었다.
‘희망 고문 아냐? 아예 관심을 안 줘야 이걸 멈추려나.’
아람의 입가에 미소가 배시시 떠올랐다. 동인이가 이런 데 열을 올리는 게 신기하고 웃겼다. 자칭 서점 탐정이라고 도도하게 구는 동인이가 말이다.
톡으로 보내준 주소에 도착했더니 저만치 동인이가 나와 있었다. 택시를 타고 15분 전에 도착했다고 했다. 잠실나루역에 있는 대형 헌책방이었다. 은색 돔 형태의 지붕 아래 헌책이 10만 권 정도 비치돼 있다고 소문난 곳이다.
“야, 유동인.”
“아람아, 마침 잘 왔어. 나 좀 도와줘. 우리가 찾을 책이 있어. 여기가 아직 정식 오픈 전이라 책 배치가 끝나지 않아서 우리가 직접 찾아봐야 해.”
“아니, 정말 이 책이 여기 있다면 왜 강마음 사장님은 출간된 걸 몰라?”
“그게 좀 이상하긴 한데 지난번 만남 이후 본사 선배한테 박태영 작가가 실종된 사실을 잘 알 만한 사람을 좀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어. 알려준 몇 분과 전화해보니 전설의 북 셀러셨던 한진선 부장님이라고 있는데 작가님이 그분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그런 분이 계셔? 근데 왜 전설의 북 셀러야?”
“미림문고 각 지점에 공무원처럼 4년씩 근무하셨는데 그분이 근무하던 지점은 매번 재직 기간 동안 대박이 났다는 전설 같은 일화가 존재하고 있지.”
“그만큼 실적이 좋다는 거네? 가는 곳마다. 신기하다. 너도 좀 그렇게 됐으면 합니다만.”
“노력해야지. 한 부장님은 비혼으로 평생 북 셀러에 몸 바쳐 일하시다 명예퇴직하셨는데, 그분을 모델로 박태영 작가님이 소설을 쓴 게 있대. 실종 직전에.”
“말도 안 돼. 그게 그럼 우리가 찾는 책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렇다니까. 박태영 작가님이 실종 후에 썼다는 책을 찾는 거야. 그 책을 찾는 게 목표야.”
아람이 동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근데 여기서 어떻게 찾아. 검색 같은 거 없어?”
“없어. 아직 가 오픈이고 리스트를 만드는 중이라서 문학과 소설 파트에서 일일이 박태영이라는 작가 이름을 찾으면 돼. 다행히 가나다순으로 제목이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문제지. 제목은 가나다순이지만 작가는 다 섞여 있잖아. 작품 제목도 모른다면서.”
“하나하나 발품 파는 게 형사 일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야! 소설만 해도 족히 만 권은 넘어 보인다. 발품이 아니라 손품을 만 권이나! 어떻게 팔아. 제목을 모르니 더 답답하지. 그나저나 좀 이상한데. 아내가 죽고 다른 사람을 모델로 소설을 썼다고? 혹시 여자분이야? 한 부장님 말이야.”
“응.”
“그럼 저번에 강마음 사장님이 말씀하셨던 박 작가님 후속작 쓰려던 거 제목이 뭐였더라? 무슨 일기라고 했던 거 같은데?”
동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얼른 이응 파트로 달려갔고 그 뒤를 아람도 따라 달렸다.
“⟪인간의 부활일기⟫, 찾았다! 작가 이름 박태영 맞아!”
아람과 동인은 카운터로 가서 계산하려 했지만, 아직 가 오픈 상태라 판매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물러날 동인이 아니었다. 통사정해서 일단 값을 치르고 나중에 문제가 있을 시에 가져온다고 했다.
책은 대략 5, 6년 정도 되어 보였지만 색이 바래지도 않았고 어디 한 곳이 찍히지도 않은 그야말로 깨끗한 새 책 상태였다. 표지는 오톨도톨한 질감이 나는 종이에 광택이 빛났고 먹색의 제목이 찍혀있었다. 제목 부분이 미세하게 눌려 있는 것이 손으로 만져졌다. 표지 그림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가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대박! 이거 박태영 작가가 후속작으로 내려고 했던 책 아냐? 그런데 이렇게 이미 출간이 되어 있다고?”
“줘봐, 판권 페이지 좀 보게.”
동인은 책 맨 뒤의 판권 페이지를 펼쳤다. 출판사와 발간 날짜는 없고 지은이만 박태영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 아래에 있어야 할 ISBN이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책에는 ISBN, 그러니까 국제표준도서번호를 따서 바코드를 붙여야 서점에서 인식할 수 있거든. 여긴 그런 번호가 없어. ISBN이 없으니까 이건 독립출판물로 봐야 하고 독립서점을 통해서 유통이 가능할 거야. 그러니 강마음 사장님도 출간된 걸 모르고 있었겠네.”
“박 작가가 이 책을 쓰고 독립출판을 했다니. 일단 내가 먼저 읽어보고 너한테 넘길게.”
책을 펼쳐서 책장을 호로록 넘기던 아람이 소리쳤다.
“어? 근데 여기 뒤쪽이 잘렸는데? 여기 봐봐. 동인아.”
아람이 책 뒷부분을 펼치자, 벼린 칼로 잘려 나간 흔적이 드러났다.
동인은 어깨에 메고 다니던 자기 가방에서 ⟪인간의 파멸일기⟫를 꺼냈다.
“여기 1부 파멸일기 책은 정확하게 305페이지, 보통 후속 시리즈를 1권과 페이지 수를 얼추 맞추는 관행에 비추어 보면 정확하게 280페이지부터 더 이상 없으니까 한 20페이지가량 잘려 나간 거야. 결말이 사라졌어.”
“그렇네. 진짜 그렇다. 왜 뒤 페이지를 자른 걸까?”
“흐음.”
동인은 뭔가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주차장으로 갔다. 아람이 차에 올라타면서 물었다.
“이상한 거 또 있어. 인터넷에 이 책 쳐보면 아무것도 안 나오는데?”
“그래서 여기를 온 거야. 여기는 유통이 안 된 독립출판 책들도 있을 법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책이 출간되면 웹상에서 독립출판물 홍보는 했을 거 아니야?”
아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