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꿰뚫은 사람들,
킹메이커
항우項羽는 범증范增(서기전 278~서기전 204)을 아보亞父라고 불렀다. 아버지에 버금가는 존재란 뜻이다. 항우가 범증을 좀 더 잘 활용했으면 《초한지楚漢志》의 결말이 뒤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항우는 개인적인 역량과 집안 배경, 군사적인 능력 그 모든 면에서 유방劉邦보다 앞섰다. 항우의 군사가 40만 명일 때 유방의 군사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바로 그때 범증은 유방을 제거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100명의 기병들만 이끌고 홍문연鴻門宴에 온 유방의 운명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위기에 빠진 유방은 장량張良의 계책에 따라 항우의 숙부 항백項伯을 끌어들였다. 항우는 눈치를 보느라 범증의 재촉에도 유방을 제거하지 못했다. 범증은 항우의 종제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는 척 하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다시 지시했으나 이마저도 항백의 방해로 실패했다. 끝내 유방이 도주하자 범증은 유방이 준 옥두玉斗를 부수면서 말했다.
“오호라! 어린아이와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항왕項王(항우)의 천하를 빼앗을 자는 반드시 패공沛公(유방)일 것이다. 우리 족속은 지금부터 패공의 포로가 될 것이다.”
초한대전楚漢大戰은 범증의 예견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범증을 제거해야 천하를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한 유방은 진평陳平의 계책에 따른 반간계反間計로 항우와 범증을 갈라놓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진 항우는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 …… 우虞여! 우여!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라는 유명한 시를 읊조리다 죽어가야 했다.
유방이 항우보다 뛰어났던 것은 참모 영입과 그 활용 능력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차이가 천하의 패자가 뒤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그만큼 참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중국사는 일종의 참모사다. 그런데 이런 참모사의 주역들은 보통 참모들이 아니었다. 항우조차도 한때 범증을 아보로 높인 것처럼 ‘스승 사師’ 자가 붙는 왕사王師이고 ‘나라 국國’ 자가 붙는 국사國師들이다. 그래서 중국사는 왕사사王師史 또는 국사사國師史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다른 점 중 하나는 참모사와 군주사다. 중국사는 참모사인데 비해 한국사는 장사長史, 즉 군주사라는 말이다. 장사는 수직으로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급전 낙하하기 일쑤다. 가까운 현대사만 보더라도 정상 부근까지 날아갔다가 추락한 예가 수도 없이 많다. 그 원인은 여럿이겠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는 ‘스승 사’ 자로 높이는 참모가 없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長 혼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한다. 그러니 자신의 날개가 밀랍으로 붙인 깃털인지도 모르고 태양 가까이 날다가 밀랍이 녹아 떨어져 죽는 이카로스의 사례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럼 왜 한국사의 장들은 참모들을 활용하지 못할까? 먼저 자신이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참모들이 자신의 지위를 빼앗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참모가 군주보다 뛰어난 경우는 많다. 그러나 하늘은 참모보다 부족한 장에게 천명을 내린다. 그래서 장은 장이고 참모는 참모가 되는 것이다.
참모는 군주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존재다. 장이 자신보다 부족한 듯 여겨서 그 자신이 장이 되려고 하는 순간 비극은 발생한다. 한국사에서 이런 이치를 정확하게 깨달은 인물이 정도전鄭道傳이었다. 정도전은 취중에 종종 “한漢 고조高祖(유방)가 장자방張子房(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태조실록太祖實錄》은 전한다.
정도전은 이성계李成桂를 천명 받은 존재로 만들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들었던 존재였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이성계를 개국 군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머리를 빌려야 자신이 개국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와 정도전은 한국사에서 그리 흔치 않게 보이는 군주와 참모의 전형이다.
참모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는 후계과정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이다. 정도전도 이 문제를 잘못 다룬 결과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장량은 달랐다. 고조 유방이 태자를 갈아치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안 황후 여후呂后는 장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량은 자신 역량 밖의 일이라면서 대신 태자 곁에 동원공東園公 등 네 명의 은자隱者를 두라고 권고했다. 그 결과 태자는 위기를 극복하고 혜제惠帝로 즉위했고, 장량도 고종명할 수 있었다.
왕사나 국사는 단순한 책사策士가 가질 수 있는 칭호가 아니다. 진평이 유방을 구한 횟수는 장량보다 훨씬 많지만 장량을 왕사로 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장량이 노선을 갖고 있던 왕사라면, 진평은 눈 앞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책사策士이기 때문이다.
참모사의 관점으로 한국사를 서술해보려는 생각은 꽤 오래되었다. 한국사를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크게 킹메이커와 왕을 보좌한 참모들로 나눌 수 있다. 킹메이커는 자신이 선택한 인물을 통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은 지금도 많지만 실현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정도전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에 능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역사를 바꾼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주류였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모든 역사는 비주류가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도전은 물론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의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도 당대에는 비주류였다. 유비劉備가 일개 농사꾼에 불과했던 제갈량諸葛亮의 초옥草屋을 세 번이나 찾아갔던 것 역시 그가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없었던들 유비는 천하 제패는 물론 촉왕蜀王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천하를 셋으로 나눈 후 척박한 촉의 땅이라도 차지해서 왕 노릇하자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내놓는 덕분에 유비는 촉왕이라도 될 수 있었다. 유비와 제갈량에게 부여한 시대의 역할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이따금 비주류들은 역사를 바꾼다. 때로는 김유신처럼 무력으로, 때로는 정도전처럼 사상으로, 때로는 소서노召西奴나 천추태후千秋太后처럼 노선으로 역사를 바꾼다. 인수대비仁粹大妃처럼 자신과 가문을 위해 킹메이커로 나섰다가 불행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천하의 향배가 정해졌다고 참모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수성守成도 창업 못지않게 어렵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수성기의 군주들은 체제에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평범한 군주들은 인재 발탁을 게을리한다. 자신의 귀에 쓴 소리를 하는 충신은 멀리하고 단 소리만 하는 아첨꾼을 중용한다. 조선 전기의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이나 후기의 정조正祖가 성공한 임금이 될 수 있었던 주요인은 인재 발탁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황희黃喜는 뛰어난 군주 밑에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행운의 사람이었다. 김종서金宗瑞도 뛰어난 군주 덕에 문신으로 출발해 장군의 역할까지 했던 인물인데, 이미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옥당, 2010)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생략했다.
가장 처신이 어려운 경우가 암군暗君, 즉 혼군昏君을 만났을 때다. 이런 혼군 밑에서도 시대를 버릴 수 없는 것은 임금보다 나라와 백성들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최악의 군주 밑에서 최선의 성과를 거두었던 인물이 유성룡柳成龍인데, 이 역시 《난세의 혁신리더 유성룡》(역사의아침, 2012)에서 이미 다루었기에 포함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는 보통의 군주 밑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참모들이 있다. 김육金堉이 이런 경우인데 특이한 것은 대동법이란 정책으로 군주를 보좌했다는 점이다. 효종孝宗이 재위 7년(1656), “김육의 고집스러운 병통은 죽은 후에야 그칠 것이므로 (대동법에 대해서) 흔들릴 리가 없을 것이다(《효종실록孝宗實錄》 7년 9월 25일)”라고 고개를 흔들 정도 그는 대동법 시행에 정치 생명을 걸었던 재상이었다. 김육의 그런 고집이 있었기에 사후 현종 11~12년(1670~1671)에 있었던 경신庚辛대기근 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때로 참모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진정한 참모는 독배毒杯도 기꺼이 들이마시는 인물이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데올로기가 압도하던 시절 악역을 감내했던 인물이 강홍립姜弘立이다. 조명군助明軍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던 강홍립은 명나라가 이미 청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그 후 진행된 역사는 강홍립의 판단이 맞았음을 말해주지만 숭명반청이 지배하던 현실은 그를 매도해왔다. 이런 강홍립의 행적을 이제는 재평가할 때가 되었다.
조선 전기가 역동적이었던 것은 이념형 참모 못지않게 실무형 참모, 즉 기술 참모도 중용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한미한 출신으로 고위직, 심지어 판서까지 올라간 참모들이 있었다. 장영실蔣英實과 박자청朴子靑이 그런 경우인데 장영실은 그간 많이 다루어졌기에 이 책에서는 박자청을 다루었다. 정도전이 한양 도읍의 설계자라면 박자청은 그 건축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역사 유적 곳곳에는 아직도 박자청의 손때가 묻어 있건만 그간 소홀히 다루어졌던 것 또한 그가 한미한 가문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국영洪國榮은 정조의 즉위에 큰 공을 세웠지만 자신의 역할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정조시대의 방향키를 그릇 잡았고 왕위계승문제에도 과도하게 개입했다. 그런 이유로 결국 자신의 몸도 불행해지고 역사에서도 버려졌다. 역린逆鱗은 군주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만 건드려야 하는 법이다.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 중에는 이전에 다른 책이나 잡지 등에 일부 언급했던 인물들도 있다. 이런 인물들도 모두 다시 쓰거나 사료를 대조해 새로운 내용들을 보충하려고 노력했다.
역사를 공부하는 장점, 즉 후대인이 전대인을 바라보는 장점은 일의 시작과 과정, 결말까지 모두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역사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되기에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동국통감東國通鑑》처럼 역사서에는 ‘거울 감鑑’ 자를 자주 쓴다. 앞선 수레바퀴라는 뜻의 전철前轍이 역사의 이칭異稱으로 사용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러나 앞의 수레가 잘못된 길을 가다가 거꾸러지는 것을 보고도 다시 그 길로 가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사다. 왜 그럴까? 아마도 욕심이나 오만이 인간의 눈을 가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신은 물론 세상에 대해서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더욱 역사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겸허하게 성찰하는 자에게만 역사는 미래의 문을 살짝 열어주기 때문이다. 역사서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날고 기는 사람들이 거꾸러진 사례를 나열해놓은 책이기도 하다. 책을 쓸 때 나 자신의 해석은 비교적 자제하는 편이지만 이 책에서는 일부 해석을 사족으로 달았다. 현재 사회의 바람직한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의 소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3년 7월
천고遷固 이덕일 기記
김유신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비주류들이다. 하지만 비주류들이 세상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주류는 강고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류가 실력이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아니라 카르텔Kartell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그 지점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비주류가 바꾼 세상은 두 종류로 귀착된다. 하나는 단순히 주류가 비주류로 교체되는 경우다. 비주류는 자신들의 인생은 바꾸는 데 성공하지만 세상은 그대로다. 다른 하나는 주류도 교체하고 세상도 바꾸는 경우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그런 경우였다. 신라 진골사회의 비주류였던 두 사람이 결합해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고 신라의 운명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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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삼국통일 5년 후인 673년 세상을 떠났다. 만으로 78세였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다. 그때는 문무왕文武王 13년(673)이었는데, 문무왕은 자신의 여동생 문희文姬가 낳은 조카였다. 지금도 김유신의 어떤 후손들은 김유신을 장군이라고 칭하면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김유신은 사망 162년이 지난 흥덕왕興德王 재위 10년(835)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흥무대왕 김유신’이라고 칭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진성여왕眞聖女王이 각간 위홍魏弘을 혜성惠成대왕으로 추시한 경우는 있지만, 왕의 부친이 아닌 인신人臣으로서 대왕에 추존된 특이한 사례다.
김유신은 왕이 아니라 킹메이커였다. 그러나 단순한 킹메이커가 아니라 나라까지 바꾸고 역사까지 바꾼 인물이었다. 어찌 보면 그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과정이 신라를 새롭게 변화시킨 과정이자 결과였다.
왕 이상의 능력을 가졌으면서도 왕이 아니라 킹메이커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지었던 김유신. 사실 그는 왕은커녕 왕의 사돈도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김유신은) 스스로 소호김천少昊金天씨의 후손이라고 해서 성을 김 씨로 삼았는데, 김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자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 곧 남가야南加耶(금관가야) 시조 수로는 신라와 같은 성씨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 열전列傳〉
김유신의 출신 문제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소호김천’, ‘헌원’ 등의 후예라는 내용 때문이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소호김천씨를 중국 한족漢族들이 시조로 여기는 황제黃帝의 아들이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소호김천씨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겨레의 시조를 중국인으로 포장하려는 중화사관의 산물이다. 먼저 소호는 공자孔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북쪽 궁상窮桑에서 태어났는데, 이 무렵 산동성은 동이족의 거주지였다. 또한 소호는 동이족 국가인 은殷(상)나라 시조 제곡帝嚳의 부친으로서 동이족이었다. 그러니 김유신의 조상은 설혹 중국에서 왔다고 해도 그 뿌리는 동이족인 셈이다.
김유신의 출자出自에 좀 더 의미 있는 것은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이라는 점이다. 그의 증조부 김구해金仇亥가 법흥왕法興王 19년(532) 신라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신라인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법흥왕 19년(532) 조는 “금관국 임금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과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세 아들 중 막내 김무력金武力이 김유신의 할아버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야는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건국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532년에 멸망했다면 무려 490년간 존속했던 왕조였다. 법흥왕은 500년 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구해왕仇亥王에게 상대등上大等의 지위를 주고 본국 가야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상대등은 귀족회의 주재자로서 신라의 최고 관직이었다.
그러나 구해왕에게 상대등은 명예직이었을 것이다. 망국 군주가 신라 귀족회의를 주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또 김구해金仇亥 일가를 신라의 진골 계급으로 편입시켰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을 이왕李王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 경우다. 일본의 왕족과 귀족들은 속으로는 고종과 순종을 업신여겼다. 마찬가지로 경주 진골들도 속으로는 김구해와 그 후손들을 업신여겼을 것이다. 진골은 진골이되 망국 출신의 2류 진골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골품이 2류 진골이라는 사실은 부친 김서현金舒玄과 모친 만명萬明의 혼인과정을 봐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는 유신의 부친과 모친의 혼인을 ‘야합野合’이라고 적고 있다.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혼인이란 뜻인데, 김서현 가문이 신라의 정통 진골이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리 없다. 또한 두 남녀도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정을 통했을 리 없다.
김유신의 모친 만명은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었다. 김서현과 만명은 길에서 보고 서로 좋아서 정을 통했는데, 부모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김서현이 만노군萬弩郡(충북 진천) 태수로 가면서 혼자 갈 수 없다는 생각에 데리고 떠나려 할 때에야 숙흘종은 비로소 두 사람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가 난 숙흘종은 만명을 별제別第(별장)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 《삼국사기》는 홀연히 벼락이 별제의 문을 쳐서 지키던 자가 놀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만명이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고 전해주고 있다. 김유신이 경주가 아니라 만노군, 즉 충북 진천에서 태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
숙흘종이 화가 났던 것에 대해 《삼국사기》는 둘이 중매를 기다리지 않고 정을 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망한 가야계 출신과 사돈이 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갈문왕 입종은 진흥왕眞興王의 동생이니 성골이었을 것이고, 그 딸도 성골에 가까운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주 진골과 혼인해야 하는데 가야계 출신과 통정했으니 별제에 가두어 둘 사이를 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서현과 만명은 만노군으로 도망가서 유신을 낳음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삼국사기》는 김서현과 만명이 동시에 태몽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서현은 경진庚辰일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 두 별이 자기에게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왼쪽)과 어머니 만명(오른쪽)가야계 출신의 김서현과 숙흘종의 딸 만명은 결혼을 반대하는 숙흘종의 눈을 피해 교제하다 만노군으로 도망친 후 김유신을 낳았다.
형혹성은 화성인데 전쟁을 가리키니 유신의 운명은 검과 밀접했다. 토성인 진성은 신성信星이라고도 불리는데, 《한서漢書》 〈예악지禮樂志〉는 진성이 나라에 머물면 이익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쟁을 가리키는데 나라에 머물면 이익이 된다는 것은 전신戰神이란 뜻이다. 서현은 자신이 꿈꾼 경진일의 ‘경庚’ 자가 ‘유庾’ 자와 비슷하며, ‘진辰’ 자가 ‘신信’과 음이 비슷하다면서 유신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만명부인도 “신축辛丑일 밤 꿈에 금으로 만든 갑옷〔金甲〕을 입은 동자가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김유신의 부모가 각각 꾼 태몽의 공통점은 전쟁이었다.
부모의 태몽대로 김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장군의 꿈을 갖고 있었다. 김유신은 17세 때인 진평왕眞平王 33년(611)에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를 공격하자 중악中嶽 석굴로 들어가 이렇게 기도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역량과 재주는 부족하지만 재앙과 난리를 없애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 하늘이시여 이를 살피셔서 내게 손을 빌려주소서.”
17세 청년 김유신은 신라에 대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강했다. 그러나 점차 성장하면서 가문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신라사회가 가야계에 갖고 있는 유리 천장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 김무력은 진흥왕 15년(544)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聖王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워서 관등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주 출신 진골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가야계는 그저 전쟁이 있을 때만 필요한 존재였다. 경주 진골들은 가야 왕족의 후예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관심이 있을 뿐 신라사회의 진정한 주류로 편입시킬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이 강했던 유신은 유리 천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라 자체를 적대시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자신도 진골 출신이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자신이 스스로 신라사회의 주류로 성장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혈통은 괜찮지만 일정한 하자가 있는 왕족이 필요했다. 그에 맞는 인물이 김춘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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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시장과 같아서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권력자 주변엔 늘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진짜 실력과 충심이 있다기보다는 사교성 뛰어난 인물들이 그 주위를 차지하게 마련이다. 김유신처럼 실력 있는 인물들은 사교성 뛰어난 인물들과 총애 경쟁을 할 수 없다. 김유신은 자신의 실력으로 임금을 만드는 길을 택했다. 그래서 하자 있는 왕족 김춘추를 역전의 카드로 선택한 것이다.
김춘추는 왕족이었지만 조부 진지왕眞智王이 나라 사람들에게 폐위된 임금이었다. 《삼국유사》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조〉는 제25대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사가 어지럽고 소행이 음란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는 진지왕이 미녀 도화녀에게 수청을 들게 하려 했지만, 도화녀는 남편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전한다. 대신 남편이 죽으면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진지왕이 쫓겨나서 죽고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는데, 진지왕의 혼이 나타나 도화녀와 정을 통해 비형랑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삼국유사》는 진지왕의 혼과 도화녀가 관계해 비형랑을 낳았다고 전하는데, 《화랑세기花郞世記》는 비형랑을 진지왕의 아들 용춘龍春의 서제庶弟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지왕이 도화녀라는 여인에게서 서자 비형랑을 낳았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근거가 있다는 뜻이자 여러 여인들을 거느렸다는 이야기다. 《화랑세기》는 “진지대왕은 미실美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思道皇后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미실이 왕위에 올려주었지만 즉위 후 미실을 총애하지 않고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자 미실이 폐위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진지왕이) 세상의 여론으로 미실을 황후로 봉하지 못하고, 다른 여성에게 빠져 미실을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태자의 아들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진평대제이다.
-《화랑세기》 〈6세 세종 조〉
진지왕은 이렇게 미실과 사도태후에 의해 쫓겨났다. 쫓겨난 전 임금의 자식들은 성골의 골품도 잃는 것처럼 보이는데, 김춘추가 진골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진지왕의 손자 김춘추는 왕족이지만 왕위에 오를 꿈을 못 꾸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김유신은 그런 이유로 김춘추를 선택했던 것이다. 하자가 있는 왕족을 국왕으로 만들어 신라사회의 진정한 주류로 발돋움하고 사회를 장악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김춘추를 일부러 끌어들였다.
열흘 뒤에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오기일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끈을 떨어뜨리게 하고 “내 집에 들어가서 옷끈을 달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자 춘추가 따랐다. 유신이 아해(보희寶姬)에게 옷을 꿰매드리라고 하니 “어찌 그런 사소한 일로 가벼이 귀공자를 가까이한단 말입니까?”라고 사양했다. 이에 유신은 아지(문희)에게 이를 명했다. 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아지와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했다.
-《삼국유사》 〈태종무열왕 조〉
《화랑세기》는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드렸다. 김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사랑〔幸〕을 했다”라고 더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김춘추는 이미 혼인한 상태였다. 김유신도 이를 알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여동생을 정실로 들이면 더 좋겠지만 가야계로서 이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는 여동생을 김춘추의 첩실로라도 들이면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과연 언니 보희에게서 “서라벌을 오줌으로 가득 채우는 꿈”을 비단 한 필을 주고 산 문희는 유신의 계산대로 임신에 성공했다. 드디어 서라벌을 오줌으로 가득 채울 남편과 태아를 갖게 된 것이다.
■김유신정통 진골 출신이 아니란 이유로 신라사회에서 배척되었던 그는 기존의 주류사회에 편입되려고 노력하기보다 야망을 품고 비주류 인물이었던 김춘추를 왕으로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상황은 김유신의 계산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김춘추가 임신한 문희를 외면했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때 공(김춘추)의 정궁부인正宮夫人 보라궁주宝羅宮主는 보종공寶宗公의 딸이었다. 보라궁주는 아름다웠으며 공과 아주 잘 지냈는데,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몹시 사랑했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삼았다. 유신은 뜰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 막 누이를 불태우려 하면서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연달아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공은 선덕善德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했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화랑세기》 〈18세 춘추공 조〉
이 화형식에 대해 《삼국유사》는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거동한 틈을 타서 마당 가운데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남산에 거동한 선덕왕의 눈길을 끌기 위한 시위성 행위이자 연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