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지옥은 법인으로서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가
미숫가루 타는 법은 집집마다 다르다
본인용 사후 지옥 회피권 VS 선물용 지옥 초대권
비유로서의 지옥과 실제 지옥의 차이
맛있게 얻어먹은 음식은 막상 내 돈으로 먹으려면
어느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비싼 생일잔치
가장 복잡한 뒷정리, 끝나지 않음
어쩐지 회식이 빨리 끝나더라니
주인 없는 밤, 물을 구하는 자에게
우물에 고이는 것은 물뿐만이 아니다
귀찮은 일을 잊는 법: 곤란한 일과 만나다
지옥은 주저앉는 자의 소리를 듣는다
붉은 한 입
그리고, 인간의 방식
부동산 임대차 계약서
임대인과 임차인 쌍방은 아래 표시 부동산에 관하여 다음 계약 내용과 같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다.
(중략)
제 2조(존속기간) 임대인은 위 부동산을 임대차 목적대로 사용, 수익할 수 있는 상태로 2021년 9월 10일까지 임차인에게 인도하며, 임대차 기간은 인도일로부터 2022년 9월 09일까지로 한다.
제 3조(용도변경 및 전대 등) 임차인은 임대인의 동의 없이 위 부동산의 용도나 구조를 변경하거나 전대, 임차권 양도 또는 담보 제공을 하지 못하며 목적 이외의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
제 4조(계약의 해지) 임차인의 차임연체액이 2기의 차임액에 달하거나 제3조를 위반하였을 때 임대인은 즉시 본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제 5조(계약의 종료) 임대차 계약이 종료된 경우에 임차인은 위 부동산을 원상으로 회복하여 임대인에게 반환한다.
특약사항:
가.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지옥으로 사용을 허용한다. 임차인은 임대인과의 협의 후 임대인의 빈방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나. 임차인의 사정으로 인해 일찍 방을 뺄 수 있으며, 퇴실 석 달 전에 집주인에게 공지할 경우, 위약금을 물지 아니한다.(하략)
본 계약을 증명하기 위해 임대인, 임차인은 각각 서명 날인 후 각각 1통씩 보관한다.
01
지옥은 법인으로서
임대차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는가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는 꼴을 봤다. 부엌에 있는 식탁, 할머니 맞은편 자리에서 웬 남자가 양푼을 끌어안고 쩝쩝거리는 중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할머니가 새 세입자를 들였을 수도 있으니 그건 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그 양푼 속 내용물들이 매우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비빔밥인 줄 알았다. 비빔밥, 참 관대한 음식이지. 밥과 채소와 고추장만 충족되면 그 외에 뭐가 들어가도 적당히 음식처럼 보이잖아. 하지만 남자의 양푼 안에 있는 건 색이 멀겋게 빠진 파스타면, 살코기 부분만 떨어져 나간 돼지갈비, 조기 대가리, 그리고 그 옆엔……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얼음 동동 뜬 커피 우유 약간.
남의 입맛에 참견하고 싶지는 않다. 누가 뭘 먹든 뭔 상관이야. 하지만 그 남자도 죽상을 해서는 자기 아침 식사를 입에 욱여넣고 있었다. 몇 번이고 헛구역질하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남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남자는 양푼을 들고 부엌을 빠져나갔다. 여전히 그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쩝쩝쩝쩝.
쩝쩝 소리가 멀어졌을 때 난 할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여든 넘긴 나이에도 흰쌀밥을 사발로 담아 드시며 이 집에 사람을 들이고 내칠 권리를 가지신 바로 그분께.
“할머니, 봤어?”
“뭐.”
“방금 나간 사람. 음식물…… 쓰레기 먹고 있었잖아.”
쓰레기라고 말해도 되겠지. 할머니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 어제부터 세줬다.”
“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앞으로 우리랑 같이 부엌 쓰는 거지? 방이랑 부엌이랑, 또 어디까지 같이 쓰기로 계약했어?”
“부엌 안 써.”
부엌을 안 써? 그러면 저 음식물 쓰레기들은 어디에서 얻어오기라도 했나? ……점점 끔찍한 상상만 든다. 나는 머릿속을 씻어내기 위해 냉동밥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탱, 냉동밥이 전자레인지 플레이트에 부딪히는 소리에 할머니의 첫 마디가 묻혔다.
“……랬잖아.”
“어, 뭐? 할머니, 잘 못 들었어.”
“어린 게 벌써 귀먹었냐? 내가 예전부터 그랬잖아. 이승에서 남긴 밥은 지옥에서 먹는다고.”
“그 말이 지금 왜 나와?”
“저놈은 생전에…… 남긴 게지.”
양반은 못 되겠다. ‘저놈’, 그 남자는 국물 한 방울도 안 남은 양푼을 들고 부엌 앞을 지나갔다. 남자의 애타는 시선이 할머니의 풍요로운 식탁을 훑었다. 혹시라도 남자가 양푼 설거지를 우리 부엌에서 할까 싶어 나는 식탁 앞에 버티고 섰다. 다행히도 남자는 부엌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의 얼굴은 납을 펴 바른 듯 생기가 없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옷차림도 잔뜩 구겨진 정장인데, 곳곳에 피와 흙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신발을 안 신었다. 집 안이니까 양말 바람으로 걷는 건 당연하지만, 그 양말이 흙투성이인 건 안 당연하잖아. 꼭 어디 야산을 헤집고 다닌 것처럼 말이다.
남자는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가 복도 끝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저기요, 거기 보일러실인데.”
나도 모르게 남자에게 참견했다.
남자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상관없어요.”
말문이 막힌 순간, 남자는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한 평도 안 될 시멘트 공간과 보일러가 보여야 할 텐데, 엉뚱하게도 그 공간을 채운 건 주황색 불꽃이었다. 지독한 열기가 순식간에 복도를 내달려 내 얼굴을 뒤덮는다. 보일러가 터진 건가? 어쩐지 얼마 전부터 난방도 안 돌리는데 굴굴굴 시끄럽더라니. 그러게 할머니, 내가 A/S 부르자고 했잖아! 뭘 하루만 더 두고 보자 타령이야. 그전에 우리 집이 사라지겠다고!
……여기까지 생각했는데, 아무 일도 없다. 여전히 부엌에서는 밥그릇에 수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난 얼빠져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주황색 불꽃은 문 너머에서만 일렁인다.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약간의 열기뿐.
남자는 양푼을 끌어안고 보일러실 안으로, 아니, 보일러실 너머 불타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불붙은 양말이 불꽃 발자국을 남겼다. 복도에 전해지는 건 열기뿐이 아니다. 비명도 흘러들어온다. 한두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레퍼토리는 ‘살려 달라’, ‘차라리 죽여 달라’, ‘난 잘못한 게 없다’로, 최소 세 종류 이상이었다. 때로 비명이 멈출 때 그 빈 자리는 더 먼 곳의 신음이 채웠다. 살과 금속과 가죽이 부딪치는 소리도 함께. 귀를 막아야 할까, 눈을 감아야 할까. 나는 어느 쪽도 못 한 채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꼬리 더럽게 기네. 문도 못 닫고 다녀?”
할머니가 어느새 다가와 보일러실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소리도 열기도 사라졌다. 아침부터 무슨 개꿈이지? 나, 깨어 있는 거 맞지? 나는 다시 보일러실 문손잡이를 비틀어 열었다. 약간의 열기가 전해지고 문틈으로 또다시 비명이 들렸다. 할머니가 짜증을 내며 문을 걷어차 닫았다. 하지만 불꽃의 정경은 아직도 내 망막 위에 일렁이는 것만 같다.
“할머니, 할머니……. 지금, 그거 뭐야? 어?”
“내가 그랬잖아, 계약했다고.”
“어, 그래. 새 세입자 구했다고 했지. 근데 지금 저거 뭐냐고? 이젠 하다 하다 약쟁이를 구해왔어? 내 아침밥에 약 탄 거 아니지?”
사실 점점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긴 했다. 이 동네 공사판은 거의 정리되었고, 근처에 번듯한 회사나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요즘 세상에 누가 화장실도 공동으로 써야 하는 낡은 단독주택에서 세를 살려 하겠어. 리모델링할 상황도 아닌지라 할머니 미간이 점점 구겨지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정말 약쟁이를 받아왔나? 하지만 할머니 대답은 내 상상을 뛰어넘었다.
“약쟁이 아니다. 지옥이랑 계약했어.”
지옥? 회사 이름인가? 여기를 회사 기숙사로 쓰겠다는 걸까?
할머니가 설명을 이었다.
“지옥이 요새 리모델링하느라 죄인들 둘 데가 모자란대서 빈방이랑 남는 공간 빌려주기로 했다. 아까처럼 죄인들 좀 오갈 거야. 함부로 문 열면 험한 꼴 본다.”
“험한…… 꼴?”
“정신 어따 팔아먹었어! 괜히 지옥 들여다보고 비명 질러서 누가 신고하는 꼴, 볼 일 없게 하라고. 알어?”
“어……, 응.”
“빨리 밥이나 마저 먹어.”
그래. 밥 먹어야지, 밥. 아침에는 5분이 뭐야, 3분도 아껴야 하는데. 빨리 먹고, 빨리 설거지하고, 빨리 이 닦고 튀어 나가야 학원 안 늦는데. 나는 멍한 기분으로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아직은 일과의 오차범위 안에 있다. 좀 덜 씹어 삼키고, 설거지는 저녁때 하면 버스는 탈 수 있어. 익숙한 시간, 익숙한 공간이다. 아직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상념을 깬다. 위층, 한동안 세입자가 없던 빈방 문이 열리는 삐거덕 소리, 그리고 누군가가 무릎을 쿵 소리 나게 꿇고, 두 손바닥을 짝 붙이고 애절하게 비는 소리까지 들렸다.
- 자모해어요, 자모해어요, 자모해…… 히이이익!
더 끔찍한 파열음이 말소리를 끊어놓았다.
할머니는 이마를 찌푸렸다.
“생전에 얼마나 험하게 살았으면 저런 벌을 받는다니. 넌 그러지 마라.”
“험하게 살 시간도 없네요. 할머니, 미안. 나, 이거 설거지 다녀와서 할게!”
“물은 받아놓고 나가!”
밥그릇에 물을 받고 신발을 구겨 신고 언덕길을 달려 내려가자 뒤늦게 현실의 텁텁한 공기가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가 본 거 도대체 뭐야? 잠이 덜 깼나? 할머니한테 드디어 치매가 왔나? 근데 치매가 나한테도 옮나? 나는 언덕길 위, 우리 집을 올려다보았다. 30년 전까지만 해도 으리으리했을 단독주택. 그리고 새 입주자인지 입주기업인지는 상념에 젖을 여유마저도 주지 않았다. 다락방 안쪽 창문에 뭔가 달라붙은 모습이 보였다. 오징어 빨판 같던 그 동그라미들은 순식간에 하나하나…… 눈알의 형태를 갖추었고, 나는 그 시점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내가 ‘지옥’을 처음 만난 날이었다. 그것도 임차인으로서 세상에 나타난.
02
미숫가루 타는 법은
집집이 다르다
할머니의 주 수입원은 커다란 단독주택 빈방들이다. 뼈대만은 드라마 속 재벌가 주택처럼 생긴 그 집이, 언제부터 뼈대 있는 대가족 대신 떠돌이들을 받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굴러먹던 개뼈다귀 중 하나인 내가 오기 전부터 이 집은 이 모양이었다. 마지막 집수리는 21세기에 막 접어들었을 때 했던가. 지금은 ‘사연 있는 흉가’를 목전에 둔 꼴이다. 나무 문짝들은 조금씩 휘어서, 문을 제대로 여닫으려면 어깨를 써야 한다. 거실 벽은 80년대에 유행했음 직한 올록볼록한 나무 장식으로 차 있어, 넓은 거실을 오두막처럼 좁아 보이게 하는 데 한몫한다. 겨울에 보일러를 돌리면 온기는 어디론가 다 날아가고 곰팡이가 벽지를 얼룩덜룩 채운다. 여름은 말할 것도 없다. 습하고, 서늘하고, 덥고. 그렇게 사계절을 꽉꽉 담아가며 늙어간 집. 근처 부동산 중개사가 ‘요즘은 원룸이라고, 도배 한 번 하고 작은 냉장고만 넣어줘도 월세 사오십은 받는다’라며 할머니를 꾀러 왔다가 그대로 뒤돌아 나갔었지. 낡아 뻐드러진 방문에 덤으로 제공되는 옵션이라곤 할머니의 잔소리뿐이다. 언젠가부터 오래 묵은 세입자들은 하나둘 돈을 모아 떠났다. 월세를 낮춰도 새 세입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투자하지 않는 할머니만을 탓할 수도 없다. 솔직히, 이 집은 분명 지어졌을 때부터 마(魔)가 끼었을 거다. 여기서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을 못 봤다고.
난 문득 떠오른 어떤 세입자의 추억을 입 밖에 꺼냈다.
“할머니, 그 새끼도 지옥 갔을까?”
“아침부터 왜 욕질이야. 어떤 시부럴 놈?”
“왜, 3층 방 계약했다가 특수폭행으로 감방 가는 바람에 파투 난 사람. 출소해서 이사 오던 길에 골목에서 칼부림하다가 죽었잖아.”
“어디 보자. 몇 년도지?”
“그걸 어떻게 기억해?”
“세상천지에 그런 일이 한둘인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물어봐?”
“그냥. 그런 사람도 지옥 갔으면 여기 어디에 있지 않을까 해서.”
그래, ‘여기 어디’. 이젠 집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바로 이곳에서 말이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안 그래도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할머니와의 아침 식사 시간. 뭣 같은 양념들이 너무 많이 추가되었다. 문짝들은 지옥의 열기를 버티지 못해 자기 혼자 열리며 지옥 주민들의 비명을 뿜어낸다. 공포영화에서나 듣던 신음이 들리고, 정말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고 듣고 싶지도 않은 파열음도 함께 들린다.
가끔 복도를 청소하다가 우연히 빈방을 들여다볼 때가 있는데, 달군 철판 위에서 맨발로 춤추는 사람 같은 건 양반이다. 눈보라 대신 살보라가 휘날리는 세상. 조금이라도 덜 고통받기 위해 제 뼈로 무기를 만들어 저항하는 인간들 위로 줄톱 그물이 떨어지고……. 나도 비위는 어지간히 좋은 편이지만 그런 광경을 오래 볼 간담은 되지 않는다. 내가 맨눈으로 보고 참아줄 수 있는 건 저기 저 식탁 너머에서 잔반 비빔밥을 먹는 작자 하나뿐.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얼떨결에 말했다.
“지옥, 진짜 끔찍스럽죠? 힘들겠어요.”
남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답했다.
“방금 그 이야기도 무섭거든요? 세입자가 칼부림하다 죽었다고요? 진짜?”
“못 들어오고 죽었으니 세입자는 아니지 않나? 뭐, 세입자 받다 보면 별꼴 다 보는데요. 예전에 어떤 세입자는 훔친 개를 옷장에 가둬 키우다 걸린 적도 있어요.”
“별…….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내쫓았죠. 근데 그 인간이, 쫓겨나던 날 화장실 변기 물탱크에다 그동안 따로 모아둔 개똥을…….”
“그만! 그만!”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아직도 한참 남은 자기 밥그릇을 바라본다. 구시렁거리는 입 모양을 보니 나 때문에 밥맛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본데, 애초부터 댁은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난 남자에게 물었다. 할머니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서.
“진짜로 이승에서 남긴 거 먹는 중이에요?”
“그건 아닌데. 그, 제가……, 생전에, 조금 못된 짓을 약간 해서.”
“뭘 하셨는데요?”
“식자재 도매할 때 함바집에 들어가던 걸……. 죄, 죗값은 치르고 있으니까 뭐라고 하지 말아요.”
문득 들여다본 남자의 밥그릇 안. 흰 곰팡이가 핀 김치와 그 밑, 녹색 싹과 함께 깍둑썰기한 감자가 눈에 띄었다. 남자는 식탁 위, 할머니와 나의 단출한 메뉴를 부러운 듯 한참 쳐다보다가 다시 양푼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역시 밥 좀 남겼다고 벌 받는 건 아닌 것 같지? 그렇다고 내가 밥을 남길 거라는 소리는 아니다. 양푼 든 남자 때문에 입맛이 떨어진 것도 첫날로 끝이었다. 방문 너머 풍경에, 입맛이고 뭐고 다 잃어버린 것도 사흘을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손톱자국 남은 복도가 사시사철 곰팡내 나는 벽보다 비위 상할 것도 없다. 심지어, 얼마 전에 깨달았는데, 집에 남은 지옥의 흔적은 내버려두면 사라진다. 아싸! 내가 청소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미, 입 마르도록 말하면 뭐 해? 듣지를 않는데! 이승에서 남긴 건 저승에서 먹는다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뭘 또 처물어보고 앉았어!”
내 입맛을 제일 잘 떨어뜨리는 건 우리 할머니인걸. 일부러 작게 말했는데도 다 들었나 보다. 할머니는 누렇게 얼룩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너, 멸치볶음 뱉을 때부터 말했잖냐. 지금 안 씹힌다고 버리면 늙어 죽어서 호물호물한 입으로 녹여 먹어야 한다고! 거짓말인 줄 알어? 어?”
“그게 언제적……. 아냐, 할머니 말이 맞지. 내가 어떻게 의심해.”
“꼬치꼬치 따질 땐 언제고, 여우인 척해? 여우가 못 되면 곰이라도 되든지. 쥐새끼처럼 얄금얄금 입 대는 것 좀 보게.”
“미안해. 밥 팍팍 먹을게. 안 남겨. 봐봐, 내가 바닥에 깔린 고추씨까지 긁어먹잖아?”
“말대꾸는. 어? 너, 나중에 지옥 가서 봐. 재판관들이 혓바닥을 잡아 늘이고 이걸로 윗사람에게 못된 소리를 했는지 묻는다고.”
할머니가 젓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켰다. 그동안 난 꿋꿋하게 밥그릇을 비웠다. 양푼을 쥔 남자는 괜히 자기 때문에 이 난리가 났다고 생각하는지, 내 눈치를 보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살다 보면 (죽은 사람에게 할 소린 아니지만) 익숙해질걸.
“혓바닥에 달군 돌을 올릴 거야. 윗사람뿐이겠어? 남자들 만나서 간드러지게 헛소리하는 것도 안 돼. 그럼 저승에서 혀를 뽑아다 밭처럼 갈아 쓴다.”
할머니가 온갖 지옥의 이미지를 빌어 나를 다스리는 것도.
“갈아서, 갈아서……, 뿌려야지. 멀리 가게.”
때때로 할머니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다가, 어느 순간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딱 다무는 것도.
할머니 눈에 초점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난 숨을 삼키고 할머니 숨소리를 듣는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다행이다. 쓰러지지는 않을 것 같다. 도리어 양푼 남자가 안절부절 못 해한다. 난 안심하라고 손을 흔들어준 뒤 식탁 위 빈 접시를 정리했다. 설거지하는 동안 물 끓여서 커피 한 잔 타 드리면 그때쯤 할머니도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올 거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직 식탁에 남은 빈 그릇을 치우려는데 할머니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효섭이 왔냐?”
무시하고 싶어도 할머니 눈은 또렷하게 나를 향한다. 곧 나름 논리정연한 근거가 흘러나온다.
“저기, 저쪽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 들렸는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효섭. 할머니의 글러 먹은 아들내미께서는 몇 년 전 할머니의 통장 서랍을 뒤지다가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그건 할머니도 잘 안다. 다만 때때로 까먹을 뿐이다. 할머니 고개가 꺼덕꺼덕 흔들렸다.
“시부럴 것이 엄마는 왜 가짜를 패물함에 둬서 사람 엿 먹이냐고 따질 때 모가지를 뽑아버렸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벌써 집 팔아먹고 문서 받으러 온 거 아냐?”
아하하,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그 새끼가 또 기어들어 오면 다리를 분질러서 중랑천에 던져버리자! ……그런 대답을 애써 삼켰다. 그놈이 쓰레기라는 건 하늘이 알고 내가 알고 할머니가 알지만, 나는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가족을 욕해도 되는 건 가족뿐이니까.
“니미, 그놈에게 물려주느니 이 집 내가 불태우지. 무덤까지 갖고 갈 것도 아닌데.”
그렇지. 집을 물려받을 사람도 가족뿐이지. 10년 넘게 집을 쓸고 닦고, 할머니 병시중까지 맡아봐야, 내가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괜찮아. 팔아먹기는커녕 철거비용이 더 나가겠지 싶은 이따위 집을 받아서 뭐 해. 할머니, 나도 이 집 가질 생각은 없으니까…… 무너지지나 않게 해줘요.
혹여나 등 뒤에서 할머니가 쓰러지는 소리라도 들릴까 봐 난 설거지를 최대한 조용히, 조심스레 했다. 덕분에 전기포트 꺼지는 소리에 바로 반응할 수 없었다. 고무장갑 널고 조금 식은 물로 커피를 타 뒤돌아서니 할머니 눈에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할머니의 생기는 대체로 뾰족하다.
“식었어.”
“김 나잖아. 맨날 끓는 거에 입 댔다가 얼음 찾으면서.”
“느 할머니 입에 얼음 들어가는 게 아까우냐?”
“아, 일단 먹고 이야기해! 프림을 마지막에 넣어서 안 뜨거워 보이는 거야.”
할머니는 못 미더운 듯, 주춤거리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 입에 욕설이 장전되기 전에 부리나케 부엌을 빠져나왔다. 양푼 뒤집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할머니께서 매우 창의력 넘치는 욕을 꺼내신 모양이다. 아, 양푼 양반, 살아봐요. 금방 익숙해진다니까. 나 또한 지옥의 풍경에 빨리 익숙해지는걸.
일상은 어지간해서는 비틀어지지 않는다. 집 앞 골목길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옆집이 야반도주해도, 보일러실 밑에서 용암이 흘러도 집은 똑같다. 복도에는 먼지가 쌓이고, 창틀은 비가 올 때마다 회색으로 흘러넘친다. 염병할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복도 너머, 누군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벽에 담배를 비벼 끈다. 2층 끝방 세입자 김 사장이다.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머, 자기. 부엌에서 큰 소리 나던데 안 가봐도 돼?”
“엎은 사람이 치우겠죠. 그보다 김 사장님, 담배…….”
“알아! 나가서 피우는데, 어, 두고 간 게 있어서 잠깐 들어온 거야.”
“예, 예. 일부러 더러운 데 대고 비벼 꺼주셔서 자국도 안 보이네요. 괜찮아요. 뭐라 하는 거 아니에요.”
보통 염치를 아는 사람은 이 정도에서 꼬리를 만다. 하지만 김 사장에게는 염치라는 것이 없다.
“……더러운 데가 한두 군데여야지. 그리고 얼마 전부터 집에 악취가 진동해서 담배 냄새는 댈 것도 없더만. 새 세입자 문제야, 아니면 또 정화조 터졌어?”
물론 우리 집구석도 월세 받기에 염치가 없는 건 인정한다. 할머니, 지옥에 세준 거 다른 세입자에게 설명 안 했구나?
“그게……, 새 세입자가 배달 음식이라도 썩혔나 봐요. 확인하고 처리할게요.”
“잘 봐줘. 달걀 썩는 냄새가 어디 가나 진동한다니까.”
김 사장이 얄밉게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에구, 착해. 할머니도 말년에 너 만나서 다행이지.”
볼을 꼬집는 손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순순히 내려가는 척하던 손은 바로 내 머리를 거칠게 헤집는다.
“잘해라. 할머니 곁에 누가 남았니? 게다가 꼬박꼬박 월세 내는 거 나밖에 없잖아, 응? 내 말도 잘 들어주고.”
“들어갈게요.”
“누가 못 가게 붙잡던?”
김 사장이 얄밉게 두 손을 들어 보인다. 거기에는 어느새 또 담배 한 개비가 들려 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계단을 올랐다. 김 사장의 이야기 때문인지, 뒤늦게 유황 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 대한 걱정은 지옥보다도 무섭게 삐걱대는 계단 소리에 밀려 사그라들었다.
내가 일상은 어지간해서 비틀어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한껏 비틀어지고 싶어도 할 일만은 말뚝처럼 박혀 나를 기다린다고 정정하겠다. 점심 먹고 방에서 한 시간쯤 토익 공부하다 내려온다. 할머니가 마신 커피 컵을 씻는다. 식탁 구석 간식 상자에서 모나카 하나 챙겨서 버스를 타러 나간다.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으로 들어가 일하고, 저녁 타임에 죽도록 일하고, 또 일하고, 죽도록 마감 치고,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그런 내 일과는 지옥이 들어와도 변하지 않았다. 다행일까. 내가 악인이었다면 삶이 바뀌었으려나. 지옥에 떨어진 악인들이 이런 잔혹한 형벌을 받는다니. 죄를 뉘우치고 남은 생은 불우한 이들과 나누며 살아가겠습니다! 하고 말이야. 내가 더 똑똑한 인간이었다면 지옥 투어 관광코스라도 개발했겠지. 어떤 사람들한테는 단테의 신곡 코스 2시간 투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유명 영화에 나온 도산지옥 30분 투어 같은 거. 그런 잡생각으로 (써먹을 데가 생길지 확신할 수 없는) 토익 공부 시간을 훌쩍 날려 보낸 뒤, 나는 아르바이트용 검은 슬랙스에 몸을 구겨 넣고 계단을 내려왔다.
“할머니, 나, 일 다녀올게!”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실 나갔나? 커피 컵을 정리하려고 부엌에 들어섰을 때, 나를 맞이한 건 커피 컵이 아닌 예쁜 유리잔이었다. 할머니가 장식장에 모셔두는 건데 이게 왜 나와 있어? 처음에는 할머니가 냉커피라도 타 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보니 달콤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다. 얼음 가장자리에 각이 잡힌 걸 보니 만든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했다.
“할머니? 할머니, 이거 뭐야? 마시려고 타둔 거야? 버려도 돼?”
‘버려도 돼?’라는 말을 듣자마자 할머니가 등짝 때리려 달려 나올 줄 알았는데,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유리잔 바닥에 붙어 있던 종이가 툭 떨어졌다. 메모지였다.
[출근하기 전에 당 채우고 나가기♡]
와, 이게 뭐야? 할머니 글씨는 아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세입자들에게 이런 거 적어달라고 부탁할 사람은 아닌데. 혹시 뭐든 비벼 먹는 그 남자인가? 하지만 지옥의 죄수들이 우리 집 부엌을 건드릴 수 있다면 그따위로 먹고 살지는 않겠지. 웩……, 그거 잠깐 생각했다고 입맛 떨어지네.
버릴까 생각했지만, 역시 멀쩡한 걸 버리는 건 거부감이 든다. 어차피 저녁도 일 끝나고 밤에 먹게 되니 간식을 미리 먹어둬야 했다. 냄새는 괜찮았다. 맛도 괜찮을지 보려고 잔을 정말 조금 기울였는데, 혀가 닿자마자 멈출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맛있네. 엄청나게. 아래에 땅콩 가루도 깔려 있어. 컵에 가득 담긴 미숫가루가 순식간에 뱃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빈 유리잔을 정리하는 동안 미숫가루를 만든 흔적을 부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설탕통이 반은 비었네. 땅콩 가루는 어디에서 구해 넣었나 했더니 율무차를 한 봉지 까 넣으셨구먼. 할머니가 의외로 센스가 있어…… 하는 순간, 난 쓰레기통 앞에서 얼어붙었다. 율무차 포장지가 비닐 분리수거함 대신 쓰레기통에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뒷정리를 이렇게 했을 리 없는데. 그럼 내가 마신 미숫가루, 할머니가 만든 게 아닐 가능성이 크잖아. 소름이 돋는다. 달고 맛있었던 미숫가루가 내 내장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바로! 언덕 아래로 내려가서! 출근해야 한다고!
토할 시간도 없고 범인 찾을 시간도 없어! 밖에서 쓰러지면 누가 발견하겠지. 차라리 직장에서 쓰러지면 좋겠다. 거긴 목격자도 많고 CCTV도 고화질로 돌아가니까.
그렇게 나 자신을 위로해보지만, 가방끈을 쥔 손은 어느새 긴장으로 차가워졌다. 복도에서 누가 소리를 질러도, 할머니 멱살을 쥐려 해도, 대문 앞에 대자로 눕는 인간이 있어도, 심지어 지옥이 집 안에 떨어져도 두려워해 본 적은 없는데. 대문을 박차고 나오는 내 불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숨을 쉬자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달콤한 걱정은 처음이었다.
03
본인용 사후 지옥 회피권
VS 선물용 지옥 초대권
미숫가루의 구성 성분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버스에서 내릴 때 뱃속에서 출렁이는 액체가 작은 재앙의 시작을 알렸다. 좀 많이 마시긴 했지. 일하면서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눈치 보이는데, 옷 갈아입기 전에 미리 들러야 하나.
그러나 먹자골목으로 꺾어 들어가자마자 시커먼 그림자가 내 앞길을 막았다.
“어, 누나! 지금 출근하시나 봐요?”
닭갈비집에서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승빈이였다. 그 들뜬 목소리가 반갑지 않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안녕. 안 들어가고 뭐 해? 누구 기다려?”
“저도 출근하는 길이에요. 이제, 들어가야죠.”
“그래.”
“음, 어, 가방 들어드려요?”
“왜, 나 피곤해 보여?”
“아뇨, 아뇨! 어, 점심 드셨어요?”
승빈이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나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고, 덕분에 난 미리 화장실에 들를 타이밍을 놓쳤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다. 걱정이 문제를 만드는 걸지도 모르지.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은 고작 5분. 하지만 고객들의 ‘저기요’가 백만 개쯤 쌓이기에는 충분한 시간.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직원들의 일감이 자잘하게 쌓였고, 매장 매니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주 씨, 오늘따라 자리에 잘 안 보이는 것 같네.”
매니저가 딱 한 문장 흘리고 지나갔고,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모카 언니가 가볍게 내 옆구리를 툭 쳤다.
“신경 쓰지 마. 자기가 직원들 완전히 꿰고 있는 줄 안다니까.”
“고마워요, 언니.”
“근데 너, 오늘 컨디션 안 좋아 보이긴 한다. 무슨 일 있어?”
‘아주 큰일이 생겼지요. 우리 집에 지옥이 들어왔어요!’라고 상담할 수는 없겠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미숫가루를 마셔서 불안하다는 말은 꺼낼 수 있겠지만, 우린 그 앞뒤에 얽힌 자잘한 맥락까지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점심으로 먹은 반찬이 좀 갈락 말락 하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불안해서 그런가 봐요.”
“혼자 꾹 참다가 쓰러지지 말고, 못 견디겠으면 바로 이야기해.”
“저 오늘 쓰러지면 절대 꾀병 아니니까 119 불러주세요.”
“아하하, 당연하지! 승빈아, 서주 쓰러지면 네가 업고 요 앞까지 나가라.”
어느새 옆에서 듣고 있던 승빈이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난 어색하게 웃다가 다른 손님의 ‘여기요’를 향해 자리를 피했다.
저녁 식사 시간대의 폭풍이 지나간다고 한가해지지는 않는다. 마감 시간이 다가올수록 취해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인간들이 하나둘은 나오기 때문이다. 취객 한 명을 앉혀놓고, 조금 덜 취한 취객의 동료가 택시를 잡고 오겠다며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20분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대걸레를 쥐고 한참을 기다리다가 결국 취객의 주변만 닦았다. 동료에게 버림받은 취객은 가게 문을 잠글 시간에야 눈을 떴다.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은데……. 별수 없이 취객에게 물 탄 사이다를 조금 먹인 후, 승빈이가 부축하게 하고는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승빈이 짐을 챙겨 나와 문간에 기대어 섰다.
먹자골목에서부터 큰길까지 이어지는 풍경은 한결같다. 제정신으로 웃으며 헤어지는 사람들과 이미 취한 사람들의 택시 쟁탈전. 1차까지는 웃으며 마셨지만 2차에서 멱살을 잡게 된 사람들의 싸움. 그 뒤로 노래만 하는 게 아닐 듯한 노래방 광고 풍선들이 사방에서 부풀어 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빈이는 곧 마지막 싸움을 끝낸 용사처럼 귀환했다. 얼룩진 셔츠를 벗어 목에 걸고 울상이 된 채로. 나는 잠깐 가게로 들어가 가게 유니폼 셔츠를 건넸다.
“와! 누나, 기다려주신 거예요?”
“짐 두고 문 잠글 수는 없잖아. 근데 너도 참 착하다. 나 같으면 가게 앞에 앉혀두고 퇴근했어.”
“왜요, 누나도 착해요. 지금 저 기다려서 챙겨줬잖아요.”
“어…….”
말문이 턱 막혔다. 비꼬는 소리 같던 내 말과 달리, 승빈이는 진짜 칭찬을 돌려준 것 같아서.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내가 뭐가 착하냐고? 짧은 침묵이 ‘대화 끊김’으로 이어지기 바로 직전, 승빈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고마워서 그러는데, 제가 뭐라도 사드릴…….”
“오, 서주 아직 안 갔네? 잘 됐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 온 상쾌한 목소리가 승빈이의 다 기어들어 가던 목소리를 뒤덮었다. 모카 언니였다. 언니는 자연스레 내 팔짱을 꼈다.
“저쪽 골목에서 싸움 나서 완전 살벌해. 같이 좀 지나가……. 어! 승빈아, 택시 타러 간 거 아니었어?”
“그게…….”
“어……”
승빈이와 언니가 어색한 시선을 교환했다. 어색해질 게 뭐 있어. 나는 가방을 고쳐 맸다.
“승빈이, 수고했어. 잘 들어가. 언니는 저랑 가요. 어디 싸움 났다고요?”
“아, 아니다! 서주야, 우리 셋이 한잔할래? 너, 아까 매니저한테 까여서 기분 안 좋잖아.”
옆에서 승빈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그러고 보니 저희 회식할 때 빼고 같이 마신 적 없지 않아요?”
“그러게. 서주야, 내가 살게. 맥주 마시면 소화도 잘될 거야.”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심리적 근거만은 충분한 주장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시원한 권유를 따를 수 없었다.
“늦게 들어가면 할머니한테 혼나요.”
“버스 끊길 때까지 마시자는 것도 아닌데?”
“완전 조선 시대 분이라, 평소 일과에서 조금만 달라져도 남자 생겼냐고 난리가 나신다니까요.”
“너무하시네. 요새 고등학생 부모도 그러진 않겠다.”
모카 언니는 입술을 삐죽였지만 더 이상 권하지는 않았다. 승빈이는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로 우리를 뒤쫓았다. 나름 끝까지 바래다주려는 모양이다. 모카 언니가 ‘어이구, 착해. 어구, 착해.’라며 강아지 어르듯 웃으며 말했다.
“역시 승빈이가 토템이네. 승빈이 오니까 꼬리 말고 내빼잖아. 남색 잠바 보여? 머리카락 덥수룩하고.”
“아, 저 어깨 넓은 남자요?”
“응. 저 사람이 취객 지갑을 슬쩍하다 걸렸나 봐. 근데 주먹 한 번 맞고 나자빠지더니 괜히 지나가는 여자들만 골라 노려보는 거 있지.”
승빈이가 혀를 찼다.
“찌질하네요.”
그자는 골목을 떠나는 와중에도 찌질했다. 행인의 시선이 제 얼굴을 스칠 때마다 그쪽을 돌아보며 외친다. 먼 거리에서도 목소리에 묻어나는 알코올 냄새와 열등감만은 또렷했다.
“구경났어? 뭘 봐?”
승빈이가 그쪽을 보며 끼어들지 말지 고민하는 것 같다. 착해도 너무 착한 녀석. 난 승빈이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너, 지금 가게 유니폼 입고 있다. 무슨 뜻인지 알지?”
뜯어말리러 갔다가 시비 걸리면 내일은 진짜로 감당 못 할 손님이 가게에 찾아오게 될 거다. 다행히도 근처 가게 직원이 나와서 남색 잠바를 노려보았다. 놈은 넓은 어깨를 움찔 떨더니 제 갈 길로 돌아갔다. 먹자골목 안쪽, 호객용 풍선이 너울거리는 모텔촌과 여관 골목으로. 우리 셋 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별꼴을 다 보네. 그럼 너희 둘, 조심해서 들어가!”
“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 승빈이, 내일 올 때 유니폼 챙겨오고.”
“네, 누나. 들어가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
“말만이라도 고맙네.”
“말뿐인 거 아니거든요! 진짜!”
승빈이는 곧 팔랑거리는 발걸음으로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아까의 그 골목을 돌아보았다. 남색 잠바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머릿속은 아까 본 뒷모습을 붙잡아 옛 기억 옆에 세우고 있다. 할머니의 둘째 아들, 정효섭 씨의 마지막 뒷모습이 저렇지 않았던가. 할머니가 고이 모셔둔 잠바에 억지로 어깨를 쑤셔 넣어, 등판에 팽팽한 줄이 가 있던 꼴이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다. 설마 저 등판이 그 등판일까. 제발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70년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모자 싸움에 또 등 터지는 건 사양하고 싶어.
누군가 버스 정류장 구석에서 토하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폭발 직전의 재떨이처럼 빽빽하다. 사방에서 피로에 절은 냄새가 난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내일 공부해야 할 범위를 곱씹었다. 복학하면 죽어도 장학금은 타야 한다. 어쨌든 돈과 공부를 생각하는 게 지옥의 축소판 같은 밤거리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생각을 바꿨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옥을 과소평가했습니다. 감히 밤거리 정도를 지옥이라 불러 죄송합니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마주한 건 혀를 길게 빼물고 기어서 도망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달팽이가 지나간 듯 침이 넓게 번들거렸다. 쟁기를 문 소가 천천히 그 뒤를 쫓았다. 나, 저거 학습만화에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거짓말한 사람 혓바닥에 농사를 짓는 지옥이 있다던가. 죄수를 따라잡은 소가 발바닥을 핥았다. 희한한 비명이 복도를 갈랐다. 소는 이제 도망자를 끌고 걸었고, 도망자는 복도에 긴 손톱자국을 남겼다. 지옥의 세입자들이 남긴 흔적은 길어야 하룻밤 정도면 사라진다. 하지만 내 기분에는 흔적이 남는다.
괜스레 소름이 돋아, 나는 양팔을 문지르며 남겨진 손톱자국을 조심히 넘었다. 소는 문을 닫을 줄 모르니, 소가 돌아간 지옥의 소리가 복도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괭이를 쥔 죄수가 도망쳤다 끌려 온 다른 죄수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당신만 도망가면 난 어쩝니까! 겨우 뿌리내린 거 다 엎어졌잖아요. 혀는 계속 대고 있으셔야지!”
“으, 으, 으…….”
도망자가 뭐라 대꾸했지만 죄수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농사짓는 죄수가 괭이를 혓바닥 위로 내리찍으려 할 때쯤 나는 문을 닫았다. 지옥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적절한 크기의 부동산을 얻은 뒤에야 창의력을 발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의 형태는 정말 다양했다. 할머니가 나를 가르치기 위해 빌려 오던 동서고금의 지옥 이미지는 댈 것도 아니었다.
흰옷을 입은 죄수들이 모여 중얼거리는 방도 있다. 그들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굴었다. 말하는 문장은 간단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화창하네요. 점심은 맛있게 먹고 나왔어요? 그럼 다음에 또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하지만 반복하다 보면 한 명쯤은 문장을 잘못 말하기 일쑤다. 죄수들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지고, 그들의 귀에 웬 이어폰이 들어간다. 죄수들은 이어폰을 뽑으려고 귀를 후벼 파다가 하나둘 주저앉기 시작한다. 그들이 지옥의 이어폰에서 무엇을 들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의자 빼앗기 게임을 하던 방도 있었지. 순해 보이는 사람이 의자를 누군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얻어맞았다. 그 딸로 보이는 죄수가 제 엄마의 멱살을 잡고 외쳤다. 엄마는 왜 언제나 내 것을 양보하면서 당신이 생색내냐고.
눈밭을 먹던 사람도 있었다. 정확히는 눈밭에서 어떤 물건을 찾나 본데, 먹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나 보다. 그는 눈덩이를 모아 식도로 꾹꾹 밀어 넣었다. 죄수가 식도가 얼어붙는 고통으로 울 때마다 눈물은 얼어붙어 다시 방을 눈으로 채웠다. 내가 방문을 닫았을 때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르릉거리는 진동 후 누군가가 눈사태에 파묻히는 소리도.
어떤 형태의 지옥이든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악당이 죗값을 받는 순간은 통쾌하지 않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