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CLAIRE KEEGAN
1968년 아일랜드 위클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로욜라대학교에서 영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이어서 웨일스대학교에서 문예창작 석사 학위를 받아 학부생을 가르쳤고, 더블린트리니티칼리지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는 그가 24년간 활동하면서 단 4권의 책만을 냈는데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 때문이다. 키건은 1999년 첫 단편집인 『남극Antarctica』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7년 두 번째 작품 『푸른 들판을 걷다Walk the Blue Fields』를 출간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출간된 가장 뛰어난 단편집에 수여하는 에지 힐상을 수상했다. 2009년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되었다. 최근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로 오웰상(소설 부문)을 수상하고,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
‘양동이와 그 안의 물에 반사된 소녀의 모습’이라는, 키건을 사로잡은 한 이미지에서 비롯된 『맡겨진 소녀』는 한 소녀가 먼 친척 부부와 보내는 어느 여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출간 이래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아일랜드에서는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이 작품은 2022년 콤 베어리드 감독에 의해 영화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었다.
표지 이미지 ⓒMagdalena Russocka / Trevillion Images
맡겨진 소녀
FOSTER
Copyright ⓒ 2010 by Claire Keegan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by DASAN BOOKS CO.,LTD.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Curtis Brown Group Limited through EYA(Eric Yang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EYA(Eric Yang Agency)를 통해 Curtis Brown Group Limited와 독점 계약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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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 마커스를 위하여
그리고 데이비드 마커스를 기억하며
1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 들판에 군데군데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길을 따라 푸릇한 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 소를 팔아 치웠던 카뉴 시장을 지난다. 아빠는 조수석에 모자를 내던지더니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뒷좌석에 누워 뒤창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군데군데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고 분필을 칠한 듯한 구름이 떠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얼기설기 지나는 전선에 긁힌 듯한 나무들과 하늘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이따금 작은 갈색 새 떼가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진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은 어떨까 궁금하다. 키 큰 여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갓 짜서 아직 따뜻한 우유를 마시라고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또 가능성은 훨씬 낮지만 앞치마를 입은 여자가 프라이팬에 팬케이크 반죽을 부으며 한 장 더 먹고 싶은지 묻는 장면도 그려진다. 엄마가 가끔 기분이 좋을 때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남편도 키가 더 크지는 않을 것이다. 아저씨는 나를 트랙터에 태우고 시내로 가서 레드 레모네이드와 감자칩을 사주겠지. 아니면 나더러 헛간을 청소하고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돼지풀과 소루쟁이를 뽑으라고 시킬지도 모른다.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뭔가 꺼내는 걸 보고 나는 50펜스 동전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니 손수건일 거다. 두 사람의 집은 낡은 농장 가옥일까 아니면 새로 지은 단층집일까, 화장실은 밖에 있을까 아니면 변기도 있고 수돗물도 나오는 실내 화장실일까 궁금하다. 나는 캄캄한 침실에서 다른 여자애들이랑 같이 누워 아침이 오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듯하더니 차가 속도를 늦추어 좁고 포장된 진입로에 들어서고, 바퀴가 캐틀그리드*를 밟자 전율이 인다. 양옆으로 두터운 관목이 네모나게 손질되어 있다. 진입로 끝에 길쭉하고 하얀 집과 가지가 땅에 끌리는 나무들이 있다.
* 구덩이를 파고 격자망을 덮어 자동차는 지나갈 수 있지만 가축은 지나가지 못하게 만든 장애물.
“아빠.” 내가 말한다. “나무 좀 봐요.”
“나무가 뭐?”
“아픈가 봐요.” 내가 말한다.
“수양버들이잖아.” 아빠가 목을 가다듬는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길쭉하고 반짝이는 유리창이 우리의 도착을 비춘다. 뒷자리에 앉은 내 모습은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서 집시 아이처럼 지저분하지만, 운전석에 앉은 아빠는 그냥 우리 아빠 같다. 나무 그림자가 져서 털이 얼룩덜룩해 보이고 목줄을 하지 않은 커다란 개가 건성으로 사납게 몇 번 짖더니 계단에 앉아서 문간을 돌아본다. 어떤 남자가 나와 서 있다. 언니들이 가끔 그리는 남자들처럼 어깨가 떡 벌어졌지만 눈썹이 하얀 게 머리카락과 똑같다. 키가 크고 팔이 긴 외갓집 사람들과 전혀 닮지 않아서 우리가 집을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이 든다.
“댄.” 아저씨가 몸에 뻣뻣하게 힘을 준다. “잘 지내나?”
“존.” 아빠가 말한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서 잠시 마당을 바라보더니 비 이야기를 한다. 비가 너무 적게 왔다, 밭에 비가 좀 내려야 한다, 킬머크리지 신부님이 오늘 아침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이런 여름은 처음이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이에 아빠가 침을 뱉고, 대화는 다시 소의 가격, 유럽경제공동체, 남아도는 버터, 소독액과 석회 가격으로 흘러간다. 나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 남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실은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장화 뒤꿈치로 잔디를 뜯고, 차를 몰고 가기 전에 지붕을 철썩 때리고, 침을 뱉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기를 좋아한다.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오면서 남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키는 우리 엄마보다 크고 머리카락은 엄마랑 똑같은 까만색이지만 헬멧처럼 짧게 잘랐다. 날염 블라우스와 갈색 플레어 바지 차림이다. 자동차 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가 나를 밖으로 꺼내서 입을 맞춘다. 입맞춤을 받은 내 얼굴이 아주머니의 얼굴과 맞닿은 채 뜨거워진다.
“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유아차에 타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대답을 기대하며 물러선다.
“유아차는 부서졌어요.”
“어쩌다가?”
“남동생이 손수레처럼 밀고 다니다가 바퀴가 빠졌어요.”
아주머니가 웃으며 자기 엄지를 핥더니 내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준다. 엄마의 엄지보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뭔지 모를 것을 말끔하게 닦아내는 느낌이 든다. 아주머니가 내 옷을 보자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통해서 내 얇은 면 원피스와 먼지투성이 샌들을 본다.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흐른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
“들어가자, 아가.”
아주머니가 나를 안으로 이끈다. 복도로 들어가자 잠시 깜깜해진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주머니도 같이 머뭇거린다. 후끈거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나에게 앉으라고, 내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말한다. 빵을 굽는 냄새 외에도 소독약 냄새와 표백제 냄새가 살짝 난다. 아주머니가 오븐에서 루바브 타르트를 꺼내 식힘 망에 얹는다. 얇은 페이스트리는 시럽이 부글거릴 정도로 뜨겁고 바삭하게 구워졌다.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오지만 부엌은 뜨겁고 고요하고 깨끗하다. 길쭉한 물잔에 꽂힌 길쭉한 프랑스국화는 물잔만큼이나 고요하다.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은 없다.
“그래, 엄마는 어떻게 지내시니?”
“복권을 샀는데 10파운드에 당첨됐어요.”
“설마.”
“진짜예요.” 내가 말한다. “그래서 다 같이 젤리랑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엄마는 자전거 튜브랑 수리 도구를 새로 샀어요.”
“음, 크게 한턱 썼구나.”
“맞아요.” 내가 말한다. 오늘 아침 내 두피에 닿았던 쇠 빗살, 머리를 촘촘하게 땋던 엄마의 손힘, 내 등에 단단하게 닿았던 아기를 품은 엄마의 배가 다시 느껴진다. 나는 엄마가 여행가방에 싸준 깨끗한 팬티와 편지를 떠올리고 엄마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