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1. 이 책은 통행본通行本 《노자老子》와 최근에 발굴되어 노자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죽간본竹簡本(혹은 곽점본郭店本)을 옮긴 것이다. 본문은 통행본을 위주로 하고, 죽간본을 함께 제시했다
2. 통행본 《노자》는 다음의 책을 주 텍스트로 했다
焦竑弱候編, 服部宇之吉 校訂 《老子翼》, 漢文大系 九卷(東京: 富山房, 1972)
3. 죽간본의 원문은 다음의 자료를 주 텍스트로 하고, 국내에서 출간된 이석명의 《백서노자》(청계, 2003) 등을 참조했다
Sarah Allan · Crispin Williams (eds.), the Guodian laozi: proceedings of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Dartmouth College, May, 1998, Society for the Study of Early China and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California: U. C. Berkeley: 2000).
4. 죽간본에 글자가 있었지만 판독할 수 없는 경우에는 _ 부호로 표시했다. 후대의 판본으로 보아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거나 추가해야 하는 경우에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 }로 보충했으며, 번역문에서도 { }로 표시했다.
5. 죽간본은 한대漢代 한문이 정착되기 이전의 판본으로, 판독시 드러난 글자로는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연구자들이 일반적으로 합의한 글자를 표기하고, 원 글자는 ( ) 안에 넣어 병기했다.
6. 번역은 가급적 직역을 원칙으로 하되, 문맥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옮긴이가 보충한 내용은 [ ] 안에 넣었다.
7. 각 장의 제목은 그 장을 시작하는 첫 구절로 달았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장 제목 아래에 옮긴이가 간단한 해설을 덧붙였다
8. 본문의 행 배열은 옮긴이가 내용과 운율에 따라 임의적으로 했다
9. 주는 모두 옮긴이주이며 후주 처리했다
10. 중국 인명과 지명은 중국어 발음을 따르지 않고 우리 한자음대로 표기한 뒤 한자를 병기했다.
들어가는말
동양 삼교三敎 중의 하나인 도가道家의 가장 중요한 기본 경전인 《노자老子》는 그 주제 때문에 ‘도덕경道德經’이라고 불리면서, 중국 고전 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많이 회자되고 연구되어온 경전 중의 하나다. 그런데 현재의 통행본通行本을 기준으로 보면 81편의 시詩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나 저술 시기, 구성 체계, 기본 성격 등에 관해서 연구자 간의 수많은 이견을 노정시키고 있는 문제작이다.
먼저 저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연구자에 따라 노자라는 인물은 춘추 말기(공자孔子보다 약간 이른 시기 혹은 동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연구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노자》라는 책에 대해서도 한 사람의 단일한 저작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편집된 책이라는 주장도 있어왔다. 이로 인해 책의 형성 시기에 대해서도 많은 견해가 있다. 늦어도 춘추시대 말기에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노자》에 등장하는 개념어들을 분석해볼 때 《장자莊子》보다 늦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비교적 최근에 새로운 《노자》 판본들이 중국의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에 힘입어 발견되었다. 1972년에 발견된 백서본帛書本과 1993년에 발견된 죽간본竹簡本(혹은 곽점본郭店本이라고도 한다)이 그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새로운 판본들이 노자와 《노자》에 대한 기존의 의문점을 해소해줄 획기적인 전기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해독과 연구에 정진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판본들이 거의 해독된 지금도 논쟁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가중되고 있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많은 성과도 있었다.
그 성과를 살펴보면, 먼저 백서본을 보면 본래의 《노자》는 현전하는 통행본처럼 81장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는 점과 그 배치 순서가 다를 수 있다(백서본은 〈덕경德經〉이 〈도경道經〉 앞에 배치되어 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늦어도 전국시대 중기에 필사되어 최근에 세상에 알려진 백서본을 현재의 통행본과 비교했을 때 허사虛辭를 제외하면 글자가 거의 일치하며, 내용 또한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비록 현재의 판본이 전승 과정상 일부 문자가 첨가되거나 탈락되기는 했지만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죽간본의 발견은 그동안의 노자와 《노자》, 그리고 도가와 유가儒家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재검토하게 해주는 커다란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즉 죽간본은 후대의 이데올로기 투쟁에 의해 개작되지 않은 원형 《노자》의 모습을 드러내주는 한편 노자가 늦어도 춘추 말기 이전에 생존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이 책에서는 단순히 통행본만을 번역하여 제시하는 관례를 깨고, 통행본 외에 죽간본의 해당 구절을 함께 제시했다.
기실 《노자》는 지금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상이한 평가와 오해를 받아왔다. 특히 ‘무無’,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욕無欲’, ‘불언不言’ 등 텍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부정적인 언사 때문에 《노자》는 부정적 · 소극적 허무주의 혹은 염세적 · 은둔적 성격의 철학으로 해석되었다. 처세적 생활철학, 은유적 신비주의, 군주의 통치술, 군사전략서 등의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도 했고, 심지어는 권모술수를 획책하는 책이라는 악의적인 평가도 있었다. 《노자》에 대한 이러한 평가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평가는 부수적인 것이거나 혹은 연구자의 관점에서 《노자》를 바라본 것일 따름이다. 나는 《노자》가 수천 년 동안 ‘도덕경’이라고 불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노자》에는 전체 5,000여 자 가운데 도道라는 글자가 70여 회, 그리고 덕德이 40여 회 등장하며, 그 모든 진술이 철두철미하게 근원적인 도와 덕을 지시하는 언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도덕경’이라는 별칭도 설득력이 있지만, 본래의 제목은 어디까지나 ‘노자’이므로 이 책에서는 원제를 따랐다.
그렇다면 도란 무엇이고, 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형이상자形而上者를 일러 도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전형적인 언명이 말해주듯이, 도는 형이상자다. 그리고 덕이란 이 도를 체득하는 것이다[德得也]. 주지하듯이 동서고금을 통해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형이상학의 주제인 형이상자는 사물적인 형상을 초월한다(형이상학의 라틴어 metaphysica의 어원은 ‘자연을 넘어서’다). 이렇게 문자 그대로 사물적인 형상을 초월하는 형이상자를 도로 확인한 노자는 그것을 사물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일반인의 관점을 전환시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부정적인 언사를 통해 도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언사만으로는 도의 진체眞體를 온전히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 상징(통나무, 물, 암컷)을 통해 도를 암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도가 단순히 초월계에 존재하는 그 무엇(초월자)이거나,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무(공무空無 혹은 도무都無)는 아니라는 점에서, 현덕玄德 혹은 상덕常德이라는 개념을 통해 도가 천지만물 가운데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한다. 나아가 이렇게 형상 없는 도를 어떻게 인식, 관조, 체득, 실천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체득과 실천의 공효功效는 어떠한지에 대해 말한다. 이처럼 《노자》는 수미일관되게 도와 덕을 지시, 인식, 관조, 체득, 실천하는 방법을 기술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노자》를 철두철미하게 도와 덕을 지시하는 화두로 보고, 그 나머지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얽매이지 않기를 권한다.
옮긴이 임헌규
일반적으로 도체장道體章으로 명명되는 이 장은 도의 체體와 용用, 입도공부入道工夫, 그리고 도의 오묘함을 찬탄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노자》 전체의 개요를 제시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노자》의 이해는 이 장의 이해와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로 언표할 수 있는 것은 항상恒常1)된 도가 아니며,
이름으로 명명할 수 있는 것은 항상된 이름이 아니다.
무無[이름 없음]는 천지의 시작을 말하며,
유有[이름 있음]는 만물의 어머니다.2)
그러므로 마땅히 항상된 무를 희구하여 도의 신묘함을 관조하고,
항상된 유를 희구하여 도가 나타난 현상을 본다.3)
이 양자[무와 유]는 같이 나와서 이름을 달리하니 같이 그윽하다고 말한다.
그윽하고 또 그윽하니 온갖 신묘한 작용이 나오는 문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이 장은 현상계에 대한 일상인들의 가치 판단은 실체성이 없는 상대적인 것임을 지적하고, 성인聖人은 이러한 상대성을 매개로 하여 근본으로 되돌아감을 말한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 알지만,
그것은 추한 것이다.
모두가 선한 것을 선한 줄 알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긺과 짧음은 서로를 나타내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대며
운율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4)에 거처하고,
말없는 가르침5)을 행한다.
만물이 일어나되 물리치지 않으며
낳되 소유하지 않으며
베풀되 의지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오직 머무르지 않기에 항상 사라지지 않는다.6)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形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惟弗居 是以不去
죽간본
천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 알지만,
[그것은] 추한 것이다.
모두가 선한 것을 선한 줄 알지만,
그것은 선하지 않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고
긺과 짧음은 서로를 나타내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를 채워주고
운율과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무위의 일에 거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이 비롯되었지만 앞서지 않고
베풀되 의지하지 않고
이루되 머무르지 않는다.
대저 오직 머무르지 않기에 항상 사라지지 않는다.
天下皆知美之爲美也 惡已 皆知善 此其不善已 有亡之相生也 難易之相成也 長短之相形也 高下之相盈也 音聲之相和也 前後之相隨也 是以聖人居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而弗始也 爲而弗恃也 成而不居 夫惟弗居也 是以不去
이 장은 유위有爲 정치를 배격하고, 무위 정치를 주창하는 노자의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유위 정치를 주장하는 다른 학파에 대한 비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노자가 우민愚民 정치를 주창했다고 오해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죽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후대의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산물로 추정된다.
어진 이를 떠받들지 않음으로 백성들을 다투지 않게 하고
얻기 어려운 보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백성들을 도둑이 되지 않게 하며
탐낼 만한 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워주며
그 의지를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한다.7)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無知하고 무욕하게 하여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가 감히 작위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로 하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다.
不尙賢 使民不爭 不貴難得之貨 使民不爲盜 不見可欲 使心不亂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常使民無知無欲 使夫知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도의 체용體用의 묘妙를 찬탄한 장이다. 도의 체는 텅 비어 있으나[無], 어디에나 편재하여 만물의 뿌리가 된다는 점에서 존재하는 듯하다[有]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도는 시간성을 초월한다[無始無終]고 말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도는 텅 비어 있으나8) 아무리 그것을 써도 다함이 없는 듯하다.
깊구나, 마치 만물의 뿌리인 듯이.
그[도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고 그 [만물의] 엉클어짐을 풀고,
그 빛을 조화시키고 그 티끌과 하나가 되니
그윽하구나, 흡사 존재하는 듯하다.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상제보다 앞서는 듯하다.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粉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若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천지와 성인은 어질지 않다고 주장하는 앞부분은 유가에 대한 비판으로, 죽간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9)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아마도 풀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 다함이 없어 움직일수록 더욱더 나온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중中을 지킴만 못하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죽간본
하늘과 땅 사이는 아마도 풀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텅 비어 있으면서 다함이 없어 움직일수록 더욱더 나온다.
天地之間 其猶橐籥與 虛而不屈 動而愈出
도의 덕을 골짜기[谷], 신묘함[神], 죽지 않음[不死] 등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이 천지의 뿌리가 됨을 말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골짜기 같으나 신묘하여 죽지 않으니
그것을 일러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10)
현묘한 암컷의 문,
그것을 일러 하늘과 땅의 뿌리라고 한다.
[하늘과 땅의 뿌리는] 면면히 이어져 흡사 존재하는 듯하며,
작용이 끝이 없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천지와 이 천지의 도를 체득한 성인은 사사롭게 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장생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늘은 항구적이며 땅은 드넓다.
땅이 항구적이며 드넓을 수 있는 것은 사사로이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길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그 자신을 뒤로 돌리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그 자신을 도외시하지만 오히려 항존하게 된다.
이는 성인이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성인은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만물 가운데 물의 덕성이 도에 가장 근접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물의 덕성을 체득한 사람은 어떻게 행위하는지를 살핀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거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거의 가깝다.
거처함에 있어서는 낮은 자리에 잘 거처하고,
마음은 깊은 연못처럼 그윽하게 잘 쓰고,
사귐은 어짊으로 잘하고,
말은 신실하게 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는 치적을 잘 이루고,
일은 능률적으로 잘 처리하고,
행동은 때에 잘 맞게 한다.
대저 오직 남과 다투지 않는 까닭에 나무랄 허물이 없는 것이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극단에 도달하면 되돌아오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말한다. “되돌아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反者 道之動也]”라는 반본反本, 귀근歸根을 주장하는 노자 사상의 원형이 잘 나타나 있다.
지니고서도 가득 더 채우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다.
때려서 더욱더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으로 집 안을 가득 채우면 지킬 수 없다.
부귀를 누리면서도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傮而銳之 不可長保 金玉滿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功遂身退 天之道
죽간본
늘려서 가득 채우는 것은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부풀려서 모아놓으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으로 집 안을 가득 채우면 능히 지킬 수 없다.
귀하고 부유하면서 교만하면 스스로 허물을 남길 뿐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그 자신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殖而盈之 不若其已 傮而群之 不可長保也 金玉盈室 莫能守也 貴富而驕 自遺咎也 功遂身退, 天之道也
도에 들어가는 공부와 도를 체득한 성인의 행위, 그리고 그윽한 덕[玄德]을 말한다. 전국시대 양생학파養生學派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혼과 [땅으로부터 부여받은] 백을 싣고 하나[도]를 껴안되
능히 떨어짐이 없게 할 수 있겠는가?11)
기氣를 한결같이 하여 부드러움을 이루되
능히 갓난아기처럼 할 수 있겠는가?
그윽한 거울을 씻고 닦아
능히 티 없이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림에
능히 지교智巧가 없이 할 수 있겠는가?
하늘 문을 열고 닫음에
능히 암컷처럼 할 수 있겠는가?
두루 환하게 사방에 통달하되
능히 어떠한 분별적인 앎도 없게 할 수 있겠는가?
[만물을] 낳고 기름에 있어,
낳되 소유하지 않고
이루지만 자랑하지 않고
기르지만 거느리지 않으니
이를 일러 그윽한 덕이라고 한다.
載營魄抱一 能無離乎 專氣致柔, 能嬰兒乎 滌除玄覽 能無疵乎 愛民治國, 能無知乎 天門開闔 能爲雌乎 明白四達 能無爲乎 生之畜之 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형상을 지닌 것[有]은 형상 없는 것[無]이 작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실례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형상 없는 도의 작용을 시사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듦에
그 바퀴통의 빈 곳[空地] 때문에 수레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빚음에
그 그릇의 빈 곳 때문에 그릇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듦에
그 방의 빈 곳 때문에 방의 쓰임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형상 있는 것이 이로움을 주는 까닭은 형상 없는 빈 곳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감각적 대상에 대한 탐욕이 가져오는 폐해를 지적하고 탐욕을 버릴 것을 권고한다.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은 전국시대 이후의 글로 간주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온갖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온갖 소리는 사람의 귀를 먹게 하고
온갖 맛은 사람의 입을 버리게 하며12)
말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화는 사람의 행실을 그릇되게 한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은 배[腹]를 채우지, 눈을 즐겁게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버리고 배를 채운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淖獵令人心發狂 難得之貨令人行妨 是以聖人爲腹不爲目 故去彼取此
먼저 은총을 받아도 치욕을 당하는 것처럼 놀라워하라고 말하면서 그 의미를 풀이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나아가 천하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총애를 받으나 치욕을 당하나 똑같이 놀란 듯이 불안해하라.13)
큰 걱정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자기 자신 또한 귀하게 여겨라.
총애를 받으나 굴욕을 당하나 똑같이 놀란 듯이 불안해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총애는 치욕이 되니 얻어도 불안해하고,
잃어서 치욕을 당해도 불안해한다.
이것을 일러 총애를 받으나 굴욕을 당하나 똑같이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큰 걱정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자기 자신 또한 귀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큰 걱정거리를 지니게 되는 까닭은
내가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
내가 자아의식이 없다면 나에게 어떤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천하 전체만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천하 전체만큼 아끼는 자에게 천하를 위임할 수 있다.
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驚 寵爲下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죽간본
사람들은 총애를 받으나 치욕을 당하나 똑같이 놀란 듯이 불안해하라[불안해한다].
큰 걱정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자기 자신 또한 귀하게 여겨야 한다.
총애를 받으나 굴욕을 당하나 똑같이 놀란 듯이 불안해하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총애는 치욕이 되니 얻어도 불안해하고,
잃어서 치욕을 당해도 불안해한다.
이것을 일러 총애를 받으나 굴욕을 당하나 똑같이 불안해한다고 말한다.
{큰 걱정거리를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자기 자신 {또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내가 큰 걱정거리를 지니게 되는 까닭은
내가 자기 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
내게 자아 의식이 없다면 혹 나에게 어떤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천하처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천하처럼 아끼는 자에게 천하를 위임할 수 있다.
人寵辱若驚 貴大患若身 何謂寵辱若 寵爲下也 得之若驚 失之若驚 是謂寵辱若驚 {何謂貴大患}若身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亡身 吾有何患 故貴以身爲天下 若可寄天下 愛以身爲天下 若可託天下
도의 오묘함을 말하고, 이를 체득한 성인의 사명에 대해 말한다. 죽간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보아도 알아볼 수 없으니 ‘이夷[색깔 없음]’라고 말하고,
들어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희希[소리 없음]’라고 말하고,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미微[모양 없음]’라고 말한다.
이 셋은 나누어서 캐물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혼융混融하여 하나가 된다.
그 위를 밝히지 않고 그 아래를 어둡지 않게 하며
이어지고 이어지는지라 무엇이라고 명명할 수 없다.
어떠한 물상物象도 지니지 않는 데로 돌아가니
이를 일컬어 모양 없는 모양이며,
어떠한 것도 없는 형상이라고 하고,
이를 일컬어 황홀하다고 한다.
맞이해도 그 머리를 알아볼 수 없고,
뒤따라도 그 후미를 알아볼 수 없다.
옛 도를 가지고 오늘의 온갖 일을 제어하면
태고의 시작을 알 수 있으니,
이를 일컬어 도의 벼리[도의 실마리를 이음]라고 말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搏之不得 名曰微 此三者 不可致詰 故混而爲一 其上不曒 其下不昧 繩繩不可名 復歸於無物 是謂無狀之狀 無物之狀 是謂恍惚 迎之不見其首 隨之不見其後 執古之道 以御今之有 能知古始 是謂道紀
말할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도를 체득한 사람의 모습 또한 그 깊이를 알 수 없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지만, 일상인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묘사한 장이다.
옛날 훌륭한 선비는 미묘하고 그윽하게 통달하여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대저 오직 깊이를 알 수 없기에 억지로 형언해본다.
머뭇거리는구나, 마치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이.
주저하는구나, 사방의 적들을 두려워하듯이.
근엄하구나, 마치 손님처럼.
풀어지는구나, 마치 녹으려는 얼음처럼.
도탑구나, 마치 질박한 통나무처럼.
텅 비어 있구나, 마치 빈 계곡처럼.
흐릿하구나, 마치 흙탕물처럼.
누가 능히 흙탕물을 고요하게 안정시켜 서서히 맑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능히 오랫동안 안분자족安分自足하다가 움직여 서서히 생명력을 부가할 것인가?
이 도를 간직한 자는 채우려고 하지 않으니
대저 오직 채우려고 하지 않는 까닭에 능히 낡아 있으면서 새로 이루지도 않는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죽간본
오랜 옛날 훌륭한 선비는 필히 미묘하고 그윽하게 [도리에] 통달하여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형언[칭송]해본다.
머뭇거리는구나,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이.
주저하는구나, 사방의 적들을 두려워하듯이.
근엄하구나, 손님처럼.
풀어지는구나, 녹으려는 얼음처럼.
도탑구나, 질박한 통나무처럼.
흐릿하구나, 흙탕물처럼.
누가 능히 흙탕물을 고요하게 안정시켜 서서히 맑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능히 안분자족하다가 오랫동안 움직여 서서히 소생시킬 것인가?
이 도를 간직한 자는 가득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長古之善爲士者 必微妙玄達 深不可識 是以爲之容(頌) 豫焉{其}若冬涉川 猶乎若畏四隣 儼乎其若客 渙乎其若釋 敦乎其若樸 混乎其若濁 孰能濁以靜者徐淸 孰能安以久動者將徐生 保此道者 不欲尙盈(呈)
비움[虛]과 고요함[靜]으로 만물의 뿌리로 되돌아가는 입도공부의 요체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길을 제시한다. 죽간본에는 앞부분만 나온다.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히 있기를 독실히 함에
만물이 함께 자라나지만, 나는 [만물이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본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나지만 각각 그 뿌리로 돌아갈지니,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靜]이라 일컬으며,
고요함, 이것을 일컬어 명命을 회복한다고 하고,
명을 회복하는 것을 일컬어 항상됨[常]이라 하고,
항상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음[明]이라고 한다.
항상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게 재앙을 일으킨다.
항상됨을 알면 만물을 포용하고
만물을 포용하면 만물에 공평해지고
공평해지면 왕이 되고[온전해지고]
왕이 곧 하늘이며
하늘이 곧 도이며
도는 항구적이니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
致虛極 守靜篤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容乃公 公乃王 王乃天 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죽간본
비움에 이르기를 항상되게 하고
중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면서
만물이 바야흐로 일어남에
가만히 앉아 되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늘의 도는 돌고 돌지만, 만물은 각각 그 뿌리로 되돌아온다.
致虛恒也 守中篤也 萬物方作 居以須復也 天道員員 各復其根
정치의 서열을 나누고, 진정한 정치의 이상은 모든 백성이 스스로 그와 같이 되는 것[自然]에 있음을 말한다. 통행본은 이 장을 다음의 18장과 나누어 두 개의 장으로 편집했지만, 백서본과 죽간본은 이를 나누지 않는다. 이로 인해 기존의 통행본이 개작되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오랜 옛날의 백성들은 군주가 있다는 것만을 알았고
그다음에는 군주를 친근해하고 칭송했으며,
그다음에는 군주를 두려워했으며,
그다음에는 군주를 모멸했다.
그러므로 [군주가] 신뢰성이 부족하니 [백성들에게] 불신이 생겼다.
머뭇거리는도다, 군주가 정령政令을 귀하게 여김이여.
공과 일이 완수되어도 백성들이 모두 우리가 스스로 그와 같았다고 말한다.
太上下知有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