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OWER OF F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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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 모든 펀 스쿼드에게,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요.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가는 습관을 들이고 항상 그래야만 한다고 믿으면, 언제 그렇지 않은지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 재미도 없는 인생을 참고 견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재미없는 삶이 습관이 되면, 자기 인생이 그렇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그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루이스(《머니볼》 저자)
프롤로그 _ 당신의 인생을 변화시킬 재미의 힘
01 의외로 어려운 재미의 정의
02 내면이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03 결국 진정한 재미가 답이다
04 재미 탐구 시작하기
05 어디에 숨었나! 재미 찾기
06 재미가 찾아들 공간 만들기
07 몰입에 이르게 하는 열정을 추구하라
08 둥둥 떠다니는 재미 끌어 모으기
09 오늘만은 삐딱하게! 무해하게 반항하기
10 꺾이지 말고 계속 노력하라
에필로그 _ 재미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다
감사의 글
참고문헌
가장 최근에 재미를 느낀 게 언제인가?
진지하게 묻는 거니까, 당신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신나고 들떴던 때가 언제인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다는 기분을 느끼지 않았던 순간, 미래나 과거에 대한 생각에 흔들리지 않은 채 현재에 전적으로 몰입하고 집중했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인가? 자유롭다는 기분을 느낀 건? 살아 있다고 느꼈던 건?
어쩌면 친구와 함께 웃음을 터뜨린 순간일 수도 있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거나 약간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데 으쓱했을 수도 있고, 처음으로 뭔가를 시도했거나 예상치 못한 누군가와 유대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떤 활동을 했든 결과는 같다. 당신은 웃고 미소 지었다. 책임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당신에게 활력과 자양분을 공급하고 생기를 되찾아줬다.
이런 묘사에 어울리는 최근 순간을 떠올리기 힘들더라도 괜찮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생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를 변화시킨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딸을 낳은 일이다. 아이를 가질까 말까 몇 년을 고민하고 1년 넘게 노력한 끝에 2014년 중반에 임신을 했다. 지금까지 옷장 정리나 주방 찬장을 이리저리 옮겨보는 소소한 프로젝트를 통해 보금자리 본능을 표현하던 남편과 나는 아이를 가진 김에 주방을 싹 뜯어고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서양 연안의 얼어붙은 1월 중순에 집의 벽 하나를 뜯어내야 하는 엄청난 공사였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창의적인 프로젝트(와 그걸 통제하는 것)를 좋아하기 때문에 새 주방을 직접 설계하기로 했다. 남편은 주방용 수도꼭지를 알아보는 데 몇 시간씩 공을 들였고, 나는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물건들을 새로운 주방에 써먹을 방법을 찾아 끙끙거렸다. 예를 들어 지하실에서 끌어내 온 아주 고풍스러운 거울이 달린 무기 장식장은 문짝을 살짝 바꿔 요리책이나 그릇을 넣어두는 서랍장으로 쓰기로 했다. 또 주방에 추가할 흥미로운 세부 장식을 찾으려고 오랫동안 이베이를 뒤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내 노트북의 검색 기록에는 ‘빈티지 서랍 손잡이’나 ‘빅토리아풍 팬시 스틱’ 같은 항목들이 쌓여갔다.
배가 점점 나오고 집이 추워지자, 우리는 이제 꽤 친해진 인부들과 함께 주방 공사와 내 임신 중 어느 쪽 프로젝트가 먼저 끝날 것인가를 놓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내가 이 대회에서 우승한 건 그들의 작업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라 출산 예정일 5주 반 전에 응급으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국 주방 수리는 끝나 무기 장식장은 내가 꿈꾸던 서랍장으로 변신했으며, 나는 마침내 이베이 검색을 그만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장식에 쓸 만한 골동품 목록을 30분씩이나 뒤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그럴듯한 구실도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들면 자동으로 이베이에 접속했다. 심지어 한밤중에 딸에게 분유를 먹일 때도 자주 그랬다. 한 팔로 아이를 껴안은 채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엄지로 화면을 스크롤했다. 우리 집의 모든 문에 이미 손잡이와 경첩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난 다른 사람들이 소셜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건축 소품을 뒤졌다. 휴대전화 화면에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에 눈이 멍해지면서 가끔은 최면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여전히 한참 동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가 잠시 화면에서 눈을 뗐는데 문득 딸에게 시선이 갔다.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작은 얼굴에 휴대전화에서 나온 파란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당시 휴대전화는 기본적으로 내 몸의 일부였다는 사실과 신생아가 얼마나 자주 분유를 먹는지를 고려한다면, 이런 일은 전에도 수없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이번에는 달랐다. 어쩌면 내가 마음챙김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수면 부족으로 인한 섬망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그 광경을 내 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몸 위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위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아기는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고, 엄마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범죄 현장 사진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자기 인식 능력을 키우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떻게 휴대전화에 뜨는 이미지에 푹 빠진 좀비가 돼 내 품에 안긴 아기를 무시하게 됐을까? 이건 내 딸이 자기 엄마와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밖에 어떤 관계에서도 얻기를 바라는 인상은 아니다. 그리고 나도 모성이나 내 삶을 이런 식으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나를 통제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손을 뻗는 것도,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길을 주는 것도 휴대전화다. 잠시 조용히 있을 틈이 생길 때마다 내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 있다. 버스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침대에서 나는 항상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들어 의식하게 된 다른 변화도 휴대전화와 관련이 있는 듯했다. 즉, 집중력이 떨어졌다. 책이든 잡지든 뭔가를 읽을 때,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은 채 한 페이지를 읽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난다. 친구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문자를 주고받는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기분만 나빠진다는 걸 알면서도 뉴스를 계속 확인하고, 이사할 생각도 없으면서 새로 올라온 부동산 매물을 살펴보는 등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전에는 연주를 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남편과 대화하는 데 할애했던 시간을 이제는 화면을 응시하면서 보낸다. 남편과 같은 방에 함께 앉아 있으면서도 각자 자기 휴대전화만 스크롤한다. 매사에 관심과 호기심이 넘치고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던 내가 최면이라도 걸린 듯 작은 직사각형 물체에 얽매인 사람으로 변했다. 그 물체에는 내가 시간을 낭비해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거대 기업의 프로그래머가 세심하게 설계한 앱이 깔려 있다.
기술은 사악한 것이고 휴대전화와 태블릿은 전부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스크린 앞에서 보내는 시간 중 일부는 생산적이고 즐거우며 심지어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다. 나는 휴대전화를 비롯한 모든 무선 모바일 기기가 우리 내면의 나침반을 심각하게 비틀어놓았다고, 우리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단순히 주의만 분산시키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본질의 핵심을 바꾸고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이제 휴대전화는 가장 신성한 영역 중 하나인 딸과의 관계에까지 잠입했다. 이런 상황은 정말 좋지 않다. 남편의 의견에 따르면 나는 행복과 슬픔이 혼합된 통렬한 감정을 잘 느끼는 사람이라서, 어떤 감정을 한창 느끼는 중에 전혀 다른 감정을 동시에 느낄 정도다. 게다가 이런 성격적 특성은 아기를 가지면서 더 심해졌다. 인생은 짧고 아이들은 너무 빨리 자란다. 나는 딴 데 정신이 팔려서 아이에게는 대충 신경 쓰는 상태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자면 내가 빨리 변해야 했다.
나는 개인적인 문제를 직업적인 프로젝트로 바꾸는 습관이 있는데, 이렇게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린 사람이 남편과 나뿐만은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이런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극히 적을 뿐이다. 당신도 직접 해보면 알게 될 테지만,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주변 세상을 둘러볼수록 걱정거리가 많아진다.
사람들이 고속도로에서 시속 110킬로미터로 차를 몰거나 번화가의 신호등을 건너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온 가족이 식당에 모여 앉아 각자 자기 모바일 장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식사하는 건 너무나 흔한 장면이 됐고 말이다. 나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있을 때의 모습을 관찰해봤는데, 꼭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화면을 이리저리 만진 뒤 주머니에 다시 넣거나 테이블에 올려놓곤 했다. 《벌거숭이 임금님》의 현대판 실사 버전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우리 모두가 중독자처럼 행동하는데도, 모두가 똑같이 그런 상태기 때문에 다들 자기 행동이 정상이고 괜찮다고 착각한다.
매일 몇 시간씩 인터넷의 끊임없는 자극에 우리 뇌를 노출하는 바람에 발생하는 정신적·신체적 악영향을 경고하는 책은 많지만,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은 드물다. 그래서 딸을 안고 나 자신을 성찰하는 순간을 보낸 직후에 《휴대전화와 헤어지는 법(How to Break Up With Your Phone)》을 쓰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테크놀로지와 더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그 책을 쓴 이유는 전자 장비에 빼앗긴 통제권을 되찾아서 진짜 나다운 생활로 돌아가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날 무렵, 더욱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장기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충실히 따랐다.
결과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놀랍게 바뀌었다. 집중력이 회복됐으며, 창의력이 높아지고, 스트레스를 덜 받았다. 당연히 남편과 딸에게 더 집중하게 됐다. 내 시간을 되찾는 데도 도움이 됐을 뿐만 아니라 테크놀로지와 나 사이에 더 확실한 경계를 만듦으로써 내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에 영감을 준 두 번째 사건으로 이어졌다.
남편과 나는 《휴대전화와 헤어지는 법》을 쓸 때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24시간 동안 모든 스크린을 끄고 규칙적으로 휴식을 취했다. 일종의 조사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휴식 시간을 ‘디지털 안식일’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시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계속해서 놀랐다. 스크린을 멀리한 덕에 순수한 시간의 양이 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인식도 느려졌다! 이제 우리는 시간이 아무렇게나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채워나갈지 직접 결정하게 됐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앱이 없으니 시간이 더 많이 생겼고, 그 시간을 우리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휴대전화와 결별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점이 있지만, 이는 단지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정말로 내 삶을 되찾고 싶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아야 했다.
2017년 초 디지털 안식일을 보내던 어느 토요일 오후, 딸은 낮잠을 자고 남편은 볼일을 보러 나가서 나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갓난아기를 키우는 엄마에게 이건 가장 행복한 순간이어야 했다. 혼자였고, 조용했고, 적어도 1시간은 내가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얼 하고 싶은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책을 읽을 기분도 아니었고, 배도 고프지 않았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빈 듯했다. 이윽고 내 특기 중 하나인 극단적으로 생각하기에 자연스레 빠져들면서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세상에!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저녁때까지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고 있네. 이건 곧 죽기를 기다린다는 뜻이잖아.’
그즈음에 스탠퍼드의 두 교수가 디자인 원리를 이용해 사람들이 풍요롭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디자인 유어 라이프》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거기에는 실습 과제가 제시되어 있는데 사랑, 일, 건강, 놀이라는 인생의 네 가지 영역에서 자신의 ‘탱크’가 얼마나 가득 차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을 알아낼 수 있다. 자기계발과 관련된 건 뭐든지 열심히 하는 나는 곧장 펜을 들었다. 사랑, 건강, 일은 모두 충만한 상태였다. 하지만 놀이라고? 또는 저자들의 표현처럼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주는 활동’이라니? 그에 해당할 만한 건 거의 생각나지 않았다.
스크린과 전자 장비를 멀리하고 휴식을 취할 때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고요함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뇌가 숨을 쉬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기회가 된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비어 있는 나의 놀이 탱크와 죽음을 향한 피할 수 없는 행진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자문했다. ‘항상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일이 뭘까?’ 휴대전화에 소비하는 시간을 회수한다면, 당신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이 질문을 곱씹는 데 쓸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기타를 배워보자는 것이었다. 난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매우 가까웠는데, 할머니는 기타를 연주하시곤 했다. 그래서 나도 기타 코드를 몇 개 배운 적이 있지만 이내 심드렁해졌고, 기타는 거의 20년 동안 벽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때 얼마 전에 본 한 전단이 생각났다. 사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베이비 비욘세’라는 수업을 광고하는 것이었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미스터 존이라는 사람이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버스를 타고 달려요(Wheels on the Bus)> 같은 전통적인 동요 대신 비욘세나 앨리샤 키스, 데이비드 보위 같은 가수를 그 주의 아티스트로 선정해서 수업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듯했다. 여하튼 그렇게 사이트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성인 취미반’이라는 메뉴를 발견했고, 어른들을 위한 초급 기타 교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기타 수업에 등록했다.
수업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에 끼어든 데다 기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코드 3개가 전부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많이 긴장했다. 하지만 기타 수업은 각자 좋아하는 술을 가져와 마시면서 진행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학습에 대한 부담이 별로 없었다. 동료 학생들은 대부분 아이들과 떨어져 1시간 30분 동안 다른 성인들과 어울리는 걸 음악 수업 자체만큼이나 좋아하는 학부모들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타가 뒷전인 건 아니었기에 언젠가 캠핑을 가면 직접 기타를 칠 정도의 수준은 되겠다고 느꼈다. 이렇게 난 매주 수요일 밤의 기타 수업을 착실히 다닌 덕에 즐길 수 있는 새 취미를 찾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도 느꼈다. 이제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휴대전화를 들고 시간을 낭비하거나 실존적인 절망의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이 훨씬 작아졌다. 기타를 꺼내 연습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 덕에 매우 큰 보람을 느꼈지만 곧 그보다 훨씬 중요한 뭔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기타 수업 중에는 일을 할 때 느끼지 못했던 몰입감과 활력을 느꼈다.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았다. 매주 시계를 올려다보면서 어떻게 벌써 90분이 지났느냐며 믿을 수 없어 했다. 일상적인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돌볼 필요가 없는 시간이었다. 평소 규칙을 잘 지키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성인인 나로서는 이런 해방감이 거의 반란처럼 느껴졌다.
수업 중에는 어깨가 가벼웠고 숨 쉬기도 한결 편했다. 마음 역시 자극을 받으면서도 편안함을 느꼈다. 당시에는 다른 학생들에 대해 잘 몰랐고, 나중에 함께 술을 마시러 다니면서 그들의 직업이 뭔지 알게 됐다. 그런데도 함께 수업할 때면 그들과 연결돼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외부 세계와 분리된 우리만의 은밀한 공동체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껏 시간을 들여서 했던 대부분의 일과 달리, 그 수업에는 반드시 이뤄야 하는 목표라는 게 없었다. 말 그대로, 우리의 목적은 그냥 노는 것이었다.
뭔가에 도취된 듯하면서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코드에 점차 익숙해지면서 만족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수업을 받으러 갈 때의 기대감과 끝난 뒤의 활기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그곳에 갈 때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수요일 밤은 곧 내 한 주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수업을 듣고 나면 온몸에 활기가 넘쳐서 며칠 동안 들뜬 기분으로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장난을 많이 치게 됐으며, 딸에게도 아낌없이 애정을 퍼부었다. 내게 주어진 의무에 분개하는 일이 줄었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도 이전보다 덜 느꼈다. 마치 새로운 에너지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그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무언가에 불이 붙었고, 그 에너지를 많이 경험할수록 더욱더 갈망하게 됐다.
이 기분은 뭘까? 아주 익숙했지만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올랐다. ‘난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부드럽고 가벼운 의미의 재미가 아니다. 손톱 관리를 받거나 새 TV를 사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재미있는 일을 할 때의 느낌이 아니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재미나 술집에서 잔뜩 취해 주정을 부리면서 느끼는 재미도 아니었다. 이번엔 뭔가 달랐고, 훨씬 강력하고 삶을 긍정하는 재미였다. 그래서 그 기분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 ‘진정한 재미’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그런 재미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골몰했다. 내가 바라는 건 진정한 재미(바로 이게 부족했기 때문에 소파에 앉아서 존재론적 회의에 빠졌던 것임을 이제 깨달았다)를 발생시키는 요소를 확인해서, 그걸 가끔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추구해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정한 재미를 느꼈던 또 다른 일들을 떠올려봤다. 남편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한 뒤 차에 친구들을 가득 태우고 다 함께 <보헤미안 랩소디>를 목청껏 부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뉴햄프셔에서 열린 스윙 댄스 캠프에 참가해서 5일 동안 계속 음악과 춤을 즐긴 적도 있다. 춤이 머리에 쏠려 있던 나의 중심을 몸으로 옮겨주었고, 너무나 유쾌했다. 평소에는 밤 10시 반이면 잠자리에 들지만 캠프에 참가하는 동안에는 너무 흥분해서 매일 밤 자정이 훨씬 넘도록 깨어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자러 갔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미국 횡단 여행을 했다. 63일 동안 코네티컷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친구들과 함께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매일 100~160킬로미터씩 달렸으며, 맨바닥에서 잠을 자고 종종 여름의 더위를 피하려고 새벽 5시 전에 일어났다. 그 여행은 육체적으로 정말 힘들었다. 로키산맥을 올려다보면서 이제 곧 저 산을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여행은 가장 친한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두 달을 보내는 기회가 됐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장난을 치거나 직접 만든 게임을 하거나 지역 박람회를 방문하는 등 우리만의 오락거리를 만들면서 여가를 보냈다. 매일 신나게 웃어댔다. 힘든 일들도 많았지만 그 여름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다.
계속 생각하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상황에서 겪은 추억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어떤 경우든 진정한 재미가 주는 감각은 분명했다. 마치 공기 중에 번개 같은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강력한 에너지가 방출된 느낌이었고, 특정한 요소들이 합류하는 지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한 재미를 느낄 때면 이 에너지가 불꽃처럼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진정한 재미는 자기비판과 판단에서 벗어나 완전히 참여하고 몰두하는 느낌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기가 하는 일에 푹 빠져 결과에 신경 쓰지 않는 데서 오는 스릴이다. 웃음이고 장난스러운 반항이다. 기쁨이 넘치는 관계다.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느끼는 행복이다. 진정한 재미를 느낄 때 우리는 외롭지 않다.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자기 의심이나 실존적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진정한 재미를 느낀 순간이 우리 기억 속에서 돋보이는 이유는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이름을 붙였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했지만, 기타 수업에서 느낀 기분을 ‘진정한 재미’라고 칭하자 더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예를 들어 진정한 재미는 특정한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생기는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남편과 나는 함께 진정한 재미를 느낀 적이 셀 수 없이 많고, 친한 친구들과 함께할 때도 그런 경험을 꽤 자주 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있을 때 항상 진정한 재미를 느끼는 건 아니다. 또 친밀감도 필수 조건인 것 같지는 않다. 낯선 사람들과도 진정한 재미를 느꼈고, 몇몇 지인과 함께 있을 때도 꾸준히 그런 순간을 누렸다. 특정한 환경이 꽤 도움이 되는 것 같긴 하지만 장소에 제한을 받지는 않는다.
또 진정한 재미는 활동 자체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어떤 활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런 재미를 느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이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진정한 재미가 내가 그 순간 하던 일의 결과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타 연주와 춤, 노래,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이는 곧 이런 활동을 일정에 많이 추가하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비결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똑같은 활동을 하면서도 큰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상황들이 떠올랐다. 혼자 연주를 하거나 자전거를 탈 때는 그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댄스 수업에 갔을 때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고 느꼈던 적도 많다. 자동차에 여럿이 타서 노래를 부른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얼굴이 아플 때까지 깔깔 웃어댄 일은 많지 않다. 진정한 재미를 끌어모으는 특정한 활동이나 사람, 환경이 분명히 존재하긴 하지만 그 결과가 확실히 보장된 건 아니다.
반대로, 얼핏 불편해 보이거나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지만 그게 진정한 재미를 안겨줬기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은 경험들도 있다. 예를 들어 캠프 카운슬러로 일하다가 쉬는 날에 친구들과 오도 가도 못 하게 발이 묶이는 바람에 광장 바닥에서 자야 했던 일이 그렇다. 또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칠 때 학생들이 한 일을 보고 크게 웃은 적도 있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 마법처럼 웃음보가 터졌다.
진정한 재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이를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오랫동안 행복과 마음챙김에 관한 글을 읽고 써왔으면서도 말이다. 일상적인 의미의 ‘재미’와 ‘진정한 재미’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어떤 활동은 처음에는 재미있는데 결국 날 지치게 하는 걸까? 재미의 강도와 지속 시간이 크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진정한 재미를 느끼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모험으로 이끌었다. 당신도 나와 함께 이 모험에 동참하길 바란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돼야만 진정한 재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식, 주거지, 적절한 휴식, 신체적 안전 등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며 빈곤, 질병, 학대, 외상, 직업적 불안정 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 재미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재미에 대해 크게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재미를 우선시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기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전제 조건이 충족된다면, 특정한 유형의 사람들만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규칙 같은 건 없다. 또 그걸 위해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다. 진정한 재미는 소수의 엘리트만 이용할 수 있는 희소 자원이 아니다. 또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돈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필수적이진 않다. 나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일들 중 일부는 기타 수업처럼 돈을 내야 하는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무료였다. 심지어 어떤 건 오히려 돈을 절약해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물건을 쌓아두는 게 재미있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나니 물건을 덜 사게 됐다.
어떤 사람들은 불안하고 우울하기 때문에 진정한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오늘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공식적인 진단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많은 이들이 공허함, 외로움, 지루함, 전반적인 무력감으로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거라고 주장하고 싶다. 고통스러워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충분히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재미는 행복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얘기다.
• 심각한 불안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게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정신건강 상담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재미가 일상적인 무력감과 권태감뿐만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에도 대항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울증을 치료할 때 사용하는 ‘행동 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라는 인지 행동 치료 기법이 있는데, 삶에서 더 의미 있고 즐거운 활동을 늘리는 데 중점을 두는 치료법이다. 정신과 의사인 내 친구는 자기 환자들에게 늘 이런 말을 한다. “우울증은 당신을 속여서 ‘난 우울하니까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예요.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거죠.”
즐길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재미를 얻기 위해 이미 꽉 찬 일정에 어떤 활동을 추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하는 일을 줄여서 여유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당신의 삶에 이미 존재하는 진정한 재미를 발견하고, 목표가 더욱 확실하게 정해진 상태로 여가를 보낼 수 있다. 반대로, 이미 충분히 즐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재미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재미를 즐기는 비결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쳐주라고 권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재미를 위해서 하는 일은 사실 가짜 재미만 안겨준다. 눈이 뻑뻑해질 때까지 드라마를 몰아서 보거나,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거나, 한 번에 몇 시간씩 소셜 미디어 화면을 스크롤하는 등의 일이 그렇다. 이런 가짜 재미를 추구하고 나면 멍하고 공허한 기분이 든다. 반면 진정한 재미는 활력이 넘치게 해준다.
진정한 재미를 우선시할 때 직면하게 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재미, 특히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경박하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심지어 미성숙하고 유치한 행동이라고 생각돼 주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에만 집중하는 건 세상 문제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을 도울 생각이 없는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계발과 관련해서는 행복, 부, 장기적인 건강, 인생의 의미나 목적의식 같은 고귀하고 더욱 진지한 목표를 추구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기계발서를 읽고, 심리 치료사를 만나고,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땀 흘려 운동하면서 이런 목표를 끈질기게 추구한다. 직장에 나가고 세금을 내고 집 청소를 하고 아이를 키우는 등 성인으로서 생활의 의무를 다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생각하면 재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건 경박하거나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헌신하는 양심적인 시민이 될 수 있다. 재미는 그런 일을 할 에너지를 더 많이 안겨준다. 그리고 자기 삶이 만족스럽고 즐겁기를 바란다면 진정한 재미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뒷전으로 밀려나서도 안 되며, 그것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별이 돼야 한다.
진정한 재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런 재미를 더 많이 누리겠다고 결심하더라도, 정작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것이다. 진정한 재미를 더 느끼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 중 하나는 그 발생이 너무 무작위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당신도 어쩌면 결코 재미있지 않은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애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뜬금없이 날씨 얘기를 건넨 적이 한두 번은 있지 않은가? 그것으로도 분위기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더 뻘쭘해졌기가 십상이다.
그런데 반대로, 일상적이고 지루한 상황에서 갑자기 진정한 재미가 튀어나오는 일도 경험해봤을 것이다. 식당에서 친구와 밥을 먹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엄청나게 웃어대거나, 어떤 일을 나중에 설명하려다가 “너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순간이 그렇다. 진정한 재미를 느끼면 마치 마법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재미는 억지로 강요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면 더 즐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기쁨, 황홀함, 행복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긍정적 상태와 다르게 진정한 재미는 접근하기 쉽고 현실적이다. 재미는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흙장난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즐거움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자신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요소가 뭔지 잘 파악하고, 그런 요소가 존재하는 상황을 많이 설계해서 참여하면 된다. 분명히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진정한 재미가 무엇이고 그게 어떤 느낌인지 이해한 후에 우선순위로 삼으면, 순간순간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 현명하게 결정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장기적인 효과로 인생도 바뀐다.
진정한 재미는 회복력을 선사한다. 공감 능력을 키워주고, 공동체를 만들어주며, 분노를 줄여준다. 진정한 재미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자기비판에서 벗어나고, 현재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정서적인 안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진정한 재미를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잡으면 창의력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더욱 바람직하고 행복한 파트너, 부모, 노동자, 시민, 친구로 만들어준다.
진정한 재미는 건강에도 좋다. 우리를 책상에서 일으키고,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도록 이끌어준다. 진정한 재미를 많이 느낄수록 스트레스 수준이 낮아지므로 스트레스로 촉발되거나 악화되는 심장마비, 뇌졸중, 비만, 당뇨병, 치매 같은 문제의 위험성을 낮춰줄 가능성이 크다.
진정한 재미를 추구하다 보면 무의미하고 산만하고 공허한 취미 활동에 들이는 시간이 줄어들어 자신의 진짜 자아에 충실해진다. 또한 자신에게 의미와 기쁨을 안겨주는 사람과 경험과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재미를 중심으로 삶의 방향을 잡으면, 즐겁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의지력과 자제력을 발휘해야 하는 대부분의 자기계발 프로젝트와 달리, 재미를 우선시하면 지금 이 순간 더 활기차고 즐거워진다.
나는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진정한 재미의 마법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단계를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그 결과를 당신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우선 진정한 재미란 무엇인지 정의부터 내려보자. 그런 다음에는 왜 최근에 진정한 재미를 느꼈던 순간을 떠올리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알아볼 것이다. 다시 말해 왜 내면이 죽은 듯한 느낌이 드는지 얘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당신을 절망의 문턱까지 데려갔던 기분이 갑자기 방향을 선회해서 진정한 재미를 선사하는 순간, 그 순간의 기분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정서적·육체적 건강과 삶의 풍요로움에까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재미와 관련된 사례를 제시한 뒤 어떻게 하면 그런 재미를 더 많이 누릴 수 있는지도 살펴본다. 그러고 나서는 진정한 재미가 발생했을 때 그걸 식별하는 방법과 이를 사악한 ‘가짜 재미’와 구별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러면 자기가 지금 진정한 재미를 얼마나 누리고 있는지 파악하고, 진정한 재미를 끌어들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활동·환경과 재미 요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내가 창안한 ‘SPARK’라는 약어를 사용해서 당신의 일상생활에 더 많은 재미를 불러올 실용적인 실전 기술도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재미를 우선시하기 위해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계획을 세울 생각이다.
당신이 내 충고를 따르면 끝없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삶을 살 수 있다거나, 그런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즐거운 삶도 항상 재미로 가득 차 있지는 않다. 하지만 진정한 재미를 나침반으로 삼는다면 더 행복해지고 더 건강해지며 삶이 어떤 시련을 줘도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미소 짓고, 살아 있다는 기분을 더 자주 느낄 것이다. 살아 있다는 느낌, 그게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짧은 시간 동안 깨어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재미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이 담겨 있다. 내 목표는 내가 지금껏 배운 걸 이용해서 당신이 진정한 재미로 가득 찬 풍요롭고 몰입도 높은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만약 이 일이 제대로 된다면, 최근의 즐거운 경험을 얘기해달라고 했을 때 당신은 그 즉시 이야기를 술술 하게 될 것이다. 그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워 눈을 반짝거리면서 말이다.
재미를 개념화하는 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I. C. 맥머너스·에이드리언 퍼넘(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
진정한 재미와 그걸 더 많이 누릴 방법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직면한 과제는 그 실체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나는 ‘재미’가 기타 수업을 하면서 느낀 강렬한 기분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라고 확신했지만, 그 단어가 온갖 맥락에서 사용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되는 활동을 가리킬 때도 이 단어를 쓴다. “재미를 위해 하는 거야.” 그러나 재미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면, 구체적인 특징이나 정서적 경험보다는 거기에 해당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활동을 분류하게 된다. 게다가 우리가 재미를 위해서 한다고 말하는 활동에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능동적인 일만이 아니라 TV 시청 같은 수동적인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 활동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수준이 근본적으로 다른데도 말이다.
우리는 또 재미라는 단어를 즐거웠다고 생각되는 경험을 이야기할 때도 사용한다. “그날 소풍 참 재미있었어.” 하지만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심인지는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친구들과 함께한 엄청나게 즐거웠던 밤 외출부터 전혀 즐겁지 않았던 저녁 모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해 그냥 “재미있었어”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재미있었다고 말하는 경험과 정서적 강도의 광범위한 범위를 생각하면, 재미가 인생을 바꾸는 힘이라는 생각이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재미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부주의하게 남용하면서 그 단어의 가치를 떨어뜨린 탓이다. 따라서 정말 재미가 지닌 모든 힘을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때와 방법에 대해 훨씬 더 엄밀해질 필요가 있다.
재미를 확실하게 정의하는 건 의외로 어렵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서는 재미를 ‘흥밋거리, 오락 또는 가벼운 즐거움’•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재미’라는 말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 것(예: “악의 없는 장난이었어”)을 뜻하거나 심지어 ‘놀리다(make fun)’의 경우처럼 조롱 또는 장난을 의미하기도 한다. ‘fun’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보 취급하다, 바보처럼 굴다’를 의미하는 중세 영어 ‘fon’에서 유래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정의하는 재미에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이 재미를 느끼는 경험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론 우리를 즐겁게 해주거나 예상치 못했던 것, 이상한 것을 가리킬 때도 “재미있네(funny)”라고 표현한다.
• 옥스퍼드 영어 사전은 또 fun을 설명하면서 ‘신나게 살다(living it up)’, ‘야호(whoopee)’, ‘흥청망청 놀기(jollification, 진짜 있는 단어다!)’ 같은 기상천외한 동의어와 ‘마시고 노는 편안한 생활(beer and skittles)’ 같은 불가사의한 표현도 제시한다. 재미의 반대말로는 ‘지루함’, ‘고통’ 등이 있다.
•• fon은 fond(누군가를 좋아하다)의 어원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검색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얼마나 광범위하고 부주의하게 사용하는지를 금방 확인할 수 있다. CNN에서 제안한 아이디어 중에는 칠면조 굽기와 잠 많이 자기, 다 함께 모여서 사랑하는 고인을 기리는 제단 만들기, 기후변화에 관한 다큐멘터리 시청하기 같은 것도 포함돼 있다. <리얼 심플(Real Simple)>이라는 잡지에 실린 비슷한 목록에서는 더 재미있게 놀고 싶다면 쿠키를 굽고, 모든 사람에게 재미있는 신학기용 공책과 준비물을 제공하고, 호리병박으로 식탁을 장식하라고 제안한다.•
• <리얼 심플>의 내용은 우리가 즐거운 활동이나 물건을 설명하기 위해 재미라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는 예다. 반면 CNN의 제안은 전부 엉망진창이다.
어쩌면 당신은 학자들이 ‘재미’라는 말을 사용하는 빈도와 그걸 활용하는 문맥을 놓고 열심히 토론할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행복이나 기쁨 같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의 정의에 대해서 토론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이 주제를 거의 무시해왔다. 자기들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시시해 보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재미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학술 연구는 놀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놀이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재미를 정의하는 건 포기했다.
1938년에 《호모 루덴스》(라틴어로 유희적 인간이란 뜻)라는, 놀이에 관한 책을 처음 출간한 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를 예로 들어보겠다. 그는 “재미는 삶의 일차적 범주로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심지어 동물 수준에서도 발견된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재미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고 그걸 추구하려는 생물학적 추진력을 갖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재미에 대해 “모든 분석과 논리적 해석을 거부한다. 하나의 개념으로서 재미는 다른 정신적 범주로 축소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현대 언어에는 영어의 ‘fun’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없다”라고도 했다.
역사학자 브루스 C. 대니얼스는 《청교도인의 놀이(Puritans at Play)》에서 재미의 정의가 “미칠 정도로 모호하다”라고 했다.
재미의 심리적 또는 신체적 영향을 직접 연구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는 아마 정의가 확실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관심을 가질 만큼 진지한 문제가 아니라는 가정도 한몫할 테고 말이다.
재미의 일반적인 개념을 다룬 논문들도 조사해봤다. 내가 찾아낼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논문에서 2017년도에 발표된 한 논문의 저자들은 “재미의 중요성을 조사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다”라면서 “재미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이나 사회심리학 분야의 교과서나 핸드북에 색인 용어로 등장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한다. 다른 논문도 같은 주장을 했다. 저자들은 “재미에 관한 심리학 문헌은 매우 한정적”이라면서 “심리학자들은 가끔 재미를 비롯한 특정 개념들은 심리학 연구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라고 덧붙였다.
신체적 영향에 관해서도 구체적이고 적절한 연구가 거의 없어서 미국 국립의학도서관이 운영하는 생물의학 문헌 검색 엔진인 펍메드(PubMed)에서 ‘재미’를 검색해봤다. 결과 목록 맨 위에 <균류에 재미를 더하다: 발톱 진균증>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떴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는 내가 당신에게 추구하라고 권하는 종류의 재미가 아니다.
학문적인 이정표가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재미’라는 용어를 시작으로 나만의 용어를 개발했다. 기타 교실에서의 경험으로 촉발된 행복감과 평범하게 사용되는 ‘재미’라는 말을 구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 진정한 재미가 특정한 활동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명확하게 밝히고 싶었다. 즉, 더 많은 재미를 느끼기 위해 일부러 이런저런 행사를 찾아다니거나 새로운 운동 방법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내가 느낀 감정에 ‘진정한 재미’라는 이름을 붙인 이상 간결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직접 느껴보면 알 것이다”라는 말로 끝낼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진정한 재미의 경험을 정의할 수 있는 요소들을 식별하기 위해 인간의 행복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 분야인 긍정심리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내 경험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내가 알아낸 사실이 내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1,500명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펀 스쿼드(Fun Squad)라는 글로벌 그룹을 모집했다. 재미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탐구해보겠다고 자원한 그들은 약 한 달 동안 내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고 피드백을 제공해주었다. 펀 스쿼드의 구성원은 10대 청소년부터 은퇴자까지 연령대가 다양했고 모든 소득 및 교육 계층에 걸쳐 있었다. 개중에는 독신도 있고 기혼자도 있고, 자녀가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었다. 직업군 역시 학생, 교사, 변호사, 가정주부, 그래픽 디자이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과학자, 의료 종사자, 재무 분석가, 작가, 컨설턴트 등 다양했다. 이들은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스웨덴부터 남아프리카, 인도, 바레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펀 스쿼드 구성원들의 인구통계학 정보를 수집한 후, 진정한 재미의 예로 기억에 남아 있는 세 가지 경험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몇 살이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누가 관련됐는지를 자세히 적어달라고 했다. 물론 특정한 정의를 제안하지 않았고, “당신의 경험이 사소해 보이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하지만 내가 물어봤을 때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경험, 즉 재미가 주가 되는 경험에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하라”라는 지침만 제공했다.
그런 다음 앞으로 준비하거나 참여하고 싶은 재미있는 이벤트나 경험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무엇을 할 건지, 누구와 할 건지, 어디에서 할 건지, 그리고 그게 왜 재미있는지 다시 물어봤다. 그리고 이상의 활동이 기쁘고 편안하고 즐겁고 만족스럽고 보람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경험이나 활동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사람들이 공유한 일화는 흥미로웠다. 진정한 재미의 기억은 어린 시절이나 성인기 초반에만 생기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설문지를 작성하기 전날 일어난 경험에 대해서도 썼다(설문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각종 제한과 봉쇄가 진행 중이던 2020년 여름에 보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내가 아직 어떤 정의를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대부분이 ‘재미’란 말 앞에 ‘정말’을 추가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느낀 게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나는 드럼을 치고 남편은 기타, 열다섯 살짜리 아들은 베이스, 아홉 살짜리 아들은 키보드를 연주한다. 이 드럼은 마흔아홉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내가 드럼 연습을 하러 지하실에 내려갈 때마다 가족들은 하던 일을 내려놓고 저마다 자기 악기를 들고 따라 내려온다. 드럼을 치면서 가족과 소통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른 차원의 의사소통을 한다. 우리는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한 곡씩 연주를 마칠 때마다 웃곤 하지만 계속 노력한다. (…) 이 경험이 얼마나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안겨주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중년의 나이에 드럼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게 우리 가족을 이렇게 재미있고 즐겁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한데 모이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진흙에 발가락을 밀어 넣는 것이다. 진흙 속을 걷는 건 재미있다(물론 기분 나쁠 때도 있다). 최근에 이런 일을 한 게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내 감각 기억에 남아 있는 건 고등학교 때 친구 마거릿과 함께 어떤 길을 따라 걸었던 때인 듯하다. 젖은 모래에 발가락을 밀어 넣는 것도 즐겁지만 진흙에서 하는 것만큼 재미있지는 않다. 아마도 진흙이 훨씬 더 지저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웃음 워크숍에 참가했다. 우리는 원숭이인 척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등 온갖 바보 같은 짓을 해야 했다. 난 그때 예순 살이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일흔다섯 살 때 언니와 형부가 시골집에 내려가 있는 2주 동안 언니네 집으로 가 발코니에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미술 도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나뿐이었다. 태양이 내리쬐고 바람 소리와 도로의 자동차 소리만 들렸다. (…)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완전히 몰두한, 정말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댄스 수업. 금요일 아침마다 노부인들이 교회 강당에 모여서 즐기는 이 재미에 흠뻑 빠지곤 한다. 마흔한 살부터 이 수업을 들었고 지금은 마흔여섯 살인데, 그곳에 오는 사람들 중에 내가 제일 어리다. 우리는 상상의 꼬리를 흔들고(촤악 펼쳐지는 공작 깃털이나 솜털 같은 토끼 꼬리를 상상한다), 상상 속의 목욕물을 찰박이고, 구름을 간지럽히고, 새처럼 짹짹거리고, 허공을 할퀴고, 발이 마시멜로 안에 잠겨 있는 것처럼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정말 재미있다.
활기 넘치는 개와 던진 물건 물어 오는 게임 하기.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난 서른두 살이다.
중학교 때 있었던 일이다. 엄마와 함께 내 침실을 프랑스 파리 느낌이 물씬 풍기는 분홍색 방으로 꾸몄다. 새로 단장한 방에서 맞은 첫날 밤에 엄마와 나는 가장 멋진 잠옷을 차려입고 쿠키를 먹으면서 영국식 억양으로 긴 대화를 나누는 파티를 했다. 그런 우리 모습이 너무 재미나서 밤새도록 웃었다.
스무 살 때 시베리아 북부 오지(아직 소련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때까지 서구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폐쇄적으로 살고 있었다. 백야가 계속되는 여름 방학에 전 세계에서 온 10여 명의 대학생과 함께 한 달간 환경 자원봉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어느 주말, 어린이 캠프를 방문해서 함께 노래하고 작은 호수에서 물장구를 치며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하지만 그 여름날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아이들 100명이 뿜어내는 순수한 진심과 철없음 그리고 노래가 완벽한 경이로 가득한 그들의 세상으로 우리를 불러들였다. 그 덕에 나 자신을 잊고 그냥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기념하게 됐고, 그 일은 내 DNA에 각인돼 있다. 더 괜찮은 표현을 찾을 수가 없는데, 어쨌든 정말 재미있었다. 음식과 음악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영혼에서 깨어난 순수함을 담아 마음껏 웃고 새로운 걸 만들며 긴 여름날을 순수하게 축하한 그 경험은, 재미의 완벽한 본보기다.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사람들이 들려준 일화의 세부 사항은 전부 달랐다. 어떤 재미는 자연 속에서, 어떤 재미는 음악, 신체 활동, 창의성, 참신함, 어리석은 행동을 통해 얻었다. 때로는 친구들이 함께 있었고, 낯선 사람과 함께한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에너지는 모두 같았다. 기쁘면서도 꽤 감동적인 뭔가가 있었다. 가벼운 기분과 충만함, 너무나 짜릿하고 자유롭고 전염성이 강해서 황홀감을 느낄 정도의 흥분도 있었다. 진정한 재미를 느낀 순간은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그런 경험들이 인생을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준다. 그 기억이 지닌 감정적인 힘은 진정한 재미가 경박하지 않고 심오하다는 증거다.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적고 나면(앞서도 말했지만 내가 재미의 정의를 제시하기 전에 적은 것이다), 재미라는 말을 접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재미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추가로 물어봤다. 놀랍게도, 그들의 답변 중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 것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억제할 수 없는 열정”이라고 썼고 또 어떤 사람은 “순수한 기쁨, 행복, 그리고 사랑!”이라고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답변은 이것이다. “마음이 넓어지고 공중으로 둥둥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본능적인 가벼움. 웃음과 기쁨이 흘러넘쳐서 지금 있는 곳 외에는 세상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은 것.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 해방감. 평소보다 약간 무모해져서 내면의 아이가 밖으로 나와 놀 기회를 주는 것.”
당시 다섯 살이던 딸에게 재미를 색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더니, 잠시 생각한 뒤 “햇빛색”이라고 말했다. 혼자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시베리아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친구와 맨발로 진흙 속을 걷고, 개를 데리고 물건 물어 오기 놀이를 하는 등의 다양한 경험에서 어떻게 똑같이 활력 넘치는 에너지가 솟아나는 걸까? 무엇 때문에 햇빛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런 경험들에 대해 읽을수록 진정한 재미는 끝없이 다양한 맥락에서 발생할 수 있더라도 모든 사람과 상황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한다는 확신이 더욱 깊어졌다.
진정한 재미는 장난기, 유대감, 몰입의 결합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상태가 동시에 일어날 때마다 진정한 재미를 경험한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매우 간단하지만 완전히 이해하려면 각각의 요소를 깊이 분석해봐야 한다.
진정한 재미는 사람들이 장난을 칠 때만 생겨난다. 장난기란 어떤 행동을 하면서 그 결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가벼운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을 의미한다.
펀 스쿼드가 공유한 사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재미에는 의무감이 따르지 않는다. 장난기는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장난을 칠 때 눈에 보이는 보상이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 일상적인 책임에서 벗어나 편안함을 느끼고, 자주 미소 짓고, 쉽게 웃음을 터뜨린다. 사람들은 장난을 칠 때 생기로 반짝인다.
진정한 재미는 항상 유대감, 즉 다른 사람 또는 다른 무언가와 특별한 경험을 공유하는 듯한 느낌을 동반한다. 그런 느낌은 당신이 물리적 환경, 참여 중인 활동 또는 반려동물이나 자신의 몸과 평소와 다르게 연결돼 있다고 여길 때 발생하는데 대개는 다른 사람과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진정한 재미를 설명할 때 누군가와 함께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동시에 자신을 온전히 느꼈다고 말한다. 외향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내향적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펀 스쿼드의 사례들에 따르면 내향적인 사람은 다수의 낯선 사람보다 몇몇 친구들 사이에서 진정한 재미를 경험할 가능성이 크지만, 외향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혼자 있을 때는 경험하지 않는다.
몰입은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현재의 경험에 완전히 몰두하는 상태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다. ‘즐거울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그게 몰입이다. 자의식과 비판(자기가 하는 비판이든 남이 하는 비판이든)은 몰입에 큰 해를 끼치며 집중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한창 경기를 치르는 운동선수나 자기가 만들어내는 멜로디에 도취된 음악가를 생각해보라. 또는 어떤 일이나 대화에 푹 빠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1시간이나 지났다는 걸 깨달은 적이 있지 않은가? 몰입은 현재의 순간에 우리를 붙잡아두는 능력이 있기에 진정한 재미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그게 없으면 진정한 재미는 일어날 수 없다. 펀 스쿼드가 공유하는 모든 경험은 몰입의 맥락에서 발생했다.
장난기, 유대감, 몰입은 각각 독립적으로 성취, 기쁨, 만족감, 행복, 경외 같은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끌어낼 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장난기나 유대감, 몰입감을 느끼게 하는 경험을 한 뒤에 “글쎄, 그냥 시간 낭비였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 특히 생산성에 집착하는 물질주의적인 문화권에서 이걸 측정 기준이나 목표로 사용하지 않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이 세 가지 상태 가운데 두 가지를 함께 경험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열띤 대화를 나누거나 종교 모임에 참석할 때는 타인과 연결된 몰입이 발생할 수 있다. 십자말풀이를 하거나 도자기를 만드는 등 혼자만의 취미에 푹 빠져 있을 때는 장난스러운 몰입이 발생할 수 있다. 누군가를 향해 나도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친구와 둘이서만 아는 농담을 나누는 등 외부와 분리된 상황에서도 장난스러운 유대감이 생긴다. 이런 조합은 전부 추구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장난기, 유대감, 몰입이 동시에 발생하면 마법 같은 결과가 생긴다. 진정한 재미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재미의 정의를 내린 뒤, 펀 스쿼드 회원들에게 이 정의가 그들의 경험에 부합하는지 확인하자 많은 것이 이해됐다. 장난기·유대감·몰입은 모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집중한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진정한 재미가 생기를 북돋아 주는 힘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진정한 재미에 따라오는 짜릿한 느낌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 에너지의 강도와 지속 시간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은, 진정한 재미를 느꼈던 어떤 사건은 잠깐만 기쁨을 줄 뿐 기억에 남지 않지만 어떤 건 더 오래 지속되면서 평생 기억되는 이유를 명확히 알려준다.
장난기·유대감·몰입은 우리가 그걸 느끼는 순간에만 존재하는데, 이는 진정한 재미가 오로지 현재 시점에서만 발생한다는 매혹적인 사실을 설명한다. 또 행복이나 만족감 같은 긍정적인 상태와 다르게 진정한 재미는 ‘경험’이다. 즉, 진정한 재미를 느끼는 모든 사례에는 시작과 끝이 있어서 그 감정을 계속 느낄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 때문에 재미를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