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Faber. Ein Bericht by Max Frisch
© Suhrkamp Verlag Frankfurt am Main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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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Translation © 2021 by Eulyoo Publishing Co.,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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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정미경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이방인과 양가성’에 대한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4년 독일 베를린자유대학 초빙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현재 경기대학교 글로벌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독일 현대문학, 젠더, 영화와 문학, 아동청소년문학 등이다.
옮긴 책으로 『몸앓이』, 『팀 탈러, 팔아 버린 웃음』, 『지붕 위의 카알손』, 『카알손은 반에서 최고』, 『돌아온 카알손』 등이 있다. 저서로 『키치의 시대, 예술이 답하다』, 공저로 『문학의 탈경계와 상호예술성』, 『독일영화 20』, 『오늘날의 유럽』이 있다.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호모 파버
발행일·2021년 7월 30일 초판 1쇄
지은이·막스 프리쉬│옮긴이·정미경
펴낸이·정무영│펴낸곳·(주)을유문화사
창립일·1945년 12월 1일│주소·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9-48
전화·02-733-8153│FAX·02-732-9154│홈페이지·www.eulyoo.co.kr
ISBN 978-89-324-0506-3 04850 978-89-324-0330-4(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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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정거장
두 번째 정거장
주
해설 현대에서 고대로, 기술 문명에서 자연으로 거슬러 가는 여행
판본 소개
막스 프리쉬 연보
일러두기
* 인명이나 지명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했으나, 옮긴이 의견에 따라 일부 굳어진 명칭은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폭설로 인해 세 시간이나 지체한 뒤 우리는 뉴욕의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했다. 비행기는 이 구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퍼컨스텔레이션 기종이었다. 타자마자 나는 곧장 잠을 청했다. 벌써 밤이었다. 탑승하고도 바깥 활주로에서 40분을 더 기다렸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눈발이 활주로 위로 분설이 되어 날리다가 소용돌이쳤다. 신경이 들떠 금방 잠들지 못한 건 스튜어디스가 나눠 준 신문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 최대 네바다 비행기 추락 사고’ 특보는 정오에 이미 읽은 기사였다. 나를 예민하게 한 건 바로, 정지해 있는 비행기 엔진이 공회전하며 덜덜거리는 진동이었다. 게다가 내 옆자리에 앉은 젊은 독일 남자도 왠지 신경 쓰였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띄었다. 외투를 벗어도, 자리에 앉아 바지 주름을 잡아도, 하물며 누구나처럼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그냥 자리에 앉아 출발을 기다리기만 해도 희한하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붉은색 피부에 금발인 이 사내는 안전벨트도 하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했다. 한 단계씩 가속치를 올리며 굉음을 내는 엔진 때문에 이름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난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지연된 비행기가 출발하길 기다리는 세 시간 내내 아이비는 내가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결혼하자고 졸라 댔다.
혼자 있으니 맘이 편했다.
마침내 출발했다.
난 여태껏 이토록 눈보라가 심한 날 이륙해 본 적이 없었다. 랜딩 기어가 새하얀 활주로에서 비상하자마자 황색 유도등이 사라지고 희미한 불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는 폭설에 맨해튼의 불빛 한 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보이는 거라곤 격렬하게 요동치다 다시 출렁거리는 비행기 날개의 녹색 점멸등뿐이었다. 심지어 이 녹색 점멸등마저 짧은 순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흡연 표시등이 들어왔다.
옆자리 사내는 뒤셀도르프 출신이었다. 30대 초반 정도였으니 그리 젊은 축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보다는 젊었다. 그가 주저 없이 내뱉은 말에 따르면 과테말라로 가는 중이었고, 내가 이해하기로는 사업상 여행이었다.
상당히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옆자리 사내가 내게 담배를 권했다. 딱히 피울 생각이 없었지만 난 내 담배를 꺼내 물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다시 신문을 집어 들었다. 나로서는 영 내 소개를 하고픈 맘이 없었다. 아마도 불친절하게 보였을 거다.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는 회의에, 힘겨운 한 주를 보낸 터라 그만 쉬고 싶었다. 사람을 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잠시 후 일을 좀 하려고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아쉽게도 때마침 뜨거운 고기 수프가 나왔고, 이 독일 남자를 더 이상 말릴 재간이 없었다(그의 어눌한 영어에 내가 독일어로 답하자 그는 금방 내가 스위스 사람임을 알아챘다). 그는 날씨며,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레이더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으레 그렇듯 유럽의 형제애로 진격했다. 난 몇 마디 하지 않았다. 고기 수프를 다 떠먹고 나서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비행기 날개 위 녹색 점멸등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때때로, 비행할 때 그렇듯 번득번득 섬광이 일고 모터 보닛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행기는 점점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난 잠이 들었다.
돌풍이 잦아들었다.
대체 왜 이렇게 신경을 건드리는지 모르겠지만, 전형적인 독일인 얼굴을 한 그가 왠지 낯익었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붉은 기운이 도는 그 얼굴을 뇌리에서 떨쳐 버리려 하자, 정말 그렇게 되었다. 얼마나 피곤했던지 어림잡아 여섯 시간을 내리 잤다. 하지만 깨어나자마자 그자가 다시 신경을 긁었다.
그는 벌써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자는 척했다.
(오른쪽 눈으로 보니) 우리는 미시시피강 위 어디쯤엔가에서 고도를 유지하며 순항 중이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프로펠러가 반짝이고 특별할 것 없는 창들로도 훤히 내다보일 정도였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텅 빈 공간에 고요히 떠 있는 비행기 날개 역시 반짝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우리도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수백 번도 더 한 여느 비행과 다름없이 모터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도 답례했다.
“잘 주무셨어요?” 그가 물었다.
아래에서는 운무가 피어오르고 위로는 햇살이 눈부셨지만 미시시피강 지류를 알아볼 수는 있었다. 황동과 청동 같은 물줄기가 흘렀다. 이른 아침이었다. 너무 익숙한 구간이었다. 좀 더 잠을 청하려고 난 눈을 감았다.
그자는 로로로 문고판 책을 읽고 있었다.
눈을 감아 봤자 아무 소용 없었다. 말짱하게 깨어 옆자리 남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마치 눈을 감은 채 그를 흘끔거리는 꼴이었다. 결국 난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 짐작하기로, 이자는 미국을 처음 방문한 것 같은데, 미국에 대한 평가를 벌써 끝내 놓은 상태였다. 그는 (대체로 미국인들은 문화인이 못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저런 점이 있다고 했다. 예컨대 대부분의 미국인은 독일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거다.
난 뭐라고 반박하지 않았다.
독일 사람 누구도 재무장을 원하지 않지만 러시아인들이 미국을 그렇게 하도록 종용한다는 것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자기는 코카서스 전투에 참여했다면서 스위스인(그는 호의를 가지고 슈비처*라고 말했다)인 나는 그 전투에 참여한 적이 없으니 이 모든 걸 판단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러시아 사람이라면 자기가 잘 아는데, 무기를 들어야만 뭘 좀 가르쳐 줄 수 있는 족속이라는 거다. “러시아인이라면 잘 알지요!” 그는 여러 번 그 말을 했다. “오직 무기로만 뭘 좀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다른 방법은 러시아인에게 씨도 안 먹히니까요.”
난 사과를 깎았다.
“저 훌륭한 히틀러가 말한 대로 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을 나누는 건 물론 말도 안 되지만, 아시아인은 아시아인인 거잖아요.”
난 사과를 깨물었다.
면도도 할 겸, 15분 정도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서류 가방에서 전기면도기를 꺼냈다. 난 독일 사람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요아힘이라는 독일 친구가 있긴 하지만……. 화장실에서 자리를 옮길 수 없을까 궁리했다. 이 옆자리 신사 양반과 더는 가까워지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가 환승하는 멕시코시티까지는 최소한 네 시간은 남아 있었다. 난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빈자리도 있던 터였다. 면도를 한 뒤 전보다 더 자유롭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며|난 면도하지 않은 상태가 정말이지 싫다|객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바닥에 떨어진 내 서류를 누가 밟을까 봐 집어 두었다가 내밀었다. 그로선 개인적인 호의를 표한 셈이었다. 서류를 가방에 넣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런데 너무 과하게 감사를 표했던지, 그는 그 기회를 틈타 냉큼 다른 질문들을 해 대기 시작했다.
“혹시 유네스코에서 일하시나요?”
꿈틀, 위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최근 자주 있는 일이긴 한데, 그렇다고 심각하거나 특별히 통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사람에게 위장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멍청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그렇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자리에 앉아 이 불쾌감을 떨쳐 버리기 위해 내 업무인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 원조’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이라면 딴생각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든 국제기구가 그렇듯 유네스코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나를 슈비처 취급하지 않고 내가 무슨 권위자라도 되는 양 내 말에 귀를 기울였는데, 그 모습에선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비굴해 보일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그가 내 신경을 건드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중간 기착을 해서 기뻤다.
비행기에서 내려 세관 검색대 앞에서 헤어지는 순간 좀 전에 들었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요아힘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었다. 요아힘의 얼굴이 그처럼 붉은빛이 돌고 통통한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다시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곳은 텍사스주 휴스턴이었다.
늘 겪는 일이지만, 지구의 반을 나와 함께한 카메라로 인해 번거로운 수속을 마치고 세관을 나와 한잔할 겸 곧장 바로 갔다. 그런데 뒤셀도르프 친구가 벌써 바에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자리 하나를|아마도 나를 위해서겠지!|비워 두고 말이다. 난 그길로 화장실로 내려갔고, 달리 볼일도 없던 터라 손을 씻었다.
환승 대기 시간은 20분이었다.
손을 씻고 말리는 몇 분 동안 난 거울 속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밀랍처럼 하얗고 자줏빛 혈관이 두드러져 잿빛과 누런빛이 돌아 시체처럼 끔찍한 행색이었다. 네온사인 탓이려니 하며 손을 씻었다. 손도 누렇고 자줏빛이었다. 그때 공항 내 어디에나 들려 지하층까지 나오는 흔한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밖은 뜨겁지만 이 화장실은 시원한데 손에서 땀이 났다. 기억나는 건 거기까지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옆에 뚱뚱한 흑인 여자 청소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좀 전에는 있는 줄도 미처 몰랐었는데 그 여자는 이제 바짝 붙어 있었고, 검은 입술의 거대한 입과 선홍색 잇몸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 몸을 숙인 자세로 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곧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거듭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곧 비행기가 이륙합니다.”
이런 안내 방송이라면 익히 아는 바다.
“멕시코, 과테말라, 파나마행 모든 승객 여러분께서는…….” 그 사이로 엔진 소음이 들렸다. “5번 게이트로…….” 다시 엔진 소음. “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난 몸을 일으켰다.
흑인 여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노라 맹세하면서 얼굴을 파이프 아래 기대려고 했지만 세면대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더워서 발작을 일으킨 거야. 별거 아니야. 어지럽고 더워서 발작이 난 것 뿐이야.
“승객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금방 다시 기분이 나아졌다.
“페이버 승객님! 페이버 승객님은…….”
나였다.
“안내 데스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을 들으며 나는 공용 세면대 물에 얼굴을 적셨다. 비행기가 나를 빼놓은 채 그냥 계속 비행했으면 하고 바랐다. 물은 내 땀보다 딱히 더 차갑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흑인 여자가 갑자기 왜 웃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웃어 대느라 그녀의 가슴이 푸딩처럼 출렁거렸다. 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녀의 거대한 입이며 곱슬머리, 희고 시커먼 눈이 아프리카를 클로즈업해 놓은 것 같았다. 다시 안내 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곧 이륙합니다.” 흑인 여자가 내 바지를 이리저리 훔쳐 주는 동안 난 휴지로 얼굴을 닦았다. 심지어 빗질도 했는데, 오직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스피커에선 연이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도착, 출발 어쩌구 하더니 또다시 나를 찾았다.
“페이버 승객님, 페이버 승객님…….”
여자는 사례비를 줘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살아 있고 주님이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라는 거였다. 지폐를 무작정 찔러 줬으나 그녀는 흑인 출입 금지 구역의 계단까지 따라와서 극구 지폐를 내 손에 도로 쥐여 주었다.
바는 비어 있었다.
난 등받이 없는 의자에 미끄러지듯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바텐더가 차가운 잔에 올리브를 넣고 술을 따르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행동을 지켜봤다. 그는 얼음이 잔으로 퐁당 떨어지지 않도록 은색 칵테일 셰이커 앞에 달린 체를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있었다. 난 지폐를 내밀었다. 바깥에서는 슈퍼컨스텔레이션이 이륙하기 위해 내 앞을 지나 활주로로 향하고 있었다. 날 태우지 않고 말이다! “승객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며 다시 안내 방송을 시작했을 때 난 마티니드라이를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익히 아는 굉음으로 막 머리 위를 날아오를 슈퍼컨스텔레이션이 엔진을 돌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그러다가 다시 안내 방송.
“페이버 승객님! 페이버 승객님께서는…….”
그게 나란 걸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마냥 기다릴 수는 없겠지, 난 혼잣말을 했다. 전망대로 나가 우리 비행기를 바라봤다. 얼핏 봐도 이륙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셸 정유회사 유조차는 가 버렸지만 프로펠러는 아직 돌아가고 있지 않았다. 우리 비행기의 승객 무리가 탑승하기 위해 빈 광장 너머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뒤셀도르프 친구 양반은 상당히 앞쪽에 있었다. 난 프로펠러가 작동하기를 기다렸다.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더니 다시 쫑알대기 시작했다.
“안내 데스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아니었다.
“셰르본 승객님, 로젠탈 승객님께서는…….”
난 하염없이 기다렸다. 네 개의 십자형 프로펠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 한 사람을 기다리는 이런 짓거리라니,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다시 안내 방송이 나오자 난 지하층으로 내려가서 화장실 빈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숨어 버렸다.
“페이버 승객님, 페이버 승객님!”
여자 목소리였다. 다시 땀이 나기 시작하자 어지러울까 봐 털썩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보면 발이 보였다.
“마지막 안내 방송입니다.”
거듭되는 멘트. “마지막 안내 방송입니다.”
대체 왜 숨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꼴등이 되는 건 평소 내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스피커가 나를 포기한 걸|최소한 10분은 그랬다|확인할 때까지 난 계속 숨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계속 비행할 마음이 도통 내키지 않았다. 슝 하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슈퍼컨스텔레이션, 그건 내가 익히 아는 소리다!|들릴 때까지 난 잠긴 문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 다음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띌까 봐 얼굴을 문질렀다. 보통 사람들처럼 화장실 칸에서 나온 뒤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홀에서 모종의 신문을 샀다. 이 텍사스주 휴스턴이라는 데에서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갑자기 내가 없어지다니!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올 때마다 매번 귀를 쫑긋하다 몇 가지 일을 처리하러 웨스턴 유니언 공항 우체국으로 갔다. 나 없이 멕시코시티로 날아갈 수하물과 관련해 전보를 보내야 했고, 우리의 조립이 24시간 연기되어야 한다고 카라카스에 전보를 치고 뉴욕으로도 전보를 보내야 했다. 내가 막 볼펜을 다시 집어넣는 순간, 한 손에 승객 명단을 든 우리 스튜어디스가 내 팔꿈치를 붙잡았다.
“여기 계셨군요!”
난 할 말을 잃었다.
“늦었어요, 페이버 승객님. 늦었다고요!”
소용없게 된 전보 용지를 손에 든 채 난 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은 온갖 핑계를 늘어놓으며 우리의 슈퍼컨스텔레이션이 있는 곳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바닥과 트랩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마치 감옥에서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처럼 걸어갔다. 내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트랩은 곧장 기체에서 분리되어 멀어져 갔다.
“미안합니다.” 내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승객들은 모두 안전벨트를 한 채 한마디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뒤셀도르프 친구 양반은 얼른 다시 창가 자리를 내주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걱정했다. 난 시계가 멈추었노라고 말하며 태엽을 감았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이륙이었다.
곧이어 나의 친구 양반이 들려준 얘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위장 장애도 사라진 터라 이제 그 친구가 약간 괜찮은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는 독일 시가가 아직 세계 최고 수준은 아니란 걸 인정하고는, 질 좋은 연초가 좋은 시가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도를 펼쳤다.
그의 회사가 확장할 예정인 과테말라 플랜테이션은 플로레스에서도 오직 말을 타고나 갈 수 있는 세상 끝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멕시코 지역인 팔렝케에서는 지프로 곧장 갈 수 있다고, 심지어 내시*라면 이 정글을 관통해서 갈 거라고 그가 주장했다.
그로선 초행길이었다.
종족은 인디오.
역시나 저개발 지역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우리는 길을 내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어쩌면 작은 비행장도 있어야 할 텐데,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교통을 연결하고 푸에르토 바리오스에서 선적할 수 있게 하는 거였다. 대담하게 한번 일을 벌여 보는 것도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로 독일 시가의 미래가 달린 일일지도 모르니.
그는 지도를 접었다.
나는 행운을 빌었다.
어차피 50만 대 1 척도인 그의 지도에서는 뭘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얀색 면은 미지의 땅이었고 초록색 국경 사이로 난 두 개의 파란 선은 강이었다. 유일하게 표기된 이름(붉은색으로 씌어 있었는데, 돋보기로 봐야 읽을 수 있었다)은 마야 유적지 정도였다.
난 다시 한번 행운을 빌었다.
그의 형제 중 하나가 몇 달 전부터 거기 어딘가에 살고 있는데, 기후 때문에 고생하는 게 분명했다.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평원의 열대성 기후에다 우기의 습함, 작열하는 태양…….
이걸로 우리의 대화는 끝났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아래로는 푸른색 멕시코만(灣)과 작은 구름 떼, 초록 바다 위에 드리워진 보랏빛 구름 그림자가 펼쳐졌다. 늘 보던 색채의 향연이었다. 그런 거라면 벌써 영상으로 찍을 만큼 찍었다. 난 아이비가 내게서 훔쳐 간 잠을 보충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비행기는 이제 고요히 날았고, 옆자리 양반도 조용했다.
그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난 소설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꿈도 마찬가지다. 아이비 꿈을 꾼 것 같은데, 어쨌든 쫓기는 기분이었다. 현실에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카지노 바였다. 계속해서 스피커에서는 내 이름을 불러 대는 소리가 나고 한바탕 야단법석이더니 돈을 딸 수 있는 파랑, 빨강, 노랑 슬롯머신과 즉석 복권 판매기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현실에서 나는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이혼하기 위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은사님이신 취리히 공과대학의 O 교수님도 오셨는데 완전히 센티멘털한 분위기였다. 그분은 수학자이자 전기역학 교수임에도 계속해서 울었다. 민망한 일이었지만, 가장 황당한 일은 바로 내가 그 뒤셀도르프 작자와 결혼한 사이라는 점이었다! 난 저항하려고 했지만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는 도저히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 치아가 몽땅 빠져 조약돌처럼 입에 가득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곧장 바깥을 내다봤다.
우리는 망망대해 위에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왼쪽 엔진이었다. 프로펠러 하나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뻣뻣한 십자 모양을 하고 서 있었다. 그게 다였다.
말했듯이, 발아래는 멕시코만이었다.
최소한 외모로는 아직 애처럼 보이는, 스무 살 남짓한 스튜어디스가 나를 깨우느라 왼쪽 어깨를 잡았었다. 그녀가 녹색 구명조끼를 내밀며 뭐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난 상황을 파악했다. 내 옆자리 남자는 구명조끼를 막 채우고 있었다. 이런 유의 비상 훈련을 받을 때 그렇듯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최소한 2천 미터 상공을 날고 있었다.
윗니 오른쪽 네 번째에 있는 의치는 말할 것도 없고 빠진 이는 물론 하나도 없었다. 문득 안심되고 솔직히 즐거운 기분마저 들었다.
앞쪽 복도에 기장이 나타났다.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닙니다.”
단지 주의하기 위한 조치다, 우리 비행기는 심지어 엔진 두 개로도 비행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멕시코 해안에서 약 1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탐피코를 향해 가고 있다, 모든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정을 유지해 주시고 잠시 금연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합니다.”
모든 승객이 가슴에 녹색 구명조끼를 입고 교회에서처럼 앉아 있었다. 난 정말로 흔들리는 치아가 없는지 혀로 살펴보았다. 다른 일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시각은 10시 25분.
“미국에서 폭풍우로 인해 지연되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이 시각쯤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을 텐데 말이에요.” 난 뒤셀도르프 친구에게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하기 위해서였다. 난 엄숙한 분위기를 싫어한다.
대꾸가 없었다.
난 그에게 정확한 시간을 물었다.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남은 엔진 세 개는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하나 고장 난 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비행기가 고도를 유지하고 있는 게 보였다. 연무 속으로 해안이 나타났다. 일종의 석호였다. 그 뒤로는 늪이 보였다. 하지만 탐피코가 보일 낌새는 전혀 없었다. 난 옛날에 생선을 먹고 식중독에 걸린 적이 있어 탐피코라면 잘 알았다. 그 식중독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탐피코는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도시예요. 기름으로 얼룩진 항구지요. 이제 곧 아시게 될 겁니다. 기름 냄새, 아니면 생선 비린내가 진동해요.” 내가 말했다.
그는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지 충고드리는데, 선생님, 생선은 드시지 말아요. 절대로요.” 내가 말했다.
그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토착민들은 당연히 면역이 되어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요…….” 내가 말했다.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말하자면 아메바에 대해, 내지는 탐피코에 있는 호텔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뒤셀도르프 친구가 내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는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건 평소 내 방식이 아니다. 난 서로 소매를 잡는 이런 식의 광기를 정말이지 싫어한다. 하지만 그가 도통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난 1951년, 그러니까 6년 전 탐피코에서 생선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킨 이야기를 지루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는 동안 비행기는 알려 준 대로 해안을 따라가지 않고 갑자기 내륙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탐피코로 가는 게 아니었다! 말문이 막힌 난 무슨 일인지 스튜어디스에게 알아볼 참이었다.
다시 흡연이 허용되었다!
아마도 탐피코 비행장이 우리의 슈퍼컨스텔레이션(그 당시는 DC-4 기종이었다)에는 너무 작거나 아니면 엔진 결함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시티로 계속 비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산맥을 코앞에 두고도 난 우리가 멕시코시티로 비행 중인 걸 알아채지 못했다. 우리의 스튜어디스는|난 그녀의 팔꿈치를 잡았는데, 말했듯이 이건 평소 내 방식이 아니다|설명해 줄 시간이 없었다. 기장의 호출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고도를 높이며 비행하고 있었다.
난 아이비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고도를 점점 높이고 있었다.
아래로는 여전히 얇고 혼탁한 늪지대가 펼쳐지고, 그 사이로 곶과 모래가 보였다. 늪은 녹색이었다가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었는데,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립스틱처럼 새빨간 늪도 있었다. 원래는 늪이 아니라 석호였다. 태양이 반사되는 곳에서는 금속으로 된 술이나 알루미늄 은박지처럼, 어찌 되었건 금속성 물질처럼 반짝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야트막한 누런 웅덩이와 더불어 파란 하늘색이나 (아이비의 눈 색깔 같은) 물색으로 바뀌더니, 자줏빛 잉크를 뿌린 듯 반점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아마도 해초인 것 같았다.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에선 미국식 밀크커피처럼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역겨웠다. 몇 킬로미터 내내 석호만 보였다. 뒤셀도르프 친구도 비행기가 상승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다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스위스 에어 항공사가 항상 비치해 두는, 제대로 된 지도가 이 기내에는 없었다. 비행기가 육지로 접근해 가는데도 탐피코를 향해 간다고 하는 이 멍청한 정보가 맘에 걸렸다. 그것도 세 개의 엔진으로 고도를 높이면서 말이다. 나는 번쩍거리는 세 개의 원형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착시 현상으로 인해 가끔 멈춘 것처럼 보이자 예의 불길한 경련이 일었다. 신경을 곤두세울 이유는 없었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프로펠러 하나가 십자 모양으로 뻣뻣하게 서 있는데 최고속으로 나는 광경이라니.
우리의 스튜어디스는 딱해 보였다.
그녀는 광고에 나오는 사람처럼 미소 짓는 얼굴로 한 줄 한 줄 걸어가며 구명조끼를 입어 불편함은 없는지 물었다. 농담을 건네자 그녀의 웃음기가 싹 가셨다. 산악지대에서 수영을 할 수 있기나 한 건지 내가 물었던 것이다.
명령은 명령이었다.
나는 딸뻘 정도로 어린 그녀의 팔을, 그것도 손목을 잡고는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물론 농담으로!) 그녀가 나에게 이 비행을 하도록 강요했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가 그렇게 했다고 말했다.
“고객님, 위험한 상황이 아니에요, 전혀요. 우리는 약 한 시간 20분 후에 멕시코시티에 착륙할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누구한테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미소 지으며, 안전벨트를 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는 임무를 다하도록 그녀를 놔주었다. 잠시 후, 그녀는 아직 점심때가 아니었는데도 식사 주문을 받았다……. 다행히 지상의 날씨는 좋았고, 거의 구름 한 점 없었다. 구름은 거의 없었지만 산악 지대에 이르면 으레 그렇듯 돌풍이 일고 예의 온난 상승 기류가 나타났다. 그래서 비행기는 하강하며 흔들리다 다시 균형을 잡고 결국 상승했지만 다시 흔들리는 날개로 하강하곤 했다. 몇 분 동안 고요하게 비행하다 다시 덜컹거리며 날개가 흔들리고 건들거렸다. 마침내 비행기가 제자리를 잡고 더는 문제없을 것처럼 상승하다 다시 흔들리곤 했다. 돌풍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저 멀리 푸른 산맥이 보였다.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산맥이었다.
아래로는 붉은 황무지가 펼쳐졌다.
그 직후, 뒤셀도르프 양반과 내가 점심으로 그린 샐러드를 넣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새하얀 샌드위치와 주스를 막 받았을 때 갑자기 두 번째 엔진마저 고장 나자 사람들은 당연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릎에 점심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이 순간부터 모든 일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다른 엔진마저 고장 날까 두려워 비상 착륙을 결정한 것이 분명했다. 어쨌든 우리는 하강했고, 스피커가 지지직거려서 방송되는 지시 사항을 거의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선 이 점심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되었다.
두 개의 엔진으로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하강하고 있었다. 착륙 전에 그러듯 움직이지 않는 랜딩 기어 바퀴를 공중에 내놓고 말이다. 나는 점심을 그냥 통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아직 적어도 고도 500미터 상공에 있었다.
이제 돌풍은 잦아들었다.
금연 표시등도 점등되었다.
비상 착륙 시 비행기가 산산조각 나거나 화염에 불타는 등 위험을 의식하면서도 내가 평정심을 잃지 않는 데 나 자신도 놀랐다.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말했지만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발아래로 모래사막이 보이더니 암벽과 같은 구릉 사이로 평평한 골짜기가 펼쳐졌다. 완전히 헐벗은, 말하자면 황무지였다.
숨죽이듯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비행기는 아래에 활주로가 있는 양 하강했다. 나는 머리를 창문에 갖다 댔다. 원래는 제동 날개가 밖으로 나오고 마지막 순간에야 이런 활주로가 보이는 법인데. 제동 날개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비행기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선회 비행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비행기는 착륙에 유리한 평평한 곳을 날고 있었다. 비행기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림자는 비행기보다 더 빠르게 씽씽 날아, 마치 붉은 모래 위로 회색 누더기가 펄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암벽이 나타났다.
비행기는 다시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시 모래사막이 나타났다. 하지만 용설란이 있는 모래였다. 두 개의 엔진이 풀가동되어 집 높이 정도 고도를 유지하며 날았다. 랜딩 기어가 다시 들어갔다. 그러니까 동체 착륙을 하시겠다! 우리는 평소 날던 높이대로 날았다. 랜딩 기어도 없이 꽤나 고요한 상태로 말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집 높이 정도의 고도였다. 활주로가 나타날 리 만무하단 걸 잘 알면서도 난 얼굴을 창문에 바짝 대고 있었다.
활주로도 없는데 돌연 랜딩 기어가 다시 빠져나오더니 제동 장치까지 가세했다. 마치 주먹으로 배를 가격당한 느낌이었다. 브레이크가 잡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는 듯한 느낌. 마지막 순간 난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양쪽에서 질주하는 용설란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결국 비상 착륙은 순전한 부딪힘이자 무의식 상태로의 추락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찾아온 정적.
달리 마땅한 표현을 못 찾겠는데, 정말이지 천운이 따랐다. 아무도 비상문을 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꼼짝하지 않았다. 우리는 안전벨트를 한 상태로 앞으로 쏠린 채 매달려 있었다.
“움직이세요!” 기장이 말했다. “여러분, 움직이세요!”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자, 움직이세요!”
다행히 불이 나지는 않았다.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야 했다. 문이 열렸지만 익히 봐 왔던 식의 트랩은 물론 나오지 않았다. 오븐을 열었을 때처럼 열기가 훅 들어왔을 뿐. 공기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난 다치지 않았다.
마침내 줄사다리가 설치되었다!
누가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날개 아래 그늘로 모여들었다. 황무지에서는 말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기라도 한 듯 모두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의 슈퍼컨스텔레이션은 약간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앞쪽 랜딩 기어만 덜렁거렸는데, 그것도 모래에 함몰되어서 그렇지 멀쩡했다. 시리듯 푸른 하늘에는 십자 모양의 프로펠러 네 개와 세 개의 꼬리 날개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말했듯이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기장이 입을 열 때까지 모두 기다리는 눈치였다.
“음, 도착했네요!” 기장이 웃었다.
사방천지 보이는 거라곤 용설란과 모래뿐. 좀 전에 어림잡아 본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붉은 산맥이 놓여 있었다. 온통 누런색 모래 천지였다. 그 위로 뜨끈한 공기가 녹은 유리처럼 어른거렸다.
시각은 11시 5분.
난 시계태엽을 감았다.
녹색 구명조끼를 입은 채 별다른 행동하지 않고 둘러서 있는 동안, 태양으로부터 타이어를 보호하기 위해 승무원들이 담요를 끄집어내 왔다. 대체 왜 아무도 구명조끼를 벗지 않는 건지.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타마울리파스에 비상 착륙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이 헹케라는 젊은 친구를 알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나에 관한 소식을 다시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라는 걸 오늘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타마울리파스에 비상 착륙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마도 자베트가 죽지는 않았을 거다. 모든 일이 그리된 게 우연 이상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명이란 말인가? 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수학이면 충분하다.
수학적으로 풀이해 보면 이렇다.
개연성(정사각형 주사위를 60억 번 던졌을 때 숫자 1이 나올 확률은 10억 번가량 된다)과 비개연성(같은 주사위로 여섯 번 던졌을 때 숫자 1이 나올 확률은 1이다)은 본질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도수에 따라 나누어지고, 이 경우 원천적으로 빈도수가 더 높은 것이 더 믿을 만하다. 하지만 비개연적인 일이 한 번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더 고차원적인 일도 아니요, 문외한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기적이나 그 비슷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개연성에 대해 말할 때는 물론 비개연성을 가능성의 한계 상황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비개연성이 발생하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경탄하거나 경악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음을 참고하라.
에른스트 몰리, 『개연성과 법칙』; 한스 라이헨바흐, 『개연성 이론』; 화이트헤드, 러셀 공저 『수학 원칙』; 미세스, 『개연성과 통계학과 진실』.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황무지에서 우리는 3박 4일, 총 85시간 체류했다. 여기에 관해서는 별반 보고할 거리가 없다. (내가 그에 관해 이야기할라치면 누구나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마어마한 체험은 없었다. 덥기는 또 얼마나 더웠는지! 물론 나도 스펙터클한 디즈니 영화를 얼른 떠올리고 잽싸게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별달리 눈길을 끄는 건 전혀 없었고,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한 도마뱀이나 일종의 모래거미 같은 게 전부였다.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타마울리파스 황무지에서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이란 바로 뒤셀도르프 양반에게 나를 소개하는 거였다. 그가 내 카메라에 관심을 보였다. 난 렌즈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책을 읽었다.
얘기하다 보니 곧 알게 된 것이지만, 다행히도 그는 체스를 둘 줄 알았다. 난 여행 다닐 때 항상 휴대용 체스를 챙기곤 하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구원받다시피 했다. 그가 코카콜라 빈 상자 두 개를 냉큼 구해 와, 우리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피해 멀찍이 비행기 꼬리 날개 아래 그늘로 가서 자리 잡았다. 옷을 벗어젖히고, 모래의 열기로 인해 신발과 자키 팬티만 걸친 채.
오후 시간이 휙 지나갔다.
저녁노을이 물들기 직전, 군용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 뭐 하나 던져 주는 것 없이 오랫동안 맴돌다 북쪽 몬테레이 방향으로 사라졌다. 난 이 모든 걸 촬영했다
저녁 식사로는 치즈 샌드위치와 바나나 반쪽이 나왔다.
체스를 두는 몇 시간 동안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 체스란 게임은 정말이지 좋다. 상대방이 뭐라 말해도 들을 필요조차 없다. 체스 판만 들여다 볼뿐, 개인적인 일 따윈 물어볼 필요도 없고 진지하게 체스 게임에 몰두해도 무례한 행동이 아니다.
“선생님 차례예요!” 그가 말했다.
그가, 최소 20년간 소식을 듣지 못한 내 친구 요아힘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동생이라는 사실은 우연히 밝혀졌다……. 지평선에 검게 늘어선 용설란들 사이로 달이 뜨자 (이 또한 나는 촬영했다) 체스 게임을 계속할 정도로 환했지만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담배나 한 대 피울 겸 모래가 있는 밖으로 나갔다. 거기서 난, 황무지는 말할 것도 없고 경치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고백했다.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죠!” 그가 말했다.
이 모든 게 그에게는 엄청난 체험거리라는 거였다.
“그만 자러 갈까요?” 내가 말했다. “슈퍼컨스텔레이션 호텔로요. 숙박 시설이 완비된 사막에서 보내는 휴가죠!”
추웠다.
사람들이 체험담을 말할 때면 난 대체 그게 뭔지 종종 궁금했다. 난 엔지니어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 익숙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대상을 난 모두 아주 정확히 본다. 난 장님이 아니지 않은가. 타마울리파스 사막 위로 떠오른 달을 본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행성을 돌고 있는 계산 가능한 덩어리고, 중력의 문제로 흥미롭긴 하지만 어째서 그게 엄청난 체험이라는 건가? 나는 달빛 아래 시커멓게 보이는 톱니 모양의 바위들을 본다. 그것들이 어쩌면 원시 시대 동물의 톱니 모양 등짝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것이 바위, 즉 암석임을 알고 있다. 아마 화산 작용으로 생겨난 것 같은데, 그건 나중에 조사하고 확인해 보면 될 터. 겁낼 이유가 무엇인가? 원시시대 동물이 더 이상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것들을 상상해야 한단 말인가? 미안하지만, 내 눈에는 화석화된 천사가 보이지 않는다. 악마도 마찬가지고. 난 보이는 것만 본다. 지질 침식의 일반적인 형태들, 거기에 더해 모래 위로 드리워진 나의 긴 그림자 같은 것을 본다. 하지만 유령은 보지 않는다. 뭐 하러 여자들처럼 약해져야 한단 말인가? 난 노아의 홍수가 아니라, 바람에 물결치는 모래가 달빛에 비친 모습을 본다. 이런 게 내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환상적이지도 않고 설명 가능한 사실이다. 난 빌어먹을 영혼이라는 게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모른다. 사막의 밤, 검은 용설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내가 보는 것은 용설란이라는 식물이다.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죽는 식물. 나아가 난 내가 (이 순간 그렇게 보일지라도) 지구상 최초의 인간도, 최후의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게다가 내가 최후의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상상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히스테리를 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산맥은 산맥일 뿐. 빛에 따라서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시에라마드레오리엔탈산맥이고, 우리는 죽음의 왕국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사막에 있는 거다. 가장 가까운 도로에서 100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이라는 게 좀 난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엄청난 체험이라는 건가? 내게 비행기는 비행기일 따름이다. 난 거기서 명이 끊긴 새 한 마리가 아니라 엔진에 결함이 생긴 슈퍼컨스텔레이션을 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달빛은 제 마음대로 비행기를 비출 수 있을 테고. 전혀 있지도 않은 것을 왜 내가 체험해야 한단 말인가? 영원의 소리 같은 것을 듣겠다고 마음먹을 순 없다. 걸음을 뗄 때마다 모래가 서걱거리는 소리 외에 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추워서 덜덜 떨리지만 일고여덟 시간이 지나면 다시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세상의 끝일 이유가 있는가? 단지 무언가를 체험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난 녹색의 밤에 하얗게 빛나는 모래벌판 끝 지평선을 본다. 여기서부터 30킬로미터는 됨 직하다. 어째서 거기 탐피코 방향에서 내세가 시작된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난 탐피코를 알고 있다. 순전히 상상으로 인해 불안해하거나 순전히 불안으로 인해 환상적으로 되는 것, 곧 신비주의를 난 거부한다.
“자, 갑시다!” 내가 말했다.
헤르베르트는 서서 여전히 체험하고 있었다.
“근데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요아힘 헹케라고, 취리히에서 공부한 적 있는 친구가 있는데, 혹시 그 사람과 친척 아니에요?”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 윗옷의 깃을 올려 세운 채 우리가 서 있었을 때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막 기내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요아힘요? 제 형인데요.”
“뭐라고요!” 내가 말했다.
“그렇다니까요. 과테말라에 있는 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참 좁군요!”
사람들은 외투와 담요를 덮고 덜덜 떨며 며칠 밤을 기내에서 보냈다. 물이 남아 있는 한, 승무원들은 차를 끓였다.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요?” 내가 물었다. “20년 동안 소식을 전혀 못 들었어요.”
“네, 뭐 잘…….” 그가 말했다.
“당시엔 친한 사이였는데.” 내가 말했다.
내가 전해 들은 말은 그렇고 그런 것들이었다. 결혼했고 애가 하나 있었고(내가 흘려들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중에 좀 더 알아봤을 텐데), 전쟁이 난 뒤에는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뒤셀도르프로 돌아왔다 등등.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이가 어떻게 드는지 놀랄 따름이었다.
“우리는 형 걱정을 하고 있어요.” 그가 말했다.
“왜요?”
“형은 저 아래서 유일한 백인이거든요. 그런데 두 달 전부터 소식이 끊겼어요.”
그가 계속 형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