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
Patricia Highsmith 1921~1995 |
‘불안의 시인’ ‘서스펜스의 대가’로 불리며, 우리 시대 최고의 범죄소설과 심리소설 작가로 손꼽혀온 미국의 소설가. 1921년 1월 19일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했다. 바너드 대학에서 소설 창작과 극작법을 공부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고, 트루먼 카포티의 지지를 받아 1950년 장편소설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출간해 큰 주목을 받았다.
50여 년 동안 꾸준히 활동하며 『캐롤』(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출간), 『아내를 죽였습니까』, 『재능 있는 리플리』, 『심연』, 『올빼미의 울음』, 『유리 감옥』 등 수많은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중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집필에 매진했고, 장편소설 『소문자 지(g)』를 마무리한 뒤인 1995년 2월 4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하이스미스는 생전에 에드거 앨런 포 상, 오 헨리 상, 프랑스 탐정소설 국제 부문 그랑프리, 미국 추리작가협회 특별상, 영국 추리작가협회 은상 등을 수상했으며, 사후인 2008년에는 <더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로 꼽혔다. 『레이디스』는 심리소설 작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초기 소설 열여섯 편을 발굴해 묶은 탄생 100주년 기념 소설집으로, 하이스미스 고유의 주제와 특징인 ‘어두운 상상력의 세계’와 ‘타인에 대한 불안한 감정’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Ladies
by Patricia Highsmith
Copyright © 2020 by Diogenes Verlag AG Zurich
Korean translation rights © 2022 by Bookhouse Publishers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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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Diogenes Verlag AG
through Shinwon Agency Co.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신원 에이전시를 통해 Diogenes Verlag AG와 독점 계약한 (주)북하우스 퍼블리셔스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일러두기
1. 주석은 모두 옮긴이 주다.
2. 본문 중 고딕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이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은 인버라라게이그 산 높은 곳에 빽빽한 숲으로 고립되어 프레스턴팬스 산길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 배움과 신학의 기관은 15세기 초반에 크레이겐퍼톡이라는 수녀가 운영했는데, 모든 면에서 너그러웠지만 단 한 가지 수칙은 철저히 지켰다. 어떤 남자도 수녀원 내에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수녀들은 당연히 모두 여자였고(아마 위계가 스무 단계쯤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도 모두 여자아이들이었으며,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수녀원 관리인이나 난로에 장작을 넣는 인력까지 모두 여자로 구했다. 바꿔 말해 살아 있는 곤충이라면 몰라도 수녀원 내에 남성 유기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어린 소녀들은 수녀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아이들은 두 살 때 수녀원에 들어왔는데 주변 시골에서는 모두 이를 크나큰 특혜로 여겼다) 남자는 아예 보지 못했고 성경에 나오는 남자들 말고는 남자 이야기를 듣지도 못했으며 남자라는 성 자체가 흐지부지 사라졌다고 배웠다.
그러다 킬리크랭키 수녀가 프레스턴팬스 산길 근처에서 메리를 발견했다. 아기는 배의 갑판에서 덮는 무릎 담요에 싸여 있었다. 메리가 여자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아니다. 내가 이야기를 좀 성급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뿐이다. 훌륭한 맥길리코딩키클러프표 타탄체크 담요에 싸여 발견되었을 때 메리는 채 한 살도 되지 않았고, 킬리크랭키 수녀는 보자마자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수녀원으로 돌아가서 크레이겐퍼톡 수녀 앞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킬리크랭키 수녀만큼 아이에게 홀딱 반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아이라는 걸 알고 나서는 더 그랬다. 그러나 킬리크랭키 수녀는 수녀원 내부 정치를 이리저리 주물러 아이를 데리고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한테는 뭐라고 말하죠?”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물었다.
“아니, 그냥 여자 이름을 붙여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킬리크랭키 수녀가 대답했다.
이름은 메리로 정했다. 어쨌든 수녀원의 어린 여자아이들 대다수가 메리였으니까. 메리는 세례식을 받고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수도복을 입었으며 네 살이 되자 공부하고 명상할 자기만의 방을 배정받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에서는 공부와 명상을 거의 하지 않았다. 기숙사 주강당 끝에는 알이 작은 스페인산 땅콩이 큰 나무통 가득 들어 있었는데, 공부하고 명상하는 시간은 이 나무통까지 가면서 수다를 떨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땅콩을 까먹고 또 땅콩을 더 가져오려고 나무통에 가고 하느라 계속해서 끊겼다. 땅콩이 어떤지는 다들 알 것이다. 일단 까먹기 시작하면 뭐… 그래서 수녀들 본인들도 겉으로는 명상하는 아이들을 감시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로는 땅콩을 가지러 나오곤 했다.
그나마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변명은 학문 기관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녀들은 누구나 의무적인 정원 일에 더해(대체로는 스페인 땅콩을 재배하는 일에 시간을 바쳤다) 한두 가지 과목을 가르쳤다. 오전에는 프랑스어, 영어 철자법, 문법, 작문 수업이 있었다. 오후에는 기초 동물학과 식물학, 수학 수업이 있었는데 수녀원에 곱셈표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녀들은 관대했고 수업은 한 시간을 꼬박 채우는 법이 없었다. 실제로 한 시간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그들이 아는 모든 걸 학생들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 매 교시 마지막 십오 분은 게임이며 서로에게 칠판 지우개를 던지는 놀이로 채워졌다.
열 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메리는 친구들의 여성성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했다.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고, 반항적으로 굴었고, 모든 게임에서 놀이 친구들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전반적으로 여자아이들보다 약간 더 거친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메리는 페티코트의 우주 속에 꼭꼭 감춰놓은 소년다움의 훌륭한 표본이었다.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아이는 수녀원에서 모두가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반려동물 같은 존재였다. 수녀들은 메리에게 저녁 여덟 시 잠자리를 준비하기 전에 인사를 하러 오라고 하곤 했다. 그들은 가운 바람으로 메리를 맞았고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렸다는 사실을 메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몹시 조심했다. (메리가 온 후로 킬리크랭키 수녀가 머리카락을 조금 길렀는데, 길이가 이 센티도 되지 않아서 꼭 ‘축구 선수’처럼 보인다는 뜬소문을 핑키클러치 수녀가 퍼뜨린 적도 있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에 갇힌 사람들은 통행금지 종이 울리는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에 야식을 먹었다. 샌드위치, 케이크, 핫초콜릿, 쿠키, 파이와 과일이 담긴 삐걱거리는 쟁반들이 튼실한 수녀원 요리사들의 손에 들려 기숙사로 운반되었고, 여자아이들과 수녀들은 저녁 여섯 시에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 공부와 명상 시간에는 스페인 땅콩까지 주워 먹고도 언제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수녀들 사이에서는 메리와 함께하는 짜릿한 시간에 대한 수요가 엄청나게 많았다. 음식을 빌미로 메리에게 특별한 대접을 제안했고, 그들은 항상 메리의 살을 통통하게 찌우려 애썼다. 메리는 식욕은 엄청난데 너무 말랐어, 쯧쯧쯧!
열 살밖에 안 되는 나이였지만 메리는 독자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크레이겐퍼톡 수녀를 졸라 수녀원 꼭대기 층에 있는 불길하고 먼지 쌓인 오래된 도서관의 열쇠를 얻어냈다. 그러고는 크레이겐퍼톡 수녀를 끌고 계단을 올라 그림 속 성자들의 수염에 손가락을 대고 철저한 해명을 요구했다.
“저건…”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숨찬 소리로 경멸을 담아 말했다. “남자다!”
“왜 얼굴에 털이 났어요?”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자란 어린 남자아이가 자라서 되는 거야.” 그녀는 애매하게 돌려 대답했다. “하지만 넌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남자들은 다 없어졌으니까.”
“남자아이가 뭐예요?”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대답했다. “남자아이란 여자아이가 아닌 아이야.” 아이가 여자가 아니면 몹시 끔찍한 일이라는 말투였다.
“아.” 메리가 말했다.
그러나 메리는 용감하고 독립적인 마음의 소유자였다. 메리는 다른 학생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쀼루퉁해서는 미간을 찌푸리고 도서관에서 지나치게 오래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는 심지어 가끔 끼니를 거른다는 말이 돌았다. 수녀원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수녀들, 특히 크레이겐퍼톡 수녀와 킬리크랭키 수녀는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으로 메리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쥐여주는 답으로는 메리가 만족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남자’에 대한 메모들과 단상들을 마음 깊은 곳에 일단 넣어두고, 수녀원 도서관에서 후속 조사를 해서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덫으로 킬리크랭키 수녀와 크레이겐퍼톡 수녀를 잡겠다고 결심했다.
불행히도 도서관에는 생물학이나 비교 해부학에 관한 책이 아예 없었다. 뻔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먼지 쌓인 기초 식물학 책들이 몇 권 있어 메리의 열렬한 마음에 처음으로 과학적 연구 방법의 묘미를 알려주었다.
사실 킬리크랭키 수녀가 가르치는 동물학은 인간의 정신이 창안한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메리는 네 살 때부터 그녀의 수업을 들었는데, 수녀원의 커리큘럼에 따라 (오후 두 시에서 세 시까지) 그 반에 들어가긴 했지만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 그래도 수업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교재가 없어서 숙제로 읽어야 할 책도 없었다. 교재가 없었던 이유는, 이 주제에 대한 정보라는 게 결국은 남성과 여성의 요소로 무조건 이어질 테고 그런 이야기를 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 달 또 한 달, 일 년 또 일 년이 지나는 동안 메리는 킬리크랭키 수녀가 딱새우, 생쥐, 개구리, 아귀 등을 해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개구리들은 바로 이 명확한 목적을 위해 수녀원 뜰의 분수에서 길러졌다. 또 킬리크랭키 수녀는 다른 유기체들을 구하기 위해서 매주 특별히 프레스턴팬스 산길 아래 바닷가의 조수 웅덩이까지 다녀오곤 했다. 수녀는 그 작은 분지를 조수 웅덩이라고 부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개구리(암피비 아 살리엔테)의 변태를 추적하는 수업에서는, 조수 웅덩이는 또한 개구리 변태의 초기 단계를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 정보는 영문과 과장인 크레이겐퍼톡 수녀에게 전달되었고,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정말로 기뻐하면서 이를 ‘향수鄕愁’와 ‘향수香水’처럼 동음이의어면서 학문 분야의 훌륭한 상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적어두었다.
* 올챙이tadpole와 조수 웅덩이tide pool를 혼동한 엉터리 가르침이다.
‘해부’는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 실험실에서 진행된 일을 묘사하기에는 너무 전문적인 기술 용어다. 킬리크랭키 수녀는 마음이 여려서 일단 동물들을 클로로포름으로 죽였지만 도저히 칼로 절개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두 손 두 발이 다 들렸다! 그녀가 생각해낸 방식은 절개만큼 깔끔하지는 않지만 확실했고 해부자 입장에서 배짱이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킬리크랭키 수녀는 해부 대상을 폭파했다. 규모는 당연히 작았다. 작은 불꽃놀이 화약을 동물 한중간에 단단히 꽂은 다음 성냥을 살짝 긋고 안전을 위해 한두 발자국 물러서면… 팍! 그러면 한순간 눈앞에, 아니면 주위에, 완전히 해체된 동물이 널렸다! 어린 소녀들은 한꺼번에 기쁨의 외침을 내질렀고, 킬리크랭키 수녀도 마찬가지였다. 반복은 자기 일에 대한 킬리크랭키 수녀의 열의를 무디게 하지 못했다. 킬리크랭키 수녀는 과학적 조사의 낭만을 강조하기 위해 여자아이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해부를 무한히 많이 해도 언제나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난다고.
(주: 킬리크랭키 수녀가 해부 때 쓰는 불꽃놀이 폭약은 수녀원 지하실의 커다란 나무통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세인트 포더링게이의 불꽃놀이 폭약을 ‘파이어크래커’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냥 ‘크래커’라고 불렀고, 먹는 크래커는 ‘비스킷’이라고 불렀으며, 비스킷은 ‘스콘’이라고 불렀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긴 수도복을 입고 허리를 벨트로 묶은 어린 메리는 실험실에서 이 과정을 지켜보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의 태도는 킬리크랭키 수녀를 불안하게 했다. 자기가 해부를 더 잘해야 하는데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크래커를 깊이 꽂았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고, 그 결과물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물러서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뜻이다. 메리가 킬리크랭키 수녀의 실험을 여러 번 비웃기까지 했기에, 착한 수녀는 아이 앞에서 권위를 완전히 상실하는 건 시간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리는 실험 수업 내내 한쪽 구석에서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서 있는 벌을 받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은 킬리크랭키 수녀가 말해준 대로만 했고, 온 세상에 그녀만 한 해부 예술가는 없다고 믿었다.
이런 상황이니 킬리크랭키 수녀는, 사실은 메리가 예뻐 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자아이들에게 메리는 행실이 끔찍한 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다들 메리를 무슨 끔찍한 존재라도 되는 듯 피하기 시작했다. 킬리크랭키 수녀와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그러면 메리가 마음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맙소사! 메리는 오히려 더 도도하고 초연해져서 도서관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뭔가 조치를 해야 해요, 수녀들은 말했다. 그것도 아주 빨리! 하지만 메리를 그토록 사랑하는 수녀들이 어떻게 아이를 벌할 수 있겠는가! 끔찍하게 골치 아픈 문제였다. 메리는 이미 손쓸 도리 없는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수녀들은 도서관 사용을 금지하고 문을 잠가버렸다. 하지만 메리는 크레이겐퍼톡 수녀의 침실에서 열쇠를 훔쳐 조사를 계속했다. 수녀들은 메리에게 실험실 구석에 세 시간 동안 서 있는 벌을 내렸다. 또 메리가 디저트를 엄청나게 좋아했기 때문에 디저트 없이 식사하는 벌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면 메리는 수녀들의 방을 찾았고, 수녀들은 다른 수녀들에게는 절대 말하지 말라면서 메리에게 케이크와 초콜릿과 미숫가루를 차려 먹였다. 메리는 하루 저녁에 세 수녀의 방을 방문하곤 했고, 두 번째 수녀의 방을 나설 무렵에는 배가 너무 불러 잘 걷지도 못했다. 그러면 세 번째 수녀(핑키클러치 수녀)가 주는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면전에 손가락을 딱 퉁기며, 수녀가 정성껏 준비한 디저트를 쳐다보기도 싫다고 거절했다. 그러면 항상 핑키클러치 수녀는 낙심한 나머지 눈물범벅이 되었다.
열두 살이 되자 메리는 세상으로 풀려날 때까지 무려 팔 년을 더 세인트 포더링게이에 갇혀 있어야 하다니 차마 못 견딜 일이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는 ‘지금’ 당장 세상을 보고 싶었다. 세상은 이 수녀원처럼 엉망진창이 아닐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몇 달이 흘러가는 사이 메리는 온 시간을 바쳐 탈출을 계획했다.
열세 살, 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크래커통이었다. 지하실에 있는 킬리크랭키 수녀의 낡은 폭약통이 그를 구원해줄 수단이었다.
아이는 지하실에 들락거리며 크래커를 수도복 안에 품을 수 있는 만큼 잔뜩 들고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킬리크랭키 수녀의 비축량을 절반 넘게 빼돌렸다.
킬리크랭키 수녀는 부족분을 알아차리고 이 문제를 크레이겐퍼톡 수녀에게 보고했다.
“쥐 떼 짓이야.”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옥수수를 베러 갔다가 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말했다.
어느 날 저녁 통 속의 크래커가 거의 다 없어졌을 때 메리는 크레이겐퍼톡 수녀를 방문해서 흰 설탕을 입히고 영국 호두를 넣은 초콜릿 케이크를 큰 조각째로 먹다가 말했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수녀원을 떠나게 해주지 않으시면 빌어먹을 수녀원을 통째로 지옥으로 날려버리겠어요!”
크레이겐퍼톡 수녀의 입이 벌어졌지만, 그건 케이크를 먹으려고도 아니었고 수녀원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도 아니었다. 메리야 늘 무시무시한 협박을 일삼았으니 말이다. 놀란 건 메리가 사용한 언어 때문이었다.
“메리, 너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잖니! 대체 어디서 그런 말버릇을…”
“이 빌어먹을 수녀원을 산산조각 박살내겠다고요!” 메리는 아직도 케이크를 입안에 가득 문 채로 수녀의 말허리를 끊었다. “킬리크랭키 수녀님한테 들어서 아실 텐데요. 통 속의 크래커가 거의 다 없어졌다는 걸요.” 메리는 불길하게 말했다.
“아… 이런 맙소사! 오! 오, 저런!”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벌떡 일어났고, 그 바람에 무릎에 놓여 있던 케이크 접시가 뒤집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메리는 남은 케이크를 입에 넣고 최후통첩을 날렸다. “제 말 기억해요. 내일 저녁 이 시각에 대답을 기다리겠어요.” 그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가며 선언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돌아보았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으, 응…”
“남은 케이크는 제가 가져갈게요!”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찬장에서 남은 케이크를 가지고 왔다. 케이크는 삼 분의 이나 남아 있었다. 수녀는 메리에게 크래커를 되돌려놓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다. 안 그러면 케이크를 주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그랬는데 문간에 서 있는 맹폭하고 단호한 꼬마의 모습을 흘끔 보고는 너무 무서워서 케이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수녀는 킬리크랭키 수녀를 불러서 당장 상의를 하고 싶었지만, 메리를 자기 방에 불렀다는 걸 동료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식사 직후에 두 수녀는 크레이겐퍼톡의 서재에서 만났다. 킬리크랭키 수녀는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함께 오만상을 찌푸리고 “아이고, 저런!”을 되뇌었다. 폭사할 생각을 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아이가 그들을 떠난다는 게 오히려 더 나쁜 일처럼 다가왔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정말로 그렇게 할까요? 아이가 폭약을 다 어디에 숨겼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거예요! 수색을 합시다! 우리 수색을 해야 해요!”
그래서 두 사람은 날아가듯 달려가서 다른 수녀들과 긴급회의를 열었고, 그들에게는 쥐 떼가 킬리크랭키 수녀의 크래커를 훔쳐갔다고 말했다. 쥐들이 갉아먹으면 폭약에 불이 붙기 쉬우니 다 같이 크래커가 숨겨진 곳을 찾아야 한다고, 수녀원의 쥐들은 말도 못 하게 똑똑하다고 말이다. 오 분도 안 되어 스무 명의 수녀들은 수녀원 경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방, 주방, 아이들. 수색은 헛수고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결과는 단 하나였다. 메리는 그들이 찾을 만한 곳을 잘 알고 있었다. 수색 과정에서 크래커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메리가 확실히 건물 전체에 폭약을 세심하게 설치해두었다는 증거였다. 어쩌면 바로 수녀들의 침실 바로 밑에 설치하고 메인 퓨즈는 어딘가 자기가 몰래 손댈 수 있는 곳에 두었을 수도 있다! 메리는 그런 일에 천재적일 만큼 기발했다!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메리를 자유롭게 풀어줘야 했다.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킬리크랭키 수녀가 말했다. “아, 아무래도 그 아이는 천재 같아요. 그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게 우리의 신성한 의무일지도 모르겠어요.”
“킬리크랭키 수녀님, 우리 커리큘럼으로는 메리에게 최고의 교육을 제공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아니, 아니에요. 크레이겐퍼톡 수녀님.” 킬리크랭키 수녀가 대답했다. 정말로 그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수녀원의 교과 대부분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찌 되었든, 메리는 언젠가 남자가 될 거잖아요.”
그러자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울기 시작했다.
점잖은 두 수녀는 반항아를 몰래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수녀들에게는 이별의 슬픔에 무너질까 봐 아예 알리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없어진 메리를 찾으면 도망간 게 틀림없다고 단순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에서 그런 사례는 처음이겠지만.
킬리크랭키 수녀와 크레이겐퍼톡 수녀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수녀원 주방 요리사들에게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 역사상 가장 멋진 케이크를 구우라고 한 것이다.
여덟 시가 되자 메리가 크레이겐퍼톡 수녀의 방에 노크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엄한 얼굴의 두 수녀를 봐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두 수녀는 사실 늑대의 옷을 입은 양이었고, 그들 앞에 있는 탁자에는 메이플 시럽에 견과류와 오렌지로 장식한 케이크가 탑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결정은 하셨나요?” 메리가 두 보호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메리.” 킬리크랭키 수녀는 감정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 케이크 정말 멋있지 않니?”
“쳇!” 메리가 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언제 자유의 몸이 되나요? 이 시설에서는 참을 만큼 참았단 말입니다!”
“메리.”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말했다. “우리는 네가 우리와 함께 있어주면 좋겠다… 그냥 팔 년만 더… 세인트 포더링게이에 남아서 언행을 고치겠다고 하면, 네 과거 행실에도 불구하고 이 어여쁜 케이크를 네게 선물로 주기로 결정했단다.”
“됐어요! 오늘 밤 열두 시 이후에는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이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시크 셈페르 팀판… 팀…”*
* ‘그러므로 언제나 폭군은 이와 같이 되리라’라는 라틴어 경구인 ‘시크 셈페르 티란니스sic semper tyrannis’를 부정확하게 기억한 것으로 보인다.
“메리.” 킬리크랭키 수녀가 노골적으로 흐느껴 울며 말했다. “프레스턴팬스 길가에서 너를 찾은 사람이 바로 나란다… 내가 너를 여기 데려와서…”
“아, 그 저주받은 날이여!”
크레이겐퍼톡 수녀가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킬리크랭키 수녀님, 우리는 이 아이를 데리고 정문까지 가서 작별 인사를 해야 해요. 인생은 힘든 과업을 떠안기지요, 친애하는 수녀님.”
킬리크랭키 수녀는 크레이겐퍼톡 수녀의 부축을 받으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 킬리크랭키 수녀가 말했다. “케이크 말이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 이 케이크는 너를 위해서 특별히 만든 것이니 네가 가져야지.”
“케이크나 먹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메리는 경멸조로 말했지만 그래도 그 거대한 구움 과자를 사양하지 않았다. 아이는 수녀들 앞에서 행진하듯 뜰로 나가 거대한 철문까지 걸어갔다.
철문 너머로 난 오솔길은 꺾어져 프레스턴팬스 산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길 끝에는, 세상이 있었다!
철문이 다시 휙 닫히자 메리는 처음으로 자유의 몸으로 섰다. 그나마 잘한 일이라고 한다면, 케이크를 내려놓고 두 팔로 착한 수녀 둘을 한꺼번에 안아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메리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은 몇 가지 다른 결말이 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메리는 세상으로 나갔지만, 정작 수녀원은 아이의 협박대로 폭발해 산산조각이 되었다는 사실. 생존자는 없었다.
인버라라게이그 산밑에 사는 사람 중에는 킬리크랭키 수녀가 크래커를 발견하고 아이를 잃은 슬픔을 못 이겨 직접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메리가 긴 퓨즈를 설치해서 문을 빠져나온 뒤 수녀원을 날려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파는 메리가 제자들에게 혼란과 잘못된 정보를 주입하는 수녀원을 그냥 두고 보지 않고 수년 후 돌아와 직접 폭파했다고 장담한다.
프레스턴팬스 산길에서 이어지는 기나긴 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볼 의향이 있다면 오늘날에도 건물 초석의 잔해 속에서 수녀원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인버라라게이그산 주민들의 생각이 일치했다. 메리가 대학에서 공부했고 훗날 한 세기를 풍미하는 선도적 과학자가 되었다는 것.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과 관련지어 내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건 금기지만,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면,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슬롯머신이 있는 지하철 플랫폼, 어느 기둥 근처에 카키색 다용도 백이 놓여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남자는 <데일리 뉴스> 만화면 너머로 그 가방을 일 분쯤 바라보더니 발작적으로 움찔거리다 커다란 머리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느릿느릿 천진하게,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예닐곱 명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살폈다. 열차가 들어오자 사람들의 구성이 바뀌었지만, 열차가 떠나고 난 후에도 카키색 가방은 여전히 주인 없이 남아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왼쪽 다리를 짚을 때는 심하게 푹 절다가, 반대편 다리를 쓸 때는 큰 키로 다시 우뚝 서면서. 어디 하나 망가진 기계처럼. 이미 잊힌 신문은 그대로 손에 들고.
한 군인이 그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서 껌 자동판매기에 일 페니를 넣고 기대 섰다. 군인의 신발이 가방 바로 옆에 멈췄다. 바지 색이 가방과 같았다. 장애인 남자는 커다란 발을 옆으로 질질 끌며 슬금슬금 멀어졌다. 다음 열차가 들어왔을 때 군인은 가방을 쳐다보지도 않고 열차에 올랐다.
다시 이 장애인이 앞으로 나서는데 그쪽으로 여유롭게 다가오는 다른 남자가 보였다. 녹색 중절모를 쓰고 로열블루 정장 위로 폴로 코트의 단추를 풀어 걸쳤으며 몸집은 작달막했다. 그의 작은 초록색 눈이 내내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장애인은 소심한 매혹에 사로잡혀 상관 않고 발을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은 소매가 스칠 정도로 가깝게 서로를 지나쳤고, 가방에서 얼마쯤 떨어지자 둘 다 돌아보았다. 한 사람은 느렸고 다른 한 사람은 여우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키 작은 남자의 시선은 흔들림 없었지만, 쪼글쪼글한 눈가에 면도도 하지 않은 얼굴은 이리저리 돌아갔다. 남자는 장애인을 쓱 훑어보고 그 평면적이고 못생긴 얼굴과 추레한 코트를 눈에 담았다. 남자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카키색 가방 쪽으로 뛰다시피 걸어가 갈색 구두로 가방 측면을 건드렸다. 발굽을 치며 반동을 주자 나무 뒷굽이 시멘트에 부딪혀 두드러진 딱딱 소리를 냈다. 장애인 남자는 몇 미터 후퇴했다. 키 작은 남자는 재빨리 플랫폼 끝으로 가더니 검은 터널을 본 다음 손목시계를 보았다.
키 작은 남자가 다시 돌아보았을 때 가방은 사라지고 없었고, 장애인 남자는 플랫폼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솟구쳤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3번가 출구 쪽으로 땅을 박박 긁으며 걸었다. 서두르진 않았지만, 치켜세운 코트 옷깃에 얼굴을 처박고 한쪽 팔로 옆구리 쪽의 공기를 허우적거리며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는 주저했지만, 곧 장애인 남자를 따라갔다. 비탈진 터널에 나무 굽 구두의 탁탁 소리가 메아리쳤다.
장애인은 몸을 힘차게 끌어올려 계단을 올랐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치고 성긴 비였다. 아직 여섯 시 십오 분경이었지만 밤이 이미 내리고 있었다. 그는 6번가로 올라가 시멘트 핸드볼 코트를 에워싼 철망, 잔디밭과 일렬로 놓인 벤치들을 지났다. 뒤에서 탁탁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났다. 장애인은 초록색 눈의 남자가 뒤를 따라오고 있음을 깨닫고 막연하게 불편해졌다. 발걸음의 보폭을 넓히고 가방을 다시 겨드랑이에 끼었다.
몇 미터 더 갔을 때 초록 눈의 남자가 불렀다. “어이!” 구부러진 손가락 하나도 쭉 폈다.
장애인은 계속 갈 길을 갔다.
“어이!” 키 작은 남자가 뛰어가서 정신없이 흔들리는 장애인 남자의 팔을 잡고 우악스럽게 돌려세웠다. “당신 갖고 있는 거, 그거 내 가방이야!” 잔뜩 가시가 돋쳐 작정한 얼굴이다.
장애인은 옆구리에 낀 가방을 쳐다본 다음 변함없는 무표정을 지었다. 커다랗고 쪼글쪼글한 입술이 열렸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키 작은 남자는 느린 눈빛, 그리고 허연 이마와 매끈한 턱 사이에 이상하게 누워 있는 코와 입을 보았다. 한쪽 귀는 흑백 체크무늬 캡 모자에 끼어 접혀 있었지만, 다른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실로 묶은 풍선 주둥이 같은 흰 살점밖에 없었다.
키 작은 남자는 장애인의 팔에서 가방을 빼앗아 지퍼를 반쯤 열어 재빨리 속을 보더니 닫았다. 그리고 상대의 차분한 눈을 홱 쏘아보았다. “도둑놈! 머저리!” 멸시하듯 입가를 실룩거렸다.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러더니 가방을 들고 6번가로 올라갔다.
장애인은 키 작은 남자의 뒷모습을, 그 옆구리에 낀 가방을 눈으로 좇으며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몸이 발작하듯 뒤채는 듯하더니, 폴로 코트를 향해 몸을 던지다시피 달렸다. 8번가로 올라가는 긴 블록을 따라. 긴 한쪽 다리로 어찌나 빨리 휘적휘적 걸었던지 불과 십 미터 거리까지 남자 뒤로 바짝 따라붙었는데, 그때 마침 가방을 채간 남자가 술집으로 들어가더니 사라져버렸다.
장애인은 발걸음에 힘을 빼고 술집 겸 음식점 앞에서 멈췄다. 캡 모자의 챙 아래 눈길이 순하게 아련한 실내를 향했다. 주차장 안내판의 미끄럽고 끈적한 봉에 손도 대보았다. 입술에서 하얀 김이 빠르게 비어져나왔다.
창을 반쯤 가린 진갈색 커튼 너머로, 맥주를 홀짝이는 남자의 간간이 숙여지는 초록색 모자가 보였다. 창가로 더 가까이 가자 남자 옆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놓인 가방이 보였다. 잠시 후 바에 앉아 있는 남자가 지퍼를 열더니 안에 손을 넣었다. 장애인은 가슴에서 납덩이가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천천히 지퍼를 닫고 일어나 머플러를 코트 아래 겹쳐 두르고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가지 않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장애인은 수줍게 몇 발 양복점 앞 인도로 물러서서 바를 바라보았다.
카키색 가방을 든 남자가 나와서 6번가를 가로질러 똑바로 걸었다. 이윽고 여자 구치소를 지나 그리니치 애비뉴 왼쪽 인도에 들어섰다.
이제 장애인은 키 작은 남자 바로 뒤까지 바짝 와서, 적당히 걷고 있는 상대의 속도에 맞춰 걷고 있었다. 먼저 초록 눈의 남자에게 정확히 뭐라고 할지 생각해야 했다. 그러나 뇌가 딱 막힌 듯 돌아가지 않았다. 적당한 그림도 적당한 말도 만들어내지 못했고, 지금 여기 말고는 다른 한순간을 상상하려 들지도 않았다. 장애인은 눈길을 카키색 가방에 못 박은 채 집요하게 길을 걸었다.
7번가에서 앞서가는 남자는 길을 건넜지만, 장애인은 파도처럼 흐르는 차량에 발이 묶였다. 불현듯 가로등이 켜지더니 삼삼오오 대로를 걷는 사람들을 비추면서 하늘을 한층 시커멓게 만들었다. 장애인은 키 작은 남자가 왼쪽으로 돌아 제인 스트리트로 향했을 때 한 블록 뒤처져 있었다. 거리는 어두웠지만, 장애인은 폴로 코트가 반사하는 창백한 빛을 볼 수 있었고 차고 앞 기울어진 인도에서 시끄럽게 부딪는 구두 굽 소리도 한두 번 정도 들을 수 있었다.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는 허드슨 스트리트에서 길을 건너 계속 서쪽으로 가다가 그리니치 스트리트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키 작은 남자의 뒷모습을 따라가던 장애인 남자는 두 블록쯤 떨어진 거리에서 빛이 환하게 밝혀진 교차로를 보았다. 가방을 든 남자가 바로 그곳으로 걸어들어갔다. 장애인은 박차를 가하고 더 힘차게 나아갔다. 돌출된 현관 계단을 지나고, 재떨이 통과 뚜껑을 지나쳐서. 가끔 질질 끌리는 발이 부딪혀서 불쾌한 소음을 냈다.
전차의 차량 모양의, 은빛 금속으로 마감한 현대적인 다이너*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장애인은 아까 술집 겸 음식점에서 그랬듯 이곳에도 천천히 다가섰다. 다이너는 높은 토대에 자리 잡고 있었고, 환하게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김 서린 유리창 너머 커다랗고 반짝이는 커피 주전자 위에 흑백의 메뉴가 한 줄로 쭉 놓여 있었다. 다이너의 긴 측면으로 가자 유리문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카키색 가방은 이제 남자의 무릎 위에 놓여 카운터 아래 꼭 끼어 있었다. 노란빛 도는 젖은 구두 한 쌍은 쩍 벌어진 채 스툴 발판에 놓여 있었다.
* 간편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미국식 식당. 대로변에 많이 있다.
바람이 강에서 울부짖으며 올라와 빗물이 다이너의 금속 벽을 철썩거리며 때렸고 환풍기에서 나오는 창백한 김을 갈랐다. 버터에 튀겨지는 햄버거 고기, 베이컨, 달걀 냄새가 훅 끼쳐왔다. 위장에서 듣기 싫은 꾸르륵 소리가 가늘게 났다. 쪼글쪼글한 입술이 돌출된 코 밑에서 더 꾹 아물렸고 파란 눈이 깜박였다.
카운터 뒤에 선 남자가 커다란 손짓으로 노란 달걀을 넉넉하게 퍼담더니, 네모난 어깨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폴로 코트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오른팔은 달걀을 퍼먹느라 바빴고, 모자 쓴 얼굴로는 버터 바른 삼각 토스트를 쑤셔 넣고 있었다. 달걀이 다 없어지자 냅킨을 뽑아 코를 풀었는데 어찌나 시끄럽게 풀었는지 바깥까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카운터 아래로 냅킨을 떨어뜨리고 이번에는 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장애인 남자는 가방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뭐가 들었는지 끄트머리가 불룩했는데, 키 작은 남자는 전혀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아마 더러운 옷일 거야, 생각하자 심장이 죄어들었다. 아니면 깡통이나 쓰레기일지도 몰라. 아니, 저 안엔 뭔가 더 좋은 게 들어 있어. 아니라면 초록 눈의 남자가 갖고 싶어할 리가 없잖아? 오렌지나 샌드위치, 양말, 아니 어쩌면 돈이 들었을지도 몰라.
드디어 카운터에 앉아 있던 남자가 접시를 밀쳤고, 모자챙 밑에서 한 줄기 연기가 휙 올라왔다. 털 많은 손에 들린 담배는 희고 깨끗했다. 남자는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던지듯 해치우고 일어나서 코트 자락을 뒤로 넘겨 바지 주머니를 손으로 찾았다.
장애인 남자는 갑자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다이너 끝쪽으로 물러섰다. 거기서는 앞쪽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왼발을 가볍게 인도에 올리고,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게 자세를 잡았다.
가방을 옆구리에 낀 남자가 담배를 피우면서 문에서 나와 한 발 내려섰다. 모퉁이에 선 형체를 알아보았다. 장애인은 곤욕스러워 몸을 꼬았다.
가방을 든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오래 서 있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 발 내려서서 걷기 시작했다. 단차를 미처 보지 못해 발에 충격이 오자 입술에 물고 있던 담배가 뚝 떨어졌다. 휘청거리던 남자는 다시 발을 멈칫하고는 장애인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똑바로 길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그리니치 스트리트를 따라 올라갔다. 남자는 전보다 더 빨리 걸었고 몇 초 후에는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어둠 속에서 뒤따라오는 장애인 남자의 소리를 들은 키 작은 남자는 처음으로 꿈틀거리는 공포를 느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방을 더 높이 추켜들었고 입가를 한쪽으로 휘어올려 웃었다. 괜찮다고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 가방은 이런 수고를 할 가치도, 이런 공포를 느낄 가치도, 저런 남자한테 쫓길 가치도 없었기에. 게다가 딱 삼 분만 더 걸으면 14번가고 거기 닿기만 하면 금세 모임에 갈 수 있었다.
장애인 남자의 움직임은 낭비가 심했다. 긴 팔은 허공을 마구잡이로 휘저었고, 걸음걸이도 걷는다기보다는 풀썩 넘어졌다가 간신히 몸을 가누고 일어서는 쪽에 가까웠다. 눈에 띄게 간격을 따라잡자 장애인 남자는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가방을 들고 집에 가서 방 침대에 앉아 열어볼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남자에게 말을 해야 했다. “나는 당신이 오기 한참 전부터 플랫폼에 서 있었어요.” 장애인은 한껏 올려세운 깃에 대고 이 문장을 연습해보았다. “나, 나, 나는, 한, 한참, 전부터 서, 서…” 큼지막한 달걀 같은 목울대가 위아래로 꿈틀거렸다. “다, 당신보다… 먼저… 서 있었다고요!” 장애인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 말을 제대로 해야 했다. 용기가 필요했다. 완벽한 행복을 느꼈던 귀한 한순간을 떠올려보았다. 그날 그 목소리와 그 말에 얼마나 행복했던가. “아치는 썩 괜찮아. 그 친구 일단 말을 하면 아주 괜찮은 얘기를 한단 말이야.” 그 말을 한 건 헨드릭스 씨였다. 언제나 웃어주고 말을 걸어주던 헨드릭스 씨. 그런 헨드릭스 씨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치, 신문 공장에서 짐을 나르는 아치,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장애인 아치는 그 말을 들은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었는데, 헨드릭스 씨가 십장인 라이젝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치는 썩 괜찮아. 그 친구 일단 말을 하면 아주 괜찮은 얘기를 한단 말이야.”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말을 그저 되새기기만 해도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던 헨드릭스 씨의 목소리가 귓전에 선했다. “아치는 썩 괜찮아…”
강인하고 아주 용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가방을 든 이 남자를 따라잡고 싶었다. 괜찮은 얘기가 되는 말들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자 이 상황이 그냥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실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장애인 남자의 발바닥이 연석에 닿아 시끄러운 굉음을 냈다.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가 등 뒤를 휙 돌아보았다. 두려움이 남자의 척추에 더 깊이 내려앉아 비정상적인 힘으로 내달리게 밀쳤다.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는 14번가 교차로를 가로질러 판판한 판석과 전차 철로를 지나 달렸다. 14번가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두세 블록 동안은 아까 있던 거리만큼 조명이 어두웠다. 다급하게 다시 그리니치 스트리트로 뛰었다. 한동안 발끝으로 걸으며, 자기가 14번가에서 어딘가로 들어가버렸다고 장애인 남자가 착각하기를 바랐다. 그때 발에 챈 무언가가 인도 위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빌어먹을!” 남자는 더러운 이를 딱딱 부딪고는 돌아서서 몸을 팽팽하게 곧추세우며 귀를 기울였다. 긁고 철썩 치고 또 긁는 소리가 가까워져왔다. 이제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대, 대체 내가 뭘 하는 거야. 미친놈한테 쫓기기나 하고.” 남자는 중얼거렸다. “14번가로 나가서 모임에 갔어야 했는데.”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느낌, 어쩐지 뒤로 질질 잡아끌리고 있었다. 키 작은 남자의 마음속에서 장애인 남자는 비현실적인 크기로 부풀어올랐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악몽에 나오는 기계 같은 형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제는 장애인 남자가 광적인 복수심에 휩싸여 가방이 아니라 그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고 믿었다. 키 작은 남자는 가방을 더 세게 움켜쥐고는, 아무리 어두워도 다음 거리에서는 나가서 어딘가 인적이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심장이 휘청거리며 무거운 두 발처럼 툭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바로 발걸음을 늦췄다. 이렇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심장이 약한 마당에. 이러다 시궁창에 쓰러져 처박히기라도 하면 어쩌지… “저놈이 밤새 나를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지! 영원히 나를 괴롭히면 어쩌지! 거지 같은 가방을 들고 미친놈한테 쫓기는 꼴을 강당에 있는 사람들한테 들키면 어떻게 하지!”
남자는 대규모 공제회의 회계 담당이었고 간혹 연설할 기회도 있었다. 이 주 전 밤만 해도 퍼터먼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맨 앞줄 이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앉아 있는 당사자를 저격했다. “동료 회원에 대해 이렇게 말해달라는 요구를 받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남자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며 말을 맺었다. “그러나 제 유일한 걱정거리는 공, 제, 회뿐입니다! …퍼터먼은 면전에서 다 괜찮다고 말하고는…” 그때 남자는 손가락을 쫙 펼쳤지만, 그 손짓은 왠지 그 장애인을 부르는 듯 느껴졌다. “그러고는 윗선에 가서 이 공제회에 대해 헛소리로 고자질했습니다! …신사 여러분, 제가 증거를 확보해 이렇게 제출합니다!” 엄청난 갈채, 퍼터먼은 구두 표결로 축출되었다. 그, 그런데 저들이 이런 상황을 알면 대체 뭐라고들 하겠…
“어이!” 장애인이 말했다. 지척이었다. “어이!” 장애인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로 노란 코트를 지분거렸다.
키 작은 남자가 펄쩍 뛰었다. “갖고 싶어? 가져가라고!” 남자는 비명을 질렀다.
“어이! 난 그냥… 난 그냥…”
그러나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는 이미 멀리 가고 없었고, 탁탁거리는 발소리도 달아나고 있었다. 거리를 벗어나 동쪽으로.
크고 야윈 손이 내려와 인도 위를 더듬거렸다. 장애인은 두 손으로 가방을 찾아 들고 두툼한 코트 팔 안에 꼭 품었다. 아치는 계속 길을 따라 걸었다. 가방을 꼭 안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애정이 솟아올라 따뜻하고 행복해졌다. 폴로 코트를 입은 남자는 벌써 마음속에서 흐릿하게 지워져 사라졌다. 장애인은 축축한 카키색 가방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옷가지 같은 냄새였다. 쪼글쪼글한 입매가 가만히 길게 펴졌다.
그대로 네다섯 블록을 쭉 걸어 20번가에서 동쪽으로 갔다. 가방에 뭐가 들어 있을지 확인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얼굴이 여느 때처럼 멍하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돌아갔다. 똑바로 앞을 바라보는 눈. 연석의 등불을 하나씩 하나씩 지나칠 때 번지는 자기 그림자, 인도의 기괴한 무늬에 가끔 머리가 일그러지는 그림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느 브라운스톤 주택에 다다른 그는 두툼한 난간을 붙잡고 몸을 끌어올려 올라가서는 열쇠를 꺼내 현관으로 들어갔다. 현관 조명은 천장에 달린 작은 알전구 하나뿐이었다. 흔들거리는 난간을 잡아당겨 계단을 올라 층계참에서마다 머리를 집요하게 찧으며 돌았다. 사 층에서 장애인은 낮고 네모난 문 앞에 멈춰 섰다. 하도 발로 차고 지문을 찍어서 갈색 페인트가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또 다른 열쇠로 자물쇠를 열었다.
집 안에서 그는 익숙하게 걸어가서 가스버너 옆 방수 천을 덮은 식탁 위의 목이 휘어지는 스탠드를 켰다. 노란색이 감도는 빛에 입방체 모양의 방이 드러났다. 해먹처럼 축 늘어지는 침대, 실패 모양의 다리가 달린 식탁, 반듯한 의자, 뒤집어서 협탁으로 쓰는 궤짝, 낡아빠진 서랍장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작은 메모들이 빙 둘러 붙어 있었다. 똑같은 간격으로 빽빽하게 써서 패턴을 형성하다시피 했다.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였다. 신문 인쇄소 직원들부터 청소부, 길모퉁이 식료품점, 담배 가게, 드러그스토어 사람들의 이름과 상세한 특징, 과거 몇 달간 광고 우편물을 보낸 잡다한 업자들의 주소까지 다 적혀 있었다.
옷장으로 쓰고 있는 한쪽 구석 천 뒤에 코트를 걸었다. 그는 두상이 상당히 길고 정수리가 판판해서, 옆모습이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굴절된 모델의 프로필 같았다. 황금빛의 아주 가는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머리통으로 아무렇게나 흘러내렸다. 방 안에서 그는 우아하게 움직였다. 완벽하게 편안한 상태로, 모든 물건의 위치를 아는 모양새로.
그는 가방을 들고 침대로 가서 울퉁불퉁한 조각보 이불 위에 부드럽게 앉았다. 금색 지퍼가 손가락에 닿자 쾌감이 오한처럼 짜르르 퍼졌다. 그 파르르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