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러시 매카들Dorothy Macardle
1889년 아일랜드 던도크에서 태어났다. 더블린의 알렉산드라 칼리지와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이후 알렉산드라 칼리지로 돌아가 영어를 가르쳤다. 게일어연맹과 아일랜드 여성평의회 회원이었으며,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체결을 두고 벌어진 아일랜드 내전에서 조약의 반대파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상의 존재: 아일랜드의 아홉 가지 이야기》(1924)를 출간했다. 매카들의 저서 중 가장 대작이자 역사가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아일랜드 공화국》(1937) 역시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내전, 아일랜드 공화국의 형성 과정 등을 다룬 것이다. 매카들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인세를 정치 활동을 함께한 동지이자 절친한 친구이며, 후에 아일랜드의 대통령이 되는 에이먼 데벌레라에게 남겼다. 극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한 매카들은 ‘마거릿 캘런’이라는 필명을 사용해 극을 썼다. 첫 소설이자 19세기 고딕소설의 전통 속에서 여성의 위치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치열하게 문제 제기 한 《초대받지 못한 자》(1941) 외의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예측할 수 없는 것》(1946), 《어둠의 마법》(1953) 등이 있다. 1958년 아일랜드 드로이다에서 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데벌레라가 그의 임종을 지켰다.
옮긴이이나경
이화여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영문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모히칸족의 최후》, 《불타버린 세계》, 《애프터 유》, 《메리, 마리아, 마틸다》, 《프랑켄슈타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젊은 개예술가의 초상》, 《너의 집이 대가를 치를 것이다》 등이 있다.
차례
제1장 클리프 엔드
제2장 중령
제3장 마을
제4장 스텔라
제5장 작업실
제6장 집들이
제7장 앤슨 신부
제8장 장날
제9장 아기방
제10장 패멀라의 실험
제11장 홀러웨이 씨
제12장 나무
제13장 중령의 방문
제14장 카르멜의 보물
제15장 화가의 모델
제16장 경고
제17장 스펠링 글라스
제18장 메리
제19장 궁지
제20장 스페인어 단어
제21장 귀환
제22장 일대일 전투
제23장 아침
해설 | 감춰진 목소리━19세기 고딕소설의 현대적 재해석
일러두기
1. 번역 대본으로는 Dorothy Macardle, The Uninvited(Tramp Press, 2015)를 사용했다.
2. 주석은 모두 옮긴이 주다.
3. 본문 중 굵은 글씨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이다.
개리에게
이 책을 받아주게. 나더러 쓰라고 한 건 자네니까. 집요하게 재촉한 건 이해해. 그해 여름 일어난 기이한 일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 사실을 곧바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기억을 의심하겠지.
내 망설임을 이해한다고 알고 있어. “증거로서, 그리고 과학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 일들이 사적인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지. 이 내밀한 이야기에서 사적인 사항은 분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했네. 이 이야기를 누군가 읽으리라는 사실을 잊으려고 노력해야 쓸 수 있었어.
자네도 나도 여기에 등장해. 자네가 법조인으로서 지키는 회의주의도, 내 섣부른 행동과 둔한 거절, 진실을 마주하라는 말을 아둔하게 거절한 것까지 다 기록했네.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자네도 나처럼 다음 글귀에 동감할 것 같아.
깊이 생각해 꾸민 음모가 힘을 잃을 때
경솔한 행동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패멀라와 내가 클리프 엔드를 처음 본 그해 4월, 무모한 분위기의 아침과 함께 참으로 기이한 운명의 장난이 시작됐으니!
로더릭
그날 아침의 들뜬 분위기는 황야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구불구불한 산들을 향해 달리는 자동차도 함께 느끼는 것 같았다.
자동차 덮개를 내리길 잘했다 싶었다. 대기 가운데 활기가 충만했다. 안개가 살짝 낀 하늘이 드높았다. 나무와 산울타리에 연둣빛 새싹이 돋았다. 새들은 바삐 날아다니고 양들은 느릿느릿 언덕을 돌아다니며 매 울었다. 패멀라는 바람에 날릴까봐 모자를 벗었다. 아침 9시 전에 출발해 바다로 향하자고 한 건 패멀라였다.
그것만으로도 무모한 짓이었다. 우리는 이미 런던에서 300킬로미터나 벗어나 있었고, 다음 날 12시에는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내일》처럼 매끄럽게 운영되는 신문사에서 매리엇처럼 편한 주간과 일한다 해도 주말을 금요일 오후 4시부터 화요일 정오 이상으로 늘릴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유명한 노스 데번의 절벽에서 대서양에 경의를 표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패멀라가 그 집을 꼭 봐야 한다고 우겼다.
패멀라는 봄날 아침이 좋아서 어쩔 줄 몰랐고 말이 많았다. “날씨가 따뜻할 거야. 오빠, 저 산사나무 좀 봐. 눈부시다! 오늘 아침엔 운이 좋을 것 같아. 어때? ‘마라톤’이라니 근사한 이름 아냐?”
내가 대답했다. “그 이름 때문에 거길 보려는 거지. 지금쯤이면 여관 주인들의 추천이 얼마나 못 미더운지 알아야 해. 좋은 곳이라면 부동산 중개업자의 매물 목록에 있었을 텐데.”
“중개업자의 매물 목록!” 패멀라가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 목록도 소용없긴 매한가지였다. “여기가 그 마을일 거야. 우회전해.”
넓은 길에서 가파르고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힐먼●은 오르막을 쉽게 올랐고, 그 집과 바다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대문 옆에 ‘마라톤’이라고 적혀 있어서 차를 세우기는 했지만 운전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북향이라 수려한 경치를 등진 삭막한 판잣집이었다.
● 1900년대 초에 생산된 영국의 자동차 브랜드.
패멀라는 환희에 차 “어머나!”를 외치더니 잠시 후 같은 소리를 신음처럼 되풀이했다. “마라톤은 바다를 내다본다고!” 패멀라가 화를 내며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잖아. 이런 곳에 저런 집을 지은 사람은 죽어서도 영영 여길 벗어나지 못해야 해.”
나는 도로가 사라지고 절벽 가장자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이 시작되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거기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도 브리스틀 해협인가? 어차피 집에서 안 보이는데 아무려면 어떠랴. 풀밭 위를 걸었다. 패멀라는 나보다 앞서 달려갔다. 그 애는 위험한 곳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나는 따라가서 그 애의 팔꿈치를 붙잡고는 강풍에 맞서 발에 힘을 줬다.
바다는 놀란 우리의 모습을 신나게 비웃는 것 같았다. 파도가 바람에 맞춰 춤을 추며 반짝였다. 파도는 해안가 양쪽으로 호를 그리며 부서졌고, 동굴과 아치, 작은 섬에 자갈이 굴러들었으며, 노란 가시금작화가 절벽을 뒤덮고 있었다. 근처에는 초록의 곶이, 그 너머에는 은빛 연무가 낀 곶들이 있었고, 런디 섬은 거인의 배처럼 저 멀리 보였다. 날마다 그곳 풍경이 시시각각 새로운 색채와 형태로 변할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풍경을 보고 싶었고, 남은 평생 그런 풍경을 간절히 바라며 살 것 같았다.
패멀라가 아쉬운 듯 말했다. “여기 집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로 돌아온 우리는 큰 도로를 달리며 지도에서 런던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았다. 아침의 황금빛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앉아 머릿속으로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런 희망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우린 어리석었다는.
한참 만에 내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어.”
패멀라는 한동안 대꾸하지 않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길 브리지 농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었는데.”
“패멀라, 넌 온종일 등잔에 기름을 따르고 욕조에 물을 채우며 지내고, 나는 책을 쓰는 대신 나무를 베고 물을 길어야 했을 거야. 그게 현명한 결정이었을까? 아니야.” 나는 가차 없이 우겼다. “슬리피 홀로의 다 쓰러져가는 낡은 방앗간이나 밝은 ‘링가-롱가’나 좀 외딴 ‘코타-번가’는 우리 돈으로 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영국은 이제 널찍하고 밝고 통풍이 잘되며 전기와 물이 있고 사생활이 보장되는, 평범하고 살기 적당한 집을 너나 나 같은 사람에게 주지 않나봐.”
“리틀우드에서 3년은 살 수 있어.”
“그리고 짬 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칠하고 목공 일을 하고 정원을 가꿔야 하지. 말했잖아. 세는 들지 않을 거라고.”
패멀라는 아무 말이 없었고 나는 당황했다. 패멀라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렸을 때는 그런 뒤에 꼭 울었었으니까. 다행히 패멀라는 웃었다. “유령 나오는 집을 산다고 광고라도 내야겠어.”
안타까웠다. 패멀라가 마음을 정한 것이 고마웠는데, 둘이 함께 도시를 탈출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한 계획은 실패로 예정된 듯했다.
6년 동안 아버지를 돌본 패멀라는 많이 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패멀라에게 블룸즈버리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하며 그 애가 내 활기찬 집에서 새로운 관심거리를 찾고 기력을 다시 얻기를 바랐다. 계획이 이뤄지는 줄 알았는데 별로 효과가 없었다. 사실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패멀라나 내게 다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렛과의 일이 있었다. 로렛이 내가 줄 수 있는 어떤 것보다 조니 메이휴와 누릴 수 있는 남들의 관심을 더 좋아하리라는 사실을 나만 빼고 모두 알았던 모양이다. 패멀라는 로렛이 나와 결혼하지 않을까봐 걱정하다가, 나와 결혼할까봐 걱정하느라 순수함과 활발한 상상력, 조소할 줄 아는 성격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지나치게 예민하고 겸손해졌다. 패멀라는 도서관 일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지만, 그러면 다시 갇혀 지내는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을 깨닫고는 그만뒀다. 결국 패멀라는 내게 말했다. 시골 생활을 원하며 질리언 롱과 함께 작은 집을 사서 라즈베리를 키우고 싶다고.
당장 몇 가지를 깨달았다. 런던은 실망스러웠다. 로렛의 활동 반경 안에서 빨리 벗어날수록 좋겠지만, 패멀라가 그리울 터였다. 영국의 검열을 폭로하고 폐지하고자 쓰는 책에는 진전이 없었고, 프리랜서 작가로도 《내일》의 기자로서 버는 것만큼 벌 수 있을 듯했다. 내가 말했다.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기뻐하는 패멀라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의욕이 타올랐다. 계획이 커졌다. 우리에게는 도시에서 완전히 벗어나 바람을 쐬고 넓은 곳에서 성장하는 삶이 필요했다. 그 깨달음을 얻고 집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 주말에만 다섯 번째 실패가 거듭됐다.
이제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소나무 사이를 지나 황야 쪽으로 향했다. 노면의 상태는 나아졌다. 교차로의 ‘비들컴’이라는 표지판이 데번 구릉에서 바다로 곧장 이어지는 곳에 자리 잡은 마을 한곳을 가리켰다. 마을 어귀의 여인숙이 좋아 보였다. 그곳의 사과주를 마셔보고 싶었지만 아직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패멀라가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서쪽을 등지니 참 우울하네. 옛날 사람들이 왜 모두 서쪽으로 향했겠어? 요정들이 사는 섬은 전부 서쪽 바다에 있지. 서쪽 사람들이 마법도 더 많이 알잖아? 그리고 음악도. 와, 오빠, 저 길이 오라고 손짓하잖아. 그냥 달려가자! 꼭대기에서 보면 전망이 굉장할 거야.”
“그래봤자 같은 전망인걸.” 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가보면 서쪽에 대한 선망이 사라지겠지!”
나는 패멀라가 좋아하도록 후진해서 가시금작화가 줄지어 자라는 작은 길로 달렸다. 길은 바위와 낙엽송 사이를 구불구불 올라가더니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울퉁불퉁한 농장 도로를 지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진달래 숲을 통과해 절벽 높이 바람이 거센 작은 들판에 닿았다. 전망은 같았지만 작은 곶이 끝나고, 서쪽뿐 아니라 남쪽으로도 바다가 펼쳐져 있어서 더 잘 보였다.
패멀라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왼쪽 나무들을 돌아가더니 전망을 등지고 섰다. 나도 그 애 곁으로 가서 빈집을 봤다.
수수하게 지은 2층 석조 주택은 참 아름다운 균형감을 지녀서 어디서든 걸음을 멈추고 바라볼 만한 건물이었다. 그런 집이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나무가 자라는 언덕이 바람을 막아줬고 북쪽으로는 방풍림이 있었다.
패멀라가 말했다. “오빠, 집이야!”
“그런 것 같네.”
집을 한 바퀴 돌아봤다. 구조가 탄탄했다. 문 양옆에 커다란 창문이 하나씩, 위층에는 창문이 셋 있는 게 조지 왕조 시대 양식의 주택 같았다. 위는 납작하고 기둥이 딸린 포치에는 채광창이 있었고, 1층의 창문은 그 채광창 곡선을 따라 얕은 아치 모양을 이뤘다. 남향이었다. 양옆이 정면보다 훨씬 길고 1층은 납작한 지붕과 함께 뒤로 튀어나와 있어서 형태가 특이했다. 그 집을 지은 사람은 2층에 방을 증축할 생각이었던 듯했다. 별채가 딸린 마당과 길 쪽으로 열린 마구간도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집이었다. 1층 창문을 보호하는 덧창은 칠이 벗겨졌고, 비스듬히 떨어진 것도 있었다. 서쪽에 있는 작은 온실은 유리가 다 깨지고 없었다. 그러나 벽은 튼튼해 보였다. 튀어나온 바위가 없는 곳에 만든 화단에는 잡초와 분홍색 나뭇잎이 가득했다. 절벽 가장자리 두 면에서 비스듬히 내려와 헤더 밭으로 연결되는 잔디밭은 전혀 손질이 안 돼 있었다. 키 작고 통통한 수선화가 자랐고 개나리가 창틀 위로 노란 꽃송이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왼쪽 멀리 등대와 해안경비대 초소 말고 다른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니 바닷소리와 갈매기 소리, 멀리서 양 우는 소리만 들렸다. 절벽은 바다로 뚝 떨어졌다. 서쪽 절벽 끝까지는 집에서 100미터도 안 됐다. 그곳에는 작은 만이 있고, 안쪽 끝에는 죽은 나무가 비틀어져 있었다. 거기 서서 내려다보니 튀어나온 바위 너머 자그마한 해변이 붉게 반짝였다. 욕심이 났다. 바위 사이 지그재그로 난 길을 달려 내려가 해수욕도 할 수 있었다. 이런 곳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오빠, 오빠.” 패멀라가 불렀다. “파는 집이래!”
패멀라는 마구간 근처 길에 서 있었다. 덤불에 가려진 빛바랜 표지판을 발견한 모양이다.
“버려진 곳이지만 우리 예산의 두 배는 할 거야. 꿈 깨.” 내가 말했다.
“비들컴, 디 애비뉴, 윌름코트, 브룩 중령.” 패멀라가 읽었다. “오빠, 어서 가보자!”
이젠 골든 하인드에 갈 좋은 이유가 생겼다. 사과주를 마시기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영국에서 무슨 상관이랴. 그 집 커피 맛은 지독했다. 우리를 맞이한 아주머니는 윌름코트로 가는 길을 묻자 깊은 관심을 보이더니 문까지 나와 배웅했다. 패멀라가 웃었다. “오빠가 단골이 될 것처럼 보이나봐.”
디 애비뉴를 포함하는 숲이 우거진 윌름코트 땅은 클리프 엔드의 마을 반대편 북쪽 산비탈에서 보였다.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가 오른쪽의 가파른 길을 오르거나 큰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아 산을 빙빙 돌아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마을이 유혹했다. 가파르게 멋대로 뻗어 있는 거리에서는 어부들이 배와 그물을 다루느라 바쁜 끄트머리의 작은 부두까지 보였다. 마을 전체에서 기분 좋은 바다 냄새가 풍겼다. 하지만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깔끔하게 손질한 울타리, 회양목, 고리에 달린 모슬린 커튼, 반짝이는 문고리로 아주 단정하게 가꾼 배 모양의 윌름코트가 나타났다.
초인종을 누르고서야 10시도 채 안 됐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문은 곧바로 열렸지만 예상처럼 깔끔한 차림새의 하녀가 나오진 않았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보는 소녀는 머리카락을 분홍색 수건으로 터번처럼 감싸고 양 뺨이 온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귀여워서 미소가 떠올랐다. 소녀는 얼굴이 더욱 빨개지더니 들어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죄송하다고 중얼거렸고, 소녀는 근엄하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받았다.
“하녀가 온 줄 알았네요. 죄송하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소녀가 말했다.
생김새는 아이 같은데, 서른 살 여주인에게나 어울리는 태도였다.
“우연히 ‘클리프 엔드’라는 집을 봤어요. 열쇠를 받을 수 있다면 실내를 보고 싶어요.” 패멀라가 말했다.
“할아버지는 외출 중이세요. 죄송합니다.” 소녀는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소녀가 나와 패멀라를 번갈아 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 집을 보시려고요?”
“가능하다면요.” 패멀라가 대답했다.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소녀는 풀 죽은 듯 말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하지만 찾아볼게요. 시간이 좀 걸려도 이해해주세요. 여기서 기다리시겠어요?”
소녀는 작지만 격식을 갖춘 식당에 우리를 앉혀두고 나가더니 곧 열쇠를 가지고 돌아왔다. 크고 녹슨 열쇠였다.
“이 열쇠가 맞을 거예요. 이걸 쓰시면 돼요. 혹시 할아버지를 기다리실 건가요?”
소녀는 조금 염려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갈 길이 멀어 시간이 없다고 했다. 소녀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열쇠를 건넸다.
“가져가세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소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방금 머리를 감아서 함께 갈 수는 없어요. 참 아쉽네요.”
“우리 때문에 차가운 바람을 쐬면 안 되죠.” 패멀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다시 놀란 표정으로 작게 웃더니 수줍지만 솔직한 눈빛으로 패멀라를 마주 봤다. 문을 닫고 나오자 소녀가 따라오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머리 감은 것을 아쉬워하면서.
열쇠는 현관문에 맞지 않았다. 집 동쪽, 창문 가까이 솟아 있는 산기슭 아래를 따라가니 작은 문이 나왔고, 그 문에 열쇠를 꽂으니 한참 뻑뻑하게 끼익하다가 열렸다. 우리는 부엌방을 통해 판석을 깐 큰 주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언덕으로 가로막히고 먼지가 잔뜩 앉아 있어서 실내가 어두웠다. 조리대, 수도꼭지, 배관마다 먼지 앉은 거미줄이 가득했다. 하지만 실내에는 전기 시설과 널찍한 조리대, 보일러가 있었다. 패멀라는 그 정도면 적당하다고 했다.
“일하기 효율적인 구조는 아니지만 넓잖아. 리지랑 고양이가 지낼 공간도 있고.” 패멀라가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리지 플린은 내가 열일곱, 패멀라가 열한 살 때부터 우리가 윔블던 집을 포기하던 때까지 식사 준비를 맡아준 사람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리지는 패멀라를 위로하고, 여주인 역할을 하도록 가르쳐주고, 아버지의 짜증을 막아줬다. 야심 차게 만든 요리를 아버지가 맛도 보지 않고 물렸을 때 두 사람이 주방에서 함께 우는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헤어지던 때에 리지는 언제든지, 어디든지 패멀라에게 돌아오겠다고 했다. 붉은 털의 고양이도 함께 올 수만 있다면. 그러니 리지가 지낼 곳도 필요했다.
“리지 마음에 들 거야.” 패멀라는 찬장과 식료품 저장실, 버터와 치즈 제조실, 세탁실, 주방 뒤의 통로와 연결돼 납작한 지붕 아래 공간을 차지하는 두세 곳의 창고를 살폈다.
그곳과 가사도우미 방을 훑어보면서 집 앞쪽으로 서둘러 갔다. 널찍한 복도를 지나니 바로 현관문이 나왔다. 문을 등지고 서서 본 복도와 층계도 마음에 들었다. 집이 작은데도 유난히 널찍하고 균형 잡힌, 넉넉해서 좋은 입구였다. 층계는 낮고 위층의 계단참에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마호가니 난간이 있었다. 거기서 다시 왼쪽 복도로 연결됐다.
계단 아래, 오른쪽에는 보기 좋은 단순한 줄무늬가 그어진 문이 있었다. 그 문과 똑같은 또 하나의 문이 복도 맞은편에도 있었다.
“우아해!” 패멀라가 오른쪽 문을 열며 감탄했다.
식당이었다. 덧창 때문에 엷은 빛만 들어와 캄캄했지만 아름다운 대리석 벽난로 선반이 딸리고 천장이 높으며 기다란 구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남쪽 창밖으로는 바다가 보일 것이고, 동쪽엔 둔덕의 그늘을 피해 낸 창문이 있었다. 여기서 아침을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툼한 실크 커튼에 상아색 칠.” 패멀라가 중얼거렸다. “웨지우드 띠 장식, 오래된 식탁, 워터퍼드 유리.”
널찍한 복도를 지나가 반대편 문을 열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렇게 아름다운 방은 처음이었다. 바닷속처럼 어두웠지만 완벽한 방의 형태, 아름다운 돌림띠 장식과 벽난로 선반이 보였다. 창문을 열어 아름답게 반짝이는 바다와 들판이 보이면 어떨지 상상됐다.
패멀라는 내 옆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정말 잘 지은 집이지?” 패멀라가 중얼거렸다.
실내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마룻바닥을 디디는 우리 발소리가 그곳의 오랜 고요를 깼다. 여기서는 마음속의 창의적인 충동을 방해하거나 가로막는 그 무엇도 없을 것 같았다. 여기서 살 수 있다면 거지가 돼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패멀라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패멀라는 흥분해서 말없이 위층으로 달려 올라갔고 나도 뒤따랐다. 패멀라는 빛나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계단참 창가에 섰다. 나는 오른쪽 문을 열었다. 응접실 바로 위에는 문으로 연결된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뜻밖에도 앞쪽 방이 더 작았다. 뒤쪽 방은 거의 정사각형이었다. 그 창문으로 아름다운 해안과 탁 트인 바다가 보였다. 앞마당에는 가지가 안으로 전부 굽은 죽은 나무가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환상적인 검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전망을 갖고 싶어.”
“가질 수 있어. 난 이 방을 갖고 싶어!” 패멀라가 신나서 외쳤다.
패멀라는 식당처럼 동쪽과 남쪽에 창을 낸 반대편 방에 가 있었다. 햇빛과 바다가 반사하는 빛이 천장과 벽에서 어른거리며 춤췄다.
“안녕히, 그대는 내가 갖기에는 너무 값지도다!”● 패멀라가 한숨을 쉬었다.
계단 쪽에 문이 달린 방을 들여다보고 패멀라에게 말했다. “실망하지 마. 여기 흠이 있네.”
●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87번의 첫 행.
동쪽 창문과 마당 쪽으로 낸 납작한 지붕을 내다보는 북쪽 벽의 아주 큰 창문이 막혀 있었다. 벽돌 난로는 너무 작았고, 붙박이 옷장들은 너무 좁고 깊었다. 그리고 방이 싸늘했다. 침침하고 꾸미지 않아 전혀 매력이 없었다.
“화가의 작업실이네.” 패멀라가 말했다. “화가인데 햇볕 없이 지내는 건 싫을 것 같아. 거미들이 좋아하잖아? 그냥 손님방으로 써야겠다.”
나는 손님 초대를 너무 좋아하는 패멀라를 놀렸다.
“내게 중요한 건 오빠랑 나, 그리고 리지야.” 패멀라가 반박했다. “그리고 오빠에겐 서재가 필요하잖아. 리지는 아래층에서 자야 하고.”
침실은 그게 전부였다. 다른 문들은 커다란 욕실, 세탁실, 다락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딸린 일종의 창고였다.
“정말 작은 집이네. 그렇지?” 패멀라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배고픈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이었다. 패멀라는 그 집을 원했다. 나도 그랬다.
“전문 건축가가 설계한 집이야.” 내가 정리해서 말했다. “전기, 상하수도 시설은 있고 상태도 매우 좋아. 테니스장은 없고 한 사람 방이 부족해. 전화는 어디서부터 끌어올 수 있을지 모르겠고. 보통 사람들의 취향과는 다른 너무 외딴곳이야. 하지만 우리 예산에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패멀라는 내 말을 들으며 잠시 우뚝 서 있었다.
패멀라가 말했다. “우린 여기서 살게 될 거야. 두고 봐.”
중령이 귀가했다. 내 명함을 가지고 들어간 하녀가 곧바로 나와 집무실 같은 방으로 안내했다. 중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일흔이 머지않아 보이는 사람이지만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파란 눈을 반짝였다. 흡사 전장에 나가는 분위기였다. “안녕하십니까, 피츠제럴드 씨.” 그는 내게 인사를 건네며 패멀라에게는 고개를 숙인 뒤 가죽 안락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회전의자에 앉아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는 내 질문을 찬찬히 듣더니 정확하게 대답했다. 그렇다.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그 집은 한동안, 정확히는 15년간 비어 있었다. 그렇다. 지붕과 바깥채들은 수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잘 지은 집이다. 건축가가 지은 집이다. 직접 살기 위해 설계한 곳이다.
“내 가족 다섯 세대가 그곳에서 건강하고 편안하게 살았소.” 브룩 중령은 거의 도전적인 말투였다. “24년 전쯤 개보수에 상당한 돈을 썼소.”
집의 자유 보유권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동쪽의 언덕과 낙엽송 숲 일부, 썰물 때는 물놀이하기에 안전한 모래 해변까지 거기에 포함됐다.
“그럼 가격은요?”
“현재 상태로 1400파운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패멀라의 표정이 바뀌었고 노인도 이마 밑에 쑥 들어간 두 눈으로 그 애에게 예리한 시선을 던졌다. 패멀라를 살피는 듯했다.
“저희가 제시하는 가격을 고려해주실 수 있을까요?” 패멀라가 말했다.
나는 수리에 큰돈이 들 거라고 하면서 1000파운드를 제시했다. 중령은 생각에 잠겨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시선을 올리며 말했다. “뭐라고 했소?” 나는 다시 대답했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래요. 그건 됐고…….”
그가 말끝을 흐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패멀라나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가?
“1000파운드에 파실 의향이 있습니까?”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재차 물었다. 중령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있더니 힘겹게 답했다. “그러겠소.”
패멀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무표정을 유지한 채 건축가를 데려다가 집을 꼼꼼히 살펴보고 보고서를 받고 싶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중령은 여전히 모호한 태도로 반스터플에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고, 그곳 은행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구해줬다. 당장 약속을 잡고 싶다면 전화를 써도 좋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아무 구속력이 없소.” 중령은 마치 소리 내 생각하는 사람처럼 덧붙였다.
나는 건축가에게도 비용이 들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동의했다. 노인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집을 확보하고 싶어 초조해졌다. 거래 자체가 그에게 손해이고 우리의 문의도 불쾌한 침범이었다. 그는 집이 싫은 것인지 집을 떠나보내는 게 싫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리처즈 씨가 반스터플에서 올 수 있다고 했다. 오후 3시에 클리프 엔드에 도착한다고. 그보다 빨리는 안 된다고 했다. 패멀라에게 야간 자동차 여행이 어떠냐고 물었다. 패멀라가 즐거울 거라고 대답해서 리처즈 씨와 약속을 잡았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나를 찬찬히 살피는 중령과 눈이 마주쳤다. 그 새파랗고 형형한 시선에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매처럼 좁다랗고 경험과 권위가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 의심스러운 표정이 드물게 드러났다. 그 집에 건축가가 밝혀낼 결함이 있는 걸까? 아니, 중령은 여러모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거래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나도 솔직하게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했고, 그는 결심이 섰다는 듯 패멀라에게 예의를 갖췄다. “셰리주를 한잔 권해도 되겠소?”
그는 하녀를 불러 셰리주를 내오라고 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메러디스 양을 불렀다. 하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살피며 나갔다. 윌름코트에 오전 손님은 드문 모양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중령은 자동차 운전 즐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서 청년 시절 타던 차 이야기를 했다. 패멀라는 쾌활하게 대답했고 나는 그사이 방 안을 둘러봤다. 흥미로운 곳은 아니었다. 서류장과 오래된 책들이 선반에 가득했다. 난로는 꺼져 있었다. 꽃도 없고, 사진도 배 사진뿐이었다. 새 책도, 항해 저널과 《더 타임스》 이외의 신문도 없었다. 방 안에 예술 작품은 단 한 점 있었다. 벽난로 위에 걸린 커다란 유화 초상화로, 그다지 잘 그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품위 있는 그림으로,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소녀의 초상이었다. 화가는 손과 머리카락, 하얀 모슬린 드레스에는 공을 들이지 않았지만 얼굴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소녀는 아름다웠다. 금발에 하얀 피부, 크고 새파란 눈을 가진 아이였다. 귀족적인 이마 위에 머리카락을 높다랗게 올렸고, 수녀처럼 양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있었다. 머리 주위에 후광과 함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배경으로 하는 그림이 쉽게 떠올랐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중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그림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행히 터번을 두른 듯한 소녀가 병과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노인이 우리를 소개했다.
“패멀라 피츠제럴드 양과 로더릭 피츠제럴드 씨란다. 클리프 엔드를 살까 생각 중이시다.” 중령이 우리에게 설명했다. “내 손녀 메러디스요. 그 집은 사실 이 아이 것이오.”
소녀는 작고 침착한 얼굴에 흥분하는 기색을 떠올렸지만 정중히 고개를 숙이더니 쟁반을 내려놓았다. 잔을 건네는 손이 살짝 떨렸다. 소녀는 패멀라와 나를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 집에서 행운이 함께하길 바라겠어요.” 소녀가 말했다.
참 특이하고 예의 바른 아이였다. 아니, 아이는 아니지. 크림색 옷깃과 소맷부리가 달린 갈색 드레스를 입고 곱슬머리를 최대한 매끈하게 빗질해 가르마를 타고 있으니 열일곱 살은 족히 돼 보였다. 행동거지는 서른 살 이상 돼 보였지만 늘 그렇지는 않았다. 소녀는 다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패멀라와 나를 바라보고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되실 거예요!” 소녀는 이렇게 외치고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잔을 들었다.
우리는 볕이 잘 드는 방들과 전망에 반했다고 했다. 소녀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근사할 거예요.” 소녀는 한숨을 쉬었다.
중령이 말했다. “식량은 어떠니, 스텔라? 손님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해도 되겠니?”
“네, 그럼요.” 소녀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초대에 응해주신다면 굉장히 기쁠 거예요.” 보호자의 압박하는 눈초리에 소녀가 덧붙엿다. “아주 소박한 식사라도 괜찮으시다면요.”
우리는 초대에 응했고 패멀라는 스텔라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중령은 내게 담배를 권했다.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피츠제럴드 양이 조금 허약해 보이는데, 이곳 공기가 도움이 될 거요.”
그래서 런던을 떠나기로 했다고 내가 말했다.
“그렇지. 섬세하고 예민한 유형…….” 중령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예민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대꾸했다.
“실례했소.” 중령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이었다. 고의로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클리프 엔드의 공기가 아주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말했다.
중령은 딴 데 정신이 팔려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바람에 영향을 많이 받는 체질인가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 둘 다 폭풍우를 좋아하는 편이죠.”
“우울한 소리를 내지. 바람이 들판 위로 불 때면.” 그가 중얼거렸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적한 곳이고…….”
“작가는 혼자 있을 줄 알아야 하고, 패멀라는 친구를 사귀면…….”
나는 말을 끊었다. 노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기다렸다. 그는 명령 신호라도 하는 것처럼 상아로 만든 종이칼로 압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더니 한참 만에 불쑥 말했다.
“내겐 확실한 의무가 있소.”
“네?”
“6년 전, 그 집에 몇 달간 누가 살았었소. 그들이 거기서 오래 살지 못했다는 걸 알려야겠소. 소란을 경험했지.”
“경험했다고요?” 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문제를 언급할 필요를 느꼈다면 대부분 ‘상상했다’나 ‘공상했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쥐 때문이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쥐 때문은 아니오.”
나는 기다렸다. 더 이야기할 것인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정원의 돌담 위에 앉은 고양이를 쳐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소.” 중령이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말을 듣거나 그만두어야 했다.
“그런 이야기라면 동생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여길 겁니다.” 내가 답했다.
“그렇소?”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그 집에 관한 모든 일을 담당하는 런던의 변호사 주소를 적어줬다. 중령은 그 집과 관련된 모든 것을 넘기길 원하는 듯했고, 나는 ‘소란’에 관해 미리 알려준 것이나 패멀라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내키지 않는 점심 초대를 하는 등 섬세하게 신경 쓰는 그의 성품을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됐다. 그는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복잡한 성격이었다. 그 소녀에게도 엄격했을까?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와 계속 대화하기 어려웠는데, 스텔라가 식사하라고 부르는 소리에 반가운 마음으로 일어났다.
맛있는 식사였다. 아스파라거스와 닭고기, 감자크로켓에 이어 따뜻한 커스터드에 비스킷을 듬뿍 올린 후식이 나왔다. 중령이 훌륭한 백포도주를 따라줬다. 식탁에서 그는 상냥하게 행동하려고 애쓰며 데번셔 남자들의 행동거지와 성품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의 건조하고 이따금 신랄한 말투에서 그 남자들에 대한 강한 호감이 느껴졌다. 몹시 들뜬 패멀라는 깊은 흥미를 느끼며 중령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노스 데번에 켈트족의 혈통이 있나요? 콘월과 웨일스 사이의 이곳이라면 그렇다고 예상할 수 있겠죠?” 패멀라가 물었다.
“없소!” 중령은 조금 날카롭게 대답했다. “웨일스인은 전혀 다른 족속이지.”
그것도 열등한 족속. 중령의 어조가 그렇게 전했다.
내 오른쪽에 앉은 스텔라는 접시만 보면서 딴생각을 하는 듯했다. 내성적인 성격인가, 투명한 성격인가? 짐작할 수 없었다. 섬세한 골격에 탄탄한 피부, 넓고 매끈한 이마와 쑥 들어간 관자놀이의 얼굴은 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계속해서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와 근육이 입술과 눈이 감추는 것을 드러냈다. 스텔라는 우리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머리에 꽂았던 빗을 벨벳 리본으로 바꾸고 목에는 얇은 금줄의 로켓 목걸이를 걸었다. 우리의 방문은 흥미진진한 일이었고 집을 파는 건 굉장한 사건이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스텔라는 질문을 천 번은 했을 것이다. 그때, 스텔라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반짝 뜨더니 외쳤다. “패멀라 피츠제럴드!”●
● 아일랜드의 독립운동가인 패멀라 피츠제럴드(1773~1831)를 가리킨다.
“스텔라!”
중령이 경악했다. 소녀는 중령의 냉혹한 눈길 아래 하얗게 질렸다.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목이 메었다. 입도 벙끗 못 했다. 패멀라는 미소를 지으며 중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중령님께선 제 유명한 선조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신 모양이네요. 그분은 오를레앙 공작의 딸이었죠. 훌륭한 분이었어요. 1798년의 아일랜드 봉기를 이끈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공과 결혼했죠. 그분이 실제로 제 조상은 아니지만 제 이름을 그분 이름에서 따온 것은 기뻐요. 그보다 더 영웅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든요.”
“글쎄올시다. 아일랜드의 반역 역사는 잘 몰라서.” 중령이 뻣뻣하게 대답했다.
패멀라는 아일랜드인의 혈기가 한번 발동하면 쉽게 기죽지 않는다. 내가 기자로서 겪은 일을 늘어놓아 주인장의 관심을 돌리려는데, 패멀라는 스텔라에게 얼마 전 대낮 가든파티 중에 더블린 근처 패멀라 피츠제럴드의 예전 집인 프래스카티에서 그녀를 본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스텔라는 패멀라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사실 놀랍지 않아요.” 패멀라가 말했다. “그분은 프래스카티에서 행복하게 지냈거든요. 영혼이 돌아다닌다면 좋아하던 곳에서 나타날 것 같아요. 그러니 영혼을 두려워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패멀라는 가볍게 말했지만 그 효과는 놀라웠다. 스텔라는 먹던 것을 멈추곤 놀라고 안도한 듯 얼굴을 환히 밝혔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스텔라가 나직이 물었다. “정말로 그렇게…….”
스텔라의 할아버지가 어찌나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패멀라를 쳐다보며 말을 막던지 나는 분노로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런 생각은…….” 중령이 경멸하는 투로 말했다.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어찌 그리도 경망스럽게, 무모하게 해대는지!”
패멀라가 중령을 봤다. 비꼬려는 걸까?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패멀라는 생각에 잠겨 천천히 말했다. “옳은 말씀이에요. 사람들은 정말 그렇죠.”
침묵이 흘렀다. 패멀라의 화제 선택이 몹시 좋지 못했다. 웨일스인, 유령, 반역은 노인이 좋아하는 주제가 아닌 듯했다. 스텔라는 초조한 기색으로 손수건을 구겼다. 거기서 강한 꽃향기가 흘러나왔다. 중령은 그걸 알아차리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스텔라는 당황해서 급히 손수건을 치우곤 부드럽게 말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제 향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잊었어요.”
“그런 것 같구나.” 중령이 대답했다.
스텔라는 일어나 패멀라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실례할게요”라고 말하며 나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침묵은 스텔라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됐다. 우리는 이웃과 그곳의 여흥거리로 화제를 바꾸려고 무도회나 아마추어 연극이 있는지, 음악은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물었다. 테니스 클럽과 (‘좀 우스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있지만 연주회나 연극 공연은 없다고 했다.
“손녀는 브뤼셀의 학교에서 최근에 돌아왔소.” 중령이 말했다. “훌륭한 학교라 학생들을 연주회와 미술관에 보낸다고 들었소. 그렇게 지내다간 여기서 재미를 느낄 만한 것이 없을 것 같소.”
스텔라는 그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브뤼셀에서 지낸 이야기를 했다. 커피가 나왔고, 우리가 클리프 엔드로 돌아갈 시각이 됐다. 스텔라가 어찌나 간절한 표정인지, 나갈 준비를 하다가 함께 갈 수 있는지 살짝 물어봤다. 스텔라는 슬픈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물어봐주세요.” 스텔라가 속삭였다.
패멀라에게 눈짓을 했고, 이미 같은 생각이었던 그 애는 노인에게 가볍게 물었다. “함께 가시겠어요? 두 분 다.”
“고맙지만 나는 차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걸어서는 한 시간이나 걸리는 길이오.” 중령이 대답했다.
“그럼 손녀분은요?”
중령은 간절히 바라는 소녀의 눈빛을 보지 않아도 분명히 느끼지 않았을까?
“미안하오. 오늘 오후엔 스텔라를 내보낼 수 없소.”
그는 구식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우리가 그 열쇠를 돌려주러 올 때쯤 자신과 손녀에겐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정중히 작별 인사를 했다.
스텔라는 실망한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체념으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초상화 속 얼굴이 짓고 있던 표정이었고, 나는 그걸 보는 게 싫었다. 흥분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표정을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패멀라는 차에서 즐겁게 열쇠 꾸러미를 짤랑거리고는 거기 붙여놓은 이름표를 읽으며 말했다. “마구간, 작업실, 화장실……. 이걸 보니 지주가 된 기분이야.”
“우리가 좀 성급했어.” 내가 경고했다. “바닥이 튼튼한지도 확인하지 않았고, 찬장을 열어보지도, 목공을 살피지도 않았어. 말라 부스러진 곳이 많을 거야.”
“말라 부스러진 곳!” 패멀라는 욕설이라도 들은 듯 외쳤다. “그 늙은이의 문제가 바로 그거야.”
“네 말에 발끈하더라. 괴팍한 늙은이 같으니.” 내가 말했다.
“괴상해. 우리한테 그 집을 팔고 싶은 거야, 아닌 거야?”
“팔아야 하는데 팔고 싶지 않은 거지.”
“그런가봐. 우리가 도와주자.”
“그 노인네 상황을 그렇게 이용하다니 너도 참 대단해.”
“음, 다섯 세대가 지나는 동안 아무도 그 노인네에게 맞선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리고 그 귀여운 애를 그렇게 괴롭히다니 참을 수 없었어.”
“애라고? 나이 차가 얼마나 된다고. 다섯 살?” 내가 놀렸다.
“그 정도야. 열여덟이라던데.”
“그렇게 안 보이던데.”
“성장하게 놔두질 않아서 그래.”
“그렇게 말했어?”
“설마. 그 애는 자기 현실을 아직 깨닫지도 못했어. 알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 거야.”
“집 때문에 굉장히 흥분한 것 같던데.”
“응, 세 살 때 떠난 후로 거기서 살아본 적 없대.”
“이상하네. 이유가 궁금하다.”
“어머니가 거기서 돌아가셨대.”
“그렇다고 그럴 건 없지.”
“그러게……. 어머니가 그 그림 속의 여인이래. 아름다운 만큼 좋은 분 같은데. 스텔라의 아버지가 그리셨대. 루엘린 메러디스, 아는 사람이야?”
“몰라. 하, 웨일스 사람이네!”
“전혀 다른 족속이지.” 패멀라가 짓궂게 흉내 냈다.
“네 편견을 발동시키지 마.” 내가 간청했다.
집 앞에 도착했다.
“오빠, 여기 진달래꽃이 피면 어떨지 생각해봐!”
“여기서 정원을 제대로 가꿀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흙이 별로 없는걸.”
“내가 어떻게든 가꿔볼 거야.”
“집이 감추는 곳이 많으니 정원도 호기심을 자극하겠네.”
마구간 앞에 차를 세우고 나무가 자란 곳을 돌아서 걸어갔다. 들판과 바다의 방종과 자유 속에서 금욕적으로 꿋꿋이 서 있는 집은 훌륭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 사는 데 만족하겠어?” 내가 물었다.
“만족?” 패멀라는 첫눈에 반한 진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제 현실적으로 판단해봐.” 집으로 들어가면서 내가 말했다.
“찬장이다!” 패멀라는 층계 아래 벽감으로 다가가며 대답했다. “다행이야, 오빠. 들어가서 전화를 걸어도 될 만큼 커!”
벽감 뒤에는 작은 옷장이 있었다. 반대편에는 하녀 방이 있어서 그 안을 다시 들여다봤다. 수풀이 창을 가렸다. 그것들을 베어내면 서쪽 전망이 보일 것 같았다. 그 옆은 철제 다리가 달린 녹슨 욕조가 놓인 오래된 욕실이었다.
“어머나, 방 하나를 빠뜨렸네!”
패멀라는 응접실과 욕실 사이의 문 앞에 서서 열쇠를 차례로 꽂아봤다. 이름표 없는 열쇠로 문을 열었다. 햇살 가득한 공간을 통과해 정면으로 구부러진 나무가 보였다.
예쁘장하고 특이한 작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연결된 공간이 있었고, 패멀라는 거기 서서 햇살을 가득 받았다. 오른쪽에는 소파가 들어갈 만큼 큰 벽감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노란 타일을 붙인 벽난로가 있었다. 빛바랜 벽지의 노란 화환 무늬가 여전히 희미하게 보였다.
“깜짝 선물 같은 방이네!” 패멀라가 황홀해하면서 말했다. “무슨 용도로 썼던 방일까?”
“흡연실이나 재봉실, 창고, 화장실.”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패멀라는 듣지 않았다. 위쪽 절반이 유리로 된,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살피고 있었다. 패멀라가 문을 당기자 유리판만 안쪽으로 열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잠겨 있었다.
“밖에서 빗장으로 잠가놨어!” 패멀라가 외쳤다. “계단은 판자로 덮어놨고. 이건 통로야. 아, 유아차가 다니는 통로! 아기방이구나. 스텔라의 방이야.”
그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잠가놓았을 것 같지만, 밖에도 튼튼한 방충망이 있었고, 걸쇠가 녹슬어 떨어졌고, 잡초가 자라 방충망이 벌어져 있었다. 그렇다. 스텔라의 방이었다.
“이 집에서 제일 예쁜 방이야. 스텔라가 여기서 하룻밤 지내면 참 좋아하겠다.” 패멀라가 말했다.
“어? 너 지금 지나치게 앞서가고 있어.”
빗장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낮은 문을 뛰어넘어 잔디밭을 가로지른 뒤 다시 나무 옆에 서서 빛나는 초승달 모양의 모래사장을 내려다봤다. 거길 가지면 바다를 가지는 셈이었다. 당장 물에 뛰어들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렸다. 한 시간 뒤 목을 매달린다 해도 바다에 들어가고 싶었다. 문득 여기 사는 로렛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일주일도 안 돼 지루해서 미쳐버리겠지. 이 산들바람에 로렛과의 기억도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 뭐, 내가 원하는 바였다.
“오빠.” 패멀라가 말했다. “생각해봐. 흙과 돌과 나무와 해변을 갖게 되는 거야.”
“생각하고 있지. 이리 와서 차고 한번 봐.” 내가 대답했다.
마구간은 차 두 대를 세울 차고가 될 것 같았다. 창문이 있는 곳과 없는 곳, 마당으로 열려 있는 작은 방들을 활용할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석재와 인건비가 비싸지 않던 시절에 가족이 늘어날 것을 고려해 지은 집이었다. 그 가족 중에서 스텔라가 마지막인 듯했다.
우리는 아기방으로 돌아갔다.
“여기까지 다시 올 순 없어.” 나는 패멀라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 치수를 재두는 게 낫겠다. 공책 있어?”
“이 방은 모두 노란색이었을 거야.” 패멀라가 말했다. “가구도, 주전자에 꽂은 민들레도. 아마 침대 옆에는 녹색 매트를 깔았을 테고…….”
나는 인도인들이 눈속임하듯이 꼿꼿이 세울 수 있는 근사한 줄자로 치수를 쟀다. 대화가 두서없었다.
“벽감은 198센티미터. 적고 있어?”
“응, 리버티 백화점에서 커튼 재료를 팔아. 노란색과 초록색으로 짠 거…….”
“창문은 208센티미터……. 응접실로 가자. 거기가 더 중요해.”
응접실 바닥은 내 카펫을 깔기에는 너무 넓었고, 마룻바닥에는 카펫이 필요 없었다.
“창문.” 내가 불렀다. “285센티미터. 예전에 쓰던 벨벳 커튼이면 되겠어. 건축가가 늦네. 루엘린 메러디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야. 실력 있는 사람이면 맥스도 알 거야.”
“고용인이었을 거야.” 패멀라가 대답했다. “커튼 덮개는 일직선, 창문은 아치형. 그렇지 않을까? 안됐지만 스텔라는 아버지를 닮았고, 노인은 그것 때문에 늘 슬플 거야. 스텔라가 무책임한 성품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해서…….”
“대체 어디서 그런 걸 다 캐냈지?” 내가 외쳤다.
“심리학적 추론이지! ……계단 카펫은 돈이 많이 들 텐데.”
“그럼 계단엔 카펫을 깔지 말자.”
“닦기 성가신데.”
“리놀륨은 깔지 않을 거야.”
“윽, 당연하지. 이렇게 고급스러운 계단에.”
“오랫동안 쓸 물건만 사들일 거야. 잠시 쓸 물건에 지출할 여유는 없어.” 내가 잘라 말했다.
“동감이야.” 패멀라가 말했다.
“물론 아직 집을 산 건 아니지만.”
“물론이지.” 패멀라가 웃고 있었다. “노인은 엄격하게 훈육하면 스텔라가 똑바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 앨 좋아하고 나름대로 잘해주고 있지.”
“계단은 스물두 단.”
“다만 가끔 그 애에게서 아들의 성격이 드러나 매처럼 달려드는 거야. 그 미모사 향을 어디서 찾았는지 궁금하다. 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스텔라가 자라지 못하게 막고, 그 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망치고 있어.”
“망할 건축가 같으니! 우린 앞으로 300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망할 사람 같으니! ……그 노인이 스텔라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스텔라에게 콤플렉스가 생길 거야.”
“세상에, 패멀라!” 나는 허리를 펴고 패멀라를 봤다. 패멀라가 이런 식으로 떠드는 건 몇 년 만에 처음이었다. “어느새 스텔라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거야?”
“글쎄.” 패멀라가 웃었다. “그렇게 내성적인 아이가 말을 했을까? 오빠, 생각 좀 해.”
“아, 그럼 다 짐작인 거야?”
“다 옳다는 데 내기라도 하겠어.”
“넌 공공의 적이야.”
클리프 엔드의 공기에서는 와인 향이 났다. 나는 그걸 축복했다. 패멀라는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런던에서 퇴각하는 데는 필사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거대한 문어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촉수 하나에서 벗어나면 또 하나에 붙잡혔다. 우선 매리엇. 늘 점잖은 그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는 해외에서의 온천 치료 지시를 받았고, 나는 5월 내내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그리고 내 후임으로 문학 기사를 담당할 클레멘트 포스터는 긴 휴가를 쓰겠다고 했다. 책을 집필하기 위해 영국 박물관에서 방대한 자료를 필사해야 하는데, 거기서 일할 시간이 저녁때뿐이라서 저녁 늦게까지 계속 일했다.
4월 19일, 클리프 엔드는 공동 명의로 영영 집세를 낼 필요 없는 우리 집이 됐다. “땅속부터 하늘까지.” 패멀라가 덧붙였다. 요즘처럼 비행기가 다니는 시대에 하늘도 포함인지는 모르겠지만.
짜증스럽게도 결국 7월이 될 때까지는 탈출할 희망이 없었다. 패멀라는 자신의 말대로 “런던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가버렸다. 그 애는 골든 하인드에서 묵었다. 나도 며칠 짬을 내 거기서 함께 지내며 집수리를 맡을 인부들을 모으고는 패멀라에게 감독을 맡겼다. 패멀라의 보고는 조금 격앙돼 있었지만 일이 잘돼간다고 만족해했다. 삼 주간 주말마다 가보고는 패멀라가 일을 대단히 잘해내며 즐기고 있음을 알았다. 그 즐거움을 놓치다니 분하기까지 했다. 윌름코트에선 도움을 제안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게 놀랍지도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까다로운 노인이 참견하지 않는 편이 나았고, 어쨌든 패멀라가 그의 손녀와 조만간 친구 사이가 될 것은 분명했다.
이상한 아이였다. 그 애를 생각하면 막 피어난 수선화가 떠올랐다.
포스터가 떠난 뒤 나는 그의 집으로 들어갔고, 가구를 보냈다. 일주일 뒤 갖가지 바구니와 고양이를 챙겨 온 리지를 패딩턴역에서 배웅했다.
“그건 제 위스키예요.” 짐꾼이 고양이가 든 바구니를 건네자 리지가 웃으며 말했다. “어딜 가나 밤낮 위스키가 있어야 하거든요.” 리지는 그 농담이 질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짐꾼도 똑같았다. “그렇고말고요, 손님.” 짐꾼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잘 간수하세요.”
리지가 얼마나 웃어댔는지! 통통한 온몸을 흔들어대고, 눈물을 흘리고 뺨을 붉히면서. 그러면 주위 모두가 웃게 된다. 아마 그 짐꾼 이야기를 몇 주 동안 계속할 것 같았다.
“위스키랑 남 이야기 하는 게 리지의 유일한 단점이에요.” 기차가 출발할 때 내가 말했다. 리지는 그때까지도 웃느라 겨우 인사했다. “잘 지내요, 로더릭 도련님! 몸 건강히!”
내 스물한 살 생일부터 리지는 잊지 않고 나를 ‘피츠제럴드 씨’라고 불렀다. 작별 인사를 하려니 그걸 잊은 모양이었다. 리지의 보살핌을 다시 받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여행도 아닌데 집이 아닌 곳에서 보내는 이 몇 주가 정말 싫었다! 게다가 맥스도 없다니.
그러나 공원에는 그늘이, 거리에는 햇볕과 산들바람이 있는 7월은 이상하게 유쾌했다. 나처럼 정직한 근로자들만 남은 런던이 진정한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런던을 포기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사라졌다. 신문사가 그리울 것 같았다. 사내 정치, 희한하고 재미있는 기고자들과 함께 펍에서 서둘러 먹는 점심 식사, 매주 마감 때의 난리. 매리엇은 독재자처럼 굴어 나를 화나게 하지만 훌륭한 사람이었고, 사무실 직원들도 보기 드물게 좋은 사람들이었다. 톰린은 내가 떠나는 것이 진심으로 속상한 듯했다. “이제 누가 ‘놉스 전하’를 관리하겠어요?” 톰린이 짜증을 냈다. 그러더니 완충장치가 사라진 놉스 전하가 자신을 억누를 거라고 했다. 나는 완충장치라 불리는 게 싫었지만, 따지고 보면 좋은 뜻으로 붙인 별명이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매리엇이 헤어지기 전에 차를 마시자며 불렀다. 그는 내 결정이 자신에게는 꽤 큰 타격이라고 했다. “자네 이름은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있네. 아주 큰 의미가 있지. 글을 많이 보내줘야 하네. 우릴 실망시키지 말게. 언제든지 연재를 제안해준다면 기쁠 걸세. 아주 기쁠 거야. 너무 고상한 글 말고. 음, ‘시골 생활’은 어떤가? ‘데번셔의 글쟁이’는? 그런 거 어때?”
나는 그런 가벼운 글쓰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속내를 애써 감추면서 아직 제대로 된 시골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첫 공연 날 밤의 추억’은 어떤가?” 매리엇이 또다시 제안했다. 은퇴한 70대에게나 어울리는 주제였지만 수락했다. 무엇보다 극장이 그리울 것 같았다. 오, 맙소사. 런던을 떠나는 건 실수일까?
로렛이 그 질문에 대답을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로렛은 도시를 떠나 있었지만, 서식스에서 전화를 걸어와 감상에 젖은 음성으로 불평하고 슬퍼했다. 그녀의 졸린 고양이 같은 얼굴이 눈에 선하고, 보드랍고 작고 미련 많은 손길이 떠올랐다. 로렛은 조니가 상냥하지 않다고 불평했다. 오랫동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하지? 로렛은 나와 즐겁고 긴 대화를 나눠야겠다며 런던으로 오겠다고 했다. 내가 너무 후련한 목소리로 곧 떠난다고 하자 로렛은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음, 그 통화는 효과가 있었다! 바람과 바다, 데번셔의 절벽을 간절히 원하게 됐다! 약속을 지키고 자기 마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그레이트 웨스트 로드●라는 이름이 강장제다. 무더운 하루가 끝날 무렵 먼지 가득한 도시에서 차를 몰아, 기울어가는 교외를 떠나 석양이 지는 드넓은 전원을 향해 달려갈 때 아쉬운 건 별로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말버러 구릉 끄트머리 여인숙에서 지저귀는 새와 샘물 흐르는 소리에 깨어나자 미련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런던과 브리스틀을 잇는 간선도로.
잠을 푹 자고 늦게 출발했다. 해가 내리쬐는 무더운 아침이었지만 고지대로 가니 바람이 불었고 한낮엔 바람결에 바다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목이 말랐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로 들어갔다가 높은 둑 뒤로 돌아가는 길에선 내내 바다가 보이지 않았지만, 드디어 만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환희에 사로잡혀 마구 속력을 내 클리프 엔드 앞에 섰다.
한동안 그 모든 광경이 흐릿했지만, 곧 나이 든 사람의 눈을 가리는 베일이 찢어진 것처럼 어린 시절에나 보았던 순수하고 강렬한 빛깔의 풍경이 또렷이 보였다. 집이 살아 있었다. 새로 칠한 페인트가 빛났고, 잘 닦인 유리창이 반짝였다. 위층에서는 흰 커튼이 물결쳤다. 안에서 리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멀라는 볕에 그을린 뺨을 붉히고 잿빛 눈을 반짝이며 집에서 날듯이 튀어나왔다. 바지에 흰색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열여덟 살 같았다.
“회춘했네!” 내가 외쳤다.
패멀라는 나를 빤히 보면서 웃었다. 리지 역시 내 손을 꽉 쥐고 따뜻하게 맞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저런. 왜 이렇게 얼굴이 상했을까.” 리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불쌍하기도 하지. 도시에서 시달리다 죽은 사형수 유령의 아들 꼴이네!” 패멀라가 말했다. “딱 맞춰 왔어. 리지, 어서 차 먼저요! 아직 식사는 부엌에서 하고 있어. 해수욕부터 하고 싶겠지만, 안 돼. 파도가 너무 높아.”
“그래, 차부터 마시자. 세상에, 패멀라. 너 정말 좋아 보인다!”
“모든 게 다 좋아!”
패멀라는 내게 위층 방부터 보여주면서 내내 떠들었다.
“많이 고친 것처럼 보이진 않아. 전문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일이 아직 잔뜩이야. 카펫도 못 깔고 커튼도 못 달았어. 하지만 전등은 켜지고, 보일러도 돌아가고, 조리대도 쓸 수 있고, 오빠의 소중한 전화도 드디어 돼.”
놀랍게도 방들은 비어 있을 때보다 더 넓어 보였다. 대부분은 연두색으로 칠하고 복도는 상아색으로 칠했다. 마음에 들었다. 런던에서는 거대하게 느껴지던 조부모의 가구들이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패멀라는 자기 방에 침대와 소파, 서랍장, 높이보다 너비가 더 긴 옷장을 두었다. 그 방에서는 풍요롭고 영원한 느낌이 났고, 한쪽 끝이 어둡고 창가는 환해 극적인 분위기였다. 내 방 창문 사이에 높은 서랍장이 있었다. 방이 그렇게 평화로우면서 경쾌한 느낌을 줄 수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침대 위치는 바꾸기로 했다. 전망을 마주 보며 일어나고 싶었다. 방 입구 쪽에 내 책상이 있었다. 햇빛이 그 위로 쏟아졌다. 분홍색 병에서 좋은 향기가 새어 나왔다. 내 서류 꾸러미들은 저마다 들어 있던 서랍을 표시해 책상 위에 정리해놓았다. 십 분만 애쓰면 내 집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애 많이 썼네.” 내가 말했다.
“작업실은 아직 도배를 못 했어.” 패멀라가 말했다. “회벽 상태가 너무 나빠서 칠을 할 수 없었어. 그리고 당분간 식당은 닫아둬야 해. 거만한 방이라서 임시변통을 참지 않아. 우리가 부자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아름다운 응접실은 일반적인 거실의 역할을 우아하게 받아들였다. 연한 색의 자작나무 서랍장, 식탁, 의자들, 안락의자와 소파의 빛바랜 장미들, 초록으로 칠한 내 책장은 보기 좋게 어울렸다. 창가 자리에는 쿠션이 가득했다. 방 반대편의 난롯가, 내가 서평 기사를 쓸 자리는 깊숙한 의자, 낮은 탁자, 스탠드, 라디오로 완성돼 있었다. 패멀라의 스탠드와 재봉 탁자는 반대편에 있었다. 패멀라가 이따금 하루 정도 법석을 떠는 것 이외에 바느질을 제대로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방 물건 중에는 새로 사들인 것이 없었고, 예전 물건들을 보니 과거와 미래가 충돌을 일으킨 듯 잠시 어지러웠다. 이내 미래가 자리를 잡더니 오늘이 실감났다. 벽난로 선반 위에는 장미가 커다란 꽃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깨진 온실에는 근사한 진달래 한 그루가 그곳이 얼마나 꽃으로 가득한, 섬세한 빛깔에 실크를 두른 듯 우아하게 장식한 곳이 돼야 하는지 주장하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빠 책이 팔리면 돈을 얼마나 쓸 수 있을까.” 패멀라가 말했다.
내 책으로 이 방에 들일 물건을 살 만큼 큰돈을 벌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찾아온 사람은 없어?” 내가 물었다.
“응, 다행히. 리지가 커튼을 달 때까지는 안전하대.”
“중령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고?”
“응.”
“‘소란’도 없었고?”
패멀라는 머뭇거렸다. “이런저런 걸 상상하긴 어렵지 않았어.”
“넌 언제나 그러지 않았니?” 내가 대답하는데 리지가 차를 마시러 오라고 불렀다.
체크무늬 식탁보 위에 엄청난 간식이 차려져 있었다. 리지는 내가 학교 다니던 시절보다 더 듬뿍 빵에 잼을 바르고 그 위에 클로티드 크림을 얹었다. 가난한 시절이 멀어져갔다.
“내일 거실 커튼을 달고, 책을 정리하고, 샹들리에를 올릴 거야. 찰리 제섭이 오후에 도와주러 온대. 큰 도움을 주는 이웃이야. 무슨 일이든지 맡아주려고 해. 하루는 ‘토마토도 좀 키울 줄 알죠’라더니 다음 날엔 ‘대장장이 일을 좀 하거든요’라고 해. 문제는, 일을 하다가 도중에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거지만. 그 사람이랑 그 사람 아주머니가 집 관리와 청소를 맡으려고 했는데, 정리가 안 돼.”
놀라운 일이었다. 브룩 중령은 그런 문제에 꼼꼼할 줄 알았다.
“어쨌든 그 사람은 빈둥거리기 좋아하고 보수를 받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아무래도 리지에게 반한 거 같아.” 패멀라가 계속 말했다.
“내가 끓이는 아이리시 스튜에 반했겠지.” 리지가 웃었다.
“이해 못 할 건 아니네.” 고기를 푸짐하게 넣어 풍미 좋게 끓인 뜨끈한 그 요리를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하지만 7월에 어울리는 음식은 아니었다.
패멀라에게 중령에게서 도와주겠다는 말이 전혀 없었는지 물었다.
“거의 안 했어.” 패멀라가 말했다. “그저 형식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지 알려달라고만 했지. 그리고 내가 물어본 이곳 사람들 주소만 알려줬어. 그 밖엔 한마디도 없었어.”
“손녀도?”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어.”
“기회만 생기면 달려올 줄 알았더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는 아닐 거야. 그건 확실해. 심술쟁이 때문이지.”
살짝 기운이 빠졌다. 패멀라와 스텔라는 친구 사이가 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내가 스텔라와 드라이브도 하고 소풍도 가고 헤엄치러 가고도 싶었단 것을 깨달았다. 한마디로 그 애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 패멀라에겐 내 생각을 읽고 소리 내 말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었다. “기사도 정신이 필요한 곳인데 말이야.”
“시끄러워.” 내가 대답했다.
리지가 커다란 갈색 찻주전자를 들고 와 내 잔을 채운 뒤 크림과 각설탕 두 개를 넣었다.
“바보!” 패멀라는 반사적으로 받아치더니 내게 진저브레드를 건넸다.
리지가 야단치듯 말했다. “고운 말을 써야죠!”
명치가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몇 살이지? 열일곱?
패멀라는 웃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패멀라가 우울한 표정을 지을 때면 눈썹이 짙고 평평해지고 눈은 짙은 회색이 되며 턱선이 팽팽해지고 어깨는 각진다.
“더 참지 않을 거야.” 패멀라가 말했다.
“중령과 싸우자는 건 아니지?” 내가 물었다. “나라면 안 그러겠어. 무서운 늙은이라고.”
“스텔라랑 친구가 될 거야.”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리지는 데번셔 크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어.” 패멀라가 덧붙였다.
그건 두서없이 말하는 패멀라의 습관 탓에 덧붙여진 말이 아니라 전투 계획의 일부였다.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케이크 조각이 목에 걸렸다. 리지가 능숙하게 내 등을 쳤다. 패멀라와 리지의 웃음소리가 바이올린과 바순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기침이 멎자 나는 차로 달려가 수영복과 새로 산 커다란 가운이 든 가방을 꺼냈다. 위층으로 올라가 이 분 만에 갈아입었지만 자갈길을 떠올리고 샌들 사기를 잊은 것에 욕설을 내뱉었다. 패멀라는 거실에서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