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키 유키伊吹 有喜
1969년 미에현에서 태어났다. 출판사에서 잡지 편집자로 근무하다 2008년에 《바람을 기다리는 사람》(응모 시 제목은 《여름이 끝날 무렵의 라 트라비아타》)으로 포플라사 소설대상 특별상을 수상하며 데뷔한다. 2010년 출간한 《49일의 레시피》가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된 것을 시작으로 대표작들이 속속 영상화, 무대화 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야마모토슈고로상 및 나오키상 후보에 오른 《미드나이트 버스》(2014)는 영화로 개봉되었으며 《컴퍼니》(2017)는 다카라즈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이후 《저편의 친구에게》(2017)로 나오키상 및 요시카와에이지신인문학상 후보에 오르며 일본 전역의 서점 직원들이 뽑는 ‘소녀의 친구 대상’을 수상했고 《구름을 잣다》(2020)로 다시 한번 나오키상 후보에 올랐다. 지은 책으로 《지금은 좀 운이 없을 뿐이야》, <나데시코 이야기>, <BAR 오이와케> 시리즈 등이 있다.
고향 미에현 욧카이치시를 배경으로 집필한 최신작 《개가 있는 계절》은 쇼와에서부터 헤이세이, 레이와 시대까지 이어지는 20년 동안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청춘의 반짝임을 묘사해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감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출간 직후 2020년 독서미터 ‘읽고 싶은 책’ 랭킹 월간 1위에 올랐으며 34회 야마모토슈고로상 후보 및 2021년 서점대상 3위에 오르는 등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옮긴이 이희정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는 《봄의 여행자》, 《트로이메라이》, 《널 죽이기 위한 다섯 가지 테스트》,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서점의 명탐정》 등이 있다.
INU GA ITA KISETSU
©Yuki Ibuki 2020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in Japan in 2020 by Futabasha Publishers Ltd., Tokyo.
Republic of Korean version published by Somy Media,Inc.
Under licence from Futabasha Publishers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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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시로라고 부르는 목소리에 꼬리를 흔들어 답하면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커다란 손일 때도 있고 작은 손일 때도 있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우유와 작은 손이 주는 빵.
날마다 저녁이면 작은 손이 빵을 우유에 적셔 먹여주었다.
오늘도 그걸 기대하며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캄캄해졌다.
불안해서 짖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더니 몸이 한참이나 흔들리고 나서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눈부신 빛 속에 있었다.
“미안해, 시로. 역시 우리 집에선 널 못 키울 것 같아.”
처음 맡아보는 낯선 냄새와 바람에 몸이 떨렸다.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에 용기를 내어 평소처럼 꼬리를 흔들었다.
“너무 원망하지 마. 넌 똑똑하니까 혼자서도 안전한 데로 갈 수 있을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키워달라고 해. 알았지, 시로?”
시로라고 불러줘서 또 꼬리를 흔들었다. 달려가는 그 사람을 따라가자 “안 돼, 저리 가”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따라오지 마! 넌 이제 자유야, 자! 이거 줄게! 물어와!”
던져준 공을 쫓아갔다. 공을 물고 돌아오면 다들 언제나 기뻐해준다. 필사적으로 쫓아가 공을 물었다.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변을 이리저리 달려보았지만 익숙한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땅바닥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며 걸어가는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눈앞에서 수많은 검은 바퀴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굴러갔다.
그 소리가 사라지고 무수한 검은 바퀴가 움직임을 멈춘 순간 정신없이 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원하는 냄새와 목소리는 찾지 못했다.
걷다 지쳐 비틀거리는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이고, 위험하잖아. 이 개가 선로로 들어가려고 했어.”
“강아지야? 강아지라기엔 조금 큰가?”
여자가 턱 밑을 긁어주었다. 그 손길이 부드러워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아, 여기 하치고구나. 마침 잘됐다. 여기다 넣어두자.”
“확실히 안전하긴 하겠네.”
땅에 내려주자 수많은 사람의 냄새가 났다. 그 속에서 희미하게 그리운 냄새가 났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그 냄새는 점점 짙어졌다.
‘빵 냄새가 나…….’
*
영어와 수학 성적은 나쁘지 않다. 다른 과목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노려볼 수 있다.
담임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다만 그 ‘조금만 더 노력하면’이 잘 안 된다. 교복 스커트의 주름을 내려다보며 시오미 유카는 생각했다.
여름방학 전에는 못하는 과목을 극복하기 위한 계획표를 짰다. 방학 기간인 약 40일간을 열흘씩 네 단계로 나누고 기초 다지기, 복습, 응용력 키우기, 총정리로 구성한 그 표는 자기가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예정은 어디까지나 예정일 뿐이다. 세상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사흘째까지는 계획대로 할 수 있었다. 나흘째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그날은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닷새째에 밀린 공부를 만회하려고 했지만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엿새째 저녁, 부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멍하니 앉아 있었더니 할머니가 공부할 게 아니면 가게 일이나 도우라고 잔소리를 했다.
그래서 집 1층에 있는 빵집 일을 거들었는데, 그날만 도우려던 게 어쩌다 보니 여름방학 내내 할머니 대신 저녁부터 계산대에 앉아 있게 되었다. 계획은 계속 밀렸고 여름방학이 끝난 지금 숙제를 빼면 해낸 일이라고는 완벽한 계획표를 짠 것뿐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가게 일 때문이 아니다.
집안일을 돕는다는 핑계로 공부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왜 도망 다녔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있는데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시오미. 제대로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괜찮아요, 선생님. 저는 많은 걸 바라진 않거든요. 집에서 다닐 수 있고 무난히 들어갈 수 있는 대학이면 충분해요.”
“너는 욕심이 없구나.”
담임이 입시학원에서 주최하는 전국 통일 모의고사 성적표를 내밀었다.
“그럼 지망 대학은 이대로 유지하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하고.”
교무실을 나온 유카는 성적표를 보았다.
교내 등수 98등. 전국 등수는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미에현 욧카이치시, 긴테쓰1 도미다야마역 옆. 여덟 방향으로 빛이 퍼져나가는 팔망성이 학교 휘장인 하치료 고등학교, 통칭 ‘하치고’는 현 내에서 손꼽히는 진학고다. 학군 내에 있는 50여 중학교에서 상위 성적을 올리는 학생 대다수가 하치고로 모여든다. 그리고 대부분 입학과 동시에 깨닫는다.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비슷하게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생각했던 만큼 우수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오히려 평범하다.
유카는 성적표를 작게 접어 스커트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대학 입시는 지망하는 학교의 지명도와 표준 점수가 올라갈수록 전국에서 우수한 수험생이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런 격전에서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입학한다 하더라도 고등학교에서 겪은 것 이상으로 자신의 평범함에 절망할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도 충분하다. 실패할까 두렵다. 더는 아무것도 아닌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발돋움을 하려고 애쓰지는 않을 것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 나답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좋다.
유카는 쇄골에 걸리는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으며 미술부실로 향했다.
여름방학 전까지 부장을 맡았던 미술부에서는 요즘 체육대회에 쓸 간판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미술부라고 해도 이 부에 미술이 특기인 학생은 거의 없다.
하치고 학생은 모두 방과 후 동아리 활동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데 미술부는 활동이 느슨하다. 체육제와 문화제 때 간판을 만드는 작업 외에는 1년에 작품을 하나 완성하거나 나고야에서 열리는 미술전을 관람하고 보고서만 쓰면 된다. 그것도 원고지 두 장이면 충분하므로 유카를 포함해 대부분이 보고서파라 방과 후에는 곧장 집으로 돌아간다. 이른바 귀가부다.
하지만 그중에도 열심히 작품 활동에 힘쓰는 부원이 극소수 있다.
미술계 대학을 지망하거나, 그림이나 일러스트를 좋아하는 학생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부실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해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린다.
유카는 옛날에는 교사로 썼다던 단층 목조건물인 동아리동으로 들어가 가장 안쪽에 있는 교실 앞에 섰다.
“야, 고시로.”
성량이 풍부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미술 교사이자 미술부 고문이기도 한 이가라시 사토시의 목소리였다.
이가라시는 바리톤의 미성에 풍채가 좋고 수염을 기른 외모 때문에 음악 선생님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교직 생활을 하면서 2년에 한 번씩 시내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현역 유화 화가다.
이게 무슨 일이래, 하고 이가라시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시로, 너 어쩌다 이렇게 조그매졌니?”
“손! 오, 손도 할 수 있네. 엎드려! 와, 엎드려도 할 줄 알잖아.”
“고시로 선배, 역시 능력 있는 남자야.”
신이 난 목소리에 유카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시로, 즉 하야세 고시로는 도쿄의 미대를 지망하는 말수 적은 동급생이다. 부실에 있을 때는 언제나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 만큼 진지하게 그림만 그리는데, 사람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다니 별일이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2학기에 유카네 집 근처로 이사 왔다. 집에서 가까운 역이 같기 때문에 등하교 시에 곧잘 마주치지만 그런 유카조차 그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유카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 부실로 들어갔다.
“다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복도까지 목소리가 다 들리잖아. 특히 선생님요.”
“너무 혼내지 마.”
이가라시가 겸연쩍게 웃고 유카를 손짓해서 불렀다.
“너도 와서 봐봐. 깜짝 놀랄걸.”
“저는 간판 만드는 걸 도우러 온 건데……, 어? 개가 있네?”
이가라시에게 다가가자 하야세 고시로의 자리에 하얀 개가 있었다. 아직 어린 개는 어째서인지 온몸에 모래가 묻어 있었다.
“이 개는 뭐예요? 선생님네 개예요?”
“내 개는 아니야. 나도 후지와라가 불러서 와본 거야.”
“부실에 왔더니 고시로의 자리에 이 녀석이 오도카니 앉아 있잖아.”
체커스2의 후지이 후미야처럼 앞머리를 길게 기른 후지와라 다카시는 학생회장으로, 학생회 임원을 3기 내내 맡아온 학생이다. 싹싹한 데다 성적도 좋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그는 남녀 사이에 거의 교류가 없는 이 학교에서는 매우 두드러지는 존재다.
후지와라가 하얀 개 앞으로 몸을 숙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오미도 한번 불러봐. 이 녀석, 고시로라고 부르면 꼬리를 흔들어.”
시험 삼아 “고시로” 하고 부르자 꼬리를 흔들며 유카의 손을 핥았다. 복슬복슬한 하얀 털과 늘어진 귀가 사랑스러웠다.
“진짜네. 꼬리를 엄청 흔들잖아. 누구네 집 아이지?”
“그걸 모르겠다니까. 그치, 다카나시?”
후지와라의 말에 미술부의 새 부장, 다카나시 료가 끄덕였다. 다카나시는 눈이 동글동글한 학생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미술사에 관심이 있는지 부실에서 늘 화집이나 역사책을 펼치고 있었다.
“우리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일단 의논하려고 이가라시 선생님을 모셔왔어요.”
“나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냐마는.”
이가라시가 하얀 개를 안아 올려 등을 쓰다듬었다.
“나도 개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 관리인인 구라하시 씨한테도 연락을 했는데 좀처럼 안 오시네.”
“늦어서 죄송합니다.”
기품 있는 목소리와 함께 회색 작업복을 입은 구라하시가 나타났다. 깔끔한 백발의 구라하시는 목소리와 행동이 부드러운 사람으로, 이가라시와 사이가 좋았다.
“죄송해요, 이가라시 선생님. 전구를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려서요.”
이가라시가 안고 있는 개를 본 구라하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녀석이 그 개군요. 귀여운 친구네요. 어디 보자……, 수컷이고요. 푸들과 닥스훈트가 좀 섞인 것 같네요.”
“믹스견이라는 뜻인가요?”
“아마도요. 자, 꼬마야. 입 좀 벌려볼까?”
구라하시가 위턱을 누르자 개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거부하지 않고 입을 벌리는 걸 보니 어느 정도 훈련도 받았네요. 강아지에서 벗어나서 슬슬 성견으로 넘어가는 시기고요.”
“누가 기르던 개구나. 길을 잃고 여기까지 온 걸까?”
“아니면 버려졌을지도요.”
구라하시가 개의 입에서 손을 뗐다.
“왜 이렇게 모래투성이인지는 모르지만 당분간 보호해주는 게 좋을지도 몰라요.”
“그럼 주인을 찾아줄까? 전단지라도 만들어보자.”
이가라시가 좋아, 하고 끄덕이고선 큰 소리로 말했다.
“누가 포스터 좀 그려봐. ‘털이 하얗고 복슬복슬한 개를 하치고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라고.”
네에? 하고 꺼리는 목소리가 부원들 사이에서 쏟아져 나왔다.
“왜들 그래? 너희도 일단 미술부잖아. 사야카, 네가 그려라.”
“네? 제가요?”
1학년 아카이 사야카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의인화한 강아지라면 그릴 수 있지만 본격적인 개는 좀 힘든데…….”
“본격적인 개는 또 뭐야? 괜찮으니까 한번 그려봐.”
못 그려요, 하고 아카이가 옆에 있는 남학생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사사야마는 미술 교사 지망이잖아? 사사야마가 그려.”
“아니, 그게…….”
사사야마가 이가라시를 흘긋대며 머뭇거렸다.
“너무 어려워 보여서 얼마 전에 지망을 바꿨어. 나는 국어 선생님 되려고.”
잠깐만, 하고 이가라시가 개를 마루에 내려놓았다.
“너 인마, 국어 선생님도 얼마나 어려운데.”
“여름방학 때 미대 입시학원에 한번 가봤는데요, 아 진짜, 완전 잘하는 애들 천지더라고요. 고시로 선배가 우글우글 모여 있는 느낌?”
어우 오싹해, 하고 터져 나온 목소리에 “그치?” 하고 사사야마가 대답했다.
“미대 지망한다고 말하고 다닌 게 부끄럽더라니까.”
“선생님, 글만 쓰면 안 될까요?”
유카는 부실 선반에 있는 도화지를 꺼내 마커로 ‘미아견’이라고 큼지막하게 썼다.
“여기에 ‘우츠룬데스’3로 사진을 찍어서 붙여요.”
“대충 갈겨쓴 그 글씨는 또 뭐냐?”
이가라시가 한숨을 푹 내쉬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다못해 레터링이라도 하든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긴 미술부라고. 게다가 시오미, 너는 부장이었잖아.”
“제비뽑기로 걸린 부장한테 그런 걸 기대하시면 안 되죠…….”
선생님, 하고 누가 말했다. 몇 번밖에 본 적 없는, 안경 쓴 1학년 남자 부원이었다.
“시오미 전 부장이 그린 포스터는 우리 학교의 수치예요. 간판 만들 때도 시오미 선배는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요.”
“그럼 네가 그리든가. 애당초 내 선택 과목은 음악이라고.”
“제가 그려도 상관은 없어요.”
1학년이 이쪽을 흘긋흘긋 보며 말했다.
“레터링은 자신 있거든요. 하지만 시간이 걸려요. 개 포스터를 그릴 시간이 있으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낫잖아요.”
이가라시가 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으니까 누가 ‘강아지 찾아가세요’ 하고 포스터 좀 쓱쓱 그려봐라.”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 그리는 게 빠르지 않아?’
‘완벽하잖아!’
“너희하고는 말을 못하겠다. 고시로, 고시로는 어디 갔어?”
이가라시의 발밑에서 개가 꼬리를 흔들었다.
“너 말고 인간 고시로 말이야. 어제도 수업에 안 들어왔던데, 무슨 일 있어?”
“걔네 할아버지가 저승 문…….”
아차, 하고 후지와라가 황급히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용태가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가 있대요.”
“그건 몰랐네.”
이가라시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꼬리를 흔들던 개가 갑자기 움찔움찔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몸을 웅크렸다. 어쩐지 겁에 질린 모습에 유카는 개를 안아 올렸다.
개가 몸을 기대오자 가만히 등을 쓸어주었다.
떨고 있는지 손바닥에 가느다란 진동이 전해져왔다.
딱한 것, 하고 구라하시가 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가 긴장했네요. 빨리 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할 텐데.”
이가라시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하는 수 없지. 일단 내가 워드프로세서로 전단지를 만들 테니 그거라도 붙여보자.”
선생님이 직접 그리지 않고요? 하고 여학생이 말했다.
“시끄러워. 지난주에 새로 샀단 말이야. 이참에 좀 써보자.”
이가라시는 개가 지낼 만한 곳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부실을 나갔다.
고시로라고 부르면 꼬리를 흔드는 하얀 개는 미술부실 구석에 케이지를 설치하고 보호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1주일 동안 미술부 학생들은 분담해서 주변 시설이나 상점에 미아견 포스터를 붙였다. 하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열흘째에 접어든 월요일, 교장이 일단 개 보호를 끝내고 주인을 찾을 때까지 맡아줄 사람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맡아줄 사람을 교내에서 모집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9월 말의 방과 후, 유카는 긴테쓰 나고야선을 탔다가 욧카이치역에서 유노야마선으로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욧카이치시는 동쪽으로는 이세만, 서쪽으로는 스즈카산맥 기슭까지 펼쳐져 있어, 동서로 폭이 넓다. 연안 구역은 예로부터 도카이도의 역참 마을로 번영해왔다.
쇼와 30년대4에 일본 최초로 석유 산업단지가 유치되었고, 그것을 시작으로 매립지에 제2, 제3의 산업단지가 차례차례 건설되었다. 고도 성장기에는 대기오염이 발생했지만 20년 넘는 노력의 결과 쇼와 63년(1988년)인 지금은 공기가 깨끗해졌다.
동쪽 도시부에 비해 유노야마선이 뻗어 있는 서쪽 지역은 논과 동산이 펼쳐진 목가적인 곳이다. 종점인 유노야마온센역은 고자이쇼다케산 기슭에 있다. 그 산기슭에 펼쳐진 드넓은 구릉지는 오랫동안 나고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베드타운으로 개발되어왔다.
유카는 다카쓰노역에서 전철을 내려 황금빛으로 물든 논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할아버지가 세운 ‘시오미 빵 공방’은 잇쇼부키산이라고 불리는 동산 기슭, 고속도로를 따라 펼쳐진 논 지대에 있다.
그래서인지 빵집이 접해 있는 이 외길은 포장은 되어 있지만 차량 통행량이 적다. 외길 동쪽에는 중학교, 서쪽에는 고가 고속도로가 있고, 그 밑을 지나서 더 가면 대규모 주택가가 펼쳐져 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매장 쪽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카, 돌아왔니?”
공방과 자택을 잇는 문에서 하얀 블라우스에 다갈색 앞치마를 두른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전철을 하나 놓쳤어.”
“어서 서둘러라. 이젠 동아리 활동도 안 하잖아?”
동아리 활동이 없는 것은 수험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름방학부터 저녁에 가게를 보기 시작한 게, 좀처럼 파트타임 직원을 구하지 못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옷 갈아입고 바로 내려갈게. 할머니는 그만 들어와도 돼.”
유카는 3층 자기 방에서 가게 유니폼을 갈아입고 도화지와 펜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옆의 공방을 들여다보자 아버지가 등을 구부정하게 숙이고 스포츠신문을 보고 있었다.
동트기 전부터 일을 시작하는 제빵사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저녁 이 시간 즈음에야 일이 끝난다. 두 사람을 보조하는 할머니도 아침 시작이 이르기 때문에 저녁에는 언제나 지쳐서 기분이 언짢다.
가게에 들어가자 파트타임 직원인 아이바 시즈코가 손님을 배웅하는 참이었다.
“아이바 언니, 혼자 일하게 해서 미안해요.”
아이바는 괜찮아, 라며 흘러내린 은테 안경을 고쳐 썼다.
“그보다 유카도 수험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빨리 사람이 구해지면 좋겠지만. 그래도 전 언니 덕분에 살았어요.”
근처 주택가에 사는 아이바는 중학생 아들이 돌아오는 4시에는 집에 가고 싶다고 해서 지금까지는 3시에 파트타임을 마쳤다. 하지만 일손이 너무 없어서 이번 달부터는 주 3일, 5시까지 근무 시간을 연장해주었다.
“응원하고 있어. 자, 앉아.”
아이바가 계산대 옆 테이블에 의자를 놔주었다.
아이바는 올해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는 아들이 하치고를 희망하기 때문에 늘 유카에게 잘해준다. 할머니와 있을 때는 절대 안 되지만 아이바와 일할 때는 손님이 없을 때 참고서를 펼칠 수도 있다.
“고마워요. 하지만 오늘은 포스터를 그려도 될까요? 개를 키워줄 사람을 찾아야 하거든요. ……맞다, 언니, 강아지 안 기르실래요?”
“아들은 키우고 싶어 했는데 남편이 동물을 싫어해서.”
“그렇구나. 우리 집도 할머니가 싫어하세요. 음식 장사를 하는 집에서 짐승을 키우다니 말도 안 된대요.”
“털이나 냄새가 신경 쓰여서 그러시나 보네.”
매장에서 흐르는 라디오에서 파워풀한 여가수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마다 마리의 ‘Heart and Soul’이다.
영어로 얼을 뜻하는 단어 Soul에 한국의 수도 이름인 서울Seoul의 의미를 담은 제목의 노래는 17일부터 시작된 서울 올림픽의 NHK 중계 테마곡이다.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해설을 들으며 유카는 도화지에 ‘강아지 가족 구함’이라고 펜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한참을 쳐다보다 연필로 개를 그려보았다.
진지하게 그렸는데 개도 아니고 여우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생물이 그려져 있었다.
한숨을 내쉬었을 때 멀리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언니, 뭔가 우는 소리 안 들려요?”
아이바가 라디오 볼륨을 낮추고 귓가에 손을 댔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또 원숭이가 내려왔나?”
공전의 호황기가 도래하면서 스즈카산맥 기슭에는 골프장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산에서 터를 잃은 원숭이가 마을로 내려왔다.
라디오에서 큰 환호성이 끓어올랐다. 그 함성 사이로 또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기도 해서 유카는 창문을 열었다.
붉게 물든 저녁놀 속에서 벼 이삭이 한들거렸다. 그 너머의 길에 작은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앗, 아이바 언니, 저기 어린애 아니에요?”
어린애? 하고 되물으며 아이바가 흘러내린 안경을 올렸다.
“어머, 그런가 본데. 세상에, 무슨 일이래? 울고 있나?”
“내가 다녀올게요.”
가게를 나와 달려가자 외길 끝에서 어린아이가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옆에는 작은 자전거가 넘어져 있었다.
“얘, 왜 그래? 자전거 타다 넘어졌어?”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어린 남자애가 눈물을 훔쳤다.
유카는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괜찮아? 아팠지?”
남자애는 눈물을 닦던 손을 멈추고 유카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수상하다는 듯 보는 표정에 유카는 황급히 등 뒤의 가게를 가리켰다.
“누나는 저기 있는 빵집 딸이야. 치료해줄 테니까 가자. 집은 어디니?”
“괜…… 찮아.”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일어서려다 비틀거렸다.
유카는 그런 아이의 앞에 앉아 등을 내밀었다.
“좋아, 누나가 업어줄게.”
돌아보고 “응?” 하고 웃어 보이자 아이는 일어났다.
걷기 시작하는 아이 옆에서 유카도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가 올려다보기에 손을 내밀었더니 작은 손이 단단히 움켜쥐었다.
무서워서 그런다는 생각에 유카도 그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가게로 들어가자 아이바는 손님 응대를 하는 중이었지만 계산대 옆에 구급상자가 나와 있었다. 유카는 아이를 계산대 옆 의자에 앉히고 무릎의 상처를 소독했다.
반창고를 집으려고 일어나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아이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이번에는 테이블 위에 있는 도화지로 쏠렸다.
“이거…… 개야?”
반창고를 집으며 유카도 포스터를 보았다.
“기뻐라. 개라고 알아보겠어?”
“개라고?”
“누나네 학교에 귀여운 개가 있거든. 꼬마야, 괜찮으면 너희 집에서 개를 키워…….”
아이가 얼굴을 감싸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다친 데가 아파?”
“안, 아파.”
아이는 어깨가 들썩이도록 울었다.
“외로워? 무서워? 괜찮아. 집에 바로 연락해줄게. 빵 먹을래? 쿠키 좋아해?”
가게 안쪽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나왔다.
“유카, 왜 애를 울려? 이렇게 어린 애를.”
“내가 울린 거 아닌데…….”
“됐다. 아이바 씨한테서 얘기는 들었으니까 들어가서 밥부터 먹어. 아이고, 딱해라. 빨리 치료부터 해줘야지.”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였다.
“얘 집은 어디라니? 전화번호는 물어봤어?”
“앗, 아직…….”
할머니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유카는 공부만 잘했지 이런 머리는 영 안 돌아간다니까.”
유카는 붙여주려던 반창고를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의 자전거를 가게 주차장까지 끌고 오며 땅거미를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자신은 어딘가 맹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 말처럼 딱히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2층 주방으로 올라가자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유카, 고생했어, 하고 어머니가 일어나 된장국을 데웠다.
“아이바 씨가 내선으로 연락했는데, 어린애가 다쳤다며?”
“자전거 타다 넘어졌나 봐. 할머니가 연락처 물어보고 있어.”
아버지가 된장국을 후루룩 마시고 “도시코” 하고 엄마를 불렀다.
“어머니 혼자서는 걱정되니까 나중에 당신도 내려가봐.”
“유카 밥부터 차려주고.”
“그건 내가 하면 되니까 괜찮아. 그보다 가게에 한 번 더 내려갈 거야.”
“안 그래도 되니까 유카는 앉아 있어.”
어머니가 행주로 손을 닦고 1인분의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연 이 빵 공방은 옛날에는 중고생이나 이웃 단골들 상대로 소소하게 꾸려왔다. 그러던 것을 15년 전에 아버지의 아이디어로 화덕을 도입해 바게트와 식빵, 조리빵에 힘을 쏟고, 먹고 갈 수 있는 테이블도 설치함으로써 주택가의 가족 단위 손님들이 자주 가게를 찾게 되었다.
3년 전에는 여섯 살 위인 오빠도 가업에 뛰어들어 영업과 배달을 담당하고 있다. 시내 음식점에 화덕에서 구운 빵과 과자를 납품하는 일도 맡으면서 공방의 사업은 점점 확장되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공방의 경리 업무와 집안일을 혼자 도맡아 하고, 남는 시간에는 가게에서 손님 상대까지 하느라 쉴 틈이 없다.
어머니가 된장국과 밥을 식탁에 차려주었다.
“유카, 지난번 모의고사 결과는 어땠어? 엄마한테 아직 안 보여줬잖아?”
“별로 안 좋아서.”
“안 좋아도 결과는 꼬박꼬박 보여줘.”
그래야지, 하고 아버지가 후루룩거리며 된장국을 마셨다.
“시험은 누가 공짜로 보게 해준다니? 그게 다 부모 돈인데 결과 정도는 보여줘야지. 밥 먹기 전에.”
하는 수 없이 3층으로 올라가 어머니에게 모의고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어머니가 안타깝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카, 성적이 점점 떨어지네. 1학년 때는 교내 등수가 더 높았는데. 역시…….”
가게 일 때문이라고 어머니가 말하려는 것을 짐작하고 유카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냥 1학년 때랑 다르게 다들 열심히 해서 그래.”
“너도 열심히 하면 되잖아. 역시 가게 일이…….”
묵묵히 식사를 하던 아버지가 식탁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도시코, 너무 잔소리하지 마.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그래. 공부 좀 할 줄 안다고 빵이 저절로 부푸는 것도 아닌데. 있어봐라, 배설로 킥 나온다.”
할아버지가 텔레비전 볼륨을 올렸다. 배영으로 금메달을 딴 스즈키 다이치 선수가 배설로 킥 수영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차를 마시며 아버지도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여보, 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비난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유카는 수험생이니까 공부에 더 전념할 수 있게 해줘야지.”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지. 오는 사람마다 어머니와 성격이 안 맞아서 다 그만두는데 어떡해. 어머니도 아이바 씨랑은 잘 지내는데.”
“서두를 거 없다. 가족끼리 일하면 그만큼 돈도 아끼는데.”
정말로 그럴까?
유카는 밥을 먹으며 말없이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에게는 월급을 준다. 그 급여 덕에 오빠는 이 집에서 나가 따로 방을 구하고 화려한 차를 타며 일한다.
자신이나, 그리고 아마도 어머니와 할머니에게는 보수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장남인 오빠만은 별개다.
‘왔어’인지 ‘왔슈’인지 모를 인사를 하며 오빠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엄마, 이거 처리해줘.”
오빠가 어머니에게 청구서를 주고 식탁에 놓여 있는 모의고사 결과를 보았다.
“오, 이게 유카 성적이야? 뭐야 이게? 교내 등수 98등. 나 참, 중학교에서 아무리 1등 해봐야 하치고에 가면 너도 별 수 없구나.”
“어쩔 수 없잖니?”
어머니가 위로하듯 말하고 오빠 앞에 차를 내주었다.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데. 50개 학교에서 1등 하는 애들이 모이면 누군가는 50등이 될 수밖에 없지.”
하지만 유카는 그 50등에도 끼지 못한다. 어금니를 깨물었을 때 오빠가 웃었다.
“발끈하지 마, 유카.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공부만 파는 여자가 뭐가 예쁘겠냐? 남자는 자기보다 잘난 여자는 싫어하거든.”
나도 그런 남자는 필요 없다. 어금니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사무, 그만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어머니가 오빠를 매섭게 보았다.
“뭐, 어멈은 똑똑하니까.”
할아버지가 후루룩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우리 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은 금고 담당인 어멈이야. 우리는 일개 졸병, 일개미지.”
“거 무슨 말씀이 그래요?”
아버지가 할아버지 앞에 있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집어 볼륨을 더 키웠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과용품 취급점 경리부에서 일했던 어머니는 일하면서 부기학원에 다니며 부기 1급 자격증을 딴 사람이다. 아버지가 원한 화덕을 설치하기 위한 자금을 끌어온 사람도, 테이블을 놓자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어머니라고 들었다.
어머니가 없었다면 이 공방은 이렇게까지 크지 못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요즘에는 오빠까지 어머니를 홀대한다.
유카는 욱여넣듯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할머니랑 교대하고 올게. 엄마는 좀 쉬어. 저녁에도 가게는 내가 볼 테니까.”
“괜찮아, 유카. 너는 공부나 해.”
“가게 보면서 단어 외우려고.”
할아버지가 크게 끄덕였다.
“그래, 유카. 공부 같은 건 어디서나 할 수 있어.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게 다가 아니야. 어멈아, 차 좀 다오.”
어머니가 큰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합세하듯이 유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참에 할아버지 앞에 있는 리모컨을 잡아채고 왕왕 울리는 텔레비전을 껐다.
할아버지가 놀랐는지 눈빛이 흔들렸다.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가게 앞의 외길에서 울고 있던 아이는 아들을 데리러 온 젊은 어머니와 함께 돌아갔다. 근처 주택가에 사는 아이로, 가까운 동산에 혼자 나섰다가 돌아오는 참이었다고 한다.
유카는 파트타임 직원인 아이바가 돌아간 뒤 가게를 보며 포스터를 마저 그렸다.
라디오에서 8시를 알리는 시보가 흘러나왔다. 슬슬 가게를 닫을 시간이다.
개 그림에 색칠을 마치고 유카는 가게 창문을 모두 열었다.
벼 이삭을 타고 밤바람이 기분 좋게 흘러왔다. 여름내 시끄러울 정도였던 개구리 소리도 사라지고 대신 방울벌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닥을 대걸레로 한 차례 닦은 뒤 밖을 내다보았다.
외길 저 멀리서 자전거 불빛이 보였다.
유카는 창문을 닫고 특가 판매하는 빵 진열대로 갔다.
아버지가 자신 있어 하는 초코소라빵과 데리야키 치킨 샌드위치를 가게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진열대를 둘러보고 핑크색 아이싱을 올린 꽃 쿠키를 넣으려다 손을 멈췄다. 생각을 바꿔 강아지 모양 쿠키를 넣었을 때 가게 문이 열렸다.
유카는 종이가방을 계산대 밑으로 숨기고 “어서 오세요” 하고 외쳤다.
커다란 보스턴백을 어깨에 걸친 하야세가 가게로 들어왔다.
목요일 이 시간에 오는 손님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개가 고시로라는 이름을 얻은 계기가 된 남학생, 미술부의 하야세 고시로다.
유카가 인사를 해도 그는 머리만 가볍게 숙일 뿐이다. 늘 무표정하게 30퍼센트 할인하는 식빵을 들고 계산대로 와 계산이 끝나면 재빨리 떠난다.
하야세가 식빵을 들고 계산대로 왔다. 유카는 넣어두었던 종이가방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있잖아, 하야세.”
지갑을 꺼낸 하야세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 눈길 끝에 그리다 만 포스터가 있는 것을 깨닫고 유카는 황급히 종이를 뒤집었다.
“그거” 하고 하야세가 작은 소리로 말하며 포스터를 가리켰다.
“그 개야?”
“어떻게 알았어? 색칠을 했더니 오히려 더 이상해져서…….”
하야세가 순간 눈을 감았다. 눈을 버렸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질색하지 마. 차라리 비웃는 게 마음이 덜 아프겠네.”
하야세는 일주일에 세 번, 나고야에 있는 미대 전문 입시학원에 다니는 듯했다. 듣기로는 미대 중에서도 가장 들어가기 어렵다는 도쿄예술대학을 지망한다고 한다.
하야세가 앞머리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이목구비가 반듯해서인지 행동이나 표정이 어쩐지 냉정하게 보인다.
“그걸 어디에 붙이려고?”
“역 같은 데에다? 하지만 이런 수준으로는 안 되겠지?”
“급해?”
“조금.”
“조금이라고 하면 얼마나 급한 건지 모르겠어.”
성의 없는 대답을 타박하는 기분이 들어 유카는 서두르는 이유를 황급히 덧붙였다.
“주초에 강아지를 어떻게 할지 교장 선생님과 이야기하기로 했거든. 그 전까지 가족을 찾아주고 싶어서. 그래서 서두르는 거야. 나는 포스터 담당이야. 후지와라는 학생회에서 먹이와 예방주사 값 모금 활동을 시작했어. 차라리 학교에서 기르자며 서명운동을 하자는 의견도 냈어. 후지와라는 참 대단하더라.”
“그 녀석이라면 그 정도는 하고도 남지.”
하야세는 언짢은 말투로 들어가기 무척 어려운 도쿄의 사립대학 이름을 말했다.
“후지와라는 거기 추천 입학을 노리고 있거든. 학생회 임원을 계속해온 것도 그걸 노린 거라는 소문이야. 그런 활동을 해두면 입시 때 유리한가 봐.”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야. 서명운동 같은 걸 했다가는 학교에서 싫어해서 추천을 안 해줄지도 모르잖아.”
“녀석이라면 요령 좋게 넘길걸.”
“하야세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엄청 의외야.”
반박할 줄 알았는데 하야세가 고개를 숙였다.
유카는 초코소라빵과 샌드위치를 담은 봉투를 하야세에게 내밀었다.
“괜찮으면 이거 가져가. 그 강아지, 우리가 장난삼아 부르는 바람에 완전히 하야세의 이름으로 굳어졌잖아. ……어제도 1학년이 그렇게 불렀다며?”
“‘야, 고시로’ 하고 불러서 돌아봤더니 그 개가 오줌을 싸고 있더라. 그러고는 ‘고시로, 이런 곳에서 쉬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어.”
“정말 미안해.”
유카는 작게 손을 모으고 봉투를 하야세에게 내밀었다.
“이건 별거 아니지만 사과의 뜻이야.”
“아니, 됐어.”
하야세가 봉투를 손으로 되밀었다. “사양하지 마” 하고 유카는 다시 내밀었다.
“어차피 버리는 거라 괜찮아. 식빵 말고도 우리 집 빵은 꽤 괜찮은 편이거든.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매일 아침마다 정성껏 만드시는 거야.”
“정말 괜찮다니까.”
하야세는 지갑에서 식빵 값만큼 동전을 꺼내 트레이 위에 딱 맞춰 내려놓았다.
“늘 할인하는 빵만 산다고 해서 먹고살기 힘든 건 아니야.”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건 아닌데.”
“지우개 대신으로 쓰는 그림 재료야.”
“먹으려고 사는 게 아니구나.”
맞아, 하고 작은 소리로 말하고 하야세가 식빵을 집었다.
“앗, 기다려. 하야세, 봉투, 봉투.”
하야세가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뒤따라 나갔지만 하야세는 자전거를 선 채로 타고 달려갔다.
고시로의 가족이 되어줄 사람은 주말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월요일 방과 후, 교장은 고문인 이가라시와 관리인 구라하시의 안내를 받으며 고시로를 볼 겸 부실로 왔다. 유카는 학생회장 후지와라가 만든 ‘고시로를 돌보는 모임’ 멤버 열여섯 명과 함께 부실 의자를 모아 대화의 자리를 만들었다.
부실 구석에서는 하야세가 교복 윗도리를 벗고 카키색 작업복을 입었다. 옷을 다 갈아입자 자리에 앉아 이번에는 쓰레기통을 끌어오더니 그 위에서 검은 막대기를 나이프로 열심히 깎았다.
하야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지난 2주 동안 개의 가족이 되어줄 사람을 찾아봤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후지와라가 교장에게 설명했다.
후지와라의 이야기를 보충하듯 개를 기르는 법을 잘 아는 구라하시가 고시로는 버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구라하시는 케이지 안에서 자고 있는 고시로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녀석은 여기에 왔을 때 모래투성이였어요. 어쩌면 바닷가에 버려졌고 거기서부터 걸어왔을지도 몰라요.”
스즈카산 기슭에 있는 중학교 출신인 여학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네? 바다가 여기서 가까워요?”
“가깝지는 않아.”
이가라시가 역 방향을 가리켰다.
“똑바로 쭉 가면 얼마 안 가 나와. 교가에도 ‘밀려오는 파도 소리’라는 구절이 있잖아? 다만 그 사이를 긴테쓰와 JR5 철도가 가로지르고 간선도로까지 있으니까. 이 강아지한테는 꽤 먼 거리지.”
뒤쪽 자리에서 남학생이 말했다.
“이 녀석은 그 먼 거리를 필사적으로 걸어서 하치고까지 왔다는 거죠?”
교장이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말했다.
“하지만 유기견이라면 아무리 기다려도 원래 주인은 안 나타날 거야.”
후지와라가 교장을 향해 손을 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발언할 때는 제대로 손부터 들어. 교장 선생님께 먼저 자기 이름부터 말하자. 저는 학생회장인 후지와라, 후지와라 다카시입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이름을 밝히고 후지와라가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웃 중에 데려가 키우고 싶다고 한 사람도 몇 명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고시로를 보면 다들 포기하더라고요. 새끼 강아지라면 좋은데 이 녀석은 거의 성견이 다 되어가니까요. 어중간하게 큰 개는 정이 잘 들지 않나 봐요.”
“그런 이유로 버려졌을지도 몰라.”
이가라시가 팔짱을 꼈다. 교장이 머뭇거리듯 입을 열었다.
“데려갈 사람이 없다면 최종적으로 보건소에 연락을 해야지.”
잠깐만요, 하고 유카가 손을 들었다.
“3학년 시오미 유카입니다. 데려가줄 사람이 나타날지도 몰라요.”
시오미 학생, 하고 교장이 온화한 눈으로 보았다.
“이 개는 앞으로 몸집이 더 커질 거야. 성견이 되면 결국 데려간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아니면 학생 집에서 키우면 안 되겠나?”
“저희 집은 음식 장사를 하는 집이라 동물은 키울 수 없다고 하셔서요.”
후지와라가 다시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후지와라입니다. 교장 선생님,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저희 ‘고시로를 돌보는 모임’에서는 이대로 하치고에서 키우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사료 값이나 예방주사 값으로 쓸 기부금도 모았습니다. 집에서 사료나 화장실 용품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고요.”
“후지와라 학생 집에서 키울 수는 없겠나?”
교장이 묻자 후지와라가 순간 머뭇거렸다.
“여동생이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게다가 그 이전에 저희 부모님은 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