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장
대단원 상 (2)
장청전주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형틀이 고요히, 느릿느릿 일어섰다. 전주가 장손무극의 가슴 위치를 겨냥해 허공을 압박하는 시늉을 하자 장손무극이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전주를 쓱 쳐다본 장손무극이 나지막이 말했다.
“스승님…….”
뒷짐을 지고 서서 묵묵히 그를 쳐다보던 전주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고생도 할 만큼 했겠다……. 그래, 이제 생각이 바뀌었느냐?”
장손무극은 한참이 지나도록 침묵을 지켰다. 그의 낯빛은 달빛보다도 창백했으나 미간에는 옥석과도 같이 단단하고 맑은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급기야 장청전주의 눈에 노기가 스쳤을 무렵, 장손무극이 돌연 전주를 빤히 응시하면서 말했다.
“스승님…… 몸을 챙기셔야겠습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 소리에 장청전주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면서 눈빛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곧장 얼음장처럼 차가운 태도를 회복한 전주가 대꾸했다.
“본좌의 몸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더니 장손무극을 쳐다보면서 냉랭하게 덧붙였다.
“현명하게 판단해라. 전주가 되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된다. 짓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것이 세상이거늘, 네 정녕 그 이치를 모른단 말이냐?”
힘없이 웃고 난 장손무극이 화제를 돌렸다.
“스승님…… 그녀는 그저 사대신역을 통과해 소원을 빌 기회를 얻으려는 것뿐입니다. 규칙에 어긋남이 전혀 없는 일인데, 왜 꼭…… 죽이려 하십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질문을 하는구나!”
장청전주가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그 계집은 하늘에서 떨어진 요녀다. 우리 장청신전과는 애초에 공존할 수 없는 존재야. 창생을 구원해야 할 장청신전이 어찌 그런 요물이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을 용납하겠느냐?”
“요물…….”
장손무극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만약…… 그녀의 소원이 단지 이곳을 떠나는 것이라면 어쩌시겠습니까? 그저 조용히 떠나고자 한다면 그러도록 해주면 되는 일이 아닐는지요?”
장청전주가 갑자기 입을 딱 닫았다. 얼굴 반쪽이 얼음동굴의 그림자에 가려진 전주는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가면을 쓴 것처럼 보였다. 동굴 안에 다시금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살벌함이 아니라 다소 애매한 분위기의 침묵이었다. 그럴듯한 구실 아래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비밀이 방금 그 무심한 질문에 기대어 슬그머니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듯한. 잠시 후, 전주가 단조로운 어조로 한 자 한 자 말했다.
“아무리 본 좌가 신술을 가지고 있고, 곧 우화등선할 몸이라고 해도 인간 세상의 규칙에 반하는 일은 할 수 없음을 너도 알아야 할 것이야. 그런 짓을 했다가는 천벌이 떨어질 게다.”
조용히 듣고 있던 장손무극이 이내 깨달은 바가 있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한다면 여기서 더 생각해보아도 좋다. 단, 결론은 나와 있느니라.”
장손무극을 잠시 쳐다보던 장청전주가 돌아서며 말했다.
“네 어리석음을 한없이 받아줄 수만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납득하겠느냐? 내일 신전 전체에 알릴 것이니라. 만약 그 계집이 진법 안에서 죽는다면 널 풀어주고 전주 자리를 물려줄 것이요, 계집이 사대신역을 통과한다면 너를 처형하겠노라고. 이번 생에 그 계집과 함께할 생각은 접는 편이 좋을 게다!”
그 말에 장손무극이 피식 웃었다.
“이번 생을…… 그녀와 함께하겠다는 주제넘은 욕심 따위는……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조금의 여한도 없는 듯 담담하기만 한 장손무극의 말투와 표정에 전주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잠시 후, 전주는 매몰차게 옷소매를 떨치면서 산을 내려갔다.
“계집이 진법 안에서 죽기나 기도하고 있거라!”
*
이쪽이고, 저쪽이고,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진퇴양난의 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장손무극이 생과 사의 선택지를 받아든 그때, 맹부요는 진법을 깨고 죽느냐 아니면 깨지 않고 죽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향로에서 가느다랗게 피어오른 연기가 계속해서 구름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맹부요와 전북야는 서로를 마주 봤다.
진법을 파할 수단은 이미 손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저 손가락 한 번 까딱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난데없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이 되어버렸다.
진을 파한다 치자. 향로가 추락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자기들 둘은 향로와 함께 떨어져 죽는 게 두렵지 않다고 해도, 바깥 허공에 떠 있는 철성은 어찌한단 말인가?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상태인 철성은 구름이 걷히는 동시에 속절없이 곤두박이칠 테고, 그렇게 되면 목숨을 건질 가능성은 전무했다.
진을 파하지 않는다 치자. 운부 신역에는 졸음을 불러오는 괴상야릇한 효과가 있었다. 잠깐만 눈이 감겨도 잿가루가 될 터인데, 일행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맹부요가 향로 입구로 올라가 철성의 위치를 확인한 결과, 산꼭대기보다는 향로 쪽과 조금 더 가까워 보였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말했다.
“이쪽으로 끌어와야겠어요. 추락하더라도 우리랑 같이 추락하는 게 그나마 살 확률이 높아요.”
향로에 거꾸로 매달려 손을 뻗어본 맹부요가 전북야와 자신의 허리에 묶여있던 밧줄 토막을 하나로 연결한 뒤 진력을 주입해 철성 쪽으로 밀어 보냈다. 뒤에서는 향로 입구까지 나온 전북야가 그녀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봐도 중간에 남은 약간의 거리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눈대중으로 거리를 가늠해본 전북야가 맹부요를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내가 하지. 그래도 내 쪽이 키가 크니까.”
맹부요는 하는 수 없이 전북야와 자리를 바꿨다. 전북야의 말대로 그의 손가락은 철성의 옷자락 바로 근처까지 미쳤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았다. 맹부요는 필사적으로 몸을 앞쪽으로 내밀었다. 그녀는 향로 입구에 바짝 붙어 있었고, 그 덕에 앞섶이 입구 둘레에 계속 쓸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전북야의 움직임에만 온 신경이 쏠린 그녀는 앞섶이 점차 벌어지면서 운혼에게서 받은 운부향로의 열쇠가 절반 이상 밖으로 삐져나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열쇠에서 먼 쪽 어깨에 앉아있는 원보 대인 역시 미처 못 봤기는 마찬가지였다.
“닿았어!”
전북야가 돌연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가락으로 철성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아직 체력이 돌아오지 않은 그는 간단한 일련의 동작만으로도 숨을 헐떡였지만, 그러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맹부요도 한껏 들떠 자기도 모르게 몸을 더 앞으로 숙였다.
깡! 열쇠가 향로 안에서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는 구멍을 향해 굴러떨어졌다. 아래를 보고 혼비백산한 맹부요가 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착! 미세한 소리와 함께 열쇠가 빈틈없이 구멍 중앙에 안착했다.
콰과광! 삽시간에 천지가 뒤집히고 주변 풍경이 소용돌이쳤다. 사방에서 무시무시한 바람 소리가 일었다. 맹부요와 전북야는 균형을 잃고 향로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거대한 향로가 데굴데굴 구르면서 추락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향로 안에서 마구잡이로 내동댕이쳐지느라 눈앞에 별이 보일 지경이었다. 벽면을 이쪽저쪽 들이받다 보니 얼굴은 멍이 들어 퉁퉁 붓고 몸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 와중에도 전북야는 어떻게든 맹부요를 붙들어보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몇 번이나 내던져지던 끝에 마침내 성공한 전북야는 손에 힘을 줘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두 사람의 눈앞에서 향로 내벽의 푸른색 주문이 희미하게 빛나며 벽을 벗어나 허공으로 돌출됐다. 그러더니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둘의 주변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주변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가슴이 턱 막혀오더니 고막이 터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콰앙!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고 서리와 눈이 사방으로 튀는 순간, 두 사람은 정신을 잃었다.
…….
주위에서 새소리가 들려오고, 어렴풋이 꽃향기가 느껴졌다. 무슨 진귀한 꽃이라기보다는 유채꽃에서 나는 향기 같았다. 샛노란 사월의 유채꽃, 그 향기를 맡고 있자니 드넓은 황금빛 양탄자처럼 고향 들판을 온통 뒤덮고 있던 유채꽃밭이 눈에 선했다. 초록빛 봄풀과 버드나무 가지, 그리고 논두렁길 군데군데 화사하게 핀 분홍색 복숭아꽃이 장식처럼 더해진, 그런 유채꽃밭. 마치 자투리 천을 기워 만든 옷을 입고 눈을 내리깐 유화 속 여인처럼, 수수하면서도 곱고 다소곳한 아름다움을 품은 유채꽃밭은 전생에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봄 풍경이었다. 풍경만큼이나 잔잔한 미풍에 사월만의 촉촉한 향기로움이 실려 왔다. 과거 시골에서 살 적에 방 창문을 통해 불어 들어오던 그 바람 같았다.
엄마는 그때 아직 아프기 전이었고, 그녀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두 모녀는 사월이 오노라면 간단한 먹을거리를 싸서 봄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가장 자주 찾았던 곳은 유채꽃밭이었다. 꽃밭을 뛰어다니고 있으면 엄마가 구식 반자동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줬다. 특별한 포즈 같은 건 없었다. 팔을 쳐들고, 냅다 달리고, 그 모든 장면이 프레임에 담겼다. 집에 돌아온 뒤 엄마가 저녁에 현상 작업을 마치면 두 모녀는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사진을 구경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 부요는 일부러 이상한 표정을 지어도 예쁘네.”
“부요야, 유채꽃은 눈에 확 띄지는 않아도 이렇게나 환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단다. 너도 훗날 어디에 가게 되든지 유채꽃처럼 환하게 살아야 해.”
환하게…… 살라고? 엄마 없이, 당신들 없이, 가슴 한구석이 항상 무겁게 그늘져 있을 나한테 어딜 가서 환하게 살라는 거야? 천천히 눈을 뜬 맹부요는 젖은 눈꼬리부터 손으로 훔쳐냈다. 또 꿈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 정말로 드넓은 유채꽃밭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논두렁에는 보송보송한 강아지풀이 돋아있고, 복숭아꽃 꽃잎 몇 개가 바람을 타고 한들한들 흩날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꽃잎 한 장이 얼굴에 내려앉았고, 맹부요는 손을 뻗어 꽃잎을 집어 들었다. 손에 잡힌 향긋하고 보드라운 그것은 진짜 복숭아꽃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그녀는 혹한이 휘몰아치는 극북의 땅 장청신산에서 온갖 고생을 해가며 진법을 깨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진법에서 향로째 추락했는데…… 눈을 떠보니 고향 봄 풍경이 펼쳐져 있다니? 심지어는 산비탈 아래 작은 시내며, 시내 건너편에 보이는 울타리 쳐진 외딴집까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전북야는? 운흔은? 요신은? 철성은? 혹시…… 그때 떨어지면서 죽어서 현대로 돌아온 건가?
맹부요는 주체 못 할 기쁨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기쁨이 최대치에 달했을 때, 문득 생사가 묘연한 장손무극이 생각났고, 환하게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됐다.
아니야! 안 돼. 그 사람을 내팽개쳐두고 나만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순 없는 거잖아. 차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차마 어떻게? 한쪽 세계에서 소망을 이루면 다른 한쪽 세계가 마음에 걸리는 상황.
어째서 인생이란 이처럼 고뇌의 연속인 걸까.
뜨거웠던 가슴이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붙으며 극과 극의 온도 사이를 오갔다. 손바닥은 싸늘하게 식고 몸에서는 힘이 빠졌다. 맹부요는 비척비척 뒷걸음질을 치다가 등 뒤에 있던 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나무가 갑자기 말을 했다.
“어딜 더듬어?”
당황스럽게도 전북야의 목소리였다. 흠칫해 뒤를 돌아보니 등 뒤에 서서 아련한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보고 있는 전북야가 눈에 들어왔다. 맹부요는 그런 그를 멍청히 쳐다보면서 몹시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실망스러운 건지 반가운 건지 혼란스러웠다.
아, 역시 집에 돌아온 건 아니었구나…….
순간, 머릿속을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맹부요의 안색이 굳어졌다.
설마 엉겁결에 전북야까지 데리고 현대로 온 건 아니지?
손을 파르르 떤 그녀가 얼른 전북야를 붙들고 물었다.
“뭐 보고 있는 거예요? 뭐가 보여요? 조금 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명천궁明泉宮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각이다…….”
넋 놓고 앞을 쳐다보고 있던 전북야가 손가락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봐라. 배롱나무가 얼마나 굵게 자랐는지. 해마다 아주 오래오래 꽃을 보여주거든. 어머니께서 저 꽃을 좋아하셔서, 머리를 감겨드릴 때는 꼭 대야를 나무 아래에 두곤 했었다. 대얏물에 꽃잎이 떨어지면 어머니 머리에서도 배롱나무꽃 향기가 났지…….”
맹부요는 멍하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차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가 고개를 틀어 전북야를 쳐다봤다. 전북야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진지한 눈빛에 장난기 같은 건 전혀 없었다. 맹부요는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섬뜩한 감각이 차츰차츰 뼛속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따스한 사월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진저리를 쳤다.
“배롱나무꽃…….”
맹부요가 넋 빠진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향기가 좋지?”
전북야가 상쾌하게 웃었다. 눈 안에서 기쁨이 반짝이고 있었다.
“명천궁…….”
맹부요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신음에 가까웠다.
“응.”
전북야가 한 지점을 가리켰다. 맹부요의 눈에 비친 그곳에는 고향 시내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모자가 제일 오래 지냈던 전각이다. 유년기부터 소년기까지의 시간을 저기서 보냈지. 봐라, 저기 구석에 내가 작은 칼로 새겨둔 글자도 남아 있어…….”
전북야의 입꼬리에 미소가 번졌다. 방금 전각 모퉁이 앞 배롱나무 아래에서 대야에 물을 떠 오는 자신과 소매를 걷어붙이고 어머니 머리를 감겨주는 부요를 본 것 같아서였다. 손이 여물지 못한 부요가 대야 밖으로 물보라를 튀기고, 둘이 그걸 보고 마주 웃어버리고…….
“유채꽃은 안 보여요?”
맹부요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물었다.
“시냇가랑 복숭아꽃이랑 오두막집은…….”
“유채꽃이랑 복숭아꽃이라니, 눈 제대로 달린 거 맞아? 저건 배롱나무꽃이야!”
행복한 꿈을 뚝 잘라먹은 게 불만인 듯, 전북야가 고개를 돌려 나무라는 눈길을 보냈다. 맹부요는 전북야의 반응에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간 오주를 돌아다니면서 온갖 괴상야릇한 일을 다 겪어봤지만, 이번처럼 기괴한 상황은 처음이었다. 분명 같은 자리에 있는데, 어째서 각자 보이는 풍경이 다른 거지?
맹부요는 홀연 원보 대인과 철성을 떠올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철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으나 원보 대인은 두 사람 곁에 나란히 서서 앞쪽을 홀린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저 새하얀 설산, 진짜 예쁘다…….
엄마 품은 참 따뜻해…….
그런데 왜 품이 점점 식는 것 같지?
원보는 열심히 엄마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핏속에 흐르는, 생명에 각인된, 최초의 온기를 찾아서. 하지만 원보를 끌어안고 있던 두 앞발은 힘을 잃고 스르르 늘어지는 중이었다.
백 년에 한 번 있는 장청신수의 탄생에는 짝짓기 과정이 필요치 않았다. 때가 되어 장청신산 풍연風淵 산마루에서 구규과九竅果를 따 먹으면 자연스레 다음 세대를 잉태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세대가 태어나면 앞 세대의 사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원보는 자신의 탄생이 곧 엄마의 죽음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장청신수의 운명이었다. 평생 고아일 수밖에 없는 운명…….
이제부터 길고 긴 백 년의 시간을 홀로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원보는 차갑게 식은 엄마를 안고 엄마의 품에 머리를 묻은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난데없이 커다랗고 새카만 그림자가 달려들어 원보를 덥석 끌어안더니 마치 제가 엄마라도 되는 양, 젖을 먹이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닌가.
으아악! 이 쓸데없이 명만 길어빠진, 장청신수 족보 중의 돌연변이! 백 년에 한 마리밖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장청신수의 규칙을 깨부순 비정상적인 존재! 정신 나간 암컷!
“찍찍!”
한창 좋은 꿈을 꾸는데 악귀가 난입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허상에 홀려있던 원보 대인은 흑진주의 등장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보대인은 경악에 찬 맹부요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자 적잖이 민망해졌다.
아유, 참. 장청신산 출신인 자신마저 걸려들 뻔한 걸 보면 천역은 역시 대단한 진법이었다.
원보 대인은 얼른 맹부요의 어깨 위로 올라가서 그녀의 귀를 붙잡고 한참을 목청 높여 찍찍거렸다. 물론 맹부요가 그 소리를 알아먹을 턱이 없었지만, 듣다 보니 퍼뜩 감이 왔다.
여기가 천역이구나. 사대신역 중 마지막 관문.
상상 속의 천역은 운부 진법처럼 구름이 자욱하고 빛이 찬란하며, 하늘 높은 곳에 누각들이 우뚝 솟아있고 꽃향기가 흐르는, 지극히 천상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천역은 마음속에 있었다. 각자가 마음속으로 가장 그리워하는 그곳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내 마음 쉴 수 있는 곳이 나의 고향이오, 내가 잠든 시각 나의 영혼이 맴도는 곳, 마음이 갈망하는 곳, 그곳이 바로 천역이어라.
맹부요가 본 곳이 엄마는 아직 건강하고 그녀 본인도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아름다운 사월이면 함께 봄나들이를 나서던, 지난 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행복하던 어린 시절의 고향 집인 것처럼.
전북야가 본 곳이 모자 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던 황궁 모퉁이 명천궁인 것처럼. 그때 전북야는 두각을 나타내기 전의 소년에 불과했다. 그를 눈엣가시로 보는 궁 안팎의 시선도, 매 순간 마음 졸이는 생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등나무꽃 아래에서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주던 나날들은 안온하고 담박하기만 했다.
“전북야!”
맹부요가 긴 침묵을 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둘, 완전히 다른 광경을 보고 있어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답게, 전북야는 환상에 미혹당한 와중에도 곧장 맹부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힌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속임수라고?”
“이게 마지막 진법이에요.”
맹부요가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어디가 심상치 않다거나 어디에서 살의가 느껴진다고 콕 집어내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찝찝한 뭔가가 있어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전북야가 이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건넸다. 물건을 보고 흠칫한 맹부요가 말했다.
“어, 우리 무기잖아요. 그 와중에 이걸 어떻게 챙겼어요?”
“향로가 추락하는 순간 충격 탓에 손을 놓치고 말았는데, 마침 그때 우리 무기가 눈앞을 스쳐 가더군. 내 정신이 아니었지만 일단 허겁지겁 붙들고 봤지.”
전북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안하다, 철성을 끝까지 잡고 있었어야 했는데…….”
맹부요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였어도 못 붙들었을 철성을 몸도 성치 않은 전북야가 무슨 수로 끝까지 붙잡고 버틴단 말인가. 무기를 건진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었다. 다만, 그럼 철성은 운부향로가 꺼지고 나서 어떻게 된 걸까? 그 괴상한 산봉우리에 있던 운흔과 요신은 별일 없는 걸까…….
확인할 길 없는 수많은 이들의 생사가 가슴 위에 무겁게 얹힌 채 그녀를 아프도록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맹부요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쉬지 않고 달려야 할 운명이었다. 비탄에 잠길 시간도, 그럴 기회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야만, 그렇게 살아내야만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녀의 앞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그 많은 사람들도 있는데, 그녀가 죽을힘을 다하지 못할 까닭이 있겠는가?
“힘들죠? 일단 좀 쉬면서 대책을 생각해보자고요.”
전북야가 기댈 수 있도록 팔을 빌려준 맹부요가 곧이어 그의 옷을 걷어 올린 다음 품 안에서 약을 꺼냈다.
“약을 다시 발라야 할지 살펴봐야겠…….”
말이 뚝 끊긴 직후, 맹부요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새카만 눈동자에 그보다 더 검은 어둠이 번져갔다. 그 어둠은 돌연히 깨달은 절망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악이었다. 전북야의 등에 난 상처 자국이 눈에 띄게 흐릿해져 있었던 것이다!
원래 그 자리는 빨갛게 부어올라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었다. 처음에 약을 바르자 물집은 허연 거품을 흘리면서 쪼그라들었지만, 빨갛게 손상된 피부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지금 약을 걷어내고 보니, 터진 물집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하얀 흉터만 약간 남아 있었다. 붉은 기운도 싹 빠진 뒤였다. 상처가 거의 다 나은 것이다. 두 눈으로 상처를 똑똑히 보면서 직접 약을 발라준 지 얼마나 됐다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이 정도까지 회복되다니?
맹부요는 화상이 낫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종월이 경신전에 맞았을 때 직접 간호해준 경험이 있었으니까. 종월은 그때 등에 얇은 막 같은 걸 붙이고 있었는데도 물집이 지금의 전북야만큼 가라앉기까지는 열흘 이상이 걸렸다. 아무리 전북야가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의 소유자라고 쳐도 이럴 수는 없었다. 이건 인체의 자연치유 법칙에 완전히 위배되는 일이었다. 설마 향로가 추락하고 나서 둘 다 열흘 넘게 기절해 있었던 걸까?
그럴 리가! 맹부요는 자기 몸 상태를 모르지 않았다. 많이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당장 오늘내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와 전북야 정도 되는 고수가 그까짓 추락의 충격으로 열흘 이상을 기절해 있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런 거였으면 이미 굶어 죽었을 거다.
맹부요가 전북야의 등을 보고 말문이 막힌 사이, 그녀가 뭘 보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는 전북야는 그저 둘이 같이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참이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든 간에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껏 들뜬 그가 농담을 던졌다.
“어이, 내 몸에 홀딱 빠진 거냐? 원한다면 한 번 쓰게 해줄 수도 있는데.”
그 소리에 불퉁하게 주먹을 한 대 먹인 맹부요가 약을 챙겨서 옆쪽에 털썩 앉았다. 얻어맞은 전북야가 꽥 소리를 질렀다.
“나 환자라고! 우악스러운 여자 같으니!”
그런데 말을 해놓고 보니 자기가 느끼기에도 뭔가 이상했다. 줄곧 욱신거리던 등판이 지금은 맹부요의 주먹을 맞고도 별로 아프질 않았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지? 순식간에 눈빛이 심각해진 전북야가 고개를 돌려 맹부요를 쳐다봤다.
“생각을 좀 해봤거든요…….”
맹부요는 자기 손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이 빨리 자라는 편이었다. 그래서 싸울 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진법에 진입하자마자 한 번 잘랐었는데, 어느새 또 훌쩍 길어져 있었다.
“방금 당신 등을 때리던 그 한순간 사이에 과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전북야는 말뜻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시선이 흔들리는 것 같던 그가 잠시 후 말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다는 거군?”
맹부요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맞은편 유채꽃밭만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천역, 천역. 하늘에서의 하루는 인간계의 천 년이라 하던가.
그들이 마음속 천국에 미혹되어 이곳에서 흘려보내는 일분일초가 밖에서는 하루가 될 수도, 열흘이 될 수도, 한 달, 혹은 일 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과연 바깥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더 심각한 건 시간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신체의 신진대사와 노화 속도까지 가속화된 것 같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이 아련한 마음속 천국은 침입자를 겨냥해 특별히 위협적인 장치를 심어둘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침입자가 자연히 늙어 죽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니까! 한때의 헛된 꿈.
“앉아서 죽기만 기다릴 수는 없어요!”
맹부요가 전북야를 끌고 일어섰다.
“진을 파할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답을 구하는 그녀의 눈빛이 원보 대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원보 대인은 망연히 그녀를 마주 봤을 뿐이었다. 예전의 천역은 단순히 환심술幻心術을 이용해 침입자를 본인의 심마에게로 이끄는 진법이었다. 심마란 한 인간이 가장 집요하게 집착하는 대상이요, 온갖 험난한 역경을 너끈히 넘어온 인간도 제 마음 하나는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실 천역을 파할 구체적 묘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탈출 여부는 순전히 본인의 의지력에 달려있었다. 본래 원보 대인은 맹부요가 그만한 의지를 충분히 갖추었다고 생각해 마지막 관문은 아예 걱정하질 않았다. 그런데 그새 천역에 변동이 생긴 것이다. 전주가 신술을 이용해 시간을 중첩시켰거나, 아니면 아예 시공을 뒤틀어 진법과 선계를 연결해 놓은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 지금과 같은 천역은 원보 대인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맹부요가 원보 대인을 토닥이면서 다행이라는 양 말했다.
“짠한 녀석, 그나마 수명이 사람이랑 똑같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늙어 죽은 네 시체였을 거야.”
노환으로 운명하신 자기 시체를 상상해버린 원보 대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라, 향로가 아직 있었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던 맹부요가 울타리 뒤편 진흙땅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는 운부향로를 발견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울타리를 완전히 짓뭉개놨어…….”
“그러게, 명천궁 후원 꽃시렁을 박살 냈군…….”
전북야가 무척 아쉽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맹부요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경련을 일으켰다. 전북야와의 기괴한 대화를 더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그녀가 앞으로 몇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일종의 주문처럼 보이는 푸른색 글자들이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서 무리 지어 눈앞을 스쳐 갔다. 순간 움찔했던 그녀가 다시 주변을 살폈을 때, 향로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였고 사방 어디에서도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가 전북야에게 물었다.
“방금 뭐 지나가는 거 못 봤어요?”
“못 봤다만.”
바로 그 순간, 맹부요는 또 한 번 눈앞이 번쩍함과 동시에 아까와 똑같은 주문이 스쳐 가는 걸 봤다. 이번에 그녀는 주문을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머릿속에 기억해뒀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향로가 여기 구멍을 냈는데?”
전북야가 불쑥 앞으로 나서서 향로를 한쪽으로 치웠다.
“봐!”
그의 말대로 향로 뒤편에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상하게도 아래쪽이 아니라 위쪽으로 이어진 구멍이었다.
“선계로 넘어가는 통로 같은 거 아닌가?”
맹부요가 나름대로 애써 농담을 했다.
“봐요, 우리 둘이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고 있는데 향로 뒤편에 난 구멍만은 똑같이 보이잖아요.”
“들어가 보지.”
전북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이미 주변 탐방을 끝낸 뒤였다. 걸어도 걸어도 명천궁을 벗어날 수 없었고, 유채꽃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진을 파할 열쇠로 짐작되는 지점은 오로지 지금 눈앞에 있는 구멍뿐이었다. 어쩌면 기회의 탈을 쓴 살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는 이곳에서 시시각각 늙어가며 가슴만 태우느니 모험을 해보는 편이 나았다.
“찍찍!”
등 뒤에서 원보 대인이 요란하게 울며 뛰어와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가지 말라고?”
맹부요가 제자리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원보 대인은 갈등하고 있었다. 새로 발견한 구멍이 탈출의 열쇠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사대신역에 숨겨진 열쇠의 뒷면에는 반드시 살의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황천으로 직행할 가능성이 컸다. 원보 대인의 눈빛을 읽어낸 맹부요가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난 여기서 늙어 죽고 싶지 않아. 원보 너랑 전북야가 내 눈앞에서 차츰차츰 늙어가다가 죽어버리는 모습을 보는 건 더 싫고.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기왕 죽을 거 화끈하게 죽는 것도 괜찮잖아?”
“옳은 말이다! 죽어도 화끈하게 죽자고!”
맹부요의 말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 전북야가 원보 대인을 밀어젖히고 앞장서서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맹부요까지 안으로 사라지자 원보 대인도 별수 없이 뒤를 따라나섰다. 한 사람만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계단이 이어져 있는 구멍 안은 퍽 천역다운 분위기가 났다. 자욱한 운무 탓에 주위 풍경을 분간하기가 힘들었고, 가파른 계단은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로 뻗어있었다. 맹부요가 한숨을 내쉬었다.
“까마득하게 높네…….”
그러자 전북야가 말했다.
“평지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았다. 운부향로 주변은 있는 그대로 보였지만, 향로 곁을 벗어나면서부터는 또다시 각기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는 걸.
전북야는 걸을수록 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걷고 있는 곳은 명천궁의 길게 뻗은 회랑이었다. 바닥에 구들이 깔린 데다가 톡톡한 휘장이 바람을 완벽히 막아주어서 회랑 안은 봄날처럼 훈훈했다. 회랑의 끝에는 어머니의 침전이 있었다. 몸이 약해 바람을 쐬면 안 되는 어머니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었기에, 전북야는 매번 회랑을 지날 때마다 더위를 탔다.
맹부요는 걸을수록 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지면은 얼어붙은 눈으로 뒤덮여 온통 반짝이고, 주위에 삐죽삐죽하게 솟은 바위에도 얼음이 한 겹씩 덧씌워져 있었다. 산꼭대기 바람이 포효하며 달려와 얼음 칼날처럼 얼굴을 할퀴고, 가슴을 베고 갔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지만, 아직은 자욱한 구름에 감춰져 있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맹부요는 운공에 기대어 심장을 에는 칼바람에 맞서는 중이었다. 사람이 있을 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 단지 바람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발밑이 갈수록 미끄러워졌다. 그녀는 이미 아찔한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산꼭대기에 동굴이 뚫려있는 게 보였다.
얼음동굴! 동굴이 눈에 들어오자 어째서인지 슬픔이 밀려들었다. 지난날 산골짜기 눈밭에서 핏자국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아픔이 다시금 되살아나 칼바람보다도 더 차갑게 그녀의 가슴을 때렸다. 그녀는 부르르 몸서리를 치는 동시에 얼음동굴 아래에 멍하니 굳어 섰다.
곧이어 발치에 늘어진 장포 끝자락이 살짝씩 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고개를 숙이자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원보 대인이 보였다. 어서 여길 뜨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맹부요는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주저할 것 없이 원보의 지시를 따르라’는 충고를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다른 문제였다면 고민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면서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온 의문이 풀릴 순간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멈추라니, 대체 어떻게?
그녀는 원보 대인을 가볍게 토닥여준 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서 마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얼굴을 덮쳐오고, 통째로 얼어붙은 폭포가 보였다. 산정상에는 판판하게 딛고 설 부분 없이 얼음동굴이 뻥 뚫려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늘귀와도 같은 동굴을 통해 구만리를 내달려온 강풍이 드나들었다. 얼음동굴 앞에 당도한 맹부요는 속눈썹에 낀 성에를 훑어내며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곳에 만약 사람이 산다면 분명 며칠 못 가 송장이 될 거라고.
성에를 다 훑어내고 시선을 든 그녀는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맞은편 얼음동굴 정중앙, 키 큰 형틀에 연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못 박혀 있었다. 굵고, 기다랗고, 금빛으로 빛나는 대못 네 개가 양쪽 손목과 어깨에 박혀 남자를 형틀에 단단히 고정해둔 상태였다. 남자의 가슴과 등은 쉬지 않고 맹렬히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형틀과 거기에 연결된 쇠사슬이며 대못에는 묵은 피와 새 피가 겹겹이 얼어붙어 있었는데, 실로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탓에 남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처럼 창백한 이마만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저건…… 저건…….
맹부요가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잘하던 떨림이 시간이 갈수록 미친 듯이 격해졌다. 몸에 붙어 있던 얼음 결정과 눈 덩어리가 서로 맞부딪쳐 미세하게 짤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맹부요는 자기 온몸의 피와 뼈마디가 순식간에 딱딱하게 얼어붙어 서로 충돌하면서 요동치는 소리를 듣는 기분이었다. 조각조각 깨진 핏방울이 온 하늘에 흩뿌려졌다!
“무극!”
그녀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과 함께 앞으로 튀어 나갔다. 워낙에 빠르고 격앙된 움직임이었던 탓에 맹부요는 그 고강한 무공으로도 몸을 완벽히 가누지 못했다. 바닥을 박차고 오르는 찰나, 무릎이 빙벽을 들이받으면서 피범벅이 됐다. 흥건하게 분출된 피는 곧이어 불어온 칼바람에 순식간에 얼어붙어 핏빛 얼음이 되었다가 맹부요의 격렬한 동작을 못 이기고 산산이 박살 났다. 그녀는 자신의 피를 밟으면서 일생 중 가장 빠른 경공을 펼쳐 몸을 날렸다.
바로 그때, 허공에 하얀 잔영이 스치나 싶더니 원보 대인이 튀어와 맹부요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맹부요는 머리채를 떨치면서 귀신같이 원보 대인을 따돌렸다. 이어서 허공에 검은 잔영이 스치더니 전북야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북야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몫의 환각 속에서 모친의 침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침전 안에서는 흡사 몸싸움이 벌어지는 중인 듯했다. 비단이 찢어지고 병이 깨지는 등의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전북야가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막 침전 휘장을 걷으려는데, 순간 등 뒤에서 맹부요가 낸 심상치 않은 기척이 그를 제정신으로 돌려놨다. 즉각 휘장에서 손을 뗀 그는 뒤로 돌아 맹부요에게로 달려갔다. 맹부요가 한발 앞서 폭주함으로써 휘장을 걷는 걸 막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는 아버지가 어머니를 강제로 범하는 광경을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휘장 뒤편의 광경을 피한 덕에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전북야가 번개 같은 속도로 장검을 내뻗어 맹부요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다음 그녀의 무릎을 향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칼자루를 휘둘렀다. 그러나 맹부요는 칼자루를 훌쩍 뛰어넘으면서 몸을 회전시켜 자기가 원래 향하던 곳으로 돌진했다.
“무극! 무극!”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얼음동굴 안 형틀에 매달려 사경을 헤매던 장손무극이 그녀의 외침을 들은 양 홀연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입가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로, 그녀에게 미소를 보냈다. 맹부요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그대로 허물어질 뻔했다. 그녀가 얼음장 같은 바람을 향해 달려들면서 소리쳤다.
“기다려요! 내가 구해줄 테니까, 내가 구해줄 거야―”
그러자 장손무극이 엷게 웃으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한마디를 한 것 같았다. 맹부요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듣지 못했다. 그녀는 칼바람과 눈보라, 그리고 자신을 막으려는 전북야, 원보 대인과 되는대로 실랑이를 벌이면서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구해줄게요! 내가…….”
그 사이, 말을 마친 장손무극은 이제 여한이 없다는 듯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그의 고개가 툭 떨어지고, 미약한 열기를 품은 입김이 공기 속으로 소리 없이 흩어졌다.
빠각― 맹부요는 그 순간 생명이 꺾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심장이 으스러지는 소리였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대로 허공에서 추락해 ‘쿵’ 하고 지면에 처박혔다. 그 충격으로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고요하게 굳어버린 얼음동굴 정중앙의 그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무극…… 무극…….
“아아악!”
돌연 고개를 젖힌 맹부요가 울부짖음을 토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피맺힌 절규가 칠흑의 번개와 검푸른 먹구름이 되어 어두컴컴한 하늘에 돌풍을 일으키고 눈을 흩뿌렸다. 번개와 먹구름이 휘몰아치는 자리마다 드높은 하늘이 찢기고 터지면서 핏빛 세상이 드러났다. 자신의 울부짖음 속에서 홀연, 그녀는 조금 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들었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소.”
그대를 위해 죽는다, 그대를 위해 죽는다, 그대를 위해 죽는다……. 나를 위해 죽는다, 나를 위해 죽는다, 나를 위해 죽는다……. 누가 누구를 위해 죽는다고? 누가 누구를 위해 죽어? 누가 누구를 위해 죽어…….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군데…….
저 멀리 하늘 끝에서부터 귀청이 떨어질 것처럼 쩌렁쩌렁한 목소리들이 떼를 지어 밀려들었다. 그러더니 박살 나 미쳐버리기 직전인 그녀의 의식을 때리면서 줄기차게 명령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죄인, 죄인, 죄인, 죄인…….
갑자기 벌떡 일어난 맹부요가 칼을 뽑았다. 시천이 허공에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궤적을 그리면서 그녀의 목을 향해 돌진했다!
죽여야 해! 죄인을 죽여버려야 해!
챙! 칼과 칼이 맞부딪치면서 공중에 불꽃이 튀었다. 맹부요가 즉각 칼의 각도를 틀어 전북야의 검을 후려쳤다. 그 무지막지한 기세에 전북야가 뒤로 물러서자 맹부요는 곧장 자신의 심장에 칼을 겨눴다.
챙! 붉은 장검이 다시 한번 칼을 가로막자 맹부요는 격분했다. 지금 그녀는 몸과 마음 모두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때리는 목소리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장손무극이 형틀에 묶인 채 참혹하게 숨을 거뒀다는 사실이 그녀의 정신을 붕괴로 몰아갔다. 그녀는 동귀어진을 불사하고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살초를 남발하고 있었다.
방해하면 같이 죽는 거야!
고통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그녀와 달리 전북야는 맑은 정신이었기에 그녀처럼 마구잡이로 살초를 쏟아낼 수가 없었다. 원래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으나, 지금은 전북야가 계속 밀리고 있었다. 급기야는 잠깐 집중력을 잃은 사이에 맹부요의 칼이 그의 무릎을 긋고 지나갔다.
피가 튀자 그 새빨간 색채에 더 자극을 받은 듯한 맹부요가 냅다 칼을 반대로 돌려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자 전북야가 부상도 개의치 않고 또 한 번 그녀를 저지했고, 두 사람은 한데 뒤엉켜서 정신없이 서로 치고받았다. 눈부신 붉은빛 검풍 속에서 전북야가 급하게 몸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그의 허리에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났다.
전북야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가슴속에 선뜩한 감각이 번졌다. 부요는 이미 저지하려야 저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그녀를 상대로 과하게 거친 공격을 펼칠 수도, 정말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부요는 엄청난 고수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이 먼저 죽고, 뒤이어 부요도 죽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사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부요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나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요가 저렇게 광기에 찬 채로 죽는 건 원치 않았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만 봐도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비통한 악몽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요를 그런 악몽 속에서 죽게 하는 건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입만 열면 장손무극의 이름인 걸 보면 부요의 마음은 오직 장손무극 한 사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었다. 무한히 넓은 마음을 가진 그녀였지만, 그녀가 품을 수 있는 사랑은 장손무극이 유일했다. 전북야는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선뜻 단념하지 못하면서도 실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쟁취하려 노력하다가 나중에는 부요가 그걸 무척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건 부요를 더 멀찍이 밀어낼 뿐이었다.
그러다가 더 나중에는 버티는 게 단순히 ‘버틴다’의 의미가 아니라 습관이 되고, 책임이 되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연속이 됐다. 그리고 그 일상의 연속이 이제는 혈맥과 골수까지 파고들어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그까짓 죽음이 뭐 대수라고. 만약 누군가 눈앞에서 죽는다면 부요도 정신이 번쩍 들지 않겠는가? 만약…… 만약 부요의 마음속에 그래도 내 자리가 있기는 하다면, 내 죽음이 그녀를 깨워주지 않을까?
돌연 동작을 멈춘 전북야가 칼자루를 맹부요 쪽으로 돌려 자신의 장검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한창 맹렬히 칼을 휘두르던 맹부요는 갑자기 손안으로 장검이 쑥 들어오자 흠칫 굳어버렸다. 그녀의 귓가에 맞은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내 모든 순간을 함께할 검이다.”
맹부요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니 검을 네게 넘긴 순간부로 내 목숨도 네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전북야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맹부요가 움찔하면서 동작을 멈췄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혼돈과 소음 속에서도 어렴풋이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은 용납되지 않는다!”
전북야는 칼끝이 아닌 맹부요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이 패기만만했다. 심마에 홀린 사람에게 회유와 부탁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지금은 부요보다 더 묵직한 기세로 그녀를 압도해야만 했다.
“만약 거절하려 든다면 내 손을 떠난 검이 네 가슴을 꿰뚫고 오주의 대지에 박힐 것이다. 영영 돌이킬 수 없이!”
맹부요의 손이 다시 한번 떨렸다.
오주의 대지…… 오주의 대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창생의 피를 대신할 수 있다면…….
주변의 눈과 얼음이 반사하는 빛을 받아 검 끝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반짝임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붉은빛은 전북야의 피였다. 검 끄트머리가 이미 살갗을 파고들었는데도 전북야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그는 검에 몸을 바짝 들이대는 걸 넘어 작게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했다. 그러자 칼날을 따라 흐르는 피의 양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나를 죽여!”
맹부요는 무의식적으로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귓전을 맹렬하게 때리는 소음은 여전했다. 안 그래도 두통을 지병으로 가지고 있는 그녀의 머릿속은 급기야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익히 들어왔던 강건한 말투와 패기만만한 표현법이 그녀에게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 역시 네가 상처 줘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전북야의 눈빛에 희색이 돌았다. 그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서자 맹부요가 또 뒷걸음질을 쳤다.
“못 하겠나?”
전북야가 검 끝을 따라 철철 넘쳐 흐르는 피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 검이 네 심장을 꿰뚫을 수밖에!”
그러더니 기습적으로 손을 뻗었다! 전북야는 자기 가슴 앞의 검 끝을 손가락으로 붙잡고 칼자루가 맹부요의 가슴 대혈을 가격하도록 검신 전체를 그녀 쪽으로 힘껏 밀었다.
기세를 압도한 다음에는 몸을 제압할 차례였다! 칼자루는 뭉툭했으나 그것이 맹부요를 향해 쇄도하면서 내는 바람 소리는 날카로웠다. 전북야도 이번에는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부요는 강력한 상대였고, 어렵사리 기세를 꺾은 지금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터였다. 칼자루가 돌진해오자 조금 전까지 멍하니 있던 맹부요가 반사적으로 비스듬히 공중제비를 돌아 거리를 벌렸다. 평소보다 훨씬 민첩한 대응이었다.
그녀가 공중에서 회전하는 찰나, 얼음동굴이 급강하해 그녀의 눈에 부딪쳐 왔다. 피로 물든 형틀과 창백한 얼굴이 머릿속에 박히자 맹부요가 비명을 지르면서 ‘쾅’ 하고 어딘가를 들이받았다. 어디에 부딪쳤는지는 몰라도 충돌과 동시에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가 터지면서, 추락하는 그녀를 따라 온갖 물건이 하늘 가득 흩뿌려졌다. 맹부요는 공중에서 자그마한 핏빛 옥 연꽃을 발견하고는 멍하니 생각했다.
저게…… 언제부터 나한테 있었지? 종월이 소매 속에 밀어 넣어놨나?
연꽃의 등장과 동시에 급격히 거세진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주변 냉기가 한풀 꺾였다. 하얗고, 알록달록하고, 까맣고, 노랗고, 빨간 광채가 연이어 빠르게 지나가면서 색색의 다채로운 선을 그렸다. 쌩쌩거리는 바람 소리 사이로 승려가 노래하는 여래패와도 같은, 범어를 나지막이 낭송하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사찰의 새벽 종소리와 저녁 북소리가 울리고, 온 천지가 소용돌이치고, 눈앞에 파랗게 빛나는 주문이 나타났다. 푸른 주문이 혈련화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광채 속을 희미하게 떠다니길 잠시, 곧이어 시천이 천천히 허공으로 부상했다. 그러더니 칼날에 반사되는 빛 사이로 투명한 기호가 떠올라 허공의 주문과 하나하나 짝을 이루었다. 귓가에 줄곧 누군가의 읊조림이 들려오고 있었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색색의 광채 속을 맴돌면서 부침을 반복했다.
“나의 사랑이여, 돌아오라!”
*
돌아오라…….
맹부요는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물론이요, 심지어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주위는 손을 뻗어봐도 손가락조차 안 보일 만큼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치 운부 신역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몸이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현상은 없었다. 그보다는 몸이 아주 가볍고 날렵해져서 깃털처럼 하늘과 땅 사이를 너울너울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 가벼움이,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고 무엇에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느낌이 그녀를 절망에 빠뜨렸다.
죽은 거야, 역시 죽은 게 틀림없어! 그냥 죽기만 한 것도 아니고 18층 지옥에 떨어져서 영영 환생조차 못 하게 된 거야.
이제부터 혼자서 이 끝없는 어둠 속을 영원토록 헤매고 다녀야 한다니. 차라리 한 번 더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는 더 철저하게 죽어보리라. 그녀는 칼을 찾았지만 시천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 맞다. 나 이제 혼령인데, 인간 세상의 무기가 날 어떻게 죽이겠어.
맹부요는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앞서 겪은 억장이 무너지는 비극이 떠오르자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갑작스레 몰려온 격통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얼음동굴 안의 풍경은 너무나 선명했고, 그 순간 장손무극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환영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그건 현실이었다. 현실……. 그렇게 생각하자 숨이 막히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맹부요는 한기를 이기지 못하고 두 팔을 교차시켜 자신을 감싸 안았다. 주변은 극도로 어둡고 극도로 고요했다. 너무 조용해서 진공 상태로 느껴질 정도였다. 생명의 징후나 속세의 기운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소름 끼치는 고요와 절대적인 암흑이 얼마나 위험한지, 맹부요는 잘 알고 있었다. 정신 밑바닥의 어둠과 광기를 끌어올리는 이 상태가 계속되면 결론은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녀는 이처럼 아무런 소리도, 그 어떤 반응이나 기척도 없는 암흑 속에서 신물 나게 고통받다가 미쳐서 죽고 싶지 않았다. 영원한 어둠, 빛도 없는 밤, 피눈물로 점철된 인생……. 진저리가 났다, 이젠 정말로 진저리가 났다…….
어렴풋한 이명이 끊임없이 울렸다. 누군가가 쉬지 않고 귓가에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돌아가, 차라리 돌아가……. 차라리 원점으로 돌아가자! 그걸로 끝내는 거야!
나갈 수도 없거니와, 나가고 싶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고작 이 한목숨 부지하는 데 그토록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르는 게 과연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쉰 맹부요는 진기를 가라앉혀 심맥 쪽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심맥을 끊어버리면 다 끝이었다. 더는 고통스러워할 일도,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킬 필요도 없으리라. 진기가 지체 없이 심맥으로 밀려드는 찰나, 멀리 앞쪽에서 난데없이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맹부요가 움찔하는 동시에 진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앞쪽을 자세히 살펴보니 가느다란 연기 한 가닥이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오르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장작 같은 걸 땔 때 나올 법한 연기였다. 연기도 불빛도 너무나 희미해 주변을 밝혀주는 효과는 전혀 없었지만, 자괴감에 빠진 맹부요의 잿빛 가슴을 단숨에 환하게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사람이 또 있었구나. 아직 세상의 연기와 불빛을 볼 수 있는 거였어. 이 어둠은 영원히 깨부술 수 없는 게 아니었고, 나는 이 절대적인 어둠 때문에 미쳐버리지 않아도 돼.
세속으로부터 비롯된 연기가 공중으로 피어오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동감이 넘쳤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내는 동안 맹부요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거의 홀린 듯이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연기가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오늘에야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연기의 출처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살짝이나마 정신이 난 맹부요는 심맥으로 밀려가던 진기를 도로 거둬들였다.
철저히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최악의 순간이 이미 도래했다 해도 자결은 안 될 짓이었다. 그보다는 여기서 나가야 했다. 나가서 갚아줘야 했다! 아직 못다 한 책임이 있고 끝맺지 못한 여정이 있는데, 왜 여기서 스스로 목숨을 버린단 말인가.
그런데 진력을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글자가 우르르 떠올랐다. 모종의 연공법을 설명하는 글자들인 것 같은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았다. 잠시 기억을 되짚다 보니 문득 정신을 잃기 직전에 봤던 기이한 광경이 생각났다. 맹부요는 푸른색 주문이 주위를 부유하는 와중에 시천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시천에 적힌 기호들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주문과 하나하나 짝을 이뤘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잠깐, 그건 단순히 주문이라고 표현할 게 아니라 정확히 말해 글자였다. 절반짜리 글자! 그리고 시천에 나타난 기호는 그 글자들의 부수였다! 주문과 기호, 두 가지가 합쳐져 온전한 글자를 이루었을 때, 마침내 완성된 것은 무공 비급이었다!
순간, 처음 운부향로 안에 들어가서 ‘주문’을 보고 느꼈던 묘한 기분이 떠올랐다. 그때는 자신의 육감이 왜 반응하는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납득이 갔다. 당시 그녀는 시천에 나타난 부수를 이미 본 뒤였고, 그 상태에서 ‘주문’이 눈에 들어오자 무의식이 자동으로 두 가지를 연결시켰던 것이었다. 다만, 그 순간에는 머릿속에 떠오른 영감을 즉각 포착해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산란하는 빛 속에서 글자들이 하나로 조합됐고, 그것은 고작 일찰나 뇌리를 스쳐 갔을 뿐임에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게 기억에 각인됐다. 더 신기한 것은, 머릿속으로 쭉 훑어본 그 무공이 부풍 바다에서 건져 올린 대풍의 책자에 적혀 있던 무공과 접점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두 가지를 대조해본 결과 대풍의 책자를 발견하고부터 줄곧 풀리지 않고 남아있던 몇 가지 의문들이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정신이 번쩍 난 맹부요는 얼른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는 본격적인 연공에 돌입하기에 앞서 연기를 향해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녀에게 있어 그 한 줄기 연기가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도 컸다. 춥고, 지치고, 절망하여 심마에 잡아먹힐 뻔했을 때, 연기가 내밀어준 흐릿하지만 따스한 손이 그녀를 붙잡아주었다. 맹부요는 잡념을 지우고 수련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채,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일정 간격으로 고개를 들어 앞쪽을 내다보는 것 외에는 오로지 연공에만 몰두했다. 앞쪽에서는 연기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는 일종의 신호였다. ‘내가 여기 있어, 기다리고 있어, 함께해줄게.’라는 신호가 맹부요를 지탱해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무서울 정도로 공허한 암흑 속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 꿋꿋이 집중할 수 있었다.
연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