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두 얼굴의 투자 구루
“패를 잡고 있을 때를 알아야 한다.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 도망갈 때를 알아야 한다, 도박판에서는 절대 돈을 세어보아서는 안 된다. 도박이 끝난 후에도 돈을 세어볼 시간은 충분하다.”
—케니 로저스의 노래 ‘더 갬블러’ 중에서
조지 소로스를 생각하면 케니 로저스의 노래 ‘더 갬블러’가 떠오른다. ‘패를 잡고 있을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투자자’가 무엇인지 그 ‘생각의 틀’을 알려준 구루guru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 식의 장기 투자만이 정답이라고 강요받는 요즘 한국의 투자 문화와 결이 다른 투자자임에 분명하다.
버핏과 소로스, 둘 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투자자지만 평가는 극단이다. 한 명은 ‘오마하의 현인’으로, 다른 한 명은 ‘영국은행을 이긴 투기꾼’으로 불린다. 많은 투자자가 버핏을 존경하며 그의 투자 방식을 성서처럼 따른다. 반면 소로스는 투기꾼의 이미지가 크다. 1992년 영국은행Bank of England 공격과 파운드화 평가 절하로 얻은 명성 때문이다. 소로스의 소개에는 늘 글로벌 투기꾼global speculator이라는 단어가 뒤따른다.
오류와 불확실성에 투자하는 ‘재귀성’ 개념
버핏과 소로스, 이 둘의 투자 방식 중 어떤 것이 우위에 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아마도 투자자 개개인의 투자 성향과 자본의 성격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주식 투자의 긴 흐름에서 보면 버핏은 벤저민 그레이엄의 계승자이고 소로스는 제시 리버모어 같은 모멘텀 투자자의 범주에 속한다. 모멘텀 투자자는 균형보다 불균형에서 베팅하는 것을 선호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거장의 차이보다 유사성이다. 마크 티어는 그의 저서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의 투자 습관(The Winning Investment Habits of Warren Buffett & George Soros)》에서 버핏과 소로스의 공통분모를 파고든다. 투자 대상을 분산하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 있는 투자 자산에 집중하며, 시장이나 경제 전망을 예측하기보다 투자 과정에 집중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돈을 버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있음을 찾아냈다. 소로스의 조언 중에 “금융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때로는 황급히 도망갈 필요도 있다”가 있다.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직관적 답변이다.
소로스와 버핏 모두 자신의 생각에 다른 생각을 접목하고 점점 더 확산해왔다. 버핏은 그레이엄의 가치투자에 필립 피셔의 성장 투자를 접목해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완성했고, 소로스는 1960년대 초반 베르트하임 & 컴퍼니Wertheim & Company의 애널리스트로 시작해 이후 퀀텀 펀드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다.
매크로 헤지펀드의 선구자로서 소로스는 기존과 매우 상이한 접근 방식으로 주목받게 된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풀린 것은 《금융의 연금술(The Alchemy of Finance)》 발간과 함께 그의 투자 접근법이 알려지면서부터다. 가격이 정규 분포를 따른다는 효율적 시장 가설에서 벗어나 수익률 분포의 꼬리가 더 두꺼울 수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방법으로, 철학자 칼 포퍼의 생각에서 도출해낸 것이다. 다시 말해 소로스의 독창성은 금융시장의 경험과 철학적 사고를 결합한 ‘사고의 틀’에 있다.
이제 와서 고백하지만, 나는 꽤 오랜 시간 어떤 의사결정을 앞두고 고민할 때마다 소로스가 정립한 ‘사고의 틀’을 적용해왔다. 책장에는 소로스의 《금융의 연금술》,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The New Paradigm for Financial Markets)》 등 국내 번역 출간된 책은 물론, 소로스를 접한 후 읽기 시작한 철학 관련 책이 금융 관련 책만큼 가득하다. 이번에 선뜻 2010년 ‘억만장자의 고백’으로 번역된 《The Soros Lectures》의 재발간을 맞아 추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5개의 강연으로 구성된 이 책을 통해 철학과 투자를 접목한 소로스의 ‘사고의 틀’에 좀 더 많은 사람이 다가가고 그를 향한 편견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5개 강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는 칼 포퍼의 철학적 언어다. 포퍼는 19세기 이래 지배적이었던 귀납주의적 접근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논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검증보다 반증 가능성이 진리로 나가는 길이라 판단한다. 경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검증한다 해도 그 검증이 완전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론은 가설의 성격만 있을 뿐이며, 어떤 주장이든 그에 대한 반증을 이겨내는 동안만 잠정적으로 진리라는 주장이다.
소로스는 런던정경대학에서 칼 포퍼를 사사했고 그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 소로스의 ‘열린 사회 재단’이 포퍼의 기념비적 저서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소로스는 철학에서 금융에 접근하는 방식을 도출했고, 포퍼의 철학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재귀성reflexivity’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이 책이 내건 캐치프레이즈 “오류와 불확실성에 투자하라”는 시장과 투자자 사이의 상호 관계를 활용하자는 의미이고 이것이 바로 재귀성의 투자 활용이다. 책의 첫 번째 강연과 두 번째 강연은 철학과 투자를 접목한 소로스의 생각을 풀어낸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싫어하지만 불확실성이 없는 세상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따분해질 것이다. 주식은 차익을 내지 못하고, 스포츠 경기는 재미가 없어지며, 코미디는 촌철살인의 위트를 발휘하지 못한다.”
—대니얼 크로스비
소로스는 확실성이 아닌 불확실성의 세계를 다룬다. 런던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했던 시절, 웨일스에서 핸드백을 팔았던 시절, 머리가 아닌 몸으로 투자해 돈을 벌었던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불확실성의 다른 말이 ‘돈 벌 기회’임을 소로스는 알고 있었다.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가 분류했듯이 금융에서 위험risk과 불확실성uncertainty은 다른 개념이다.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위험과 불확실성이 동일하지만 위험은 분포와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반면 불확실성은 분포 자체를 알 수 없다. 나이트는 불확실성이 바로 이윤의 원천이라 주장한다. 불확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예측 가능한 리스크만 존재하며 구매자와 판매자가 각각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윤이 창출될 수 없다.
소로스는 불확실한 시장에서는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한다. 결국 사람의 생각이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투자자와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익의 기회를 잡으려 했다. 반증되기 전까지, 가설은 적절한 판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재귀성은 시장과 투자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이론이다. 재귀성 이론 관점에서 보면 펀더멘털과 주가는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 종속변수의 관계일 뿐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주가의 변동 요인은 현재 유행하는 ‘추세’와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착각’의 결합이며, 이들은 주가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러한 영향은 스스로 강화되거나 수정되기도 한다.
소로스의 탁월함은 여기에 있다. 가격과 펀더멘털의 관계를 ‘피드백 고리’라는 개념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미스터 마켓Mr. Market을 조울증 환자로 표현하는 이유는 상황에 따라 가속과 감속이 불규칙하게 전개된다는 데 있다. 물론 행동경제학에서도 이러한 불안정성을 다루지만, 소로스는 이것을 절반의 분석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사람들이 금융 자산의 가격을 잘못 산정하는 과정에만 집중할 뿐, 잘못된 가격 산정이 펀더멘털에 미치는 영향은 다루지 않으므로 행동경제학은 재귀 과정의 절반만 분석합니다.”[73쪽]
소로스의 ‘재귀적 피드백 고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반면 행동경제학은 점점 더 효율적 시장 가설의 대안이 되고 있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으로 정보가 왜곡되고 이로 인해 주가가 적정 가격을 벗어날 수 있음을 지적했을 뿐이다. 소로스의 지적대로 시장이 작동되는 메커니즘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평온했던 시장이 군중의 광기로 바뀌는 사례는 빈번하지만, 집단 쏠림이 투자자 집단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결국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몰려가게 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지 못했다.
불완전한 균형이 반전되는 시점이 투자의 기회
소로스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로 버블과 붕괴의 원인을 밝혀냈다. “부정적 피드백은 균형을 이루는 경향이 있지만, 긍정적 피드백은 역동적 불균형을 만들어냅니다. 긍정적 피드백은 시장 가격과 펀더멘털 모두에 큰 변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더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긍정적 피드백 과정에서는 처음에 한쪽으로 자기강화가 진행되지만, 마침내 정점에 도달한 다음에는 반대쪽으로 자기강화가 진행됩니다.”[74~75쪽]
소로스는 불완전한 균형이 반전되는 시점이 투자의 기회임을 자신의 이론으로 정립했고, 이후 여러 번의 투자에서 성공했지만 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는 게임의 규칙이 바뀌는 베팅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라자 합의 당시의 달러 매도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87년 5월 《금융의 연금술》을 출간하면서 스타 매니저가 되었지만, 그해 블랙 먼데이 당시에는 큰 실패를 맞기도 했다. 중국 경제가 흔들릴 때는 위안화 약세에, 유로존이 흔들릴 때는 유로화 붕괴에 베팅했고 언론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지만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언론은 그의 투기가 실패했다고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포지션이 반증되면 빠르게 청산했고 여전히 투자자로 살아남아 있다.
이 책은 금융시장만 다루지 않았다. 세 번째에서 다섯 번째 강연은 금융시장보다 좀 더 광범위한 가치의 영역을 다룬다. ‘열린 사회에서 유권자는 진실을 수호하고 거짓을 응징해야 하지만 현실은 왜 그렇지 않을까? 열린 사회가 되고 있음에도 왜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정의가 펼쳐지지 않을까?’라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네 번째 강연의 제목처럼 열린 사회와 시장경제는 하나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열린 사회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소로스는 정치를 금융시장에서 분리하면 시장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소로스가 시장근본주의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는 적절한 규제, 무엇보다 규제의 범위가 세계적이어야 효과가 있을 거라 주장한다. 실제로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원칙은 정치인의 보이는 손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열린 사회에서 정치는 공익에 맞춰지기보다 자본가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며 특수 이익집단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아쉽게도 이 책이 발간된 후 10년이 지난 이 시점에 상황은 더 악화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양대 정당이 중도를 놓고 경쟁했지만, 중도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정치는 갈수록 양극화되었습니다. (중략) 정치에 참여할 때의 기능과 시장에 참여할 때의 기능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나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능이 개선되리라 믿습니다. 각 개인에게 달린 문제입니다.”[176쪽]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라지는 중도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말이 맞고 내 말에 반대하는 상대는 적이다”라는 식의 극단론은 우리 사회를 ‘닫힌 사회’로 퇴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의 적은 좌나 우가 아니라 흑백논리로 무장한 전체주의자일 뿐이라는 철학자 칼 포퍼로 회귀하는 것이다.
소로스는 이러한 전체주의의 망령을 중국에서 찾은 듯하다. 이 책 말미에서 그는 중국을 향한 불안한 시선을 고백한다. “중국은 세계 국가들에 인정받으려면 더 열린 사회가 되어야 하고,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중략) 중국은 자신이 제국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생각에 너무 길든 나머지, 이제는 자신이 제국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략) 나는 중국 정부 지도부가 상황에 맞게 대응하기를 희망합니다. 세계의 미래는 여기에 달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214~215쪽]
소로스의 바람과 달리 중국은 열린 사회가 아닌 닫힌 사회로 가고 있다. 소로스는 중국에 대한 기대를 접은 듯하다. 추천사를 쓰는 동안 그가 “블랙록의 중국 투자는 큰 실수다”라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중국의 반응도 원색적이다. “소로스는 국제 테러리스트다(George Soros is a global international terrorist).”(CHINA STATE MEDIA) 소로스의 예언대로 국제자본주의와 국가자본주의가 충돌하고 있다. 획일적이고 광적이며 배타적인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지뢰밭이 되고 있다. 아마도 소로스는 여기서 다시 베팅의 기회를 잡으려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잊지 말자. 소로스는 스스로 의견을 시장에 알리고 재귀적 연결고리가 작동하는지를 실험한다. 이미 6년 전 그는 위안화 숏 베팅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이미 스타 매니저였지만 《금융의 연금술》을 읽은 뒤 퀀텀 펀드에 합류해 후계자가 되었던 스탠리 드러켄밀러의 소로스에 대한 평가다.
“소로스는 내게 선택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옳은 선택을 했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그른 선택을 했다면 얼마나 적은 돈을 잃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스탠리 드러켄밀러
선택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에서 ‘성공하면 더 큰 돈을, 실패해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투자’가 바로 소로스의 투자 철학임을 알려준 문장이다.
투자자는 미래의 사건을 확률로 측정하고, 현재화되기 전 투자에 반영한다. 소로스는 재귀적 피드백 고리로 이의 가속 여부를 판단했고 이후 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M&A를 통해 영향을 주거나 사회적 책임 투자SRI와 ESG같이 특정 가치와 소통하며 가격에 영향을 주는 전략도 일정 부분 그의 투자 전략과 연결된다.
돈은 거래의 매개체일 뿐이지만 자본은 스스로 돌면서 증식한다. 돈이 넘쳐나는 시대, 누구나 자본가가 되고 싶어 하지만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을 것이다.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야’라는 식의 장기 투자만 가지고는 격변하는 자본시장에서 자본을 키우기 쉽지 않다. 소로스의 지적대로 금융은 ‘이성과 합리성’이 아닌 ‘오류와 불확실성’이 증폭될 때가 기회의 영역이다.
돈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금융시장에서 얻은 교훈이다. 많은 이가 강세장에서 이러한 원칙을 경시한다. 유튜브 생태계에는 ‘사서 들고 있으면 된다’는 식의 값싼 조언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소로스의 진면목을 이해했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소로스는 자서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불안감이 나를 깨어 있게 하고 실수를 바로잡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틀리면 부끄러워하지만 나는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자. 재귀적 연결고리가 변할 때 더 좋은 타이밍을 잡아낼 수 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꾸고 또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현재가 아닌 미래는 유동적이기에 기회가 있다. 바라보는 시각을 아주 조금만 바꿔도 사고가 유연해진다. 나는 소로스에게서 변화에 대처하는 ‘사고의 틀’을 배웠다. 균형이 깨질 때가 기회다.
2021년 9월
윤지호
이베스트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