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 문병철
철학자의 포부를 안고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으나 한국 근현대사가 할퀴어놓은 한반도의 운명에 아픔을 느끼고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사 졸업 후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영국 뉴캐슬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및 세계시민교육 등을 가르쳤고 방송에서 국제정치와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며 현재까지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세계인명사전 〈마르퀴즈 후즈후(Marquis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되어 있다.
천문학자 이명현
초등학생 때부터 별에 빠져 별만 보고 별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 아마추어 천문가였다. 별과 UFO, 외계인에 빠진 소년은 연세대학교 천문기상학과를 거쳐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전파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티 코리아(SETI KOREA) 대표와 METI International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외계지적생명체 탐색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과학책방 ‘갈다’를 운영하며 과학 저술과 강연으로 과학 문화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이명현의 별 헤 는 밤》 《이명현의 과학책방》 《빅히스토리1: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지구인의 우주공부》, 공저로는 《2020 노벨상 강의》 《과학 산책, 자연과학의 변주곡》 《떨리는 손》 《과학자의 책장》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 《판타스틱 과학 책장》 《과학하고 앉아 있네》 등이 있다.
복잡한 세상을 횡단하여
광활한 우주로 들어가는
사 과
책
“사회과학책은 읽기가 지루해요. 사회과학책 읽기의 문턱을 넘으려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요?”
사회과학책 읽기에 관해 얘기하다 보면 자주 듣게 되는 질문이다. 정답은 없다. 다만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답안은 ‘관심’이다. 바로 사회과학책을 펼쳐보기 어렵다면,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경제의 영역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는 것만이 문턱을 넘는 방법이라고 덧붙인다.
선거철이 되면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파들이 경제 성장이나 소득 분배, 권력 구조의 개편 등 여러 가지 정책을 공약으로 쏟아낸다. 또 국제적으로 기후 위기나 아프가니스탄 난민 등 수많은 뉴스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온다. 내가 자각을 하든 못 하든 간에, 이런 것들이 모두 나와 관련되어 있고 결국 나의 생활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과학책을 찾게 되는 출발점이다. 먼저 사회현상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게 되고, 사회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개념을 숙지하고 체계적인 인식의 틀을 갖추려면 사회과학책 읽기가 필수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한편, 자유·인권·정의 등 사회과학이 다루는 전통적인 핵심 가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사회현상도 존재한다. ‘기후난민’이 대표적인 예다.
키리바시(Kiribati)는 지구상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다. 남태평양상에 수십 개의 산호초 섬으로 이뤄진 이 작은 나라는 인구 11만 명에 불과한데, 800제곱킬로미터 남짓한 국토가 해마다 바닷물에 침식되고 있다. 방파제를 쌓으면 부서지고, 다시 쌓으면 또 부서지는 가혹한 시련은 해수면 상승이 초래한 재앙이다. 수십 년 내에 나라 전체가 수몰될 운명임을 알고 있는 키리바시 정부는 모든 주민을 집단 이주시킬 방안을 마련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다. ‘존엄한 이주(Migration with dignity)’ 정책은 이들이 내놓은 장기 이주 전략이다. 다른 나라로 이주하더라도 경제적 약자로 전락하지 않도록 다양한 기술을 가르쳐서 양질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키리바시 사례는 기후변화가 초래한 기후난민의 실상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석탄, 석유 등 화석연료를 사용함으로써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목축 산업에서 뿜어져 나오는 메탄가스가 대기 온도를 상승시켜 지구온난화를 초래했다는 것은 상식이 됐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대규모 해빙은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졌고, 키리바시 주민들이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경제활동(산업활동)이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기후변화가 다시 인간의 생존 공간 및 생존 방식의 변화를 강제하는 흐름은 인간 사회와 자연 생태계가 결국 지구 생태계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회과학책 읽기와 자연과학책 읽기를 함께해야 하는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과학책은 어려워요. 하루하루 넘쳐나는 정보를 수용하기도 힘든데, 그 어려운 과학책까지 읽어야 할까요?”
과학책은 어렵다. 어려운 것을 쉬운 것처럼 속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연과학적인 현상인 기후변화가 한 나라 인구 전체를 난민으로 만드는 것처럼 현대 사회의 대부분 문제가 과학 및 기술과 연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적인 사고를 하고 현대적인 삶을 누리려면 과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가 된 시대다. 어느 정도의 과학 지식이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과학적 태도를 갖춰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매체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태도를 기를 수 있지만 독서만큼 직접적으로 문해력(literacy)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도구는 없는 것 같다. 문해력이란 글을 읽고 그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문해력이 향상됐다는 것은 학습 능력이 높아졌음을 뜻한다. 이런 독서의 효용은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요구하는 시간과 노력에서 비롯된다. 책은 의지를 갖고 능동적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직접 읽어야 한다. 그 시간과 노력이 책에 담긴 지식과 태도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내재화할 수 있게 한다. 독서의 영향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으나 문해력을 단박에 향상시키는 인공칩을 뇌에 삽입하는 일이 일상화되기 전까지는 독서를 통한 문해력 장착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이 책에서 자연과학책 읽기와 사회과학책 읽기를 한 권으로 묶은 것은 정말이지 현명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과학책 읽기와 자연과학책 읽기를 관통하는 핵심은 ‘과학적 책 읽기’다. 하지만 과학적 책 읽기가 거창한 독서 개념이나 독서 방법론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책 읽기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적용하는 학습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독서라는 것을 고려할 때, 어떻게 하면 독서를 더 체계적으로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것이다.
사회과학책을 읽는 것이나 자연과학책을 읽는 것은 모두 사회현상과 자연현상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과학도 사람의 일이다. 과학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과학책을 읽으면 인간의 본성이 보일 것이다. 인간과 사회, 자연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이해와 사회과학적 통찰이 동시에 필요하다. 사회과학책 읽기와 자연과학책 읽기가 함께 어우러져서 융합된다면 문해력과 비판적 사고 능력을 배양해 더 나은 지식 체계와 세계관을 갖출 수 있으리라. 우리가 이 책의 제목을 ‘복잡한 세상을 횡단하여 광활한 우주로 들어가는 사X과X책’으로 정한 것도 그런 기대 때문이다.
천문학자의
과학책 읽기
나의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독서생활
중학교 2학년 시절은 말하자면 내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전환기였다. 특히 책과 관련해 두 차례의 큰 파도가 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첫 번째 파도는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가을날, 초등학교 동창이자 지금은 나의 아내가 된 소녀로부터 이별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처음 겪는 실연이었다. 소녀는 이별을 선언하면서 두 편의 시를 적어 보냈다. 김소월의 ‘초혼’과 윤동주의 ‘서시’였다. 중학생 소년의 감성으로는 두 편의 시가 뒤섞이며 혼을 다해서 사랑하지만 지금은 쓸쓸하게 혼자의 길을 가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몇 날 며칠을 목 놓아 울던 나는 그렇게 윤동주 시인을 만났다.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서 한 편 한 편 소리 내 읽고 또 읽으면서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학교가 끝나면 종로2가에 막 문을 연 동화서적으로 달려갔다. 닥치는 대로 시집을 손에 들고 시를 읽고 또 읽었다. 이별의 충격으로 시작된 윤동주 읽기는 세상 모든 시에 대한 사랑으로 번져나갔다. 겨울을 넘길 무렵 나는 도서관 서가에 꽂힌 대부분의 시집을 읽었다. 시를 읽는 것은 곧 그녀를 향한 복수였고 그리움의 표출이었다. 그 시절 윤동주의 ‘서시’는 내 삶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윤동주가 공부했던 숭실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가 제작에 참여했던 평양 숭실고등학교의 교지 《숭실 활천》의 정신을 이어서 ‘활천’이라는 이름의 문학동인회를 만들고 그 이름으로 동인지도 발행했다. 시 낭독회도 했고 시화전도 개최했다.
대학교도 윤동주를 좇아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마음이 허할 때면 윤동주가 머물렀던 기숙사 방(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을 찾아가 기웃거리기도 했다. 핀슨관 앞에 있는 윤동주 시비는 나의 단골 쉼터가 되었다. 그러던 중 1학년 가을 어느 날 같은 학교에 입학한 아내를 윤동주 시비 앞에서 다시 만났다. 그곳은 우리 사랑의 표상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윤동주를 만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별을 관측하는 천문학자가 되었다.
두 번째 파도가 시작된 것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학교를 대표해서 종로도서관에서 열린 독서 캠프에 참가하여 매일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기를 반복했다. 캠프가 끝나갈 무렵 학교 대항 문학 퀴즈 대회가 열렸다. 나는 3학년 선배와 함께 짝을 이루어서 대표로 참가했다. 우리는, 아니 선배는 무적이었다. 워낙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터라 내가 답을 생각하고 있는 동안 선배의 입에서 먼저 정답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가볍게 우승했다.
내가 맞힌 건 단 두 문제였다. 선배가 《주홍글씨》의 여주인공이 가슴에 새기고 다녔던 글자 ‘A’의 스펠링을 헛갈리는 순간 내가 ‘Adultery(간통)’라고 스펠링을 정확하게 외쳤다. 그리고 안톤 체호프의 〈바냐 삼촌〉에 나오는 바냐의 풀네임을 묻는 문제가 나왔을 때 내 입에서 먼저 ‘이반 페트로비치 보이니츠키’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우승에는 기여하지 못했으나 그날 바냐의 이름을 외친 순간 나도 모르게 체호프가 내 인생에 갑자기 끼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내가 가장 신뢰하는 체호프의 희곡집은 박현섭의 번역본 《체호프 희곡선》(을유문화사)이다. 〈바냐 아저씨〉로 더 많이 번역되었으나 여기에 실린 〈바냐 삼촌〉으로 소개한다. 사실 바냐는 소냐의 외삼촌이다).
내가 체호프를 알게 된 건 그의 작품이 아니라 TV 퀴즈 프로그램 도전자를 위한 퀴즈백과 책에서였다. 퀴즈백과에 나온 작품 제목과 줄거리 그리고 등장인물 소개를 모두 외우고 있었기에 마치 내가 그 작품을 다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아는 척하던 게 시시해질 무렵, 퀴즈백과에서 만난 저자들이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꿈을 꾸었다. 문득 두려워졌다. 나는 외워서 알고 있던 책들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서가에서 처음 마주친 작가가 안톤 체호프였다.
체호프의 희곡집을 뒤적거리다가 단편 희곡 〈바냐 삼촌〉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외운 줄거리로 상상했던 〈바냐 삼촌〉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울면서 글을 읽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가엽고 아름다운 아내 엘레나에 대한 연민에 빠져들었다. 독선적인 교수 블라디미로비치를 저주했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급기야 〈바냐 삼촌〉을 내 멋대로 다시 썼다.
내친김에 체호프의 소설도 찾아 읽었다. 중학생 수준에서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세계에 심취해버렸다. 과학을 공부하고 진화심리학을 접하면서 내가 체호프에 그토록 매료되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체호프의 작품들은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진화심리학적인 내용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나는 등장인물들의 온갖 욕망과 열정, 분노, 시기, 위로, 꿈 같은 복잡한 감정을 공유하며 벌거벗은 나를 만났다. 이후로도 나는 내 삶의 교차로에서 머뭇거릴 때마다 체호프의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고, 같이 늙어가는 오래된 애인이기도 했다. 그를 만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삶의 교차로에는 진짜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타나곤 했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을 뒤흔든 책과 처음 마주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책을 읽는 것이 습관화된 소년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겪은 두 차례의 파도는 책과 나를 운명공동체로 엮어버렸다. 과학자를 꿈꾸던 소년, 문학청년으로서의 삶, 천문학자가 되어 걸었던 궤적들이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과학저술가가 되었다. 서로 다른 갈래로 뻗어나가는 것 같던 것들이 한곳에 모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 지금도 책을 읽으면 설레고 행복하다.
내가 독서를 보호해야 할 사생활로 인식하게 된 건 추리소설 한 편 때문이다. 그 소설의 제목도 저자도 기억나지 않지만, 대신 슬프고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었다. 선생님이 독후감 숙제를 내면서 책을 읽고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쓰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추리소설 한 편을 읽고 독후감을 썼다. 책의 내용은 이랬다. 어느 탐정이 악당에게 잡혀서 죽을 위험에 놓이자 꾀를 내서 악당에게 제안을 한다. 가장 잔인한 복수는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스스로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악당은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탐정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도록 장치를 해놓고 자리를 떴다. 시간을 벌게 된 탐정은 장치에서 빠져나와 결국 악당을 처치한다.
선생님의 말마따나 나는 솔직하게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독후감을 검사한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꾸짖는 것도 부족했던지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 문제의 내 독후감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내가 만약 탐정의 입장이 된다면 슬기로운 탐정처럼 꾀를 내서 살아남을 것이며, 악당의 입장이 된다면 탐정을 붙잡는 즉시 죽여버리겠다고.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만의 책 읽기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제출용 독후감을 따로 쓰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느낀 솔직한 생각은 마음에 적었다.
사람들이 독서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한 소일거리일 수도 있고,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창구일 수도 있다. 독서는 새로운 깨달음을 위한 촉매제가 되기도 하고, 위안을 얻는 안식처일 수도 있으며, 밥벌이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유건 모든 독서는 사적인 독서에서 출발한다. 다른 사람이 개입할 여지 없이 저자와 독자가 일대일로 만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든 읽고 나서 어떤 느낌을 받든, 그건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저자의 생각에 동조하며 더 알고 싶은 것을 묻는가 하면,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이야기를 가능한 한 경청하려고 하지만, 의문이 넘치면 그 책은 던져버리고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도 하고 아예 책을 덮어놓고 질문만 이어가기도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책이 주인공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인공인 셈이다. 자기 자신을 중심축에 놓고 책을 읽으려면 무엇보다 그 행위자가 자유로워야 하고 즐거워야 한다.
사적인 독서에서는 책을 읽는 방법도 자유롭다. 과학책을 읽다가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거나 지겨워지면 그냥 건너뛴다. 특히 연식이 있는 과학책을 읽을 때는 이미 바뀐 과학적 오류가 나오면 과감히 넘긴다. 과학사적인 의미 없이 흥미 위주로 나열된 신화나 가십도 건너뛴다. 책을 읽다가 뒷부분이 궁금해지면 책장을 냉큼 뒤쪽으로 넘겨서 읽는다. 특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누군가는 질색하며 쫄깃한 추리소설의 묘미를 다 놓친다고 안타까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이런 식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즐기는 법이 따로 있지 않겠는가.
1970년대에 방영되었던 〈형사 콜롬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추리물인데 보통 초반에 유력한 범인이 드러나고, 콜롬보 형사가 용의자의 범행을 하나하나 추리해가면서 드라마가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콜롬보의 끈질기고 논리적인 추궁에 범인이 자백하면서 사건이 해결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깨달았다. 나는 추리소설을 읽을 때 범인이 누구인가보다는 범인이 누구인지 파헤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범인을 먼저 확인하고 추리소설을 읽으면 그의 범행이 밝혀지는 논리적 과정을 더 즐길 수 있다.
마음 가는 대로 ‘왔다 갔다 읽기’와 ‘건너뛰면서 읽기’가 나의 사적인 독서 방법의 핵심이다. 왔다 갔다 읽기와 건너뛰면서 읽기는 책 한 권 안에서뿐만 아니라 책과 책을 건너뛰고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더 나아가 책에서 얻은 소양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나만의 이야기를 즐기는 것은 사적인 책 읽기가 주는 권리이자 자유다. 남들이 뭐라 하건 나의 소중한 사적인 책 읽기 방식을 버릴 필요는 없다.
나는 직업적으로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서평을 쓰거나 방송에서 책을 소개하고 책 읽기를 지도하는 일을 한다. 처음 한두 번 서평이나 강연 요청을 받았을 때는 내내 해왔던 사적인 독서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이 반복되면서 사적인 독서와 공적인 독서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적인 독서를 할 때 나는 사적인 독서와 달리 고른 책을 앞표지에서 뒤표지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정독한다. 또한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차례대로 완독한다. 책과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 책을 정확하게 읽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책을 소개할 때가 나의 독서 행위 중 강도가 가장 높은 층위라고 할 수 있다. 정독과 완독은 기본이다.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한 구절이나 쟁점이 되는 부분은 책장 모서리를 살짝 접어두었다가 반복해서 읽는다. 앞뒤를 오가며 비교하면서 다시 읽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궁리한다. 객관성이나 팩트 체크는 물론, 의문이 나는 대목은 메모를 해두었다가 다른 책을 참고하거나 다른 매체의 정보를 찾아보기도 한다. 그렇게 책을 읽고 난 후에는 하루 이틀 정도 묵혔다가 다시 꺼내서 통독을 한다. 전체적으로 조망하되 부분에 집중하면서 놓친 부분이 있진 않나 되짚으며 읽는다.
이런 방식으로 하다 보니 한창 서평을 쓰고 방송에서 책을 소개할 때는 일주일에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도 상당히 버거웠다. 그래도 왔다 갔다 읽기나 건너뛰면서 읽기를 적용하지 않고 오로지 정독과 완독을 고집했다. 그 책을 쓴 저자와 그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이때만큼은 내가 주인공인 독서가 아니라 청중과 독자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적인 독서를 할 때는 자신이 쓴 서평을 읽는 독자나 방송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시청자, 책 읽기 모임에서 나의 가이드를 따라 책을 읽을 청중, 즉 대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때 유용한 방법은 질문을 하는 것이다. 사적인 독서를 할 때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 저자와 질문 배틀을 하지만, 공적인 독서를 할 때는 저자와 책을 향해 던지는 질문의 결이 다르다. 내가 궁금해하는 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궁금해할 내용을 질문해야 한다. 물론 그 시작점은 나의 주관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지만, 질문을 뽑는 과정에서 청중이 공감할 만한 내용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중심 좌표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이동해서 질문을 계속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첫 질문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가장 동의하기 힘들었던 장면은?’으로 시작한다. 책을 읽은 사람마다 다른 장면을 꼽겠지만, 같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보편적인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이다. 가상의 독자나 청중과 책을 토대로 토론할 수 있는 질문을 만들 때는 보편성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다른 사람이 쓴 서평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의 관점과 설명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면서 그 차이가 흥미롭다면 토론의 주제가 되기 적합하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내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면 사적인 독서와 공적인 독서의 구분이 명확해지자 나 자신이 좀 더 좋은 독서 전문가가 되었다고 느꼈다. 구분을 알고 그것의 교집합도 인식하면서 의식적인 독서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적인 독서와 공적인 독서가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다층적 독서를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독서의 기쁨이 더 커진다. 오랜 세월 사적인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다가 공적인 독서에 발을 들였을 때 그 좋은 게 싫어질까 봐 걱정도 되었다. 결과는 반대였다. 공적인 독서를 통해 더 풍성하게 책을 읽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수십 번을 더 읽은 책도 다시 즐겁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나는 사적인 책 읽기와 공적인 책 읽기를 늘 병행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이 기쁨을 함께 누려보길 바란다.
나처럼 직업적으로 책을 소개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공적인 독서가 필요할 때가 있다. 교사나 학부모라면 사적인 독서 외에 학생들이 책 읽기를 잘하도록 그리고 과학적 태도를 기르고 과학 지식을 습득하는 목표를 달성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책을 잘 읽어야 한다. 이 경우 교사나 학부모는 내가 아니라 아이들을 중심에 놓는 공적인 독서를 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 책을 읽어야 할까? 공적인 독서법을 훈련할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있다.
칼 세이건의 《에필로그》(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에 실린 ‘낙태에 관한 찬반 논쟁’이라는 글이다(요즘은 ‘임신중지’라고 부르는데, 낙태와 관련된 법은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폐지된 상태다). 1990년 아내 앤 드루얀과 같이 써서 발표한 칼럼이다. 이 글을 쓰면서 칼 세이건이 밟은 단계는 공적인 독서를 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특히 학생들의 독서를 지도하는 교사나 학부모에게 과학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공적인 독서를 하는 방법은 학습 능력을 키워주는 데 꽤 유용한 지도법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이 이 글을 전개하는 방식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단계는 임신중지를 화두로 올렸을 때 나올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나열하고, 자신의 견해나 결론은 유보한 상태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객관적인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답을 빠짐없이 적어간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답도 그대로 적어놓는다. 주제에 관한 대부분의 질문에 대해 가능한(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모든 답을 펼쳐놓은 질문과 대답의 매트릭스를 짜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고 다른 견해도 동일한 비중으로 청취한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낙태에 관한 찬반 논쟁’은 그저 그런 잡글이 되었을 것이다.
2단계는 펼쳐놓은 매트릭스를 좁혀가면서 수렴시키는 과정이다. 과학이라고 하는 엄격한 잣대로 걸러낼 질문과 답을 선택한다. 처음부터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지만, 과학적 팩트 체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훈련을 통해서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장이 있으면 반드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적인 독서를 할 때 개인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원칙이다. 사적인 독서에서는 자기 느낌대로 읽으면 되지만 공적인 독서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한다. 자신이 던지고 싶은 주관적인 질문에서 시작하더라도,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제기할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는 태도로 읽는다면 공적인 독서의 영역으로 넘어가 보편성 있는 질문으로 수렴한다. 최종적으로 질문을 정리할 때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며 답변할 수 있도록 구체성을 띤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각 질문에 대한 답의 범위를 좁히고 난 후 3단계에서 비로소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임신중지와 같이 첨예한 쟁점을 다룬 글을 쓸 때 객관적이라거나 가치중립적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입장을 숨기거나 모호하게 뭉개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글의 진가는 논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분명하게 자신의 답변을 내놓았다는 데 있다. 칼 세이건은 과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논리적으로 표현한다. 제기된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나열하며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추거나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가치관을 드러내며 어느 한쪽의 입장을 취사선택한다. 그리고 그 입장에 대해서 평가를 받고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마지막에는 가장 논쟁적인 질문을 대범하게 던지며 반대편 사람들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만의 답을 내놓는다.
공적인 독서를 통해서 교사와 학부모가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공적인 독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상을 상정한 공적인 독서에서 정보만을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되, 개별적인 경험에 머물지 않고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단순한 정보나 토론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고를 통해서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학생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결론에 책임을 질 줄 아는 태도를 견지하게 하는 것이다.
서평을 쓸 때도 이 부분이 중요하다. 좋은 서평이 되려면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면서도 양비론에 그치지 않고 책임감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고 논리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입장에 대해 책임질 줄 아는 태도를 보이면 된다.
나의 책 읽기 습관 중 조금은 특이하다 할 점은 같은 책을 읽고 또 읽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읽은 책을 다시 읽었을 때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유학 시절에 체호프를 다시 만났다. 중학생인 나를 뒤흔들었던 〈바냐 삼촌〉을 읽는 동안 또 다른 격동을 느꼈다. 어릴 적에는 관심 없던 인물들이 내 마음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은 주인공인 퇴직 교수나 그의 젊은 아내, 그리고 딸과 바냐가 아니라 그들의 주변 인물들에게로 향했다. 가장 눈에 밟히는 사람은 의사인 아스트로프였고 어머니 마리아와 유모 마리나의 고단한 그림자도 느껴졌다.
마흔일곱 살 때 《체호프 희곡 전집》(김규종 옮김, 시공사)으로 〈바냐 삼촌〉을 다시 읽었다(이 책에 실린 제목은 〈바냐 외삼촌〉이다). 바냐의 나이도 마흔일곱이다. 극중 인물들과 비슷한 연배가 되니 이번에는 모든 것이 연민으로 읽혔다. 나 자신을 바냐와 동일시하면서 그의 눈으로 다른 인물들을 만났고 그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바냐의 귀를 통해 소냐의 위로를 듣다가 동시에 소냐가 되어 희망을 품는 이중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퇴직 교수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고, 중학생 때부터 품었던 그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며 그가 가여워졌다. 엘레나의 욕정과 체념에 같이 울며 그녀를 탐했던 아스트로프를 극단으로 내몰지도 않았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서 내 얼굴을 보았다. 몰락한 지주 텔레긴의 힘 빠진 투덜거림에서 친구들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처음으로 그들 모두가 되어 〈바냐 삼촌〉을 읽었다. 고단하고 비루한 삶이지만 살아내야 하는 그들의 현실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서글펐고 황홀했다. 〈바냐 삼촌〉을 다시 쓰라면 체호프가 써 내려간 내용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같은 책을 여러 차례 읽다 보니 각 시절의 책 읽기는 파편적인 내 삶의 모습을 투영하게 된다. 세월과 함께 반복된 책 읽기가 누적되어 짧은 한 편의 희곡이 변주되면서 내 인생을 관통하는 맥락과 역사가 생겨났다. 아주 사적인 독서생활에서 체호프를 읽으면서 체득했던 그 느낌이 공적인 독서생활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 책이 《코스모스》다.
천문학자가 되고서 가장 많이 읽고 또 읽은 책이 《코스모스》다. 학창 시절 철모르고 읽었던 《코스모스》를 다시 만난 건 천문학자로서 이 책에 대해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였다. 천문학자의 눈으로 본 《코스모스》는 나를 압도했다. 우주에 대한 칼 세이건의 열정뿐만 아니라 우주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는 그의 열정이 눈부셨다. 당시 나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기에 더욱 심취했다. 그렇게 나의 공적인 독서가 《코스모스》와 함께 시작되었다.
첫 《코스모스》 강연 이후로 이 책에 대한 글도 쓰고 방송도 하게 되면서 따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50번 넘게 읽은 것 같다. 《코스모스》를 다시 읽을 때는 한 가지 루틴을 따른다. 강의나 방송이나 글쓰기 요청을 받을 때마다 새 책을 산다. 그 전에 읽었던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매번 그 시점에 나와 있는 최신판을 구해서 읽는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다 보면 익숙함 때문에 계속 같은 주제와 화두에만 머무를 수 있다. 새 책으로 읽으면 약간의 낯섦을 유지할 수 있어서 이미 익숙한 책에서도 새롭게 시선을 끄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수십 년에 걸쳐 대여섯 번을 읽은 책과 달리 매년 몇 차례씩 다시 읽는 책은 당시 내가 관심을 갖고 있거나 몰두하고 있는 것과 더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한다. 특히 공적인 독서를 하며 정독과 완독을 할 때면 각각의 시절에 읽은 《코스모스》가 현재 나를 둘러싼 지적 환경과 입체적으로 융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뭔가를 계속 채굴한다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이겠다. 파도 파도 끝이 없는 책이라니, 반복되는 책 읽기를 통해서 나는 점점 더 넓고 깊은 코스모스를 만나고 있다.
문학 작품이든 과학책이든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행복한 작업이다. 정말 좋은 점은 이들 책을 계속 읽어가면서 당시의 내 생각이 예전의 추억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들은 그대로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 생각은 바뀌고, 그런 나와의 상호작용을 거치며 책에서 새로운 추억을 건져 올린다.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나이가 아직 어려서 또는 관심사가 달라서 놓쳤던 것들이 책 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새삼스러운 발견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언제나 동시대적으로 살아 있는 책이 된다는 의미다.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거울을 닦는 것이고 동행자를 만드는 작업이다. 현재진행형의 책 읽기를 위한 최고의 작업은 반복해서 읽기다.
같은 책을 다시 읽으면 조각난 경험이 하나로 엮어진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화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치게 된다. 이런 훈련을 하면 다른 책을 읽을 때 입체적으로 읽게 되고 좀 더 융합적으로 맥락을 파악하게 된다. 독서의 근력이 생기면 읽을 책을 선택할 때도 좀처럼 실패하는 일이 없다. 자신의 취향과 독서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책 속의 세계와 책 바깥에 놓인 자신의 세계가 연결되면서 더 깊고 넓은 지평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왜
과학책은
어렵다고
할까?
왜 사람들은 유독 과학을 어렵다고 할까? 수학적 개념이 깔려 있을 거라는 부담과 기반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 거기에 최신 과학의 변화 속도가 빨라서 따라가지 못한다는 체감이 과학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는 요인이다. 이런 장벽에 어떤 오해가 있다고 쳐도, 아직 우리 사회가 과학을 교양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과학과 기술은 현대 사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동력이며, 과학을 알아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덕에 벽돌처럼 보이는 과학책이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 목록에 오를 수 있지 않았겠나. 과거에 비해 과학책도 읽어야 할 책이라는 인식이 많이 늘었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과학을 접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소설이나 교양서 읽기에 비하면 과학책 읽기가 상대적으로 문턱이 높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매년 10월이면 기자들에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과학적 업적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심지어 유치원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달라고도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다. 평생에 걸쳐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연구를 하고, 뛰어난 동료 과학자들의 검증까지 거쳐 일군 과학적 성과를 어떻게 아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