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장로회신학대학(Th.B., M.Div.), 미국 프린스턴신학교(Th.M.), 멜버른 신학대학원(Th.D.)에서 공부했고, 한국교회사, 에큐메니즘, 선교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현재 서울장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세계선교협의회(CWM) 이사를 역임했으며, 장로교역사학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소죽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와 사상』, 『호주장로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한국선교 1889-1942』, 역서로는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 『에큐메니컬 선교학』 외 다수가 있다.
머리말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영성과 신학은 분리되지 않았다. 신학자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기도의 원리는 신학의 원리였다. 오늘날 신학교육 현장과 한국교회에서 신학과 영성이 유기적이지 못한 것은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의 진리가 유리된 현실을 반영한다.
교회사 안에서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개신교의 영성은 매우 풍요롭고 다양하다. 그러한 기독교 영성의 다양성 안에는 성경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예배공동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영성은 매우 에큐메니컬적이다. 이러한 풍요로운 영성 경험을 신학교육과 목회 현장에서 공유하지 못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성사에 관해 개론적으로 훌륭한 서적들이 이미 시중에 여럿 출판되었다. 그중 하나가 필자가 번역한 필립 쉘드레이크의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20)다. 이런 개론적 영성사는 짧은 분량 안에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거시적으로 시대별 영성의 특징을 설명하는 관점으로 기록된다. 반면, 개별 영성가에 관한 연구들은 미시적으로 깊이가 있지만, 전문적인 지식이 부족한 경우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목적은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 중간 지점에서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영성의 풍요로운 경험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성은 대폭 축소하고, 개별 영성의 경험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었다. 또한 개신교,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성 경험과 영성운동과 영성가를 시대별로 골고루 담으려고 노력했다. 이 책이 포함한 인물과 영성은 필자 자신의 선호도에 크게 의존했다. 그래서 제목을 『기독교 영성 산책』이라고 했다. 산책에는 특별한 규칙이 없다.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고, 지나치고 싶은 곳은 지나치는 것이 산책의 장점일 것이다. 독자께서 중요한 부분을 놓쳤다고 야단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1~3장은 영성 신학의 기초에 해당한다.
제1장 “기독교 영성 이해”에서는 영성 신학 혹은 영성사를 산책하는 데 필요한 기초 개념인 영성의 정의, 기독교 영성의 특징과 오해, 영성과 신학의 관계를 다뤘다.
제2장 “영성과 성경”에서는 신구약성경이 각각 담고 있는 영성의 특징을 다루면서 초대교회 영성의 기초가 된 주기도문의 영성을 살폈다.
제3장 “관계적 영성”에서는 기독교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 자아, 이웃, 창조세계라는 관계망을 다루고, 영성 유형과 균형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했다.
이 책의 4~11장은 영성의 역사를 다루었다.
제4장과 제5장 “고대 기독교의 영성”에서는 기독교 영성이 예배와 성례, 성도의 공동생활, 은사, 순교 안에서 발전되었음을 설명했다. 영성가들은 죄와 싸우기 위해 수덕주의를 발전시켰고, 순교 및 수덕주의 영성은 사막 교부를 통해 수도원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리용의 이레니우스는 영지주의와 신학적 투쟁을 하면서 몸과 자연 구원의 타당성을 발전시켰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 예전, 관상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성을 통해 고대 서방교회 영성의 종합적 특징을 볼 수 있다.
제6장 “동방정교회의 영성”은 고대 7차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정통신학(삼위일체, 기독론, 테오토코스, 이콘신학)과 영성의 관계를 설명했다. 정교회 영성의 최종 목적인 ‘신화’(theosis)와 14세기 그레고리오 팔라마스가 종합한 ‘예수 기도’와 ‘헤지카즘’의 중요성을 소개했다.
제7장 “중세 서방교회의 영성”에서는 베네딕토회, 시토회, 탁발수도회의 영성을 다뤘다. 개별적으로는 베네딕토, 베르나르, 보나벤투라, 에크하르트, 줄리안의 영성의 특징과 그것이 현대에 주는 의미를 정리했다.
제8장 “새로운 경건운동”은 14세기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일어난 새로운 영성운동이다. 평신도들의 영적 요구를 수용하는 내면의 경건, 공동생활, 교육의 혁신을 다뤘다. 특히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지닌 영성의 특징과 의미에 무게를 두었다.
제9장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은 루터와 칼뱅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종교개혁 영성뿐만 아니라 이냐시오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과 그 영향력을 살펴보았다.
제10장 “근대의 영성”은 17~19세기에 나타난 가톨릭과 개신교의 영성을 살폈다. 17세기 청교도, 퀘이커, 경건주의, 18세기 복음주의, 감리교 영성을 읽을 수 있다. 17세기 프랑스 가톨릭 영성운동에서 프랑스 영성 학파의 창시자 피에르 드 베륄, 살레시오 영성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드 살, 『하나님의 임재연습』으로 알려진 로렌스 형제, 얀센주의자 코르넬리우스 얀센과 블레이즈 파스칼, 정적주의자 몰리누스, 귀용 부인, 프랑수아 페늘롱의 영성을 살폈다.
제11장 “20세기의 영성”에서는 20세기 예언자적-사회참여 유형의 영성을 잘 드러내는 인물과 운동을 선택했다. 개별 인물로는 나치와 영적 전투를 했던 본회퍼, 같은 시대 미국의 가톨릭 백인 수사 토머스 머튼과 침례교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영성을 고찰했다. 그리고 해방신학, 페미니스트 운동, 에큐메니컬 운동, 오순절 운동이 지닌 영성을 검토했다.
깊은 전문성은 약하지만, 이 책이 쓰임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2021년 1월
서울장신대학교
정병준 교수
제1장
기독교 영성 이해
기독교 영성 길을 산책하는 데 필요한 기초개념을 정리한다. 영성의 출발지점, 기독교 영성의 정의, 기독교 영성에 대한 오해와 기독교 영성의 특징, 영성 형성과 영성훈련, 영성과 신학의 관계를 간단하게 살핀다.
여리고부터 사해(死海) 길을 따라 내려가면 유대 광야, 엔게디 골짜기, 마사다가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메마른 붉은 바위와 흙이 이어지고, 왼쪽으로 하얀 소금이 깔린 푸른 사해가 펼쳐진다. 광야와 사해는 목이 마르고 생명이 살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광야에서 훈련받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은 광야 체험을 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도 40년 광야를 거쳤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광야로 도망쳤고 거기서 만난 하나님 경험을 시편에 남겼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했고, 주님도 광야에서 40일 금식한 후 마귀의 시험을 받았다. 사도 바울도 회심한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영적 훈련을 받았다.
기독교인이 광야 훈련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가장 무력한 상태에 처해야 하나님과 참 자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광야에는 문명, 쇼핑, 정치, TV가 없다. 인간의 힘의 상징인 돈과 군대조차 광야에서는 무력해진다. 광야에서는 생존, 안전 그리고 자기실현을 하나님께만 의존해야 한다. 여기서 비움과 순종이 생긴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은 영적인 실존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42:1-2)
영의 갈증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성경은 ‘생명수’라는 은유로 이 사실을 설명한다(아 4:15, 렘 2:13, 17:13, 슥 14:8, 요 4:10-11, 7:38, 계 7:17, 21:6, 22:1, 17). 특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겔 47장)과 생명수(계 22장)는 영적 갈증을 해갈하는 구원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수다(요 4장). 예수님은 영적 갈증을 겪고 있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물을 구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여인은 갈증을 느끼며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인은 갈증의 본질을 육체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영적 갈증을 느끼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목마른 사람이 그 부족을 허기로 착각하고 빵을 먹는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우리의 잘못된 욕망은 더 큰 갈증을 일으킨다.
예수님은 여인의 죄를 드러내셨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 여인은 자신의 죄성이 드러나자 대화 주제를 갑자기 예배로 바꾼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 속죄의 장소를 찾으려는 몸부림을 보게 된다. 주님은 바른 예배, 속죄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영성은 성부와 성령과 진리이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영적 목마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로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하게 지으셨기에 당신 안에서 쉼을 찾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라고 고백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공간이 있다.”라고 말했다.
1) 기독교 영성의 어원
성경에서 ‘영’을 뜻하는 말은 히브리어 ‘루아흐’(חור)와 그리스어 ‘프뉴마’(πνεύμα)다. ‘루아흐’는 하나님의 ‘영’, ‘바람’, ‘숨’, ‘호흡’, ‘생명의 원리’, ‘하나님의 능력’을 뜻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생명의 호흡을 받아서 살아간다. 그리스어 ‘프뉴마’는 ‘소마’(σωμα) 혹은 ‘몸’과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사르크스’(σαρξ) 혹은 ‘육’의 반대말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영과 육을 대조하는 것은 영과 몸을 대조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두 가지 태도, 즉 성령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대조한 것이다(고전 2:12, 14). 영성을 뜻하는 영어 ‘Spirituality’는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에서 기원했다.
2) 영성에 대한 정의
영성학자 샌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는 영성이란 궁극적 가치를 향하여 자기 초월을 통해 온전한 삶을 추구하는 경험이라고 정의한다.1) 영성은 첫째, 궁극적 가치를 지향한다. 자아와 자기 사랑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자기 초월과 온전하고 통합된 삶을 추구한다. 약물, 알코올, 소비 등으로 자기 초월을 시도하는 것은 온전하고 통합된 삶을 파괴하기 때문에 영성을 구성하지 못한다. 셋째, 영성은 전 생애를 포함하는 삶의 경험과 여정이다. 순간적 감정 변화와 흥분 상태를 영성이라고 칭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1) The New Wes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ed. Phillip Sheldrake (Lousville: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1. (이후 NWDCS로 표기)
3)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정의
슈나이더스는 영성에 대한 일반적 정의에 근거하여 기독교 영성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정의한다.
궁극적 가치의 지평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고,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일 때 그리고 자기 초월의 프로젝트가 교회공동체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삶일 때, 그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고, 하나님과 이웃과 모든 실재와 연결된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적 유일신론, 성육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도덕, 성례는 기독교 영성의 구성적 특징이다.2)
2) Ibid.
필립 쉘드레이크(Philip Sheldrake)는 기독교 영성을 영적 변형(trans-formation)이라는 실천적 차원에서 정의한다.
기독교 영성이란 인간 변형의 맥락인 하나님, 인간 정체성 그리고 물질세계에 대해 우리가 특별히 이해한 것을 우리의 근본 가치, 생활 방식, 그리고 영적 실행 안에 반영하는 방식이다.3)
3) Philip Sheldrake,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 정병준 옮김(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 2020), 24.
두 학자의 정의를 종합하면 기독교 영성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궁극적 가치로 삼고, 하나님, 이웃, 자연과 통합적 관계를 맺고 교회와 사회 안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변형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해서 기독교 영성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연합하는 삶의 자세다. 기독교 영성은 전인적으로 영과 몸을 포함하고, 하나님, 이웃, 자연과 통합적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신앙공동체와 세상 안에서 신앙체험, 훈련, 봉사를 통해 일생 성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원하는 보편적이고 본성적인 갈망이 있지만, 그것은 죄로 인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비성경적인 영성 이해는 다음과 같다.
1) 심령주의(Spiritualism)
심령주의는 영과 몸(물질)을 분리적, 대립적으로 보는 영성 이해다. 이것은 금욕적 방법으로 물질세계를 벗어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영적 태도로 여긴다. 심령주의는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에서 기원했다. 플라톤은 우주를 형상의 세계와 물질세계로 구분했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본래 형상의 세계에 속했으나 타락해서 물질세계의 포로가 되었다고 본다. 그는 철학의 역할은 물질의 포로가 된 영혼에게 돌아갈 고향을 알려 주어 해방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윤리적, 지적 정화(淨化)를 통해 물질을 초월해서 신과 동화(同化)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령주의는 물질을 창조하시고, 육체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사상이 아니다.
2) 도피주의(Escapism)
도피주의는 현실 세계를 떠나 영적 세계로 도피하는 경향을 지닌다. 도피주의는 물질세계를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심령주의와 유사성이 있지만, 당면한 삶의 책임을 피하고 은둔을 택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하나님과 돈독한 관계를 위해 잠시 세상의 문을 닫는 것은 건강한 영성이지만(고전 7:5), 현실과 삶의 과제와 책임에서 도피하는 것은 잘못된 영성이다.
3) 열광주의(Enthusiasm)
열광주의는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심리적 흥분 상태에 머무는 체험을 강조한다. 신앙은 신비와 열정이 필요하고, 부흥집회와 성령운동은 어느 정도의 열광주의 경향성을 띤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하는 방법으로 열광주의를 택하면 본질에서 벗어나기 쉽다. 영성은 감성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감성에 종속되면 안 된다.
4) 경험적 신비주의(Experientialism)
경험적 신비주의는 주관적 체험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영성 이해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향해 오시는 하나님의 여정에는 관심하지 않고, 나의 체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성취할 목표를 정해 놓고 자기에게 몰두하는 것은 오히려 영성 성장에 방해가 된다.
5) 지성주의(Intellectualism)
지성주의 영성은 하나님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중세 지성주의 영성은 13세기 스콜라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개신교 지성주의 영성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에서 크게 나타났다. 이러한 영성은 교리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감정과 경험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주관주의를 경계한다. 영성은 지성, 감성, 의지가 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성만 중요하게 여기면 균형과 조화가 깨진다.
기독교 영성은 성경과 교리, 그리고 예배공동체인 교회의 삶에 근거해서 건강성을 식별하는 특징이 있다.
1) 삼위일체적 영성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기독교인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인도된다.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요구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따르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갈망한다. 삼위일체적 영성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한다(요 4:24).
2) 통전적 영성
영성을 지닌 인간은 몸과 인격(知, 情, 意)을 지니고 살아간다. 우리의 영과 몸은 상호 보완적이고 협력한다. 건강한 기독교 영성은 영, 몸, 인격이 통전적으로 작용한다.
3) 관계적 영성
영성은 하나님, 이웃, 자연과 통합적 관계를 맺으면서 변형을 이루어 간다. 건강한 영성은 하나님과의 교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문화적 영역, 그리고 자연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4) 공동체적 영성
신앙공동체와 보편교회와 단절되고 고립된 사람의 영성은 성숙하기 어렵다.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 안에서 자란다. 말씀과 기도, 세례와 성찬, 성도의 교제는 영성에 필수적이다. 영성은 공동체적인 특성이 있어서 문화, 교파, 개성 및 은사에 따라 다양하다.
5) 성령에 순종하는 영성
바울은 사람의 영성을 ‘육신을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구분했다(롬 8:5). 이것은 영-육 이원론이 아니다. ‘영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인도에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고, ‘육을 따르는 자’는 성령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을 따르는 상태의 사람을 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위에서 언급한 올바르지 못한 영성과 건강한 이해의 특징을 잘 이해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 삶 속에서 ‘영적 식별’(spiritual discernment)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식별이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영감이나 충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식별은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 기준이 되지만, 영적 식별에서는 사고 작용뿐만 아니라 영적인 감각에서 비롯되는 느낌과 직관도 그 대상이 된다.4)
4) 유해룡, 『하나님 체험과 영성수련』(서울: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999), 222.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되었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transformation)되고 재형성(reformation)되는 것을 ‘영성 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고 한다.5)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5) 영성 연구회 평상, 『오늘부터 시작하는 영성 훈련』(서울:두란노, 2017), 28.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7-18)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말했다. 또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롬 12:2). 바울의 말을 종합하면 영성 형성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예수의 마음(빌 2:5)으로 변화를 받아서 영적 식별을 하는 것이다.
영성훈련이란 영성 형성을 돕기 위해 기독교 전통에서 발전된 여러 실천적인 훈련을 뜻한다. 영성훈련은 기능과 방법을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영성 형성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사막의 교부 에바그리오스(Evagrios Ponticos, 345–399)는 “신학자는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고,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은 신학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6) 초기 교회와 교부들은 신학과 영성을 분리하지 않았다. 신학은 영성을 설명하는 일이었고, 영성은 살아 있는 신학이었다. 신학과 영성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스콜라주의 시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신학과 도덕신학(영적 삶)을 분리했고, 그 후 도덕신학에서 영성신학이 독립하게 된다. 이것이 서방교회 신학의 패턴이 되었다. 신학은 학문의 분야가 되었고, 영성신학은 수도회의 실천이 되었다.
6) Evagrius Ponticus, On Prayer (61), in A. M. Casiday, Evagrius Fontius (London:Routledge, 2006), 192.
근대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서방신학은 스콜라적 훈련이 되었고, 영성은 비학문적 경건의 실천 혹은 신비적 기도의 양육으로 의미가 축소되었다. 18세기 로마 가톨릭 영성신학자 죠반니 스카라멜리(Giovanni B. Scaramelli, 1687-1752)는 영성신학을 다시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으로 구분했다. 수덕신학이란 완덕을 추구하는 인간의 능동적 차원(정화와 조명)을 다루는 분야고, 신비신학은 하나님 편에서 이끌고 가서 만나는 수동적 차원(관상을 통한 연합)을 다루는 분야를 뜻한다.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신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쳤으나 그것은 하부 신학훈련으로, 신학생들의 개인적 영성의 완덕을 추구하는 공부였다. 영성신학은 조직신학과 윤리신학에서 그 원리를 가져왔고, 스콜라주의 패턴을 따라 조직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르러 ‘영성’은 보편적인 학문으로 발전했다. 그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다. 경제적 공황, 세계대전, 냉전으로 인해 과학과 물질문명에 대한 공허감이 증가했고,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발전하면서 사람의 내적 공간에 대한 탐구가 활성화되었다. 또한 서구 사회에서 초월, 개인의 완성, 의미 탐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론이 크게 변했고 신학의 폭이 넓어지면서 영성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한편 기존 교회로부터 영적 탐구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고, 동양의 신비 종교, 약물, 새로운 종교운동, 신비체험, 색다른 신앙과 실천의 종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신비 문학, 수도회의 실천, 피정, 개인적 영적 지도, 그룹 영성 실행과 같은 전통을 재발견했다. 교회의 학자들은 문화와 교회 안에서 생성되는 영성을 연구하는 것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기독교 종교 경험을 연구하면서 학문으로서 영성 연구가 탄생했고, 1993년 ‘기독교영성학회’가 창립되어 2001년 학술잡지 Christian Spirituality Bulletin을 발간했다.
제2장
영성과 성경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만나고 하나님께 응답하면서 성장한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본질상 성경적이다. 제2장은 구약과 신약의 영성 그리고 주기도문의 영성을 살펴본다. 슈나이더스에 따르면 성경은 세 가지 차원의 영성을 제공한다. 첫째, 성경 저자의 영성이 있다. 구약에는 하나님 백성의 영성이 있고, 신약에는 사도와 그들의 계승자의 영성이 있다. 둘째, 성경 본문에 포함된 영성이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에서 나오는 영성은 다양하고 풍요롭지만 놀라운 통일성이 있다. 셋째, 성경을 통해 개인과 공동체 안에 형성되는 영성이 있다.1)
1) Sandra M. Schneiders, “Biblical Spirituality,” Interpretation:A Journal of Bible and Theology vol 70(4) (2016):417-430.
2) Mark J. Boda, “Old Testament Foundations of Christian Spirituality” in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ed. Glen G. Scorgie (Michigan:Zoderban, 2011), 40-45의 내용을 참조했다. (이하 DCS로 표기)
1) 토라
(1) 창세기의 영성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남자와 여자3)를 창조하셨고, ‘숨’을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창 2:7). 이 사실은 영성 이해의 중요한 출발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자연을 다스리고 땅에 번성하라’라는 복과 임무를 받는 대리자의 자격을 뜻하는 것은 분명하다(창 1:26-28).4) 즉, 창조주와 다른 피조물의 중간에 있는 인간(시 8편)은 하나님과 함께 창조세계를 보살피는 노동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과 친교한다.5)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은 자유와 자발적 의지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과 초대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과 동물의 이름을 지으라는 초대에서 잘 나타난다(창 2:16-19).
3) 남녀 창조의 순서는 시간의 순서이며 지위의 순서로 해석되면 안 된다.
4) ‘다스리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자연의 노예가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에 자연을 신성화했던 이교사상에 대항하는 창조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었다.
5)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모방하는 인간의 능력이며 축복이다. 고대 바벨론 신화에서 신은 노동하기 싫어서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의 노동은 신을 섬기는 기능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반역과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을 파괴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서 숨고,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수치심을 느꼈다. 창조 위임명령을 방해하는 거룩한 저주(인간과 자연의 생산 고통)가 임했다. 인간과 자연 사이, 여자의 씨와 뱀 사이에 적대감이 나타났다. 창조세계는 직접 죄를 짓지 않았으나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창세기 3장 이후,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인간공동체를 주시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킨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과 교제를 갈망하는 인간의 영적 욕구를 나타낸다. 창세기 4~11장에는 가인과 셋의 족보가 나타난다. 가인의 족보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의 독립적 특징을 나타내고, 셋의 족보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 사람의 특징을 나타낸다. 셋의 족보에 속한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존재다(창 4:26, 12:8). 인간의 반역과 죄가 가져온 홍수 심판(창 6:1-7)은 우주를 창조 이전의 무질서 상태(창 1:2)로 되돌려 놓았으나 하나님은 관계를 갱신할 기회를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에는 인간과 자연이 모두 포함된다(창 8:20-9:17).6) 그러나 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7)
6) “너와 함께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창 8:17).
7) “……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창세기 12~50장에서 하나님은 셈의 족보에 속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해 구속사(救贖史)를 열어 가신다. 하나님은 한 가족과 언약 관계를 맺고(창 12장, 15장), 인간에게 신앙과 순종의 응답을 요구하신다(창 17장, 22장).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언약의 파트너가 되었지만(창 15:6) 늘 믿음과 불신 사이를 허우적거린다(창 16장).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을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했다(창 32:24-32).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구속의 미래를 보여 주셨다. 족장들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창 13:4, 21:33, 26:25).
(2) 출애굽기의 영성
창세기의 족장사가 구속받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초를 제공했다면, 출애굽기는 하나님과 구원받은 공동체 사이에 영적 관계성을 형성하는 구속적이고 계시적인 사건을 보여 준다. 출애굽기 1~15장은 히브리 백성의 출애굽과 구원이 소개된다. 그 구원의 목적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이다(출 3:12, 9:1, 10:3). 십계명은 머리말에서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근거해 언약을 맺는다고 명시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은 구원하신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율법을 주신다. 율법은 구원을 성취하는 수단이 아니지만, 영성의 중요한 요소다. 십계명에는 네 가지 영성적 기초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 대한 감사, 둘째, 하나님이 주신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모범에 뿌리내리기, 셋째,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관계 추구하기, 넷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기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십계명(출 20:3-17)과 언약 법전(출 21:1-23:33)은 하나님과 백성의 영적 관계를 구조화한 것이다. 영성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나를 위해 하나님을 상대화하고 통제하고 길들이려는 시도다.8) 따라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이 가장 중심에 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선교의 차원을 포함한다. 이스라엘은 세상 나라 가운데서 제사장 기능을 수행함으로 하나님과 온 인류 사이에 관계성을 맺도록 부름을 받는다.
8)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in The New Interpreters’ Bible, Vol. 1 (Nashville:Abingdon, 1994), 842.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시내산 언약 설립 이후에 장막에 대한 계시와 건설(출 25-40장)이 기록되어 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언약공동체와 항구적으로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증한다. 하나님의 임재 장소는 시내산(출 19:18)에서 장막(출 40:34-38)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출발하는 중요한 영적 원리를 설립했다.
출애굽기의 성막 기사의 중심에 금송아지 숭배라는 반역 기사가 있다(출 32-34장). 그리고 그 무서운 심판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속성이 계시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알려 주시며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의 속성이 사랑이며 공의인 것을 선포하셨다(출 34:5-7).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해야 하며,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 이러한 찬양과 참회의 신학적 기초는 구약에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민 14:18, 느 9:17, 시 86:5, 욜 2:13).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기독교 영성의 근거가 된다.
(3) 레위기와 민수기의 영성
레위기와 민수기의 영성에는 제의적 미학이 나타난다. 이 책들에 포함된 율법은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 관계(출 19-24장)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보장하는 데(출 25-40장) 목적이 있다. 레위기는 ‘희생제사법’을 통해 영적 관계성을 양육한다. 자발적으로 드리는 번제, 소제, 화목제는 하나님께 찬양, 헌신, 감사를 표현하게 한다(레 1-3장). 속죄제(레 4-6장)는 죄 사함을 위한 제사이고, 속건제는 성물과 계명에 대해 실수로 범죄한 것을 배상하는 제사다. 가난한 사람은 번제와 속죄제에서 짐승 대신 곡식을 바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에서 가난한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섬세한 배려다.
희생제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영적 관계를 양육하는 수단이었다. 레위기 1~7장의 제사법은 개인 가족에게 초점을 두었지만, 이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동체 단위로 실천되었다. 제사법의 제의적 차원은 모든 생명으로 확대된다. 레위기 10:10~11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한다. 제사법은 여호와의 임재를 드러내는데 가장 가까운 것을 거룩한 것으로, 그것에서 가장 먼 것을 부정한 것으로 분류해서 이스라엘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규정되는 제의적 세계(ritual world)를 창조한다. 인간의 죄와 더러움은 이스라엘을 거룩성에서 멀어지게 했다. 따라서 제사법(희생제사, 기름 바르기, 모발 밀기, 목욕 및 세탁)은 이스라엘을 거룩성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류는 생명과 피조물의 모든 영역, 임신, 유출과 월경, 출생, 음식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었다. 제사법은 이처럼 상징적이고 제의적인 우주를 만들어 냈고, 그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억하고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회를 얻었다.
(4) 신명기의 영성
신명기는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이면서 나머지 구약성경의 신학적 전망과 연속성을 제공한다. 신명기의 영성신학은 제사법과는 다르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응답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사랑해서 선택하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며, 그 백성을 훈련하신다. 특히 자기 백성의 우상숭배에 대해 질투하시는 거룩한 행동을 하시는데, 그것은 언약에 응답하라는 요청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신명기는 누가, 어디서, 어떻게 예배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하나님이 정한 장소에서, 올바른 방법을 따라 실행되어야 한다. 시내산 언약은 과거 사건만이 아니라 현재 살아 있는 실재다. 현재 우리 앞에 있는 우리와 함께하는 관계성이다(신 29:14-15). 신명기 27~28장은 우리 앞에 저주와 복, 징계와 특권이 놓여 있음을 알려 주면서 우리의 선택에 책임이 따른다고 강조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 28:1-2)
2) 예언서
(1) 전기 예언서의 영성
신명기가 강조한 언약에 근거한 관계적 영성은 전기 예언서(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전체를 지배한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 산당 제사, 이교적 관행에 빠졌을 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수호하려고 투쟁한다. 하나님은 토라, 직접 음성, 예언을 통해 신앙공동체에게 말씀하신다. 이때 신명기의 ‘복과 저주’의 방식을 사용하신다(신 30장). 예언자, 제사장, 일반 지도자도 언약의 관계성을 양육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세, 여호수아, 사사, 왕으로 지도력이 교체되면서 신정정치는 군주제로 바뀌었다. 다윗 왕권은 이상적이지는 않았지만 희망을 제공했다. 특히 왕권이 신명기적 영성을 붙잡고 예배에 대한 열정과 순결성을 지킬 때 그랬다. 신명기에서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곳”(신 12:11)은 궁극적으로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확인된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기도(왕상 8장)에 따르면 이 성전의 기능은 이스라엘과 여호와 사이의 관계성을 양육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도의 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2) 후기 예언서의 영성
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신앙의 관계성 안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격려한다. 예언자들은 일관되게 토라에 명시된 기본 요구 조건이 위반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특히 우상숭배(하나님 사랑 위반)와 사회적 불의(이웃 사랑 위반)를 고발한다.
이사야는 여러 민족의 위협에 직면해서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호소한다.9) 예레미야는 마음의 회개로 응답하라고 요구한다(렘 4:1-4). 에스겔은 세상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한다(겔 39:21, 43:5). 12 소선지서는 백성을 징계하면서 돌아오라고 요청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라고 호소하며, 오직 회개만이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안에서 그러한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새 언약(렘 31:31-33, 32:40)으로, 에스겔과 요엘은 성령(겔 36:26, 욜 2:28)으로 때가 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의 관계성이 충분히 경험될 수 있다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9)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사 2:22),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사 50:10), 참조:사 3:1, 27:5, 31:1, 36:6, 47:10, 48:2, 51:5, 59:16.
후기 예언서는 예언자의 소명 이야기(사 6장, 렘 1장, 겔 1-3장)에서 하나님을 만난 영성 체험을 설명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예언자는 자기의 죄성을 비판하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을 호소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소명을 주어 언약 백성을 향해 은총을 확대하시려고 한다. 예언자는 종종 비극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예언자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정직하게 보게 된다. 이사야는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사 6:11)라는 질문으로, 예레미야는 ‘탄식’(렘 4:19)으로, 하박국은 ‘항의’(합 1:13)로 하나님께 반응한다. 예언자들은 폭력과 부정의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증언하는 저항의 영성을 보인다.
3) 시가서
잠언에는 지혜 전통의 영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고(잠 1:7) 목적(잠 2:5)이다. 그것은 모든 지혜의 언약적 기초다. 잠언 1~9장의 기본 토대는 모든 일상 속에서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잠언 10~31장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관계성, 상업, 리더십의 영역에 적용한 실용주의적 영성을 보여 준다. 전도서는 청년들에게 젊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을 준수하며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권한다(전 12:1-2). 욥기는 지적 정서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 유일한 해결 방법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님과 만나는 것임을 보여 준다(욥 42:3-6).
시편에서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예배의 영성이 나타난다. 평화 가운데 사는 사람, 평화가 깨진 시대를 사는 사람, 새로운 질서 속에 사는 사람의 경험이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으로 표현된다. 많은 경우에 개인 영혼의 탄원은 공동체 전체를 향해 움직인다. 가령 시편 51편의 죄 고백은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주었다. 시편은 다양한 인간의 삶의 정황에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기도와 찬양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의 음성이 시편 기자들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시편 기자들은 그 안에서 대화 영성을 고무하며 하나님과 대화한다. 시편에는 영적 인간론이 돋보인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 없이는 소멸하는 ‘육체’이고, 영감과 내면의 작용이 이루어지는 ‘영혼’이다. 인간의 중심은 은밀한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마음’(혹은 양심)이다(시 16:7-10). 히브리어로 콩팥을 의미하는 ‘마음’은 은밀한 감정의 자리고 악의 장소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신다(시 7:8, 26:2, 32:2).10)
10) H.-J. Kraus, 『시편의 신학』, 신윤수 옮김(서울:비블리카 아카데미아, 2004), 351.
역대기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실행되었던 예배의 영성을 설명한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다윗 왕가의 지원을 받으며, 성전에서 공동체 예배를 위해 제사와 찬양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대상 24:1-19; 26:1-19). 여기서 레위 지파 음악가의 감독을 받는 음악 전통이 발전했다. 그들은 인간의 경험에 맞는 영광스러운 음악으로 성소를 채웠다(대상 16:4). 또한 역대기는 왕조 이야기를 통해 바벨론 포로기의 악몽에서 살아가는 청중에게 겸손하게 기도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을 권고한다(대하 6:38, 7:13-15).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대에게 언약의 친밀성을 통해 새 생명의 기회를 주신다고 약속한다. 역대기의 영성은 에스라-느헤미야의 회복 이야기에서 잘 나타난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는 성전 건축과 성전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스 1-6장), 회개의 영성을 보인다(스 9장, 느 1:9). 그 회개는 신명기 30장의 모세의 설교와 역대하 6장의 솔로몬의 기도가 제공하는 회복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구약성경은 다양한 영성신학과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다양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 중심에는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을 열정적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11) 참조:Jeannine K. Brown, “New Testament Foundations of Christian Spirituality,” DCS, 46-50, Philip Sheldrake, 『미래로 열린 영성의 역사』, 55-59를 참조했다.
구약에 나타난 언약은 관계적, 공동체적, 선교적인 특징을 갖는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은 관계적이다. 비록 우상숭배의 경향성이 강한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당신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신다(출 19:3-6). 둘째, 하나님의 언약은 공동체적이다. 그것은 가족, 성전, 토라 등 공동체적 구조를 통해 중재된다(신 6:1-9). 셋째, 하나님의 언약은 선교적이다(창 12:1-3, 신 4:5-7). 언약은 늘 이방 민족을 향해 열려 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신약과 연속성을 갖는다. 하지만 신약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는 새 길을 열었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과 관계되며, 성령에 순종하는 영성이었다. 그리고 공로주의와 영지주의와 투쟁하는 영성이었다.
1)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성
신약에서 영성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언약의 완성자, 하나님의 계시고 구원자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구약의 완성으로,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로 증언한다(마 1:23, 28:20). 제자는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의(義)의 영성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에 헌신해야 한다(마 5:38-42).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섬기러 오셨고(막 10:45), 십자가에서 고난받는 메시아로 소개한다(막 8:31). 예수의 행동, 치유, 가르침은 오직 십자가의 조명 아래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막 8:34).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가난하고 주변화 된 사람에게 복음을 확대하는 메시아로 소개한다(눅 4:16-21, 6:20-26). 제자는 성령 충만과 기쁨으로 약자를 환대하고 복음을 증언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
공관복음서가 역사적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관심을 가졌다면, 요한복음은 선재(先在)하신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강조한다. 예수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다. 제자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부와 성자의 연합의 관계성에 참여하는 영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친구’ 된 모든 사람과 연합한다(요 15:12-15).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은유로 표현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떡’(요 6:35)과 ‘물’(요 4:10)이다. 신자는 포도나무인 예수의 ‘가지’로서 예수로 인해 지탱된다(요 15:1-8). 또한 예수님은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