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 조경수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책으로 《사과씨의 맛》,《걸작 인간》,《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빈둥빈둥 투닉스 왕》등이있다.
우리 시대의 아이
옮긴이 조경수는 연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사과씨의 맛》 , 《걸작 인간》 ,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 《발칙하고 통쾌한 교사 비판서》 , 《빈둥빈둥 투닉스 왕》등이 있다.
지은이 _ 외된 폰 호르바트
옮긴이 _ 조경수
펴낸이 _ 전병석
펴낸곳 _ (주)문예출판사
신고일 _ 2004. 2. 12. 제 312-2004-000005호
(등록일 1966. 12. 2. 제 1-134호)
주소 _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84-4
대표전화 _ 393-5681
팩시밀리 _ 393-5685
E-mail _ info @ moonye.com
제1판 펴낸날 _ 2002년 10월 20일
제2판 펴낸날 _ 2004년 09월 10일
ISBN 89 -310 - 0473-7 03850
본 전자책은 빌드북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주소│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776-1 로데오 메탈릭타워 805호
대표전화│070-7848-9387
대표팩스│070-7848-9388
이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시에는 형사/민사상의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본 컨텐츠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회의의 KoPub서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군인이다.
그리고 나는 군인인 게 좋다.
아침에 초원에 서리가 내려 있거나 저녁에 숲에서 안개가 몰려오면, 낟알이 물결치고 낫이 번쩍이면, 비가 오건 눈이 내리건 태양이 웃음짓건 낮이건 밤이건, 항상 나는 대오를 지어 서 있는 것이 기쁘다.
이제 내 존재는 갑자기 다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내 젊은 인생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완전히 절망했었다. 세상은 아무 희망도 없었고 미래는 완전히 죽어버렸다. 나는 미래를 진작에 파묻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것을, 내 미래를 되찾았고 무덤에서 부활한 녀석을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다.
지금부터 채 반년도 되지 않은 그날, 내가 징병 검사를 받을 때 나의 미래는 군의관 소령 옆에 서 있었다. “합격!”이라고 군의관이 말하자 미래는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 감촉을 느낀다.
그리고 3개월 후, 내 빈 옷깃에 별이, 은빛 별이 달렸다. 과녁을 연속으로 명중시킨 덕분이었다. 중대 최고의 명사수. 나는 일등병이 되었고 벌써 좀 대단해졌다.
특히 내 나이에 비하면.
왜냐하면 나는 우리 중에 거의 제일 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사실 난 훨씬 더 나이가 많다, 특히 내적으로는.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딱 한 가지 원인이 있을 뿐이다. 바로 몇 년 동안 나는 실업자였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신문들, 조간과 정오 신문, 석간 등을 찍어내는 커다란 기계들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인쇄공이 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헛수고였다!
어디 변두리 인쇄소에서조차 견습생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커다란 기계들이 말했다.
“우리에겐 이미 필요 이상으로 사람이 많아. 우습지, 우리를 네 머릿속에서 떨쳐버리라고!”
나는 그들을 내 머릿속에서, 또 마음속에서 몰아내버렸다. 인간은 다 자존심이 있는 법이다. 일자리가 없는 놈조차도.
너희들 꺼져버려, 이 비열한 바퀴, 인쇄기, 피스톤, 전동장치 놈들아! 꺼지라구!
그리고 나는 자선 활동에 의탁했다. 처음에는 국가의, 그 다음에는 민간의.
그때 난 수프 한 접시를 타려고 긴 줄에 서서 기다렸다. 어느 수도원 문 앞에서.
교회 지붕에는 석조상 여섯 개가 서 있었다. 남자 다섯과 여자 하나인 여섯 성자(聖子)가.
나는 수프를 떠먹었다.
눈이 내렸고 성자들은 높다란 하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모자가 없었고 이슬을 기다렸다.
해가 길어졌고 거친 바람이 따뜻해졌다.
나는 수프를 떠먹었다.
어제 나는 그것을 다시 보았다, 첫 새싹을.
나무에는 꽃이 피고 여자들은 속이 훤히 보인다. 나도 속이 훤히 보이게 되었다.
재킷이 다 해지고 바지도 똑같은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거의 피해 갈 지경이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스쳐 지나간다.
수프를 한술 뜰 때마다 그 생각들이 점점 혐오스러워진다.
갑자기 나는 그만둔다.
양철통을 돌바닥에 내려놓는다. 양철통은 아직 반쯤 차 있고 내 위는 꾸르륵거리지만, 더 먹고 싶지 않다.
더는 싫다고!
지붕 위의 여섯 성자는 푸른 허공만 쳐다보고 있다.
그래, 더는 싫다, 이 따위 수프! 날마다 똑같은 국물이라니! 이 멀건 수프를 쳐다보기만 해도 벌써 속이 메슥거린다!
그걸 쏟아버려, 네 수프를!
버려! 쓰레기통에나 처넣으라고!
지붕 위의 성자들이 비난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그 위에서 빤히 보고 있지만 말고 이 밑에 와서 나나 도와주시지!
나는 새 재킷이, 멀쩡한 바지가 필요하다고. 다른 수프도!
기분 전환, 신사 숙녀 여러분! 기분 전환 말이야!
구걸을 하느니 차라리 도둑질을 하겠어!
우리 줄에 있던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늙은이들과 젊은이들이. 그들은 제일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 우리는 많이 훔쳐댔다. 대개는 급한 식료품이었지만 담배와 궐련, 맥주와 포도주도 있었다.
우리는 대개 교외의 주말농장을 찾아갔다. 겨울이 다가와 행복한 농장 주인들이 자기 집의 따뜻한 부엌에 있을 때면 말이다.
나는 두 번이나 거의 붙잡힐 뻔했다. 한번은 탈의실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들키지 않고 도망쳤다.
마지막 순간에, 빙판 위로.
만약 그때 형사한테 붙잡혔다면 나는 지금 전과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빙판이 나를 도왔고 형사는 벌렁 나자빠졌다.
그리고 내 서류는 계속 백합꽃처럼 하얀 상태다.
내 기록에 과거의 그림자는 전혀 없다.
그래도 나는 반듯한 사람이고 그저 내 처지가 너무 절망적이라 바람 속의 갈대처럼 그렇게 흔들렸을 뿐이다. 암울했던 6년 동안 점점 탈선의 늪에 빠져들었고 마음은 점점 더 슬퍼졌다. 그래, 난 정말이지 아주 비참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다시 기쁘다!
이제는 내가 어디 속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내일 먹을 게 있을지 걱정하지 않는다. 군화가 닳으면 기워주고 양복이 다 해지면 새 양복을 얻고, 겨울이 오면 우린 외투를 보급받을 거다. 크고 따뜻한 외투를. 난 벌써 그것들을 보았다.
더는 빙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지금은 모든 게 확고하다.
마침내 질서가 잡혔다.
일상의 걱정들아, 안녕!
이제 항상 누군가 네 옆에 있다.
좌우로, 밤낮으로.
“정렬!”
명령이 울려 퍼진다.
우리는 대오를 맞춘다.
연병장 한가운데에.
그런데 병영은 도시만큼이나 커서 절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중·경기관총을 가진 보병이지만, 이제 겨우 일부만 기계화되었을 뿐이다. 나는 아직 기계화되지 않았다.
대위가 우리 대열을 사열하고, 우리는 눈으로 그를 좇는다. 그가 세 번째 병사를 지나가자 다시 앞을 응시한다. 꼿꼿한 부동자세로. 우리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다.
질서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규율을 사랑한다.
규율은 일자리가 없던 젊은 시절의 온갖 불안을 겪은 후에 우리에게 찾아온 천국이다.
우리는 대위도 사랑한다.
그는 멋있는 사람이다. 공정하고 엄하고, 이상적인 아버지다.
대위는 매일 천천히 우리를 사열하고, 모든 게 제대로 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단추가 잘 닦여 있는지 그것만 살피는 게 아니다. 그의 시선은 무장을 뚫고 우리의 영혼 속을 들여다본다. 우리 모두 그것을 느낀다.
대위는 거의 웃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가 웃는 것을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가끔 그에게 연민을 느끼다시피 하지만 결코 그를 기만할 수는 없다. 우리는 대위처럼 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반면에 우리 중위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도 공정하기는 하지만 별안간 지독하게 화를 내며 아주 사소한 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고함을 칠 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화나 있지 않다. 중위는 그저 너무 과로한 탓에 신경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을 뿐이다. 그는 참모부에 들어가고 싶어하고 그래서 밤낮으로 공부한다. 언제나 손에 책을 들고 읽고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소위는 그저 애송이일 뿐이다. 소위는 우리와 거의 동년배다. 그러니까 대략 스물두 살쯤 되었다. 그 역시 고함치고 싶을 때가 많지만, 제대로 고함칠 용기가 없다. 그래도 소위는 굉장한 스포츠맨이고 우리들 중 최고의 단거리 주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한다. 그는 멋들어진 폼으로 달린다.
게다가 군대라는 것은 스포츠와 아주 비슷하다.
군대가 가장 멋진 스포츠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다. 군대에서는 기록만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이상의 것이 중요하다. 바로 조국이다.
한때 내가 조국을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있다. 그때에는 매국노 같은 녀석들이 통치했고, 어둡고 초국가적인 세력들이 지배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그들의 공이 전혀, 결코 아니다.
지금 내가 대오를 지어 행진할 수 있는 것 또한 그들의 공이 아니다.
오늘 내게 다시 조국이 있는 것은 그들의 공이 아니다.
강력하고 힘 있는 제국, 전 세계의 빛나는 모범이여!
언젠가 세계도 지배하게 되리라, 전 세계를!
조국이 명예를 되찾은 이후로 나는 조국을 사랑한다! 이제 나 역시 내 명예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더는 구걸하지 않아도 되고, 더는 도둑질할 필요도 없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더 철저히 달라질 것이다!
다음번 전쟁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결단코!
우리 지도자들은 모두 항상 평화에 대해 열광적으로 떠들어대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그저 서로 눈짓을 할 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교활하고 영리해서 남들을 능히 속일 것이다. 그들처럼 거짓말 기술에 통달해 있는 사람도 없으니까.
거짓이 없으면 삶도 없다.
우리는 항상 그저 대비할 뿐이다.
우리는 매일 정렬하고 정문을 향해 나아간다, 보조를 맞춰서.
우리는 시내를 행진한다.
민간인들은 우리를 즐겁게 쳐다본다. 단지 몇몇 예외만이 마치 우리한테 화가 난 것처럼 시선조차 주지 않을 뿐이다. 그건 언제나 노인들이다. 더는 가치도 없는 자들. 그래도 그들이 시선을 돌리거나 단지 우리를 보지 않으려고 갑자기 진열창 앞에 멈춰 서면 우리는 화가 치민다. 그들이 결국 우리를 보게 될 때까지, 그러니까 진열창 유리에 우리 모습이 비치는 것을 그들이 알아차릴 때까지는. 그러면 그들은 붉으락푸르락해지게 화를 낸다.
그래, 당신들 신사 숙녀 여러분, 구닥다리들, 폐기 처분된 양반들아, 당신들이 아무리 김빠지게 평화주의니 뭐니 떠들어봤자 우리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야! 어디 고급 식품, 장난감, 책, 브래지어나 들여다보시지. 그래 봤자 어디서나 우리를 보게 될 거야!
우리는 진열창을 통해서도 행진하니까!
우리가 당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우리도 알아!
나는 당신들을 이미 잘 알고 있지, 구석구석!
내 아버지도 비슷한 부류다.
아버지도 내가 행진하는 것을 보면 시선을 돌릴 거다.
그는 군수산업을 증오하기 때문에 우리 군인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군수산업가들이 돈을 벌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가 세상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군다.
성실하게 납품만 한다면야 돈을 벌어도 되지 뭐!
훌륭한 대포, 탄약 그리고 모든 대용품을!
그건 우리 신세대들에게는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최고의 것은 조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다른 건 전부 무의미할 뿐이다. 아니면 기껏해야 그저 부수적일 뿐.
조국이 잘되면 그의 아이들 전부가 잘된다. 조국이 잘 안 되면 그의 아이들이 전부 다 잘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 있는 민족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몇몇 예외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조국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만, 그러니까 자기만의 날카로운 무기를 소유하고 있어야만 잘된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런 무기다.
나도 거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릇된 방향으로 빠져버린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들은 이런 당연한 상관 관계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19세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 졸렬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상관 관계를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무리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슬픈 무리다.
패배한 군대.
아버지는 거짓말쟁이다.
아버지는 1917년부터 3년 동안 전쟁포로로 잡혀 있다가 1919년 말에야 겨우 귀향했다. 나로 말하자면 1917년에 태어났으니, 이른바 전쟁둥이다. 하지만 물론 난 그 세계대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기, 이른바 전후 시기라는 것도. 그저 가끔씩 아주 어렴풋한 기억이 날 뿐이다. 제대로 된 기억은 대략 1923년부터 시작한다.
아버지의 직업은 웨이터다. 팁으로 먹고사는 노동자. 아버지는 세계대전 때문에 사회적으로 신분이 하락했다고 주장한다. 1914년 이전에는 오로지 일류 레스토랑에서만 일했는데 지금은 저 밖 변두리에서 아주 그렇고 그런 식당에 처박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포로 생활을 한 다음부터 다리를 저는데, 고급 식당에 절름발이 웨이터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비극이 있더라도 아버지가 전쟁을 욕할 권리는 없다. 전쟁은 자연 법칙이니까.
아버지는 한마디로 불평꾼이다. 내가 아직 아버지 방에 얹혀살았을 때 우리는 날마다 다투었다. 아버지는 항상 돈 있는 사람들을 욕하고, 그러면서 또 그들을 동경한다. 그저 팁밖에 생각하지 않으니까 기꺼이 그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그렇다, 그는 철두철미한 거짓말쟁이고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혹시 내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자문할 것이다. 이 재수 없는 자식은 대체 누구지?
언젠가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연세로는 다시 나갈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아버지는 처음엔 잠자코 있더니 뭔가 기억해내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요.”
내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더는 껴주지도 않아요.”
아버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대단히 악의에 찬 시선을 내게 던졌다. 마치 매복지에서 주위를 살피듯이. 그러더니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럼 넌 네 전쟁에 나가거라!”
그가 고함쳤다.
“가서 전쟁이 뭔지 경험해봐! 전쟁한테 안부도 전하시고! 원하면 전사하시든가! 전사하라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게 3년 전의 일이다.
여전히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들리고 층계참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나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갔다. 연필을 두고 나왔던 것이다. 나는 짤막한 광고가 실린 신문들이 진열장 안에 걸려 있는 편집부에 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거기서 혹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아무 일자리나. 그래, 그 당시 나는 그래도 여전히 동화를 믿고 있었다.
다시 방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날은 그가 한 주에 한 번 쉬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내 쪽으로 그저 잠깐 돌아섰을 뿐이다.
“연필을 깜박했어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끄덕이고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그건 무슨 눈빛이었을까?
아버지가 울었나?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실컷 우시라고요, 나는 생각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으시죠. 따지고 보면 지금 내 처지가 이렇게 거지 같은 데는 아버지 세대의 잘못이 가장 크니까요(당시 나는 아직 실업자였고 미래가 없었다).
나의 아버지 세대는 국제법과 영원한 평화라는 어리석은 이상에 매달렸고 하등한 동물의 세계에서조차 한 녀석이 다른 녀석을 잡아먹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폭력이 없이는 법도 없다. 우리는 생각하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전쟁은 만물의 아버지다.
나는 내 아버지와 더는 아무 관계도 없다.
나는 참을 수 없다, 그 끝없는 울음소리를!
거듭 이런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지!”
그러면 나는 잔뜩 열을 받는다.
아버지의 좋은 시절 따위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 걸요!
옛날 사진을 보면 그 시절을 정확히 상상할 수 있다고요.
아버지는 방 세 개짜리 아파트가 있었고, 아직 미혼이었으며 당시 표현을 빌리자면 신바람 나는 총각 생활을 영유했죠.
여자들과 카드 놀이와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돈이 있었다.
썩어빠진 시대였다.
누구나 일하고 돈을 벌 수 있었고, 아무도 배를 곯며 지낼 필요가 없었고, 누구에게도 근심이란 없었다.
혐오스런 시절!
나는 편안한 생활을 증오한다!
앞으로, 계속 앞으로만!
전진, 전진하자!
우리는 앞으로 돌진한다, 그 무엇도 우리를 저지하지 못한다!
경작지도, 울타리도, 덤불도.
우리는 그것들을 짓밟아버린다.
전진, 전진하자!
우리는 그렇게 앞으로 돌진하고 어떤 언덕 위에서 그 밑으로 지나가는 도로를 통제하기 위해 엄폐 자세를 취한다.
당장은 그저 기동 훈련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곧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다. 그런 징조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전쟁은 지난날의 세계대전과는 완전히 딴판일 것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거대하고, 가혹할 거다. 여하간에 섬멸전이 될 것이다!
나 아니면 너!
우리는 현실을 직시한다.
우리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기만당하지 않는다.
이제 유탄포를 쏘아댄다.
저기 빛이 가물거리는 먼 곳에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우선은 무작정 쏘아댄다.
아래 도로에 여자아이 둘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그 애들은 우리를 보지 못한다.
그 애들이 갑자기 멈추더니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더니 한 여자애가 덤불 뒤로 가 쪼그리고 앉는다.
우리는 히죽거리고 내 뒤에 있던 소위도 살짝 웃는다.
상사가 쌍안경으로 쳐다본다.
이제 하늘에서 윙윙 소리가 난다. 항공기다. 항공기는 우리 위를 지나 날아간다.
여자애는 구애받지 않고 그저 올려다보기만 한다.
항공기는 아주 높이 날기 때문에 그 애를 볼 수 없다. 그 애는 그걸 알고 있다.
우리가 있다는 건 생각도 못 한다.
그런데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건 언제나 우리 보병이지 결코 공군이 아니다! 비록 사람들이 공군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떠들어대고 우리 얘기는 별로 하지 않지만. 비록 그들이 우리보다 더 세련된 군복을 입고 있긴 하지만, 그들이 착각하는 만큼 자기들에게 능력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녀석들은 자기들이 위에서 한 나라를 간단히 폐허로 만들고 나면 우리 보병들은 그냥 그 폐허를 점령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 위험도 없이 말이다! 경찰과 다를 바 없다 이거다. 두고 보라지!
우리가 쓸데없는 존재인지 아닌지 알게 될 거다! 아니면 아예 이류인지!
아니, 난 공군들을 좋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