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의 말
이 책을 준비하고 저술하는 데 도움을 준 몇 사람이 있다. 여러 가지 조언과 제안을 해 준 알렉스 캘리니코스, 린지 저먼, 던컨 핼러스, 크리스 하먼, 개레스 젠킨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또, 자료 찾는 것을 도와 준 린다 에이켄, 수 코커릴, 제프 엘런, 닉 하워드, 마틴 로이저와 이 책을 편집하며 조언을 해 준 피터 마스던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국가기록관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자료를 찾아주고, 원고를 타이핑해 주고, 노동당과 반파시즘 투쟁을 다룬 자신의 글을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준 하니 로젠버그에게는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토니 클리프와 도니 글룩스타인
일러두기
1. 이 책은 The Labour Party : A Marxist History(Tony Cliff And Donny Gluckstein)를 번역한 책이다. 원서 초판은 1988년 10월에 나왔으며, 1996년 7월에 개정판이 나왔다(17장은 그때 추가된 것이다). 이 한국어판은 1996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2. 인명과 지명 등의 외래어는 외래어 표기법에 맞춰 표기했다.
3. 본문에서 [ ]는 옮긴이가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문맥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다. 단, 인용문에서 옮긴이 첨가와 저자 첨가를 구분하기 위해 [ ― 지은이]라는 표기를 두었다. 그리고 해당 쪽 맨 아래에 설명을 덧붙여 놓은 것에도 옮긴이와 지은이의 것을 구분하기 위해 [옮긴이]라는 표시를 두었다.
4.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표시된 부분은 고딕체로 표시했다.
5. 책과 잡지는 ≪ ≫로, 신문과 주간지는 〈 〉로, 논문과 신문 기사 제목은 “ ”로 표시했다.
6. 본문에서는 사람, 단체, 책 등의 영문을 대부분 표기하지 않았다. ‘찾아보기’와 ‘후주’를 참조하기 바란다.
7. 원서에서 일부 주가 누락돼 있고 순서도 틀려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수정했다.
8.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표, 영국의 정치 제도, 영국 총선 결과, 영국 노동당 역대 당수, 주요 인물과 정당 소개를 책 앞과 뒤에 덧붙였다.
연표
1889년 미숙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신노동조합 운동이 벌어짐.
1893년 독립노동당 창당.
1900년 독립노동당, 페이비언협회, 사회민주연맹, 노동조합 등이 모여 노동자대표위원회 결성.
1901년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테프베일 판결이 내려짐.
1906년 노동자대표위원회가 총선에서 29석을 획득. 키어 하디를 당수로 해서 노동당으로 개명.
1907년 의원단이 당대회의 결정에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는 내용의 결의안이 노동당 당대회에서 통과됨.
1910년~1914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짐.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노동당 당수인 맥도널드가 제1차세계대전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명하자 당수가 아서 헨더슨으로 교체됨.
1915년 노동당이 자유당의 애스퀴스가 이끄는 자유당․보수당 연립정부에 들어감.
1916년 아일랜드 더블린의 ‘부활절 봉기’.
1917년 2월과 10월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남.
1918년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남. 영국 노동당 당대회에서 “생산수단의 공동소유” 등 사회주의적 내용이 담긴 당헌 4조가 통과됨.
1919년 광원․철도 파업이 벌어졌으나 노조 관료들이 파업을 통제함.
1920년 영국 공산당 창당.
1921년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한 투쟁을 노조 지도자들이 배신. 광원 100만 명이 석 달 동안 처절하게 투쟁하다 패배함(‘암담한 금요일’). 영국이 아일랜드를 분할함. 노동당이 주도한 ‘포플러 운동’이 벌어짐.
1922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자유당을 제치고 원내 제2당이 됨. 램지 맥도널드가 당수로 다시 선출됨.
1924년 노동당은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최초의 노동당 정부를 구성. 맥도널드가 총리로 취임. 공산당 마녀사냥인 ‘캠벨 사건’으로 노동당 정부가 물러남.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압승.
1926년 정부가 광산을 폐쇄하자 총파업이 벌어짐. 파업 9일째 노총 집행위원회가 돌연 파업 종결을 선언. 아무런 양보도 얻어내지 못한 채 파업이 끝남.
1928년 코민테른이 노동당을 “제3의 자본가 정당”으로 보는 초좌파주의 ‘제3기’ 정책을 취함.
1929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제1당이 돼 제2차 맥도널드 내각을 성립시킴. 미국 증시 폭락과 세계 대공황 발생.
1931년 경제 위기에 부딪힌 노동당 정부가 실업 급여를 삭감함. 노동당 내각에서 실업 급여 10퍼센트 삭감안이 통과됐는데도,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지 못한 맥도널드는 즉시 노동당 정부를 해산시킴. 맥도널드 등은 노동당과 결별하고 보수당․자유당과 손잡고 거국내각인 국민정부를 구성함. 그 뒤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 의석이 급감하고, 국민정부가 압승함.
1932년 노동당 정부 붕괴의 여파로 독립노동당이 노동당에서 탈당. 노동당 좌파 크립스가 사회주의자동맹을 창립함.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 장악.
1934년 파시즘에 맞선 공동전선 제안이 노동당 당대회에서 큰 표차로 부결됨.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민중전선의 선거 승리. 스페인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내전이 벌어짐. 영국 노동당은 스페인에 ‘불개입’ 태도를 취함.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조약 체결. 독일의 폴란드 침공. 제2차세계대전 발발.
1940년 제2차세계대전을 반파시즘 전쟁으로 규정한 노동당은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연립정부에 참여함.
1942년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 독립을 위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짐. 노동당은 수많은 인도인들 살해와 지도자 체포를 묵인함. 질병․빈곤․실업 퇴치, 국민의료서비스, 가족수당, 완전고용 유지에 대한 포괄적 계획을 담은 베버리지 보고서 발행.
1944년 노동당 장관 어니스트 베빈이 필수유지업무 사업장의 파업을 금지하는 규칙1AA를 도입함. 영국 정부가 그리스의 레지스탕스를 공격함.
1945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애틀리 단독 내각을 구성함. 애틀리 정부는 영국은행, 광산, 가스, 전기 등을 국유화하고 국민의료서비스와 같은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해 노동당 역사의 정점으로 기록됨.
1947년 영국이 혹한과 전 세계의 식량․원료 부족 등으로 금융 위기를 겪음. 노동당 정부는 긴축정책 도입.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한 뒤 영토 분할로 인도․파키스탄 전쟁 발생.
1948년 노동당 정부가 임금 동결 발표.
1950년 한국전쟁 발발.
1951년 한국전쟁으로 국방비의 대규모 증액이 필요해지자 노동당 정부는 복지를 삭감함. 국민의료서비스에서 틀니와 안경에 요금을 부과하자, 어나이린 베번이 이에 항의해 사임함. 10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함.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영국 등이 이집트를 침공.
1959년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당수 게이츠컬이 당헌 4조를 공격함.
1960년 영국에서 핵무기철폐운동이 주최한 시위에 10만 명이 참가함.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고 해럴드 윌슨 내각이 출범함. 노동당 정부는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막고 국제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간접세 인상, 공공 투자 삭감, 임금동결 등의 정책을 취함. 임금 인상을 제한하는 소득정책을 발표해 반발을 불러옴.
1968년 베트남의 구정 공세. 노동당 정부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지지함.
1969년 노동당 정부가 노동운동을 공격하는 ≪투쟁을 대신해≫라는 백서를 발행.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짐.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에 패함.
1971년 보수당 정부가 노동악법인 노사관계법을 발의. 이에 맞선 시위와 파업이 벌어지지만, 노동당은 별 구실을 하지 못함. 어퍼클라이드조선회사의 해고에 항의하는 대규모 투쟁이 벌어짐.
1972년 광원 파업이 승리함.
1974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보수당에 승리함. 제2차 윌슨 내각 성립. 세계 경기 후퇴와 낮은 경제성장률 등에 직면한 노동당 정부는 공공 지출 삭감과 임금 삭감으로 대응.
1976년 총리 직을 사임한 윌슨의 뒤를 이어 캘러헌이 총리로 취임.
1978~1979년 정부가 또다시 임금 인상률을 5퍼센트 이내로 억제하는 소득정책을 강요하려 하자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임(‘불만의 겨울’).
1979년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승리함. 그 뒤 1997년까지 노동당은 총선에서 세 차례(1983년, 1987년, 1992년) 연속 패배함.
1979~1981년 노동당 좌파인 토니 벤이 이끄는 벤 좌파 운동이 벌어짐.
1982년 노동운동의 퇴조와 함께, 노동당이 당내 좌파 그룹인 밀리턴트에 대한 마녀사냥을 시작함.
1984~1985년 정부의 탄광 폐쇄에 맞서 광원 파업이 벌어졌으나 패배함.
1987년 선거 패배 뒤, 노동당 당수 닐 키녹이 당의 우경화를 주도함.
1990년 주민세 반대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짐.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91년 소련 붕괴
1993년 1당원 1투표제가 당대회에서 통과돼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약해짐.
1994년 ‘신노동당’을 주창하는 토니 블레어가 노동당 당수로 선출됨.
1995년 공동소유와 산업민주주의를 명시한 당헌 4조가 당대회에서 폐기됨.
1997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보수당에 압승. 토니 블레어 총리 취임.
2007년 이라크 전쟁 개입 실패 등으로 토니 블레어가 물러나고, 고든 브라운이 노동당 총리로 취임.
영국의 정치 제도
선거
1918년부터 남성은 21세 이상, 여성은 30세 이상이 참정권을 갖게 됐고, 1928년부터 21세 이상의 성인 남녀 전체가 참정권을 갖게 됐다. 지금은 18세 이상의 성인 남녀 유권자가 보통 5년마다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각 선거구에서 최대 표수를 획득한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국회
영국 국회는 선출되지 않고 정부가 임명하는 상원(영국 국교회 주교들과 귀족들로 구성된다)과 국민들이 선출하는 하원으로 구성된다. 입법권을 비롯한 실질적 권한은 하원에 있다. 하원은 2008년 현재 646명이다(2005년 총선까지 659명이었으나 스코틀랜드 의원 수가 줄어 현재 인원이 됐다). 총선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당이 내각을 구성하고, 이 당의 당수가 총리가 된다. 양대 정당제가 발달돼 있는 영국에서는 제1야당이 정권 획득에 대비해 미리 내각의 구성원들을 예정해 둔다. 그리고 정권을 획득하면 그 구성원들이 내각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것을 섀도 캐비닛(그림자 내각)이라 한다. 국회(하원)가 내각을 불신임하면, 내각이 총사퇴하거나 국회(하원)를 해산한 뒤 총선거를 실시해 국민의 의사를 묻는다.
주요 정당
휘그당과 토리당의 뒤를 이은 자유당과 보수당이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 양대 정당으로 활동했다. 토리당의 후신인 보수당은 전통적인 보수 정당이고, 자유당은 신흥 상공업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20세기 초 노동당이 등장하면서 자유당은 제3당으로 전락했다. 20세기와 현재까지 노동당과 보수당이 양대 정당으로서 정권을 번갈아 가며 잡았으며, 자유당과 사회민주당이 통합해 만든 자유민주당이 제3당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어판에 부치는 서문
이 책은 12년 전에 출간됐고 주로 영국 독자들을 겨냥해 썼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책을 번역해서 다시 출간하는 의의는 무엇인가?
영국 노동당의 역사를 쓰게 된 동기는 노동계급 운동에서 벌어지는 개혁과 혁명의 투쟁 때문이었다. 이 두 조류의 경쟁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언제나 존재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영국에서 이 투쟁은 특히 격렬했다.
그보다 앞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집권했던 노동당 정부는 자기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당시 노동당은 이렇다 할 개혁을 제공하지 못했고 영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를 관리하는 노릇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당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거의 매력을 주지 못했다. 특히, 1968년 5월이나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 다양한 급진 운동(여성·흑인·동성애자 운동 등) 같은 대중행동의 절정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주로 영국 등지에서 개혁주의 정당들의 행동 때문에) 대중의 전투성과 자주적 행동의 물결이 퇴조하자 많은 사람들은 실망한 나머지 오히려 환멸의 근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노동당과 영국 의회를 급진적 정치, 정말로 혁명적인 정치로 설득시키기를 원했다. 이 책은 그런 생각이 당시에도 이룰 수 없는 꿈이었을 뿐 아니라, 노동당의 역사 전체에서 늘 신기루에 불과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썼다. ‘황금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영국의 특수성이나 노동당 지도자들 개인의 성격 탓이 아니다. 노동당은 개혁주의 정치의 고전적 사례이고, 따라서 노동당의 역사를 살펴보며 얻을 수 있는 정치적 통찰과 교훈은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을 쓴 데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집권한 노동당이 자본주의 체제에 전혀 도전하지 못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책은 여럿 있었다. 랠프 밀리밴드의 ≪의회 사회주의≫가 대표적이다(아이러니이게도, 밀리밴드의 두 아들은 지금 브라운 정부의 각료다). 이 책은 노동당이 저지른 ‘범죄’나 사회주의를 배신한 행위를 나열하는 데서 더 나아가 개혁주의가 사회주의를 배신할 뿐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근본 과정을 분석하고자 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자들이 혁명가들과 목표는 똑같은데 그 목표에 도달하는 더 느린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목표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어떤 부르주아 의회도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개혁주의자들의 집권은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선거로 의회를 ‘포획’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포로가 돼 자본주의에 이롭게 체제를 운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와 동시에, 노동당이 집권할 때마다 노동계급은 거의 언제나 노동당에 환멸을 느꼈지만 개혁주의는 여전히 영속적이고 강력한 조류로 남아 있다. 왜 그런가? 마르크스가 설명했듯이, 사회적으로 유력한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다. 자본가들은 언론 통제, 소외, 국가의 기능을 이용해 사상투쟁에서 승리하려 애쓰고, 자본주의의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거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런 요인만 작용한다면, 개혁주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우파의 지배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도 주장했다.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 실제 생활에서 겪는 경험은 자본주의 사회가 정의롭고 공평하다는 생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그런데 이런 주장만이 진실이라면, 역시 개혁주의는 존재하지 않고 혁명이 승리할 것이다.
진실은 대부분의 시기에 대다수 노동자들의 머릿속에 이 모순된 조류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개혁주의 의식이다. 즉, 더 나은 사회를 염원하면서도 그런 사회에 이를 수 있는 방안으로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사상이다. 이런 신념은 노동당 같은 조직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독재 정권 따위의) 역사적 이유나 실천적 이유 때문에 그냥 사상의 형태에 그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개혁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초보적 대응’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조차 개혁주의 사상의 영향력 때문에 대중이 결정적 행동을 하지 못해 잠재적인 혁명적 상황이 무산되는 경우가 역사에서는 비일비재하다.
이런 경우의 예외 사례가 위대한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1917년 2월 차르 체제가 무너졌고, 대중적 개혁주의가 순식간에 나타나 득세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대중의 자주적 활동 수준이 엄청나게 높았다. 소비에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세력(볼셰비키)이 개혁주의를 지지하던 노동자와 병사의 핵심 부문을 설득해서 자신을 지지하게 만들고, 나아가 10월 혁명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잘 조직된 세력임을 입증했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실천적 약점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개혁주의가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계급투쟁의 경험과 실천을 통해서 노동자 대중은 독자적 사상을 발전시킨다. 노동당 자체도 대중적 노동조합 운동의 발단이 된 1884년의 계급투쟁(런던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 같은 투쟁들)에서 탄생했다. 그러나 다른 시기와 장소의 혁명적 상황에서도 드러났듯이, 노동계급의 대중행동은 자본주의와의 부분적 결별 ― 개혁주의로 대표되는 ― 을 뛰어넘을 수 있고, 효과적으로 지도된다면 혁명으로 곧장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은 1997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하기 직전인 1996년에 완성됐다.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보수당보다 253석을 더 얻어 다수당이 됐다. 이것은 토니 블레어의 정치적 수완 덕분이라기보다는 대처리즘•에 대한 반감과 환멸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블레어가 “보수당의 정책과 대동소이한 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이 점은 즉시 입증됐다. 신임 재무 장관 고든 브라운은 취임 후 2년 동안 전임 보수당 정부와 똑같은 지출 정책을 지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방금 유권자들이 쫓아낸 정부의 정책을 고수하겠다는 것이었다. [의회] 민주주의란 기껏 그런 것이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최저임금 등 일부 사소한 개혁들을 제외하면, 노동당은 보수당의 정책 노선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 민영화는 계속 진행됐다. 노동당은 대학 등록금 제도를 도입했고, 한부모 가정에 대한 복지를 삭감했고, 난민 규제 조처들을 잇달아 도입했고, 무슬림 혐오를 부추겼고,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많이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다. 노동당은 유럽에서 가장 억압적인 노동조합 통제 법률들을 제정한 것을 지금도 자랑스레 떠들고 있다.
• [옮긴이]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정부의 정치로서 민영화, 국가 개입 축소, 복지 지출 감축, 간접세 확대, 노동조합 통제 등의 정책이 그 특징이다.
그러나 노동당은 운이 좋았다. 노동당은 (최근까지) 경제성장의 덕을 봤다. 그래서 세 차례 연속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상당한 돈을 공공서비스에 지출할 수도 있었다. 불행히도, 노동당의 시장 친화적 태도 때문에 이 돈 중에서 아주 적은 액수만이 보건 의료나 교육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사용됐다. 나머지 지출은 대부분 민간 건설회사, 경영 컨설턴트, 은행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만약 블레어 집권기에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라크 전쟁의 재앙일 것이다. 이 가장 기독교도다운 정치인은 2003년 3월 중동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조지 부시의 잔혹한 모험에 영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말과 사실 왜곡을 밥 먹듯이 했다. 블레어는 친구인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의 도움을 받아 노동당 의원들을 협박해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머독의 신문들은 사담 후세인이 영국 국민들을 45분 안에 몰살시킬 수 있는 대량 살상 무기를 개발했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떠벌였다). 이 전쟁은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결국은 블레어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앗아갔다.
노동당 의원들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반면, 영국의 수많은 대중은 그렇지 않았다. 2003년 2월 15일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런던에서 벌어졌다. 전쟁저지연합이 주최한 이 시위에 참가한 사람이 자그마치 200만 명이나 됐다. 블레어는 어떻게든 전쟁을 지속했지만, “임무 완수했다”(2003년 5월 2일 부시가 한 말)던 전쟁이 재앙으로 바뀌자 노동당 정부의 악명 높은 ‘엉터리 문서’(후세인의 무기에 대한 허위 주장들이 담긴 보도자료)가 터무니없는 사기극이었음이 밝히 드러났다. 블레어의 인기는 추락했고, 고든 브라운이 총리가 되려고 암투를 시작하자 노동당은 내분에 휩싸였다.
경제성장뿐 아니라 보수당에 대한 반감도 지속된 덕분에 노동당은 2005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지만, 득표율은 상당히 감소해 35퍼센트에 그쳤다. 비록 블레어가 비틀거리면서도 2년 더 총리 직을 유지했지만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2003년 2월 15일 시위는 블레어에 대한 ‘주민세 반란’(1990년 3월 대처를 정치적으로 파멸시킨 사건)과 마찬가지였다. 블레어 노선이 벽에 부딪혔듯이, 그가 주도한 ‘신新노동당’ 정치 조류도 마찬가지였다. 당원들이 급감했고, 의미심장하게도 전통적으로 노동당을 확고하게 지지한 노동조합 기반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방관노조와 철도노조가 노동당에서 떨어져 나갔고, 다른 노조들도 노동당 탈퇴를 고려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당의 재정 위기가 심화했다. 신노동당은 대기업 경영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보수당을 지지하고 있다. 진정한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를 가진 진품 정당을 지지할 수 있는데 구태여 모조품 정당에 돈을 대 줄 이유가 있겠는가?
이제 고든 브라운이 총리가 된 지 1년이 지났다. 블레어의 후임자를 둘러싼 내분에서 은밀하게 브라운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가 블레어와 다른 정책들을 추진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금세 환멸로 바뀌었다. 총리가 된 브라운이 다우닝 가 10번지[총리 관저]로 맨 처음 초빙한 손님은 대처였다. 브라운은 블레어가 짜놓은 틀 안에서 블레어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브라운은 신용 경색에 따른 경제적 폭풍을 맞고 있는 점이다. 최근 영국은행 총재는 “10년의 좋은 시절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노동당 집권기에 19세기 이후 최악의 빈부 격차 심화를 경험한 영국인들의 다수는 그 10년이 도대체 누구의 좋은 시절이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노동당이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면서 신노동당이 됐을 때 노동당은 사실상 개혁주의를 포기한 셈이었다. 선거에서 여전히 수많은 표를 얻기는 했지만 말이다. 대체로 개혁주의 사상을 가진 노동자들은 여전히 노동당 외에는 이렇다 할 선거 대안이 없다(비록 그들의 투표 성향이 전보다는 훨씬 더 가변적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미국의 서브프라임 주택 시장 붕괴에서 시작되고 식량과 연료 가격 폭등과 맞물려 진행 중인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물귀신처럼 고든 브라운을 침몰시키고 있다. 2008년 5월에 노동당은 영국에서 여론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확고했던 것들이 모두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고 썼다. 노동당은 100년 넘게 영국 노동계급 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배해 왔다. 지금의 경제적 혼란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책의 집필 동기였던 개혁과 혁명의 투쟁이 여전히 현실 관련성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개혁과 혁명의 세력균형이 변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2008년 7월
도니 글룩스타인
머리말
노동당은 영국 노동운동에서 유력한 정치 세력이다. 노동당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노동당은 사회주의를 주장하지만, 집권한 뒤에는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노동당 지지자들은 주로 노동계급이지만, 노동당은 모든 사회계층을 대변한다고 자처한다. 노동당은 재정과 선거 득표를 대부분 노동조합원 대중에게 의존하지만 집권한 뒤에는 그들을 공격한다.
노동당 정부는 항상 보수당과 마찬가지로 열렬하게 체제를 지지한 반면,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은 보수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사뭇 다르다. 노동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조합과 계급을 지키기 위해 기업주들뿐 아니라 노동당 정부에도 맞서 거듭거듭 싸웠다. 그러나 노동당은 여전히 대다수 노동자들의 정치적 구심이고, 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하면 노동계급은 실망한다.
한 노동당 지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당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등장을 선언하고 표현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산업 노동자들의 염원과 요구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 우리는 이런 견해가 틀렸고, 오히려 레닌의 다음과 같은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노동당원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노동자 정당인지 아닌지는 당원의 구성뿐 아니라 당의 지도자들, 당의 활동과 전술의 내용에도 달려 있다. 오직 이 후자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인지 아닌지를 좌우한다. 유일하게 올바른 이 관점에서 보면, 노동당은 철저하게 부르주아 정당이다. 왜냐하면 노동당은 비록 노동자들로 이뤄져 있지만, 그 지도자들은 반동적 세력, 그것도 최악의 반동적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정신에 따라 행동한다. 노동당은 노동자들을 체계적으로 속이기 위해 존재하는, 부르주아지의 조직이다.2
따라서 노동당은 “자본주의 노동자 정당”이다. 노동당은 (특히 집권했을 때) 자본주의를 옹호하지만 노동자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 이런 지지는 영국 노동계급 의식의 본질에서 비롯한다. 마르크스는 한편으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체제의 압력 때문에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이런 투쟁을 통해 자본주의 사상에 대한 저항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세기에 자본가들의 정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동적 노동자들은 항상 극소수였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정치를 분명하게 거부하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극소수다. 노동계급의 대다수는 개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체제의 기본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맞서 저항도 한다.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뭉뚱그리는 국민이라는 개념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의 핵심 요소는 계급의식이다. 노동당은 국민과 계급을 결합하려 하고, 의회 같은 국가기구들을 통해 노동계급의 염원을 딴 데로 돌리려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당은 다른 형태의 개혁주의, 예컨대 노동조합 의식이나 개별 작업장에 국한된 ‘아래로부터’ 개혁주의•와는 다르다. 노동조합 의식과 의회 개혁주의는 노동당 정치의 핵심이다. 노동당은 의회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애를 쓰는 노조 관료들의 정치적 표현체다. 노조 관료는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중재하는 집단이다. 노동당도 생산 현장의 직접 투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중재하는 집단이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노동당 지도자들은 때때로 국가를 운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은 결코 기업을 운영할 수 없다.
• [옮긴이] do-it-yourself reformism, 개혁주의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고전적 형태는 노조 관료나 개혁주의 정당 지도자에게 의존해 개혁을 쟁취하려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는 노동운동 관료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통해 스스로 개혁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가 여전히 개혁주의인 이유는 그 목표가 근본적 사회변혁이 아니라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처럼 제한된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들 사이에서 중재자 구실을 하는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로, 노동당도 결국은 서로 다투는 계급들 사이의 세력 균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노동당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노동당의 역사를 무엇보다 계급 세력 저울의 변화에 따라 좌우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많은 질문들에 답하고자 한다.
1.노동당과 산업 투쟁의 관계
① 노동당 지도자들은 산업 투쟁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
② 1910~1914년, 1919~1926년, 1968~1974년, 1976~1987년 같은 중요한 계급 전쟁 시기를 전후로 노동당 지지율은 어떻게 변했는가? 노동당은 [투쟁의] 침체기에 성공하는가, 아니면 고양기에 이득을 얻는가? 그 관계는 어떤가?
2.노동당의 조직
① 누가 누구를 통제하는가? 노동당 의원단, 중앙집행위원회, 당대회는 각각 어떤 구실을 하는가?
② 노조 관료들은 노동당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③ 노동당의 기층과 의원단의 관계는 어떠한가?
3.노동당의 정치
① 노동당의 정치적 실천은 강령과 어떻게 다르며, 그 둘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② 좌파와 우파는 노동당의 정책 결정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4.노동당 내부의 분열
① 당내 분파들의 상대적 강점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② 좌파와 우파의 활동에는 어떤 한계가 있는가?
③ 당의 정책과 대중의 지지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5.노동당 좌파
① 노동당 좌파는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의회 활동과 의회 밖 활동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무엇인가?
② 노동당 좌파는 당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 국회, 지구당, 노동조합, 지방의회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
③ 노동당 좌파는 산업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좌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④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당에 들어가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견해는 어땠는가?
6.노동당이 배신해도 노동당에 충성하는 노동자들
① 노동자들의 충성심은 노동당의 집권 여하에 따라 영향을 받는가?
② 그것은 경제 상태에도 영향을 받는가? 경제가 호황인지 아닌지에 따라 영향을 받는가?
③ 그 충성심은 개혁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당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가? 개혁 없는 개혁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
④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당의 개혁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확신시킬 수 있는가? 이 과정에서 대중적 혁명정당과 계급투쟁 수준의 고양은 어떤 구실을 하는가?
오직 노동계급만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할 수 있고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런 일은 노동당 개혁주의의 대안인 혁명정당이 지도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이 책이 의회 연단에서 자본주의 정치인들을 비판하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는 정당, 체제를 완전히 쓸어버릴 수 있는 정당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투쟁에서 노동당 지도부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우리는 안다. 그들은 노동계급 대중을 상대로 싸울 것이다. 오늘날 노동당의 선거 승리에 희망을 걸고 있는 바로 그 노동계급 대중을 상대로 말이다.
* * *
전사(前史) : 차티스트 운동부터 독립노동당까지
1911년에 램지 맥도널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영국식 정치 전통과 방식을 가진 나라에서 점진적 사회주의가 취할 수 있는 정치 형태는 …… 노동당뿐이다.1
이 말은 틀렸다. 영국 노동자 대중이 개혁주의와 사뭇 다른 정치사상을 지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 노동자들의 다수가 개혁주의 견해를 채택했다.
1839~1848년에 노동자들은 차티스트 운동을 지지했다. 노동당과 달리 차티스트 운동은 기존 사회의 합법적 틀을 거부했다.• 예컨대, 1839년 11월에 뉴포트에서는 수천 명의 차티스트 광원들이 무장 항쟁을 벌였다. 차티스트 운동의 가장 유명한 요구는 보통 선거권이었지만,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인 노동계급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면 부르주아 사회는 치명적인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다. 매콜리가 하원에서 말했듯이, 보통 선거권은 “문명의 존속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지배계급의 생각이었다.3
• 인민헌장의 ‘6대 요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제안한 사람들은 원래 윌리엄 러벳 같은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이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자, 상층계급들의 선의에 호소한다는 생각은 사라져 버렸다. 톰프슨이 썼듯이, “서명 용지 취합은 새로운 단체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닌 듯했다. …… 옛 차티스트 활동가 어느 누구도 서명 용지 취합을 주요 활동이라고 회상하지 않았다.”2
노동당은 (임금과 노동조건을 관리하는) 노조 간부들과 (‘정치’에 관심을 쏟는) 의원들을 엄격하게 구분한다. 차티스트 운동 시기에는 정치 활동과 산업 투쟁 사이에 장벽이 없었다. 1839년 차티스트 대회는 선거운동이 아니라 직접행동이 향후 진로임을 분명히 했다.
대회는 총파업, 즉 전국적 작업 중단으로 산업 계급들의 권리와 자유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만장일치로 결의했다.4
1842년에 총파업은 현실이 됐다. 이것은 세계 최초의 총파업이었고 1926년 총파업보다 더 오래 지속됐다. 처음에는 50만 명의 노동자가 임금 삭감에 항의해 일손을 놓았지만, 머지않아 “임금이 아니라 인민헌장을 위해 파업할 준비가 돼 있다”고 스스로 선언한 공장들이 잇따랐다. “이것이 일반적 흐름이었다.”5
차티스트 운동은 공공연한 계급 운동이었다. 차티스트 운동의 요구들은 혁명적 의미가 있었고,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으로 그런 요구를 쟁취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 운동은 1848년 이후에 소멸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사회 평화와 제국주의의 번영이 득세했다. 영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다.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이 향상될 수 있었다.
초기의 전투성과 단결은 깨졌고, 파업을 정치적 무기로 이용한다는 차티스트 운동의 사상은 완전히 배격됐다. 예컨대, 1856년에 금속 노동자들의 지도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정치적 문제를 토론하거나 살펴보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6 시어도어 로스스타인은 그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치 반대” 구호는 …… 계급투쟁적 정치조직들의 정치만 반대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정치에 관여할 수 있었다. …… 그래서 정치적으로 원자화한 영국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정당 이데올로기의 조직적 힘에 쉽게 포섭돼, 보수당원이나 자유당원이 되고 말았다.7
차티스트 운동 이후 계급 정치가 붕괴한 사실은 1867년에 도시 거주 남성들에게 투표권이 허용된 것에서 드러난다. 이것은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노동자들의 지지를 매수하려 했음을 뜻한다. 비슷한 조처가 20년 전에 실시됐다면 ‘문명의 종말’이 찾아왔겠지만, 이제는 핼리팩스 자작子爵이 “거의 모든 노동계급은 합리적이며 ……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꽤 개선됐다”고 상원을 안심시킬 수 있었다.8 1884년에 농촌의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투표권이 부여됐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본주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당시 영국 노동자들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1848년 이후 부패의 시기에 점차 사기가 꺾인 영국 노동계급은 마침내 자유당, 즉 자신을 억압하는 자본가들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9
1874년에 토머스 버트와 알렉산더 맥도널드가 “최초의 노동자 국회의원들”로 선출됐다. 두 사람 다 광원노조 간부 출신으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다. 버트는 독자적 노동자 정당을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계급을 이루고 있고, 아마 항상 계급적 특징을 지니고 있겠지만, 계급적 차이를 강조해서는 안 된다.”10 알렉산더 맥도널드는 광원노조 대의원대회에서 “광원들이 파업을 자제하려고 애쓴다면 후세에 감사를 받을 만한 커다란 성취를 이룰 것”이라고 말했다.11 이 두 사람의 경우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이 의회에 진출한 사실만으로 노동계급이 대단한 진보를 이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화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버트와 맥도널드는 이른바 자유당-노동당 제휴파Lib-Labs(이하 자-노 제휴파)였다. 이들이 결코 중요한 세력이 되지 못한 이유는 자유당 지지자들이 지배계급을 흉내 내는 노조 간부들보다는 진정한 지배계급 출신들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자-노 제휴파는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우리는 항상 자유당과 동맹하려 했고, 우리 스스로 자유당 소속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은 우리의 이런 심정을 알아주지 않았고 …… 중간계급 자유당원들은 노동계급 후보를 지지하기보다는 보수당에 투표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12
그렇지만 가끔은 소수의 자-노 제휴파가 선출됐다. 1900년에는 자-노 제휴파 의원이 11명이었다. 심지어 랭커셔의 면직업 노조 간부 출신으로 노동조합의 후원을 받은 보수당-노동당 제휴파 후보도 있었다!
그러나 자-노 제휴파 국회의원들의 존재는 영국의 세계 무역 독점에 따른 경기 호황에 달려 있었다. 오직 그런 상황에서만 노동자들은 논리적으로 “우리 사장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공연한 자본가 정당들에게 투표할 수 있었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예측했다. “미국 등 다른 공업국들의 추격으로 이 독점이 크게 무너지면 …… 사정은 사뭇 달라질 것이다.”13 1870~1913년에 세계 무역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하락하고,14 1889년에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이 등장해 자-노 제휴론이 깨지자 엥겔스의 말이 옳았음이 드러났다.
신노동조합 운동에서 개혁주의 정치로
1889년 파업의 원인은 경제적인 것이었고, 비슷한 경제적 변동은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극적인 새 출발 같은 것은 없었다. 1889년 폭발의 결정적 요인은 비록 매우 적은 수이지만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이었다.15 그들 다수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사회민주연맹과 연계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톰 만, 존 번스, 벤 틸렛 같은 사회주의자들이 지도한 ‘런던 항만 노동자 파업’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항만 노동자들은, 엥겔스의 말을 빌리면, “최하층의 부랑자들 …… 망가지다 못해 완전한 파멸을 향해 표류하는 …… 끝없이 좌절한 인간 군상”이었다.16 그런 항만 노동자 3만 명이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이자 거대한 제국의 중추를 마비시키고 승리했다!
신新노동조합의 기반은 미숙련이거나 반半숙련인 남녀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숙련공들과 달리 협상력이 없으므로 조직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었다. 그런 생각은 새 ‘일반노동조합’의 결성으로 틀렸음이 입증됐다. 일반노동조합은 과거의 노동조합과 달리 모든 형태의 노동자들을 포괄해 계급 전체를 조직하려 했다. 과거의 노동조합은 협상과 조정을 신봉한 반면, 신노동조합은 대체 인력 투입에 반대하는 대규모 피케팅•과 물리적 저항도 마다 않는 직접행동에 의존했다.
• [옮긴이] Picketing,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일 때, 작업장 출입구에서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노동자들이나 대체 인력이 작업장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다른 동료 노동자들에게 파업 참가를 호소하는 행동을 말한다.
가장 선진적인 신노동조합 조합원들은 부르주아 정당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고 노동계급의 힘에 의존했다. “우리의 외침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의 격렬하고 절절한 외침이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우리의 노동 생산물이 우리 것이 될 때까지 자본가에게 휴전의 백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17 톰 만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 결성과 8시간 노동 입법화를 연결했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과 정치적 요구들을 결합했다.
그리하여 신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정치와 경제의 제도적 분리에 도전했다. 체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이용해 집단적 투쟁이 체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면 국가는 노동자들을 유권자들, 즉 낱낱의 개인으로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8시간 노동 입법화 운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맞서 하나의 계급으로 움직이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해 지배계급을 강제하려 하는 운동은 모두 정치 운동이다. …… 특정 공장이나 특정 업종에서 파업 등을 통해 개별 자본가에게 노동시간 단축을 강요하는 운동은 순전히 경제적 운동이다. 반면에, 8시간 노동 입법을 강제하려는 운동은 정치 운동이다.18
구舊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새로운 흐름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런던 지역노조연합체 의장인 조지 십턴이 그 공세를 주도했다. 조지 십턴은 혁명적 정치투쟁 방식들을 비난했다. 국가한테 양보를 강요하기 위한 대중 시위 같은 방식이 아니라 국가를 통해 작동하는 방식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참정권이나 투표권이 없었을 때는 머릿수를 과시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노동자들에게 투표권이 있다.”19 십턴은 노동조합 투쟁에 정치를 도입하는 것도 반대했다. “‘신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정부와 의회에 의존한다. ‘구노동조합 조합원들’은 자력에 의존한다.”20
벤 틸렛과 톰 만은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자신들은 의회에 대한 개혁주의적 종속이나 정치·경제의 분리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는 것이 진보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의회에 호소하는 활동을 신뢰하지 않으려 했고, 노동단체들 안에서 교육 활동이 이뤄지기만 하면 국가기구가 자연히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해 왔다. …… ‘신’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정부와 의회에 의존한다는 말은 완전히 헛소리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조직하고, 그러고 나서 행동하는 것이다. …… 21
이 시기의 전투적 산업 투쟁은 의회 개혁주의와 전혀 달랐지만, 몇 년이 채 안 돼 의회 개혁주의가 득세했다. 운동이 어떻게 변했기에 그럴 수 있었을까?
신노동조합 운동의 영웅적인 국면은 매우 짧았다. 지배계급은 직장 폐쇄와 대규모 대체 인력 투입으로 반격에 나섰고, 가장 취약한 노동자 집단들을 분쇄했다. 이것이 성공한 이유는 영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아서 모든 부문의 노동계급이 반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구노동조합의 적대감도 단결을 해치는 데 한몫했다. 마지막으로, 좌파의 주요 조직인 사회민주연맹은 구제 불능의 종파였다. 사회민주연맹은 노동조합 활동의 가치를 무시했고 항만 노동자들의 파업도 깎아내렸다. 1889년 9월 [항만 노동자 파업이] 승리한 바로 그때 사회민주연맹은 “파업의 오류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하찮은 승리를 거둔 항만 노동자들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말했다.22
1890~1892년에 신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32만 명에서 13만 명으로 감소해, 가장 많았을 때는 영국 노총TUC 조합원의 25퍼센트나 되던 것이 1900년에는 10퍼센트밖에 안 됐다.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이었던 가스노조 조합원도 1890년 6만 명에서 1896년 2만 4000명으로 줄었다.23 노동조합운동이 대체로 심각하게 후퇴했고, 조합원 수도 3년 만에 40퍼센트나 감소했다.
노동조합 기구들을 보호하기 위해 윌 손과 벤 틸렛 같은 지도자들은 전에 자신들이 비난했던 ‘구’노동조합 관료들의 보수적 태도들을 재빨리 받아들였다. 1893년에 틸렛은 헐Hull 항만의 대규모 대체 인력 투입에 항의하는 전국적 파업을 막았다. 1894년에 손은 “노동조합원들에게 간부들의 충고를 따르라고 훈계하며, ‘간부들의 태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억압이 극심하지 않다면 파업에 나서려는 노동자들을 확실하게 뜯어말려야 한다’고 선언했다.”24
처음에 신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1891년에 가스노조 대표단은 제2인터내셔널에 보고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성공했든 못했든 …… 지난 2년 동안의 크고 작은 파업 수백 건은 모두 똑같은 교훈,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동조합운동과 파업만으로는 노동계급을 해방하지 못한다는 것을.25
자본주의에 정치적으로 도전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했다고 해서 그로부터 반드시 혁명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적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회에 요구하는 것도 포함해) 개혁을 위한 투쟁을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를 위한 최후의 혁명적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의회에 대한 개혁주의적 태도는 계급을 동원하지 않는 수단이다. 즉, 대결을 회피하고 체제 내 활동만 하려는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라고 계급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들의 협상 기술이 대중행동을 대체한다.
슬프게도 1890년대에는 사회민주연맹의 종파주의 태도 때문에 개혁주의적 대안만이 가능했고, 그 대안이 결국 승리했다. 혁명적 주장을 받아들였을 극소수조차도 지속적인 세력으로 조직되지 못했고, 신노동조합 운동의 가장 선진적인 사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톰 만은 가장 늦게 현장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1891년 6월에도 톰 만은 여전히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다. “의회 활동이 노동조합운동을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 믿음이 꽤나 강력하다. …… [그러나 그것은]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다.”26 그러나 머지않아 새로운 견해가 등장했다. 이것은 틸렛이 브래드퍼드에서 의회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가장 분명히 드러났다. 1889년과 1890년에 틸렛은 선거 출마 권유를 거절하며 “정당정치 따위는 집어치우시오” 하고 대꾸했다.27 그러나 1891년 9월에는 선거 출마 권유를 받아들였다. 틸렛의 선거운동 기조는 의미심장했다.
자칭 사회주의자였는데도, 틸렛은 선거운동 내내 ‘사회주의’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회중교회• 원로들의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선거 공보물에 집어넣기도 했다. “틸렛 같은 사람이 규율 없는 노동자들의 지도자가 된 것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틸렛은 마라[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병사입니다.” …… 틸렛은 사회주의 천년왕국에 대한 구상을 일부러 밝히지 않은 듯했다. 적어도 세 번이나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28
• [옮긴이] Congregational Church,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교회 통일 정책에 반발해 국교회 개념을 거부한 개신교 교파. 19세기 후반 자유당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다.
틸렛의 선거운동은 많은 노동자들의 일반적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브래드퍼드는 산업 투쟁의 패배가 어떻게 개혁주의 정치로 이어지는지 가장 분명하게 보여 준 사례였다. 바로 여기서 독립노동당이 1893년에 창당 대회를 열었다. 이 도시에서만 독립노동당 창립 기금의 6분의 1이 걷혔고, 창당 대회 대의원의 3분의 1이 웨스트요크셔 지방 ― 핵심 도시가 브래드퍼드였다 ― 출신이었다.29
브래드퍼드가 개혁주의의 이상적 근거지가 된 것은 신노동조합 운동이 잠시 폭발했다가 금세 사그라졌기 때문이다. 그 전환점은 최대 33퍼센트의 임금 삭감을 둘러싸고 벌어진 매닝엄 공장 투쟁이었다. 그 투쟁은 여섯 달 동안 계속됐고, 3000명의 노동자들이 가담했으며, 도심에서 몇 차례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30 결국, 노동자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패배했다. 그 뒤 브래드퍼드는 노동조합 조직가인 벤 터너의 말처럼 “노동조합을 조직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 돼 버렸다.31•
• 브래드퍼드에서 겨우 13킬로미터 떨어진 리즈는 사뭇 달랐다. “리즈에서 독립노동당 지방의원이 처음 당선된 것은 1906년이었다. 그때는 이미 조우잇이 브래드퍼드 지역에서 14년째 지방의원으로 활동하며 커다란 성과를 올리던 때였다. …… 그러나 두 도시의 사회적·산업적 차이를 살펴보면, 몇 가지 이유를 금세 알 수 있다. …… 미숙련 남성 노동자들은 신노동조합 운동 덕분에, 대체로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했고 불만 사항도 몇 가지 없앨 수 있었다. 그래서 [1890년 6월 리즈에서 벌어진] 가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은 짧고 격렬했고 승리한 반면, 매닝엄 공장 투쟁은 길고 굴욕적이었고 패배했다.”32
이런 상황에서 1893년 1월 14일 독립노동당이 창당했다. 1889년 이후 어떤 상황 변화 때문에 그런 개혁주의 정당이 창당될 수 있었을까? 첫째, 해외 경쟁과 관련된 경제 문제들이 있었다. 둘째, 사회주의자 지도자들이 응집력을 제공한 대규모 산업 투쟁이 있었다. 이런 요인들이 없었다면, 자-노 제휴파의 정치와 단절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산업 투쟁의 전투성이 꺾이지 않았다면, 자신감과 자주적 활동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정치 운동이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893년에는 개혁주의에 딱 맞는 상황들이 맞물려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조직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패배 때문에 그 조직들은 관료적 방향으로 나아갔다. 산업 전선과 정치 전선 둘 다에서 지도자들은 투쟁을 통해 유명해졌지만, 이제 그들은 대중의 운동을 대리하고 있었다. 독립노동당은 신노동조합 운동의 산물이 아니라 그 패배의 산물이었다. 바로 여기서 개혁주의와 노동계급의 관계가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독립노동당
독립노동당은 자유당과 제한적으로 결별한 것이었다. 브래드퍼드에서 당의 이름을 둘러싸고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명을 ‘사회주의노동당’으로 하자는 제안이 부결되고 ‘독립노동당’이 채택됐다. 그 근거는 “당이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당 밖의 아주 광범한 노동자 대중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33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였다. 당의 목표가 자본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가장 중요한 것은 득표수가 아니라 사회주의 활동에 헌신적인 사람들의 수일 것이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이라는 당명이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을 보면, 대의원들이 선거에서 성공하는 것을 으뜸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독립노동당의 독보적 지도자 키어 하디는 “나에게는 하원의 노동당 의원 수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썼다.34
그러나 ‘독립’이라는 명칭은 당의 미래를 보증하기에 불충분했다. 광원 출신 국회의원 찰스 펜윅 같은 자-노 제휴파도 “의회 진출의 절박한 필요성이 있고 …… 노동자들도 노동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권위 있게 연설할 수 있어야 한다”고 독립노동당과 비슷한 주장을 했으니까 말이다. 그들도 “혁명의 정치가 아니라 개혁의 정치”를 추구했던 것이다.35 독립노동당은 자신들이 자-노 제휴파와 다르다고 주장해야 했고, 그래서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집단적 공동소유”라는 목표를 채택했다.
이것은 냉소적인 책략이 아니라 신노동조합 운동의 여운을 반영한 것이었다. 독립노동당의 평당원들이 사회주의의 근본이라고 여긴 것을 물 타기 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나려 한 훗날의 움직임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그 때문에 1932년에 당은 분열했다. 이런 의미에서 독립노동당은 초창기의 노동당과 사뭇 달랐다. 독립노동당은 개혁주의 정치로 후퇴하기는 했지만 계급투쟁을 통해 사상을 발전시킨 개별 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당이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개별 당원들의 가입으로 시작된 당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가입과 관료적 조종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당이다.
황금기라는 신화
독립노동당은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해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틀렸음은 역대 노동당 정부가 자본주의에 도전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1893년에는 개혁주의 주장을 논박할 실천적 사례들이 없었다. 노동당 정부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타협들이 막 시작됐고, 그것이 성과를 낼 때까지는 40년이 걸릴 터였다. 1932년에 가서야 독립노동당은 브래드퍼드에서 채택한 견해의 결론을 인정했지만, 그 결과는 독립노동당의 완전한 붕괴였다.
개혁주의의 논리가 아주 천천히 전개됐기 때문에, 노동당의 황금기라는 신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노동당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신화다. 나중에 의회적 길 ― 노동자들의 이익과 선거의 이익을 맞바꾸는 길 ― 을 걸어 내려온 사람들은 제일 처음 꼭대기에서 시작한 사람들을 되돌아봤다. 당연히 이 개척자들은 뭔가 고상한 이상에 의해 더 고양되고 고무된 사람들처럼 보였다. 과거 노동당 지지자였다가 환멸을 느낀 사람이 이미 1921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열렬한 신념과 영웅적 자기희생이 충만했던 초창기, 키어 하디가 천 모자[노동계급의 상징]를 쓰고 하원에 앉아 있던 초창기와, 정치꾼들이 선거 득표와 자리다툼에만 골몰하는 요즘은 엄청나게 다르다.36
그러한 차이는 환상이었다. 노동당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옛 노동당과 새 노동당의 차이는 그런 개혁주의가 작동하는 외부 조건에 달려 있다. 노동당에는 되찾을 만한 순수한 노동자 전통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표현을 빌리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정당은 태어날 때부터 썩어 있었고, 어떤 정당은 점차 썩어 갔고, 어떤 정당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썩었다. 각각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있다. 러시아 공산당은 독일 혁명의 패배, 국제적 고립, 16개 나라 군대의 침략과 내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썩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오랜 시기 동안, 그리고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같은 사람들이 들인 많은 노력 때문에 점차 기회주의에 물들었다. 그러나 노동당은 처음부터 순전한 개혁주의 정당이었다.
종속노동당
여러 결점들이 있었지만, 독립노동당 창당에는 매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1886년에 엥겔스는 독자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의 한계가 무엇이든 그런 조직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처음으로 운동이 시작된 한 나라에서 최초의 커다란 진일보는 노동자들이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든, 그것이 분명한 노동자 정당이고 ……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이라면 그 방식은 상관없다. [노동자들은 ― 지은이] 실수에서 배워 전진할 것이고, 잘못을 통해 지혜를 터득할 것이다.37
비록 잘못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엥겔스가 독립노동당 창당을 노동계급의 진정한 진일보라고 본 것은 옳았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이 가장 종속적인 조직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독립노동당은 노동계급 외부의 단체들이 제공한 이론에 철저하게 의존했다. 이 점은 필립 스노든의 말처럼 “ …… [독립노동당의] 지부들이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들로만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실이었다.38
이론은 개혁주의자들의 영원한 문제다. 부르주아 사상의 전통과 노동계급 사상의 전통 ― 마르크스주의 ― 은 각각 서로 다투는 사회 계급들의 삶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본가들은 철학자, 역사가, 정치인, 경제학자 등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지적 문화를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주의는 국제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에 의존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은 독자적 전통이 없다. 그들은 기존 제도들을 통한 활동에 스스로 매몰되고, 따라서 노동계급의 염원을 체제가 정해 놓은 이데올로기 틀 안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면서 불안한 이론적 노선을 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노동당원들의 헌신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키어 하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시끄러운 거리 모퉁이 가로등 아래 빈 궤짝 위에 서서 연설하는 사회주의자의 말을 잠시 들어 본 행인들 가운데 종교적 느낌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 사회주의자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이 날마다 고된 일을 마친 뒤 피로와 불편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서는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매주 일요일 몇몇 이웃 도시를 방문해 선전하거나 아니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두 차례 모임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일을 돕느라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는지 알게 된다면, 그리고 어떻게 보수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해마다 이런 일을 계속하는지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지상낙원을 건설하려는 염원으로 가득 찬 열정적인 종교인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39
이런 분위기와 훗날 헤일셤 경이 묘사한 보수당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라.
보수당원은 정치투쟁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들은 대다수 노동당원과 …… 다르다. 가장 단순한 보수당원은 여우 사냥을 선호하고, 가장 현명한 보수당원은 종교를 선호한다.40
빈 궤짝 위의 노동계급 선동가와 여우 사냥을 즐기는 보수당원의 생활양식은 많이 다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종교다. 독립노동당의 비국교도 같은 종교적 열정이야말로 그들의 지적 종속성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사실, 영국 국교회와 마찬가지로 비국교도의 전통도 지주들의 이익과는 무관했다. 그러나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동 예배를 강조한 비국교도에서는 노사 공동의 이익과 공동의 이데올로기라는 정서가 강했다. 트로츠키는 이것이 영국 부르주아가 “문화적 보수주의로 프롤레타리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분명한 증거라고 봤다.41
독립노동당의 가장 뛰어난 선전가는 필립 스노든이었다. 스노든은 ‘필립과 함께 주님 곁으로’라는 당원 가입 방식으로 유명해졌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개종자들이 앞으로 나올 때 스노든은 우렁차게 선언했다.
전 세계에서 위대하고 의로운 힘의 작용을 보여 주는 조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의의 태양이 떠올라 치유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입니다. 더 밝은 사회질서가 새롭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 새 예루살렘입니다.42
독립노동당과 초기 노동당에서 종교는 매우 중요했다. 심지어 1911~1914년의 생디칼리슴 운동을 주도하고 결국 공산당에 가입한 톰 만이 독립노동당 사무총장 재직 시절에 신부가 되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1906~1910년에 노동당 국회의원들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책을 조사한 재미있는 연구 결과가 있다. 40명 중 25명이 종교 서적들을 꼽았다(16명은 구체적으로 성서를 들었다).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책을 꼽은 사람은 2명뿐이었다.43•
• 다른 저자들 중에는 봉건시대의 황금기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비판한 존 러스킨(16명), 엥겔스가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비판한 토지세를 주장해 인기를 끈 헨리 조지(11명) 등이 있었다. 5명이 셰익스피어를 꼽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통찰력도 없는 로비 번스와 찰스 디킨스를 꼽은 사람이 각각 4명이었다.
독립노동당은 사용자와 노동자의 공동 이익을 강조하며 계급 갈등을 완화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하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 운동을 서로 싸우는 집단들의 지배권 투쟁으로 깎아내리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계급의식적’ 사회주의자들을 원하지 않는다.”44 하디가 독립노동당의 “가장 큰 지적 자산”이라고 칭송한 램지 맥도널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계급 전쟁이라는 조야한 관념을 거부하는 이유는 계급의식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 사회주의의 표어는 계급의식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이다.”45 당의 경제 전문가로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 필립 스노든은 한술 더 떴다. “부자는 …… 주위 사람들의 불행을 알기 때문에 돈을 마구 쓸 수 없다. …… 사회주의에 가장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아마도 교양 있는 유한계급일 것이다.”46
만약 독립노동당이 계급투쟁을 성가시게 여겼다면, 그것은 혁명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1895년에 〈레이버 리더Labour Leader〉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유럽 대륙 전체에 …… 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실제로 혁명이 일어나면,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인류의 거대한 비극을 목격할 것이다.”47
독립노동당은 비록 혁명적이지는 않았지만, 보수당과 자유당에 견주면 분명히 진보였다. 독립노동당은 신노동조합 같은 노동계급 조직들을 인정했고, 실제로 그런 조직들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은 자본주의와의 대결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국가기구 안에서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노동당이 독자적 개혁주의 이론을 정립할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하디는 무지를 축복으로 여겼다. “독립노동당은 …… 독자적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독립노동당의 강점이다.”48 그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독립노동당은 사회를 전혀 분석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자신의 역사적 위치도 파악할 수 없었다. 하디가 독립노동당의 탄생을 묘사한 말을 들어 보라. “독립노동당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아무도 모른다. 왜 봄에 싹이 트는가? 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인간사와 봄철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확신한다.”49 따라서 독립노동당은 자신을 둘러싼 자본주의 사상을 무방비로 받아들였다. 독립노동당 의장 브루스 글래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내가 평범한 자유당원이나 보수당원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나는 사회주의를 위해 주장하고 활동할 수 있다.”50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독립노동당은 자본주의라는 우물에서 곧장 퍼올린 사상들, 특히 자유당과 페이비언의 사상을 노동계급에게 전파했다. 하디와 램지 맥도널드는 모두 자유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된 뒤에야 노동당 정치에 의존했다. 그때조차 그들은 거듭거듭 자유당 정치에 공공연히 경의를 표했다. 나중에 키어 하디는 자신이 1892년 사우스웨스트햄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덕분에 최초의 사회주의자 의원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디가 의회에 등원할 때 열렬한 지지자들이 그가 탄 마차를 뒤따라 나팔을 불며 새 시대가 열렸다고 외친 것은 사실이다.51 그러나 하디 자신은 “나는 평생토록 자유당을 지지했다. …… 나는 지금도 자유당 강령에 동의한다”고 말했다.52
스노든은 자신이 “자유당 정치 안에서 성장했다”고 유권자들을 안심시켰다.53 광원 지도자이자 독립노동당의 노조 출신 거물인 로버트 스마일리는 노스이스트랭커셔에서 출마했을 때 자신이 자유당 후보보다 더 훌륭한 자유당원이라고 주장했다.54 맥도널드가 노동당 사무총장이 됐을 때, 자유당 정치와의 결합은 거의 극에 달했다. 맥도널드와 하디는 1899년에 쓴 중요한 글에서 독립노동당이 “진보적 사도전승•이라는 진정한 연계”를 통해 자유당 정치와 결합됐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55 그들은 두 정당을 “연결하는 황금 다리”를 놓고 싶어 했다.56
• [옮긴이] 예수의 사도 12명의 권위가 주교들을 통해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그리스도교 교리.
그러나 독립노동당이 자유당 정치를 채택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유당의 대안이 되기를 원하는 조직은 어느 정도 자신을 차별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을 위해 독립노동당은 페이비언들에게 많이 의존했다.
“사회혁명의 최악의 적들”
이 말은 페이비언협회의 핵심 인물인 비어트리스 웨브가 한 말이다.57• 독립노동당과 훗날의 노동당을 좌우한 것이 바로 페이비언협회였다. 어떤 역사가는 “현대 영국 사회주의의 정치적 원칙을 제시한 것은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라고 썼다.58 그렇게 작은 단체가 그토록 엄청난 구실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00년 페이비언협회가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가입했을 때, 회원 수는 겨우 861명이었다. 협회가 창설된 지 17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독립노동당이 이론적으로 무능했기 때문에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중추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거의 처음부터 독립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의 3분의 2가 페이비언협회 회원이었고, 그중에는 하디, 맥도널드, 만(독립노동당 사무총장), 틸렛, 랜즈버리 등도 포함돼 있었다.59••
• [옮긴이] 원래는 키어 하디가 노동계급을 경시하고 사회혁명을 부정한 페이비언협회를 두고 한 말이다. 비어트리스가 이 말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고 인정하면서 다시 인용했다.
•• 활동가들이 전혀 다른 정치조직들의 회원 자격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론을 경시하고 조직이 느슨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그래서 톰 만은 사회민주연맹에서 페이비언협회로 재빨리 옮겨 갔고, 그 뒤 페이비언협회를 탈퇴하지 않고도 독립노동당을 이끌었다. 랜즈버리는 사회민주연맹, 페이비언협회, 독립노동당의 회원 자격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윌 손은 사회민주연맹 회원 자격을 유지한 채 노동당 국회의원이 됐다. 그것도 사회민주연맹이 노동당과 결별한 지 5년 뒤에 그랬다. 이 밖에도 많다.
페이비언협회 지도자들 ― 비어트리스·시드니 웨브 부부와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 ― 은 “개인으로서 우리는 지배계급”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60 오랫동안 페이비언협회에는 노동자가 단 한 명뿐이었는데, 주택 도장공이었던 그 노동자를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은 ‘전시품’쯤으로 여겼다.61 페이비언협회는 실제로 자유당과 보수당에 ‘침투하는’ 정책으로 상층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관심이 더 많았고, 노동당을 세 번째 침투 대상으로 여길 만큼 하찮게 여겼다. 1891년 뉴캐슬에서 열린 자유당 당대회에서 시드니 웨브가 제안한 정책이 그대로 채택되자, 비어트리스는 시드니가 “자유당 정책의 원천이자 최고의 정책 선동가”라고 말했다.62 1910년에도 비어트리스는 일기장에 보수당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 자유당도 그렇다고 썼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정당에서 가장 많이 얻어 낼지 정말 모르겠다. 우리가 급속한 진보를 원한다면 결국 진정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63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은 노동계급을 철저히 경멸했다. “우리 대도시들에 우글거리는 이 수많은 불결한 영혼과 망가진 육신들한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야만, 비열함, 범죄뿐이다.”64 25년 뒤에도 그런 어조는 바뀌지 않았다. 비어트리스는 “노동조합 현장 조합원들의 엄청난 어리석음”, “천박하고 교양 없는 노동자들” 운운했다.65 인간적인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비어트리스 웨브는 자유당이 노동자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한 것을 혹평했다. 1911년에 비어트리스는 자유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꾀병 환자들을 어떻게 가려내려는 것인지 모르겠다. …… 정부는 치료와 규율 감독의 확대를 회피하고 있다. 그들은 단지 기계적으로 임금 소득자 계급의 화폐소득을 늘리려 하고 있다. ……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하도록 장려하는 조처는 전혀 추진하지 않고 있다.66•
• 이런 태도를 가진 웨브 부부가 ≪노동조합운동사≫와 ≪산업민주주의≫ 같은 탁월한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꼼꼼한 연구에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책임감 있게 활동하도록 훈련하고, 노동조합은 탄압이나 굴복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 상대라는 것을 지배계급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비어트리스 웨브의 말처럼, 이 부부는 “(노동조합원들을 위해!) 노동조합을 비판하고 …… (중간계급과 경제학자들의 각성을 위해) 노동조합을 변호하거나 방어했다.”67
1896년 페이비언협회가 펴낸 소책자 ≪사회주의의 도덕적 측면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회주의 정책은 약자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유리하다. …… 그것은 산업의 찌꺼기가 자연스럽게 걸러지고 일종의 ‘외과 수술’을 받게 되는 의식적인 사회적 선택 과정이다. ……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 정책은 사회적 적자생존뿐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경쟁하는 사회들의 적자생존에도 부합한다.68
히틀러가 등장하기 훨씬 전에 이미 버나드 쇼는 우수 인종과 “초인”의 육성, “낙오자들의 멸종”을 주창했다.
그들의 철저한 지배계급 관점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사회주의’나 더 흔하게는 ‘집산주의’ 운운할 때 영어를 터무니없이 잘못 썼음을 알 수 있다(이 골수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집산주의가 그나마 덜 불쾌한 용어라고 생각했다).
페이비언협회의 정치적 배경에는 두 요인이 있었다. 첫째는 조지프 체임벌린의 ‘속죄의 복음’이었다. 체임벌린은 자유당에 영국 연방 개념을 제공했고, 사회적 소요의 위험을 피하려면 사회복지와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속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비어트리스는 “제국을 유지하기 바란다면 …… 우리는 지금 음울한 불만이 확산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69
둘째,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19세기의 대부분 동안 지배계급은 이른바 자유방임laissez-faire 정책을 추진했다. 이 프랑스어[‘내버려 두라’는 뜻]는 자본주의 체제의 요구를 잘 표현했다. 자본 단위는 소규모였고 해외 경쟁은 미미했다. 그래서 기업주들은 자유무역을 요구했고 시장의 힘이 자유롭게 작용하기를 바랐다. 그들은 자본 축적 과정에 국가가 최소한으로 개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이 경제적 위협 상대로 떠오르자, 지배계급의 일부는 국가가 더 개입해서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배계급의 한 분파는 시장과 원료를 확보하는 수단이 바로 제국주의라고 봤다. 또 다른 분파는 국가가 국내 자본의 효율성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후자가 페이비언협회의 정책이었다.
그 정책의 완결판이 처음으로 드러난 것은 1889년 12월의 ≪페이비언 논총≫에서였다. ≪페이비언 논총≫은 항만 노동자 파업이 승리한 지 석 달 뒤에 출간됐지만, 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국가 개입이 곧 사회주의라는 생각이었다. 고위 공무원 출신의 시드니 웨브는 정부 관료들을 역겨울 만큼 칭송했다. “정부 관료들의 조처는 그들이 경멸하는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활동이다.”70 그러므로 “우체국은 …… 이제 순수한 사회주의 기관이다.” 사회주의가 그런 것이라면, 쇼가 자랑스레 떠들었듯이 페이비언협회의 강령에는
뭔가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조항은 이미 인정된 원칙들을 적용하고 이미 충분히 실행하고 있는 관행들을 확대하는 것들뿐이다. 모든 조항에는 영국인의 정신에 딱 맞는 교회의 도장이 찍혀 있다. 영국적이지 않은 …… 사회주의나 혁명 같은 ……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71
그래서 글래드스턴의 뒤를 이어 자유당의 지도자가 된 윌리엄 하코트 경은 “이제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자들이다” 하고 선언했다.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은 엘리트 사회공학자들이 돼, 철저하게 체제의 틀 안에서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혁명의 위험을 회피하는 활동을 했다.
페이비언 집산주의의 궁극 목표는 국가가 전국 규모로 자본주의 생산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 웨브 부부가 국가자본주의 사회인 스탈린의 러시아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을 때 많은 회원들은 깜짝 놀랐다. “[스탈린의 러시아는] 우리의 이상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 노동조합은 우리가 제안한 대로 정확히 [국가에] 종속돼 있다.”72 이것이 항상 페이비언주의의 논리였음을 알았다면 평론가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계급은 새 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능동적 구실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페이비언협회가 황송하게도 노동계급을 거론한 몇 안 되는 글 가운데 하나인 1889년의 글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이 “[국가를 ― 지은이] 실제의 적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고, “국가를 잠재적 구세주로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73 엥겔스는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노동자들의 지배가 두려워 단결한, 그리고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 무리들”이라고 옳게 지적했다.74
그들이 바로 “노동당의 정치적 원칙을 제공한” 사람들이다. 독립노동당과 훗날의 노동당은 페이비언 사상에 없었던 노동계급의 외피와 신뢰를 제공했다. 페이비언 사상은 예컨대 독립노동당 창당의 주역인 로버트 블래치퍼드의 글에도 나타나 있다. 그의 신문 〈클라리온Clarion〉과 75만 부가 팔린 그의 책 ≪메리 잉글랜드≫는 페이비언 사상을 통속적 형태로 대중화했다.
거의 모든 법률은 어느 정도 사회주의적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법률은 국민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통제할 국가의 권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 도로와 다리의 통행세를 폐지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조처다. 그렇게 하면 도로와 다리가 공동소유가 되기 때문이다.75
노동계급의 이익과 국가를 동일시하다 보니 민족과 민족주의 사상도 받아들이게 됐다. 블래치퍼드의 두 번째 걸작은 ≪영국인을 위한 영국≫이었다. 그 내용은 안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래치퍼드는 독립노동당 창당 무렵을 회고하며 “우리는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먼저 영국인이었다”고 말했다.76
키어 하디가 사회주의 이론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책 ≪농노제에서 사회주의로≫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경찰과 군대는 …… 국민의 압도 다수인 소작농들과 노동자들의 의지와 분명한 권위 덕분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동의가 없으면 군대든 경찰이든 존속할 수 없다.
하디의 경제 이론에는 페이비언주의의 치명적 낙인이 찍혀 있다.
사회주의는 토지나 자본을 폐지하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오직) 자본주의와 지주제만을 폐지하자고 제안한다. 자본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기술자들도, 건축가들도, 조직가들도, 기업을 경영하는 관리자들도 모두 존속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민간 자본가가 그들을 고용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가 그들을 고용할 것이다.77
다음과 같은 맥도널드의 말이야말로 이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지금 성과를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성과는 이 새로운 조직화, 즉 사회주의다.”78•
•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은 독립노동당 내의 페이비언주의 신봉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비어트리스 웨브에 따르면, 독립노동당은 “파괴자나 다름없는 정당이었다.”79 왜냐하면 독자적 노동자 정치는 자유당과 보수당에 침투하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온건한 독립노동당조차도 페이비언협회 회원들이 보기에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래서 비어트리스 웨브는 1895년 선거에서 독립노동당이 패배한 것을 환영했다. 왜냐하면 “영국의 어떤 계급도 파괴자를 오랫동안 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80
처음부터 노동당에서 유력했던 사상은 노동계급의 사상이 아니었다. 이 점에서 레닌이 “노동당은 철저하게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 비어트리스 웨브는 독립노동당과 페이비언협회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공 행정에서 공적 통제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리분별 없는 사람들을 조직해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분별 있는 사람들을 사회주의자들로 만들 것인가? 우리는 후자의 과정이 옳다고 생각한다.”81
* * *
패배와 수동성의 배경
신노동조합 운동으로 촉진된 ‘사회주의 호황’은 1890년대 말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독립노동당은 진성 당원 수가 1895년 1만 1000명에서 1901년 5000명으로 감소하는 등 파산 지경이었고,1 독립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1년에 4회로 줄 수밖에 없었다.
1895년 총선에 독립노동당 후보는 28명이 출마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독립노동당의 유일한 국회의원이었던 하디를 포함해 모두 낙선했다. 그들이 얻은 표는 모두 합쳐 2만 5000표였다. 계급의 선진 부위를 결집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그러나 의석을 얻기 위해 원칙을 희석한 정당에게는 재앙적인 결과였다.•
• 선거 결과가 안 좋기는 독립노동당보다 좌파든 우파든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1895년 영국 노총 위원장인 자-노 제휴파 젱킨스는 선거 결과에 의기양양해 하며 “일반 노동자의 이름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고 자임하는 자들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당한지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말했다.2 사회민주연맹도 기뻐했다. 사회민주연맹은 (비록 앙상한 종파주의적 방식이기는 했지만)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이론적 명확성을 추구한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다른 단체들보다 더 잘 버텨 살아남을 수 있었다. 1898년에 사회민주연맹은 5년만 지나면 자신들의 지부가 갑절로 늘어 독립노동당의 3분의 2 수준인 137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3
따라서 노동당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사회주의의 기반은 협소했다. 심지어 희석된 사회주의조차 그랬다. 독립노동당이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노총 내의 신노동조합 지지자들도 패배했다. 1889년 이후 신노동조합들은 구노동조합들과 빈번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좌파가 승리했다. 1889년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88표 대 63표로 부결된 8시간 노동 입법안이 1890년에는 193표 대 155표로 통과됐다.4•
• 1893년 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모든 생산·분배 수단의 집단적 소유와 통제 원칙”을 규정한 ‘사회주의’ 결의안이 통과됐다.5 1894년 대의원대회에서는 토지와 광산의 국유화가 추가됐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후퇴하자 반격이 시작됐다. 1895년에 노총 위원장은 독립노동당을 “노동자와 노동조합에 적대적인 운동”이라고 비난하며 “노총이 노동운동 외부의 세력들에게 이용당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6
구노동조합들의 공세는 규약 변경이라는 형태로 진행됐다. 그때까지 각 대의원의 투표권은 1인당 한 표였고, 노동조합뿐 아니라 정치조직의 대표들도 노총 대의원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카드투표제•가 도입됐고, 노동조합 대의원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노총 대의원대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광원노조와 면직물노조 같은 대규모 우파 노동조합들이 대의원대회 결과를 좌우할 수 있게 됐다. 독립노동당의 영향을 받는 소규모 노동조합들은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이런 사태를 저지하거나 노동자 정당을 계속 옹호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카드투표제가 나중에 노동당 당대회를 통제하는 주요 무기가 된 것은 아이러니다.
• [옮긴이] 대표자가 전체 노동조합원 수만큼 표수를 갖는 일괄 투표. 예를 들면, 광원노조에서 찬성 600표, 반대 450표로 통과됐더라도, 광원노조 위원장은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조합원 전체의 표(1050표 +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조합원)를 찬성표로 던지게 돼 있다. 블록투표라고도 한다.
1895년에는 노동자 정당에 대한 희망이 모두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5년 뒤 노총은 노동자 정당을 건설했다. 이런 극적인 변화의 계기는 무엇인가? 그 답은 지배계급의 공격이었다. 1889년에는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현장 조합원들이 이제 관료들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독립노동당은 선진적인 좌파 운동의 산물이었다. 노동당은 노총 관료들의 책략의 산물이었고 계급투쟁이 후퇴한 결과였다.
사용자들은 1894년에 7만 명의 스코틀랜드 광원노조를 굴복시킨 것을 시작으로 노동조합들을 하나씩 분쇄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런 패배를 겪으며, 부문의 투쟁[경제투쟁]이 실패하더라도 계급의 투쟁[정치투쟁]은 성공할 수 있다는 혁명적 사상을 깨우치지는 않는다. (광원노조 간부 출신인) 하디가 재빨리 결론지었듯이, 선거 정치가 해답이라는 개혁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훨씬 더 흔하다.
스코틀랜드 광원 파업은 겉보기에는 노동자들의 완전한 패배인 듯 보였음에도, 위대한 승리였다. 누구의? …… 노동운동의 승리였다. …… 지난 18주 동안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 많은 광원들은 (기존의) 정당정치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독립노동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7
그 이듬해에는 제화공노조가 패배했다. 또다시 하디는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되풀이했다.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대체로 그렇다. …… 그러나 이번 쟁의의 교훈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일전의 레스터 지방선거 결과는 노동자들이 교훈을 제대로 배웠음을 보여 준다.”8 철도 노동자들은 ‘전체 직급 운동’•이 패배한 뒤 노동자 대표를 의회에 보내자고 노총에 제안했다. 그다음 차례는 구노동조합들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센 통합금속노조를 굴복시키기 위한 공장 폐쇄였다.
• [옮긴이] 1897년 철도회사의 탄압에 맞서 노동조합이 직종이나 직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철도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펼친 운동.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등의 요구를 사용자 측이 단호하게 거부하자 이렇다 할 투쟁을 벌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여섯 달이 채 안 돼 사용자들은 “자기 작업장의 주인”이 될 권리를 되찾았다. 이에 대해 〈레이버 리더〉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실패. 그러나 교훈을 얻기 위해 치를 만한 대가였음이 마침내 입증될 것이다. ……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자들의 집이 아니라 국회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영국 정치의 전통적 원칙들과 상식에 더 부합할 것이다.”9
잇따른 성공으로 용기를 얻은 사용자들은 법원을 훨씬 더 자주 이용했다. 이것은 태프베일 판결•에서 절정에 달했다. 태프베일 판결은 피케팅을 불법화했을 뿐 아니라 파업 기간의 손실을 노동조합이 전액 배상하도록 강요했다. 이런 패배를 겪으며 노조 관료들은 심각하게 흔들렸다. 1902년에 한 노조 지도자는 “작업장, 법원, 언론 등 도처에서 위협에 직면한 노동조합의 피난처는 투표소와 노동자 의원밖에 없다”고 선언했다.10
• [옮긴이] 철도 회사 태프베일은 노동조합을 고소해 파업 기간의 손해액 4만 2천 파운드를 받아냈다. 이 판결 전에는 노동조합이 손해 배상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용자들의 공세 수준을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금속 노동자들이 패배한 뒤인 1898년에 노총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운동 역사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군대를 앞세운 자본의 거대한 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저들의 목표는, 그 지도자가 공공연하게 말했듯이, 노동조합의 힘을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해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11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해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19세기 말의 투쟁들은 격렬했지만, 그 효과는 노동자들의 독자적 활동을 자극한 것이 아니라 사기를 떨어뜨리고 산업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약화시킨 것이었다. 노동조합 안에서는 현장 조합원보다 관료들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세졌다. 사용자들이 공세를 펼쳤는데도 노조 관료들의 수는 급증하고 있었다. 1850년에는 노동조합에 상근 간부들이 없었지만, 1892년에는 600명이 있었다. 이미 그해에만 금속노조 간부들이 네 배 늘었고, 목수노조 간부들은 열 배나 늘었다. 1920년에는 노조 상근 간부들이 3000~4000명이나 됐다.12
사용자들의 반격이 낳은 한 가지 효과는 노조 관료들이 조정 제도들을 통해 사용자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는 부분적 통합이 이뤄진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섬유 산업을 포괄하는 브루클랜즈 협정이었다. 그런 협정들 때문에 파업 건수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이런 추세는 1910년까지 지속되다가 현장 조합원들의 반란으로 뒤집혔다.
또 다른 효과는 노조 관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었다. 노조 관료들은 조합원도 보호할 수 없고 노동조합 기금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아마 후자가 더 큰 관심사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의지와 반대로 그들은 순수한 경제적 행동에서 정치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조 관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렇게 했다. 1895년에 노동당 건설 구상을 철저하게 거부했던 노총이 이제는 그 구상을 환영하고 나섰다.•
• 노동당 건설에 대한 독립노동당의 태도도 1890년대에 바뀌었다. 1893년 브래드퍼드에서 열린 독립노동당 창당 대회는 노동조합들과 지역노조연합체들을 초대해, 그들을 흡수할 수 있는 연방적 구조를 채택했다(반대표는 두 표뿐이었다). 콜은 “브래드퍼드에서 독립노동당은 여전히 자신이 유일한 노동자 정당이 될 것이라고 꿈꾸고 있었다”고 썼다.13 1895년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독립노동당이 배척당한 뒤 하디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독립노동당은 노총에서 배제된 단체들과 가입을 원하는 다른 단체들에게 문호를 개방해서 ‘사회주의 노총’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디는 과감하게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그렇게 되면 그 노총은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노동계급의 온갖 견해를 모으는 구심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14
1890년대 말에 그런 생각은 가망이 없었다. 이제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동맹을 체결해야 했고,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했다. 1899년에 독립노동당 중앙집행위원회가 어쩔 수 없이 실시한 투표 결과를 보면, 2397표가 사회민주연맹과의 동맹에 찬성했고 1695표는 전면 통합에 찬성했다. ‘사회주의 단체들의 통합’에 찬성하는 정서가 너무 강력해서 반대표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중앙집행위원회는 투표 결과에 따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노조 관료들과의 미묘한 협상 과정에서 “독립노동당이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5
‘노동자 동맹’을 건설한 창당 대회
1899년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철도노조 대의원들이 제안한 노동자대표위원회[영국 노동당의 전신] 건설 추진 결의안은 찬성 54만 6000표 대 반대 43만 4000표로 통과됐다. 그 결의안은 “다음 의회에 노동자 대표들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한 수단과 방식을 강구할 …… 임시 대의원대회”를 요구했다.16 그래서 1900년 2월 27일 런던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가 창설됐다. 참석한 대의원은 129명이었다. 그중 65명은 56만 8000명의 노동조합원들을 대표했고, 사회주의 단체들의 대의원은 독립노동당 당원 1만 3000명, 사회민주연맹 회원 9000명, 페이비언협회 회원 861명을 대표했다. 12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됐는데, 노동조합 소속이 7명이었고 사회주의 단체 회원이 5명(독립노동당과 사회민주연맹 소속이 각각 2명, 페이비언협회 소속 1명)이었다.
세 가지 방안이 대의원들에게 제출됐다. 사회민주연맹은 “계급 전쟁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자본가 정당들과 분리된 정당 조직 …… 그 궁극적 목표는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사회화”를 제안했다.17 우파의 방안은 노동자대표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네댓 개의 강령”으로만 구성된 정책을 채택하고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었다.18 이것은 자-노 제휴론의 연장이었다. 노동자대표위원회 의원들이 태프베일 판결 같은 당면 현안들을 다룰 수도 있지만, 일단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면 그들은 다시 자유당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키어 하디는 두 견해를 모두 반대했다. 하디는 정확히 중간노선을 추구했다. “자체의 원내총무가 있는 독자적 노동자 의원단.” 따라서 기성 정당들과 조직적으로 결별하지만, 뚜렷한 정치적 차별성은 없을 것이다. 하디가 제안한 정책은 “당분간 노동자들의 직접적 이익에 유리한 입법을 추진하는 데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정당과 기꺼이 협력한다”는 것뿐이었다.19 1906년에 노동자대표위원회는 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노동당은 위에서 아래로 건설됐다. 계급투쟁은 아무 구실도 못했다.
1899~1907년은 산업 평화 시기였다. 그 시기는 통계가 시작된 1891년부터 비슷한 평화 시기가 시작된 1933년까지의 기간 동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 노동쟁의로 인한 연평균 노동 손실 일수는 300만 일이 채 못 됐고, 아무리 많은 해에도 500만 일을 넘지 않았다. 반면 …… 1908~1932년에(1926년을 제외해도) …… 연평균 노동 손실 일수는 1400만 일이었다.20
운명적 결정을 내린 1899년 노총 대의원대회는 독립노동당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레이버 리더〉는 노총 대의원대회를 다룬 “빛 좋은 개살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올해 노총 대의원대회가 유난히 지루했던 것은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보도했다.21 노동자대표위원회 결성 자체는 〈타임스〉에서 한 칼럼의 4분의 1 분량으로 다뤄졌을 뿐이다.22
노동자대표위원회에 대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금속 노동자들과 제화공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따라서 그들의 노조 간부들은 의회 진출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대표위원회 가입 찬반 투표 결과는 제화공 노동조합원 가운데 6.5퍼센트만이 투표에 참가했고 찬성이 1500표, 반대가 675표였다. 통합금속노조의 결과는 더 나빴다. 조합원 8만 5000명 가운데 4퍼센트만 투표에 참가했고 찬성 2897표, 반대 702표였다. 투표 참가율이 워낙 낮았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투표에서 가입을 지지했는데도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가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23
1900년 총선 결과도 똑같은 양상이었다. 노동자대표위원회는 아직 노조 간부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고, 선거 자금도 총 33파운드에 불과해 자체 후보를 3명밖에 낼 수 없었다. 그중에 키어 하디와 철도노조 출신의 리처드 벨이 당선됐다.24 독립노동당 후보로 10명이 출마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노동자대표위원회와 독립노동당 후보들이 모두 합쳐 6만 6000표밖에 못 얻은 사실은 대다수 노동자들이 여전히 개혁주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줬다.25
노동자대표위원회 설립은 또 다른 의미에서 관료적이었다. 노동자대표위원회 설립은 표어만 달라졌을 뿐 정치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클라크가 랭커셔 지방을 연구한 결과를 보면, 어떻게 “자유당 인스[영국 서부 체셔 주의 지명] 지구당(위원장, 윌리엄 쇼)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노동당 인스 지구당(위원장, 윌리엄 쇼)이 생겨났는지” 알 수 있다.26 1914년 5월에도 노스이스트더비셔에서 출마한 노동당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영국에서 저보다 더 열렬한 자유당 지지자는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을 겁니다” 하고 말했다.27
그래서 난처한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아서 헨더슨은 1903년 바너드캐슬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 의원이 되기 전까지 7년 동안 자유당 선거 간사였다. 선거운동 기간에 상대 후보 측에서 헨더슨이 전에 독립노동당의 사회주의를 비난했던 발언들을 유인물로 만들어 뿌린 적이 있었다.28 정치적 태도를 쉽게 바꾸지 못한 리처드 벨은 노리치 지역의 선거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 후보에 맞선 자유당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가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29
노동조합 관료 집단의 정치적 표현
노동자대표위원회 결성의 주요 성과는 노조 지도자들을 조직적으로 자유당과 분리시킨 것이었다. 이제 노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조직에 정치적으로 충성했다.
노조 간부들이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가입시킨 이유는 대부분 의회 진출을 원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가입한 노동조합은 항만노조 두 개와 가스노조뿐이었다. 이 세 노동조합은 신노동조합 운동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전체 노동조합의 5분의 1에 불과했다.30 특히, 광원노조와 섬유노조가 노동자대표위원회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899년 노총 대의원대회 결의안에 반대한 43만 4000표 가운데 35만 1140표가 이 두 노동조합에서 나왔다. 특히 광원노조는 조합원들이 밀집해서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조 간부들이 외부 도움 없이도 자-노 제휴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광원노조는 주요 노동조합 가운데 노동당의 효용을 가장 늦게 깨달았고, 1909년에야 노동당에 가입했다.
두 번째 가입 물결을 일으킨 것은 태프베일 판결이었다. 〈레이버 리더〉는 초기 노동당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조합에 태프베일 판결만큼 다행스러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 판결로 노동자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고 주장했다.31
처음부터 노동조합은 사회주의 단체들(독립노동당이나 페이비언협회)과 함께한 ‘노동자 동맹’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했다. 노동조합 간부들과 노동당의 연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제1차세계대전 전에 노동당 의원단의 95퍼센트는 노동조합의 후원을 받는 의원들이었고, 노총의 지도위원 13명 가운데 9명이 노동당 의원이었다.32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노동조합이 정치적 사건들에 직접 개입한 결과였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조합주의의 후퇴, 즉 집단적 조직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는 신념의 후퇴이기도 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노동자대표위원회는 노동조합주의의 대체물 ― 톰 만이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일축한 ― 이었다. 1898년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오그래디는 “우리가 투쟁을 산업 분야에서 정치 분야로 옮기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라고 주장했다.33
이런 태도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태프베일 판결에 따른 위협 앞에서 노조 간부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투쟁에 나서야 할 수도 있었다. 유명한 노조 지도자인 클라인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01년에 분노한 노동자들을 집결시킬 수 있는 노동당이 없었다면, 태프베일 판결을 정의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 노동자들이 영국의 대규모 산업 중심지 도처에서 공공연히 혁명을 선언하며 반격에 나섰을지도 모른다.34
노동자대표위원회 창설은 산업 투쟁의 대안을 모색하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단을 찾고 있던 관료들의 정치적 대안이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거기에도 모순은 있었다. 노동자대표위원회를 존재하게 만든 것은 현실 세계의 경제와 정치, 국가와 기업주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이었다. 더욱이, 정당[이라는 조직]은 노조 관료들의 전망을 대부분 바꿔 놓았다. 그래서 노동자대표위원회는 소속 노동조합원들에게 보낸 첫 인사말에서 “노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원칙들을 국가적 문제에 적용한 결과”가 노동자대표위원회라고 주장했다.35
그러자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노동조합이 정치와 무관하게 경제적 처지를 바탕으로 조합원을 가입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당도 노동자들의 정치와 무관하게 표를 모으려 했다. 키어 하디는 노동당이 다음과 같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좋은 것은 모두 보존할 만큼 충분히 보수적이어야 하고, 개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개혁할 만큼 충분히 자유주의적이어야 하며, 잘못된 것은 모조리 근절하고 파괴할 만큼 충분히 급진적이어야 한다.”36 스노든도 노동당을 “자유당과 보수당이 함께 만날 수 있는 중립지대”라고 묘사했다.37
허위의식 문제
계급사회에서 중립지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 강령에 계급 전쟁을 포함시키지 않기로 한 결정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분명한 정치적 태도가 함축돼 있다. 한 노동당 지지자는 1921년에 이 점을 깨달았다.
일단 ‘계급 전쟁’을 인정하면, 우리는 곧바로 정치적·산업적 ‘사투死鬪’ 전술에 어느 정도 헌신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자유를 염원하고 압제자들에 대항하는 피억압 계급으로 여겨지는 한은 …… 우리도 진화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정책에 헌신해야 한다. …… ‘계급 전쟁’을 부인하면, 당연히 ‘타협’의 정치, ‘개혁’의 정치, ‘이해’와 ‘연합’의 정치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38
이것은 옳은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당 지지자들이 노동당의 정치적 중립 가능성을 신봉한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당의 자기의식과 그 실제 태도 사이의 차이, 신화와 현실의 차이라는 문제에 거듭 직면한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허위의식’ 개념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의 세계 인식과 사회 현실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물질적 생산 조건의 물질적 변화와 …… 법률, 정치, 종교, 예술, 철학 등 요컨대 이데올로기 형태들[의 변화]를 항상 구분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 형태들 속에서 인간은 [사회적 ― 지은이] 갈등을 의식하게 되고 투쟁으로 이것을 해결한다.
우리는 이것이 노동당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 노동당 지지자들은 노동당이 계급 전쟁을 거부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정치에 대해 중립적이고 상식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 모든 계급에 공통된 이해관계의 존재, 국가와 법률의 공평무사함을 확신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그들은 틀릴 수밖에 없다. 역사적 경험은 정치와 경제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 국가는 계급 지배의 무기라는 것 등을 보여 줬다.
현실과 개혁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은 변증법적으로 연결돼 있다. 계급투쟁이 자동으로 정치적 결론과 직결된다면, 이미 영국에서 대중적 혁명 조직이 등장해 거침없이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반면에, 외부 세계와 개혁주의 의식 사이에 아무 연관도 없다면 노동당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세계관은 허위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간접적이나마 외부 세계와 진정한 연관이 있고 외부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다.
기술적 분업
노조 관료는 계급투쟁에서 한 발 떨어져 있다가 노동자들과 사용자들이 싸울 때 끼어들어 협상에 나선다. 노동당은 계급투쟁에서 두 발 떨어져 있다. 처음부터 노동당은 “노동조합운동의 원칙을 국가적 문제들에 적용한” 기구라고 자임했지만, 둘은 질적으로 달랐다. 노조 관료들은 정치사상에 취약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업무는 임금과 노동조건을 중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노조 관료들은 서로 다른 산업과 직종 등 부문에 따라 분열돼 있고, 작업장에서 현장 조합원들의 집단적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의회 활동에는 다른 관료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집단적 노동자들이 아니라 투표소의 원자화된 노동자 시민의 지지를 받으려 한다. 그들은 적절한 기술과 폭넓은 정치적 흡인력을 가진 직업 정치인이 돼야 한다. 국회의원들과 당의 상근 지식인들이 그런 일을 한다.•
• 노조 간부들과 개혁주의 정치인들 사이의 분업은 심지어 노동당이 결성되기 전에도 독립노동당 안에서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1898년에 톰 만은 독립노동당이 정치에만 몰두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사퇴했다. 바로 그해에 가스노조의 조직가인 피트 쿠란도 정치에서 하는 구실과 산업에서 하는 구실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독립노동당 위원직을 그만뒀다. 펠링은 다음과 같이 썼다. “신노동조합 운동과 직접으로 맺어 온 오랜 연계가 끊어졌다. 이제 하디가 이끄는 새로운 위원들이 당을 운영하게 됐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아무 연계도 없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시간을 모두 또는 대부분 당 활동에 자유롭게 쏟아 붓는 램지 맥도널드, 스노든, 글래셔 같은 상근 저널리스트 정치인들이었다.”39
노동조합주의를 뛰어넘는 정당으로 활동할 때만 노동당은 노동조합원이 아닌 다수의 유권자들에게 매력을 줄 수 있었다. 이 점은 많은 노동조합 후보들이 자신의 조합원들한테서도 표를 얻지 못한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노동조합의 지지와 선거 득표 사이의 연관은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이것을 규명하기가 힘들다는 것도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는 계급 개념을 의도적으로 폐기하고 모든 사람을 일개 시민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오직 광원들만이 규모도 크고 지리적으로도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투표 결과를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 밀집 거주지이고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강력한 광산 지역에서도 노동조합원이라는 사실과 투표 행위 사이의 연관은 미약했다. 광원들의 정치를 연구한 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대체로, 자유당 후보도 출마한 지역에서는 광원 출신이나 광원노조 간부 출신 노동당 후보라 하더라도, 광원들의 표를 50퍼센트 이상 얻는 경우가 드물었다.40
그래서 1910년에 요크셔 광원노조 위원장인 허버트 스미스는 5000명의 광원들이 포함된 선거구에서 겨우 2000표를 얻었다. 허버트는 사실상 꼴찌를 한 반면, 자유당 후보는 8000표를 얻었고 보수당 후보도 3400표나 얻었다!41 노동조합의 공식 추천과 득표 사이의 연관이 미미했기 때문에, 노동당은 선거 정당으로 성공하려면 훨씬 더 광범한 사람들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조 간부들도 노동조합이 없다면 노동당도 없을 것이라고 응수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빈은 노동당을 “노총이 배출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계급사회에서 계급을 부인하기
따라서 노동당의 정치뿐 아니라 구조에도 노동조합을 통한 계급 조직화와 국민을 지향하는 정치가 불안하게 결합돼 있다. 노동당은 노동계급의 염원을 대변하지만, 국민국가의 작동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스노든은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당은 결코 계급의 승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노동당의 목표는 육체 노동계급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 노동당과 사회주의 정당이 임금 소득자 계급에게 호소하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노동당과 사회주의 정당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자극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들이 유권자의 압도 다수이므로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42
두 요인 사이의 균형은 노동당 좌우파의 분열에서 드러난다. 둘은 똑같은 개혁주의의 서로 다른 측면이다. 그래서 윌 손은 1906년 선거 출사표에서 자신에게 투표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짓밟힌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자본주의 체제가 폐지돼 해방될 때까지 끊임없이 임금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과 자본주의 사이의 전쟁에서 노동자들을 편드는”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43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는 벨파스트에서 출마한 윌리엄 워커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출사표가 있다. “항상 그랬듯이 나는 ‘영국·아일랜드 연합’을 지지하고, 제국 의회의 지배권이 손상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이다.”44
노동자대표위원회는 독자적 정치 강령이 없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었다. 독자적인 조직적 연단을 만든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지만, 그 연단에서 무슨 내용으로 연설할 것인가? 초기에 노동당은 열에 아홉 자유당의 정책을 열렬히 지지했다. 정치적 독자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00년 5월 노동자대표위원회의 한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노동자대표위원회 소속 단체들은 자신의 후보를 출마시킬 때 먼저 지방 자유당 조직이나 보수당 조직이 노동자 후보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당과 보수당 원내총무들에게 …… 우리가 다른 정당들에게 적대감이 전혀 없으며 …… 이 후보들이 당선되도록 협조해 주셔서 고맙다는 …… 내용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45
이런 제안은 ‘독자적 노동자 조직’을 만든다는 결정에 담긴 최소한의 독립성조차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 제안을 둘러싸고 노동자대표위원회 내에서 찬반 의견이 팽팽했지만, 결국 의장의 캐스팅보트로 부결됐다.
1903년에 노동조합들이 조합원 1인당 1페니씩 거두기로 결정하고 국회의원들은 의원단의 다수결에 복종해야 한다는 ‘서약’이 통과되자 노동당 조직은 강화됐다. 그러나 자유당에 대한 정치적 종속이 조직의 발전을 끊임없이 가로막았다.
밖에서 떠받쳐 줄 대중적 개혁주의가 없는 상태에서 관료들이 결성한 노동당은 불안정한 존재였다. 노동당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지만, 자유당 지지자들을 끌어당기려고 자유당에 맞서 싸우는 것과 ‘온건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지 않으려고 자유당에 아첨하는 것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하디는 자유당 고위 인사들에게 노동당을 지도해 달라고(그리고 자유당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력을 빌려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디는 바로 얼마 전까지도 강력하게 비난했던 존 몰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도전할 수 있는 두뇌, 일할 수 있는 손, 영감을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 ……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돼 주시겠습니까?”46 하디가 1903년에 로이드조지에게 보낸 편지는 훨씬 더 애처로웠다. “가장 고귀한 염원을 충분히 만족시킬 지도부가 여기 당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습니다. 당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그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47•
• 로이드조지를 노동당 지도자로 영입하려는 노동당의 비겁한 태도 때문에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1916년에 로이드조지는 “램지 맥도널드를 [그의 평화주의를 문제 삼아 ― 지은이] 감옥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고 놀려 댔다.” [그런데도] “맥도널드는 로이드조지의 미래에 관해 얘기할 때, 로이드조지가 노동당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했다.”48 ≪C P 스콧의 정치 일기≫를 보면, 1917년 12월에 시드니 웨브와 맥도널드는 로이드조지가 언젠가는 노동당의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49 1926년 6월에도 로이드조지의 노동당 가입 문제가 논의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맥도널드가 로이드조지에게는 “노동당이 너무 점잖고 실용주의적”이라며 논의를 중단시켰다. 맥도널드는 로이드조지에게 그 대신 공산당 가입을 권유했다.50
키어 하디의 호소는 아무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하디와 맥도널드는 노동당의 선거 문제를 아주 부정직하게 해결했다. 맥도널드는 항상 노동자대표위원회의 독립성을 주장했으면서도, 자유당 전국 선거 간사인 허버트 글래드스턴과 몰래 협약을 맺었다. 그 내용은 자유당이 후보를 낸 선거구에 노동자대표위원회 후보가 출마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른 선거구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 후보들의 자유로운 출마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 협약은 50년 동안 비밀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면, 노동당이 자유당과 다르다는 주장은 아마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이 협약의 가치는 1906년 총선에서 드러났다. 노동당 의원 27명 중 19명이 그 협약에 따라 자유당이 양보한 곳에서 당선됐다.51 비록 비밀은 유지됐지만, 이 협약은 선거의 성과를 위해 노동당이 자유당에 종속되는 위험한 유산을 남겼다.
의의
키어 하디는 1903년 노동당 당대회 연설에서 노동자대표위원회 결성이 중요한 돌파구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장엄한 당대회장에 자유당 지지자, 보수당 지지자, 사회주의자가 모두 모여 기뻐했다. 그들을 모두 불러 모은 원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독립성이다.”52 그러나 자유당 지지자, 보수당 지지자, 사회주의자가 모두 동의했다면, 그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인가?
노동당에 우호적인 역사가들의 평가는 더 냉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 동맹’ 덕분에 “희망이나 기대를 …… 뛰어넘어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거나 “당시 상황에서 가능했던 최상의 수단”이 ‘노동자 동맹’이었다고 주장한다.53 이런 주장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노동자대표위원회와 나중의 노동당은 어쨌든 자-노 제휴론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기존의 공공연한 자본가 정당들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정당에 투표하도록 결집시킨 것은 1900년의 상황에서는 분명한 진전이었다. 왜냐하면 조직적 의미만 보더라도 대중적 개혁주의 정당이 창설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치 상황이 변했다. 이제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쟁이 실천에서 검증될 수 있었다. 그리고 노조 지도자들이 이제는 공공연한 자본가 정당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원과 조직에 의존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대차대조표에는 중요한 차변借邊이 있었다. 기층의 정치적 발전이 없는 상황에서,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좌파적 사회주의 이상들을 희생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던 사회민주연맹은 1901년 8월 노동자대표위원회를 탈퇴했다. 안타깝게도, 사회민주연맹은 노동당 정치를 대체할 더 급진적인 대안을 만들려 하지 않고, 과거의 종파주의 황무지로 되돌아갔다.
독립노동당도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독립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은 노조 관료들의 볼모가 됐다. ‘동맹’의 어느 한쪽이 투표권의 94~99퍼센트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코 공평한 동맹이 아니었지만, 독립노동당은 그런 동맹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독립노동당은 사회주의 선전으로 의석을 얻으려는 노력을 덜 하게 됐다. 노동자대표위원회는 자신들의 의회 진출을 도와 달라고 공개·비공개로 자유당에 호소했다. 1902년에 〈클라리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 독립노동당의 공식적인 주요 활동은 사회주의 추구가 아니라 의회에 대여섯 명을 진출시키기 위한 책략인 듯하다. 자유당과 모종의 협정을 맺지 않고도 사회주의자를 의회에 진출시킬 수 있는 곳은 영국에서 (혹시 그런 곳이 있다면) 기껏해야 한 군데[키어 하디 선거구] 정도일 것이고, 자유당은 그런 협정의 조건으로 아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아주 무거운 대가를 요구할 것이다.54
독립노동당의 불확실한 영향력은 섬유노조 지도자 데이비드 섀클턴이 잠시 부각된 데서 드러났다. 섀클턴의 통합섬유노조는 1899년까지도 보수당-노동당 제휴파 후보를 후원했다. 섀클턴 자신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노동자대표위원회 후보 선정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게 된 자유당원이었다. 그는 애크링턴 지역의 자유당 간부였고 “보통의 자유당원보다 약간 더 진보적인 온화한 신사”였다.55 1902년에 클리더로 지역의 보궐선거가 실시되자 후보 지명을 간절히 바란 독립노동당은 결국 섀클턴을 위해 포기했다. 섀클턴은 주요 정당들을 거의 비판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중에 자유당으로 복귀할 때 아무런 반발에 부딪히지 않았다.
1906년에 노동당이 처음으로 상당한 세력이 됐을 때 섀클턴은 거의 노동당 당수가 될 뻔했다. 섀클턴과 키어 하디가 노동당 의원단 대표 선거에서 경합했다. 하디는 “능력과 경험 면에서 자격이 충분한 …… 걸출한 후보였다. 하디는 고참 국회의원이었고, 독립노동당의 존경받는 지도자였으며, 노동당 창설에 그 누구보다 많이 기여한 사람이었다.”56 그러나 의원들의 거수투표 결과는 팽팽했다. 비밀투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3차 투표까지 가서야 하디가 한 표를 더 얻어서 대표가 됐다. 섀클턴은 진정한 정치적 고향으로 돌아가 자유당 정부에서 관직을 맡았다.
노동당이 위로부터 창설된 사실은, 조직적 독자성뿐 아니라 자유당과 보수당에 대한 공개 비판도 추구해야 하는 정치적 명료화 과정이 사실상 중단됐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창당 대회에서 타협이 이뤄진 결과로 노동당은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비판할 수 없었고, 심지어 개혁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 비판조차 할 수 없었다.
온갖 결점들이 있었지만, 독립노동당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였다. 사회주의의 희망은 대체로 계급의 전위가 노동자 대중을 이끌고 (당장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개혁을 위한 투쟁까지) 전진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노동당은 그런 의미의 지도력을 제공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당은 이 공식을 뒤집어 버렸다.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더 후진적인 노동자들에게 종속됐다. 그것은 노조 간부들이 가장 후진적인 노동자들과 보조를 맞추는 경향 때문이기도 했고, 독립노동당이 선거를 위해 전보다 훨씬 더 많이 타협한 결과이기도 했다.
개혁주의의 모든 측면이 그렇듯, 노동당의 탄생도 모순적 성과였다. 노동조합과 연계되고, 노골적인 부르주아 정당들과 모호하게나마 다른 조직의 등장은 노동자 대중이 볼 때 성과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노동당의 선거주의 전략을 받아들인 소수의 선진 노동자들이 볼 때 새 조직은 감당하기 힘든 골칫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폭은 넓혔지만 정치적 깊이는 얕아진 것이다.
의회의 영향력
허버트 모리슨이 “정치의 기적”57이라고 부른 것 ― 집권을 향한 노동당의 전진 ― 이 190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노동당은 총선에서 34만 6000표를 얻어 29명을 의회에 진출시켰다.•
• 의미심장하게도, 노동당 의원의 대다수인 24명은 자유당 후보와 대결하지 않은 덕분에 당선될 수 있었다. 정확한 득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대표위원회가 33만 1280표를 얻었고, 머지않아 중앙의 노동당과 통합하게 될 스코틀랜드 노동자대표위원회가 1만 4878표를 얻었으며, 사회민주연맹과 무소속 사회주의자들이 2만 4473표를 얻었고, 주로 광원들인 ‘자-노 제휴파’ 후보들이 10만 표쯤 얻었다. 전체 투표자는 600만 명이 조금 안 됐다.58
자본가 정당들은 오랫동안 의회를 독점해 온 자신들의 지배력이 위험해졌다고 느꼈다. 보수당 지도자 밸푸어는 이를 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런던에서 폭동을 불러일으키고 베를린에서 사회주의를 진전시킨 운동의 반향”이라고 비난했다.59 문명을 구하기 위한 사회주의반대연합이 급조됐고, 〈데일리 익스프레스〉는 “사회주의 때문에 미쳐 버린 16세 소년의 자살”, “하인들의 불만을 부추기는 부엌 사회주의” 따위의 소름 끼치는 기사들을 실었다. 케임브리지의 학생들은 사회주의의 확산을 저지하고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을 방해하기 위해 키어 하디를 납치하려 했다. 그러나 하디와 아주 비슷한 사람을 납치하는 데 그쳤다.60
레드 콤플렉스는 노동당 역사에서 계속해서 나타난 특징이므로 단순한 광기나 선전 공세로만 치부할 수 없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일부 지배계급은 “노동당의 허장성세 위협 뒤에 진짜 위험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숨어 있다”고 두려워했다.61 기업주들의 언론이 노동계급을 두려워한 것은 옳았지만, 노동당이 정말로 혁명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믿은 것은 어리석었다. 이미 1902년에 노동당 당대회 의장은 “우리의 정책은 반정부 선동의 원천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62
사실 1906년의 성공 덕분에 개혁주의의 논리는 중요한 진일보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진전이 있을 때마다 자본주의와의 정치적 타협은 이론에 그치지 않고 더욱 현실이 됐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의회였다.
처음에는 우리 의원들이 “유럽 최고의 연단”인 영국 의회를 시도 때도 없이 이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연단을 이용하기를 꺼렸고 오히려 “의회의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 의원들이 자신을 뒷받침하는 운동의 지도자나 격려자, 통역가나 말 못하는 대중의 대변자를 자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 그러나 우리는 …… 뛰어난 연설가들이 정치인 흉내 내려고 애쓰다가 무기력한 수다쟁이로 전락하는 광경을 …… 목격했다.63
‘요크셔의 로베스피에르’라는 별명을 가진 스노든은 다음과 같이 썼다.
새 의회의 초기가 …… 뚜렷하게 기억난다. …… 고참 의원들은 신참들이 조바심 내는 것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처음 의회에 들어왔을 때는 좋은 일을 해내겠다는 진지한 열정이 넘쳤다고 했다. 그러나 점차 좌절하기 시작했고, 노동당 의원들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그들은 이 거추장스런 기구를 합리적으로 개혁하려는 희망을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64
이런 무력감이야말로 의회의 가장 음험한 영향력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강력한 부패 요인은 “유럽에서 가장 배타적인 클럽”의 매혹적인 분위기였다. 철도노조 지도자인 J H 토머스는 순식간에 그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의원이 된 직후부터 나는 의회 전체의 위대함과 관대함을 높이 평가했다.”65 계급의식을 내팽개친 정당에서는 이런 ‘관대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고, 그에 비해 노동자들은 그 정당이 보기에는 안타깝게도 착취자들에게 이런저런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의회에는
속물근성도 없었고, 편 가르기도 없었다. 의회에서는 소득이 아니라 성격과 두뇌에 따라 사람을 환대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의회처럼 노동조합운동에서도 등급이 쉽게 무시되기를 바랐다.66
토머스 같은 골수 우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불공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군수 공장 직장위원이자 클라이드노동자위원회 지도자로서 전시의 산업 노예제도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글래스고에서 추방됐고, 1922년에 재커바이트•처럼 공포의 ‘클라이드 여단’••을 이끌고 웨스트민스터[국회의사당] 경내를 무단 침입한 데이비드 커크우드의 말은 어떤가?
• [옮긴이] Jacobite, 1688년 명예혁명 후 망명한 스튜어트 왕가를 복위시키고자 잉글랜드를 침입한 세력.
•• [옮긴이] 클라이드사이드의 전투적 투사 출신 국회의원들을 부르는 별명.
의회는 이상한 곳이었다. 나에게는 정말이지 경이로운 곳이었다. 나는 가끔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과 내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율을 느꼈다. 더 이상한 것은 그들이 모두 아주 소박하고 꾸밈없고 친절한 사람들인 점이었다. 의회에서 속물근성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커크우드가 보너 로[보수당 정치인]의 실업 대책을 격렬하게 비판했을 때였다. 로는 복도에서 커크우드와 마주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당신네 클라이드 친구들 때문에 아주 괴로웠네. 그래도 글래스고 사투리를 들으니 좋더구먼. 이 곰팡내 나는 곳에서 마치 스코틀랜드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네.” 커크우드는 “그런 인사말을 듣고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67 정말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당은 무장해제가 됐다. 스노든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사람들은 노동당 의원들이 모든 인습을 완전히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동당 의원들이 보수당 의원들보다 [의회의 ― 지은이] 관행을 더 잘 지키는 것을 보면 약간 우스울 정도였다.68
자유당 의원이 노동당 의원으로 오해받지 않으려고 중산모[비단 모자]가 아닌 중절모를 쓰고 의회에 참석한다는 소문도 있었다.69
의회가 노동당 의원들을 타락시킨 것은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이 잡으려던 권력이 의회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타락한 것이다.
당대회 길들이기
노동당 의원들이 처음으로 한 일은 노동당 의원단을 구성한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매켄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노동당’은 의회 밖의 당 조직만을 일컫는 말이다. 의회 안에는 독자적 조직인 ‘노동당 의원단’이 따로 있고, 노동당은 의원단을 지원할 뿐이다.”70
노동당의 역사는 대부분 의원단에 집중된 당 지도부와 의회 밖 지지자들 사이의 주도권 다툼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개혁주의 안에는 계급의 염원과 국민의 정치라는 두 축이 나란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노동당 의원단은 처음 구성될 때부터 당원들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를 강력하게 천명했다.
개혁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교조적이라고 비웃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논리야말로 가혹한 주인이다. 이제 이 주인은 의원들을 의회에 진출시킨 활동가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권력자들을 지켜보기나 하라고 명령했다. 의원들의 활동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대인 당대회가 선거 승리의 첫 번째 피해자가 됐다.
노동자대표위원회는 1906년에 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듬해 노동당 집행위원회가 당대회에 제출하려 한 결의안 초안에 따르면, 당대회 결의안은 “의원단이 타당하다고 여길 만한 행동 방침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당대회 때 나온 의견들을 반영”할 수만 있었다.71 그러나 이것은 너무 노골적이었다. 어떤 사람이 독일 수정주의의 대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게 말했듯이, “사람들은 이런 것을 굳이 말로 하지 않고 그냥 실천에 옮긴다.”72 결국 그 결의안은 논쟁에 부쳐지지 않았다. 독립노동당 소속 노동조합원인 피트 쿠란은 집행위원회 스스로 결의안을 수정하라고 주장했다.
최종 자구 수정 과정에서 공격적인 문구가 삭제되고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당대회 결정 사항의 ― 지은이] 실행 시기와 방법은 의원단과 중앙집행위원회에 위임한다.”73 그래서 의원단은 원하던 것을 모두 얻었다.
노동당이 순식간에 배신한 것을 생각하면, 당대회에서 벌어진 논쟁은 놀라운 일이었다. 금속노조 대의원은 “의원들이 전달받은 지침을 무시할 뿐 아니라 당대회의 명시적 요청과 반대로 표결하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의원들이 의원들의 그런 행동을 문제 삼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연합• 대의원도 그 말에 동의했다. “의원단이 아니라 당대회가 의회 사업을 결정해야 한다.”74 그러나 늘 그렇듯이 노조 관료들은 자신의 정치적 형제들을 지지했고, 그 결의안은 64만 2000표 대 25만 2000표로 통과됐다.
• [옮긴이] 1929년 운수일반노조에 통합된 노동조합.
1907년의 논쟁 때문에 노동당 의원단은 의회 밖 기구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할 수밖에 없었다. 스노든이 내린 결론은 노골적이었다.
당대회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은 당대회 결의문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과감한 개혁 프로그램을 요약한 수많은 결의문이 당대회에서 통과됐지만, 실제로 결과를 낳은 것은 거의 없었다. 당대회가 말하면, 말하게 내버려 둬라. 당대회 결의문을 최종 처리하는 것은 정부다(노동당 정부도 포함된다). …… 노동당의 평당원들은 이제 그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당대회 결의문이 쓸모없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다.75
60년 뒤 해럴드 윌슨과 제임스 캘러헌이 이끈 노동당 정부의 경험은 스노든의 말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줬다.
당대회의 종속적 지위가 승인된 뒤에는 의회가 정말로 대중을 대표한다는 생각과 변화를 실행할 만한 공간은 의회뿐이라는 생각도 받아들여졌다. 맥도널드는 이것을 간명하게 요약해, “사회주의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염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유권자들 ― 지은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76
1907년 당대회 직후에 헨더슨은 의원들이 당대회에 책임지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당대회의 결정 사항들을 정말로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의회에서 내가 직접 대표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 우리의 이런 처지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77 ‘유권자의 이익’이라는 생각은 ‘국민의 이익’이라는 생각만큼이나 그럴싸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본가를 희생시켜야만 이렇다 할 진보를 이룰 수 있다. 거꾸로, 자본가는 자신이 착취하는 사람들의 땀과 노고로만 살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와 자본가를 한꺼번에 모두 대표할 수는 없다. 자신을 지지한 노동계급 유권자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기를 정말로 바라는 의원이라면 의회가 속임수라는 것, 사회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