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원주는 1>, 2>, 3>으로 옮긴이주는 1, 2, 3으로 표시했다.
· 책에 나오는 해설은 모두 옮긴이가 덧붙인 것이다.
머리말
4, 5년 전1 가까운 동료들의 권유로 나는 자서전 쓰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시작하여 첫 페이지를 다 쓰기도 전에 뭄바이2에 폭동3이 일어나 일은 중단되었다. 그 뒤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 생겨나 결국 나는 예라브다 감옥에 갇혔다.4 그곳에 함께 갇힌 제람다스 씨가 나에게 만사를 제쳐두고 자서전을 완성하라고 권했다. 나는 이미 스스로 연구 계획5을 짰기 때문에, 그것을 마칠 때까지 다른 일은 할 수 없다고 답했다. 내가 만일 예라브다에서 나의 형기를 다 치렀더라면 자서전을 완성할 수 있었으리라. 왜냐하면 그 과업을 완성하기 위한 한 해가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석방되었다.6
최근 아난드 선생7이 다시 자서전 쓰기를 권했다. 나는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사티아그라하8의 역사를 완성했으므로 《나바지반》지에 자서전을 쓰려고 했다. 선생은 내가 독립된 책으로 출판하기 바랐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나는 매주 한 장(章)씩 쓸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매주 《나바지반》을 위해 무언가 써야 한다. 그게 자서전이어서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선생도 내게 동의해 지금 나는 부지런히 쓰고 있다.
그러나 한 경건한 친구가 의문을 품고 나의 침묵일9에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서양의 특유한 관행이다. 서양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 동양에서 자서전을 쓴 사람은 없다. 게다가 무엇을 쓴다는 것인가? 자네가 오늘 원칙으로 주장한 것을 내일 부정한다면, 또는 오늘의 계획을 앞으로 바꾼다면, 자네가 입이나 글로 한 말을 믿고 행동한 사람들이 잘못된 길을 갈 것 같지 않은가? 따라서 당분간 자서전 같은 것은 쓰지 않는 게 좋지 않겠는가?”
그 말은 어느 정도 옳았다. 그러나 정말로 자서전을 쓰는 것이 내 목적은 아니다. 나는 단지 내가 진실을 추구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삶이 그 추구들로 이루어졌기에 그 이야기가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갖출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오로지 나의 진실 추구에 대한 것이라 해도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만일 그 진실 추구를 연결해 설명하면 독자들에게도 유익하리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렇게 믿는다고 자부하고 싶다.
정치 분야에서 내 진실 추구는 지금 인도만이 아니라 ‘문명’ 세계에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나에게 그것은 별 가치가 없다. 따라서 그 일로 나에게 주어진 ‘마하트마’10라는 칭호는 더욱 가치가 없다. 그 칭호는 종종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정말 이야기하려는 것은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정신 분야의 추구다. 내가 정치 분야에서 활동한 힘은 거기에서 나왔다. 그 추구가 정말 정신적인 것이라면 자찬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 그것으로 나의 겸손만이 더해질 뿐이다. 과거를 돌이켜 반성하면 할수록, 나의 한계를 더욱더 생생하게 느낄 뿐이다.
내가 이루고자 원한 것, 지난 30년간 이루고자 싸우고 애쓴 것은 자아실현이고, 신11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며, 구원1〉,12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이 목표에 이르고자 살아 움직이고 존재한다. 말이나 글로 한 모든 것, 그리고 정치 분야에서 한 모든 시도는 그 목표를 향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가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의 진실 추구는 은밀하게 행해진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나는 이 사실이 그 진실 추구의 정신적 가치를 손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자신과 신만이 아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다. 내가 말하려는 진실 추구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적이고, 더욱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종교의 본질은 도덕이기 때문이다.13
여기서 종교에 대해서는 노인이나 아이들도 알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만일 내가 그것을 냉정하고 소박한 정신으로 이야기하면, 다른 많은 진실 추구자들이 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을 얻게 되리라. 나는 이 추구에서 완벽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과학자가 최고의 정확성과 신중함과 정밀함으로 실험을 행하면서도 그 결론이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고 언제나 열린 마음을 유지하는 것 이상으로 나도 내 진실 추구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깊은 자기성찰을 했고, 나 자신을 철저히 탐색했으며, 모든 심리 상태를 조사하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는 내 결론이 완전하다거나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정말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당시 나에게 절대로 옳다고 생각되고 완전하게 보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취사선택의 과정을 밟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동했다. 따라서 나의 행동이 이성과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는 본래의 결론을 굳게 지켜야 한다.
내가 오직 학문적 원리를 토의하려 했다면, 나는 분명히 자서전을 쓰려고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내 목적은 이러한 원리의 여러 가지 실제 적용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이어서 내가 쓰려고 한 책을 ‘나의 진실 추구 이야기’라고 했다. 그 속에는 물론 진실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비폭력이나 금욕 등과 같은 행위 원칙에 대한 추구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 진실은 최고 원리로서 다른 많은 원리를 포함한다. 이 진실이란 말의 진실만이 아니라 생각의 진실이고, 우리들 관념의 상대적 진실만이 아니라 절대적 진실, 영원한 원칙, 즉 신이다.
신에 대해서는 수많은 정의가 있다. 왜냐하면 신은 무한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나타남은 나를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압도하며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러나 나는 신을 진실한 것으로만 받든다. 나는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그를 찾고 있다. 신을 계속 찾기 위해 나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희생할 각오다. 설령 그 희생이 나 자신의 생명이라 해도 그것을 기꺼이 바치겠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절대적 진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내가 이해하는 상대적 진실을 굳게 잡을 수밖에 없다. 그 상대적 진실이 당분간은 나의 등대고, 나의 방패일 수밖에 없다. 비록 이 길이 험하고 좁으며 면도날처럼 날카롭다 해도 나에게는 그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쉽다. 나의 히말라야 산맥 같은 실수14조차도 나에게 시시했던 이유는 내가 이 길을 엄격하게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 길은 내가 실망에 빠지지 않도록 구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빛에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 나아감 속에서 나는 종종 절대적 진실인 신의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신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확신이 점차 커져왔다. 누구나 원한다면 내게 이 확신이 어떻게 커져왔는지 알아보기 바란다.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나와 함께 추구하고 또한 나와 확신을 나누기 바란다.
나에게 가능한 것이면 어린이에게도 가능하다는 확신이 더욱 커져왔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은 어려운 만큼 쉽기도 하다. 교만한 어른에게는 참으로 불가능하게 보여도, 순수한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쉽다.
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먼지보다 겸손해야 한다. 세상은 먼지를 발밑에 짓밟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먼지에게조차 짓밟힐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는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바시슈다와 비슈바미트라15의 대화는 이를 명백하게 밝혀준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이를 충분히 보여준다.
이 책에 쓴 내용 중에 조금이라도 내 자랑을 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면 나의 탐구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고, 내가 얼핏 보았다는 것도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나 같은 사람 몇백 명이 없어지더라도 진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같은 잘못 많은 인간을 심판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진실의 기준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이 책에 흩어져 있는 권고를 권위로 간주하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이 진실 추구 이야기는 하나의 본보기로 간주되어야 하고, 각자는 자신만의 의도와 능력에 따라 스스로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한정된 범위에서만 이 본보기는 참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꼭 해야 할 이야기라면 그것이 아무리 추악한 것이라도 나는 숨기거나 줄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모든 단점과 잘못을 독자들에게 모두 알리고 싶다.
내 목표는 사티아그라하의 과학을 통해 내가 추구하려는 것을 설명하는 데 있지, 내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말하려는 데 있지 않다. 나 자신을 판단함에 있어 나는 진실에 대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엄격해야 하고, 남들도 그렇게 하기를 바란다. 그런 기준에 의해 나 자신을 판단할 때, 나는 수르다스16처럼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나처럼 사악하고 못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창조주에게 버림받을 만큼
나에게는 믿음이 없구나.
왜냐하면 창조주가 내 생명의 모든 호흡을 지배하고, 나를 낳았음을 알고 있는데, 그로부터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음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나를 붙들어 그에게 가지 못하게 하고 그로부터 멀리 있게 하는 것이 나쁜 열정임을 알고 있다. 게다가 나는 아직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서 머리말을 끝내고 다음 장부터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1925년 11월 26일
사바르마티 아슈람
M. K. 간디
1. 출생과 집안
간디 집안은 상인 계급1에 속했고, 본래는 식료품상인2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증조부로부터 3대에 걸쳐 카티아와르3 지방 여러 나라4의 수상5을 지냈다. 나의 할아버지 우탐찬드 간디, 통칭 오타 간디는 강직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수상이었던 그는 정치적 음모로 인해 포르반다르6에서 쫓겨나 주나가르7로 피난을 갔다. 거기서 그는 국왕에게 왼손으로 인사를 했다. 이 너무나 무례한 태도를 보고 누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오른손은 이미 포르반다르에서 서약했기 때문이다.”
오타 간디는 첫 아내가 죽자 재혼을 했다. 첫 아내에게서 아들 넷, 둘째 아내에게서 아들 둘이 태어났다. 나는 어렸을 때 오타 간디의 아들들을 같은 어머니가 낳지 않았음을 느끼지도 알지도 못했다. 이 여섯 형제의 다섯째가 카람찬드 간디, 통칭 카바 간디였고, 여섯째가 툴시다스 간디였다. 두 사람은 차례로 포르반다르에서 수상을 지냈다.8
카바 간디가 내 아버지였다. 그는 라자스다니크 조정9의 고문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그것은 당시 부족장과 부족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는 매우 강력한 조직이었다. 한동안 그는 라지코트에서, 이어 반카네르10에서 수상을 지냈다. 그가 죽자 라지코트는 그에게 연금을 지급했다.
카바 간디는 아내들이 계속 죽어 네 번 결혼했다.11 초혼과 재혼에서 두 딸이 태어났다. 마지막 아내인 푸틀리바이 사이에 딸 하나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는 그 막내였다. 내 아버지는 집안사람들을 사랑했고, 성실하고 용감하며 관대했으나 성질이 급했다. 그는 육체적 쾌락에 어느 정도는 빠진 것 같다. 마흔이 넘어 네 번째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12
그는 정직했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매우 공정한 사람으로 유명했다. 나라에 대한 충성도 유명했다. 아버지가 모신 라지코트 왕인 다코레 사헤브13를 영국인 주재관이 모독하자 아버지는 엄중하게 항의했다. 분노한 주재관이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거부했고 그 때문에 몇 시간이나 구속을 당했다. 아버지는 철석같아서 주재관은 결국 그를 석방해야 했다.
아버지는 재산 축재의 야망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거의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교육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체험으로 배웠다. 기껏해야 구자라트어14 교본 제5권을 읽었을 정도였다. 역사와 지리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실무에 대한 그의 풍부한 경험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종교적 수련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힌두교도들이 종종 사원을 찾아가 설교를 들어서 얻는 정도의 신앙은 가졌다. 만년에 그는 집안과 친한 유식한 브라만의 권고로 《기타》15를 읽기 시작해 매일 예배 시간에 몇 구절씩 큰 소리로 읽곤 했다.
내 기억에 뚜렷하게 남은 어머니의 인상은 성스러움이다. 그녀의 믿음은 깊었다. 매일 기도를 하지 않고서는 밥도 먹지 않았다. 바이슈나바16 사원인 하벨리17에 가는 것이 일과의 하나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차투르마스1>를 빠진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가장 엄격한 맹세를 하고 그것을 철저히 지켰다.18
병이 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찬드라야나2>를 엄수하는 동안 병이 났지만 중단하지 않았다. 두세 끼 계속 단식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투르마스 때면 하루 한 끼 먹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떤 차투르마스 때는 그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하루 걸러 단식을 했다.
또 다른 차투르마스 때는 해를 보기 전에는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 때 우리 아이들은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어머니에게 해가 떴음을 알려드리려고 기다렸다. 우기의 정점에선 해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자주 있음을 누구나 안다. 그러다 별안간 해가 나타나면 우리는 어머니에게 뛰어가서 그것을 알리곤 했던 일이 기억난다. 그러면 어머니는 자기 눈으로 그것을 보려고 뛰어나왔지만, 도망자 해는 곧 사라져버려 어머니가 식사를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즐거이 말했다. “괜찮아. 신은 오늘 아침 내가 먹기를 원치 않으셔.”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다시 단식을 했다.
내 어머니는 똑똑했다. 나라의 모든 일을 잘 알았고, 조정 부인들은 그녀의 지성을 높이 평가했다. 나는 종종 아이라는 특권으로 그녀를 따라갔는데, 어머니가 다코레 사헤브의 홀어머니와 자주 토론한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러한 부모 사이에서 나는 1869년 10월 2일 포르반다르(수다마푸리라고도 했다)에서 태어났다.19 나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갔던 생각이 난다. 구구단을 외는 것이 힘들었다. 그 시절 다른 것보다도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선생을 이런저런 별명으로 부르기를 배웠던 게 기억난다는 건 내 지능이 낮았고 기억력이 미숙했음을 잘 보여준다.
해설
《간디 자서전》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인도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도(印度)란 India를 중국에서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을 우리말로 그대로 읽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인디아’라고 읽는 것이 옳겠으나 이미 외래어가 되었으니 인도라고 부르기로 한다. 인도는 약 316만 제곱킬로미터 넓이로 남한의 30배가 넘고, 인구도 10억을 넘어 남한의 20배가 넘는 큰 나라다. 그러니 지형과 기후, 사람과 언어, 종교와 문화 등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흔히 인도는 종교적으로 심오한 신비성을 갖는 나라로 알려졌으나, 이는 16세기 이후 인도를 침략한 서양인이 만든 고정관념(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런 생각은 전통적으로 불교가 강했던 한반도에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를 막연히 생각하는 경우에도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불교가 13세기 후 소멸했고, 한국 불교는 그전에 중국에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대부분 힌두교를 믿은 인도인들은 13세기 이후 이슬람교도들의 지배를 받다가, 영국이 1600년에 설립한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았고, 1857년 반란20에 의해 1858년부터 영국 정부가 직접 지배하는 인도 제국이 되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은 이때부터 전개되기 시작해 1947년 독립하면서 파키스탄과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힌두교는 교조도 교단도 경전도 없는 특이한 종교다. 그것을 유지해온 것은 브라만이라는 최고 카스트로서 힌두교의 핵심인 카스트 제도와 운명관을 형성했다. 카스트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4계급, 즉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라는 구분과는 달리 몇십 개로 나뉜다. 카스트는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은 그 운명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힌두교의 핵심이다.
간디는 1869년에 태어났다. 그때부터 1893년 남아프리카로 간 스물네 살 때까지가 《간디 자서전》 1부 내용이다. 그사이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간디가 인도 사회의 병폐로 비판한 조혼(간디 자신은 열세 살에 결혼했으나 법적으로는 열 살부터 가능했고 1891년에 열두 살부터 가능하도록 한 법이 만들어졌다)과 열아홉 살에서 스물두 살까지의 영국 유학이다.
간디가 열여섯 살이 된 1885년 영국인이 인도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뒤에 간디가 이끌게 되는 이 단체는 처음에는 의례적인 영국식 인도 신사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간디도 남아프리카에 갈 무렵까지 유럽의 복장과 생활 양식을 즐기는 식민지의 엘리트 지식인 청소년이었다.
간디의 정신분석과 여성성
간디의 정신분석으로는 에릭 에릭슨의 《간디의 진실》(1969, 노톤사)이 유명하다. 에릭슨의 제자인 수디르 카카르는 《친밀한 관계: 인도 섹슈얼리티 탐구》(1990, 시카고대학출판부)에서 간디의 정신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카카르에 의하면 간디는 아버지가 성에 지나치게 몰두했다고 의심했고, 어머니를 희생자로 보았으며, 그래서 그 후 나이 든 사람이 어린 소녀와 결혼하는 것을 반종교적이라고 배척했다고 한다. 간디는 물론 그가 존경한 톨스토이 등은 모두 성욕에 반발했는데 이 점도 부모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나아가 여성주의자였던 간디는 남녀의 대립을 해소하려면 여성에게 가해진 불평등을 제거할 게 아니라 남녀관계에서 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보았다고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성의 성욕을 부정하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이상적으로 보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나아가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도 여성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19세기 말 독특한 힌두교파에서 자란 간디에게 그런 여성관이 존재했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고 볼 여지는 분명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폭력=남성, 비폭력=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의 반복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간디의 《간디 자서전》 등 그의 글에서는 그러한 고정관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와 더욱 가까워 보인다는 건 사실이나, 조국에 대한 사랑이나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 등에서는 분명히 남성적인 용기를 대단히 중시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사실이다. 스스로도 그처럼 가족에 대한 남성적 권위주의가 과도했음을 고백하고 있고, 그런 가족적 차원의 문제점을 극복한 뒤에도(자녀의 경우 열여섯 살이 되면 간섭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여전히 권위주의에 집착하는 남성적 측면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실 간디의 경우 남성성이니 여성성이니 하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므로 나는 앞서 소개한 정신분석의 효용성에 의문을 갖는다. 간디가 성에 대해 가진 태도를 어떻게 평가하든 자유나, 가령 한국인이나 서양인 또는 인도인의 과도한 성적 관심은 간디를 들먹이지 않아도 문제가 아닐까?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포르반다르에서 출생.
1876년(7세) 라지코트로 이사해 초등학교에 전학.
1881년(12세) 중학교에 입학.
1882년(13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결혼.
1887년(18세) 대학입학자격시험 합격.
1888년(19세) 9월 4일 영국 런던 인너 템플에 유학.
1891년(22세) 변호사 자격을 얻고 인도로 귀국.
뭄바이와 라지코트에서 변호사 사무실 개업.
2. 어린 시절
아버지가 라자스다니크 조정에 들어가려고 포르반다르를 떠나 라지코트로 간 것은 내가 일곱 살 때였다. 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나를 가르친 교사들의 이름과 특성을 나는 잘 기억한다. 포르반다르에서처럼 여기서도 공부는 그저 그랬다. 그저 보통 학생이었다. 그 학교 다음으로 간 곳은 교외 학교였다. 다시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벌써 열두 살이었다.
그 짧은 기간에 나는 교사나 급우들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매우 부끄럼이 많았고 어울리는 걸 싫어했다. 책과 수업이 유일한 친구였다. 시간이 되면 학교에 갔고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달려오는 것이 나날의 버릇이었다. 나는 정말 달려서 돌아왔다.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누가 놀릴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시험 때 기록할 만한 사건이 생겼다. 장학관 길스 씨가 검열을 나왔다. 그는 다섯 단어를 받아쓰기 문제로 냈다. 그중 하나가 ‘솥’이었다. 나는 틀리게 썼다. 교사가 신발 끝으로 내게 눈치를 주려 했으나,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내가 옆 사람 석판을 보고 그 철자를 베끼길 원했으나,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교사가 거기에 서 있는 이유가 베끼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보니 나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모든 단어를 바르게 썼다. 오로지 나만 어리석었다. 그 뒤 교사는 내게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었음을 알려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끝끝내 ‘베끼는’ 기술을 익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교사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약해지지는 않았다. 나는 천성적으로 손윗사람의 잘못에는 눈이 어두웠다. 그 뒤 나는 그 교사의 수많은 실수를 알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여전했다. 어른의 명령에는 복종해야 하며, 그들의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언제나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대체로 교과서 외의 독서에는 무관심했다. 수업을 잘하려 한 것은 교사의 꾸중을 듣기 싫고 그를 속이기 싫어서였다. 그래서 수업을 하기는 했지만 가끔은 하기 싫었다. 이처럼 수업조차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다른 독서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연히 아버지가 산 책이 눈에 띄었다. 《슈라바나의 효성에 대한 희곡》21이었다. 나는 그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그 무렵 그 희곡 그림의 순회 전시회가 있었다. 내가 본 그림 중 하나는 슈라바나가 눈먼 부모를 멜빵으로 업고 순례를 떠나는 것이었다. 그 책과 그림은 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기 네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가 있다.” 슈라바나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부모의 슬픈 울음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새롭다. 그 끓어오르는 곡조가 나를 깊이 감동시켰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사준 손풍금으로 그 곡조를 연주했다.
다른 희곡과 관련된 비슷한 사건도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어느 극단의 연극을 보았다. 그 연극 <하리슈찬드라>22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늘 보도록 허락받을 수 있을까? 그것에 사로잡혔기에 나는 스스로 하리슈찬드라를 몇 번이나 연기해야 했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 “왜 모두 하리슈찬드라처럼 진실23하지 못할까?”라고 물었다. 진실에 따라야 하고, 하리슈찬드라가 겪은 모든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 불어넣어진 하나의 이상이었다. 나는 하리슈찬드라의 이야기를 글자 그대로 믿었다.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자주 눈물이 났다. 지금의 내 상식으로 하리슈찬드라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하리슈찬드라와 슈라바나는 나에게 살아 있는 실재이고, 지금 그 희곡들을 다시 읽는다면 과거처럼 감동할 것임에 틀림없다.
3. 조혼
이 장을 쓰지 않기를 너무나도 바랐다. 따라서 이야기를 하면서 수없이 쓴 잔을 마시게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하겠다고 선언한 이상 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열세 살에 결혼했다고 기록해야 함은 뼈아픈 의무다. 지금 내가 돌보는 같은 나이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또 나 자신의 결혼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동정하면서, 나와 같은 운명을 피한 그들을 축하하고 싶어진다. 어떤 도덕이론도 그런 터무니없는 조혼을 옳다고 할 수 없다.
독자는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나는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했다. 카티아와르에는 두 가지 다른 의식이 있다. 결혼과 약혼이다. 약혼은 부모들이 소년 소녀를 결혼시키고자 미리 약속하는 것으로 깨뜨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소년이 죽어도 소녀가 과부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하게 부모들의 약속이지 아이들과는 무관하다.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는 경우도 자주 있다.
나는 몰랐지만 아마도 세 번쯤 약혼을 한 것 같다. 나와 약혼한 두 소녀는 차례로 죽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나는 세 번 약혼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 약혼은 내가 일곱 살 때 했던 것으로 희미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미리 통지받은 기억은 없다. 이 장에서 나는 분명하게 기억하는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독자는 우리가 3형제였음을 기억하리라. 맏형24은 이미 결혼했다. 어른들은 나보다 두세 살 위인 둘째 형25과 아마도 한 살 위였던 사촌형을 나와 함께 결혼시키려고 결정했다. 그렇게 하는 데 우리의 희망은 물론 행복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편의와 돈 문제 때문이었다.
힌두교도에게 결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신랑 신부의 부모들은 그 때문에 파산할 수도 있다. 그들은 재산과 시간을 낭비한다. 옷과 장식품을 만들고 식사 예산을 준비하는 데 몇 달이 걸린다. 양가는 서로를 누르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자 한다. 여자들은 목소리가 좋든 좋지 않든 간에 목이 쉬도록 노래해 병들기도 하고, 이웃의 평화를 방해한다. 이웃은 잔치의 부산물인 모든 소란, 쓰레기, 찌꺼기를 조용히 참는다. 그들도 언젠가 같은 짓을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이 성가신 일을 한 번에 치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경비는 줄이면서도 식을 성대하게 치를 수 있었다. 세 번에 쓸 돈을 한 번에 쓰면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삼촌은 나이가 많았고, 우리는 그들이 결혼시켜야 할 마지막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평생의 가장 좋을 때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세 쌍의 합동 결혼식이 계획되었고, 앞서 말한 대로 준비에 몇 달이 걸렸다.
장차 다가올 일을 우리가 알아챈 것은 오로지 그 준비를 통해서였다. 당시 그것은 나에게 좋은 옷을 입고 북을 치면서 결혼식을 올리고, 풍성한 식사를 하고 함께 놀 초면26의 소녀를 만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성적 욕망은 그 뒤에 왔다. 이제 기록할 만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 수치심 때문에 커튼을 내려야겠다. 그 몇 가지는 뒤에 쓰겠다. 그러나 그것들도 나의 진실 추구 이야기를 쓰면서 항상 마음속에 간직한 중심 사상과는 무관하다.
여하튼 나와 형은 라지코트에서 포르반다르로 왔다. 마지막 연극을 향한 서막으로서 재미있는 일이 몇 가지 있었다. 가령 온몸에 심황(深黃) 가루 반죽을 바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아버지는 수상이었지만 사실은 종에 불과했다. 다코레 사헤브의 총애를 받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최후 순간까지 아버지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놓아주면서 아버지를 위해 특별 마차를 준비시키고 여행을 이틀로 줄이도록 명했다.
그러나 운명은 달리 움직였다. 포르반다르는 라지코트에서 120마일이었고, 달구지로 닷새 길이었다. 아버지는 그 거리를 사흘에 달렸지만 마지막 날 마차가 뒤집혀 엄청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도착했다. 결혼식에 대한 아버지와 우리의 흥미는 반감되었으나, 예정대로 치러야 했다. 결혼식 날짜를 어떻게 변경하겠는가? 그러나 결혼식에 대한 아이다운 즐거움에 취한 나는 아버지가 부상당한 슬픔을 잊었다.
나는 부모를 따랐으나, 그 못지않게 몸이 요구하는 열정에도 따랐다. 부모를 섬기려면 모든 행복과 쾌락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쾌락 욕구에 대한 천벌이라도 되는 듯한 일이 생겨 지금까지 늘 마음에 걸리는데, 그 이야기는 뒤에 하겠다.
니슈쿨라난드는 이렇게 노래한다. “욕망 자체를 버리지 않으면 욕망의 대상을 버리고자 아무리 노력해도 수포로 돌아간다.” 이 노래를 부를 때나 들을 때마다 이 쓰리고 괴로운 사건이 기억에 살아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아버지는 부상에도 아랑곳없이 기쁨에 찬 얼굴로 결혼식에 끝까지 참석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결혼식의 성가신 절차를 밟으려고 앉아 있던 자리가 생각난다. 당시 나는 언젠가 아이일 때 결혼시킨 아버지를 끔찍하게 비판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옳고 당연했으며 즐겁게 보였다. 나 자신도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당시 아버지가 한 모든 일은 비난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그 일들이 생생하게 회상된다.
그때 우리는 결혼식장 윗자리에 앉았고, 샤프타파디3>를 했으며, 신혼부부가 달콤한 칸사르4>를 서로 입에 넣어주고, 함께 살기 시작했던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오! 그 첫날밤. 천진난만한 두 아이가 철없이 인생이라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형수가 첫날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세히 가르쳐주었다. 아내에게는 누가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그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없고,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다.
독자는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기조차 힘들었으리라고 확신하리라. 정말 우리는 부끄러웠다. 그녀에게 어떻게 말하고 무엇을 말할까? 가르침은 소용이 없었다. 그런 일에는 사실 어떤 가르침도 불필요하다. 본능의 인상이 너무 강하여 모든 가르침은 무색하다. 우리는 차차 서로를 알게 되었고,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동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남편으로서 권위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4. 남편 노릇
내가 결혼할 무렵, 부부애, 절약, 조혼 등의 문제를 다룬 1파이스나 1파이(정확한 값은 잊었다)짜리 작은 팸플릿이 간행되었다. 나는 그런 것이 눈에 띄는 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그 후 내가 싫어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만 실천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나는 아내에게 평생 신의를 지키는 것이 남편의 의무임을 그런 책에서 배웠고, 그것은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졌다. 게다가 진실을 향한 열정은 내가 타고난 것이어서 그녀를 거짓으로 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어린 나이에는 배신의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신의의 교훈이 곤란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내가 아내에게 신의를 맹세하면 그녀도 나에게 신의를 맹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나를 질투하는 남편으로 만들었다. 아내의 의무는 아내에게 신의를 요구하는 나의 권리로 쉽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켜져야 한다면, 나는 그 권리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아내에 대한 믿음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었으나, 질투는 이유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아내의 거동을 살펴야 했다. 따라서 내 허락 없이 그녀는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그것이 우리 사이에 쓰라린 싸움의 씨를 뿌렸다. 간섭이란 사실 일종의 감금이다. 그리고 카스투르바이27는 그런 것을 참을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 어디에나 마음대로 갔다. 내가 제재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녀는 멋대로 행동했고, 나는 갈수록 더 곤란해졌다. 그래서 서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어린 부부의 일상이 되었다. 어떤 속임수도 없는 소녀가 사원에 가거나 친구 집을 방문하는 것까지 구속받고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나에게 그녀를 구속할 권리가 있다면, 그녀도 같은 권리를 갖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남편으로서 권위를 세우는 것에 급급했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는 우리 생활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의 경우 엄격함은 사랑에 근거했다. 나는 아내를 이상적인 아내로 만들고자 했다. 내 욕심은 그녀가 순결한 생활을 하고, 내가 배운 것을 그녀도 배우며, 그녀의 생활과 생각을 나와 같이하도록 만들고자 한 것이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그런 욕심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그녀는 글자를 몰랐다. 그녀의 천성은 단순했고 독립적이며 끈기가 있었고, 적어도 내게는 말수가 적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지를 걱정하지 않았고 나의 공부에 자극을 받아 공부를 하고 싶어 한 적도 없었다. 따라서 나의 욕심은 정말 일방적인 것이었다. 나의 열정은 한 여인에게 완전히 집중되었고, 그것이 상호적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설령 상호적이지는 못해도 최소한 한쪽에는 적극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전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았다.
그녀에 대한 정욕의 집착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그녀를 생각했고, 밤이 오면 우리가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실없는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그녀는 자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정욕의 집착과 함께 의무 수행에 대한 염원이 없었다면 나는 병들거나 일찍 죽었거나 성가신 존재로 전락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침마다 약속된 일과를 마쳐야 했고,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수많은 함정에서 나를 건져준 것은 이 마지막 것이었다.
카스투르바이가 글자를 몰랐음을 앞에서 말했다. 나는 정말 그녀에게 가르치고 싶었지만 정욕에 빠졌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먼저 그녀를 가르치려면 그녀의 뜻을 거슬러야 했고, 게다가 밤에 해야 했다. 나는 어른들 앞에서 그녀와 만날 수 없었고, 더욱이 말을 할 수 없었다. 카티아와르에서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그곳 특유의 쓸모없고 야만적인 푸르다, 즉 베일로 얼굴을 가리는 풍습이 있었다.
사정이 그렇게 나빴다. 따라서 어린 시절에 카스투르바이를 가르치려던 나의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정욕의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해 거의 여유가 없었다. 가정교사를 두어 그녀를 가르치려고 한 것도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그 결과 카스투르바이는 지금 간단한 편지를 겨우 쓰고 쉬운 구자라트어를 이해할 뿐이다.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이 정욕에 물든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 교양 있는 숙녀가 되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그녀가 공부를 싫어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순수한 사랑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정욕적인 사랑의 재난에서 나를 어느 정도 구제한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그 밖에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동기가 순수한 사람은 결국 신에 의해 구제된다고 하는 점을 많은 본보기들을 통해 확신했다. 조혼이라는 잔인한 풍속과 함께, 그 폐해를 어느 정도 없애주는 풍속이 힌두 사회에 있다. 즉 어린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 있는 것을 부모가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 아내는 반 이상의 시간을 친정에서 보낸다. 우리도 그러했다. 즉 우리 결혼생활의 첫 5년 동안(열세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우리가 함께 지낸 것은 3년에 불과했다.
우리가 함께 지낸 지 반년도 안 되어 아내에게 친정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에는 그것이 못마땅했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를 구원했다. 열여덟 살에 나는 영국으로 갔다. 그것은 오랫동안의 별거를 뜻했다. 심지어 영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우리는 반년 이상을 함께 지내지 못했다. 내가 라지코트와 뭄바이 사이를 부지런히 다녔기 때문이다. 그 후 남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이미 정욕에서 상당히 떠난 뒤였다.
5. 중학교 생활
결혼 당시 내가 중학교28에 다니고 있었다는 점은 이미 말했다. 우리 3형제는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다. 맏형은 훨씬 높은 학년이었고, 나와 함께 결혼한 둘째 형은 나보다 한 학년 위였다. 우리는 결혼 때문에 한 해를 허비했다. 특히 이것이 형에게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그가 공부를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소년들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을까? 오로지 우리 힌두 사회에서만 지금도 이처럼 결혼과 공부를 병행한다.
나는 공부를 계속했다. 중학교에서는 열등생이 아니었다. 언제나 교사들의 사랑을 받았다. 매년 부모에게 성적과 행동에 대한 통지표가 왔다. 나는 나쁜 통지표를 받은 적이 없다. 2학년 말부터는 상까지 탔다. 5, 6학년 때에는 각각 4, 10루피의 장학금까지 받았으나, 이는 성적 때문이라기보다도 운이 좋은 탓이었다. 왜냐하면 그 장학금은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카티아와르의 소라드29지방에서 온 우수한 학생에게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 반 4, 50명 중에 소라드에서 온 아이는 많지 않았다.
성적이 좋았다고는 기억되지 않는다. 상이나 장학금을 탈 때마다 놀랐다. 그러나 행동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지극히 사소한 잘못으로도 눈물을 흘렸다. 잘못을 저지르거나 교사에게 그렇게 보여 꾸중을 들으면 견딜 수 없었다. 맞은 적도 있었다. 벌 자체보다도 벌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나는 슬프게 울었다. 1, 2학년 때의 일이었다.
7학년 때 똑같은 일이 있었다. 당시 교장의 이름은 도랍지 에둘지 기미였다. 그는 엄하고 유능하며 훌륭한 교사여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는 상급학생에게 체조와 크리켓을 필수 과목으로 요구했다. 나는 그 두 가지 모두 싫어했다. 나는 크리켓이나 축구 등, 어떤 체육 과목에도 그것이 필수 과목으로 되기 전부터 참석하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나의 수줍음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 잘못이었다. 당시 나는 체육은 교육이 아니라고 잘못 생각했다. 지금 나는 체육은 교과 과정에서 지육(智育)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운동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건강이 나빠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신선한 공기 속에서 오랫동안 걷는 것이 좋다는 것을 책에서 읽고, 그 충고가 좋아서 지금까지 산책하는 버릇을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 산책으로 나는 상당히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내가 체육을 싫어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를 잘 간호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나는 집으로 달려가서 아버지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체육이 필수가 되자 간호에 지장이 생겼다. 나는 기미 선생님에게 아버지 간호를 위해 나를 체육 과목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수업이 오전에 끝나 오후 4시에 체육을 하러 다시 학교에 가야 했다. 내게는 시계가 없었고 흐린 날씨가 나를 속였다. 내가 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기미 선생님이 출석부를 점검하여 내가 결석했음을 발견했다. 결석한 이유를 물어서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벌금 1, 2아나스(정확하게는 모르겠다)를 물도록 했다.
결국 나는 거짓말을 한다는 누명을 썼다!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나의 결백을 어떻게 증명할까? 도리가 없었다. 엄청난 고통으로 울었다. 진실한 사람은 주의 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내가 학교에서 부주의로 저지른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었다. 결국 나는 벌금을 물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또한 아버지가 교장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방과 후에 집에 있도록 해달라고 해 나는 체육 시간을 면제받았다.
체육을 무시했다고 해서 그리 나빠진 건 없지만, 다른 것을 무시한 탓에 지금까지 벌을 받는 것이 있다. 글자를 잘 쓴다는 것이 교육에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어디서 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영국에 갈 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후에, 특히 남아프리카에서는 그곳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변호사나 청년 들이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을 보고, 나는 부끄러웠고 나의 게으름을 후회했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한 교육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고쳐보려고 노력했지만 너무 늦었다. 젊은 시절의 게으름을 끝내 고칠 수 없었다. 모든 청년은 내 경우를 보고, 좋은 글씨 쓰기가 교육의 필수임을 알기 바란다. 지금 나는 아이들이 글씨 쓰기를 배우기 전에 그림 그리기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꽃이나 새 같은 다른 사물을 관찰하여 배우듯이 글씨도 관찰하고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림 그리기를 배운 뒤에 글씨 쓰기를 배우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아름답게 짜인 글씨를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창 시절의 추억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이 두 가지 더 있다. 결혼으로 인해 한 학년 늦어졌기 때문에 교사에게 1년을 건너뛰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것은 부지런한 학생에게만 허용되는 특전이었다. 그래서 나는 3학년을 반년만 다녔고, 여름방학 전에 시험을 보고서 4학년에 진급했다.
4학년부터는 과목 대부분을 영어로 수업했다.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었다. 4학년부터 기하를 새로 공부했는데, 특별한 실력도 없는 데다 영어로 수업을 하니 더욱 어려웠다. 교사는 잘 가르쳤지만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2년에 해야 할 공부를 1년 만에 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하여 몇 번이나 낙심하고 3학년으로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이는 나만이 아니라 교사에게도 망신스런 일이었다. 왜냐하면 교사는 내 노력을 믿고 진급을 추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중으로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다 유클리드 제13정리에 들어가자 별안간 기하가 쉬워졌다. 오직 순수하고 간단한 추리력 사용만을 요구하는 과목이 어려울 리 없었다. 그 뒤로 기하는 쉽고도 흥미로운 과목이 되었다.
그러나 산스크리트어는 더욱 어려웠다. 기하에는 암기할 것이 없었으나, 산스크리트어에서는 모든 것을 암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목도 4학년부터 시작되었다. 6학년이 되자 나는 절망했다. 교사는 아이들을 강제하려고 애쓰는 엄격한 사람이었다.
산스크리트어 교사와 페르시아어 교사 사이에는 일종의 경쟁심이 있었다. 페르시아어 교사는 너그러웠다. 페르시아어가 매우 쉽고 페르시아어 교사가 매우 훌륭하며 아이들을 배려한다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 돌았다. 그 ‘쉬움’ 때문에 나는 페르시아어 수업에 들어갔다. 산스크리트어 교사는 섭섭해했다. 그는 나를 불러 말했다. “네가 바이슈나바의 자손임을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 너는 네 종교의 말을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어렵다면 왜 나에게 오지 않느냐? 나는 너희 학생들에게 산스크리트어를 열심히 가르치고자 한다. 조금씩 알아가면 너는 정말 흥미로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낙심해선 안 된다. 산스크리트어 수업에 다시 나오너라.”
그 친절에 나는 부끄러웠다. 그 교사의 사랑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크리슈나산카르 판디야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당시 산스크리트어를 조금이라도 배우지 않았다면 우리의 성스러운 책에 대해 어떤 흥미도 가질 수 없을 테니까. 사실 나는 산스크리트어에 더 깊은 지식을 갖지 못해 많이 후회한다. 그 후 모든 힌두 아이들은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져야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인도의 모든 고등 교육 과정에 각 지역 언어 외에 힌두어, 산스크리트어, 페르시아어, 아라비아어, 영어 과목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짓수가 많다고 놀라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 교육이 더욱 체계적이고, 아이들이 과목을 외국어로 배우는 부담을 벗어버리면 이 모든 언어를 배우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 도리어 매우 즐거우리라고 확신한다. 어떤 언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다른 언어에 대한 배움을 더욱 쉽게 만든다.
사실 힌두어, 구자라트어, 산스크리트어는 하나의 언어로 볼 수 있고,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도 하나다. 페르시아어는 아리아인의 것이고, 아라비아어는 셈족 언어 계열에 속하지만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는 유사하다. 모두 이슬람교가 출현한 뒤에 완벽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우르두어도 완전히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법은 힌두어와 같고, 어휘는 주로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르두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를 배워야 하고, 구자라트어, 힌두어, 벵골어, 마라티어를 제대로 배우려면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야 한다.
6. 비극
중학 시절의 몇 안 되는 친구 가운데, 가까웠다고 할 수 있는 두 친구가 시기를 달리해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내가 친구를 버린 탓이 아닌데도 오래가지 않았다. 도리어 내가 다른 친구를 사귀었다고 해서 그가 나를 버렸다. 이어진 두 번째 우정은 내 일생에서 비극의 하나다. 그것은 오래갔다. 나는 개혁자 정신으로 그 우정을 형성했다.
그 친구30는 본래 형의 친구였다. 그들은 같은 학급 친구였다. 그에게 약점이 있었지만 나는 그를 믿을 만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맏형, 아내는 내가 나쁜 사람과 사귄다고 경고했다. 나는 아내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기에는 너무나 교만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맏형의 의견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 변명했다. “말씀하시는 약점이 그에게 있음을 저도 알지만, 그의 장점은 모르십니다. 제가 그와 친한 것은 그를 고쳐주기 위한 것이므로 그가 저를 잘못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가 생활을 고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시길 빕니다.”
그 변명으로 그들이 안심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들은 내 설명을 수긍했고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 뒤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개혁자는 그가 개혁의 대상으로 삼는 자와 친해질 수 없다. 참된 우정이란 영혼이 같아지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우정이란 오로지 유사한 천성 간에서만 전적으로 가치가 있고, 오래갈 수 있다. 친구는 서로 영향을 준다. 따라서 친구 사이에서는 개혁의 여지가 거의 없다. 나는 모든 배타적인 친밀함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선보다 악을 더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혼자 살거나, 세계를 자기 친구로 삼아야 한다. 내가 잘못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친밀한 우정을 맺고자 한 내 노력은 실패했다.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무렵, 라지코트에는 ‘개혁’ 풍조가 휩쓸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많은 교사가 숨어서 고기와 술을 먹는다고 말했다. 또 같은 무리에 속한다는 라지코트 명사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그중에는 중학생도 몇 명 있다고 했다.
나는 놀랍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친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허약한 민족이야. 영국인은 고기를 먹기 때문에 우리를 지배할 수 있지. 너는 내가 단단하고 잘 뛴다는 거 알지. 그건 내가 고기를 먹기 때문이야. 고기를 먹으면 부스럼이나 종기가 나지 않고, 그런 게 생겨도 금방 낫게 돼. 고기를 먹는 우리 교사들이나 그 밖의 명사들은 바보가 아니야. 그들은 그 효과를 알고 있어. 너도 그렇게 해야 해. 실제로 해보는 것보다 좋은 게 없어. 해봐. 그러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알게 될 거야.”
육식을 위한 이 모든 권고는 단번에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는 내 친구가 종종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자 노력한, 오랫동안 공들인 논의의 요점이다. 둘째 형은 이미 육식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그는 친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형이나 친구가 보기에 나는 분명 허약해 보였다. 그들은 모두 튼튼했고 힘도 셌으며 훨씬 대담했다.
친구의 재주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먼 거리를 놀라운 속도로 뛸 수 있었다. 그는 높이뛰기와 넓이뛰기 선수였다. 그는 어떤 육체적 벌도 참을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재주를 종종 나에게 보여주었고, 어떤 사람이건 자신에게 없는 자질을 남에게서 발견하면 언제나 현혹되듯이, 나는 친구의 재주에 현혹되었다. 이어 그와 같이 되려는 욕망이 솟구쳤다. 나는 뛰지도 달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나라고 해서 그처럼 강해질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나는 겁쟁이였다. 나는 늘 도둑, 귀신, 뱀을 무서워했다. 밤에는 문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어둠은 나에게 공포였다. 나는 귀신이 한쪽에서 나오고, 도둑이 다른 쪽에서 나오며, 뱀이 또 다른 쪽에서 나온다는 생각 때문에 어둠 속에서 잘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방에 불을 켜두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내 공포를 아이도 아니고 벌써 어른이 되어 내 곁에서 잠자는 아내에게 숨길 수 있었을까? 나는 아내가 나보다 더욱 용기가 있음을 알았기에 부끄러웠다. 아내는 뱀이나 귀신을 몰랐다. 아내는 어둠 속에서도 어디에나 갈 수 있었다. 내 친구는 내 모든 약점을 알았다. 그는 자기가 손으로 뱀을 잡을 수 있고, 도둑도 물리치며, 귀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육식 탓이라고 했다.
당시 구자라트 시인 나르마다의 해학시가 우리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저 힘센 영국인을 보라.
허약한 인도인을 지배하네.
육식을 하기 때문에
키가 다섯 큐비트31라네.
이 모든 게 나에게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육식이 좋고, 나를 강하고 대담하게 만들며, 모든 사람이 육식을 하게 되면 영국을 이긴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느 날, 그 실험을 하기로 했다. 비밀리에 해야 했다. 간디 집안은 바이슈나바 신자들이었다. 특히 부모는 열렬한 바이슈나바 신자였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하벨리를 방문했다. 게다가 우리 가족만의 신전도 있었다. 구자라트에는 자이나교가 성했고, 언제 어디에서나 그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구자라트의 자이나 교도와 바이슈나바 교도들은 인도 안팎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육식을 반대하고 혐오했다.
나는 그런 전통 속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리고 나는 부모에게 특히 극진했다. 내가 육식을 했음을 알게 되면 그들이 충격으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진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는 지극히 조심했다. 내가 육식을 하는 것이 부모를 속이는 짓임을 당시 내가 몰랐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내 마음은 ‘개혁’으로 기울었다. 맛을 즐긴다는 문제가 아니었다. 특별히 맛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강하고 담대해지기를 바랐고, 동포들도 그렇게 되어 영국에게 이겨서 인도를 자유롭게 만들기를 원했다. 당시까지 나는 ‘자치’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가 뜻하는 바를 알았다. ‘개혁’에 대한 열정으로 눈이 흐려졌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부모에게 내 행동을 숨기는 것은 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7. 비극 (계속)
마침내 그날이 왔다. 당시의 심정을 정확하게 묘사하기는 어렵다. 한편에는 개혁에 대한 열의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짓을 하면서도 도둑처럼 숨겨야 한다는 수치심이 있었다. 어느 쪽이 더 강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외딴 곳을 찾아 강가로 갔다.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고기를 먹었다. 빵집에서 구운 빵도 있었다. 어느 것이나 맛이 없었다. 염소 고기는 가죽처럼 질겼다.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구토가 나서 식사를 중단해야 했다.
그날 밤, 혼이 났다. 나는 무섭게 가위눌렸다. 잠이 들려고 하면 살아 있는 염소가 내 뱃속에서 우는 것 같았고, 견디지 못해 벌떡 일어나야 했다. 그러나 나는 육식은 의무임을 상기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 친구는 쉽게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 그는 고기로 여러 가지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먹는 곳도 강변의 외진 곳이 아니라, 부엌과 탁자와 의자를 갖춘 관사였다. 친구는 그곳 요리사에게 부탁해 준비했다.
이 미끼는 효과가 있었다. 싫어하던 빵도 좋아지고, 염소에 대한 동정도 잊고, 고기 자체는 아니라고 해도 고기 요리의 맛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년쯤 지냈다. 그러나 그런 고기 잔치를 즐긴 것은 대여섯 번 정도였다. 그 관사에는 매일 갈 수도 없었고, 비싸고 맛난 고기 요리를 자주 준비하기가 분명히 어려웠기 때문이다.
내게는 이 ‘개혁’에 지불할 돈이 없었다. 따라서 내 친구가 언제나 그 돈을 마련했다. 그가 어떻게 마련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나를 꼭 육식주의자32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돈을 마련했다. 그러나 그의 수단에도 한계가 있었으므로 잔치는 당연히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비밀 잔치를 치른 날이면 집에서 저녁을 먹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당연히 음식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셨다. 나는 말했다. “오늘은 식욕이 없어요.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런 핑계로 속이자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것도 어머니에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육식주의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면 부모님이 엄청난 충격을 받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슴이 미어터졌다.
그래서 스스로 말했다. “고기를 먹는 것이 필요하고 전국에서 식사를 ‘개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부모를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고기를 먹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쁘다. 따라서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육식은 안 된다. 그들이 죽고 내가 자유로워지면 나는 내놓고 고기를 먹겠지만, 그런 때가 오기까지는 안 된다.”
친구에게 그 결심을 알리고 다시는 육식을 하지 않았다. 부모는 두 아들이 육식주의자가 되었음을 알지 못했다.
나는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순수함으로 육식을 끊었지만, 친구와의 교제는 끊지 않았다. 그를 바꾸려는 나의 열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으나, 나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그 교제는 아내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게끔 했다. 그러나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면했다. 친구가 나를 사창가로 데려간 적이 있다. 그는 필요한 것을 말하고 나를 들여보냈다. 그 모든 것은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다. 돈도 사전에 지불되었다. 나는 죄악의 문턱으로 갔지만 신이 그 무한한 자비로 나를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그 죄악의 굴에 들어가니 눈과 귀가 멀었다. 여자의 침대 가까이 앉자 혀가 굳었다. 그녀는 당연히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문을 가리켰다. 남자 체면을 손상당한 듯해 수치심에 땅속에 기어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신이 나를 구해준 것에 감사한다.
그런 일이 평생 네 번 더 있었다. 대부분 내 노력보다는 운이 좋아 구제됐다. 엄격한 윤리관으로 본다면 그 모든 경우는 도덕적 타락으로 보아야 한다. 정욕이 이미 거기 있었고, 이는 행위를 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몸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으면 구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구제됐다.
어떤 행위를 피한 것이, 피한 사람이나 그 주위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경우가 있다. 사람은 올바른 의식으로 돌아오면 피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신의 자비에 감사한다. 사람은 아무리 저항해도 유혹에 빠지는 경우가 있고, 또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섭리에 의해 구제받는 경우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일어날까? 사람은 어디까지 자유롭고 어디까지 환경의 산물인가? 자유의지는 어느 정도로 역할을 하고, 운명은 언제부터 등장할까? 이 모든 것은 신비요, 영원한 신비로 남으리라.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친구와의 교제가 나쁘다는 사실에 눈뜨지 못했다. 따라서 내가 생각지도 못한 그의 타락이 명백하게 나타나서 정말 눈을 뜨기까지 나는 더욱 많은 쓴잔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뒤에서 차례로 하겠다.33
그러나 한 가지만은 여기서 말해야겠다. 같은 시기에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불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의심할 바 없이 그 친구와의 교제였다. 나는 헌신적이면서도 질투가 강한 남편이었고, 그 친구는 아내에 대한 내 의심을 부채질했다. 나는 그의 진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행동해 아내에게 고통을 준 죄악의 폭행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이러한 학대는 힌두 아내만이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여성을 관용의 화신으로 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억울한 의심을 받은 하인은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 처지의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나면 된다. 마찬가지로 친구는 교제를 끝내면 된다.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면 조용히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를 의심하면 그녀는 끝이다. 그녀가 어디로 갈 수 있는가? 힌두 아내는 법원에 가서 이혼을 청구할 수도 없다. 그녀에게는 법이 무용하다. 내가 아내를 그런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것을 나는 잊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그런 의심의 암을 뿌리 뽑은 것은, 내가 비폭력5>을 모든 면에서 이해한 뒤였다. 그제야 나는 금욕6>, 34의 영광을 깨달았고,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니라 동료이자 협력자이고, 남편과 고락을 함께하는 동등한 동반자로서 남편처럼 자유롭게 그녀만의 길을 선택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의심과 의문으로 어두웠던 나날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어리석음과 잔인한 치정이 혐오스러워져 친구를 맹목적으로 믿은 것을 통탄하게 된다.
8. 도둑질과 속죄
내가 고기를 먹던 시절과 그 이전에 저지른 실수에 대해 말할 게 있다. 이는 결혼식 전후에 시작된다.
어느 친척과 나는 담배를 피우게 되었다. 담배 피우는 데 좋은 점이 있어서였거나 담배 냄새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입으로 연기를 내뿜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저씨에게 그런 습관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고 그를 모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버린 꽁초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꽁초가 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는 연기를 많이 내뿜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 궐련을 사려고 하인의 주머니에서 동전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어디에 두느냐가 문제였다. 당연히 어른들 앞에서 피울 순 없었다. 우리는 훔친 동전으로 몇 주일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어떤 식물의 줄기에 구멍이 많아 담배처럼 피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을 구해 피워도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자립하지 못하는 것이 원통해지기 시작했다. 어른들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살기가 싫어져 우리는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어디서 독약을 구할 것인가? 우리는 다투라 씨가 독성이 강하다고 들었고 정글을 뒤져 그것을 찾아냈다. 저녁때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케다르지 만디르(Kedarji Mandir)에 가서 사원의 등에 기름을 치고, 예배35를 한 뒤 외진 구석을 찾았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금방 죽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자살하면 좋은 점이 무엇일까? 자립하지 못해도 참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데도 우리는 두세 알을 삼켰다. 그러나 더는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죽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람지 만디르(Ramji Mandir)에 가서 마음을 고쳐먹고 자살할 생각을 잊기로 했다.
나는 자살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나는 누가 자살하겠다고 위협하는 소리를 들어도 거의 또는 전혀 겁내지 않는다.
자살 생각은 결국 담배꽁초를 피우고, 담배를 피우려고 하인의 동전을 훔치는 버릇을 그만두게 만들었다.
그 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담배를 피우려 하지 않았고, 담배 피우는 것을 언제나 야만적이고 더러우며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담배 피우는 사람으로 가득한 찻간에서 여행하기 어렵다.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한 도둑질은 그 후의 일이었다. 동전을 훔친 것은 열두세 살, 아니면 그보다 어려서였다. 그 다음 도둑질은 열다섯 살 때였다. 이번에는 육식하던 형의 팔찌에서 금 한 조각을 훔쳐냈다. 형은 약 25루피의 빚을 지고 있으면서 팔에는 순금 팔찌를 끼고 있었다. 거기서 한 조각 떼어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훔쳤고, 그 빚은 청산됐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다시는 훔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것을 아버지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매질을 두려워한 탓이 아니었다. 아니, 아버지가 우리를 매질한 기억은 없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당할 고통이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해야 한다고 느꼈다. 깨끗한 고백 없이는 깨끗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백서를 써서 그것을 아버지에게 바치고 용서를 빌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종이 위에 써서 직접 아버지에게 드렸다. 글 속에서 나는 죄를 고백했을 뿐 아니라, 적절한 처벌을 요구했고, 나의 잘못 때문에 아버지 자신을 벌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끝을 맺었다. 또한 앞으로는 절대로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아버지에게 고백서를 전했을 때 나는 벌벌 떨었다. 당시 아버지는 치루로 고생을 하셔서 침대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침대는 평평한 나무 판자였다. 나는 그에게 종이를 전하고 판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가 다 읽자 구슬 같은 눈물이 두 뺨을 흘러내려 종이를 적셨다.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종이를 찢었다. 그는 읽기 위해 일으켰던 몸을 다시 누였다. 나도 울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뇌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만일 화가라면 지금이라도 그 모습 전체를 그릴 수 있다. 그 장면은 여전히 내 마음에 생생하다.
그 사랑의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내 마음을 정화시켰고, 나의 죄를 씻어버렸다. 그런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찬송가에서 노래하듯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 힘을 안다.” 이것은 나에게 비폭력의 실제 교육이었다. 당시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았을 뿐이지만, 지금 나는 그것이 순수한 비폭력이었음을 안다. 그러한 비폭력이 모든 것을 끌어안을 때 거기에 닿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종류의 숭고한 용서는 아버지에게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화를 내서 나를 꾸짖고 자기 머리를 칠 줄 알았다. 그러나 너무나도 경이롭게 평화로웠다. 나는 그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 덕분이라고 믿는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담은 솔직한 고백은,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바쳐질 때, 가장 순수한 형태의 회개가 된다. 내 고백이 아버지로 하여금 나에 대해 절대로 안심하게 했고, 나에 대한 사랑을 무한히 증가시켰음을 나는 안다.
9. 아버지의 죽음과 이중의 수치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은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앞서 보았듯이 아버지는 치루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와 늙은 하인, 그리고 내가 그를 주로 돌보았다. 나는 간호 임무를 맡았는데, 이는 주로 상처를 싸매고 약을 갖다 주며 약을 집에서 만들어야 할 때 그것을 조제하는 일이었다. 나는 밤마다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고 아버지가 가라고 하거나 잠이 들어야 물러났다. 나는 그 일을 하는 걸 좋아했다. 한 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날의 의무를 다한 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을 나누어 학교에 가거나 아버지 곁에 있었다. 아버지가 허락하거나 좀 평안해지면 나는 저녁 산책을 했다.
또한 이때는 아내가 만삭이었다. 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이중의 수치였다. 첫째, 아직 학생으로서 자제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점에 대한 수치였다. 둘째, 내가 의무로 생각한 공부를, 그리고 어려서부터 슈라바나를 이상으로 삼은 나로서 공부보다 더욱 큰 의무로 생각해야 할 부모에 대한 헌신을 나의 정욕이 눌러버린 점에 대한 수치였다.
밤마다 나의 손은 아버지 다리를 주무르는 데 바빴지만 마음은 침실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또한 그때는 종교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물론 상식적으로도 성교를 할 수 없는 시기였다. 나는 언제나 의무에서 벗어나면 좋았고, 아버지에게 인사한 뒤 바로 침실로 뛰어갔다.
그때 아버지의 병세는 악화되었다. 힌두교(ayurvedic) 의사는 연고, 이슬람교 의사들(hakims)은 고약으로 치료했고, 지방 돌팔이들은 비법을 썼다. 영국인 외과의사도 치료했다. 최후이자 유일한 방법으로 그는 외과수술을 권했다. 그러나 주치의가 반대했다. 아버지와 같은 고령에는 수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주치의는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이어서 그의 충고가 받아들여졌다. 수술을 포기했고, 수술을 위해 산 여러 가지 약은 소용없게 되었다.
나는 당시 만일 주치의가 수술을 허용했다면 상처는 쉽게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수술은 뭄바이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의 뜻은 달랐다. 죽음이 목전인데, 누가 제대로 치료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모든 수술 기구를 가지고 뭄바이에서 돌아왔으나, 이제는 소용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욱더 약해져 마침내 필요한 일을 침대에서 하도록 지시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언제나 침대를 떠나서 하려고 고집했다. 외부 청결에 대한 바이슈나바교의 교리는 그렇게 엄격했다.
그런 청결이 필요하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서양의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최대한 청결을 유지하면서 목욕을 포함한 모든 일을 침대에서 할 수 있고, 환자에게 어떤 불편도 주지 않으면서 침대를 얼룩 하나 없이 늘 청결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런 청결은 바이슈나바교와 완전히 일치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침대를 떠나야 한다고 고집해 나는 놀랐고, 그 점에 대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밤이 다가왔다. 당시 삼촌은 라지코트에 있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라지코트에 온 것으로 나는 희미하게 기억한다. 형제는 정이 두터웠다. 삼촌은 온종일 아버지 침대 곁에 앉아 있었고, 우리 모두를 잠자리로 보내고는 아버지 침대 옆에서 자기를 고집했다. 누구도 그날이 운명의 밤인 것을 꿈에도 몰랐다. 물론 위험은 있었다.
밤 10시 반이거나 11시쯤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안마하고 있었다. 삼촌은 내게 가보라고 했다. 나는 좋아서 곧장 침실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왔는데 어떻게 잘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를 깨웠다. 그러나 5, 6분 뒤에 하인이 문을 두드렸다. 나는 놀랐다. 그가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아버님이 매우 위독하십니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때 ‘매우 위독’하다는 것이 뜻하는 바를 짐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빨리 말해!”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두 손을 비비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했다. 너무나 부끄러웠고 비통했다. 아버지 방으로 달려갔다. 만일 동물적인 정욕이 나를 맹목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하는 이별의 고통은 면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안마를 해드려야 했고, 그러면 내 품 안에서 돌아가셨으리라. 그러나 그 특권은 삼촌에게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형에게 극진했으므로 최후의 봉사를 할 명예를 차지했다!
아버지는 다가오는 일을 예감했다. 그는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는 시늉을 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마지막 준비를 하라.
그러고는 팔에 찼던 팔찌를 풀고, 또 염주 금목걸이를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숨지셨다.
앞장에서 내가 수치라고 한 것은, 정신을 차려서 봉사해야 할 아버지 임종의 순간에도 육욕에 젖었던 수치를 말한다. 이는 지울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흠이며, 부모에 대한 헌신이 아무리 무한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해도, 나의 마음은 그때 육욕에 사로잡혔으니 용서받을 수 없는 결함으로 알아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그래서 나는 비록 내가 믿음직한 남편이지만 동시에 육욕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육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중의 수치에 대한 이 장을 끝맺기 전에 아내가 낳은 그 가련한 꼬마는 3, 4일도 못 살고 죽었음을 적어둔다. 그 밖에 다른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결혼한 모든 사람은 나의 경험에서 깨우치길 바란다.
10. 종교 맛보기
예닐곱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종교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웠다. 교사들이 전혀 힘들이지 않고서 나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을 얻지 못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나는 주위에서 이것저것 주워들었다. 내가 말하는 ‘종교’란 가장 넓은 뜻으로서, 자기실현이나 자기 인식을 뜻한다.
나는 바이슈나바 신앙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종종 하벨리에 갔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 화려함과 사치가 싫었다. 게다가 거기서 부도덕한 일이 일어난다는 소문을 들어 완전히 흥미를 잃고 말았다. 따라서 하벨리에서 얻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얻지 못한 것을 나는 유모에게서 얻었다. 우리 집에서 오래 일한 그녀가 나에 대해 가졌던 사랑을 지금도 기억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귀신과 유령을 무서워했다. 유모 람바는 무서움을 이기려면 ‘라마나마’ 36를 외우라고 했다. 나는 그 치료법보다도 그녀를 믿었기 때문에 귀신과 정령에 대한 무서움을 치료하려고 어린 나이에 라마나마를 외기 시작했다. 이는 물론 오래가지 못했으나, 어린 시절에 뿌려진 그 좋은 씨앗은 헛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라마나마가 확실한 치료법인 것은 그 훌륭한 여성 람바가 뿌린 씨앗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 무렵, 《라마야나》37를 신봉한 사촌이 둘째 형과 나를 위해 ‘람 락샤’38를 배우도록 했다. 우리는 그것을 외워서 매일 아침 목욕 뒤에 되풀이했다. 우리가 포르반다르에 있었을 때는 그것을 지켰다. 그러나 라지코트에 오자마자 잊어버렸다. 그것을 크게 믿지 않은 탓이었다. 내가 그것을 외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람 락샤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 《라마야나》를 읽은 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병석에 있던 한동안 아버지는 포르반다르에 있었다. 그곳에서 매일 저녁 그는 《라마야나》를 들었다. 낭독자는 라마의 독실한 신자인 빌레슈바의 라다 마하라지였다.
그는 한센병 환자였는데 아무 약도 쓰지 않고, 빌레슈바 사원에 있는 마하데바 신상 앞에 들렀다가 그곳에 바쳐진 빌바(Bilba) 잎사귀를 아픈 데 붙이고 《라마야나》를 계속 외워 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믿음이 그를 완치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하튼 우리는 그 이야기를 믿는다. 라다 마하라지가 《라마야나》를 읽기 시작하자 그의 한센병이 완전히 나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다. 도하스(두 줄 노래)와 초파이스(넉 줄 노래)를 부른 뒤에 설명을 했다. 그때는 자신을 잊고 듣는 사람이 그에게 취하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열세 살이었는데, 그의 낭독에 매료됐음을 확실히 기억한다. 그래서 《라마야나》에 대한 깊은 믿음이 생겨났다. 지금 나는 툴라시다스39의 《라마야나》를 모든 신앙서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몇 달 뒤 우리는 라지코트로 왔다. 더는 《라마야나》를 읽지 않았다. 그러나 에카다쉬40해 날이면 《바가바트》41를 읽었다. 나도 그 모임에 종종 참석했으나 낭독자에게 영감을 받지는 못했다. 지금 나는 《바가바트》를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책이라고 본다. 나는 그 책을 엄청난 흥미를 갖고 구자라트어로 읽었다.
그러나 내가 단식하는 21일 동안 판디트 마단 모한 말라비야가 그 일부를 원어로 읽는 것을 들었을 때, 어린 시절에 그처럼 신앙이 깊은 사람에게 듣고 그것을 좋아하게 됐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형성된 인상은 그 사람의 본성에 깊이 뿌리내리는 법이다. 따라서 그런 시절에 더욱 좋은 책들의 낭독을 듣는 행운을 갖지 못했음을 나는 매우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라지코트에서 나는 힌두교의 모든 종파와 그 자매 종교에 관용할 수 있는 기반을 일찍부터 갖게 되었다. 부모님은 하벨리만이 아니라 시바42와 라마의 사원도 방문했고, 어린 우리를 거기 데리고 가거나 그곳에 보내기도 했다. 또한 자이나교 승려도 아버지를 자주 찾아왔고, 심지어 자기들 규칙에 어긋나게 비(非)자이나 교도로서 우리 음식을 먹기도 했다. 그들은 아버지와 함께 종교나 세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밖에 아버지에게는 이슬람교도와 파르시교43 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그들의 믿음에 대해 말했고, 아버지는 언제나 그들을 존경했으며, 때로는 흥미롭게 경청했다. 나는 그를 간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그 이야기에 참가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모든 종교에 관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 기독교만은 예외였다. 나는 그것을 싫어했다. 그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학교 부근 모퉁이에 서서 힌두교도와 그 신들에 대해 욕설을 퍼붓곤 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딱 한 번 들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다시 들을 생각이 없어졌다. 그 무렵, 유명한 힌두교도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문으로는 그가 세례를 받자마자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복장도 바꾸어 양복을 입고 모자까지 쓴다고 했다.
이에 나는 분노했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며 고유한 복장을 바꾸게 하는 종교란, 종교라고 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또 그 개종자가 벌써 자기 조상의 종교와 관습과 나라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기독교 혐오를 형성했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배웠다고 해서 신에 대한 생생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의 수집품 가운데 《마누법전》을 우연히 보았다. 그 속에 나오는 창조 등의 이야기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고, 도리어 나를 무신론으로 상당히 기울어지게 했다.
높은 지성을 가진 어느 사촌이 지금도 살아 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의문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도 그 의문을 풀어주지 못했다. 헤어지기 전에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자란 후에는 그 의문을 스스로 풀 수 있을 거야. 지금 네 나이에는 그런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좋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마누법전》에 나오는 음식 등의 부분은 일상의 실제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의문에 대해서도 나는 같은 답을 얻었다.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책을 더 많이 읽으면 그런 것을 더욱 잘 알게 될 거야.”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여하튼 당시 《마누법전》은 아힘사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다. 나는 앞에서 육식 이야기를 했다. 《마누법전》은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또 뱀이나 빈대 따위를 죽이는 것은 너무나도 도덕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빈대 같은 벌레를 죽이면서 그것을 의무라고 생각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나에게 깊이 뿌리내렸다. 즉 도덕이 사물의 근본이고, 진실이 모든 도덕의 본질이라는 확신이다. 진실만이 나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그것은 매일매일 거대하게 자라기 시작했고, 그것에 대한 내 정의도 점차 커져갔다.
구자라트의 교훈시 하나가 내 마음과 가슴을 사로잡았다.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그 교훈이 내 지도 원리가 되었다. 그것이 정열이 되어가면서 나는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시작했다. 다음은 (나에게) 그 놀라운 구절이다.
물 한 잔을 훌륭한 식사로 갚고
정다운 인사를 열렬한 절로 갚고
동전 한 닢을 황금으로 갚고
목숨을 건져주면 목숨을 아끼지 마라.
모든 말과 행동을 그렇게 존중하고
아무리 작은 봉사도 열 배로 갚으라.
그러나 참된 성자는 모든 사람을 하나로 알아
악을 선으로 즐겁게 갚는다.
11. 영국 유학 준비
1887년, 나는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다. 당시 그것은 아메다바드44와 뭄바이에서 치렀다. 카티아와르 학생들은 대부분 가난했기 때문에 당연히 가깝고 값싼 곳을 택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나도 같은 선택을 했다. 이것이 라지코트에서 아메다바드로 간 첫 여행이었고, 그것도 혼자 한 여행이었다.
어른들은 내가 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에 가기를 원했다. 뭄바이처럼 바브나가르45에도 대학이 있었는데, 그곳 물가가 싸서 나는 그곳의 사말다스대학에 가기로 했다. 나는 그곳에 갔으나 모든 것이 너무 어려웠다. 모든 것이 힘들었다. 교수들의 강의에 흥미를 느끼기는커녕 따라갈 수도 없었다. 교수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곳 교수들은 가장 우수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수준이 낮았다. 첫 학기를 마칠 무렵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46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이자 조언자인 마브지 다베는 재바르고 똑똑한 브라만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그는 우리 가족과 인연을 이어왔다. 내 방학 기간에 그가 찾아왔다. 그는 어머니와 큰 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공부에 대해 물었다. 내가 사말다스대학에 다닌다는 것을 듣고 그가 말했다.
“시대가 변했어요. 적절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아이들 누구도 아버지의 지위를 이을 수 없어요. 이 아이는 아직 공부를 하고 있으니 그가 지위를 잇도록 보살펴주어야 해요. 그가 4, 5년이 걸려 학사가 되어도 기껏 60루피짜리 자리나 얻을 수 있지 수상 자리는 안 돼요. 내 아들처럼 법을 공부한다면 시간이 더 걸리고, 그때는 법률가들이 쏟아져 나와 수상 자리를 노릴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그를 영국으로 보내는 것이 낫지요. 내 아들 케발람 말로는 변호사가 되는 건 쉽다고 해요. 3년으로 충분해요. 학비도 4, 5천 루피가 넘지 않을 것이고. 영국에서 막 돌아온 변호사를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버젓하겠는가! 수상 자리는 원하기만 하면 될 것이고. 나는 올해 모한다스를 영국에 보내길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케발람은 영국에 친구가 많아요. 그가 영국 친구들에게 소개장을 써줄 테니 모한다스가 그곳에서 지내기 수월할 거예요.”
조시지(우리는 나이 많은 마브지 다베를 그렇게 불렀다)는 완벽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서 공부하지 않고 영국에 가지 않겠나?” 나에게는 그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 나는 공부가 어려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제안에 너무나 기뻐 영국에 빨리 갈수록 더 좋다고 답했다. 시험에 빨리 합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형이 가로막았다. “아버지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우리 바이슈나바 교도는 시체 해부를 할 수 없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건 너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야. 아버지는 네가 법조인이 되기를 바라셨어.”
조시지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네 아버지처럼 의사란 직업에 반대하지는 않아. 힌두교 경전(Shastras)에서 반대하지도 않아. 그러나 의사로서는 수상이 될 수 없어. 나는 네가 수상이 되길 원하고, 가능하다면 그 이상이 되길 바라. 그래야 너의 대가족을 보호할 수 있어. 시대는 급변하고 있고 나날이 더욱 힘들어지고 있어. 따라서 변호사가 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야.”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제 저는 가겠어요. 제가 말씀드린 것을 잘 생각해보세요. 다음에 여기 오면 영국 갈 준비에 대해 듣길 바랍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꼭 알려주세요.”
조시지는 갔고, 나는 공중누각을 쌓기 시작했다.
맏형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보내는 데 드는 비용도 걱정이었지만 외국에 나처럼 젊은이를 혼자 보낸다는 것도 걱정이었다.
어머니도 당황해했다. 나와의 이별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포기하게 하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삼촌이 가장 연장자이시니 그분과 상의해야 해. 그분이 동의하시면 생각해보기로 하자.”
형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말했다. “우리는 포르반다르 정부에 요구할 게 있어. 렐리 씨47가 행정관이야. 그는 우리 집안을 존경하고 삼촌에게도 호의를 갖고 있어. 네가 영국에서 공부하는 데 약간의 국가 보조를 받도록 추천해줄 거야.”
나는 그 모든 것이 좋았고, 포르반다르로 떠날 준비를 했다. 당시에는 기차가 없었다. 소달구지로 닷새 길이었다. 앞에서 나는 겁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영국에 가야 한다는 욕망 앞에서 겁이 없어졌다. 나는 욕망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나는 소달구지를 빌려 도라지까지 갔다가, 다시 도라지에서 포르반다르까지는 하루 빨리 도착하려고 낙타를 탔다. 처음으로 타본 낙타였다.
그곳에 도착해 삼촌에게 인사를 하고 모든 것을 말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종교를 손상시키지 않고 영국에 머물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들은 바가 있어서 그래. 유명한 변호사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사는 꼴이 유럽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 그들은 음식도 전혀 가리지 않아. 담배를 입에서 떼지도 않지. 영국인처럼 수치스럽게 옷을 입어. 그 모든 것이 우리 집안의 전통과 맞지 않아. 나는 곧 순례를 떠날 것이고, 살날도 그리 길지 않다. 죽음의 문턱에서 네가 바다 건너 영국에 가는 걸 어떻게 허락하겠니? 그러나 나는 네 길을 막지 않겠어. 결정권은 네 어머니에게 있다. 만일 어머니가 허락한다면 다행이지! 나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전하렴. 너를 축복하며 보내주겠다.”
내가 말했다. “삼촌께는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지만 렐리 씨에게 추천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나 그는 좋은 사람이야. 나와의 관계를 말하고 약속을 받으렴. 그렇게 해주고 도움도 줄 거야.”
삼촌이 왜 추천장을 써주지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막연하게, 그가 비종교적이라고 생각한 나의 영국행을 직접 도와주기 싫어서였으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렐리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가 관사로 오라고 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를 보고 느닷없이 말했다. “먼저 학사 학위를 받고 나를 찾아오너라. 지금은 도와줄 수 없다.” 그리고 위층으로 바쁘게 올라갔다. 나는 그를 만나려고 철저히 준비했다. 문장도 몇 개 외웠고, 낮게 구부려 두 손 모아 인사를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나는 아내의 패물을 생각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맏형 생각도 했다. 그는 나의 잘못에도 관대했고, 나를 아들처럼 사랑했다.
나는 포르반다르에서 라지코트로 돌아와 모든 일을 보고했다. 조시지는 필요하다면 빚이라도 내라고 했다. 나는 2, 3천 루피를 받을 수 있는 아내의 패물을 처분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형은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여전히 반대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상세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머니에게 인도 청년이 영국에 가면 몸을 망친다고 했다. 그들이 고기를 먹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영국에서는 술 없이는 못 산다고도 했다. “이런데 어떻게 하겠니?”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답했다. “저를 못 믿으십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에는 손도 대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조시지가 저를 가게 하겠습니까?”
“나는 너를 믿는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나 너를 멀리 떨어진 나라에 두고 어떻게 믿겠느냐? 나는 어지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베차르지 선생에게 물어봐야겠다.”
베차르지 선생은 본래 모드 상인 종족(Modh Bania)에 속했으나, 지금은 자이나교 승려인 사람이었다. 그도 조시지처럼 우리 가족의 상담자였다. 그는 나를 도와주려고 집으로 와서 말했다. “제가 이 아이에게 세 가지를 지키도록 엄숙하게 맹세시키면 그가 떠나도록 허락할 수 있습니다.” 그가 베푼 서약식에서 나는 술과 여자, 고기를 멀리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허락했다.
중학교에서는 명예롭게도 송별연을 베풀어주었다.48 라지코트의 젊은이가 영국에 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감사의 말을 몇 자 썼다. 그것을 더듬더듬 읽었다. 내가 그것을 읽으려고 일어서자 머리가 얼마나 어지럽고 온몸이 얼마나 떨렸는지 지금도 기억한다.
어른들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뭄바이로 출발했다. 라지코트에서 뭄바이로 떠난 최초의 여행이었다. 형이 동행했다. 만사가 순조로운 듯 보였으나 호사다마라고 하듯이 뭄바이에서 나는 어려운 일을 많이 겪어야 했다.
12. 종족에서 추방됨
어머니의 허락과 축복을 받으며,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남겨두고 나는 신이 나서 뭄바이로 떠났다.49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형에게 6, 7월의 인도양은 거칠고, 나의 첫 여행이기 때문에 11월 이후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가 증기선 하나가 최근 풍랑으로 침몰했음을 알렸다. 그 말을 들은 형은 불안해져 즉시 떠나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며 떠나지 못하게 했다. 형은 나를 친구 한 사람과 함께 뭄바이에 남겨두고 자기 일을 하러 라지코트로 돌아갔다. 그는 내 여비를 매부에게 맡겨두고 친구들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도와주라는 말을 남겼다.
뭄바이에서는 너무나 지루했다. 나는 영국에 가는 꿈만 꾸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종족50 사이에 나의 외국행을 둘러싸고 말썽이 생겼다. 그때까지 모드 상인 종족 가운데는 영국에 간 사람이 없었고, 내가 정말 가게 되면 나는 종족에 불려가 해명을 해야 했다! 종족 총회가 열려 나더러 거기에 출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갔다. 어떻게 그럴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전혀 기죽지 않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는 그 총회에 참석했다. 종족 대표인 호상(豪商)51은 먼 친척으로서 아버지와 막역했기에 나를 달랬다.
“우리 종족의 의견으로는 네가 영국에 가려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우리 종교는 외국 여행을 금하고 있다. 또 영국에서는 우리 종교를 어기지 않고 살 수 없다고들 하는구나. 유럽인과 같이 먹고 마셔야 한다니!”
나는 답했다. “저는 영국에 가는 것이 우리 종교에 전적으로 반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그곳에 가려고 합니다. 게다가 저는 여러분이 가장 우려하는 세 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이미 어머니에게 엄숙하게 약속했습니다. 저는 그 맹세가 저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고 확신합니다.”
대표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가 너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우리의 종교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너는 내가 네 아버지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고 있으니, 내 충고를 반드시 들어야 해.”
내가 말했다. “저는 두 분의 관계를 압니다. 그리고 대표는 저의 어른이십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영국에 간다는 결심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충고자인 현명한 브라만도 저의 영국행을 반대하지 않았고, 제 어머니와 형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종족의 명령을 무시하려고 하느냐?”
“저로선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종족이 이 일에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에 대표는 화가 났다. 그는 나에게 욕을 했다. 나는 움직이지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자 대표는 명령을 내렸다. “오늘부터 이 아이를 종족에서 추방한다. 누구든 이 아이를 도와주거나, 부두에 송별하러 나가는 자는 1루피 4안나의 벌금형에 처한다.”
그 명령은 나에게 아무 효력이 없었다. 나는 대표와 헤어졌다. 그러나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이었다. 다행히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고, 대표가 뭐라고 하든 내가 가도록 허락한 바에는 변함이 없다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그 사건 때문에 배를 탈 일이 더욱 걱정되었다. 그들이 형에게 성공적으로 압력을 가하면 어떻게 될까? 예상도 못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렇게 내가 곤경에 빠져 고심하고 있을 때 주나가드의 어느 변호사가 법정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해 영국으로 가려고 9월 4일에 배를 탄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형이 나를 돌보라고 부탁한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도 그와 함께 가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시간은 급박했다. 형에게 허락해달라는 전보를 쳤더니 허락해주었다.
이어 매형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종족 대표의 명령을 들먹이며 자신은 종족을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집안 친구를 찾아가 뱃삯과 잡비 정도를 융통해주고 그 빚은 형에게 받으라고 부탁했다. 친구는 나의 요구를 선선히 받아주었을 뿐 아니라, 나를 격려해주기까지 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 돈의 일부로 즉시 배표를 샀다. 이어 여행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 일에 경험이 있는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가 옷가지 등을 준비해주었다. 그중 어떤 것은 좋았으나 완전히 싫은 것도 있었다. 넥타이는, 나중에는 매는 걸 좋아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싫어했다. 짧은 재킷은 점잖지 못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런 혐오스러움도 영국에 가고 싶다는 최고의 욕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양식은 여행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친구들이 나의 침대를 주나가드 변호사인 트럄바크라이 마즈무다르 씨와 같은 객실에 마련해주었다. 그들은 또 그에게 나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이가 찬 경험 많은 사람이었고, 세상을 알고 있었다. 나는 세상 경험이 전혀 없는 열여덟 살 풋내기였다. 마즈무다르 씨는 친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9월 4일, 나는 뭄바이를 떠났다.
13. 마침내 런던에
나는 뱃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 불안해졌다. 선원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부끄러워했다. 나는 영어 회화에 전혀 익숙하지 못했는데, 마즈무다르 씨를 빼면 2등 선실 승객은 모두 영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할 때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설령 알아들어도 대답할 수 없었다. 입으로 말하기 전에 마음속에서 모든 문장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나이프와 포크 사용법도 몰랐고, 메뉴 가운데 고기가 들어있지 않을 게 뭐냐고 물어볼 용기조차 없었다. 그래서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언제나 객실에서 식사를 했다. 게다가 식사도 주로 내가 가지고 온 단것과 과일로 했다.
마즈무다르 씨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누구와도 잘 어울렸다. 그는 갑판 위를 마음대로 다녔으나, 나는 온종일 객실에 숨어 지내다가 사람들이 거의 없을 때만 갑판 위에 겨우 나갔다. 마즈무다르 씨는 나에게 승객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편하게 이야기하라고 계속 말했다. 또 변호사는 말을 잘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법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는 나에게 영어로 말할 모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고, 실수란 외국인에게 당연한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부끄러움을 이길 수 없었다.
어느 영국인이 매우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는데,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했으며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등을 물었다. 또 식탁으로 오라고 권했다. 배가 홍해 부근에 다다르자 그는 내가 고기를 절대로 먹지 않으려는 것을 비웃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좋습니다만 비스케이 만52에 가면 결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국은 매우 춥기 때문에 고기 없이는 그곳에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고기 없이 살 수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했다.
“틀림없이 헛소리입니다.” 그가 말했다. “내가 아는 한 그곳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술을 마시면서도 당신에게 술을 권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당신이 고기는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충고 고맙습니다만, 나는 어머니에게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선언했고 따라서 먹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고기 없이 살 수 없음을 알게 되면 거기서 살기 위해 고기를 먹기보다는 인도로 돌아가겠습니다.”
배가 비스케이 만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고기나 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모으라는 충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 영국 친구에게 한 장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쾌히 써주었고, 한동안 나는 그것을 보관했다. 그러나 그 뒤 고기를 먹어도 그런 증명서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을 보고 흥미를 잃었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증명서를 가진들 무슨 소용인가?
내 기억에 우리가 사우샘프턴53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배에서는 검은 옷을 입었지만, 배에서 내릴 때 입으려고 친구들이 마련해준 흰 플란넬 양복을 특별히 간직했다. 육지에 내릴 때 흰옷이 더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기에 흰 플란넬 양복을 입은 것이다. 그때는 9월의 마지막54이었고 그런 옷을 입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린들리 회사 사람에게 짐을 맡기는 것을 보고 나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해 짐을 맡겼는데 열쇠도 그 안에 포함되었다.
내게는 소개장이 넉 장 있었다. 메타 의사, 달파트람 슈클라 씨,55 란지트신 왕자, 다다바이 나오로지56에게 소개하는 것들이었다. 배에서 누군가가 런던에 가면 빅토리아 호텔에 드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그래서 마즈무다르 씨와 나는 그리로 갔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뿐이라는 부끄러움을 더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짐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을 호텔에서 들어 화가 났다.
사우샘프턴에서 메타 의사에게 전보를 쳤더니 같은 날 8시에 찾아왔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환영했다. 플란넬 양복을 입은 것을 보더니 웃었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털모자를 들고 얼마나 부드러운지 보려 하다가 손을 잘못 놀려 털을 망쳐버렸다. 메타 의사는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약간 화를 내며 말렸다. 그러나 실수는 이미 저지르고 말았다. 그 일은 미래에 대한 경고가 되었다. 이것이 유럽의 예의에 대한 나의 첫 수업이었다. 그것에 대해 메타 의사는 재밌게 상세히 말해주었다.
“남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 것. 인도에서 보통 하듯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질문하지 말 것. 크게 떠들지 말 것. 인도에서 하듯이 사람들에게 말할 때 ‘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말 것. 그건 하인이나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이야” 등등이었다. 또한 그는 호텔에서 지내는 건 매우 비싸므로 가정집에서 살기를 권했다. 우리는 월요일까지 그 문제를 미루기로 했다.
마즈무다르 씨와 나는 호텔이 골치 아픈 곳임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너무 비쌌다. 그러나 몰타에서 배를 함께 타서 마즈무다르 씨와 친구가 된 어느 신드(Sindhi) 사람이 자신은 런던이 처음이 아니므로 우리에게 방을 찾아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월요일 짐을 찾자마자 호텔에 돈을 치른 후 그가 빌려준 방으로 갔다. 나는 호텔비가 충격적인 3파운드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처럼 거액을 내고서도 나는 사실 굶주렸다! 아무것도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가 맞지 않아 다른 것을 주문하면 두 가지 값을 물어야 했다. 그동안 내가 먹은 것은 뭄바이에서 가져온 양식이었다.
새로 들어간 방에서도 불편했다. 집과 조국 생각이 끝없이 났다. 어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없었다. 밤이면 눈물이 두 뺨 위로 흘러내리고 고향에 대한 갖가지 추억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누구와도 나의 비참함을 나눌 수 없었다. 설령 그렇게 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를 위로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사람들, 생활 방식, 심지어 그들의 집도 낯설었다. 영국의 예의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으니 끊임없이 주의해야 했다. 채식의 맹세 때문에 더욱 불편했다. 심지어 내가 먹을 수 있는 요리조차 무미건조했다. 그래서 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영국을 견딜 수 없었지만, 인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왔으니 3년은 마쳐야 한다고 내 마음의 목소리가 말했다.
14. 나의 선택
월요일, 메타 의사가 나를 만나러 호텔에 왔다. 그는 우리가 떠난 것을 알고 우리의 새 주소를 알아내 우리 방으로 찾아왔다. 나는 배에서 너무나 바보스럽게도 피부병에 걸렸다. 세탁과 목욕시에 비누가 풀리지 않는 바닷물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비누를 사용하는 것이 문명의 상징인 줄 알고 비누를 사용했고, 그 결과 피부가 깨끗해지지 않고 끈적끈적해졌다. 그래서 피부병에 걸렸다. 메타 의사에게 보였더니 초산을 바르라고 했다. 초산을 바르고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도 기억한다.
메타 의사는 방과 시설을 둘러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곳은 좋지 않아. 우리가 영국에 온 목적은 공부 못지않게 영국의 생활과 풍습을 경험하기 위해서야. 그렇게 하려면 영국인 가족과 살아볼 필요가 있어.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연습 기간을 갖는 게 좋아. 그곳에 데려다주지.”
나는 그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친구57의 방으로 이사했다. 그는 너무나도 친절했다.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고 영국의 습관과 예의를 가르쳐주었으며 영어로 말하는 것을 익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음식은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소금이나 양념 없이 요리한 삶은 채소를 먹을 수 없었다. 그 집 주부는 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아침에는 오트밀 죽을 꽤나 배부르게 먹었으나, 점심과 저녁은 언제나 배가 고팠다. 친구는 나에게 계속 고기를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언제나 나의 맹세를 지키며 침묵했다. 점심과 저녁으로 우리는 시금치, 빵, 잼을 먹었다. 나는 잘 먹었고 위도 컸지만 빵을 두세 조각 이상 달라고 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해 부끄러워했다. 게다가 점심과 저녁에는 우유가 없었다.
이런 상태를 보다 못해 친구가 말했다. “네가 만일 내 동생이라면 나는 너를 쫓아내겠어. 무식하고 이곳 형편을 전혀 모르는 어머니에게 한 맹세가 무슨 가치가 있지? 그건 맹세도 아니야. 법으로는 맹세로 취급되지도 않아. 그런 약속에 매인다는 건 정말 미신이야. 그런 고집은 여기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 너는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고 고백했어. 너는 전혀 필요 없는 곳에서는 고기를 먹고, 정말 필요한 곳에서는 먹지 않고 있어. 정말 답답해!”
그러나 나는 철석같았다. 친구는 매일 그런 주장을 했으나 나는 영원한 부정으로 그에게 맞섰다. 그가 주장하면 할수록 나는 더욱더 타협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나는 신에게 보호해달라고 빌었고 그것을 얻었다. 신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믿음 때문에 가능했다. 착한 유모 람바가 씨를 뿌린 그 믿음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벤담58의 《공리주의론》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말이 너무 어려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했다. “용서하게나. 이처럼 어려운 것은 능력 밖이야. 고기 먹을 필요가 있음을 인정해. 그러나 맹세를 깰 수는 없어. 그것에 대해 나는 토론할 수 없어. 토론으로 너를 이길 수 없음은 분명해. 그러니 나를 바보나 고집쟁이로 알고 포기해줘. 나에 대한 네 사랑에 감사하고, 내가 잘되길 바라는 것도 알아. 네가 나에게 거듭 말하는 것도 네가 나를 생각해서인 줄 잘 알아. 그러나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어. 맹세는 맹세야. 그걸 깨뜨릴 수 없어.”
친구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책을 덮고 말했다. “좋아. 더는 말하지 않을게.” 나는 기뻤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다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 대한 걱정을 그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담배도 피고 술도 마셨지만 나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실은 두 가지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유일한 걱정은 내가 고기를 먹지 않으면 몸이 너무 약해지고, 그 결과 영국에서 편안히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한 달 동안 내가 신참으로 견습한 이야기다. 친구 집은 리치몬드에 있어서 런던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메타 의사와 달파트람 슈클라 씨는 나를 가정집에 두기로 결정했다. 슈클라 씨는 웨스트 켄싱턴에 있는 영국-인도 혼혈인 가정이 적당하다고 생각해 나를 그곳에 살게 했다.
집주인은 과부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 맹세에 대해 말했다. 노부인이 나를 잘 돌봐주겠다고 약속해 그 집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여기서도 굶어야 했다. 나는 집에다가 단것과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으나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맛이 없었다. 노부인은 매일 음식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전히 부끄러워 내 앞에 놓인 것 이상을 달라고 하지 못했다. 그 집에는 두 딸이 있었다. 그들이 내게 빵 한두 조각을 더 먹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덩어리가 있어야 내 배가 찬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나는 내 길을 찾았다. 아직 정규 공부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나는 슈클라 씨 덕분에 신문 읽기를 시작했다. 인도에서는 신문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규칙적인 신문 읽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데일리 뉴스》, 《데일리 텔레그래프》, 《팔말 가제트》를 훑어보았다.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리고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 식당을 찾아다녔다. 시내에 그런 곳이 있다고 노부인이 알려주었다. 나는 매일 10~12마일씩 걸어 값싼 식당에 가서 빵으로 배를 채웠지만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런 방랑 끝에 우연히 페링던 가(Farringdon Street)에서 채식 식당을 발견했다. 그곳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너무나도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출입구 옆 창문 아래 팔려고 진열한 책을 보았다. 그중에서 솔트(Henry Salt)의 《채식주의자를 위한 변명》을 보았다. 1실링에 그 책을 사서 식당으로 바로 갔다. 그날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실컷 먹었다. 신이 나를 도운 것이다.
나는 솔트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그 책을 읽은 날부터 나는 스스로 선택하여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머니 앞에서 맹세한 날을 축복했다. 나는 그때까지 진실과 맹세를 지키려고 고기를 먹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인도인이 고기를 먹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고기를 먹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내 사명이 되었다.
15. 영국 신사 흉내
채식주의에 대한 믿음은 나날이 자라났다. 솔트의 책을 읽고 음식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채식주의에 대해 구할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었다. 그중 하나인 하워드 윌리엄의 《식사의 윤리》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인간의 식사에 대한 문헌의 전기식(傳記式) 역사’였다. 그 책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나 예수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자와 예언자가 채식주의자였다.
의사 안나 킹스퍼드의 《완전한 식사법》도 매력적이었다. 건강과 위생에 대한 의사 엘린슨의 책도 매우 유용했다. 그는 환자의 음식조절에 근거한 치료법을 주장했다. 스스로가 채식주의자로서 환자들에게 엄격한 채식을 처방했다. 이 모든 문헌을 읽은 결과, 채식 추구는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건강이 최고 관심사였으나 그 뒤에는 종교가 최고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에 대한 친구의 걱정은 그치지 않았다.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는, 내가 육식을 계속 반대하면 몸이 허약해질 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바보가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채식주의 책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자 그는 내 머리가 둔해지지 않을지, 그런 것을 추구하며 시간을 허비해 공부를 잊고 괴짜가 되지 않을지 걱정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바꾸려는 최후의 노력을 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극장에 초대했다. 연극을 보기 전에 우리는 홀본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은 빅토리아 호텔 이후 처음 보는 대궐 같은 식당이었다. 빅토리아 호텔에 묵었던 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냈기 때문이다. 친구가 나를 홀본 식당에 데리고 온 것은 분명히, 체면 때문에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한 탓이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하는 식당 중앙에서 우리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먼저 수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