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 제르맹Sylvie Germain
창조적인 서사 전개와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실비 제르맹은 1954년 프랑스 샤토루에서 태어났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곳곳을 떠돌며 유년 시절을 보냈고, 소르본대학에서 저명한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했다. 박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프라하로 건너가 철학을 가르쳤다.
1981년부터 틈틈이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1984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밤의 책』으로 여섯 개의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호박색 밤』 이후 출간한 세번째 장편소설 『분노의 날들』로 1989년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2005년 ‘고등학생들이 선정하는 공쿠르상’ 수상작 『마그누스』 외에 『숨겨진 삶』 등 많은 소설을 발표했다. 2016년 프랑스 문화재단에서 수여하는 치노 델 두카 국제상을 수상했다.
무력한 개인이 엄혹한 세계와 화해해가는 과정을 몽환적인 상상력과 치밀한 필치로 그려낸 실비 제르맹의 작품들은 ‘새로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2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김화영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알베르 카뮈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십여 년간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같은 대학 명예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바람을 담는 집』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 『문학 상상력의 연구』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발자크와 플로베르』 『행복의 충격』 『한국 문학의 사생활』 『여름의 묘약』 『김화영의 번역수첩』 등이 있고, 알베르 카뮈 전집(전20권), 『다다를 수 없는 나라』 『어린 왕자』 『섬』 『마담 보바리』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그리고 모디아노의 『신혼여행』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청춘 시절』 『팔월의 일요일들』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cover illust ⓒEditions Gallimard
La Pleurante des rues de Prague
by Sylvie Germain
Copyright ⓒ Editions Gallimard, 1992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MUNHAKDONGNE Publishing Corp., 2006
This Korean Edition wa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Editions Gallimard through Sibylle Books Literary Agenc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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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형제자매들에게
물시계가 내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오래전부터 우리는 눈물로 세월을 헤아리고 있는 것을.
천사를 초대할 수 있다면 그건 멋진 일일 것이다.
그러나 천사가 우리를 초대한다면
그건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블라디미르 홀란
1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가 들어왔다, 문득. 그러나 그녀가 책의 주위를 배회한 지는 벌써 여러 해가 된다. 그녀는 책을 살짝 건드리곤 했다. 하지만 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들을 들춰보았고 심지어 어떤 날은 낱말들을 기다리고 있는 백지상태의 페이지들을 소리나지 않게 스르륵 넘겨보기까지 했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그 여자는 책 속으로 슬쩍 미끄러져들어왔다. 잠자는 사람에게 꿈이 찾아와 그의 잠 속에 퍼지면서 온갖 영상들을 찍어넣고 그의 피와 숨에 가느다란 목소리의 메아리를 섞어놓듯이 그녀는 책갈피 속으로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녀는 어디나 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면 어디든 끼어들고 나무기둥이나 다리의 교각이나 마찬가지로 벽도 쉽사리 통과한다. 그녀에게는 어떤 물질도 장애가 되지 않는다. 돌도 쇠도, 나무나 강철도 그녀의 내닫는 충동을 가로막거나 붙잡지 못한다. 어느 물질이나 그녀에게는 흐르는 물과 다름없다.
그 여자는 절대로 뒷걸음치는 법 없이 곧장 앞만 보고 나아간다. 그녀의 방황은 어떤 비밀스럽고 다급한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방향감각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엉뚱하다. 인적 없는 거리 한복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기도 하고 이렇다 할 이유 없이 옆길로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떤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방 안이나 부엌, 혹은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을 지나가는 전차 안 같은 어딘가에서 견딜 수 없는 고독, 고통 혹은 두려움에 짓눌려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말이다.
그녀를 이처럼 깨워서 움직이게 한 심장의 고동소리가 오래전에 이미 꺼져버린 심장의 그것인 경우도 없지 않다.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들 못지않게 죽은 사람들과도 옷소매를 스친다. 그녀의 귀는 가장 가느다란 숨소리나 가장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도 지각한다.
수천 번 말랐다가 다시 살아난 잉크색이 늘 그녀의 발자국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 여자가 책 속을 깊숙이 파고 들어왔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마치 바람처럼.
그 여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녀 생각을 하지 않는 때와 장소에 소리소문 없이 불쑥 나타난다. 그러고는 주의를 독차지한다. 그녀는 자신이 자아낸 놀라움과 자기가 초래한 대혼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간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녀는 결코 뒤를 돌아보는 일 없이 걸어간다. 그냥 자기 갈 길만 간다. 그러나 그 길이 어디로 인도하는 것인지, 어떤 힘이 그녀의 걸음에 리듬을 부여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이 그녀를 떠밀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떠돌아다니는 개들처럼, 방랑자들처럼, 바람에 불려다니는 나뭇잎처럼 지나간다.
그녀가 지나가면 바람이, 잉크의 바람이 일고 그녀의 발자국 속에는 숨소리가 난다.
여기 이 책은 오직 그녀의 발자국들로만 이루어진 것이기에 이 역시 우연이 시키는 대로 나아간다.
2
그러나 우연이 어떻단 말인가? 그것은 때로는 행운과, 때로는 불운과 혼동된다. 그리고 위험, 의혹, 위기, 그리고 모험의 의미도 거기에 연관된다. 우연이라는 개념은 너무나도 정의하기 어렵고 막연한 것이어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이 이상한 떠돌이 여자의 출현을 관장하고, 벽을 뚫고 지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그 우연이란 것은 우발적인 것으로 귀착될 수 없다. 변덕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 떠도는 여자에게는 너무나도 심각한 데가 있고, 이 거리 저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그녀의 태도에는 너무나도 큰 참을성과 견디는 힘이 있으며, 그녀의 덧없는 출현에는 너무나도 강한 힘이 느껴진다.
불쑥 나타나기만 하면 그녀는 가시적인 것의 한계를 부숴버리고 시각을 압도하고 모든 감각의 주의를 휘어잡아 심장에 경종을 울리니 말이다.
사실상 전체를 한눈에 포괄해보지도 못하고 정확한 지표도 없이 더듬더듬 나아가고 정처 없이 에둘러 가는 것은 오직 이 텍스트의 글쓰기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러나 가시성의 공간 속에서 이따금씩 불쑥 불쑥 나타날 뿐인 한 낯선 여자가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닌 궤적을 어떻게 기록하면 좋을 것인가?
바람, 그녀의 발걸음 속에 부는 잉크의 바람에 불려 낱말들이 허리를 구부리며 간신히 균형을 잡고, 망각의 경계에 이른 기억 속에 깊이 파묻혀 있던 이미지들의 뿌리가 뽑힌다. 그리고 오직 단편적이고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책의 페이지들이 벌써부터 낱장으로 흩어진다.
3
이 낯선 여자, 그녀는 누구일까?
스스로 환영들을 지닌 채 도처에 환영들을 뿌리고 다니는 하나의 환영.
자신을 나타내는 데 인색한 어떤 환영. 그 여자는 겨우 몇 번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것도 언제나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그러나 매번 그녀의 현전現前은 극한적이었다.
어떤 한 장소에 관련이 되어 있고 도시의 돌들에서 솟아난 하나의 환영. 그녀의 도시, ─프라하. 그녀는 결코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여자는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없다. 어쩌면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늘 감추고 있다.
그녀의 몸은 위풍당당하고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그녀는 엄청나게 큰 거인이다. 그리고 심하게 다리를 전다. 그녀의 왼쪽 다리는 오른쪽 다리보다 훨씬 짧다. 그녀는 대단히 무거운 듯 힘겹게 발을 들어올리지만, 발을 땅에 내려놓을 때는 더욱 힘겨워하는 것 같다. 마치 땅에 닿으면 큰 상처를 입기나 할 것처럼.
그녀의 옷은 거친 천을 아무렇게나 재단하여 만든 단순한 것이다. 덩치가 크고 별로 우아하지 못한 몸은 황마나 삼베 천조각의 옷을 입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저 그 천에 감싸여 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녀가 어깨에 걸친 소매 없는 망토는 발목까지 내려오는데, 꼭 무슨 공사장 가림막의 방수포 조각을 찢어내서 만든 것만 같아 보인다.
과연 건물의 정면을 덮고 있는 가림막 틀이 그만큼 많이 서 있는 것이었다. 그 파이프 막대들은 녹이 슬어 있고 그 밑에는 풀이 돋아나 자란다. 어떤 거리들은 그 부식된 쇠와 썩은 나무로 된 약식의 구조물에 통째로 다 뒤덮여 있다. 거기에는 더이상 해가 들지 않는다. 임시 통로들 밑에 고이고 쌓인 그늘이 점차로 견고하게 굳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건물들의 정면 벽에서 떨어진 돌이나 석고 쓰레기들이 잔뜩 널린 사이로, 이가 맞지 않는 각목들로 세운 임시 통로들 위에는 새들이 집을 짓고 잠들어 있다.
발뒤꿈치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옷은 승복 같은 것이다. 주름마다 그림자가 져서 거무죽죽해 보인다. 그러나 그 승복은 올이 닳고 닳아서 이젠 더이상 찢어질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옷단의 실밥이 풀어져 포석의 바닥에 끌리면서 먼지와 흙탕으로 온통 더럽혀지고 있다.
여자는 자신의 옷차림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음이 너무 헐벗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은 원래 그런 법이다. 가슴이 어둠에 잠기고 생각이 인적 없는 길들을 따라 풀어 흩어지는 사람들의 몸은 그 무슨 옷으로도 가릴 수가 없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몸이 무겁지만, 그리고 아주 눈에 띄게 다리를 절지만 그 여자는 걸을 때 전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한데도 몸은 수런거리는 소리를 낸다.
수런거리는 바람소리 같은 것이 그녀의 옷 주름들 속에서 떨리고 있고 잉크의 은근한 소곤거림이 그 속에서 가볍게 끓는다. 아니면 그건 눈물인가?
첫번째 나타남
누가 문턱 가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나,
누구의 발소리가 영혼 속에서 부스럭거리는가,
고독은 누가 다가오는 것을 예감하는가,
누가 들어오는가, 지금 나는 누구에게 묻고 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보후슬라프 레이네크
그녀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어느 가을날 저녁, 구시가의 골목에서였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건물들의 옆구리에 잊은 채 그대로 둔 오래된 가림막 틀에서 풍겨나오는 녹과 벌레먹은 나무의 악취가 안개 냄새에 섞이고 있었다.
가을이 끝나가면서부터, 그리고 겨울 동안 줄곧, 프라하에서 안개는 무슨 냄새가 나고 심지어 물질적 질감까지 느껴진다. 어떤 저녁이면 안개는 거의 손에 만져질 정도로 단단하고 주황색 물이 들어 있다. 도시에 피어오르는 연기로 안개가 부풀어오르고 물이 든다. 아탄의 먼지가 공기중에 떠돌면서 맵싸한, 그러면서도 그윽한 맛을 풍긴다. 도시들에도 몸처럼 냄새가 있다. 피부가 있다.
그 거대한 여자는 푸르스름한 빛이 어린 골목을 쩔뚝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가림막 틀에 가린 어느 집 큰 대문에서 지금 금방 나온 걸까? 약간 회색빛이 도는 상아색 모시 숄로 감싼 그녀의 머리는 가설 통로들의 이층 높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갈색의 큼직한 두건은 그녀의 목 주위에서 약간 벌어져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가설 통로를 떠받치고 있는, 벌써부터 영 신통치 않은 상태의 발판을 건드려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그녀가 걸을 때 몸이 그만큼 흔들리는 것이었다. 또 그녀의 양어깨가 그만큼 널찍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느다란 배관들을 아주 가볍게 약간 스쳤을 뿐이다. 그녀의 큼직한 몸은 언제나 그처럼 유연하게만 흔들리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황혼녘의 안개 속에서 고요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가로등의 흐릿한 불빛 때문에 그녀의 옷 색깔이 달라져 보였다. 모든 것이 네온 불빛으로 파열된 수족관의 색깔처럼 약간 서늘하게 퍼진 녹색을 띠고 있었다. 골목 여기저기에 놓인 키 높은 양철 쓰레기통들이 은빛 광채로 빛났다.
그 여자는 몇 미터 떨어진 내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지 않은 채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그렇게 처음으로 나타났을 때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이 어떤 환영의 나타남 같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그 거인여자가 나타날 때 그랬듯이 갑작스레 사라졌을 때, 그 놀라움은 어떤 초자연적인 광경을 보았을 때 같은 경악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박명의 어둠이 구석구석 쌓여 있었고, 건물 정면의 우묵하게 들어간 곳들에는 그토록 많은 대문들이 뚫려 있었으며, 안개가 그토록 짙게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거인여자가 골목길 한가운데 떨고 있는 가느다란 한줄기 불빛에서 비켜나 내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기는 그만큼 쉬웠다.
아니다, 놀라움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호기심이라는 역동성이 아니라 마법의 신비스러움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 놀라움은 이제 겨우 태동하는 정도였을 뿐 아직은 의식의 표면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태어나고 있는 중인 어떤 꿈의 저 변두리에서 부화하는 중이었다.
그 놀라움은 어렴풋한 심장의 꿈틀거림 같은 것이었다.
두번째 나타남
안개가 영혼들의
저울처럼 펼쳐졌다.
모든 것이 자란다, 모든 것이 가까이 있다.
어떤 천사가 기다림의 외침 속에서
부활의 트럼펫을 벼리고 있다.
─보후슬라프 레이네크
두번째는 내가 그녀를 그저 흘끗 보았을 뿐이다. 이번에도 또 구시가의 거리에서였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 안개가 더 짙게 끼어 있었다. 그러나 저녁이 내린 것은 아니어서 가로등은 하나도 켜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침한 회색의 시간을 낮이라고 이름하기는 어려웠다. 하늘이 너무나도 나직하게 걸려 있어서 집의 지붕들 위로 기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빛은 없었다. 안개가 낮의 빛을 부식시켜버린 것이었다.
‘작은 광장’의 우물전 주위에 둘러쳐놓은 철책이 눈에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