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서는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6A4026424)
머리말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심은 필자의 전공이 미국연극과 미국영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민자들의 나라로 세워진 미국은 건국의 주역인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들WASP이 나라를 세운 후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들로 채워져 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처럼 본인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잡혀 온 이민자들도 있었지만,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꿈을 쫓아 건너온 후속 이민자들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점차 세워 갔다.
처음에 주도적으로 미국을 건설한 유럽 출신 백인들은 철저한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백인 중심의 가치관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다. 여기서 배제된 종족들은 타자로 구축되어 모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폄하되었다. 유럽에서 후발대로 건너온 아일랜드계, 이탈리아계, 슬라브계 등의 이민자들도 처음에는 앵글로색슨 신교도 문화와의 차이로 인해 타자로 치부되고 종종 차별받았지만, 똑같은 백인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구별하기 쉽지 않아 주류 백인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갔다. 그러나 외모상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아프리카계, 라틴계,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북미 원주민들은 태생적인 차이로 인해 타자라는 표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1960년대에 백인 중심의 제도권을 겨냥한 민권운동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청년들이 기성세대에 반대하는 반문화운동과 여성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 반발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미국 사회는 격변을 겪게 되었다. 사람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정치적 올바름”이 사회의 화두가 되고, 지금까지 등한시되고 무시되었던 타자들의 문화와 정체성이 부상했다.
이론적으로 다문화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식민주의의 잔재를 극복하고 현재의 문화에 남아 있는 식민주의적 시각이나 세계관을 불식시키려는 탈식민주의와도 연관이 된다. 1980년대 이후 미국문학은 정전에 속하는 미국의 낭만주의 문학, 사실주의 문학, 모더니즘 문학 중심에서 다문화주의 문학으로 범위를 확장했고, 최근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학자들의 연구 또한 탈식민주의나 다문화주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
그동안 마샤 노먼과 베스 헨리 등의 페미니즘 연극, 수잔 로리 팍스 등의 아프리카계 연극, 줄리아 조・성노・필립 고탄다 등의 아시아계 연극, 토니 커쉬너 등의 게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해 왔던 필자는 영화에서의 다문화주의로 관심을 넓히게 되었고, 한국연구재단의 저술 지원을 받아 본 저서를 집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결혼이주민, 이주노동자, 탈북자 등이 우리나라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국 국민들과 갈등을 겪고 비극적인 일을 당하거나 상처와 앙심을 품고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꿈꾸는 상황을 보면서 촉발되었다. 우리보다 먼저 다문화 사회를 경험한 미국과 유럽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해하는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술 동기였다.
다문화주의는 접근하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알리 라탄시, 로버트 스탬, 마르코 마르티니엘로 등 많은 학자들이 그 모호성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필자는 이 책에서 인종적・문화적으로 세분화된 영화들의 분석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부분을 보강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한국의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였다. 어쩌면 다문화주의 자체가 “지배적인 전통 밖에서 서로 다른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시작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운동”(Willett 1)이기 때문에 일원화된 이론적 체계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 과제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성 있는 주제를 설정하는 것이 저서의 통일성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주제를 분석 대상이 되는 모든 영화에 포괄적으로, 또 어떤 영화에서는 한정적으로 적용하였다.
첫째는 이미지와 스테레오타입 연구이다. 페미니즘 영화 이론이 처음 등장할 때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스테레오타입화되었는가를 다루는 여성 이미지 연구를 서두로 출발했던 것처럼, 다문화주의 이론에서도 백인의 눈에 비친 비백인non-white에 대한 연구가 이미지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스테레오타입은 미국영화의 경우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라틴계 미국인 등에서 표현되었고, 한국영화에서도 결혼이주민, 이주노동자, 탈북자를 특징짓는 스테레오타입들이 빠른 시간 안에 설정되고 소비되었다.
둘째는 인종차별주의이다. 유럽과 미국의 다문화주의가 다루는 가장 많은 주제 중 하나는 유럽 중심, 백인 중심의 세계에서 주류문화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핍박을 받아 왔는가이다. 따라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인종의 스테레오타입은 바로 인종차별을 위한 기표로 이용되었고, 백인만이 옳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셋째는 다문화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인종차별주의 고발과 비판이 영화 <크래시>나 한국의 몇몇 다문화주의 영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보편적인 인간애에 호소함으로써 백인 혹은 주류사회의 주체들을 변호하고 타자의 스테레오타입 강화를 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문제이다. 모든 문화가 동등하게 상호 공존하자는 주장이 문화상대주의와 지적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넷째는 초국가주의라는 이슈이다. 다문화적인 사회는 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발생한다. 유럽에 살던 유럽인들의 북미 대륙 이주, 아프리카・중남미・아시아에서 살던 사람들의 북미 이주, 과거 유럽 식민지였던 나라 출신자들의 프랑스 혹은 영국 이주, 코리언 드림을 찾아 결혼 혹은 취업을 통해 한국을 찾은 동남아와 중국, 북한 사람들의 이주 등이 다문화 사회가 생성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오늘날 영화의 제작 환경 또한 많이 바뀌었으며 국경을 넘는 영화인과 제작자들의 연대 또한 일어나고 있다. 전에는 영화가 국적으로 분류되고, 그 나라의 언어뿐 아니라 문화와 정치, 가치관 등을 같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바뀌어서 글로벌화된 시장을 겨냥하여 만드는 영화들은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다.
이 책의 목차는 미국영화에 경도된 필자의 시각을 반영한다. 다문화주의는 미국과 유럽에서 시작된 현상이지만, 이 책에서는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미국의 다문화주의에 할애한다. 우선 미국에서 가장 일찍 다문화 종족으로 핍박과 차별을 받아 온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국 내에서 점점 더 인구와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능가하는 인구 집단이 된 라틴계 미국인, 인디언 보호구역에 수용되어 거의 사라져 갈 위기에 처한 북미 원주민 등을 다룬 후 성적 지향성의 측면에서 주류와 다른 문화에 속하는 게이 레즈비언 영화를 분석하였다.
주변부의 부상과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이 기존의 백인 주체들과 제도권에 미치는 영향은 <그랜 토리노>에서 마초 백인 남성성의 변화와 다문화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크래시>는 인종차별이 단지 백인과 흑인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계, 아랍계, 라틴계 미국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인종의 용광로에서 이들이 영화의 제목처럼 어떻게 충돌하며 오해하고 스테레오타입을 강화 혹은 불식시키는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유럽의 다문화 영화는 영국에 사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와 <슈팅 라이크 베컴>, 그리고 초국가적 영화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보여 주는 <인 어 베러 월드>를 다루었다. 아쉽지만 이 주제는 더 많은 연구와 공부가 필요한 분야로 남겨 두었다.
한국의 다문화 영화는 한국영화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많이 연구되었다. 또한 최근에 인기를 끈 <범죄도시>를 비롯하여 탈북자, 중국 동포, 이주 노동자를 다룬 영화들이 계속해서 제작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한국의 다문화 구성원들을 결혼이주민 여성, 이주노동자, 탈북자로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서 각각을 대표하는 영화들을 세 편씩 분석하여 그 공통점과 한계점을 파악하려고 하였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일부는 그동안 개별적인 논문으로 학회와 학회지에 발표된 것들로, 피드백을 거쳐 단행본 형식으로 다시 편집되었다. 글로벌화와 초국가주의 현상이 가속도를 더해 가는 이 시점에서, 또한 한국 내에서의 다문화 현상이 점점 우리의 관심과 행동을 요구하는 이 시점에서 ‘다문화주의와 영화’라는 주제를 책으로 엮어 내게 된 것을 보람으로 생각한다. 이 책이 다문화주의와 영화를 이해하려는 연구자와 독자들에게 흥미롭고 유익하게 읽히길 바라며 이 연구를 지원해 주신 한국연구재단과 출판을 기꺼이 맡아 주신 앨피출판사에 감사 드린다.
2018년 12월
이형식
우리나라의 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처럼 보인다. 2007년에 100만을 돌파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숫자는, 2018년 9월 현재 237만여 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4.2퍼센트에 해당한다. 산업노동자를 비롯하여 불법이주민, 결혼이주민 등으로 증가되는 외국인의 한국 사회 유입은 해마다 증가 추세이다. 그중에서 중국인이 107만여 명으로 1위, 베트남인이 19만 7천여 명으로 2위, 태국인이 19만 6천여 명으로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순혈주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문화와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2007년에는 재한외국인처우기본법이 제정되었고,2008년에는 제1차 외국인 정책기본계획(2008~2012)이,2012년에는 제2차 외국인 정책기본계획(2012~2017)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에게 피부색과 문화와 언어가 다른 다문화이주민과 같은 공간과 직장에서 생활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사실이며,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은 도처에서 갈등의 불씨를 내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눈에 띄게 두드러진 현상이면서도 이를 정의하는 단어인 ‘다문화주의’라는 말은 각 학문적 영역에서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정부의 복지정책 차원에서, 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문화 교육적인 차원에서, 문학과 예술 분야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이러한 이름을 붙인 각종 단체와 연구소들도 넘쳐나고 있다. 예를 들어, 문화콘텐츠기술연구원 다문화콘텐츠사연구사업단에서 펴낸 《다문화주의의 이론과 실제》는 우리나라에서의 다문화주의 논의와 교육 현장, 복지 서비스,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방면에 대한 연구서이며,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은 ‘국경 없는 마을 공부모임’에서 나온 토론의 쟁점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다문화주의
다문화주의라는 학문 영역 자체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다문화 사회 문제가 대두되면서 정부는 정부대로, 학계는 학계대로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동상이몽일 경우가 많다. 또한 다문화주의와 관련된 학회와 학문적 접근도 많은 경우에 사회복지적 차원과 현실적인 차원에서 다문화 이주민들을 어떻게 도움을 줄 것인가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서구 사회도 마찬가지다. 다문화주의의 모호성에 대한 당혹감이 곳곳에 배여 있다. 알리 라탄시AliRattansi는 “다문화주의의 용인된 정의는 언제나 악명 높은 정도로 모호했다elusive”(7)라고 말하고 있으며, 로버트 스탬RobertStam 또한 “다문화주의라는 단어는 실체essence가 없다. 그것은 그저 논란을 가리킬 뿐이다”(Film Theory, 270)라고 말하고 있다. 마르코 마르티니엘로MarcoMartiniello는 다문화주의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분야에 따라, 학파에 따라, 그리고 국가에 따라”(86)의미의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다문화주의 자체가 “지배적인 전통 밖에서 서로 다른 시각의 다양성을 존중하려고 시작된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운동”(Willett 1)이기 때문에 일원화된 이론적 체계가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경험한 유럽에서 등장한 다문화주의는 그동안 유럽 중심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로 타자를 지배했던 유럽의 자기반성적인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타자를 무시하고 지배하려고 했던 자세에서 타자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자세로, 서구적인 시각으로 단일화되었던 세계관과 가치를 복수의 세계관과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로 전환하려는 것이 바로 다문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배상준은 “다문화주의는 근대 이후의 세계문화가 유럽의 백인 중심으로 주도되어 오면서 나타난 다수자와 소수자 간의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계급에 따른 문화적 소수자의 지위와 권리 그리고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82)라고 주장하며, 최성희는 “유럽 중심주의와 문화적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제시된 다문화주의는 하나의 문화에서 복수의 문화로, 이성과 계몽의 이름으로 ‘타자’를 계도하고 지배하는 문화에서 다양성과 독자성을 인정하는 문화로, 문화와 좌표를 충돌에서 공존으로 옮겨 놓았다는 점에서 해방적 전복적 의미를 지닌다”(3)고 지적한다.
서구에서 다문화주의는 학문적으로 볼 때 버밍엄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 연구가 발달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발전되었다. 더글러스 켈너DouglasKellner는 〈문화 연구, 다문화주의, 미디어 문화CulturalStudies,Multiculturalism,andMediaCulture〉에서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계층의 재현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그리고 다양한 압제의 형식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문화 연구는 문화가 어떻게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피지배 계층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하는지 보여 주는 다문화주의 프로그램에 적합하다”(10)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텔레비전, 영화, 미디어에 어떠한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코드화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문화 연구가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알리 라탄시는 호주와 캐나다, 유럽에서의 다문화주의에 집중하면서 호주와 캐나다에서의 백인 위주 이민 정책의 폐지가 다문화주의 담론의 등장에 크게 기여를 했다는 입장을 취한다. 라탄시는 다문화주의는 반드시 인종차별주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에서는 다문화주의를 다인종multi-ethnic주의와 호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는 ‘다문화주의’라는 용어가 “비백인 종족 집단이 학교와 대학 커리큘럼에서 자신들을 문화적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199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대중적인 어휘에 진입하게 되었다”(11)고 지적한다.
다문화주의는 문자적인 뜻으로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해 나가는 사회를 현실로 파악하고 이해하며 대응해 나가는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의미하지만, ‘문화’는 ‘인종race’이라는 배경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재니스 웰쉬JaniceWelsch와 제이 큐 애덤스J.Q. Adams는 인종은 하나밖에 없으며 모든 인간은 ‘인류humanrace’에 속한다면서, 인종에 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종족성ethnicity에 대한 논의라고 주장한다(xiv).
실제로 미국의 백인들은 자신의 종족적 근원ethnicorigin을 표기할 때 ‘독일계’ ‘이탈리아계’ ‘프랑스계’ ‘아일랜드계’ 등 국가적 근원으로 수렴하지만, 아프리카계나 아시아계, 라틴계의 경우 그 국가적 근원에 상관없이 뭉뚱그려져 불린다. 이는 백인 이민의 역사가 오래된 것이 한 원인이지만, 백인이 유색인종을 대하는 시각이 우월적이고 지배적인 데서도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종족적 배경에서 유래하는 문화와 종교, 습관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우산과 같은 포괄적 개념 속에 스테레오타입화한다.
다문화주의에 대한 이해는 탈식민주의와도 연관이 된다. 로버트 스탬과 루이스 스펜스LouiseSpence는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재현Colonialism, Racism, andRepresentation〉에서 인종차별주의가 본질적으로는 식민주의 정책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흑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아랍인, 그리고 다른 원주민들이 유럽 정복자들에 의해 체계적으로 지배당했으며 계속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반식민주의 영화 제작에 대한 요구에서 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영화적 특징이 필요하다면서 “영화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원래의 실제 모델 혹은 원형에 대한 충실도, 혹은 재현의 완벽한 정확성보다는 서사의 관행, 장르의 관행, 영화의 스타일이 되어야 할 것”(641)이라고 주장한다. 단지 차별당하는 마이너리티를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그렇다고 이들이 원래 떠나온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없다. 오히려 재현의 과정은 문화적 정체성의 혼종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문화 영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먼저 다문화 사회를 경험하고 문제점을 극복해 온 미국과 유럽의 사례를 영화를 통해 살펴봄으로써 이를 통해 우리나라에서의 적용 가능성과 시사점을 통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인가? 탄생한 지 불과 100년이 조금 넘었지만 영화는 사회 이데올로기의 흐름과 대중의 관심,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중요한 텍스트가 되어 왔다. 영화들은 그 시대의 대중과 국가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지시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산업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영화는 20세기의 각 10년대decade마다 각각 경제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 냉전, 반문화, 성의 해방, 신보수주의의 반격, 페미니즘 등 사회의 변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동시에 제도권의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작용해 왔다. 특히 60년대 이후 흑인, 여성, 아시아계, 성적소수자, 청년 등이 보수주의 제도권에 도전하면서 이것이 영화에 반영되고 수용되는 현상들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는 현상태statusquo를 유지하며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흔들림 없이 미국을 떠받치고 있음을 천명하는 제도권의 마우스피스 역할도 해 왔다. 결국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Anderson의 주장대로, 국가는 서술된 스토리이며 영화 관객은 이 스토리를 소비하며 수용하는 주체이다. 따라서 영화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은 ‘용광로’에서 ‘샐러드 보울’로 미국 사회의 다문화성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성찰할 수 있는 적절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다문화 영화는 그동안 제도권의 지배적 시각 속에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underrepresented 틀리게 표현된misrepresented 마이너리티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바로잡고자 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거의 모든 아시아계 사람은 수학을 잘하고 모범적이며 적응을 잘하는 모델 마이너리티modelminority로 보고, 아랍인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라틴계는 마약과 범죄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에서 다문화 영화는 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좌절을 표현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자 한다. 그래서 이 연구는 반드시 영화 속 스테레오타입 연구와 분석으로 연결된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해 보면 같은 아시아권 내에서도 지배 종속 관계가 존재하며 젠더, 계급, 지역성의 헤게모니에 따라 차별이 발생함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다문화가족’은 비하적인 뉘앙스가 포함된 표현이다. 다문화 교육 현장에서 일하는 교사들의 경험에 의하면, 한국인과 결혼이주민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켜 “쟤는 다문화야”라고 말하는 것은 차별과 배제의 뉘앙스를 담고 있다. ‘다문화’라는 표현이 한국인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고,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 출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또한 같은 결혼이주민, 혹은 이주노동자들 사이에도 미묘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한다. 한국인과 외모가 거의 비슷한 중국과 일본 등에서 온 이주민과, 겉으로 보기에 타자성이 두드러지는 동남아 출신 이주민 사이에 엄연히 다른 계급이 존재하는 것이다. 일반 내국인들이 이들을 상대할 때의 태도나 자세에서도 이러한 차별이 그대로 적용된다.
다문화 영화와 관련하여 최근 세계 주요 영화산업에서 두드러지는 또 다른 현상은, 영화가 초국가적・초민족적 매체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피터 레만PeterLehman과 윌리엄 루어WilliamLuhr의 지적대로 이제는 미국영화, 한국영화, 호주영화 등 국가를 영화 앞에 붙이는 것이 힘든 시대가 되고 있다. 미국 작가가 쓴 대본을 영국 감독이 연출하여 호주 배우를 주인공으로 멕시코에서 촬영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자체가 다문화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문화다양성의 코드를 영화에서 읽어 내려는 시도에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다문화 영화에 대한 연구는 ‘트랜스내셔널 시네마transnationalcinema’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간의 파워와 자본의 불균형으로 인해 인적・물적 이동이 빈번해지고, 또한 교통수단의 발달과 인터넷의 영향으로 세계는 이미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해진 전지구적 상태가 되었다. 영화 제작 방식 또한 스토리와 소재, 자본력, 제작진, 배우, 배급에서 초국가적인 공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초민족적인 영화에서는 자본, 사람, 정보의 이동이 “민족 단위를 넘어서는 사람 또는 제도들을 엮는 전지구적인 힘”(Ezra 1)을 반영한다.
다문화주의와 영화의 연관성 연구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 바로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연구이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 각각의 인종과 국가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인종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과 유럽의 열강들이 물질과 권력에 대한 야욕으로 신대륙 정복 경쟁에 나서면서 유럽은 낯선 인종과 조우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유럽 중심주의에 의한 세계관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타자와의 접촉이 계속되었고, 백인들은 유럽 중심주의를 고수하면서 이를 기준으로 타자를 판단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다. 로버트 스탬은 유럽이 자신을 의미의 원천으로 보고, 나머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실재로 보는 단일한 패러다임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면서, 다문화주의는 바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주장한다(269). 이러한 유럽 중심주의가 영화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백인과 다른 인종에 대한 재현 이미지이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타자들이 주류에 속한 인물들과 겪게 되는 갈등의 근원에는 인종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자리잡고 있다. 다문화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대두되는 문제는 인종차별주의이며, 이는 아프리카계와 아시아계, 히스패닉계 미국인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에서 이주민들이 내국인과 부딪히는 갈등의 기폭제이다.
다문화 영화의 주제
이 책에서 분석 대상이 되는 모든 영화에서 우선적으로 탐색하게 될 주제들을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미지 연구: 스테레오타입과 그것의 극복
페미니즘 영화 이론이 처음 등장할 때 몰리 해스켈MollyHaskell의 《숭배에서 강간까지FromReverencetoRape》, 앤 캐플란AnnKaplan의 《여성과 영화WomenandFilm》 등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어떻게 스테레오타입화되었는가를 다루는 여성 이미지 연구를 서두로 출발했다. 마찬가지로 다문화주의 이론에서 비백인non-white에 대한 연구 또한 이미지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미국으로 잡혀 왔을 때부터 백인들은 흑인의 외모와 생물학적인 특징을 근거로 자신만의 잣대로 그들을 스테레오타입화하기 시작했다. 윈스롭 조던WinthropJordan의 《흑보다 우월한 백: 니그로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 1550~1812White Over Black: American Attitude Toward the Negro 1550~1812》는 당시 백인들이 흑인 남성성에 느낀 위협에 대해 흥미로운 안목을 제공한다. 흑인들이 미국에 노예로 잡혀 와서 살게 되면서 백인들은 흑인들의 성적 능력에 대해 강한 편견을 품게 되었다. 특히 흑인 남성이 성적으로 왕성하며 백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흑인들의 강한 성욕과 성적 능력이 경계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것이 흑인 여자 노예들을 성적 노리개로 이용한 “백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흑인들에게 투사한 결과”(151)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이 흑인 여자들에게 했던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백인들은 흑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흑인들이 백인 여성을 겁탈함으로써 복수할 것을 두려워했다. 흑인 남성에 대한 성적 편견은 그들의 신체적・해부적인 특징으로도 강화되었으며, 이것은 곧바로 흑인 남성들을 동물적인 이미지와 연관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흑인 여성들도 성적으로 더 적극적이고 왕성하다는 편견이 만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인이 흑인 여성의 성적 욕구를 채워 주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백인 노예 주인에 의한 흑인 여성 성적 착취는 거의 공공연한 관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당화된 백인 남자 주인과 흑인 여자 노예 간의 관계에서 아이들이 태어났고, 이는 또 다른 재산 증식 수단이 되었다. 이렇게 태어난 혼혈 자식들, 즉 ‘물라토Mulatto’들은 흑백의 성관계 자체를 자연의 법칙을 어기는 것으로 보는 이율배반적인 잣대로 인해 철저하게 외면되었고 노예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아무리 외모가 백인처럼 보이더라도 흑인 취급을 받았고, 생부를 포함한 백인들은 물라토들의 승인과 신분 상승을 거부했다. 이처럼 흑인 남성을 성적으로 왕성한 종마 정도로 보고, 흑인 여성은 성적 놀이의 대상으로 보면서 흑백 관계에서 태어난 자손들까지 흑인으로 배척하는 이율배반적인 시각은 흑인을 온전한 인격적인 개인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보게 했고, 이는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스테레오타입은 비단 아프리카계 미국인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에서 북미 원주민은 얼굴에 워페인트를 칠하고 손도끼를 휘두르며 괴성을 지르면서 백인 정착자들을 공격하는 야만인들로 묘사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귀한 야만인Noblesavage의 스테레오타입도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의 거의 50퍼센트가 서부영화였던 클래식 할리우드의 전성기에는 서부 개척자들과 북미 원주민, 그리고 기병대와 전쟁을 다룬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부영화에서 북미 원주민은 백인들이 자명한 운명ManifestDestiny을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인, 제거되어야 마땅한 장애물이었다. 백인 배우가 검은 칠을 하고 흑인 역할을 연기했던 민스트럴 쇼Minstrelshow가 그랬듯이, 이 당시 많은 영화에서 북미 원주민 역할은 백인 배우가 인디언 분장을 하고 맡았다. 즉, 북미 원주민의 진실한 묘사가 아니라 백인의 눈에 비친 북미 원주민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다.
정착민의 집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머리 껍질을 벗기고, 부녀자를 납치하는 야만적 행동을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된 북미 원주민은 1960년대 이후 수정주의 웨스턴이 등장하면서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작은 거인LittleBigMan>과 <솔저 블루SoldierBlue>와 같은 영화는 기병대가 인디언 마을을 습격하여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몰살하는 잔인한 장면을 여과 없이 보여 줌으로써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과의 유추를 끌어냈다. 실제로 ‘야만인’은 들판에 뛰놀던 아메리카 들소를 멸종시키고 북미 원주민들을 속여 땅을 빼앗고 결국 그들을 멸망의 길로 내몬 백인이었다. <늑대와 함꼐 춤을DanceswiththeWolves>과 같은 영화는 실제 북미 원주민 배우를 출연시키고 그들의 입장에서 백인을 본 영화라는 점에서 괄목할 만한 영화이다.
스테레오타입 연구는 히스패닉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에게도 적용된다. 미국은 서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는 과정에서 북미 원주민뿐 아니라 라틴계 국가들과 인종들을 정복하거나 추방해야만 했다. 또한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을 단지 미국 시민에만 적용하도록 명칭을 빼앗아 왔다(Benshoff and Griffin 135). 중남미 출신 사람들을 가리키는 ‘히스패닉’ 혹은 ‘라티노’라는 명칭은 사실상 그 이름 속에 포함된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갖는 광범위한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용해하면서 각각의 민족과 국가가 가지는 특수성을 단순화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라티노의 스테레오타입에는 그리저greaser와 라틴 연인Latinlover이 있다. 그리저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성적으로 왕성한 라틴 남자를 말한다. 이에 반해 라틴 연인은 피부가 좀 더 희고 정열적인 연인으로서 백인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많은 남자이다. 여기서도 백인성의 우월성은 강조된다. 한때 마릴린 먼로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던 리타 헤이워드RitaHayworth는 원래 마가리타 칸지노MargaritaCansino라는 이름의 히스패닉 배우였으나 이름을 바꿈으로써 백인 여자 배우로 변신했고, 그 결과 할리우드 최고의 뇌쇄적인 미인 배우가 되었다. 라틴계 미국영화는 불법 이민, 갱스터, 가난 문제, 가족이라는 우선적인 주제를 다루며 라티노가 미국에서 태어났든 다른 곳에서 태어났든 그들의 기회는 제한적이며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는 도전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외모의 현저한 차이로 인해 결코 미국 백인사회에 동화될 수 없는 아시아계 이민은 백인들의 스테레오타입과 희화화의 대상이 되며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재현되어 왔다. 라틴계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아시아계 이민도 그 광범위한 우산 속에 포함될 수 없는 각각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아시아 갱 단원, 식당이나 세탁소 혹은 청과물상, 그리고 수학을 잘하며 교육열이 높아서 명문대 진학을 잘하는 인물이라는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었다. 중국・한국・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계 이민이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대학 교육을 받은 고급 인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교육열과 재능이 자녀들의 명문대 진학과 전문직 직업 추구로 연결되며 이것이 세대 간의 갈등 요인이 된다. 소위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이러한 인식 또한 아시아계 이민을 옭죄는 굴레가 되어 이들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장벽이 된다.
인종차별주의
다문화주의가 다루는 가장 많은 주제 중 하나는 유럽 중심, 백인 중심의 세계에서 백인 주류문화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핍박을 받아 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인종 스테레오타입은 바로 인종차별을 위한 기표로 이용되었고, 백인만이 옳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이 책에서 유색인이라는 용어 대신 비백인non-white이라는 용어를 쓴 것은 대개 백인 중심의 시각에서 백인 이외에 인종들을 지칭할 때 ‘유색인colored’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의 문제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유색인’이라는 표현의 기저에는 ‘백색’은 색깔에 포함시키지 않고 바로 백인성whiteness을 기정값default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백인은 보이지 않는invisible 컬러인 것이다. 다문화주의 영화 연구가 최근에 ‘백인성’에 대한 연구로 발전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데이비드 로디거DavidRoediger의 《백인성을 향해 나아가기WorkingTowardWhiteness》와 같은 책은 미국 이민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국성을 버리고 백인성을 취하기 위해 애썼는지를 잘 보여 주는 저서이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1960년대 이전까지는 유색인이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영화들이 많았다. 이런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인물들의 피부색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면서 영화를 본다. 따라서 피터 레만과 윌리엄 루어의 주장대로 “미국영화에서 흰색은 색깔이 아니었다”(380). 유색인이 등장하는 영화가 나왔을 때 백인은 그 유색인이 유색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비가시적 기준이 되었다. 다문화주의가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면 다문화주의 영화 이론에서 전통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백인이 어떠한 스테레오타입으로 묘사되었는지, 백인은 왜 비가시적 기준이 되었는지 분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백인이 비가시적 기준이 되는 것의 문제는, 그것이 다른 인종을 판단하고 폄하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 인종은 오랜 역사적・정치적・사회적 구축물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백인을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백인이라는 인종을 우수하고 당연하고 바람직한 속성으로 구축해 왔다. 그리고 관객의 인종이 어떠하든지 간에 백인 주인공과 동일시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1960년대 이후 민권운동이 격렬해지고 인종차별주의가 쟁점이 되자, 비백인을 조연 혹은 사이드킥sidekick으로 기용하는 것이 할리우드의 관행이 되었다. ‘생색내기tokenism’이라고 불리는 이 관행은 인종차별주의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조연을 맡은 흑인이나 히스패닉 캐릭터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죽거나 사라지고 백인 영웅만이 살아남아서 세계를 구한다(Benshoff and Griffin 55).
백인이 비백인을 보는 인종차별적 시각은 백인이 더 많이 진화되었다는 잘못된 신념에서 출발한다. 인류는 유전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같지만, 종래에는 과학조차도 백인이 유전학적으로 비백인보다 더 우월하고 진화되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 백인들은 자신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속성들을 타자에게 투사하고 그것을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데 사용하였다. 가령 흑인들이 게으르고, 더럽고, 불성실하다는 편견은 백인들이 자신의 부정적인 속성을 흑인들에게 투사해서 구축한 결과물인 것이다. 이는 영화를 비롯하여 이데올로기적 국가 도구에 의해 전파되고 일반인들에게 주입되었다. 스테레오타입 논의에서 보았듯이 비백인은 백인의 우월성을 뒷받침하고 입증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이 그동안의 경향이었다. 이런 경향은 1980년대말부터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비백인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서 영화를 찍는 감독이 되면서 기존의 스테레오타입을 불식시키고 비백인들이 주류사회에서 당하는 오해와 편견을 그리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의 고발 혹은 그것의 위장으로서의 다문화 영화
비백인 감독들의 등장은 지금까지 스테레오타입에 그쳤던 각 인종의 이미지가 진솔하고 편견 없이 묘사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실제로 NYU 출신의 스파이크 리SpikeLee와 존 싱글턴JohnSingleton 감독은 흑인의 입장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흑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감독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인디 계열의 영화로 출발한 스파이크 리의 경우 할리우드의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제도권 감독으로 부상하였다. 아시아계 영화 감독 중에는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매번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안AngLee 감독을 들 수 있다. 그는 <와호장룡CrouchingTiger,HiddenDragon>과 같은 중국 배경의 영화뿐 아니라 가장 미국적이라 할 수 있는 카우보이를 소재로 <브로크백 마운틴BrokebackMountain>을 제작하여 상업적・비평적 성공을 거두었다. 라틴계 감독 중에는 그레고리 나바GregoryNava와 로버트 로드리게즈RobertRodriguez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주의가 본질적으로 식민주의 정책의 결과라고 보는 로버트 스탬과 루이스 스펜스는 〈식민주의,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재현〉에서 단지 차별당하는 마이너리티를 긍정적으로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새로운 영화 스타일과 영화 제작 시스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반식민주의 영화 제작에 대한 요구에서 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영화적 특징이 필요하며 “영화가 강조해야 하는 것은 원래의 실제 모델 혹은 원형에 대한 충실도, 재현의 완벽한 정확성보다는 서사의 관행, 장르의 관행, 영화의 스타일이 되어야 할 것”(641)이라는 것이다.
영국과 호주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이민자 정책과 국가 내 소수민족들에게 지원을 하게 되면서, 이것이 미국과 프랑스 등 과거 식민지를 소유한 나라들에게 번져 갔다. 이 나라들에서는 “다문화주의가 기존 정치 체제 내에서 소량의 재현을 제공함으로써 소수자들을 어느 정도 힘을 실어 주고 달래 주려고 고안된 공식적 정부 프로그램을 지칭한다”(Benshoff and Griffin 55). 그러나 다문화주의가 과연 인종차별을 종식시키고 사회 내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정책이 될 것인지의 여부는 많은 요인에 달려 있다.
이것을 영화에 적용해 보면 1990년대 이래로 비백인 감독이 아니라 백인 감독이 흑인이나 히스패닉,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을 묘사하면서 그들의 억압된 삶과 미국 사회에서의 편견을 이야기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그러나 이러한 취지로 만든 영화일지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여전히 백인우월주의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많은 백인들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알로 켐프ArloKempf는 “인종차별을 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을 없애는 데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뜻”(94)이라고 주장하면서 표피적이고 순진한 관용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심층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슬라보이 지젝SlavojŽižek 또한 〈다문화주의, 혹은, 다문화주의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Multiculturalism, Or, theCulturalLogicofMultinationalCapitalism〉에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다문화주의는 거부된, 전도된, 자기참조적인 형식의 인종차별주의이다. 그것은 ‘거리를 둔 인종차별주의’이다. 다문화주의는 타자의 정체성을 ‘존중’한다. 그것은 타자를 스스로 울타리를 친 ‘진정한’ 커뮤니티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대해서 다문화주의자 자신은 특권적인 보편적 위치로 인해 가능하게 된 거리를 유지한다. 타자의 특정성에 대한 다문화주의자의 존경은 자신의 우월을 주장하는 하나의 형식이 된다.(44)
다문화주의는 종종 인종차별주의를 순화시키기 위해 이용되며, 제인 쿠JaneKu는 그것이 “탈정치화 시도이며 권력관계나 ‘반인종차별주의’ 교육에 연루되기 싫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접근”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영화가 폴 해기스PaulHaggis 감독의 영화 <크래시Crash>(2004)이다. 이 영화는 인종적 문제를 전향적으로 다룬 영화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2006년도 아카데미상 3개 부문을 수상(최우수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하고 3개 부문 후보(감독상, 남우조연상, 음악상)에 올랐다. 단지 백인만이 유색인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종이 서로에 대해 가진 두려움과 편견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동기를 부여한다. 관객은 감정적으로 주인공들의 상황과 감정에 공감하면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휴머니스트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적・비평적 성공의 이면에는 이 영화가 인종차별주의 문제의 근원을 회피하고 단지 감상적이고 인간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백인우월주의와 타자의 스테레오타입을 공고히 한다는 비판 또한 만만치 않았다. 흑백 대립이 아니라 백인, 아프리카계, 히스패닉, 아시아계, 이란인 등 다양한 인종 간의 충돌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을 공통의 휴머니티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재현하기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의 근원에 다가가는 것을 오히려 막고 있다는 것이다. 필립 하워드PhilipHoward는 그람시AntonioGramsci의 이론을 빌려 “헤게모니적 개념이 공고히 자리잡게 되는 가장 효과적이고 교활한 장소는 ‘상식’이다”(27)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면 공통으로 느끼는 휴머니티와 상식에 호소하여 교묘하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백인이 편견을 가지고 유색인을 차별하는 내용뿐 아니라 다문화적인 주체들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인종차별주의가 등장한다. 따라서 어떤 평자의 논문 제목처럼 이 영화의 주제는 “걱정 마, 우리 모두 약간은 인종차별주의자야Don’t worry, we’re all racist”(Giroux and Giroux 745)라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용tolerance이라는 점을 이 영화가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은 희석되고 단지 감상적인 영화적 감동 속에 관객의 의식은 매몰되고 만다. 체인처럼 얽힌 희생자와 희생시키는 자의 연쇄 고리 속에 백인이나 유색인 할 것 없이 연루되어 있지만, 선한 행동으로 죄를 뉘우치고 영웅으로 다시 거듭날 기회는 유독 백인에게만 주어진다. 필립 하워드는 “백인들은 자신들의 인종차별주의로 정당한 처벌을 받지 않는다”(39)고 말한다. 인종차별의 시작점에는 분명히 백인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
초국가적 영화
오늘날의 세계는 글로벌화라는 용어로 특징지을 수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인터넷으로 인해 이제 세계의 한 곳에서 일어난 일은 더 이상 그곳만의 사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에는 영화가 국적으로 분류되어 해당 국가의 언어뿐 아니라 문화, 정치, 가치관 등을 같이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글로벌화된 시장을 겨냥하여 전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다. 레만과 루어는 이제 미국영화와 외국 영화를 구분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면서 “많은 영화들이 이제 더 이상 미국에서 촬영되지 않는다”(474)고 지적한다.
과거에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출품되는 작품은 반드시 그 나라 언어로 촬영되어야 했지만, 2006년부터 규정이 대대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극단적인 예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PassionoftheChrist>는 미국와 호주 대륙에서 찍고, 세계 어디서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언어들인 라틴어, 아람어, 그리고 고대 마야 방언으로 만들어졌다. 영화 제작 방식 또한 스토리와 소재, 자본력, 제작진, 배우, 배급 면에서 초국가적인 공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초민족적인 영화에서는 자본, 사람, 정보의 이동이 “민족 단위를 넘어서는 사람 또는 제도들을 엮는 전지구적인 힘”을 반영한다. 이제 미국영화 스타들은 “미국인이 아니라 러셀 크로우, 콜린 패럴, 주드 로와 같은 사람이며 영국,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출신의 배우와 감독들이 글로벌한 영어 영화 제작에서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맡는다”(Lehman and Luhr 473).
이제는 호주 감독이 미국의 자본을 가지고 영국에서 영국 배우를 기용하여 영화를 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홍콩 무술영화의 흥행과 인기를 미국영화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로 오우삼 감독이 할리우드로 진출한 것이나, <매트릭스TheMatrix>의 장면들을 찍기 위해 홍콩의 유명한 쿵푸 안무가인 원화평YuenWoo-Ping을 영입한 것은 좋은 사례이다. 타이완 출신의 이안 감독은 이런 면에서 매우 초국가적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의 캐스트가 중국인인 <결혼 피로연TheWeddingBanquet>으로부터 영국의 18세기 고전소설인 <센스 앤 센서빌리티SenseandSensibility>,1970년대 미국의 도덕적 붕괴와 환멸을 다룬 <아이스 스톰TheIceStorm>, 중국 무술영화인 <와호장룡>, 그리고 카우보이 동성애자를 다룬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타이완 출신 감독이 미국에 와서 미국과 영국의 소재뿐 아니라 중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안 감독은 초국가성을 대표하는 감독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주윤발, 이연걸, 성룡 등의 영화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를 끄는 현상을 가리켜 민하 팜Minh-HaT. Pham은 “다문화주의 아시아의 할리우드 침략The Asian Invasion of Multiculturalism in Hollywood”The라고 불렀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부응은 일본 원작 소설을 가지고 한국 감독이 중국 배우를 기용하여 만든 영화라는 점에서 <파이란>을 초민족적 영화라고 보고 있다. <경계>를 만든 장률 감독은 조선족 출신의 영화감독이면서 중국 혹은 몽골 이야기를 다룬다. 그의 영화는 한국 자본을 투자했기 때문에 한국영화라고 할 수 있고, 그의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그의 국적은 여전히 중국인이다. 과거 식민지 국민이었던 사람들이 이민을 통해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등으로 이민을 가는 디아스포라 현상은 특히 <슈팅 라이크 베컴BendItLikeBeckham>,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MyBeautifulLaundrette>와 같은 영화에 나타나 있다.
다문화주의의 함정과 극복 과제
앞의 논의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다문화주의는 자칫 인종차별주의를 순화하고 그 근본이 되는 시스템에 대한 심층적인 반성과 행동을 수반하지 않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최성희의 지적대로 “‘모든 문화가 동등하게 인정받고 평화롭게 공존하자’는 다문화주의의 이상적 개념은 문화적 상대주의와 지적 허무주의로 빠져 버릴 위험”(3)도 있다. 실제로 다문화주의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함정은 동화주의이다. 정부 주도의 ‘사업’ 위주로 다문화주의가 진행될 때 그것은 이주민들의 타자성을 강조하고 그들의 한국 사회 정착에만 치중한 나머지 한국인들의 다문화 수용이나 이해를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다.
중앙선데이는 2017년 4월 9일자 기사에서 “다문화센터에 실제로 다문화는 없어, 김치 한국어 전수 한국문화센터에 불과”라는 제목으로 광주대 교수로 일하고 있는 욤비 토나 교수의 인터뷰를 싣고 있다. 토나 교수는 다문화센터에 실제로 다문화는 없기 때문에 김치나 한국말을 가르치는 한국문화센터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호주에서는 이주민들에게는 호주 문화를, 호주인들에게는 아랍 문화 등도 가르친다”라고 지적하면서 “첫 번째가 국가 정책, 그 다음은 미디어, 세 번째가 교육이다. 특히 정책은 만들려면 잘 만들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라고 꼬집고 있다. 다문화주의 정책이 성공하고 이주민들이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치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정책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이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인종차별주의를 넘어서서 포용과 환대의 긍정적인 자세로 다가가는 노력이 양쪽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미국과 유럽의 다문화 영화 논의 다음에 한국영화의 다문화주의를 다룬다. 특히 이주노동자를 다룬 영화로 다문화를 포용하고 이주민들을 이해하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는 한국인 주인공을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다문화 영화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는 세 편의 영화를 분석하였다. 외국 이주민들이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 현실로 다가온 이상, 언제까지 그들을 타자로 취급하고 그들이 우리의 문화에 동화하며 맞추어 살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존중하여 문화적인 융합과 소통을 달성하여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다문화 영화는 이방인들이 주류 문화에 들어와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과 고통뿐만 아니라 이방인 문화의 유입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융합된 문화로 승화되는 주류사회의 변화 또한 형상화해야 할 것이다.
1장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스테레오타입
도널드 보글DonaldBogle은 저서 《톰, 쿤, 물라토, 매미, 그리고 벅Tom, Coons, Mulattoes, Mammies, andBucks》에서 미국영화에 나타난 흑인 스테레오타입을 시대별로 구분하고 있다. 백인 배우가 검은 칠을 하고 흑인 역할을 연기했던 민스트럴 쇼부터 덴젤 워싱턴, 우피 골드버그, 에디 머피 등 개성파 흑인 배우들이 연기력을 인정받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흑인 묘사의 변천사를 그리고 있는 이 저서는, 특히 벅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설명을 통해 왕성한 성적 능력을 가진 흑인 남성에 대한 백인들의 편견을 잘 보여 준다.
보글은 “성적으로 지나치게 왕성하고 야만적이며, 백인의 육체를 탐할 때 폭력적이고 광적이 되는”(14) 인물로 벅을 묘사하면서 〈국가의 탄생TheBirthofaNation〉을 감독한 D. W. 그리피스가 흑인의 과다한 섹슈얼리티에 관한 신화를 이용하여 모든 흑인 남자가 백인 여자를 원한다는 백인들의 공포를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동경하는 이유 중에는 파워 심볼로서의 위치에 대한 이끌림에 그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피스는 흑인 남성의 동물적인 특징에만 집중하여 관객의 분노를 자극했다는 것이다. 톰, 쿤, 물라토, 매미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혜안을 보여 주는 보글의 저서는 오늘날까지도 흑인 스테레오타입 연구의 교과서라고 할 정도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특히 1950년대에 ‘통합주의자 영웅’으로 떠오른 시드니 포이티어SidneyPoitier의 사례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원초적인 남성성으로 백인의 순수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그려지던 흑인 남성 캐릭터는, 1960년대가 되면서 훨씬 더 순화된 캐릭터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 관객의 주류를 이루게 된 젊은 층이 여성운동, 청년운동, 민권운동 등의 문제에 더 열린 태도를 견지하게 되었고,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킬 순화된 캐릭터로 시드니 포이티어라는 배우가 등장했다. 흑인운동의 기본 논리에 공감하는 진보적 백인들이 링컨기념관 앞에서 벌어진 유명한 민권운동 시위에 동참하는 등 1960년대의 지적이고 정치적인 분위기는 흑인 남성 주인공의 출현을 맞이할 정도로 무르익어 있었다. 바로 이때 등장한 배우가 시드니 포이티어이다.
존 벨튼JohnBelton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 등장한” 그리고 “상당한 백인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최초의 흑인 스타”(127)로 시드니 포이티어를 평가하고 있다. 도널드 보글은 그를 “통합주의 시대의 영웅”(175)이라고 표현하면서, 교육을 받고 표준어를 사용하며 점잖은 복장을 한 매너 좋은 그가 백인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인물로 비쳤다는 사실에서 그의 성공 이유를 찾는다. 포이티어가 1967년에 출연한 세 편의 영화 <밤의 열기 속에서IntheHeatoftheNight>, <언제나 마음은 태양ToSirwithLove>,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Who’sComingtoDinner?>의 상업적 성공은 1960년대 초와 1970년대 초에 정기적으로 영화를 보러 가는 관객의 4분의 1을 차지했던 흑인들뿐 아니라 그에게서 위협을 느끼지 않는 백인 관객에게도 그가 어필했음을 보여 준다.
그가 맡았던 배역은 저널리스트(<베드포드 사건>), 의사(<초대받지 않은 손님>), 엔지니어/교사(<언제나 마음은 태양>), 강력계 형사(<밤의 열기 속에서>) 등 백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지위와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면서 계층 상승을 꿈꾸는 모든 흑인들에게도 역할 모델이 되었다. 보글은 포이티어가 “점잖은 매너의 톰”(176)의 스테레오타입에 속한다고 규정하면서, 지적이고 인내심 많고 충동적인 행동을 절대로 하지 않는 타입의 인물로 그를 평가한다. 이처럼 교육 수준도 높고 전문성을 갖춘 인물로서 포이티어의 캐릭터는 처음에는 백인들에게 배척받지만 시간이 가면서 백인들도 하는 수 없이 그의 전문성을 인정하게 된다. 이는 <언제나 마음은 태양>, <밤의 열기 속에서> 등의 남녀 관계를 다루지 않은 영화에서뿐 아니라 <패치 오브 블루>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쿤, 매미, 물라토, 벅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은 백인들이 만든 영화들에서 그 잔상을 찾을 수 있다.
흑인 남성성과 흑인 커뮤니티의 민낯 탐구:<보이즈 앤 후드>
1960년대와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흑인이 만들고 흑인 관객을 겨냥한 흥행 위주의 영화를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영화’라고 부른다. 흔히 특정 관객을 겨냥해서 흥행을 목적으로 제작하는 ‘익스플로이테이션exploitation 영화’라는 용어에다 <빌리지 보이스VillageVoice>의 비평가들이 앞에다 ‘블랙’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시기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은 민권운동의 여파로 흑인들의 지위가 개선되고 흑인들도 여흥과 오락을 즐길 여유가 생기면서 그들이 좋아할 수 있는 스테레오타입을 제시하여 인기를 모았다. <스윗스윗백의 배대스 송SweetSweetback’sBadaaasSong>을 비롯한 이 시기의 영화들은 폭력적인 영웅을 내세워 억압적인 백인 지배 사회에 시원한 복수를 시도하는 플롯을 특징으로 한다. 이 영화들은 흑인을 폭력적이고 성적인 스테레오타입으로 구축하고 영화 포뮬라와 장르적인 방식으로 스토리를 전개하여 많은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난 후 등장한 스파이크 리, 존 싱글턴과 같은 젊은 감독들은 흑인 감독이 바라보는 흑인 사회의 모순과 흑인들의 문제점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흑인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존 싱글턴의 <보이즈 앤 후드Boyz ’N’ theHood>는 흑인의 시각으로 재현된 흑인 남성의 성장기다. 제목이 말해 주듯, 이 영화의 포커스는 ‘보이’와 ‘후드’, 즉 흑인 남자와 흑인 커뮤니티이다. 싱글턴은 트레Tre라는 이름의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 남성으로 자라나는 것이 얼마나 많은 편견과 장애물과 싸워야 하는지를 신랄하게 보여 준다. 영화는 “흑인 미국 남성 21명 중 1명은 살아가는 중 살해를 당할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이 다른 흑인 남성의 손에 죽을 것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 후 ‘정지Stop’ 도로 표시판을 들이댄다. 스파이크 리의 영화에서 트레이드마크로 사용된 도로 표지판을 영화의 서두에 제시함으로써 싱글턴은 이 모든 무분별한 살인이 멈춰져야 함을 영화의 메시지로 제시한다.
부모의 이혼 후 엄마와 함께 살아온 트레는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킨 후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그가 학교에서 백인 여성 교사로부터 주의를 받고 그로 인해 교사가 엄마에게 전화로 상담하는 사건은 학교라는 교육 기관이 흑인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의 단면을 잘 보여 준다. 트레가 수업을 하고 있는 교실 장면에서 우리는 이 학교가 백인은 한 명도 없는 흑인들만이 다니는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설명하던 중 “인디언”이라는 말을 했다가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아님을 깨닫고 “북미 원주민NativeAmericans”라고 정정한다. 교사의 가르침에 불손한 태도로 임하던 트레는 앞에 나와서 한번 가르쳐 보라는 선생의 명령에 앞으로 나와서 모든 인간의 근원은 아프리카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다른 학생과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게 되고, 이 일로 인해 교사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백인 교사는 트레의 엄마인 레바 스타일즈RevaStyles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흑인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내비친다. 백인 교사가 가진 편견은 첫째, 흑인 가족은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기 때문에 불안하다, 둘째, 흑인 어머니는 일도 하지 않고 교육도 받지 않고 성적으로 문란하다, 셋째, 흑인 어머니는 아이 아버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Lehman and Luhr 315). 이런 편견에 대해 레바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녀는 직업이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석사 과정을 밟고 있으며, 아버지와 이 문제를 의논하겠다는 것이다. 이혼한 흑인 가정은 아버지와 단절되어 있다는 편견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트레는 아버지의 집으로 옮겨 가게 되고 이제 흑인 남성으로의 성장은 아버지인 퓨리어스 스타일즈가 맡게 된다.
남자가 되는 법
아들인 트레를 데려다 주면서 레바는 퓨리어스에게 나는 남자가 되는 법how to be a manhow 을 가르칠 수 없으니 이제 당신이 가르치라고 말한다. 이를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퓨리어스는 이제 막 도착한 아들에게 낙엽을 다 치우라고 말한다. 화면은 시간의 경과를 서서히 보여 주면서 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낙엽을 치우는 트레를 보여 준다. 저녁이 되어 욕실을 청소하고, 아버지의 방을 청소하고, 잔디에 물을 주는 등 다른 규칙들을 말하는 아버지에게 트레는 아버지는 하는 일이 뭐냐고 묻는다. 퓨리어스는 “내가 너무하는 것 같으냐”고 물은 뒤, 자신의 교육이 바로 책임지는 법을 가르치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퓨리어스는 자신의 책임은 고지서 대금을 지불하고, 식탁에다 음식을 올리며, 트레의 몸에 옷을 입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남자의 중요한 책무라고 여겨져 왔으며, 퓨리어스는 이 책임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이다.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 책임이 이 영화에서 중요시되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흑인 남성들이 이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서두에 제시된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흑인 남성들은 마약과 살인 등 쉽게 범죄에 휘말리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가거나 죽음으로써 가족들을 저버린다. 퓰리처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흑인 극작가 오거스트 윌슨AugustWilson은 자신이 <담장Fences>이라는 극을 쓸 때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마당에서 아기를 안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라고 했다.1그는 가족들을 보살피지 않고 무책임한 인간으로 굳어진 흑인 남성의 스테레오타입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인 트로이 맥슨은 자신을 왜 사랑하지 않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다.
좋아한다고? 내가 아침마다 출근해서 매일 그 백인 놈들을 상대하며 뼈 빠지게 일하는 게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런 바보 봤나? 그건 내 일이야. 내 의무라구! 알아들어? 남자는 가족을 돌봐야 하는 거야. 네가 내 집에서 살고 내 침대보에 네 엉덩이를 대고 자고 내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건 네가 내 아들이기 때문이야. 내 혈육이라구. 너를 좋아해서가 아냐! 너를 돌보는 것이 내 책임이라구!(38)
퓨리어스의 대답은 트로이 맥슨의 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집세와 전기세 등 당연히 내야 할 세금을 지불하고, 의식주의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성장하는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폭력과 범죄로 물든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퓨리어스는 아들과 함께 간 낚시터에서 대화를 통해 계속해서 남성다움에 대한 교육을 한다. 그는 리더가 되기 위한 세가지 규칙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대화를 할 때 눈을 쳐다보라, 요구하기를 겁내지 마라,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존중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고 자존감 있는 남자로 자라나기를 교육하는 것이다. 그는 부자간에 거북한 주제일 수가 있는 성교육도 과감하게 시도한다. 퓨리어스는 섹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뭐냐고 질문한 다음, 아기를 만드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지만 “진짜 남자realman”만이 아기를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역시 17세에 트레를 낳았지만 그를 버리지 않았고 책임지고 아들로 키웠다. 범죄에 가담하라는 친구들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는 아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그 유혹을 이겨 냈다. 이처럼 아버지로부터 남자답게 사는 법에 대해 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트레의 눈에 도둑질을 해서 경찰에 체포되는 도우보이의 모습이 보인다.
퓨리어스가 사는 동네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를 볼 수 없고 싱글맘이 아이들을 양육한다. 그러나 엄마들은 마약 중독으로 자신의 쾌락만 좇으며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관심이 없다. 특히 남자아이들은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어른이 없이 쉽게 범죄 세계에 발을 딛는다. 그들에게 남성다움이란 갱단에 들어가 폭력을 휘두르거나 총질을 하는 허황된 마초 놀음이다. 또한 여성을 “bitch”나 “whore” “hootchie”등 성적인 대상으로만 파악하여 서로 경쟁적으로 섹스에 탐닉하고 그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흑인 동네 남자아이들의 남성성이다. 이런 단어들은 “젊은 흑인 남성들이 자신의 진짜 남성다움authenticmachismo을 과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준 언어들이다”(Dyson 220). 7년 동안 감옥에서 보낸 후 출소한 도우보이를 환영하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벌인 파티에서 남자들은 그곳에 모인 여자들을 보고 성적인 농담을 한다. 도우보이의 동생인 리키는 고등학생인데 벌써 아기를 낳았다. 음식이 준비되었을 때 서로 먹겠다고 몰려가자, 신사들처럼 숙녀에게 양보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 것도 트레이다. 아버지 손에서 반듯하게 잘 양육된 트레의 선한 영향력을 신뢰하는 도우보이의 어머니 브렌다는 그에게 자기 아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좀 해 주라고 부탁한다. 신뢰할 만한 성인 남성성의 모델이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