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이중톈易中天
중국 대륙 최고의 역사 고전 해설가.
1947년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1981년 우한武漢 대학을 졸업하고, 우한 대학, 샤먼廈門 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현대적 시각으로 역사와 고전을 풀어내 중국인의 자화상을 그리는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로, 문학, 예술,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에 힘쓰고 있다.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의 ‘백가강단’이라는 인문강연 프로그램에서 ‘한나라 시대의 풍운아들’을 강연하고 2006년 『삼국지 강의』를 발표했는데, 이는 ‘이중톈 현상’이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는 『이중톈 중국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2011년 그간 펴낸 책들이 16권에 달하는 『이중톈 문집』으로 묶였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삼국지 강의』(전2권) 『독성기』 『품인록』 『제국의 슬픔』 『백가쟁명』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이중톈 국가를 말하다』 『이중톈 미학강의』 『이중톈 정치를 말하다』 등이 있다.
옮긴이김택규
1971년 인천 출생. 중국 현대문학 박사. 한국출판산업진흥원 중국 저작권 수출 분야 자문위원. 출판 번역과 기획에 종사하며 한국외대와 숭실대에서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이중톈 중국사』 『논어를 읽다』 『내 가족의 역사』 『단단한 과학 공부』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사춘기』 『아큐정전』 등이 있고 저서로 『번역가 되는 법』이 있다.
design 표지 윤종윤 본문 이현정
易中天中華史: 魏晉風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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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본문에서 괄호 속 설명은 지명 표기 등을 제외하면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진 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 사마의는 은인자중의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뱀이 풀숲에 숨어 있듯이 조용히 있다가도 일단 공격을 개시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중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은 두 번씩 출현한다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헤겔이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중에 마르크스가 덧붙여 말하길,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출현한다고 했다.1
1 카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참고.
위진魏晉의 왕조 교체가 바로 그랬다.
서기 220년, 조비曹丕는 한 헌제獻帝를 핍박해 양위를 하게 했다. 이것이 첫 번째였다. 그리고 반세기도 안 지나서 사마염司馬炎이 또 위 원제元帝를 핍박해 선양禪讓을 하게 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였다. 당연히 조비는 자신의 왕조가 그토록 단명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같은 수법을 재연한 사마염 역시 자신의 제국이 오래가지도 못한 데다 그토록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꼴을 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2
2 서기 265년, 사마염이 위 원제를 핍박해 선양하게 함으로써 조위는 망했다. 건국한 지 46년 만이었다. 또 316년에는 진 민제 사마업이 흉노족 유총劉聰의 한나라에 투항해 서진이 망했는데 건국 후 51년 만이었다.
사마의司馬懿는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다.
나중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는 사마의는 진晉 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였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뛰어난 지모와 인내심 덕분이었을 것이다. 정계에 입문하여 정권을 탈취할 때까지 그는 무려 42년의 시간을 들였다. 그사이 조조, 조비, 조예曹叡, 조방曹芳 4대의 군주를 거쳤고 끝내는 조씨 가문의 ‘부동산’을 자기 소유로 만들어 명의 변경 절차만 남겨놓고 죽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마의는 고급 사족士族 출신이었다. 고조부는 후한의 장군이었고 증조부와 조부는 다 군의 태수였으며 부친 사마방司馬防은 벼슬이 경조윤京兆尹(수도 지역의 행정 책임자)에 이르렀다. 일찍이 조조가 처음 벼슬살이를 시작할 때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수도 북부 지역의 경찰서장)로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사마방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줄곧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위왕이 되고 나서 연회를 열어 사마방을 대접하며 옛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사마공이 보시기에 지금 내가 다시 현위縣尉(낙양북부위는 현위급이다)가 되면 어떻겠소?”
사마방이 말했다.
“지난날 제가 추천할 때 대왕은 현위가 딱 적당했습니다.”
조조는 껄껄 웃었다.3
3 『삼국지三國志』 「무제기武帝紀」 배송지주裴松之注의 「조만전曹瞞傳」 인용문 참고.
사마방의 대답은 지극히 온당하고 실제적이었다. 42년 전, 조조는 스무 살의 나이에 효렴孝廉(한나라 때 세족들의 천거로 인재를 관리로 뽑던 특별 임용 제도)으로 천거되어 막 낭관郎官(일종의 예비 관리)이 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고작해야 지역 경찰서장 정도가 되는 것이 제격이었다.
사실 조조가 “천자를 받들어 조정에 불복하는 신하들을 호령하게 된” 6년 뒤에 이르기까지 사마씨 가문은 정계의 그 새로운 실력자를 좋게만 보지는 않았다. 실례로 조조가 사마의를 자신의 막료로 임명했을 때, 사마방의 그 차남은 그것을 거절했다. 중풍에 걸렸다는 핑계로, 벼슬을 받느니 차라리 집에 오래 누워 있으려 했다.4
4 이하 사마의의 사적은 따로 주 없이 모두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참고.
그렇게 시간을 끈 것이 무려 7년이었다. 그러다가 적벽대전이 있던 해에 조조는 사마의에게 조정에 나오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사마의는 더 이상 아픈 척할 수가 없어 불가피하게 조조 정권에 합류했다. 그 후로 그는 조조에게 자신의 재능을 증명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위 문제文帝 조비와 위 명제明帝 조예의 시대에는 황제의 유능한 조수이자 위 제국의 유일무이한 모략가가 되었다.
그래서 중병에 걸려 아들을 맡겨야 했을 때 조예는 사마의를 떠올린 것이다.
당시 사마의의 관직은 이미 태위太尉(최고 군사 책임자)였으며 얼마 전에는 연왕燕王이라 자칭하던 공손연公孫淵을 격파해 요동을 위 제국의 판도 안에 넣고 막 관중關中(지금의 산시성 중부 웨이허渭河강 유역의 평야) 지역을 지킬 병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예의 조서를 받자마자 그는 밤낮으로 말을 달려 낙양으로 돌아와서 대장군 조상曹爽과 함께 조예의 유언을 받들어 새 황제 조방曹芳을 보좌했다.
조씨의 위나라, 즉 조위曹魏는 이때부터 멸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조예는 대단히 무기력하게 아들을 맡겼다. 반면에 손책孫策은 장소張昭에게 동생 손권孫權을 맡길 때 “중모仲謀(손권)가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면 그대 스스로 취하시오”라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유비도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길 때 “그가 재능이 없으면 그대 스스로 취하시오”라고 잘라 말했다.5 그런데 조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갓 여덟 살 된 조방을 바라보느라 한마디 독한 말도 하지 못했다.
5 『삼국지』 「장소전」 배송지주의 『오력吳歷』 인용문과 『삼국지』 「제갈량전」 참고.
결국 전권을 부여받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신하는 충성을 다했고, 후사를 맡아달라고 황제가 신신당부한 신하는 정권을 탈취했다.
조예의 유언을 받든 또 한 명의 대신인 조상도 믿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 능력도 전공戰功도 없는데도 죽기 전 제정신이 아니었던 조예에 의해 돌연 대장군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자부심 하나는 강했던 조상은 어떻게든 사마의를 몰아내려 궁리하다가 결국 조방을 움직여 사마의를 태위에서 태부太傅로 관직을 바꾸게 했다.
그것은 영전인 듯했지만 실제로는 좌천이었다.6 태부는 지위만 높고 실권은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6 조상의 사적은 따로 주 없이 모두 『삼국지』 「조상전」 참고.
사마의는 당연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의 힘이 아직 조상과 맞서기에는 부족해서 그를 해치우려면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몇 년간 주변을 맴돈 뒤에 사마의는 두 번째로 다시 병에 걸린 척했다.
병에 걸린 척하는 것에는 이미 이골이 난 그였다. 먼젓번에 중풍에 걸린 척했을 때는 조조의 부하가 와서 죽이려는 시늉을 하는데도 침대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번 병도 당연히 중풍이 재발한 것으로 꾸몄으며 연기력도 한층 좋아졌다.
연극은 사마의의 태부 관저에서 벌어졌고 관객은 조상이 보낸 신임 형주자사荊州刺史 이승李勝이었다. 이승 앞에서 사마의는 시녀가 건네주는 옷도 받지 못했고 죽도 앞가슴에 질질 흘려가며 겨우 먹었다. 그리고 이승의 부임지도 형주가 아니라 병주幷州로 잘못 알아들었다.
이승은 그에게 다시 말해줘야 했다.
“제가 가는 곳은 형주입니다.”
하지만 사마의는 계속 엉뚱한 말을 했다.
“병주에 가는 것은 자네한테는 조금 억울한 일이지. 병주는 오랑캐 땅과 가깝지 않나. 부디 현명하게 처신하도록 하게. 앞으로 만나기 힘들 텐데 어떻게 해야 좋겠나?”
이승은 다시 말했다.
“형주입니다. 병주가 아닙니다.”
사마의는 그제야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아, 형주라고? 내가 자네 말을 잘못 들었군그려. 잘됐네, 잘됐어. 형주에 있으면 공을 세울 기회가 많지. 내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를 잘 부탁하네.”
말을 마치고 그는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이승은 돌아가서 조상에게 보고했고 조상은 마음을 놓았다.7
7 『삼국지』 「조상전」 배송지주의 「위말전魏末傳」 인용문 참고.
그러나 사마의는 은밀히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다가 병에 걸린 척한 지 2년 반 만에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궁정 밖에 나간 틈을 타, 벼락같이 쿠데타를 일으켜 단번에 그 강적을 쓸어버렸다. 조상은 우선 관직을 빼앗기고 이어서 멸족을 당했으며 형제와 파벌도 일망타진되었다. 그중에는 위진풍도魏晉風度의 대표자 중 한 명인 하안何晏도 있었다.
조상의 무능함이 그 사건의 전개 과정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쿠데타 당시, 사마의의 군대는 낙수洛水에 주둔했고 조상의 군대는 이수伊水에 주둔했다. 그리고 사마의가 낙양을 점령하기는 했지만 황제는 아직 조상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누가 건의하길, 천자를 위협해 먼저 허현許縣으로 가서 각지의 군대에 황실을 구원하라고 명하면 거뜬히 사마의에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조상은 그 적절하고도 실행 가능한 방안을 거절한 뒤, 저항을 포기하고 사마의에게 투항했다. 심지어 자신을 탄핵하는 사마의의 상소문을 황제에게 가져다 바치기까지 했다. 그때 조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공은 정권을 탈취하려고 할 뿐이니 정권을 내주면 그만이다. 나는 대장군이 될 수는 없겠지만 대부호는 될 수 있을 것이다!”8
8 『진서』 「선제기」 참고.
뜻만 크고 재주는 모자랐던 조상은 사마의가 얼마나 음험하고 교활하며 악랄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다. 조상이 아직 저항할 힘이 있었을 때, 사마의는 그저 관직만 빼앗겠다고 맹세했다. 심지어 조상이 집에 연금되어 있을 때는 일부러 사람을 보내 양식과 고기를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상 등이 모반을 꾀했다는 증거가 다 갖춰지자마자 전원 재산을 몰수하고 참형에 처했다.9
9 『삼국지』 「조상전」 배송지주의 『세어世語』와 「위말전」 인용문 참고.
조씨 가문은 처음부터 사마의의 적수가 아니었다.
어린 황제 조방도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꼭두각시도 사마의가 죽은 지 3년 만에 그의 아들 사마사에 의해 폐위되고 열네 살의 조모曹髦가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에는 꼭두각시 노릇을 달가워하지 않던 조모도 피살을 당해 열다섯 살의 조환曹奐이 황제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위 원제로서 조위의 마지막 황제였다.
역사에서는 조방, 조모, 조환을 ‘삼소제三少帝’라고 부른다.
사마의가 쿠데타에 성공한 뒤, 삼소제의 시대는 사마씨 가문의 시대로 바뀌었다. 사마의,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 사마사의 동생 사마소가 차례로 16년간 조정을 장악했다. 나라를 세우고 겨우 46년 동안 지속된 조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세월은 조씨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남은 일은 그저 사무 처리에 불과했다.
사마소는 먼저 진공晉公으로 책봉되고 이어서 진왕晉王으로 승격되었다. 함희咸熙 2년(265) 8월, 사마소가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 사마염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고 12월, 위 원제의 선양으로 사마염이 칭제稱帝를 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진 무제武帝다.
이 모든 절차는 조위가 후한을 대신한 것과 일치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후한의 꼭두각시 황제는 단 한 명이었던 것에 비해 조위는 여러 명이었고, 또 조씨 가문은 겨우 2대의 2명이 왕조를 바꾼 데 비해 사마씨 가문은 3대의 4명이 동원되었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인과응보를 연상시킨다.
역사는 공평해서 인과응보가 줄줄이 이어지곤 한다. 사마염이 죽은 지 겨우 1년 만에 기다렸다는 듯이 변란이 폭발했다. 그의 아들들은 폐위되었다가 옹립되고 옹립되었다가 또 피살되었다. 그의 왕조는 사분오열이 되어 다시는 회복되지 못했고, 더구나 제위를 찬탈하고 정권을 전복하고 나라를 분열시킨 자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의 육친이었다.
변란의 원인은 사마염 자신이 제공했다.
이 얘기를 만약 사마염이 하늘에서 듣는다면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바람은 원래 오랜 치세로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조위의 멸망을 교훈으로 삼아, 황제가 되자마자 제도 개혁을 실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잘못을 저질렀다.
사마염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봉건제를 회복시켰다.
서주 때 시행된 봉건제는 진시황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 후, 진나라와 한나라 양대에는 다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단지 전한 초에만 군현제와 봉건제를 결합한 군국제가 실시되었는데 결국 성이 다른 왕과 성이 같은 왕이 다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제국의 통치자들은 고조부터 무제까지 무려 100년 가까운 시간을 들여 겨우 사태를 수습하고 우환을 제거할 수 있었다.(이중톈 중국사 8권 『한무의 제국』 참고)10
10 기원전 202년, 유방이 황제가 된 지 얼마 안 돼서 연왕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다. 또 기원전 122년에는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모반을 꾀했다.
그 후로 제국은 다시는 봉건제를 채택하지 않았다.
물론 왕과 후侯는 계속 책봉했다. 그러나 한나라는 후만 책봉했고 위나라는 왕만 책봉했다. 더욱이 왕을 책봉하더라도 그것은 식읍을 주지 않는, 허울뿐인 ‘허봉虛封’이었다. 후한 말에 조조가 위공과 위왕으로 책봉된 경우만 ‘실봉實封’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던가. 후한을 대신해 왕조를 세웠다.
역사의 경험은 참고할 만하다. 그래서 조비가 황제가 된 후로 책봉된 국왕들은 다 작위만 있지 국토와 신하는 없었다. 혹은 명의상의 봉국封國만 있지 통치권도 군사권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부를 세우고 자신의 군대를 통솔할 수 없었으며 조정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위나라의 국왕은 실제로는 봉국에 연금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 또 어떻게 되었을까? 사마씨 가문이 위나라를 찬탈할 때 조씨 가문의 국왕들은 전혀 도움이 못 돼서 황제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사마염은 이것이 바로 위나라 멸망의 경험이자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황제가 된 해에 사마염은 황족 27명을 왕으로 봉하고 왕국마다 군대를 갖게 했다. 그중 대국은 3군, 5000명을 가졌고 중간 규모의 나라는 2군, 3000명을 가졌으며 소국은 1군, 1500명을 가졌다. 국왕은 한 지역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참여하고 재상이 될 수도 있었다.
성이 다른 사족은 공과 후에 책봉되었고 역시 실봉이었다. 그들도 봉국과 관리를 가졌을뿐더러 군공郡公, 군후郡侯, 나아가 그 밑의 현후縣侯까지 군대를 가졌다. 요컨대 국왕이든 공후든 전부 실력파였던 것이다. 사마염은 그들이 실력을 갖게 해야만 각자 중앙을 지키는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들은 모두 제국에서 이익을 취했으므로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팔왕八王의 난이 터졌다.11
11 팔왕의 난에 대해서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제82권부터 제86권 참고.
그것은 진 무제 사마염 사후 1년 뒤에 시작되어 16년간 이어진 정치 동란이자 골육상쟁이었다. 원래 위기가 곳곳에 잠복해 있던 서진西晉 왕조는 이 동란으로 급격히 쇠락하여 결국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그런데 이 폭탄의 도화선을 당긴 이는 그 국왕들이 아니라 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가남풍賈南風이었다.
가남풍은 진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의 황후이자, 사마씨 집단의 일원이었던 가충賈充과 곽괴郭槐의 딸이었다. 가충은 음험하고 교활했으며 곽괴는 질투가 심하고 사나웠는데 가남풍은 부모의 이런 성격을 전부 물려받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의 남편인 혜제는 무능함을 넘어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충직해서 그녀가 어떤 사고를 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12
12 진 혜제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바보 황제이지만 뤼쓰몐呂思勉 선생은 꼭 사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뤼쓰몐, 『중국통사』 참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 황후는 야심을 실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양楊 태후의 아버지 양준楊駿 때문이었다. 양준 부녀는 화음華陰 양씨 출신으로서 조상이 후한의 명신 양진楊震이고 가문의 지위가 지극히 높았다. 진 무제 사마염은 일찍이 이런 명문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어 황실의 명망을 높이고자 했다. 황족과 사족이 한마음으로 협력하기만 하면 황제를 보좌하는 양쪽 날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13
13 『후한서後漢書』 「양진전」, 『진서』 「양준전」, 판원란范文瀾의 『중국통사』 참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틀렸다. 현실에서 황족과 사족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고 가 황후는 이 갈등을 교묘히 이용했다. 진 혜제가 제위를 잇고 그 이듬해 3월, 그녀는 사마염의 다섯째 아들인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를 불러 조정에 들어가 태부 양준을 죽이고 양 태후를 폐하게 했다. 동시에 사마의의 넷째 아들인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도 불러 황제를 보필하게 했다.
이것은 물론 가 황후가 원래 바라던 구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세 달 뒤, 그녀는 양준을 죽인 초왕 사마위에게 명해 여남왕 사마량을 모반죄로 죽이게 했고 또 황제의 조서를 위조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위까지 죽였다. 사마위는 사족을 죽이고 황족도 죽이고 자기도 피살되었다. 사족의 대표자와 황족의 대표자를 모두 원귀로 만들어놓고서 차도借刀살인까지 한 가 황후는 마침내 정권을 장악했다.
뜻을 이룬 가남풍은 득의만만했다.
그러나 사마씨 가문은 계속 음모가와 야심가를 배출했다. 그래서 9년 뒤에는 이 여인도 폐위되어 죽임을 당했다. 죄명은 태자 사마휼司馬遹의 모살이었다. 사마휼은 혜제 사마충과 사숙원謝淑媛의 아들이었으니 당연히 가 황후의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사마휼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평민으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그가 피살된 것은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의 음모 때문이었다.
조왕 사마륜은 사마의의 아홉째 아들로서 원래 가 황후와 한통속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 황후에게 태자를 죽이라고 종용한 것은 자신의 정권 탈취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태자가 죽자마자 그는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를 일으켜 궁정에 들어가서 가 황후를 죽였다. 그 후에는 아예 진 혜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반란이 시작됐다.
제일 먼저 들고일어난 사람은 사마염의 조카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이었다.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호응한 이는 사마염의 열여섯째 아들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사마염의 사촌동생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사마염의 여섯째 아들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였다. 결국 사마륜은 패하여 피살됐고 진 혜제 사마충이 다시 제위를 회복했다.
정권은 이제 제왕 사마경의 수중에 떨어졌다.
사마경은 원래 사마륜과 같은 편이었다. 사마륜이 가 황후를 폐할 때 궁정에 난입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당시 사마경은 병사 백 명을 데리고 먼 길을 신속히 달려와, 황제 눈앞에서 가 황후의 외조카 가밀賈謐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가 황후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사마경이 답했다.
“황후를 체포하라는 조서를 받았소.”
“조서는 다 나를 통해 나가는데 너는 누구의 조서를 받았다는 것이냐?”
사마경이 대답하지 못하자 가 황후가 또 물었다.
“일을 벌인 자가 누구냐?”
“조왕이요.”
가 황후가 탄식하며 말했다.
“개를 묶는데 목이 아니라 꼬리를 묶었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안타깝게도 그녀의 후회는 너무 늦었다.
가 황후의 동지가 가 황후를 폐하고 또 사마륜의 동지가 사마륜을 죽였다. 이처럼 정치투쟁에서 영원한 친구란 있을 수 없으며 음모와 살육으로 건립된 서진 황실은 태생적으로 탐욕스럽고 악랄했다. 따라서 사마경이 집권한 지 얼마 안 돼서 동료인 장사왕 사마예에게 피살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마경을 죽인 사마예도 마찬가지로 토벌을 당했다. 과거의 두 동지인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낙양을 포위했고, 고립무원의 사마예는 결국 포로가 되어 적의 군중에서 사마영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사마예를 붙잡은 사람은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이었다.
사마월은 사마염의 사촌 동생이자 ‘팔왕의 난’의 여덟째 왕이었다. 앞의 다섯 명(여남왕 사마량, 초왕 사마위, 조왕 사마륜, 제왕 사마경, 장사왕 사마예)은 이미 죽었고 나중에는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이 사마월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엎치락뒤치락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사마월이 반격에 성공해 승리를 거두었고 패한 사마영은 피살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사마옹도 모살되었으며 진 혜제 사마충도 독살되어서 사마치司馬熾가 그 뒤를 이어 진 회제懷帝가 되었다.
5년 뒤, 사마월이 죽고 낙양이 외적의 공격에 함락되어 진 회제 사마치가 포로가 되었다. 2년 뒤에는 태자 사마업司馬業이 장안長安에서 제위에 올라 진 민제愍帝가 되었다. 그리고 또 3년이 지나 진 민제가 침입한 외적에게 투항함으로써 서진이 멸망했다.
진 무제 사마염의 위나라 찬탈부터 서진의 멸망까지 흐른 세월은 도합 51년이었다. 팔왕의 난부터 서진의 멸망까지는 25년이었다. 그리고 팔왕의 난의 종료부터 서진의 멸망까지는 10년이었다. 따라서 서진은 사실상 내홍 때문에 망한 것이며 외적의 침입은 단지 부차적인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마염이 당한 인과응보였다.
낙양과 장안을 함락시키고 서진 왕조의 멸망을 선언한 것은 어느 흉노인이 수립한 정권이었다. 그 후로 중국 북방은 이민족의 천하로 변했으며 진 황실은 장강 하류의 동남부 지역에 자리를 잡아 동진東晉으로 불렸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호십육국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 역사 시기는 서진 혜제 때 시작되어 남조南朝 유송劉宋까지 136년간 지속되었는데, 그사이 19개에서 20개에 달하는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중 어떤 정권들은 차례로 흥하고 교체되었으며 어떤 정권들은 같은 시기에 병존했다. 가장 많을 때는 중국 북방에 8개의 정권이 9~10년간 나란히 존재했다.
정권의 창립자는 대부분 이민족인 흉노, 갈羯, 선비鮮卑, 저氐, 강羌이었는데 이들을 합쳐 ‘오호’라 불렀다. 그중에서 선비인이 수립한 정권이 7개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저인이 4개였으며 흉노인은 3개였다. 갈인과 강인은 각기 1개씩이었다. 여기에 한족이 수립한 소규모 정권 4개까지 합하면 모두 20국이었는데 구지九池와 북위北魏를 셈에 안 넣으면 18국이었다. 보통 ‘16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염위冉魏와 서연西燕까지 제외해서 그렇다.
18국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16국의 이 흥망표는 두젠민杜建民, 『중국 역대 제왕세손 연표』 81쪽에서 인용.
이 오호십육국시대의 지도는 가와모토 요시아키川本芳昭의 『중화의 붕괴와 확대中華の崩壞と擴大: 위진남북조』 56쪽에서 인용.
아마도 이 나라 이름과 인명을 다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이른바 ‘16국’이 기본적으로 북방에 있었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 지도를 통해 이 현상이 왜 ‘오호난화五胡亂華’, 즉 다섯 이민족이 중국을 어지럽힌 것으로 일컬어지는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 나타난 것처럼 진 왕조의 강토 중 절반이 상실되고 말았다. 더욱이 관중 지역은 원래 주나라 문명의 발상지이며 장안과 낙양은 진, 한, 위, 진 네 왕조의 수도로서 중화문명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곳들이 통째로 ‘이민족 천지’가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많은 이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족의 전신은 화하족華夏族이었고 화하족의 근거지는 중원이었다. 심지어 주 성왕成王 시대의 청동기, 하존何尊에 새겨진 ‘중국中國’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낙양을 가리킨다. 이것은 현재까지 발견된, ‘중국’에 관한 가장 최초의 문자 기록이다. 따라서 낙양이 이민족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은 로마 제국이 로마를 잃은 것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더욱이 화하족에게는 줄곧 ‘중국’을 차지해야 정통이고 정통이어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관념이 존재해왔다.(자세한 내용은 이중톈 중국사 2권 『국가』와 3권 『창시자』 참고) 하, 상, 주, 진秦, 한, 위, 진晉이 모두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제 이민족이 “중국을 차지했으니” 그들이 천자가 되어 천하를 다스려야만 했을까?
이민족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한족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한족의 대표자는 유곤劉琨이었다. 유곤은 중원이 함락될 즈음에 ‘적 후방 전투’를 고집했던 서진의 장군으로서, 흉노를 배반할 생각이었던 갈족의 장군 석륵石勒을 시험하면서 이런 이유를 댔다.
“당신네 이민족은 어쨌든 천자가 될 수 없으니 우리 진 왕조에 와서 명신名臣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석륵은 예의 바르게 명마와 보물을 사신에게 딸려 보내면서 유곤에게 이런 회신을 전달했다.
“장군은 한족이니 당연히 진 왕조에 충성을 다하겠지요. 하지만 나 석륵은 원래 이민족이니 귀국의 일은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14
14 『진서』 「석륵재기상石勒載記上」 참고.
유곤은 이렇게 퇴짜를 맞았고 석륵은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석륵은 중국 북방의 다섯 이민족 중에서 최초로 칭제를 한 인물은 아니었다. 최초로 칭제를 한 인물은 흉노의 유연劉淵이었고 국호는 한漢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한나라의 합법적인 계승자라고 선언했다. 과거에 묵돌冒頓 선우單于(흉노의 최고 우두머리)가 유방의 사위였으므로 후대의 선우들과 한 황제는 사촌 관계인데, 지금 한나라의 적통이 끊겼으니 마땅히 자기가 대한 왕조의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유연의 주장은 널리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국호도 훗날 조카 겸 양자에 의해 조趙로 바뀌었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전조前趙라고 부른다. 갈족의 석륵이 세운 나라도 조인데 역사에서는 후조後趙라고 부른다. 전조는 후조에 의해 망했고 후조는 염위에 의해 망했으며 염위는 전연前燕에 의해, 전연은 전진前秦에 의해 망했다. 전연이 망한 뒤, 중국 북방은 잠시 전진의 것이 되었다.
전진은 저족氐族의 정권이었고 전연은 선비족의 정권이었다. 그래서 오호십육국시대의 전반기에 활약한 주역은 흉노(전진), 갈(후조), 선비(전연), 저(전진) 그리고 전진이 쇠락할 때 갑자기 등장한 강羌(후진後秦)이었다. 후반기의 주역은 당연히 선비였다. 그들이 건립한 북위는 무려 한 세기 가까이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