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광고하다
TBWA KOREA, 박웅현 ECD
오늘 아침은 나의 보물입니다
5시 40분, 원하는 시간에 정확히 울려준 나의 알람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준 나의 몸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몸을 수영장까지 데려다 준 평범한 나의 차와
그 차의 창으로 잠깐 느낀 신선한 아침 공기는 나의 보물입니다.
뛰어들 때마다 저절로 “아, 좋다” 말하게 만드는 수영장의 찬물과
그 물을 헤칠 때 온몸으로 느껴지는 물살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식탁에서 마주한 따뜻한 두부 한 모는 나의 보물입니다.
출근길 차 안에서 들은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나의 보물이고
그 목소리의 선율을 만들었던 베르디라는 사람은 나의 보물입니다.
구름 사이로 내리비치는 햇살, 장마로 약간 불어난 중랑천의 물길,
삭막한 시멘트 벽면을 부드럽게 덮어가는 담쟁이덩굴의 부지런함,
그 담쟁이덩굴에서 볼 수 있는 총천연색 연두색의 향연,
천변에 아무렇게나 핀 노란 들꽃, 그 들꽃을 살짝살짝 흔드는 바람,
그 바람을 헤치는 자전거의 풍경, 그 위를 나는 이름 모를 새의 날개짓,
물새들이 가끔 보여주는 이륙과 착륙의 경이적인 몸짓,
거기에 간지러운듯 반응하는 개천 물의 흰 포말…
출근길에 만나는 이 모든 풍경은 나의 보물이고, 천천히 달리며
이런 풍경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 교통 정체는 나의 보물입니다.
사무실에서 내가 직접 내려 마시는 녹차 한잔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 녹차와 함께 업무 모드로 바뀌는 나의 머리와
오늘 처리해야 할 열한 가지 일들은 모두 나의 보물입니다.
늘 그 자리에서 별문제 없이 내 명령을 기다리는 내 노트북과
바탕화면에 깔아놓은 보물 1448호 백자 사진의 단아함은
나의 보물입니다. 그리고 이 원고를 써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이렇게 원고를 쓰고 있는 이 순간은 나의 보물입니다.
오늘 아침은 나의 보물입니다. 나의 일상은 나의 보물입니다.
들어가는 말
‘인문학적’인 박웅현의 광고에 대해서
책이 나오기 열흘쯤 전에 박웅현과 만났다. 이 책과 관련된 만남으로는 마지막이었다. 인터뷰할 때는 자주 만났다. 인터뷰 끝나고 원고 쓰는 기간이 길었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안부 인사가 길었다.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광고의 성공 여부에 대해 물었다. 책 맨 뒤에 소개한 e-편한세상의 광고, 〈진심이 짓는다〉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본 박웅현이 만든 광고의 도착점이다.
“〈진심이 짓는다〉도 성공인 것 같습니다. 반응이 좋습니다. TBWA(박웅현이 재직하는 광고회사)가 건재하구나, 하는 칭찬도 좀 들었습니다.”
아파트 광고로서는 아주 신선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광고다. 무슨 이야긴지 궁금하신 분이라면 당장 책 맨 뒤(263쪽)를 보고 오셔도 된다. 그동안의 아파트 광고들은 부동산 거품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박웅현의 광고는 직설법으로 그런 광고에 반대한다. 집은 사는 게 아니라 사는 곳임을 강한 톤으로 말한다. 그런 점에서 감동적이다. 극장용 광고 〈북극곰〉은 환경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이 광고도 역시 인문학적인 가치가 돋보인다. ‘인문학적’이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어려운 것 아닌가 하는 선입견을 가지는 것 같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문학적’인 박웅현의 광고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마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가 100만 부 넘게 팔리는 인기를 누리는 이유와 같은 것이리라.
“제가 만든 광고 이야기라 좀 쑥스럽기는 합니다만, 그 〈북극곰〉도 성공적이에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일이 점점 더 많아지네요.”
“이 책도 박 ECD의 광고만큼 성공해야 할 텐데요.”
책으로 초점을 돌리자 박웅현은 잠깐 생각하더니 되묻는다.
“책의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역습을 당한 셈이다. 내가 인터뷰어고 박웅현이 인터뷰이다. 그런데 질문을 받게 되다니. 그러나 적시에 적절한 질문이다.
“글쎄요. 무엇보다 제 독자들의 관심을 얼마나 받게 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쓰는 일을 사람들에게 말 걸기라고 본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 중요할 테니까요.”
물론 그러려면 우선 책의 내용이 좋아야 하고, 잘 쓰여야 한다. 그러나 요즘은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정보 홍수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잘 쓰인 책도 제 독자의 손에 가기도 전에 스러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우리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해 평가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지만,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읽어본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면 그런 점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 ECD가 보기에는 이 책의 제 독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글쎄요. 아마도 창의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 독자가 아닐까요? 광고에 관심이 많은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광고를 소재로 창의성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광고 이야기라기보다는 창의성 이야기고요.”
“창의성에 대한 강의를 해보셨으니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좀 아시겠네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이제 서가의 먼지를 좀 털어야겠군요’ 아마 제가 인문학적인 책읽기를 통해서 창의성이 자란다는 것을 강조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서가書架라는 말부터 고리타분한 말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만큼 책을 읽지 않는 것 같고요.”
“그래도 최근 들어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인데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깝고요.”
“그래서 저는 책 읽기를 파도타기 같다고 말합니다. 왜 영화에서 파도 타는 모습을 보면 기가 차게 멋있어 보이잖아요. 그런데 처음 파도타기를 하면 잘 못 타니까 물만 먹겠죠. 괴로울 거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파도를 제대로 타기 시작하면 그 재미에 흠뻑 빠져버리지요.”
“파도타기라고 하니까, 패트릭 스웨이지가 주연했던 영화, 〈폭풍 속으로〉가 생각나는군요.”
“그렇죠. 그 영화를 보면 나도 파도타기 마니아가 되고 싶을 정도지요.”
“이 책을 보면 박 ECD나 제가 책 마니아로 보일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책 마니아로 보이고, 그 모습이 〈폭풍 속으로〉의 패트릭 스웨이지처럼 멋져 보이면 이 책을 읽는 사람들도 책 마니아가 되고 싶을 텐데요. 그렇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따름이겠죠?”(함께 웃음)
“희망 사항이 구체화되도록 꿈을 꿔보죠 뭐. 꿈꾸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특권인데, 우리라고 그런 특권을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리고 저에게는 소박한 바람이 하나 있어요. 한번은 저와 사진 찍는 박규호 씨 둘이서 포토에세이 전시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녀님들이 오셨는데, ‘광고하는 사람들도 생각이 이렇게 깊은지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 마음이 참 아팠죠. 그 수녀님들은 ‘깊은 생각이 담긴 사진’을 보고 광고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바뀌셨겠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은 게 우리 현실인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그래서 사람들이 가진 광고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너무 소박한가요?”
“아닙니다. 박 ECD로서는 당연한 바람이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책 앞부분에서 현대적인 광고 이야기를 쓴 거고요. 아무튼 그런 모든 바람이 이루어지려면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하겠네요.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성공은 많이 팔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고요. 기억나세요? 박 ECD가 좋아하는 김훈이 쓴 책, 《자전거여행》 서문을 보면 ‘사람들아 새 자전거 사게 책 좀 사봐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저도 책을 쓰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이 저렸거든요. 그 말을 제 상황에 맞추면 ‘사람들아 새 컴퓨터 하나 사게 책 좀 사봐라’가 됩니다.”
“처음 선생님이랑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나중에 따로 책을 한 권 쓰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 책 원고가 쓰이는 걸 보면서 나중에 따로 쓰지 않아도 되겠다 싶은 거예요. 딱 내가 쓰고 싶었던 바로 그 책이었거든요.”
다행이다. 독자들과의 만남도 이런 행운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프롤로그
박웅현은 보보bobo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애쓸 뿐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
박웅현이라는 이름은 대중에게 아직은 낯설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박웅현을 잘 알고 있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할아버지 대학생,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를 몸으로 보여주던 젊은 CEO,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엔 도전한다”고 하던 육군사관학교의 여생도가 나온 광고를 기억할 것이다. 또 과일가게 아주머니와 과일을 사러온 청각장애인 아가씨가 ‘문자 기능’으로 가슴 뭉클한 필담을 나누는 장면도 기억할 것이다. 저장된 전화번호는 많은데 걸 사람이 없는 경우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라고 하는 ‘군중 속의 고독’ 같은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려주던 “현대생활백서”라는 광고도 기억할 것이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로 시작해서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로 마무리하며 우리를 감동하게 만들었던 “사람을 향합니다”와 같은 광고도 기억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미 박웅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박웅현이 만든 광고의 ‘제작 과정’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런 감동적인 광고를 만들어내는 창의성은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궁금한 것이다. 사실 창의성에 대해 기술한 책을 읽어보면 귀신에 대한 설명을 보는 듯하다. 있지만 없는 것, 없지만 있는 게 귀신이다. 귀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물을 손에 쥐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물은 손을 적시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지만 곧바로 빠져나가버린다. 그러고 말라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창의성에 대한 책을 읽는 동안에는 찬물로 샤워를 하는 기분이지만 그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창의성이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창의성을 느끼게 해준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런 감동적인 광고를 만든 창의성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 책의 목적은 ‘박웅현이 가진 창의성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다. 그래서 우문愚問일지는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창의성의 비밀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죠.”
그날 박웅현은 며칠 뒤에 ‘창의성’에 대한 강의를 한 기업체에서 하는데 들으러 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강의에서 내 질문에 대해 답해주었다.
“2시간 만에 무슨 수로 창의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신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겁니다.”
2시간을 200시간이나 2,000시간으로 바꿔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창의성에 관련된 책 몇 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웅현은 “그러니 제가 만든 광고를 보면서 그 광고 제작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시지요”라고 했다. 그것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는 뜻이다.
박웅현은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었다. 구체적인 예는 ‘이야기’였다. 강의가 끝나고 일어서면서 보니, 청중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공감의 열기가 뜨거웠다.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아마 돌아가자마자 책을 주문하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한두 권은 사 볼 것이다. 박웅현은 강의를 하는 동안 자주, 창의성의 원천 가운데 하나가 인문학적인 소양이고, 그것은 좋은 책을 잘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나 또한 인터뷰 기간 중에 박웅현이 추천해준 새로운 책과의 만남을 즐겼다. 가장 큰 기쁨은 김화영의 책들이었고(그래서 그분을 간절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은 밀란 쿤데라와 카뮈, 그리고 《보보스》였다(물론 이것들 말고도 무수히 많다). 보보bobo란 부르주아 보헤미안Bourgeois Bohemian을 줄인 말이다. 보보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돈을 많이 번 로맨티시스트, 가치 중심의 삶을 추구하는 현실적으로 성공한 전문가 정도라고 보면 된다.
박웅현은 “김용옥 교수의 책에서 카를 마르크스를 형님이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스티브 잡스가 형님입니다”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는 미국의 전형적인 보보다. 그 말은 박웅현 자신도 보보라는 뜻이다. 《보보스》에서 정의한 보보는 이런 사람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는 신성한 모든 것을 경박한 것으로 바꾼다고 썼다. 그러나 우리 보보들은 경박한 모든 것을 신성한 것으로 바꾼다. 우리는 더럽고 물질주의적일 수도 있는 것들을 고상한 것으로 바꾸었다. 우리는 부르주아의 핵심적 행위인 쇼핑을 보헤미안의 핵심적 행위로 바꾸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술, 철학 그리고 사회적 행동으로 바꾸고 있다.
보보들은 미다스의 역逆방향의 힘을 갖고 있다. 즉 우리가 만지는 것은 무엇이든 영혼을 갖게 된다.
— 《보보스》, 데이비드 브룩스/형선호, 동방미디어, 2000/2001, 111쪽
《보보스》를 다시 읽으면서 이 책의 구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박웅현이 답을 준 셈이다.
늘 그래왔듯이 내용이 형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언제나 옳다.
《보보스》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고대 그리스 용어인 메티스를 오늘날 예일 대학의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코트가 다시금 부활시켰다. 그것은 실천적인 지식이나 수완, 혹은 육감적인 능력 같은 것이다. (중략)
이와 같은 능력은 가르치거나 암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전수받거나 습득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서 문법을 배울 수는 있지만 말하는 능력은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메티스 역시 점진적으로만 전체적인 그림을 형성하는 일련의 무작위적 습득을 통해서 얻어진다. 메티스를 공유하는 사람들은 강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하고 나란히 일을 한다. 메티스를 얻으려면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심으로 보아야 한다. 자세하게 관찰해서 사물의 실제적인 현상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과정에 대한, 사물의 상호관계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한다. 메티스를 습득하는 사람은 이론이나 상상이 아닌 행동으로 배워야 한다.
— 《보보스》, 145쪽
이 글에 나오는 메티스가 바로 창의성이다. 창의성을 가장 잘 배우는 방법 역시 ‘전수받거나 습득하는 것’이다. 전수받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스승과 함께 부대끼면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 강의를 듣는 것, 책을 읽는 것이다. 사람들은 첫 번째나 두 번째 방법을 늘 최고라고 하지만 묘하게도 인류는 그런 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다. 인류는 무엇이든 책을 통해 내리물림해왔다. 책 한 권에 담기는 낱말이 4만 개쯤이고, 그 4만 개가 만들어내는 의미망은 단순하지 않다(이 책은 3만 7,000개쯤 된다). 그 넓고 깊은 의미망에 푹 빠져 보면 안다. 책을 가장 잘 읽는 방법도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책 속에 담긴 ‘육감적인 능력’을 느낄 수 있다면 함께 호흡하면서 전수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박웅현의 창의력은 인문학적인 책들로 만들어졌고, 이 책을 쓰는 동안 나 역시 많은 책을 다시 읽었다. 책으로 무엇이든 배울 수 있다.
2
텔레비전을 가리켜 바보상자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그 말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비디오를 멍청히 들여다본다는 의미가 크다. 그러나 지켜보기만 했던 텔레비전에 변화가 왔다. 시청자의 손에 리모컨을 들려준 것이다. 리모컨을 두고 경박스럽게 채널을 여기저기로 돌리게 되었다며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리모컨이 텔레비전을 바보상자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고 볼 수도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것을 ‘그저 보던 자리’에서 능동적으로 ‘골라 보는 자리’로 이동시킨 것이다. 리모컨의 위력은 채널이 많아지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사람들에게 선택의 자유가 생기자 이번에는 방송사, 제작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선택받기 위해서는 좀 더 잘 만들기 위해서 고민해야 했고,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방송국이나 언론매체와 같은 발신자들을 더 긴장하게 만든 것은 인터넷이다. 인터넷은 사람들에게 리모컨보다 더 강력한 자유를 주었다. 이젠 채널 숫자가 곧 선택의 폭이라는 개념마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당연히 일방통행식의 소통 방식은 완전히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런 사회적인 환경의 변화는 광고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광고의 질과 내용을 바뀌게 만드는 동력이 된 것이다. 아직도 광고를 ‘사람을 자극해서 소비하게 만드는 악마’로 보는 사람에게는 리모컨과 수많은 채널, 인터넷을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게다가 ‘사람은 사회가 주무르는 대로 만들어지는 찰흙 덩어리도 아니고, 환경의 희생자도 아니’(《본성과 양육》, 매트 리들리/김한영, 김영사, 2000/2001, 114쪽)라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현대적인 광고’를 보면 좋겠다. 현대 광고가 아니라 ‘현대적인 광고’라고 말하는 이유는 현대의 광고 가운데에는 아직도 ‘광고 나부랭이’의 범주에 드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9년에 시작한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 사의 광고나 1984년 매킨토시 출시를 알리는 광고(둘 다 본문에서 소개된다)는 20년이 더 지난 광고지만 ‘현대적인 광고’들이다. 대중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중의 참여를 바라고, 대중의 공감(설득이 아니라)을 얻으려는 적극적인 예술 작품들이다. 마셜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의 말처럼 현대적인 ‘광고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예술 형식’이 되어가고 있다.
박웅현은 광고를 만드는 자세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광고 나부랭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물건을 팔기 위해 말하는 방법은 수천 가지가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하느냐는 것이지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옳은 말’을 하면서 광고 효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찾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언젠가 〈KTF적인 생각〉 광고 캠페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딱딱하고 일방적인 사회 구조에서 다양하고 수용의 폭이 넓은 사회로 변화하는 데 제가 만든 광고가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이 제가 느끼는 보람이기도 합니다.”
현대적인 광고는 제작 기술과 세련된 정도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정신을 얼마나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보스의 시대에는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중요하고,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하고, 시스템이 아니라 관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가치로운 선택과 실천이 중요하다. 기업들도 이미 ‘더 좋은 가치가 더 많은 이윤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3
그래서 이 책에서는 현대적인 광고에 대한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논리적인 글 속에 스토리도 슬쩍슬쩍 끼워넣으려고 한다. 논리란 세상을 단순화하는 방법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기 어렵다. 명징한 대신 현실적이지 않을 확률도 높다(그래서 논리는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소통할 수 있는 범위도 좁아진다. 그러나 스토리에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읽는 사람은 쓴 사람도 미처 깨닫지 못한 깨달음을 찾아내기도 한다. 규정하려고 들면 애매할지 모르지만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소통 도구인 말과 글과 몸짓이 신비로운 상징체계이기 때문이다. 논리가 그 신비스러움을 최소화하는 방식이라면 스토리는 최대화하는 방식이다. 독자는 스토리 속에 참여해서 자기만의 해석을 통해 자기만의 것으로(현실화)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웅현이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독자들에게 비춰 보여주는 거울이 된 ‘나’라는 인터뷰어의 캐릭터도 함께 드러내려 한다.
1부_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

1
감동에서 시작되었다, 사실은. 박웅현이 만든 광고 시리즈 〈사람을 향합니다〉 가운데 하나를 보고 놀랐다. 이건 시詩구나!
카피는 이렇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장면은 조금도 극적이지 않다. 우리 둘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감동스럽다.
우리는 기차가 달려 들어오는데도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는 용감한 사람에게 박수를 친다. 놀라움과 함께 감탄, 그리고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라면 그렇게 못했을 거야’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 크게 감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을 다룬 비디오를 보면 오히려 걱정이 된다. 어쩌면 그런 극단적인 상황 설정은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미리부터 ‘나는 못할 일을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밀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박수 치는 역할로 만족하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수많은 영웅 이야기를 다룬 비디오를 보면서 대리 만족으로 끝내거나, 로망으로만 남겨두듯이 말이다. 물론 ‘특별한 사람’ 축에 드는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도록 격려하게 되는 가능성도 없다거나, ‘꿈을 크게 꾸도록’ 만듦으로써 아주 먼 미래의 가능성도 만들지 않는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이 글에 담긴 이야기는 다르다. 보통 사람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준다. 감동은 특별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진 이타적인 유전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자기도 모르게’ 몸이 기울어지면서 저절로 손이 나간다. ‘생각’ 같은 것은 없다. 아이가 쥐고 있던 풍선을 놓치는 것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폴짝 뛰어 잡게 된다. 여기에도 ‘생각’ 같은 것은 없다. 누군가의 봉지가 뜯어지고 그 속에 담긴 것들이 흩어질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가던 길을 멈추고 주워준다. 끙끙대고 오르막길을 오르는 손수레를 보면 혹시 직접 밀어주지는 않을지 몰라도 밀어주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길을 가다가 뒤에서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자전거가 넘어진 것을 보면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가서 일으켜 세워준다. 누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자뻑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게 무척 만족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 광고는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은 이타적 유전자를 가진 감동적인 동물입니다. 우리 모두 말입니다.”
광고를 통해 이런 메시지를 내보내는 회사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만큼 멋진 설득 전략은 정말 다시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이 광고를 만든 기업도 이타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행렬에 슬그머니 끼어든다.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에게는 기업이 필요하고, 그 기업이 이타적인 유전자에 관심을 가진다니 반가운 일이다.
2
칭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편집자가 끼어들었다.
“너무 좋게만 말씀하시네요.”
그런가? 그렇지만 눈에 거슬리는 데를 찾기가 어렵다.
“글쎄요. 흠을 찾기 어렵네요. 카피를 잘 읽어보니 조사 사용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
내 오랜 직업의식이 순발력을 발휘했다.
“아이는, 풍선은, 손수레는, 길은`… 좀 어색하지 않아요? ‘을’이나 ‘를’을 써야 하는 자리에 ‘은’과 ‘는’을 썼어요. 강조하려는 의도로 그랬으리라 짐작합니다만(나중에 박웅현에게 물어보았는데 내 짐작이 맞았다) 이미지와 음악이 저만큼이나 강력한데, 더욱이나 자막은 빠르게 사라지는 것인 데다가 메시지 전달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본다면 잘못 쓰인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데 편집자는 밑도 끝도 없이 말머리를 돌린다.
“혹시 박웅현 ECD라는 분을 아세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선생님이 금방 이야기해준 그 광고 때문에 물어본 겁니다.”
“선생님은 무슨,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몰라요? 그냥 이름을 불러주세요.”
“하하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 광고도 박웅현 ECD가 만든 겁니다.”
“그런데 그분 이야기는 왜요?”
“조금 전에 길게 설명해주신 그 시 같은 광고, 그것도 박웅현 ECD 작품이거든요. 그리고 늘 말씀하시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것도 박 ECD 작품이고요.”
처음에는 박웅현 씨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ECD였다.
“ECD라고 했어요?”
“아, 예. 좀 묘한 직책이지요? 그게 이런 뜻입니다. E는 이그제큐티브Executive니까 CD들 가운데 대장쯤 된다 이런 뜻이고요, CD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입니다.”
“한국말로 하면 창의성 감독쯤 되겠네요.”
“창의적인 작품 제작을 위한 총책임자쯤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멋진 직책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보네요.”
“한번 만나보지 않으시겠어요?”
“이야기해보세요.”
사실 관심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줄기차게 써먹는 ‘카피’를 만들어낸 사람을 직접 만나본다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박웅현 ECD는 책을 많이 읽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TV, 책을 말하다〉에도 몇 차례 출연했어요. 광고업계 사람으로는 특별하지요.”
‘책을 많이 본다는 말’에 좀 더 마음이 갔다.
“박 ECD는 좋은 광고인이 되는 조건을 인문학적인 소양이라고 말할 정도니까 웬만한 사람을 붙여서는 이야기가 잘되질 않아요. 그래서 선생님을 생각한 겁니다. 선생님은 도서관에서 장서개발위원장까지 지내셨으니까… 뭐.”
이 말은 아마도 다른 사람과 몇 번 ‘붙여보았는데 잘 안 되더라’는 말일 것이다. 알마 출판사의 인터뷰집 시리즈를 읽어보아서 아는데, 내가 인터뷰 글을 쓰는 방식은 좀 다르다.
“그런데 제가 쓴 인터뷰 글은 읽어보셨어요? 방식이 많이 다른 편인데.”
“그럼요. 제가 박 ECD한테 보내드렸어요. 그분도 선생님 글을 다 읽어봤죠.”
3
박웅현과 CD라는 직책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박웅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꽤 많은 자료가 찾아졌다. 제일기획에서 제작국장을 지낸 적이 있고, 미국 뉴욕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TBWA KOREA라는 회사의 전문임원이라고 나온다. 이 전문임원이 ECD를 번역한 것인가 보다. TBWA는 세계적인 광고회사 그룹 옴니컴의 자회사로, TBWA KOREA는 국내 광고업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광고회사다. 인하우스(한국에서는 재벌 그룹에서 자기네들의 광고를 맡기기 위해 자회사를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런 광고회사를 인하우스라고 부른다)가 많은 한국이라는 상황을 감안하면 독립적인 광고회사인 TBWA KOREA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웅현을 만났을 때 CD라는 직책에 대해 물어보았다.
“사실은 광고회사에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PD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지요. 그런데 프로듀서라는 이름에는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뜻을 좀 넓혀 보면 CEO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입니다. 요즘 CEO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모든 리더들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야 할 겁니다. 시대적인 요구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광고회사에서만 그 이름을 쓰는 것이 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무 좋은 이름이니까요.”
위키피디아 백과사전(영문판)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에 대해서 찾아봐도 비슷하게 설명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은 광고,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쓰이는 직책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웹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서도 쓸 만한 직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설명은 해놓았지만 뒤에 이어지는 글은 주로 광고회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예를 들면 유명한 CD들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다들 광고회사의 CD였다. 그렇다면 광고회사에서는 언제부터 CD라는 직책이 생겼을까? 박웅현의 설명이다.
“글쎄요.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제일기획에 입사할 때만 해도 크리에이티브 디파트먼트Creative Department라고 부르지 않고 제작국이었습니다. 광고회사라는 업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세기 중반쯤이었는데 그때는 오늘날처럼 ‘광고 제작’이 아니라 광고 면을 판매하는 ‘스페이스 브로커’였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광고를 제작해주는 일까지 맡게 되었는데 광고 제작을 겸하면서 시작된 직책이겠지요. 그게 아마 19세기 후반쯤이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언제, 어느 회사에서 맨 먼저 이런 직책을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박웅현의 말대로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있다. 창의적으로 디렉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CD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감독도 그렇고, CEO도 그렇고, 출판사 편집장도 그렇다. 그런데 직책의 역할 가운에 무엇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창의성’에 방점을 찍어서 그것을 직책 이름으로 쓴 업계는 광고회사뿐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박웅현이 광고회사에 대해서 말한 것이 생각났다.
“컴퓨터와 생각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광고회사입니다. 광고회사에는 생산 라인이나 널따란 공간, 시설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 있으면 됩니다. 생각을 만들고, 생각을 파는 것이 광고회사거든요.”
그 생각이라는 것은 소통을 위한 창의력을 말한다. 박웅현은 이렇게 예를 들었다.
“연애편지를 쓴다고 해봅시다. 편지 하나에는 ‘보고 싶습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에는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라고 쓰여 있습니다. 누구 손을 잡아주겠습니까? 광고를 만드는 창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