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더글러스는 15년간 여성 잡지와 신문에 다양한 글을 기고하며 저널리스트로 활동해왔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의 꿈을 갖고 있던 더글러스는 첫 소설 《The Sisters》가 2013년 <마리 끌레르> 신인 소설상에 당선되며 작가로 데뷔했다. 《The Sisters》는 2015년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신인 작가의 소설 중 한 편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2016년 여름 발표한 더글러스의 두 번째 소설 《소피 콜리어의 실종 Local Girl Missing》 역시 영국 아마존 및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로 큰 인기를 얻었으며 세 번째 소설 《Last Seen Alive》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경희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영미계약법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처음에는 영상 번역 분야에 종사하면서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영화 등을 번역하다 출판 번역자의 길로 들어섰다.
Copyright © 2016 by Claire Douglas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17 by Gu-Fic
Korean edition is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The Agency Group Ltd. through Duran Kim Agency, Seoul.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Duran Kim Agency를 통해 The Agency Group Ltd사와 독점 계약한 도서출판 구픽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어느 나른한 오후, 막 점심을 먹고 난 뒤였어. 네가 죽었다는 걸 마침내 알게 된 건.
진동으로 해둔 휴대전화에 모르는 번호가 떴어.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에 치여 정신없는 상태에서 받았지.
“프란체스카 하우 씨인가요?” 남자의 목소리가 내 기억 속으로 파고들었어. 그의 따뜻한 시골 분위기의 음성은 미니멀리즘 스타일 가구가 있고 걸킨 빌딩(Gherkin, 런던의 랜드마크-옮긴이)이 보이는, 부모님 소유의 호텔 꼭대기 층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과거에서 온 거였어. 새벽에는 갈매기가 꽥꽥거리고, 부두에는 파도가 부딪히고, 피시 앤 칩스의 냄새가 공기에 스며들어 있는 서머싯 카운티의 내 고향에서.
“다니엘?” 쉰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고, 휴대전화를 잡지 않은 손으로 책상 모서리를 움켜쥐었어. 나 자신을 이 방, 현재에 묶어버리려는 듯. 그래야 내 어지러운 마음이 먼저 과거로 빠져들지 않을 테니까.
그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가 나한테 전화할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어.
너에 대한 소식이지.
“오랜만이네.” 그는 어색하게 말했어.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새끼 망아지처럼 다리에 힘이 풀려, 도시가 내다보이는 빗물 튀는 창가로 일어나 다가갔어. 폐에 공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고, 내 불규칙한 숨소리가 들렸어.
“소피 일이야?”
“그래, 발견됐대.”
입안에 침이 고였어. “살아… 있어?”
잠시 침묵이 흘렀어. “아니, 뭔가를 발견했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어. 그의 지금 모습을 상상해보려고 했어. 네 친오빠. 예전에 그는 키가 크고 말랐지. 언제나 검은 옷만 입었는데, 그게 머리칼 색깔과 길고 창백한 얼굴에 어울렸어. 10대들이 보는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처럼 얼굴빛이 나빴지. 그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걸 알 수 있었어. 그가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어. 네가 처음 실종되었을 때도, 경찰이 며칠에 걸쳐 덤불 지대와 해안 수색까지 한 뒤 수사 중단을 결정했을 때도, 네가 신었던 남색 아디다스 운동화 한 짝이 버려진 부두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어, 네가 브리스톨 만에서 실족해 바다로 쓸려간 것으로 추정된 후 사람들이 흥미를 잃었을 때도 그는 울지 않았지. 사람들은 떠나갔고,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잊기 시작했어. 어느 날 밤 클럽에서 사라진 소피 로즈 콜리어. 발랄하지만 수줍어할 때도 있는, 올드클리프 온 시 출신의 스물한 살 여자. 옛날 브리티시 텔레콤 광고를 보면서 울었고, 가수 자비스 코커의 팬이었으며, 비스킷을 남기는 법이 없던 여자.
다니엘이 목소리를 가다듬었어. “시신 일부가 발견되어서 브레안에서 세척 작업을 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어. “일치했어. 그 애의 시체야. 프랭키.” 나를 프랭키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니 이상했어. 너도 언제나 나를 프랭키라고 불렀지. 오랫동안 ‘프랭키’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었어.
브레안 샌즈의 해안에서 발견된 게 너의 신체 부위 어디인지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어. 너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싫었어.
넌 죽었어. 그건 사실이야. 이젠 더 이상 실종자가 아니지. 네가 기억을 잃고 호주나 태국(태국이 더 가능성이 있지) 같은 다른 곳에서 살아가고 있으리라 믿으며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어. 우린 늘 여행을 가고 싶어 했지. 동남아 배낭여행 계획 세우던 거 기억나? 넌 추운 겨울을 지긋지긋해했잖아. 마을을 휘감고 돌던 살을 에는 듯한 바람,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입안에 들어갈 정도로 길가에 모래를 날려 보내던 그 바람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지. 비수기의 올드클리프는 시끌벅적한 활기를 더해주던 관광객들이 없어서 더 우중충하고 음침했어.
숨을 쉴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셔츠 컬러 단추를 목에서 풀었어.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넬이 컴퓨터 작업을 하는 게 보였어. 빨간 머리칼을 번(작고 둥글납작한 빵-옮긴이) 모양으로 희한하게 묶었어.
책상으로 돌아가 회전의자에 몸을 던졌어. 귀에 댄 휴대전화가 뜨거웠어. “정말 유감이야.” 거의 나 자신에게 혼잣말하듯 말했어.
“괜찮아, 프랭키.” 정원의 바람 소리, 물웅덩이를 가르며 지나가는 타이어 소리, 행인들의 알 수 없는 이야기 소리가 전화기 뒤에서 들렸어. “예상 못했던 일도 아니잖아.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어.” 그는 어디에서 전화를 하는 걸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공식 확인 절차가 필요하대. 간단한 일이 아닌가 봐.” 그가 심호흡을 했어. “시신이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서 그렇대. 그래도 다음 주 중반 정도면 끝낼 거라고 했어.”
“경찰은….” 나는 짜증이 나는 걸 참았다. “소피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있대?”
“지금으로는 불가능하대. 시신이 없어서 부검도 못했잖아. 다들 그 애가 만취한 상태에서 실족해 바다에 빠졌다고 생각했고, 그 부둣가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너도 그때 상황 알잖아.” 목소리가 분노에 찬 어조를 띠었어. “하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아. 그날 밤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소피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 말이야.”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어. 대신에 책상 주변에 있던 문진을 움직여서 사진틀에 끼워두었던 내 사진을 폈지. 망아지를 타고 있는 내 옆에 아버지가 얼굴 한쪽에 미소를 띤 채 자랑스럽게 서 있는 사진이야. 아버지에게 나는 언제나 프란체스카였어. “왜 그렇게 생각해?”
“실종되던 날 밤, 그 애는 겁에 질려 있었어. 누군가 자기를 쫓아다닌다고 했고.”
피가 귀로 쏠렸어. 휴대전화를 더 꽉 잡았어. “뭐? 전에는 그런 얘기 안 했잖아?”
“경찰한테 말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어. 소피는 불안해했고 편집증 증상을 보였어. 약을 한 건 아닌가 생각도 해봤어. 그 주변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마약을 구할 수 있던 때니까. 하지만 소피는 약을 하지 않았어. 난 알아. 확실히 알아. 더없이 착한 애였어.” 그는 목이 메었어.
오빠는 우리가 애쉬톤 코트 페스티벌에서 약을 했던 사실을 모르지? 닷지(1990년대 영국의 인기 팝 밴드-옮긴이)의 공연을 보면서 쉴 새 없이 떠들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편집증적으로 약에 빠져들었다는 걸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눈을 감고 그 마지막 밤을 떠올렸어. 넌 클럽 ‘베이스먼트’ 구석에 서서 사람들이 ‘Born Slippy’(영국 밴드 언더월드의 히트곡-옮긴이)에 맞춰 펄쩍펄쩍 뛰는 것을 보고 있었지. 그날은 내 기억에 각인되어 있어. 1997년 9월 6일 토요일. 댄스 플로어의 반대쪽에서 디제이와 수다를 떨다가 자욱하고 탁한 담배 연기 사이로 문득 뒤를 돌아봤는데 네가 사라지고 없었지. 넌 겁먹거나 걱정하는 것 같지 않았어. 문제가 있었다면 나한테 털어놨을 거야. 난 네 가장 친한 친구였어.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었지.
“나 좀 도와줄 수 있니, 프랭키?” 다니엘의 목소리가 갑자기 다급해졌어. “소피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내야겠어. 뭔가 숨기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부두에서….”
“부두는 위험해서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잖아.”
“알아. 하지만 다들 거기 드나들곤 했잖아. 소피가 혼자 갔을 리 없어. 그날 밤 같이 갔던 사람이 있을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 절박감을 느낄 수 있었어. 내 마음도 저절로 빨려 들어갔지. 오랜 세월 동안 그날 밤 일을 계속 지워버리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어. 그러니 그에게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 거야.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겠고, 인생은 늪에 빠져버렸겠지.
“사람들이 나한테는 얘기를 안 하려고 해. 하지만 너라면 다를 거야.”
오빠는 너를 위해 이 일을 하려는 거야. 언제나 동생을 걱정했으니까.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글쎄. 런던으로 이사 온 후로는 가본 적이 없어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웠어. 사춘기 시절 동안 나는 우리가 자랐던, 밀실 공포증이 생길 것 같은 해변 마을을 떠나고 싶어 했어. 너도….
과거의 어두운 비밀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마을을.
그 비밀을 용서받지도 못할 그 마을을.
“부탁이야, 프랭키. 옛날 생각을 해 봐. 소피는 너와 가장 친했잖아. 아는 사람들도 비슷하고, 같이 놀던 사람들도 많잖아. 소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
“물론 알고 싶어.” 나는 대답했어. 18년이 지난 지금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는 그 마을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난 체념한 듯한 한숨을 억지로 참았어. “언제 가면 될까?”
◆
빨간색 털코트를 걸친 다음, 넬에게 딱딱한 말투로 몸이 좋지 않아 집에 가야겠다고 말했어. 넬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지.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그녀의 표정을 무시하고 사무실을 나갔어. 하이힐에 타이트 스커트 차림이었지만, 택시를 잡기 위해 빗속에서 종종걸음을 쳤어. 뒷좌석에 몸을 파묻자 종아리에 차가운 가죽이 느껴졌고, 머리가 아직도 어지러웠어. 택시는 이슬링턴으로 향했어.
네가 죽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났어.
이제 끝난 거야.
올드클리프에 돌아와서 과거를 캐는 걸 도와달라고 침착하게 청하던 다니엘과의 통화를 되새겨봤어. 몸서리가 쳐지는 걸 억지로 참았어.
절대 끝나지 않을 거야.
◆
널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해. 우리가 일곱 살이었던 1983년 9월이었지. 초등학교 입학날이었고, 우리 담임이었던 드레이퍼 선생님 교실 앞에 서 있었지. 길고 부드러운 머릿결에, 무상 안경(보건복지부가 빈곤층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안경-옮긴이)을 쓰고 있던 너는 왠지 쓸쓸하고 혼란스러워 보였어. 지저분한 흰색 양말이 야윈 다리에서 흘러내려와 발목 주변에 모여 있었지. 혹이 많이 나 울퉁불퉁한 한쪽 무릎에는 더러운 깁스를 하고 있었고, 녹색 교복 치마가 그 위를 덮고 있었어. 네 학교생활 도우미를 찾는다는 드레이퍼 선생님의 말에 나는 손을 번쩍 들었어. 너에게 친구가 필요한 것 같았거든.
◆
집에 들어섰어. 이상할 정도로 휑했지만 깔끔했어. 다른 사람의 눈, 바로 네 눈을 통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지금의 너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내 3층 주택을 보고 혼자서도 멋지게 살아왔다고 말할까? 아니면 늘 그랬던 것처럼, 다니엘과 비슷한 냉소적인 미소를 띠면서 아직도 파파걸을 못 벗어났다고 말할까?
복도 거울 앞에 멈춰 섰어. 서른아홉 살 전문직 여성이 거울 안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미용사가 신경 써준 덕분에 내 머리칼은 아직도 광채 있는 어두운 색을 유지했고, 흰머리는 보이지 않았어. 내가 늙은 것 같니? 넌 그렇게 생각하겠지. 넌 나이 먹는 걸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언제나 젊고 생기 있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영원한 스물한 살.
거울에서 고개를 돌렸어. 짐을 싸야 했어. 위층에 있는 침실로 갔어. 다니엘은 벌써 내 숙소를 잡아줬어. 친구가 하는 호텔형 아파트가 있는데, 2월은 비수기라 할인 가격으로 묵을 수 있대. 내일 아침에 갈 거야.
실질적인 일을 해야 했어. 옷장 선반에서 루이비통 여행 가방을 꺼내 침대 위에 펼쳐놓았어. 수많은 질문들이 경주마가 달리는 것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어. 며칠 예정으로 짐을 싸야 하지?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새로운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어. 마이크한테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하지?
◆
지하실 부엌에서 부산하게 채소를 손질하다가, 마이크가 날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마이크는 작년에 이 부엌을 수리해줬어. 그때는 우리가 동거하기 전이었지. 그전에도 안면은 있었어. 새 호텔 리노베이션을 도와줬거든. 탄탄하고 건장한 체격에, 머리칼은 엷은 갈색이었고 턱은 강해 보였어. 통하는 점은 없었지만, 처음부터 그에게 끌렸어. 주방 가구의 흰 광택과 두꺼운 코리안 석재 조리대를 보면 늘 우리 사이가 떠올라. 밖에서 보면 늘 깨끗하고 새로워 보이지만, 그 안의 연결 부분은 느슨하고, 찬장 하나에는 큰 금이 가 있지.
라디오를 켜고 볼륨을 높여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나를 감싸 흐르게 했어. 날카로워진 신경을 달래려고 했지. 큰 잔에 따른 메를로 와인도 도움이 될 거야. 두 잔 마신 다음, 내일 가져가려고 병을 짐에 넣고는, 저녁으로 스튜를 만들기 시작했어. 마이크는 놀란 것 같았어. 내가 집에 있는 데다가─보통은 늦게까지 사무실에 있거든─요리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 있어, 프랜?”
프랜. ‘프랭키’나 ‘프랭크’보다는 훨씬 어른 느낌이 나지. 섬세하고 성숙한 사람, 과거의 프랭키하고는 아주 다른 사람.
“왜 울고 있어?”
“양파 때문에 그래.” 거짓말을 했어. 앞치마에 손을 닦고는 몸을 돌렸어. 그에게 다가가 볕에 탄 볼에 키스했어. 뺨에 있는 수염의 거친 느낌을 즐겼지. 그에게는 벽돌과 콘크리트의 건조한 냄새가 나.
그는 나를 부드럽게 밀어냈어. “씻지도 못하고 돌아온 길이야. 샤워해야 해.” 그는 내 옆을 지나 방을 나갔어.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렸지.
저녁 식사 때 네 얘기를 꺼냈어.
“처음 듣는 얘기네.” 고기와 당근을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면서 그가 말했어. 누구한테도 네 얘기를 하지 않았어. 마이크는 물론이고 직장 동료들, 얼마 되지 않는 친구들, 심지어 전남편에게도. 우리는 과거에─지금도─너무나도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네 얘기를 하는 건 과거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되니까. 전부 지우고 새 출발 해야 했어. 그게 내가 그 사건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
와인을 들이켰어. “어렸을 때 가장 친했던 친구야.” 떨리는 손으로 잔을 식탁에 놓으면서 말했어. 포크를 집어 들고는 감자를 찍어 그레이비소스에 적셨어. “너무 친해서 엄마는 우리가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고 하실 정도였지. 하지만 소피는 19년 전에 실종됐어. 그 애의 시체─유골에 가깝지만─가 발견됐다는 사실을 오늘 알았어.” 포크를 내려놓았어. 식욕이 없었어.
“그렇게 오래 걸렸어? 젠장맞을 일이네.” 그는 “젠장맞을”이란 말을 실감하는 것처럼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의 창백한 눈동자 뒤에 있는 생각을 읽을 수 없었어. 그가 너에 대해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주길 원했어. 우리가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는지. 너는 어떤 사람인지 물어봐주기를.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는 모를 거야. 우리가 아홉 살 때 마돈나의 ‘True Blue’에 맞춰 춤추려고 안무까지 짰다는 걸. 내가 열세 살 때 자전거 창고 뒤에서 사이먼 파커와 키스하고는 너에게 처음 얘기했다는 걸. 네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나에게 털어놓았다는 걸. 내 목마를 타고 있던 너를 너무 웃기는 바람에 내 어깨에 오줌을 쌌던 사건도. 우리 우정의 이 작은 에피소드들을 레드와인과 함께 삼켰어. 마이크는 다시 식사를 계속했어. 고기를 기계적으로 씹으면서 레미콘처럼 입안에서 돌리고 돌렸어.
갑자기 와인을 그의 얼굴에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어. 어떤 반응을 보이나 싶어서. 친구 폴리는 마이크가 무사태평이라고 했어. 식상한 표현이지만 사실이야. 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에게, 내 문제에 공감하는 감정이 부족해.
우리 사이가 삐걱댄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그에게 동거하자고 말한 걸 후회해. 하지만 그는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날 붙잡아줬어. 그가 홀로웨이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자기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생들과 함께 사는 게 안쓰러웠어. 3주 전, 그와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아빠가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엄마의 전화가 왔어. 아빠의 충고를 따랐어야 했어. 아빠는 항상 남자와 동거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지. 남자와 동거해서 함께 한 집에서 생활하게 되면 떼어내기 힘들다고, 마치 매듭으로 묶인 두 가닥의 끈처럼 재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고 하셨어. 난 지금 이 관계에서 빠져나올 힘이, 매듭을 풀어낼 에너지가 없어. 식탁에서 일어나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렸어.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이크에게 내 계획을 이야기했어.
“소피 오빠 다니엘이 내가 묵을 곳을 잡아줬어. 휴가철에 사용하는 호텔형 아파트야.” 치마를 벗어 침대 의자에 던지면서 말했어.
그는 털이 거의 없는 근육질의 맨가슴으로 침대에 앉아 있었어. 난 아직도 그에게 빠져 있고, 그를 좋아해. 아직은 우리 사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
“빨리도 구했네.” 그는 내가 셔츠 단추를 푸는 모습을 보면서 숱이 많은 눈썹을 치떴어.
어깨를 으쓱했어. “비수기니까. 내가 호텔 싫어하는 거 알잖아.” 오랫동안 호텔에서 일하다보니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건 지긋지긋했어.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있는 곳, 식사도 따로, 출입구도 따로 있는 곳이어야 해.
“왜 하필 지금이야? 18년 동안 실종 상태였다며. 왜 이제 와서 진상을 밝혀내려는 거지?”
짜증이 등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어. 네 시체가 발견된 건 사건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잖아?
“이제는 소피가 죽었다는 게 확실해졌으니까.” 난 날카롭게 말했어.
그는 놀란 것 같았어. “올드클리프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있지도 않은 점을 팔 위쪽에서 잡아당기면서 그가 말했어. 같이 가겠다는 암시라면 무시해야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실크 캐미솔을 머리 위로 벗으면서 말했어. 그가 동행해주길 바라지 않아. 난 숨 돌릴 곳이 필요해.
“바닷가에서 자랐다니 재미있었겠네.”
난 딱딱하게 미소를 지었어.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파스텔 핑크 색의 기괴한 건물에서 자랐던 기억에 몸서리치지 않으려고.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전에 아빠가 그 집을 팔고 런던에 건물을 사신 게 다행이야. 사업에 관한 감각이 있었던 데다, 현금도 보유하고 있던 덕분이었지. 이불을 당겨 침대 안으로 들어가 마이크 옆에 누웠어.
“얼마나 가 있을 거야?” 그는 내 목을 애무하면서 가까이 당겼어.
“오래는 아니야.” 등을 끄면서 내가 말했어. “며칠이면 되겠지. 호텔을 오래 비울 수 없으니까. 지금은 아빠도….” 말을 삼켰어. 아직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어. 언제나 건강하고 유능하던 아빠는 이제는 병상에서 옛날 당신 모습의 그림자 속으로 사그라들고 있었어. 말씀도 못 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셔. 그렇게 되신 게 아직도 어제 일처럼 너무나 생생해. 나는 피곤한 척하면서 몸을 약간 움직여 돌아누웠어.
자는 척했어. 마이크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팔다리가 내 위로 무겁게 늘어진 다음, 문 뒤에서 가운을 집어 들고는 발끝으로 계단을 내려가 부엌으로 가서는 어둠 속에서 식탁에 앉았어. 레드와인 한 잔을 더 들이켰지. 고기 스튜 냄새가 아직도 부엌에 남아 있었어. 식기 세척기의 작은 적색 불빛이 반짝이더니 삑삑 소리를 내면서 작동이 끝났다는 걸 알렸어. 어둡고 텅 빈 부엌에서 그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낯설게 들렸어.
삶을 잘 정돈하고, 성공을 거두고, 앞으로 나아가고, 날마다 너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수 년 동안 열심히 노력했어. 털실로 된 공 안에 웅크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털실이 풀리기 시작했어. 털실이 풀리면 알몸으로 누운 내 모습이 세상 사람들 눈앞에 드러날 거야.
제이슨. 그 이름이 갑자기 떠올랐어.
와인을 계속 들이켰지만 심장이 뛰는 게 가라앉지 않았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이었지. 그때 숨겼던 어두운 비밀과 함께. 우리는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절대로.
일기를 쓰는 지금은 늦은 시간이다. 이해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약간 취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잊지 않으려면 지금 써야 한다.
프랭키가 돌아왔다!
오늘 밤에 그녀를 봤다. 모조에 있는 바에서 내가 모르는 남자 둘을 옆에 끼고 서 있었다(그중 하나는 완전 털보였다!). 내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프랭키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머리칼은 어디서도 알아볼 수 있다. 여전히 완벽하게 어두운 색으로 빛났고, 시트처럼 흘러내려 있었다. 그걸 보면 언제나 인형의 머리칼이 생각났다. 중국 인형의 두텁고 부드러운 머리칼. 그녀는 카멜 색깔의 인조 모피 코트(인조이길 바란다)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검정 부츠를 신었다.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면서 익숙한 감정인 꼬인 부러움을 느꼈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청바지 차림에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은 내가 초라하고 볼품없게 느껴졌다(오랫동안 사고 싶었던 남색 가젤 신제품이었는데도 그랬다).
그때 그녀가 몸을 돌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같이 온 남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마치 60년대 영화 스타처럼. 프란체스카 하우. 프랭키. 내 가장 친한 친구. 다른 사람들은 마치 배경처럼 희미해졌다. 그들은 모두 흑백이고 그녀에게만 색이 입혀진 것 같았다.
“소피! 세상에, 웬일이야!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방방 뛰면서 흥분으로 팔을 휘저었다. 저녁 8시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취한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술을 자제하지 못했다. 나를 격하게 끌어안아 이브생로랑 파리의 자극적인 향기에 파묻었다. 학교 다닐 때도 이 향수는 그녀의 상징이었다. 빈티지 모피 코트를 입은 그녀의 어깨에 내 코가 눌렸다. 중고 매장의 좀약이 주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녀는 나를 잠시 떼어내더니 팔을 뻗어 잡고는 나를 훑어봤다. “너 정말 달라졌구나. 진짜 예뻐졌어.”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 부분 염색 머리, 눈썹 왁스, 콘택트렌즈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키도 엄청 컸네! 내가 꼬마 같다.” 그녀는 웃었다. 나는 섬세하고 아담한 그녀에 비교하면 뚱보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카일리 미노그(호주 출신 인기 팝스타-옮긴이)처럼 자그마했지만 가슴은 풍만했다. 학교 다닐 때도 그녀의 가슴이 부러웠다. 나는 아직도 절벽 가슴인데.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학교를 떠난 후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생각하면서, 완벽하게 정리된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4년 전인 1993년이다. 그녀는 내 말에 “그렇게 오래 됐나?”라고 했다.
그녀는 열두 살 끝 무렵에 떠났다. 그녀의 부모님은 6학년 열등생 반에서 그녀를 빼내 브리스톨에 있는 일류 기숙학교에 보냈고, 거기서 A-레벨(영국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옮긴이) 과정을 마치게 했다. 우리는 서로 연락하자고 약속했고 한동안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집에 오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나는 그녀가 브리스톨 같은 대도시에서 밀리센트와 제미마스(매력적이고 화려한 여자를 상징하는 캐릭터-옮긴이)와 함께 보냈던 신나는 생활에 비해, 내 편지는 지루할 정도로 촌스럽고 바보 같아 보이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내가 엄마와 다니엘과 함께 살았던(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온 지금도 살고 있는) 주택 단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결국 편지 왕래는 흐지부지되었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여름에 가끔씩 함께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내가 워윅 대학에 들어가고 프랭키는 재수를 하면서 우리 사이는 약간 껄끄러워졌다. 물론 그녀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이 받았던 사교육을 생각하면, 우리 처지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 집안에서 대학에 간 사람도 내가 처음이었으니까.
방학 때면 프랭키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녀는 거의 집에 오지 않았다. 세이프웨이 슈퍼마켓에서 우연히 그 애 엄마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프랭키 엄마는 프랭키와 “학교의 부자 친구들”이 함께 집을 빌려서 학기 중뿐만 아니라 1년 내내 거기서 산다고 말해주었다. 프랭키 엄마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프랭키 아빠의 아이디어였는데, 그 사람은 늘 그런 식으로 딸을 망친다고 말했다. 나는 프랭키가 집에 오지 않는 걸 진심으로 비난한 적이 없다. 방학 때 갈 수 있는 다른 데가 있다면 나라도 여기에는 돌아오지 않았을 테니까.
때로 생각하곤 했다. 그녀가 멀리 떠나 있었던 건 돌아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돌아오게 되면 그녀는 떠올려야 했으니까. 내가 떠올리게 하니까. 우리가 열여섯 살 때 제이슨에게 일어났던 일을. 그 여름 이후 우리의 우정은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는 뭐든지 말할 수 있는 사이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얘기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이름을 입 밖에 내기만 해도 우리가 저질렀던 끔찍한 일이 떠오르니까.
“대학 생활은 어때?” 그녀가 덧붙였다. “넌 언제나 똑똑했잖아. 영문학과라고 했지? 늘 공부하고 싶어 했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관심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게 프랭키의 방식이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처럼 느끼게 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너는 어때?”
그녀는 나에게 손을 저었다. 그녀의 손톱은 마치 시체처럼 창백한 푸른빛 광택이 났다. “결국 카디프 대학에 들어가긴 했어. 경영학을 전공했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가 그러라고 했거든.”
“대단한데.” 말을 하긴 했지만 지루했다. “올여름엔 여기서 지낼 거야?”
그녀는 내 팔짱을 꼈다. “그럴 거야. 호텔 경영 분야에서 경력을 쌓길 아빠가 바라시거든.”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었다. “어쩔 수 없지. 너는 어떻게 지내?” 그녀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우아하면서도 딱 부러지게 들렸다. 마치 기숙사 생활을 통해 귀에 거슬리는 서부 시골식 R 발음을 없앤 것 같았다.
“모르겠어. 취업 준비 중이야. 출판사 쪽을 알아보고 있어.” 늦은 밤이면 나를 갉아먹는 듯한 불안감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듯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남은 인생을 엄마나 오빠처럼 올드클리프에 주저앉아 살게 되는 건 아닐까. ‘좋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고작 해변의 기름투성이 노점의 변태 같은 스탠 밑에서 일하면서.
프랭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험 성적도 내가 우수했고, 더 좋은 대학에 갔지만 그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프랭키처럼 돈도 많고 자식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부모님이 없었으니까. 워윅 대학에 다닌 3년이 이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보고 싶었어, 소피.” 그녀는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없으니까 학교생활이 예전 같지 않았어.”
나도 동감이었다. 그녀가 없다는 사실이 주는 무게감은 생각보다 더 컸다. 그녀는 내 첫 번째 친구였다.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내 팔을 잡고 바로 데려가서는 지갑을 꺼내 다이아몬드 화이트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 동안 지나간 시간들, 우리가 좋아했던 음악, 푹 빠졌던 밴드에 대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우리는 취향이 거의 같았다. 수다를 떨다 보니, 지난 3년의 공백은 사라지고 마치 바로 어제 만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중심가에 새로 문을 연 이 인디 음악 전문 클럽인 ‘베이스먼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중에 또 함께 오자고 약속했다.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종업원이 마지막 주문 시간이라고 말했다. 나는 함께 왔던 친구 헬렌을 찾아봤지만 오래전에 가버리고 없었다. 프랭키는 다이아몬드 화이트를 한 병 더 주문했다. 함께 잔을 비우며 그녀는 말했다. “마지막 즐거운 여름을 위해 건배! 세상에 떠밀려 나가 일자리와 책임감에 짓눌리기 전 마지막 여름을 위하여!”
우리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맥주에 취해서는 술기운에 깔깔대며 해변을 향해 팔짱을 낀 채로 비틀대며 걸었다. 방파제에 앉아서 바닷물이 발에 찰싹대는 것을 바라봤다. 공기에는 아직 더위와 습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했다.
한밤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지만 이제는 너무 흥분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내 친구가. 정말 보고 싶었다. 대학 생활은 즐거웠고 좋은 친구도 생겼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에 비할 수는 없다.
그녀는 내 소중한 어린 시절 추억의 일부다. 나에게 롤러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녀의 부모님 호텔에 있는 아늑하고 고급스런 방에서 밤샘 파티를 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호텔 식당에서 브런치도 먹었다(엄마, 오빠와 TV 앞에서 무릎에 차를 놓고 마시던 것과는 달랐다). 올드 부두에서 캔맥주를 마셨다. (엄청나게 작은) 내 침실에서 마돈나와 파이브 스타(영국의 인기 팝 그룹-옮긴이)의 춤을 따라했다. 교실 뒷자리에서 마로우 선생님의 가발 이야기를 하며 킥킥댔다.
그녀는 끔찍한 기억 속에도 존재한다. 나와 프랭키처럼 오래 알고 지내다보면 그런 나쁜 점도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을 망치지는 않을 것이다. 난 아직 취한 상태니까.
최고의 여름이 될 것이다!
차를 몰고 올드클리프 중심가를 지나갈 때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날은 후텁지근했어. 구름이 낮게 내려앉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지. 왼쪽에는 진흙 같은 갈색 모래와 더러운 식기 세척기 같은 색깔의 바다가 있었고, 멀리 해변 끝, 파도가 시작되는 곳이 어디인지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떠야 했어. 해변에는 웰링턴 부츠를 신은 사람들의 모습이 점처럼 찍힌 것 같았어. 그들의 코트는 바람 때문에 등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비에 젖은 말라빠진 개들에게 막대기를 던지곤 했어.
예전에 야외 수영장이었던 곳을 지나갔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여름 동안 대부분 거기서 시간을 보냈지. 이제는 판자로 둘러쳐져, 슬퍼 보이는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어. 마치 데이트 상대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연인처럼. 해안을 따라 펼쳐진 그랜드 부두는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의 정면과 밝은 빨강 레터링이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어.
호텔과 게스트하우스의 빅토리아 양식 테라스는 길 반대편에 서서 바다를 향해 있었어. 한때 우리 호텔이었던 곳, 내가 자랐던 그 호텔을 지나쳐 갔어. 캔디 핑크색이었던 벽은 이제 보다 세련된 파우더 블루로 바뀌어 있었어.
중심가는 약간 고급화된 것 같아. 호화 카페와 깔끔한 레스토랑 몇 개가 할인 매장과 싸구려 식당들 사이에 튀어나와 있었어. 하지만 마을 대부분은 변함이 없었어. 마치 시간이 1950년대의 어느 한순간에 멈춘 것처럼. 시끌벅적한 상점가는 불행히 아직도 그대로였지만. 시끄럽고 귀에 거슬리는 음악과 화려하게 번쩍이는 조명과 함께. 어렸을 때는 그게 좋았어. 코 묻은 돈을 죄다 그 10펜스짜리 오락기에 써버리곤 했지.
여름에는 마을이 전처럼 활기찰 거라 생각했어.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커플들은 해변 앞을 따라 걷고,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고, 연금 생활자들은 벤치에 앉아서 집에서 만들어 온 샌드위치에 차를 마시며 마치 대형 유람선에 탄 것처럼 바다를 쳐다보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지. 지금 이곳은 마치 유령이 사는 마을 같아. 내 과거의 기억 중 가장 끔찍한 것들을 모두 불러내.
중심가에서 나와 왼쪽의 해안 도로를 따라 차를 몰았어. 그리고는 봤지. 탁한 바다 위로 솟아오른 빅토리아 양식 유물을. 썩어가는 괴물이 강철 다리로 발아래 땅을 찌그러뜨리려는 듯한 그 모습을. 올드 부두. 네가 실종된 곳. 너는 좋아했지만 나는 싫어했지. 지금은 더 끔찍해. 차로 가까이 다가가자 내가 떠났을 때보다 더 황폐해진 모습이 확실히 눈에 들어왔어. 차로 더 들어가면 너와 다니엘이 자랐던 외곽 주택 단지에 닿겠지. 나에게는 아직도 그 모두가 친숙해. 마치 이 마을 지도를 뇌에 문신처럼 새긴 것 같아.
내 레인지로버를 도로변 주차 구역에 세운 다음, 시동을 끄고 앉아서 부두를 바라봤어. 우리가 거기에 갔던 시간의 기억들이 전부 밀려오도록. 10대였을 때는 제이슨과, 그 후에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과 함께 갔지. 1989년에는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어. 마을 중심부에서 멀리 나가 놀 수 있는 곳, 앉아서 평화롭게 레드 스트라이프 라거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 내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로 블러와 오아시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지. 우리는 부두 안쪽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고, 특히 끝에 있는, 오랫동안 방치된 별관 건물에는 절대 가지 않았지. 우리는 술집에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유령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 별관에서 추락사한 건설업자가 밤마다 출몰한다는 이야기.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갓난아기를 안고 바다에 투신자살한 여자가 빅토리아 양식의 잠옷을 입고 나타난다는 이야기.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겁에 질리는 걸 좋아했지.
이제 부두는 붉은색 글씨로 ‘위험: 출입금지’라고 적힌 대형 안내판이 걸린 출입 통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어. 하지만 임시 담장을 넘어 들어가는 건 아직도 쉬웠지. 그때도 이런 담장이 있었다면 그랬을 거야.
잠시 더 앉아서 빗물이 차 지붕과 바람막이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입에 거품을 문 성난 미친개 같은 파도가 철썩이는 모습을 바라봤어. 내려오는 길에 마을 외곽에 있는 주유소에 들렀어. 예전에는 엘프(Elf) 사 주유소였는데, 이제는 쉘(Shell) 사 주유소로 바뀌었어. 입구에 신문 가판대가 있었지. “시체가 해변에 떠내려오다”라는 표제가 지방지 1면에 대문짝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어. 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잘못된 것 같았어.
네가 처음 실종된 때를 잊지 못할 거야. 다음 날 네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걸 알고 네 엄마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셨지. 처음에는 나나 헬렌 집에 있겠거니 생각해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나중에 네 친구들 모두에게 전화해보고 허탕을 친 후에야 경찰에 신고하셨어. 너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때로부터 거의 24시간이 지난 즈음이었지. 경찰이 우리 모두를 조사했고, 해안 경비대가 며칠간 수색을 했지만 너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어. 경찰이 올드 부두 끝에서 네 운동화를 찾아낸 게 다였지. 그 후로는 수사가 지지부진했어. 경찰은 네가 올드 부두에서 실족해 익사했다고 믿는 게 분명했어. 공식 사망 판정은 없었어. 네 가족이 인정 사망 청구(장기간 실종으로 생존 가능성이 없는 경우, 유족의 청구에 의해 사망으로 인정하는 제도-옮긴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여전히 ‘실종자’ 상태야.
그리고 지금… 신문 표제가 내 눈앞을 다시 어지럽히기에 외면했어.
가야 했어. 거의 3시가 다 되었고, 다니엘과 만나기로 한 약속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었으니까. 마지못해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고 했을 때 부두 잔교에 있는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어. 마치 곧 바다에 투신할 것처럼 철책 쪽으로 몸을 멀리 기울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어. 어렴풋한 실루엣뿐이었지만, 하트 모양 얼굴에 긴 머리카락이 스치는 것으로 보아 여자 같았어. 꼭 너 같았어. 가슴이 떨렸어. 너일 수는 없어.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잔교에는 울타리가 쳐 있고, 발판은 썩은 데다 구멍들이 가득 나 있어서 그 위를 걸으려고 하다간 널빤지 사이로 빠지고 말 테니까.
낮게 깔린 해가 갑자기 회색 구름 사이를 뚫고 잔교를 비추는 바람에 잠깐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눈을 감아야 했어. 검은 점이 눈꺼풀 뒤로 춤추는 것 같았지. 다시 눈을 떴을 때 하늘은 다시 회색빛으로 바뀌어 있었고, 잔교에는 아무도 없었어. 햇빛 때문에 잘못 봤나 봐.
◆
휴가용 아파트는 올드 부두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높이 솟아 있었어. 우회전을 하면서 입이 바짝 말랐어. 내 차는 이제 해안 도로를 벗어나 가파른 힐 스트리트를 달리면서, 움푹 파인 곳들을 가볍게 가로질렀어. 길이 평평해지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아도 됐어. 그리고 뷰포드 빌라가 눈에 들어왔어. 커다란 베이 윈도우(돌출창. 실내에 구석진 부분을 만들기 위해 벽을 밖으로 내민 형태로 만든 창-옮긴이)와 화려하게 장식된 뾰족한 박공 지붕이 있는, 레몬색과 흰색의 빅토리아 양식 아파트 단지였어. 거의 똑같은 아이스크림 색 건물들로 이루어진 줄 사이에 서서 올드클리프 만에 접한 올드 부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마치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불만투성이 이모들이 줄 서 있는 것 같았어. 마을 이쪽은 웅장한 건물과 거주자 전용 주차장이 있어 언제나 더 고급스러웠지. 오래된 부두가 있는데도 말이야.
진입로로 들어서 자갈 위 금색 박스홀 차 옆에 주차했어. 정문 옆 낮은 벽 위에 한 남자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고 있었어.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다니엘을 한눈에 알아봤어. 뺨의 곡선, 긴 콧날, 똑바르게 자리 잡지 못하고 앞머리 위로 주저앉아서 계속 눈에서 쓸어 올려야 했던 어두운 색 머리칼. 그는 내 차 소리를 듣고 올려다보더니. 기대감에 찬 얼굴을 하고 펜을 귀 뒤에 꽂았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당기는 손이 조금 떨렸어. 여기 돌아온 게 왜 이렇게 불안하지? 회의를 하고, 까다로운 고객을 처리하고, 짜증나는 직원들과 지내는 것은 지금 느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스키니 진과 스틸레토 힐 차림이지만 우아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차에서 내렸어. 나를 맞아주는 차가운 공기가 마치 뺨을 때리는 것 같았지.
“프랭키?” 그는 담 벽에서 뛰어내려 나에게 천천히 걸어왔어. 여전히 늘씬한 몸에 팔다리가 길고 껑충하니 키가 컸어. 검정색 진과 어두운 색의 긴 오버코트를 입고 줄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어. 그는 노트를 코트 앞주머니에 찔러 넣었어. 멀리서는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인 스물세 살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날렵했던 모습도 나이를 먹어 둥글둥글해지고 살집도 붙은 데다,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던 머리카락도 조금씩 희끗희끗해진 걸 볼 수 있었어. 피부도 거칠어져서 해맑은 느낌이 덜했지. 내가 처음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BMX 자전거를 타고 단지 주변을 돌면서 우리에게 뽐내던 거야. 그때 그는 아홉 살이었지. 지금은 마흔한 살 먹은 남자고. 그렇게 생각하자 얼굴이 붉어졌어.
우리는 어색하게 포옹했어. 그가 찡그리는 듯 미소를 띠면서 나를 훑어보기에, 내 모습이 기억하는 것과는 달라서 실망한 건 아닌가 생각했지. “거의 달라지지 않았구나, 프랭키 하우.”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그가 말했어. “여전히 레이디 같은데.” 그 순간 나는 다시 그 자리에 가 있었어. 네 침실. 다니엘은 침대에 기대 누워서 냉소적으로 치켜뜬 회색 눈을 반짝이면서 우리를 놀리곤 했지.
나는 웃었어. “오빠가 날 레이디 프랭키라고 부르곤 했던 걸 잊고 있었네.”
“뭐, 넌 부자였으니까.” 그는 눈에서 머리칼을 쓸어 올렸어. 그 동작은 너무도 친숙하고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올랐어. 눈물을 참으려고 눈을 깜빡였어. 내가 왜 이러나 당황했지. 난 울보가 아니었어. 눈물하면 너였지. 우물가 가까이 살아서 눈물이 많은 거라고 내가 늘 놀렸잖아.
“난 부자가 아니었어.” 내가 말했어. 불편한 느낌에 말투가 생각보다 까칠하게 나왔지만, 소귀에 경 읽기라는 걸 알아. 늘 그랬지. 나는 큰 호텔 주인의 딸이었고, 너와 다니엘은 1960년대 후반 양식의 테라스와 지저분한 차고가 있는 주택 단지 주민이었으니까.
그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았어.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레이디 프랭키.” 그가 놀렸어. “소인이 아가씨의 성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어. 천장은 높았고 정교한 돌림띠가 있었어. 계단에는 부드러운 비스킷 색깔의 양털 카펫이 깔렸어. 층계참 양쪽에는 번호가 있는 문이 두 개 있었어. “네 방은 2층에 있어.” 내가 왼쪽 문 밖에서 멈춰선 것을 알아채고 그가 말했어. 그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니 넓은 사각형 층계참이 나왔어. 서로 마주한 문이 두 개 더 있었고 그 사이에는 작은 아치형 창이 있었어. 창으로 가 만을 내려다봤어.
“와, 경치가 정말 좋네.” 마음은 무거워도 그렇게 말했어. 매일 그 부두를 내다보면서 네가 실종된 장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어. 이제는 실종이 아니라 사망한 장소지, 속으로 바로잡았어.
그가 가까이 다가와 내 뒤에 서는 걸 느꼈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어. “부두를 내다보는 곳이어서 미안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가 말했어. “네가 중심가 호텔에 묵고 싶어 할 것 같지 않았거든. 이 아파트는 레이디 프랭키가 쓰기에 멋지고 완벽한 장소고.”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그는 농담을 했어. 돌아서서 그와 마주 봤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괜찮아.” 거짓말을 했어. “잘했어. 며칠만 있을 거니까….” 말소리가 잦아들고 우리의 시선이 멈췄어. 분위기가 달라졌어. 지난 18년 동안 말하지 못한 모든 일들과 함께 더욱 무거워졌지.
그가 먼저 시선을 피하더니 왼쪽 문으로 몸을 돌렸어. 크롬으로 된 숫자 4가 흰색 페인트 나무에 붙어 반짝였어. 그는 천천히 열쇠를 자물쇠에 꽂고는 문을 열었어. 너무 오랫동안 닫아 놓은 듯 퀴퀴한 냄새가 났어.
아파트를 안내해주는 그를 따라 걸었어. 방들은 쾌적하니 넓은 데다 바람이 잘 통했고, 벽에는 중성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지. 더블베드가 있는 작은 침실은 뒤뜰에 있는 쓰레기통들을 내려다보는 위치였어. 옆방에는 현대식 조리실이 있었고. 거실의 큰 베이 윈도우는 거친 회색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마호가니로 된 바닥이 내 부츠 아래서 삐걱거렸지. 우아한 가구가 비치되었고, 엷은 회색 벨벳 소파와 유리판이 놓인 낮은 커피 테이블을 볼 때, 어린애가 딸린 가족보다는 커플을 위한 방인 게 분명해. 구석에는 대형 TV가, 소파 반대쪽에는 무쇠 벽난로가 있었고, 그 옆에 장작이 쌓여 있었어. 화려한 방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았던 느낌이었고, 몇 주 동안 텅 비어 있었던 듯 퀴퀴한 냄새가 났어.
“침실은 하나뿐이야. 친구 말로는 다음 주 금요일까지 묵어도 된대. 놀랍게도 그 후에는 예약이 되어 있다네. 주말 휴가를 보내러 오는 사람이 있나 봐. 안 그랬으면 더 오래 머물 수 있을 텐데.”
낯빛을 유지하려고 애썼어. 하루이틀 묵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울 지경인데 일주일 내내라니.
“얼마 동안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아. 내가 호텔 책임자거든. 아빠가….”
다니엘의 몸이 굳는 것을 느꼈어. “너희 아버지 얘기는 신문에서 읽었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그가 말했어.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을 거야.”
놀라서 그를 쳐다봤어. 전국 신문의 경제면 사이에 조그만 기사로 났을 뿐이었거든. 아무도 그 기사를 읽지 않았으면 했어. 특히 우리를 기억하는 올드클리프 주민은 더더구나. 아빠는 지금까지도 자존심이 강하니까.
“그랬지. 심장마비가 심각해서….”목 안에서 생긴 덩어리를 삼켰어.
그가 손가락으로 내 팔을 쓰다듬었어. 그러더니 자신의 행동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떼고는 주머니에 찔러 넣었지.
아빠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 호텔 두 곳을 책임지고 있고, 세 번째 호텔을 곧 개장한다는 부담이 나를 무겁게 짓눌러. 헛수고나 하려고 시간 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야. 다니엘을 위해, 우리의 그 시절을 위해 온 거야. 그리고 너를 위해. 우리를 위해.
“이 블록에는 아파트가 몇 개나 있어?” 창 쪽으로 가며 물었어. 밖은 거의 어둑어둑해졌어. 그가 내 뒤를 따라왔어.
“위층에 둘, 아래층에 둘. 비수기라서 이번 주에는 아래층 방 하나에만 손님이 있는 것 같아.” 그가 얼굴을 찌푸렸어. “유령 나올 것 같은 이 큰 건물에 혼자 있어도 괜찮겠지?” 그가 웃었어. 한 방 맞은 듯한 기분이었어. 그의 웃음이 너무나 익숙했거든. 너하고 너무 닮았어.
“유령 같은 건 안 믿어.” 나는 무시하듯 콧방귀를 뀌었어.
“그레타도 안 믿어? 자기 갓난아기를 찾아 흐느끼던 유령,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그 유령 말이야.“
“집어치워.” 나는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그의 팔을 때렸어. “예전이랑 똑같네. 놀리는 데는 선수야.”
그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 그리고 나도 기뻤어. 오빠는 네가 사라진 후 이런 사이를 그리워했던 게 분명해. 너를 떠올리려고,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려고 나를 여기 오게 한 건지도 몰라. 네 실종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데 내 도움이 정말 필요한 걸까? 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아니면 우리가 가졌던 모든 것을 내가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오길 바랐던 걸까?
지금은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그 모든 걸.
◆
다니엘이 내 짐을 가지러 차에 간 사이, 거실로 가서 커튼을 걷었어.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부두는 검은색 실루엣만 보였고, 입구 근처의 구식 가로등 두 개가, 부러진 널빤지와 무너져가는 구조물을 마치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어. 멀리서 별관의 돔이 수평선에 잉크 얼룩이 찍힌 듯 어렴풋하게 보였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서 커튼을 닫았어. 차를 한 잔 끓이러 주방으로 갔어. 다니엘이나 집주인이 빵, 우유, 티백 같은 물건들을 사두었다는 데 감동했어.
“설탕 탔던가?” 머그컵 두 개를 들고 거실로 돌아오면서 물었어. 그는 내 가방을 발치에 두고 소파에 앉아 있었어. 벽난로에 불을 피워 놓았고.
“아니, 단 건 별로야.” 머그컵을 받아들면서 그가 싱긋 웃었어. “고마워.”
“오빠가 부엌에 있는 우유랑 티백 사다 놨어?”
그는 어깨를 으쓱했어. “필요할 것 같아서. 가방엔 뭐가 들은 거야? 팔 빠지는 줄 알았네.”
“몰라도 돼.” 그의 옆에 앉으며 놀리듯 말했어. “우유랑 티백 고마워….” 팔을 만졌지만 그의 몸이 딱딱하게 굳는 바람에 손을 떼어야 했어. 나머지 말은 입안에서 사라졌지.
그는 긴 손가락으로 머그컵을 감싸더니, 입김을 불고 나서 한 모금 마셨어.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목소리를 밝게 하려고 애쓰면서 물었어.
그는 얼어붙더니 머그컵을 세게 감쌌어. 그의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에 소박한 은반지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어. 누가 준 것일까 궁금해졌어. 아무 대답도 않기에 내가 기분 나쁘게 했나 걱정이 됐지. 난 사람들의 기분과 감정에 대한 직감이 있는 편이라,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면 언제 적당한 질문이나 완벽한 칭찬을 해야 하는지 알아. 사실 그 점이 자랑이기도 하고. 내가 일하는 업계에선 굉장히 쓸모 있는 수단이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의 에티켓은 잘 모르겠어. 친구의 시체가 발견된 후에 그 오빠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떤 이야기가 적당할까?
그는 머그컵 가장자리 위로 나를 올려다봤어. “혼란스런 시간을 겪었지.” 어깨를 으쓱했지만 창피해하는 것 같았어. “너도 알잖아.”
네가 오빠를 걱정하던 걸 기억하고는 고개를 끄덕였어. GCSE(영국의 고교 졸업시험-옮긴이)에 불합격한 데다, 일자리도 구하려 하지 않는다고 했지. 올드클리프에 영원히 주저앉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나서는 꿈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음악 말이야.”
심장이 내려앉을 것처럼 놀랐어. “아직도 밴드 해?” 그 밴드 기억나. 실력이 형편없는데도 주말마다 브리스톨에 가서 초라한 퍼브에서 연주를 했지. 다니엘의 기타는 나쁘지 않았어. 문제는 리드보컬인 시드였지. 음정을 제대로 잡지 못했거든.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지.
그는 빙그레 웃었어. “당연히 아니지. 음악을 만드는 것보다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데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 대학에 가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음악 담당 기자가 됐어.”
“와, 이곳을 벗어났네?”
그는 씁쓸하게 웃었어. “내가 어떻게 살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