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1932년 미국의 워싱턴 주 이스트 스탠우드에서 태어나 몬태나 주의 캘리스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애틀 퍼시픽 대학에서 철학(B.A.)을, 뉴욕 신학교에서 신학(S.T.B.)을 공부하고,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셈어 연구로 석사학위(M.A.)를 받은 뒤 미국 장로교단(PCUSA)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59년 뉴욕 신학교에서 성경 언어와 성경을 가르치는 한편 교회에서 파트타임 목사로 일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오로지 생계를 위해 시작한 목사 일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목회 소명을 깨닫고 목회자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3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메릴랜드 주의 작은 마을 벨 에어에서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를 시작해 29년간 목회했다. 이후 피츠버그 신학교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의 리젠트 칼리지에서 13년간 재직하면서 영성신학을 가르쳤고, 2006년 은퇴한 후로는 몬태나 주의 시골 마을로 돌아가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목사와 작가라는 두 가지 소명을 깨달은 뒤로 평생 그 소명에서 온전함을 이루는 일을 추구하며 걸출한 저작들을 남겼다. 성경을 이 시대에 맞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12년간 몰두한 끝에 2002년 《메시지》를 출간했고, 《목회자의 소명》, 《목회자의 영성》, 《한 길 가는 순례자》,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현실, 하나님의 세계》, 《이 책을 먹으라》, 《그 길을 걸으라》 등 30여 권의 책을 썼다.
옮긴이 | 박세혁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와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미국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의 박사 과정에서 미국 종교사를 공부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배제와 포용》,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 《소비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 《가치란 무엇인가》,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 《이렇게 답하라》 등 다수가 있다.
추천의 말
좋은 선배를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가 걸어간 삶의 궤적을 통해 그가 씨름한 고민, 그가 남긴 유산,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삶과 사역을 붙들어준 중심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유진 피터슨은 전 세계 모든 목회자의 선배, 목회자의 목회자로 여길 만한 분이다. 다윗의 손에 들렸던 다섯 개의 물맷돌(Five Smooth Stones for Pastoral Work, 이 책의 원래 제목이다)처럼, 이 책은 선배 목회자 유진 피터슨이 그의 후배 사역자들에게 전수해주는 목회 비법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목회자는 목회의 본질과 씨름하는 목회자이다. 그의 책들은 어느 책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지만, 목회자가 목회의 현장에서 고민해야 할 중요한 주제와 씨름하고 있다.
그는 목회에 있어서 기도, 이야기, 고통, 거절, 공동체와 같이 중요한 주제들을 신학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다룬다. 그의 글은 부실한 신학적 기초 위에 실용적이거나 윤리적 조언으로 범벅된 설교가 아니다. 그리고 현학적이거나 신학적 지식은 있으나 적실성은 상실한 가르침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목회자들이 무슨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씨름해야 할지 배울 수 있다.
더군다나 그는 이러한 주제들을 모두 성서에 기초하여 다루고 있다. 흔히 목회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무시되거나, 다루어져도 고작 윤리적으로 다루어지는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서와 같은 책에 기초하여, 목회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다섯 절기와 그 절기에 사용된 이 구약의 책들 속에서 그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학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성서에서 귀한 가르침을 길어내는 방법론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유진 피터슨에게 배워야 할 중요한 목회 방법론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가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깊이 있는 영성을 드러낸다. 일상 속에서 영성을 살아내는 것과 관련하여 그가 끊임없이 글을 써왔듯이, 그는 목회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영성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아니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지 그의 책을 통해서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글은 단지 중요한 주제를 성서신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적실하게 전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책 한 권에서 우리는 유진 피터슨이 후배 목회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많은 보화를 발견할 수 있다. ‘좋은 목회자’가 절실한 한국 교회, 이 척박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목회자’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우리 후배 목회자들이 이 책을 통해 무궁무진한 보화들을 발견하고 누려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성도들을 온전케 하는 일에 진보가 있기를 기도한다.
김 형 국
(나들목교회 대표목사, 《교회를 꿈꾼다》 저자)
추천의 말
유진 피터슨은 사랑이 많은 목회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낙담을 하나님과 부모의 마음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한다. 또한 들어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목회자로서의 무력감과 고뇌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사변적인 신학자는 아니다. 그래서 교리나 논리의 함정에 빠지거나 이념이나 종파의 울타리에 갇히지도 않는다.
그는 풍성한 감성의 작가이자 ‘이야기꾼’이다. 그래서 그의 깊은 묵상과 사색은, 우선 자신의 무력감과 고뇌를 넘고 사람들의 상투적인 생각을 넘어, 하나님나라의 지평을 계속 심화시키고 넓혀간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탁월한 설득력과 원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성서의 원뿌리들을 재미있게 풀어준다. 그래서 그의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경을 ‘복 받는 비결집’으로 전락시킨 한국 교회의 현실을 슬퍼하면서, 박제화된 ‘예수쟁이’들의 머리와 마음을 조용히 파고들어 잃어버린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그의 책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부디 유진 피터슨의 책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명예를 찾게 되기를 소원한다.
신 우 인
(포이에마예수교회 담임목사, 《예수의 첫 수업》 저자)
감사의 말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해진다”(잠 27:17). 이 책에 담긴 날카로움은 모두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 우리 왕 장로교회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의 친구들과 나눈 대화와 도전, 제안의 결과물이다.
나는 지난 17년 동안 그들과 더불어 예배하고 일했으며, 그들 가운데서 목회 사역의 기술을 배웠다.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준 친구들도 있다. 격려와 지침을 준 멘토들인 도널드 밀러Donald Miller 박사와 이언 윌슨Iain Wilson 박사, 원고를 읽고 비판해주어 책을 크게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준 동료들인 윌리엄 하퍼William Hopper 목사, 존 후드셸John Houdeshel 목사, 휴 매켄지Hugh MacKenzie 목사, 제프리 윌슨Jeffrey Wilson 목사, 성서 지향적인 목회 사역에 함께 헌신하며 나의 경험을 계발하고 심화시켜준 나의 형제 케네스 피터슨Kenneth Peterson 목사, 나의 누이 캐런 핀치Karen Finch, 나의 아내 재니스Janice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25년 넘게 친한 친구로 지내온 러스 리드Russ Reid의 통찰과 성원은 이 책을 시작하고 마칠 수 있도록 자극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도움과 헌신은 늘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내게 도움을 주었다.
차 례
추천의 말
감사의 말
여는 말
목회 사역을 위한 필수 요건 | 목회 사역의 다섯 가지 기초석 | 목회 사역을 위한 성경 사용법 | 성경적 목회 사역의 과제
1부 기도를 가르치는 목회 사역: 아가서
구원
아담
성
언약
몸
성만찬
2부 이야기를 만드는 목회 사역: 룻기
룻기와 오순절
짧은 이야기
상담과 심방
나오미와 룻, 보아스
족보
3부 고통을 나누는 목회 사역: 예레미야애가
배경
형식
역사
분노
존엄
공동체
위로
4부 ‘아니오’라고 말하는 목회 사역: 전도서
헛되고 헛되다!
나 전도자는
나는 생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너는 알지 못한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5부 공동체를 세우는 목회 사역: 에스더서
부림절
수산
하만
모르드개
하닷사
닫는 말
주
일러두기
본문에 인용한 성경은 대한성서공회에서 펴낸 새번역판을 따랐으며,
개역개정판을 인용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하였다.
여 는 말
목회 사역은 종교라는 귀부인의 손을 붙잡고 그를 일상의 세계로 데려가 친구와 이웃, 친지들에게 소개하는 것과 같다. 홀로 남아 있을 때 종교는 수줍고 소극적이며 사적인 것이 되고 만다. 아니면 한껏 멋을 내며 뽐내는 프리마돈나가 된다. 하지만 그런 종교는 인격적이지도, 일상적이지도 않다. 목회자는 무리와 섞여야만 하는 곳으로 이 귀부인을 데리고 가겠다고 고집한다.
목회 사역을 경시할 때 종교는 예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사적인 감정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경우이든 종교는 여전히 많은 일을 잘 수행한다. 신학은 심오하고, 명상은 신비적이며, 도덕적 충고는 현명하고, 예전은 화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귀부인을 공적인 광장으로 끌고 나오기 전까지 종교는 복음으로 생동할 수 없으며, 그 사상과 신념을 실제 삶의 상황에 비추어 시험하고 적용해볼 기회를 얻지 못한다.
목회 사역은 일상적인 것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독교 사역의 한 분야다. 그것은 종교를 현재의 삶에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초연함, 중립성, 의도적인 고립, 이론적인 내세지향성을 몹시도 두려워한다. 그것은 평상복 차림의 사역이다.
목회 사역은 모든 기독교 사역과 마찬가지로 성경이라는 근원으로부터 유래했다. 하지만 적어도 두 세대 동안 최신의 행동 과학이 만들어낸 관점이 목회자들을 위한 책을 지배해왔다. 이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우리가 급격한 변화의 세기에 살고 있으며, 우리가 대면하는 것 중 전례가 없던 것이 너무나도 많고, 지식과 기술의 엄청난 진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전 시대에 유효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모든 시간을 소비하더라도 최신 유행을 따라잡아야 한다. 훈련 방식을 개조해야 한다. 최신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 미래 충격의 시대에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을 익혀야 한다.
과거를 거의 존중하지 않고 과거에 대해 잘 모르는 분위기가 심해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가 목회 사역을 휘감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우리가 다른 이들과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지혜를 잊어버리고 있다. 즉, 하나님의 존귀한 실체를 잊고 있으며, 구속의 이야기 안에서 모든 개인적이며 지역적인 세부사항이 즉각적 중요성을 띤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가 사람들을 바라보거나 연구하는 방식, 그리고 그들과 일하는 방식에서 최신의 유행을 따라야 하며, 심리학과 사회학이 우리의 능력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켜서 우리를 새로운 인간의 잠재력을 성취할 수 있는 선구자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일은 시대를 더 잘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인간-과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일은 혁신이 아니라 연속성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인간의 조건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환경과 문화 속에서 시험을 당하고, 그러한 중에 신실함을 증명한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목회적 기술을 개발하고 목회적 소명을 키워나가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려 할 때, 가장 추천하고 싶지 않은 세기가 있다면 그것은 20세기다. 이토록 속임수에 매혹되고, 지겨울 정도로 많은 유행이 지나가고, 특효약에 중독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생에 물을 대는 영적 지하수에 접근하지 못하는 세기가 있었던가? 목회 사역과 관련해, 현재의 치유와 도움에 관한 학문들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묘사한 것처럼 폭은 1.6킬로미터에 이르지만 깊이는 3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플랫 강River Platte과 같다. 이런 학문들은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 목적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학문일 뿐이다. 심리학과 사회학이 20세기의 도움이라는 전문 분과와 결합된 것을 이해하기란 전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도 서로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피터 마린Peter Marin은 이렇게 불평한 바 있다. “도덕적으로 복잡한 상황에 대해 고려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역사와 더 광범위한 공동체에 대한 거부, 타자의 실종, 의지에 대한 과장, 모든 경험을 상투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태도-이 모든 태도를 거의 모든 현대 심리 요법 안에서 맹아적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1
성경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게 목회하는 것이 결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드문 것은 아니다. 성서신학 운동의 부상과 성취는 북미 대부분의 지역에 있는 강단과 교회 학교에서 가시적인 성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목회 사역의 분야에서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지난 50년 동안 설교와 성경 공부를 바탕으로 견고한 성경적 기초를 재건했더라면, 목회자들이 지속적으로 일하는 다른 사역의 분야들을 계속해서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주일 사이에 표준적으로 행했던 목회 사역-상담, 안내, 위로, 기도, 행정, 공동체 세우기-에 성경적 기초가 존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초가 없거나 적어도 눈에 띄게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와 교육에 관해 지침과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서재로 들어가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카를 바르트Karl Barth와 찰스 도드C. H. Dodd, 존 브라이트John Bright와 도널드 밀러, 조지 버트릭George Buttrick과 데이비드 리드David Read, 브레바드 차일즈Brevard Childs와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의 책을 집어든다. 성경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일에 관해 나를 이끌고 지원하고 격려하는 학자와 신학자, 설교자들,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나에게 가르쳐주는 훌륭한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다. 만약 내가 성경에 충실하게 설교하고 가르치지 못했다면 나 말고는 책임을 물을 사람이 없다. 교회사에서 이처럼 경건하고도 성경적인 학문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축복으로 누린 세대가 없었다. 그러나 월요일에 깨어나 한 주 동안 교인들을 섬기는 사역을 준비할 때,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han과 탤콧 파슨스Talcott Parsons,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와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의 책을 건네받는다. 이는 인본주의와 기술에 관한 책들이다. 강단은 예언자적, 케리그마적 전통에 기초하지만, 교회 사무실은 IBM 기계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가르치는 행위는 역사비평, 본문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을 통해 얻은 성경적 통찰에 의해 훈련을 받지만, 병실 심방은 정신과 의사와 의사들의 감독 아래서 이뤄진다. 20세기의 사회학자와 심리학자, 경영 컨설턴트, 공동체 활동가들은 탁월하다. 그들의 통찰력은 눈부시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용하다. 나는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불안하다. 내가 배운 기술에 관해 상당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목회자인가? 나는 다양한 역할을 적절하게 수행하지만, 날마다 내가 하는 일이 나의 선배 들인 예언자와 제사장, 지혜로운 자들이 했던 고대의 사역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견고하고도 권위 있는 토대인 성경적 기초가 존재하는가? 나를 가르치는 이들은 성경에서 본문 하나를 택해 그 본문이 내 편이 되어준다고 나를 안심시키지만, 명백한 사실은 그들이 장려하는 문화 속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목회적 동반자를 만나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 언약 신학, 성육신적 사고는 그들의 관심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 있으며 그들의 전문 분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나에게 능란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민첩하게 그 역할을 바꾸라고 가르친다. 그 결과 목회 사역에서 기술이나 유용성은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신앙의 세계에 속한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고, 내가 하는 일이 성경적 세계 안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느낌도 전혀 없다. 나는 책과 기사, 강연과 세미나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 내가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오리고 붙이며, 약탈하고 구출해낸다. 물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동료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한 후, 나는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더 많은 똑똑한 장치와 유능한 훈련 그 이상의 것을 원한다. 설교나 교육뿐만 아니라 목회 사역 전체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원한다.
목회 사역을 위한 필수 요건
목회 사역의 독특한 속성은 사역의 두 가지 측면을 결합한다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는 영원한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목회자가 사는 실제 장소와 그가 더불어 살고 있는 이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독특한 요소들 사이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만약 둘 중 어느 한 측면을 가벼이 여긴다면 좋은 목회 사역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최선의 목회 사역에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과 옛 아담의 죄를 물려받았지만 새 아담의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 사이에서 성경이 묘사하는 은총의 교회를 이야기하고 그 모형을 만들어낸다. 이런 교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은 한결같고 사람의 필요는 변함이 없다. 물론 하나님의 선물과 사람의 필요라는 확정된 두 극 사이에 변수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변수들이 발생하는 양상은 그래프를 그려서 역사 전체를 통해 상승하거나 하락하는 선으로 정리해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들의 뜻 사이에 반복적인 상호작용의 “사례들”이 존재할 뿐이다.
목회 사역에서는 마치 후대의 세대가 새로운 수준에 도달해 전 세대를 능가하거나 뒤처지는 것처럼 진보의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깊이를 발견한다. 켜켜이 쌓여 있는 증거들이 있고, 그것들이 걸러져 그중 일부는 지혜가 된다.2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목회 사역 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목회 사역이 성경적인 바탕과 목회적 전통-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특별한 교감이 일어난 증거-안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필수 요건이다. 그리스 신화의 안타이오스Antaeus 이야기는 이에 대한 경고다.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아들인 거인 안타이오스는 이미 거대한 자신의 힘을 보존하고 더욱 강화하기 위해 언제나 맨땅에 누워 잤다. 땅에 몸이 붙어 있는 한 그는 힘이 되살아났다. 이 거인과 씨름을 하던 헤라클레스Her-cules는 힘으로 그를 이겨 땅으로 내동댕이칠 때마다 대지모신이 그의 힘을 되살려내 그의 근육이 부풀고 사지에 원기가 충만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헤라클레스는 그를 아래로 내던지지 않고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려 그가 죽을 때까지 갈빗대를 하나씩 부수었다. 만약 목회 사역이 그 토대로부터 멀어진다면, 안타이오스처럼 그 일이 가지고 있는 복잡한 문제들과 씨름할 힘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무지 때문이든 망각 때문이든 성경의 목회적 전통으로부터 분리될 때 목회 사역은 우스꽝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그 하나는 우리 힘으로, 최선을 다해, 우리가 그들에 대해 품고 있는 자연스러운 긍휼과 관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순진하게 노력하는 모습이다. 다른 하나는 침실과 부엌, 쇼핑몰과 일터, 기업 이사회실과 정당의 집회장에서 생겨나는 다루기 어려운 모호한 문제들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양떼에게 강단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모습이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 우스꽝스러운 태도, 즉 순진하게 인본주의적으로 세상에 동화되는 태도와 세상으로부터 영적으로 초연한 척하는 태도를 예방하는 힘이 있다. 성경에서 그리는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 사이의 모범적인 상호작용은 목회적 능력을 얻고 그 능력을 새롭게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총의 놀라움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죄가 만연한 곳에서 목회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그런 사역을 하고자 한다면, 무언가를 빨리 성취하고 즉각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통일성을 지닌 동시에 다차원적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도널드 밀러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목회 사역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필수 요건이다. 사람들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들을 친밀하게 대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설교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에게 질문을 했다. 그는 “그 질문에 대해서는 강단에서 대답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심방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 강단이라는 거룩한 울타리 안에서 무리의 필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3
그러나 이 시대는 목회자들에게 이런 성경적 유산과 접촉을 유지하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영적 근간과 공동체의 안정성을 발전시키는 조용한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변화의 바람에 휩쓸려 임기응변으로 사역을 하지 않으려면, 목회자는 단호하게 자신의 발뒤꿈치를 땅에 묻어야 한다. “유행을 따르려고” 할 때는, 즉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할 때는 기술이 필요 없다. 신경증에 걸렸거나 강박적이거나 우울하거나 야심이 넘치는 남자와 여자들과 가끔씩 대화를 나누고, 아침에 20분 신문을 읽고 저녁에 30분 텔레비전을 보는 것으로 이 대화를 보충하면 “현대적”인 것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20세기에 목회자들이 시대에 뒤처졌다는 그럴듯한 비판을 나는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유행을 너무나도 잘 따라잡고 있다.
나는 현대 문화를 결코 경멸하지 않는다. 그것을 즐기며 그것에 참여한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환경이며 내가 그리스도의 일을 나누는 영역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나의 목회적 소명을 위한 양분을 20세기 미국 문화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확신한다. 솔 벨로Saul Bellow의 소설 속 등장인물 찰리 시트린Charlie Citrine은 이렇게 정확히 관찰한다. “어쩌면 미국은 예술과 내적 기적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외적인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은 거대한, 매우 거대한 기계 장치다. 그것이 더 커질수록 우리는 더 작아진다.”4 그 말은 곧 내게 가장 많은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분야에서 우리 문화는 가장 천박하다는 뜻이다. 나는 한결같은 신실함으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격려를 받아야 하고, 지역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에 몰입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목적에 대해 우리 사회는 엄청난 자원과 창의력에 집중한다. 방대한 양의 지식이 전산화되고 깜짝 놀랄 만한 과학 사업에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지혜롭지” 않다. 다시 말해, 살아가는 데에 능숙하지 않다. 사람들을 달에 보내는 과학자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과 잘 지내지 못한다. 국제적인 규모의 권력 투쟁에서 탁월하게 균형을 맞추는 정치인들은 그들과 가까이에서 사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우리에게 “실체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는 예술가들은 그들 안에 비열함이 가득하다.
20세기에도 직관적 깨달음의 순간들은 있을지 모르지만 더 큰 전망이나 더 넓은 관찰을 위한 시간은 없다. 특히 지식인들은 이전 시기에는 말로 표현해낼 수 있었던 경험의 차원들을 다룰 만한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5
또한 그들은 창조의 세부사항이나 구속의 무대와도 접촉하지 못한 채 대중 운동의 일반화와 제도화된 직업의 비인격화라는 흐름에 휩쓸려가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과학이나 정치, 예술, 학문에 대해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지혜의 교사가 될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창조의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에 응답하며 순전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일에 관해 그들은 유익한 조언을 제공할 수 없다. 그리고 목회 사역은 바로 그 일을 맡고 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읽는 법을 배우고 성경을 원어로 읽을 정도로 철저하게 성경에 몰입해 있는 사람이라면 최신 유행에 대해 예방접종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세기에 걸친 한 백성의 구원 이야기를 숙고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바울의 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오이디푸스Oedipus 이야기가 제공하는 실마리를 가지고 신화적인 억측을 하거나, 정신병에 관한 연구에서 유래한 최근의 모형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과학적 방법이라는 거짓 주장을 일삼는 사람들의 모호한 글에 매혹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나돗의 예레미야의 고백적인 기도보다는 프레드릭 펄스Frederick Perls의 게슈탈트 요법gestalt therapy에 더 정통해 있다. 평화에 관한 예루살렘의 이사야의 말보다는 기업들이 소비자들에게서 폭리를 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워싱턴의 랠프 네이더Ralph Nader의 말을 더 능숙하게 인용한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John Calvin보다 이반 일리히Ivan Illich의 개혁 사상에 더 열광한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대담한 주장보다 카를 융Carl Jung의 영지주의적 원형을 훨씬 더 잘 이해하고 더 높이 평가한다. 우리가 주일에 사용하는 성경은 월요일이 되면 최신 조직학 입문서나 상담 안내서, 잡지의 사설로 재빨리 대체된다. 그러나 목회 사역에서는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가 아니라 옛 지혜를 흡수함으로써, 최신 서적을 읽음으로써가 아니라 옛 책들을 소화함으로써 전문 지식을 수집한다. “지식은 지능이 아니다.”6 이 일은 지역적인 것과 인류에게 본질적인 것-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스피노자의 말로서 특정한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만물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옮긴이) 정의된 일상적 실존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을 다루기 때문에 이런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 일에 몰두했던 사람들의 축적된 경험이 이 일을 잘 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최선의 자양분이다.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우리 시대는 그런 식의 접근 방법을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목회 사역의 오랜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유행 속에 휩쓸리고 말 것이다. 혹은 계절에 따라 치맛단이 올라가고 내려가듯이 바뀌는 죽음과 환생의 거짓 주기에 대응하는 목회 전략을 개발하려고 애쓸 것이다. 우리 시대에 목회 사역은 그런 과정-대학원, 베스트셀러 목록,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최신 여론조사 결과 등 가용한 것은 무엇이든 허겁지겁 필사적으로 끌어모아 날림으로 지은 건물-에 따라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목회 사역에 역사적 깊이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던 클레브시Clebsch와 제이클Jaekle은 “무엇보다도 우리는 불연속성의 의식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음을 애통해한다”라고 말했다.7 그러나 사용할 마음을 먹는 이들은 성경을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더 나은 목회 사역을 위한 기초석을 발견할 수 있다.
목회 사역의 다섯 가지 기초석
따라서 성경에 접근할 때 성경이라는 기초와 목회라는 상부구조 사이의 구별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는 목회자의 일상적 사역 안으로 그대로 가져와 적용할 수 있는 목회 사역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은 복잡하고 거대한 혼합물로서, 그 안에서 그리스도와 피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이 “일상의 우주”라고 부른 것 안에서 작동한다.8 각 문화와 각 세대, 각 회중은 저마다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세대의 목회자들이, 그리고 어느 정도는 목회자 각자가 자신만의 목회 사역이라는 상부구조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기초를 설계하지 못하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성경에서 자신의 사역을 위한 기초석을 찾으려고 할 때 목회자들은, 자기네 마을이 파괴된 후에 마을로 되돌아가는 고대인들과 같다.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역사를 재구성해준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마을을 건설했는지 알 수 있다. 고대인들이 그곳을 마을이나 도시의 터로 고른 것은 대개 농업이나 전략과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다. 그곳은 물을 댈 수 있거나 약탈자들로부터 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곳이었다. 혹은 두 가지 조건을 다 충족하면 더 좋다. 그 터 위에 세워진 집과 성소, 성벽은 매우 자주 파괴를 당했다. 어떤 경우는 자연 재해-화재나 지진-의 결과로 파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군사적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도시는 폐허로 변하곤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은 아니었다. 그곳은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돌아와 재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시는 옛 도시와 달라 보였을 것이다. 때로는 돌아온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이나 구브로 사람, 이집트 사람들한테서 새로운 설계 방식을 배워 와 다른 양식으로 건물을 지었다. 때로는 요새를 더 강화하는 방법을 배워 새로운 성벽을 더 두껍고 튼튼하게 세우기도 했다. 다시 지을 때 그들은 이미 있는 재료-오래된 기초석-를 사용해서 같은 터 위에 지었다. 주거지의 지층을 탐사해보면 고고학자들은 여러 세대의 주민들이 같은 기초와 같은 기초석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 속에서 이 시대에 목회 사역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고대인들처럼 파괴의 시간이 지난 후 폐허로 돌아가 어떻게 여기서 재건을 시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목회적 전통과 목회적 기술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우리는 시편 74편에서 묘사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이렇게 훼손하였으니
…
그들은 나무를 도끼로 마구 찍어내는
밀림의 벌목꾼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도끼와 쇠망치로
성소의 모든 장식품들을 찍어서, 산산조각을 내었습니다.
주님의 성소에 불을 질러 땅에 뒤엎고,
주님의 이름을 모시는 곳을 더럽혔습니다.
그들은 “씨도 남기지 말고 전부 없애 버리자” 하고 마음먹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 뵙는 장소를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시 74:3-9)
예를 들어,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공들인 심방 사역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새뮤얼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가 보여준 탁월한 영적 권면의 서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버밍엄Birmingham의 오라토리오회를 이끌던 뉴먼Newman이 강조한 바 있으며, 분명히 목회 사역에 필수적인 기술 중 하나인 “인내의 능력passion of patience”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정교하고 미묘한 심방의 능력 대신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당을 가득 채울 수 있게 해준다고 약속하는, 전도라고 잘못 명명된 집단 방문 운동을 위한 훈련을 받는다. 영적 권면을 담은 편지 대신에 우리는 본래 대중매체를 위해 만들어진 표어를 사용한다. 인내의 본보기 대신에 우리는 그저 사기를 북돋는 말을 건네며 교회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치어리더처럼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둔한 회중이 그런 말에 반응하려고 하지 않을 때는,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참아낼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다른 회중을 찾아나선다.
우리에게는 어떤 징표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예언자도 더 이상 없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아무도 이 일이 얼마나 오래 갈지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모욕하는 저 대적자를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 원수를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시 74:9-10)
그러나 우리는 폐허 위에 서서 재건을 위해 어떤 돌멩이를 사용할지 고민했던 최초의 사람들이 아니다. 목회 사역의 역사는 사역이라는 평원 위에 있는 커다란 언덕이다. 그 일을 했던 선배들의 층이 선명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층, 베네딕투스의 층, 프란체스코의 층, 루터의 층, 칼뱅의 층, 웨슬리의 층, 키르케고르의 층이 있다. 그리고 모두가 성경에서 찾은 돌멩이들을 활용했다.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 한 가지는 정처 없이 다니며 새로운 건물터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재건은 성경이라는 터 위에서 성경에서 찾은 기초석을 사용해 이뤄져야 한다.
이 일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성경적 문서가 있다. 예를 들어, 신명기는 이 일을 위해 한 차례 이상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명기는 옛 족장과 출애굽 전통을 가져와 새로운 상황에 맞게 재처리해 요시야 시대에 목회적으로 활용된 문서다. 마태복음은 메시아적 공동체인 교회가 사도 시대의 케리그마적, 교훈적 자료를 목회적으로 활용한 예다. 그 밖에 다른 예도 있다.
이러한 다른 자료들, 더 소박한 자료들 중에 메길롯, 즉 우리가 아가서,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서라고 부르는 히브리 성경의 다섯 두루마리가 있다. 이 책들은 어쩌면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서 야심적인 면과는 가장 거리가 먼 책들일 것이다. 어떤 책도 특별히 위대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책들은 모세오경이나 예언서와 동급이 아니다. 그중에는 가까스로 정경의 지위를 얻은 책도 있다. 하지만 모두 성경 안에 포함되었다. 로이드 베일리Lloyd Bailey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켜준다.
…성경 안의 모든 이야기는 그 정체성이 (어느 정도는) 그 이야기에 의해 확인되고 유지되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전제한다. 따라서 모든 세대가 공유하는 지혜에 의해 그 이야기가 반복되고 후대에 전해지고 소중히 간직된다(즉, 정경화된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를 통해 “시험을 거쳤고” 가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9
메길롯이 목회 사역을 위한 문서로 적합하다는 점은 유대교에서 이 문서를 활용하는 방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의 중요한 다섯 예배 절기에 이 책을 읽도록 정했다. 이 다섯 축제 때 하나님의 백성은 팔레스타인의 온 마을에서, 디아스포라로 흩어졌던 그 길을 되돌아와 그들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기 위해, 찬양과 순종과 믿음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동기부여와 지침을 얻기 위해, 그들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안에 정향定向하기 위해 모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배하기 위해 돌아왔다. 메길롯은 이 축제를 규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을 해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축제 동안 누군가 일어나 정해진 두루마리를 읽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하나님과 맺은 언약 안에서 살기로 다짐한 사람들의 삶의 한 양상을 살찌울 수 있었다. 더불어 다섯 두루마리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자신들의 삶에 관심을 집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적용된 목회직의 지혜였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룻기는 오순절에, 애가는 아빕월 제9일에, 전도서는 장막절에, 에스더서는 부림절에 읽었다.
이 다섯 두루마리를 다섯 번의 연례 예배 절기(네 번의 축제와 한 번의 금식 절기)에 읽도록 정한 것은 목회적 상상력을 탁월하게 발휘한 예라고 생각한다. 누가 그렇게 정했는지, 심지어는 언제 정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관습에 대한 최초의 문서 증거는 주후 8, 9세기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제2성전기에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섯 두루마리를 예배라는 특정한 케리그마적 맥락에 자리 잡게 할 때 놀라우면서도 예상치 못했던, 목회 사역에 관한 통찰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했던 것을 지금도 다시 해볼 수 있다.
메길롯을 현재의 목회 사역을 위해 재활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스라엘이 반복적으로 성경을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로 전해진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존경심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고, 그 의미를 묵상한 다음, 현재의 상황 속에서 그것을 적용하며, 바로 여기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살아낸다. 우리는 성경적으로 “그럴듯한 모양을 만들기” 위해 현대 목회적 삶을 고대적 틀 안에 집어넣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성경적 자료 안에 분명히 드러난 좋은 목회 사역의 생명력에 다가가 그것을 우리 시대에 활용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성경의 재활용은 그 자체로 성경적인 행위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그렇게 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역사를 단순히 주기적으로 반복하지 않았다. 각 세대가 어떤 것은 후대로 넘겨주고 어떤 요소는 무시하고 가끔은 혁신적인 것을 도입하기도 했다. 전통에 대한 의존과 전통 안에서의 자유가 공존했다. 성경의 모든 페이지가 그들이 그렇게 했음을,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떻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야훼 신앙에서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가져와 새로운 형태로 만들었다. 이사야는 시온과 다윗의 전통을 새로운 방식으로 선포하고 발전시켰다. 신명기는 출애굽 경험과 모세의 지도력을 새롭고 독창적으로 활용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과 백성의 소명을 깨닫기 위해 옛것의 여러 요소를 창의적으로 사용했다. 에스겔은 (20장에서) 출애굽과 광야의 경험이라는 거룩한 전통을 완전히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6세기 망명기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게 만들었다. 신구약의 거의 모든 페이지가 옛 전통을 이처럼 창의적으로 다룬 결과물을 보여준다.
각 세대가 참신한 해석을 더했지만, 그렇게 하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성경을 만들고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은 루이스C. S. Lewis가 《사랑의 비유The Allegory of Love》의 첫머리에서 주장했던 바를 예증한다. “인간은 역에서 기차표를 건네듯 말을 건네지 않는다. 말은 살아 있기 때문에 언제나 움직이지만 절대로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지금도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10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새로운 상황에 맞게 옛 전통을 적응시키는 이 과정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역사와 하나님의 연속성을 보존하고 그것이 일련의 무관한 행위로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정당한 방법이었음”을 자세히 논증한 바 있다.11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모든 목회 사역은 편집 행위, 즉 오늘의 공동체를 위해 성경적 설교와 교육을 수정하는 행위, 케리그마적 충실성과 목회적 감수성을 결합하는 행위다.
유대교에서 예배 행위 안에 자리 잡은 메길롯의 책들은 각각 목회 사역의 한 양상을 다룬다. 즉, 구원의 맥락에서 사랑하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일(아가서),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맥락 안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일(룻기), 구속적인 심판의 맥락에서 고통을 다루는 일(애가), 섭리적 축복의 맥락에서 종교적 망상과 경건을 가장한 기만을 폭로하는 일(전도서), 세상의 적의라는 환경 속에서 축제의 신앙 공동체가 되는 일(에스더서)에 관해 이야기한다.
목회자가 하는 모든 일이 다섯 영역에 들어맞지는 않지만,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이 그 안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메길롯이 목회적으로 매우 유용하게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메길롯은 목회 사역이라는 건축을 위한 유일한 모퉁이돌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두어야겠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자갈도 아니다.
목회 사역을 위한 성경 사용법
메길롯이 목회 사역에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예배라는 맥락 안에서다. 그런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읽고 연구할 때 메길롯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다. 예배 행위(유월절, 오순절, 아빕월 제9일, 장막절, 부림절) 안에서 낭독되는 메길롯에 귀를 기울일 때, 이 책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바위층 안에 박혀 있는 보석은 그 나름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캐내서 자르고 광을 내고 반지를 만든 다음 손가락에 끼웠을 때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기능과 모양을 갖게 된다. 메길롯을 규정된 예배 행위 안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유대교에서는 그 역사적 배경 안에서는 분명하지 않았던 효과가 드러나게 했다. 목회적 지침과 통찰을 제공했으며, 그 목회적 기능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으며, 원래부터 있던 것을 목회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뿐이다.
공동체의 예배라는 맥락에서 메길롯을 사용함으로써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과 교회 안에서 여전히 유효한 진리를 입증했다. 즉, 목회 사역은 예배 행위에 그 기원을 둔다. 공동체(“공동”) 예배는 목회 사역을 위한 성경적 배경이다. 공동 예배를 떠나서 목회 사역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목회 사역 그 자체로는 아무런 정체성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파생된 일이며, 예배는 그것이 파생된 원천이다.
예배할 때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함께 모여 성경과 설교, 성례전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 선포된 말씀이 믿음을 낳고, 그 믿음으로부터 찬양과 순종, 헌신의 반응이 나타난다. 성경적 신앙, 혹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삶이 이런 공동 예배와 상관없이 존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의 예배에 자주 그리고 꾸준히 참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 관한 사적인 생각으로부터 종교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그분의 구원의 사랑을 나누라고, 주고받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형제자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 채, 그들이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사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구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모든 목회 사역은 이런 예배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주일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예배하자”는 초대의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일은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축복의 말과 더불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목회 사역은, 교인들이 예배하면서 듣고 노래하고 말하고 믿은 바를 삶 속에서 실천할 때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은 주일 사이에, 첫 번째 날과 여덟 번째 날 사이에, 창조와 부활의 경계선 사이에서, 창세기 1장과 계시록 21장 사이에서 이뤄진다. 주일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 위에 신앙 공동체의 삶을 확립한다. 주중의 목회 사역에서는 사람들이 위기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 속에서 일하고 사랑하고 고통당하고 슬퍼하고 놀고 배우고 자랄 때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그 말씀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펼쳐 보인다. 예배에서는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찬양과 순종으로 응답하게 한 다음, 그 찬양과 순종의 의미를 살아내도록 사람들을 공동체 안으로 보낸다. 그러나 그저 그들을 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그들과 동행한다. 목회 사역은 그러한 동행의 사역이다. 목회 사역은 강단과 세례반, 성찬대에서 시작한다. 그것은 병실과 거실, 상담실, 회의실에서 계속된다. 예배할 때 사람들을 이끄는 목회자는 예배 행위 사이에서는 바로 그 사람들의 동반자가 된다.
공동 예배로부터 단절된 모든 목회적 행위는 서서히 그러나 반드시 그 성경적 특성을 잃어버리고 만다.12 그것은 고립된 치유와 위로, 안내, 권고의 행위-아름답지만 생기가 없는 잘라낸 꽃 같은 사역-가 되고 만다. 물론 그런 사역도 잘 한다면 여전히 쓸모가 있다. 그러나 성경적 기원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사역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을 위해 의도하신 통전성을 만드는 케리그마적 현실을 펼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다섯 예배 행위 안에 자리 잡은 다섯 메길롯은, 예배 안에서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케리그마적 전통이 어떻게 일상 속에서 지속되고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예증한다. 이 두루마리들은 예배 행위를 통해 선포된 복음의 실체를 죄가 전형적으로 왜곡하거나 약화시키거나 기피하는 영역을 골라, 복음의 실체를 개인적이며 현실적인 것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교정책과 훈련, 통찰을 제공한다. 그런 맥락에서 활용할 때 메길롯은 목회적 문서가 된다.
성경적 목회 사역의 과제
성경적 목회 사역을 재건하고자 할 때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지역적이고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말을 구사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엘리엇T. S. Eliot은 다른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역적 문제에 관한 지역적 연설은 온 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연설보다 더 뜻이 분명한 경향이 있으며, 반대로 모호한 표현과 애매한 일반화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례는 대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연설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13
메길롯의 책들은 각각 “지역적 문제에 관한 지역적 연설”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순종의 명료성을 권장하며 주중의 신앙의 특수성을 장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의 사역을 위한 작업 모형이 된다.
목회자는 위대한 복음의 선포와 회중이라는 산지를 걸어 다니다가 간식과 모닥불-웅장한 환경 속에서 휴식과 회복을 제공하는 지역적인 사례들-을 대하는 등산객처럼 메길롯을 만난다. 높은 산맥의 경치가 아무리 웅장해도 그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피로를 풀어야 하며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목회자의 책무는 이 등산길을 함께 걸으며 지역적이고 구체적이며 개인적인 어법과 행동 양식을 구사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만나는 모든 사람을 단지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보편성 안에서 특수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르트의 말처럼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성령은 “익명의 거대한 힘이 아니라” 전적으로 구체적이며 언제나 인격적이시기 때문이다.14
메길롯은 목회자가 주일 사이에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소박하고 제한적이며 일시적이고 평범한 장소들 속에서 목회 사역의 이러한 세부사항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주는 다섯 가지 사례들이다.
그녀는 한 친구의 추천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 어려움을 겪어오면서 여러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해보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전화로 상담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그녀가 나의 서재로 찾아왔을 때가 첫 만남이었다. 그녀가 던진 첫 마디는 “목사님은 저의 성생활을 전부 알고 싶어 하실 테죠. 의사들이 늘 그렇듯이 말이에요”였다. 나는 “만약 자매님이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저는 듣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자매님의 기도생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진지했다. 그녀가 만난 정신과 의사들이 그녀의 성생활을 자세히 알고 싶어 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즉,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그녀의 기도생활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첫 만남에서 나는 그녀의 성생활에 관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섹스는 친밀한 관계를 묘사할 때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나중에 자신과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기도의 언어를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목회 사역에서 언제나 교차하는 두 가지, 성생활과 기도가 나란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능력, 즉 친밀한 관계를 맺는 능력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목회 사역의 많은 부분은 친밀한 관계를 키워주는 것, 즉 사랑을 잘 표현하고 받아들이는-공유하는-관계를 계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관계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자매와 형제, 이웃과 아는 사람, 고용인과 피고용인, 친구와 적, 부자와 가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