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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련의 작품을 지금껏 퀴어 문학으로 읽지 않았다면
대체 어떤 방향으로 읽었단 말이지”
소설가 박서련 추천
전지적 퀴어 시점으로 ‘다시' 읽는 지하련
“나는 진정 네가 좋다! 웬일인지 모르겠다.
네 작은 입이 좋고, 목덜미가 좋고, 볼따구니도 좋다!”
1940년 지하련이 최정희에게 보낸 편지의 한 문장이다. 이 편지는 2014년 다수의 언론에서 이상이 최정희에게 보낸 연애편지로 소개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편지가 “남자가 여자한테 보낸 연서"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착시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지하련과 최정희가 나누었던 감정의 실체를 오롯이 파악하지 못하게 가록막는 원인이 이성애규범적 독해의 관습이라면 이러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지하련의 소설을 ‘다시’ 읽을 때 우리는 어떠한 새로운 앎에 도달할 수 있을까.
옮긴이의 글 중에서
퀴어문학 전문 출판사 큐큐에서 지하련 작품집 『이따금 난 네가 몰라져서 쓸쓸탄다』가 출간된다. 지하련 작가는 1940~1947년의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촉망받는 작가였다.
그동안 지하련을 다시 읽기 위한 시도가 여럿 있었으나, 『이따금 난 네가 몰라져서 쓸쓸탄다』가 독자에게 보여주는 시각은 전작들과 조금 다르다. 우리가 지금껏 지나쳤던 소설 속 ‘퀴어성’을 발견하고 탐독할 수 있도록 다섯 작품을 선별해 실은 까닭이다.
작품집에는 미니픽션의 형태로 수록된 박서련 작가의 추천사도 함께 수록된다. 지하련 편지에 대한 최정희의 답신 형태로 쓰인 추천사를 실은 소설가 박서련은 “이 작품들을 지금까지 퀴어 문학으로 읽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라고도 전했다.
지하련의 소설은 1940년대에 쓰여 지금의 독자들이 읽기에 다소 어려웠으나, 이번 작품집에서 현대어로 번역한 덕분에 매끄러운 독해가 가능해졌다. 역자 백종륜은 지하련 소설의 ‘다시 읽기’라는 의도에 충실하게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사어와 오랜 표현들을 세심히 살폈다. 작가의 문체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지하련 작품집으로 유일하다.
당대의 저명한 작가 임화의 아내라는 스포트라이트와 그늘을 동시에 견뎌야 했던 지하련의 작품에서 시대적 불화에 대응하는 여성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작품 곳곳에서 결코 감춰지지 않는 퀴어 사이의 미묘한 심리 묘사는 지하련이 진정으로 추구했던 또 다른 글쓰기의 모습이 무엇이었을지 감히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젠더간 연대를 탐색하는 데서 나아가 퀴어의 세계로까지 확장해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지하련의 소설을 바라볼 때 그의 소설은 7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특별해진다.
1940년 12월 지하련이 최정희에게 쓴 서한
<결별>
“학교를 마치던 해에 정희와 도망갈 약속을 어겼던 일, 별로 맘이 내키지도 않는 것을 어머니가 몇번 타이른다고 그냥 시집갈 궁리를 하던 일, 생각하면 아무리 제가 한 일이래도 모두 지랄 같다.”
정희의 혼인 축하연에 초대된 형예가 겪는 마음의 변화를 그린다. 여학교 시절 함께 도망할 것을 약속했던 정희가 입이 마르도록 신랑을 자랑하는 한편, 집으로 돌아온 아내의 이야기에 무시로 일관하는 남편의 모습에 형예는 외로움과 모욕을 느낀다. 비로소 지난날과 결별할 때가 왔음을 느끼며,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해 가는 모습이 소설 전반에 그려진다.
<가을>
“쓸쓸하니 말이죠……. 사랑하기만 하면 백 년 천 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주인공 석재가 아픈 아내를 떠나보낸 뒤, 아내와 각별했던 친구 정예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정예와 얽히는 일이 편하지 않았던 석재는 죽은 아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정예의 눈물 앞에서 ‘단지 벗을 잃은 슬픔만이’ 아님을 느낀다.
<산길>
“연희의 뒷모양이 눈앞에 떠오른다.
역시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다.”
남편이 자신의 친구 연희와 연애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재가 연희로부터 만나자는 편지를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사랑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연희와, 한갓 실수이니 용서하면 될 일이 아니냐는 남편 앞에서 오히려 예쁜 연희의 마음을 더 헤아리게 되는 순재의 내면을 그린다.
<종매>
“이젠 형도 옆에 계시고, 또 열도 차차 좋아지고 하니까, 어떻게든 꼭 낫게 하겠습니다”
석재 역시 조금 전 철재의 웃는 얼굴에서와 같은 이상한 것을 마음으로 느끼며 “그래, 얼른 낫게 합시다” 하고 말을 받으면서, 일변 좀 더 다정한 말이 있을 것도 같아서 잠깐 머뭇거리고 있는 참인데, 별안간 어색하였다. 그래서 별 생각도 없이, 그저 얼결에 옆에 놓인 철재의 손을 잡아보았다.
석희가 사촌 여동생 정원의 부탁으로 몸이 아픈 청년 철재를 간호하게 된다. 사찰에서 함께 기거하게 된 이들 틈에 석희의 절친한 친구 태식이 방문하게 되고, 철재를 의식한 듯 태식과 마냥 편하지만은 않은 석희의 모습에서 묘한 기류가 생긴다.
<양>
‘내가 뭐 하러 이것을 샀을까?
사천육백 평이나 되는 울창한 삼림을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이 그저 좋아서 샀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설사 말이 된대도 이건 결코 그리 떳떳지 못한 이유임에 틀림이 없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도무지 떳떳지가 못한 것일까?’ 그는 못내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성재는 정래와 함께 벽지 산골에서 짐승과 화초를 함께 가꾸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성재가 가족의 성화에 못이겨 선을 보고 집으로 돌아 온 날, 정래의 여동생 정인이 찾아온다. 정인의 혼인 이야기를 나누던 정래와 성재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는 고독이란 괴물이 서로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던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웬일일까? 내가 이렇게 비위가 잘 상하는 것은 그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제법 맹랑한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로서는 또 뭘 그렇게 치우쳐 다잡아 볼 것 없이 그저 남편을 사랑한다고밖엔 도리가 없는 것이, 이러지 않고는 사실 일이 너무 거창해서인지도 모른다.
_27쪽
“정말 인어라는 게 있을까?”
형예는 싫을 만큼 들어온 이야기지만 어째 이상한 생각이 다소곳이 들어서 정희보고 말한 것인데 “그럼 있지 않고요” 하고 신랑이 말을 받았다.
‘내 보기엔 당신네들부터 수상한 것 같수다’ 하는 것처럼 색시들의 얼굴을 보며 웃는 것이다.
_57쪽
‘저 기다랗게 끼록끼록 하는 것은 지렁이일 테고, 끼득끼득 하는 것은 귀뚜라미일 테지만, 저 솨르르 솨르르 하고 쪽쪽쪽 하는 벌레는 대체 어떤 형상을 한 무슨 벌레일까? 왜 저렇게 몹시 울까?’싶다. 갑자기 밀물처럼 고독이 온다. 드디어 형예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
_62쪽
지금껏 그는 이처럼 마구 쏟아지는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턱으로 뺨으로 함부로 쏟아지는 눈물에 비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 싸늘한 태도가 어쩐지 여자의 알지 못할 운명 같기도 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과연 여자의 울음은 단지 벗을 잃은 슬픔만은 아닌 듯했다.
_87쪽
“쓸쓸하니 말이죠……. 사랑하기만 하면 백 년 천 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_92쪽
“날 비난하시려거든 맘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제 내게도 말이 있다면 그분을 사랑했다는 것, 사랑 앞에서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_110쪽
평화해야만 하는 부부 생활이란 이런 데로부터 시작되는 것인가?’하는 알 수 없는 생각에 섬뜩하다. 문득 좌우로 무성한 수목을 헤치고 베 폭처럼 희게 벋어나간 산길을 성큼성큼 서둘러 올라가던 연희의 뒷모양이 눈앞에 떠오른다. 역시 총명하고, 아름다웠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직했다.
_123쪽
문득 요란한 바라 소리가 뚝 그친 법당으로부터, 외길로 찬찬한 염불 소리가 호젓이 들려왔다. 석희는 밤이 이슥해진 것을 깨달으며, 지금쯤 아무 영문 모르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철재를 생각하며 일어섰다.
_166쪽
“당신은 이야기를 얼마나 지녔소?”하고 물어봤더니, 정래는 이 말에 대답은 없이 다만 소리를 내어 조금 웃을 뿐이었다. 성재는 그 웃는 얼굴이 몹시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그곳에 야릇하게 끌리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_214쪽
지하련이 최정희에게 보낸 육필 편지
추천 미니 픽션_ 박서련
결별
가을
산길
종매(從妹): 지루한 날의 이야기
양(羊)
옮긴이의 글 _백종륜
191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자랐다. 도쿄 쇼와고녀와 도쿄 여자경제전문학교에서 수학한 지하련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사회주의 여성해방 단체에서 활동한 혁명적 지식인이었다. 1936년 사회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임화와 결혼한 후 임화의 아내로서 문예지에 산문을 발표하기도 했던 지하련은 1940년 『문장』에 소설 「결별」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인간의 심리를 섬세한 필치로 묘파하는 지하련의 문학 활동은 절친한 동무이자 퀴어한 감정을 나누었던 상대인 작가 최정희의 독려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46년 발표한 「도정」으로 문단의 큰 주목을 받았지만 1947년 임화를 따라 월북한 뒤 지하련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53년 임화가 숙청된 후 1960년 평북 회천의 한 교화소에서 병사했다는 설이 전해질 따름이다. 지하련의 월북 이후인 1948년에 출간된 『도정』은 그의 유일한 작품집으로 남아 있다.
대학에서 미학과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을 전공했다.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퀴어 문학을 역사화하는 작업과 더불어, 교차적 관점에 입각한 채식주의/비거니즘의 윤리-정치적 의의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퀴어 코리아』를 함께 옮겼다.
1) 15,120원 펀딩
<이따금 난 네가 몰라져서 쓸쓸탄다> 도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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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180mm / 양장 / 240쪽 / 2023년 9월 6일 출간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