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속의 부재, 부재 속의 존재
봄
봄은 생기(生氣)의 계절. 생동의 기운을 느끼며 세상에 없는 그림 시집을 엮습니다.
글에 앞서 강기원 시인, 이창분 화가, 두 분께 고마움을 먼저 전합니다. 달아실출판사는 이제 갓 시작한 출판사이고 춘천이라는 변방의 작은 출판사인데, 그럼에도 흔쾌히 저희에게 출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더 좋은 출판사, 더 큰 출판사에서 책을 낼 수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정말 세상에 없는 그림 시집을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결과는 결국 또 독자의 몫이겠지요.
여름
강기원 시인의 시는 모든 것을 품어버리는 여름의 녹음(綠陰)입니다.
시의 길을 함께 걷는 도반으로서, 독자로서 저는 강기원의 시를 무척 오랫동안 봐왔습니다. 그의 시는 이질적인 성질들(영성과 세속, 차안과 피안, 실제와 상상, 삶과 죽음, 에로스와 파토스, 성(聖)스러움과 성(性)스러움, 영혼과 육체, 추함과 아름다움, 미각과 후각, 청각과 시각 등)이 반죽되고 뒤섞여 있고, 그의 언어는 그 경계를 수시로 무너뜨립니다. 무엇보다 그의 시는 무시로, 수시로 무의식을 건드리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타자(내 안팎의)를 마주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런데 실은 그것이 강기원 시의 매력입니다.
가을
이창분 화가의 그림은 마침내 노랗게 붉게 물드는 가을의 단풍입니다.
이창분 화가의 그림은… 실은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사실 그림에 관한 한 저는 무녀리요 무지렁이요 문외한입니다. 그림을 해석하거나 좋고 나쁨을 식별할 만한 눈을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림을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다만, 제가 느낀 어떤 ‘감(感)’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이창분의 그림을 보면서 저는 형상(形象)보다 색(色)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어떤 풍경은 초록색으로 어떤 풍경은 노란색으로 또 어떤 풍경은 붉은색으로…. ‘어디’보다 중요한 것은 색입니다. 정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색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색이 품고 있는 어떤 상징이 아닐까. 그런 느낌이 확, 들어왔습니다. 그런 감을 통해 다시 그림을 보니 문득 강기원 시인의 시와 묘하게 닿은 느낌입니다.
겨울
겨울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하얗게 덮어버립니다. 겨울은 모든 색, 모든 형상, 모든 계절을 덮어버립니다. 존재하지만 부재하고,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계절입니다. 겨울이 신비한 까닭입니다.
강기원의 시는 글로 쓴 그림이고, 이창분의 그림은 물감으로 그린 시입니다. 그 둘이 만나 시가 그림을 덮고, 그림이 시를 덮었습니다. 시가 그림에 섞이고, 그림이 시에 섞입니다. 그 반죽이 마침내 발효가 됩니다.
이제 이 그림 시집을 열면, 포도에서 나왔으나 포도주와 포도는 전혀 다른 것이듯, 그림과 시에서 나왔으나 그림 너머, 시 너머의 색과 향을 지닌 세상에 없던 ‘무엇’이 당신 앞에 펼쳐질 테지요. 그럼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