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며 생애 통틀어 400여 편의 출연작을 남긴 주증녀의 연기생활은 여학교 시절 고협의 연극을 보고 희열을 느끼며 연극광이 된 것에서 시작한다. 18살의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찾아간 극단 고협에서 <무영탑>(유치진)의 시녀 역을 시작으로 <청춘의 윤리> <유령> <맹진사댁 경사>등을 공연하며 차근차근 배우의 인생을 밟아갔다.
조용하고 섬세하면서도 선이 뚜렷한 연극에서의 그의 연기가 눈에 띄어 윤대룡 감독에게 발탁되었다. 그렇게 출연한 작품이 <조국의 어머니>(49, 윤대룡)인데 뒷날 남편이 된 허영(許影)과 공연한 이 영화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남편의 뜻을 이어 광복운동에 투신한 주인 공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같은 해 홍성기 감독의 첫 연출작이자 최초의 천연색 극영화인 <여성일기>(49, 홍성기)와 <심판자>(49, 김성민)에 잇달아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53년 <애정산맥>(이만흥)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여 당시 노경희와 쌍벽을 이루는 주연급 여배우가 되었다. 뒤이어 <애인>(56, 홍성기) <처와 애인>(57, 김성민) 등의 화제작에 출연한 주증녀는 <실낙원의 별>(57, 홍성기)에서 본격적인 영화 연기에의 의지를 느꼈다고 한다. <애인>이 흥행에 성공하고 <실낙원의 별>이 전국적으로 화제를 일으키면서 인기가 더욱 상승하여 대종상 주연여우상 등을 수상하였다. 젊은 애인역으로 사랑받던 그는 <고려장>(63, 김기영)에서는 노파 역으로 일생일대의 연기를 보여주며 ‘오랜만에 연기다운 연기를 해본다’는 자신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조용하면서 차가운 열정을 안고 있는 배우 주증녀는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완벽한 얼굴”의 명성과 “어머니 역, 처녀 역 닥치는 대로 소화시켜내는 연기력”으로 당대의 히로인으로 군림했다. 이 무렵 그에 대해서는 “항상 어두운 모습을 몸에 지니고 있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은 인상을 주는 멋”, “언제나 조용하고 정서적인 역만을 하는 주증녀, 항상 무엇인가를 사색하는 듯한 … ” 등으로 전형적인 한국여인상이 부각되었고 ‘희생의 여인’상이 관객의 동정을 받으면서 많은 팬을 가지게 되었다. 실제로 그의 역할은 가난한 대학교수 부인, 현숙한 외교관의 아내, 선량한 어머니, 간호부, 기생, 가정교사, 바 걸 등 다양했지만 모든 결말은 “여성이 갖고 있는 비극성”으로 이어졌다고 주증녀 스스로 지적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할수록 영화 속의 인상도 변해야 한다. … 비극의 여성상이 영화에서 드물게 나타날 때 우리나라 여성들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또 다른 그의 이미지는 서양의 여배우와 비교한다면 데보라 카와 비슷하다 했는데 “차가우면서도 꼿꼿한 그러면서도 사시사철 푸르른, 비장(秘藏)된 것 또는 밀폐(密閉)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애원하고 절규하는 장면에서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59])광기로 가득찬 공간에서 지쳐가는 모습에서도 (<하녀>[60])슬픔과 절망이 주증녀를 흩어놓는 법은 없었다.
상당한 재력을 소유하여 어느 배우보다도 먼저 자가용을 구입했다는 그는 제작에도 관심을 가져 주증녀 프로덕션을 차려 <그 여자는 행복했던가>(59, 송국)를 만들었으나 흥행에 실패하였다. 게다가 이혼과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현숙한 이미지’가 타격을 받았으며 재정난에 빠진 그를 돕기 위해 영화계에서 ‘주증녀 집사주기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한동안의 슬럼프 후에 김수용 감독의 <산불>(67)과 <만선>(67)의 연기를 통해 대종상등을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만인의 애인이자 어머니”였던 주증녀는 70년대 중반 뇌종양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살 때 “낙화된 벚꽃을 달래듯” 스스로를 달래며 살고 있다고 토로하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스크린의 벚꽃’으로 항상 우리 곁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