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명예교수는 태동기 한국 문화예술계를 밝힌 석영(夕影) 안석주(安碩柱) 선생과 김흥봉(金興奉) 여사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국민 동요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한 이가 아버지 안석주, 작곡한 이가 큰오빠 안병원이다. 김흥봉은 ‘훌륭한 어머니’(1971년 한국소년지도자협회)로 선정됐다.
서울혜화초등학교와 진명여중고교, 이화여대 음대와 동 교육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뉴욕 맨해튼 음대에서 수학했다. 6·25 사변 당시 큰오빠가 국방부 산하 ‘정훈 어린이 음악대’를 조직하자 안희숙은 피아노 반주를 도왔다. 실의에 빠진 피란민과 일진일퇴 생사를 넘나들며 싸우던 군인을 희망의 음악으로 위로하는 일에 일조했다. 어머니가 생전 “10남매 중 희숙이가 제일 고생을 많이 했다”며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 주신 것을 잊지 못한다. 훗날 어린이 음악대원 모두 국내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성장했다.
안희숙은 정전 후 처음 개최된 조선일보 신인음악회를 시작으로 한국일보의 특별후원으로 독주회, 귀국독주회, 서울시향 협연(’피아노 협주곡의 밤’) 등을 거치며 국내 학계와 음악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거듭났다.
29년여 동안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와 연주를 병행했다. 피아노 독주회와 피아노 협주곡 협연 등 8회 개최, 피아노 듀오 연주회 3회 개최, 사제 모임인 ‘희연회’ 연주회 15회 개최, 성악가 아들(최진호)과의 모자음악회도 두 차례 열어 갈채를 받았다.
특히 연세대 음대 학장을 지낸 나운영 선생의 신곡을 서울시향 협연으로 연주한 기억도 있다. 이후 박재열, 이영자, 김동환, 이찬후, 나인용, 김청묵 등 유명 국내 작곡가 수십 명의 신곡 발표를 도맡아 연주했다.
이밖에 초창기 한국피아노학회 부회장, 한국피아노 듀오협회 부회장, 동아일보·한국일보 콩쿠르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피아노학회 이사다. 국민훈장 무궁화상을 수상했다.
나는 1년 전쯤인가 몇 달 동안 병이 나서 두문불출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너무 무료하여 나의 과거를 한 자 한 자 노트에 쓰게 된 것이 자서전 《인생의 건반을 두드리다》로 만들어졌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았을 터인데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다 여러분의 사랑과 배려로…….
개중엔 본인이 아는 분들이 많이 등장해 좋았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고…….
다시 청천벽력, 코로나 전염병으로 또다시 나는 두문불출하게 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이번엔 노트북에 과거 기억나는 일들, 중요한 사건들을 생각나는 대로 두들기게 됐습니다.
나의 이대 재학 시절과 연세대 재직 시의 일들은 자서전에 담겨 있어 생략했습니다.
이 글을 원고지에 썼더라면 얼마나 많은 원고지를 찢어 버렸을까요? 특히 서투른 나에겐, 그러나 노트북은 더하기, 고치기, 빼기를 맘대로 해도 말짱해서 얼마나 좋은지요!
베토벤은 작곡할 때 수정을 많이 하는 편이라 악보가 새까맣게 됐다고 합니다. 나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많이 받는 셈이지요. 자꾸 두들기고 싶어지는데요.
글 속에 평소에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글을 쓰다 보니 생각이 떠올라 쓴 내용들이 더러 있게 되더군요. 잊었던 일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일들도 말입니다.
저는 전문 문인도 아니어서 고상하고 품격 높은 표현에 서툴답니다. 고로 나는 그냥 이야기하듯 썼습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계절 중에 제일 아름다운 가을, 푸른 하늘과 불타는 듯한 단풍의 계절이네요! 왠지 쓸쓸한 계절이기도 합니다. 아마 인생의 노년기에 비유할 수 있을는지…….
또한 지금 코로나의 긴 지옥 터널, 감옥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여러분이 이 글을 읽으실 때쯤엔 어떤 시절과 계절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젊은이에겐 과거 부모 세대를 지나 조부모님들의 생활은 이러저러했었다 말해 주고 싶고, 어른들께는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하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부족한 이 사람의 인생과 함께하여 주시는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제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