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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김정훈

최근작
2019년 12월 <평양과 뉴욕>

김정훈

사단법인 한국행정학회, 한국정책학회 이사
미국 국무성 초청 Fulbright Scholar at Harvard Law School
미국 MIT 국제인권연구소 연구위원(비상근)
청와대 정책위원(비상근)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전문위원(비상근)
현) 서경대학교 공공인적자원학부 교수
중앙환경정책위원

[주요 저서]
시민의 정부혁신론(1997)
변화의 시대, 경제주체의 선택(공저, 1998)
정부조직의 혁신(공저, 1998)
서울시정의 바른길(공저, 2002)
자원순환사회와 NGO(2006)
북한의 정부혁신론(2012)
평양과 프라하(2013)
평양과 강남(2015)
평양과 비엔나(2016)
평양과 베네치아(2018)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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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평양과 뉴욕> - 2019년 12월  더보기

머리말 뉴욕의 맨해튼은 물로 둘러싸인 단단한 돌 섬이다. 그 돌 섬 위에 높게 세워진 고층건물들은 세상을 들고 서 있는 아틀라스를 연상시킨다. 17세기 초, 비어있던 맨해튼 섬에는 몇몇 인디언 가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네덜란드 사람이 이곳에 와서 해안요새를 짓겠다고 하면서 인디언 부족장에게 약간의 돈과 물건을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맨해튼의 남쪽 공원에 가면 당시의 맨해튼을 사고파는 장면을 장식한 기념비를 찾아볼 수 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연도는 1626년이고, 이때부터 맨해튼은 인디언의 추장에서 암스테르담 이민자의 손으로 넘겨졌고, 그곳에는 해안요새(Fort Amsterdam)가 세워졌다. 그런데 요새를 짓고 보니 맨해튼이 지닌 잠재적 조건 즉, 항구로서의 입지가 너무도 좋아서 점차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바뀌게 되었다. 뉴암스테르담 항구(Port of New Amsterdam)로 바뀐 맨해튼은 아메리카-유럽-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이민 온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의 고향, 암스테르담을 생각하며 이곳에 집들을 지었는데 지금도 남쪽 맨해튼에 가면 오래된 뉴암스테르담의 예쁜 박공장식 연립주택 단지가 보전되어 있다.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와 영국은 맨해튼을 사이에 두고 전쟁과 협상을 벌였는데 결국 맨해튼은 영국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뉴암스테르담의 맨해튼에서 ‘뉴욕의 맨해튼’으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맨해튼에 가면 뉴암스테르담의 숨결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네덜란드의 브뢰켈렌은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으로, 암스테르담 근처의 하를럼은 맨해튼의 할렘(Harlem)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철자와 발음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 뿌리를 따지면 맨해튼은 런던보다 암스테르담에서 찾는 것이 더 정확하다. 흔히 뉴욕 사람들을 가리켜 양키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로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Jan)’이 뉴욕에 많이 살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마치 한국 사람들 사이에 김씨가 많은 것처럼 네덜란드 사람에는 ‘얀’이 많았고, 그래서 뉴욕에서는 길을 걷다가 뒤에서 “어이, 얀!”하고 부르면 대부분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뒤돌아섰다는 것이다. 뉴욕 사람들을 가리켜 대명사처럼 ‘양키스’라고 부르게 된 배경이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아닌지 어쨌든, 영국계(프로테스탄트의 보스턴) 레드삭스와 네덜란드계(암스테르담 상인의 뉴욕) 양키스 야구팀이 시합을 벌이면, 그 날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영란(英蘭)전쟁을 연상하게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18세기의 미국인들은 캐나다와 달리 영국 왕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네덜란드공화국과 비슷한 독립된 공화국이 되고 싶어 했다. 암스테르담 요새가 있던 뉴욕의 맨해튼 남쪽, 로어 맨해튼에서 보면 영국과 미국이 다를 수밖에 없는 그 차이점들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뉴욕이 뉴암스테르담의 전통에서 비롯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례도 있는데 예컨대, 미국의 주식시장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영국의 침입에 대비하면서 1653년에 높이 세웠던 요새의 긴 장벽(Wall)이 영국과 벌인 독립전쟁 과정에서 사라졌고, 그래서 장벽이 사라진 곳에 거리(Street)가 생겨나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주식시장이 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1792년, 월스트리트 68번지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모인 증권 중개인과 상인들은 버튼우드(Buttonwood) 협정을 맺고, 이를 계기로 월스트리트는 금융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된다.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은 거의 없었기에 민간에 의해서 자유롭게 작동되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탄생한 것이다. 좁다란 월스트리트에 뉴욕증권거래소까지 세워지면서 뉴욕의 맨해튼은 북미대륙의 금융중심지로 발전했고, 19세기의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20세기 초부터 맨해튼의 월스트리트는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런데 약 백여 년이 지나면서 맨해튼의 월스트리트도 새로운 둥지가 필요하고, 뉴욕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2011년에 몰아친 ‘OWS(Occupy Wall Street)’ 시위는 한계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예견하는 듯했고, 새로운 방향성이 절실히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초, 런던이 뉴욕에 세계금융의 중심지 지위를 스스로 넘겼던 것처럼, 이제 뉴욕도 자신의 지위를 넘길 시점이 멀지 않았음을 인식하고 있음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한반도의 DMZ가 어수선한 북한 핵(核) 문제로 갑작스럽게 주목받는 지역이 되었고, DMZ의 한복판(판문점)에서 한국과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물론이고, 미국의 대통령과 그 대통령의 가족까지 함께 회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2019년의 뜨거운 여름, 뉴욕의 맨해튼 출신 대통령이 한반도의 DMZ에 등장하면서 한반도와 전 세계는 DMZ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태평양 시대에 동아시아의 온대지역이면서 좋은 잠재적 입지조건을 갖춘 서해안의 DMZ가 마치 과거의 맨해튼처럼 여전히 텅 빈 곳으로 21세기에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세계인들에게는 놀라움이었다. 부동산개발업자 출신의 미국 대통령의 언급은 물론이고, 세계적 자본투자가들이 지목했던 것처럼 한반도의 DMZ는 관찰의 대상을 넘어서서 주목의 대상이 분명히 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적 변화 속에서 다음과 같은 직설적인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그 옛날에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암스테르담의 금융가로 변했던 것처럼, 그리고 런던의 자본이 뉴욕의 맨해튼으로 이동했던 것처럼 21세기 중반, 뉴욕의 자본은 태평양을 건너서 한반도의 DMZ로 이동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세 개의 시대 즉, 유라시아 시대, 대서양 시대 그리고 태평양 시대의 헤게모니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고 조사, 접근했다. 그리고 각 시대를 구분하는 편과 편 사이에 현장답사를 통해 수집한 자료를 첨부해 독자들의 다각적인 이해를 돕고자 했다. 연구의 대부분을 정리하면서 나름 분명한 확신도 갖고 책의 부제도 정할 수 있었다. 에서 ‘태평양의 헤게모니’는 세계의 핵심도시인 뉴욕이 태평양을 건너서 한반도의 DMZ 개경으로 이동할 것이며 그 잠재적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실은 역사적 사례들이 증명하듯이 그것은 기회이고 가능성일 뿐, 필연적인 운명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가까운 미래를 목표시점으로, 분단의 상처인 우리의 DMZ가 세계인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번영의 중심지가 되기를 바라며, 세계의 플랫폼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한반도의 모든 시민에게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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