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은 사람이어야! 뭐더러 자꾸 이야기를 꺼내냐. 애비는 이미 죽어 자빠진 지 오래잉께 다시는 지난 이야기 같은 거 묻지 말어라, 알었냐?”
(중략)
왜 아버지는 ‘죽어 자빠진’ 삶을 살아야 했을까. 마음이 맞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일절 사람을 만나려 하거나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 아버지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는 소위 벽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을 걸고 손을 잡으려 해도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한, 일체의 반응이 없는 벽. 나는 매번 그 앞에서 서성이다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하고, 진실도 알지 못하고 걸음을 돌리기 일쑤였다.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아버지는 가끔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기는 하였으나 벽을 허문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애(愛)에서 증(憎)으로, 증(憎)에서 애(愛)로 옮기기를 거듭했다.
그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치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근래부터다. 아버지는 어째서 당신이 지금까지 마음을 잠그고 숨어야만 했는지 지난날에 대해서 조금씩 이야기를 꺼냈다.
(중략)
이 책은 아버지의 그러한 고백을 담았다. 첫 시집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두 번째 시집 『이 차는 어디로 갑니까』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채 드러내지 못한 여백을 여기에서 밝힌다. 소시민의 일상이 어떻게 역사의 흐름에 편입될 수 있는지 귀 기울여 들어 주시길 바란다.
2024년 봄